The God Delusion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브그는 <최종 이론에의 꿈>에서 다음과 같이 짚었다.
일부 사람들은 신에 대해 아주 폭넓고 유연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서든 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신은 궁극자다", "신은 우리의 더 나은 본성이다", "신은 우주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다른 모든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신이라는 단어에도 우리가 원하는 어떤 의미든 갖다 붙일 수 있다. "신은 에너지다"라고 말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석탄 더미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종교를 지나치게 존중한다는, 종교를 정말 중시한다는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전시에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근거는 종교다. 당신이 전쟁의 해악을 상세히 연구하여 우수한 논문을 발표한 뛰어난 도덕 철학자라 해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병역을 면제받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신의 부모 중 단 한 사람이라도 퀘이커교도라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당신이 퀘이커교의 이론을 모른다 해도 순풍에 돛단 듯이 병역을 면제받을 것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 문제가 원칙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그의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한 확률을 갖는다는 결론으로 건너뛰는 오류를 흔히 접하게 된다.
그 오류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은 거증 책임을 이용한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찻주전자 우화가 그 방법을 제대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로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의 정의를 떠올려보자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신이 이기도록 신이 돕는다고 믿는 운동선수가 있다. 아마 그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게는 자신을 편애해 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신이 자신을 위해 주차공간을 비워들 것이라고 믿는 운전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공간을 빼앗기는 셈이다.
외계 지성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를 찾아내고 우리에게 대량의 지식과 지혜를 전달한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숭배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용납될 것이다. 그런 광대한 거리 너머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문명이라면 우리 문명보다 훨씬 더 우월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설명 송신 당시에 그 문명의 발전 수준이 지금의 우리 문명 정도였다고 할지라도, 우리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고려할 때 신호가 우리에게 도달할 무렵에는 이미 우리보다 수백만 년 앞서 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룬 기술적 성과들은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일 것이다. 암흑시대의 농민을 21세기로 데려온다면 우리 문명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가 휴대용 컴퓨터, 휴대 전화, 수소 폭탄, 항공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보라. 아서 클라크가 <제3의 법치>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우리 기술이 빚어낸 기적들은 고대인들에게 모세가 바다를 갈랐다거나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에 못지 않게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외계인들은 우리에게 신처럼 보일 것이다. 선교사들이 총, 망원경, 성냥, 일식을 초단위까지 예측하는 달력을 지닌 채 석기사회에 출현했을 때 신으로 대접받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진보한 외계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이 아닐까? 신과 신 같은 외계 생명체의 핵심적인 차이는 그들의 특성이 아니라, 기원에 있다. 복잡한 지적 존재들은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마주쳤을 때 그들이 아무리 신처럼 보인다 해도,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니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다섯가지 증명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데다 공허하기까지 하다.
처음 세 개의 증명은 같은 것을 그저 달리 말한 것으로 하나로 묶어 생각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무한 회귀를 수반한다.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선행 질문을 제기하고, 그런 식으로 질문은 무한히 계속된다.
1. 부동의 원동자, 그 어느 것도 선행 원동자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회귀로 이어지며, 회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신이다. 무언가가 최초의 움직임을 일으켜야 하며, 우리는 그 무언가를 신이라 부른다.
2. 원인 없는 원인. 그 자체가 원인인 것은 없다. 모든 결과에는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으며, 여기서도 우리는 회귀의 압박을 받는다. 그것은 최초의 원인을 통해 종식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부른다.
3. 우주론적 논증. 그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물체들이 존재하므로 그것들을 출현시킨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부른다.
4. 정도 논증. 우리는 사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말하자면 선이나 완벽성 같은 것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값과 비교해야만 그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은 선하면서도 악할 수 있으므로, 최대 선은 우리 안에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완벽성의 기준이 될 다른 어떤 최대값이 있어야 하며, 우리는 그 최대값을 신이라고 한다.
5. 목적론적 논증 또는 설계 논증. 세계의 사물들. 특히 살아있는 것들은 마치 설계된 듯이 보인다. 우리가 아는 것 중에 설계되지 않았으면서 설계된 듯이 보이는 것은 전혀 없다. 따라서 설계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다.
1~3 관련)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이 전능을 발휘하고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카렌 오언스는 이 기발한 역설을 재치있는 시에 담아냈다.
전지한 신,
미래를 아는 신은 알 수 있을까?
전능함이
미래에 자신의 마음을 바꾸리라는 것을.
4 관련) 이것이 논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런 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냄새가 다르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최대 냄새를 참조해야만 서로의 냄새를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비할 수 없을 만큼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다고. 비교할 특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로 아둔한 결론이 도출된다.
5 관련) 다윈 덕분에 우리가 아는 것중 설계되지 않았으면서 설계된 듯이 보이는 것은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복잡성과 우아함을 경이로운 수준으로 올려놓음으로써 설계되지 않은 것도 설계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 의사설계의 걸작 가운데는 작은 곤충의 몸속에까지 장착된, 단순한 화살보다 정교한 열추적 미사일과 더 흡사한 목표추구 행동을 보이는 신경계가 있다.
나는 일부 사람들은 과학이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다루고 종교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다루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다고 본다는 말을 일부러 했다. 그러자 왓슨은 이렇게 대꾸했다. "저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저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니 당신의 인생은 참 황량하겠소' 하지만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을 기대감에 차 있습니다. 그 말대로 우리는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종교와 IQ라는 주제로 메타분석을 한 연구는 내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다. 2002년 멘사 매거진에 폴 벨이 발표한 것이다. 벨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1927년 이래로 신앙과 지능 또는 교육 수준의 관계를 다룬 연구 논문 43편 중 4편을 제외한 모든 논문이 그들 사이에 역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지능이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적이거나 어떤 신앙을 지닐 가능성이 적다.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신이 존재할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잘못 추정했을 때 닥칠 대가가 훨씬 크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신을 믿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옳다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고, 당신이 틀리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테니깐. 반면에 당신이 신을 믿지 않았을 때, 당신이 틀리다면 영원한 천벌을 받을 것이고 옳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신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그를 믿는 것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믿는다는 것에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신이 친절이나 관용이나 겸손함에 대해 보상하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아니면 성실함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이 죽어서 신 앞에 섰을 때 신이 왜 자신을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여, 증거가 불충분했습니다. 증거요." 신은 비겁하게 내기로 양다리를 걸친 파스칼보다 용기있는 회의주의를 내세운 러셀(그가 1차 세계대전 때 용기 있게 평화주의를 주장했다가 투옥된 것은 제처두더라도)을 훨씬 더 존중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일종의 반파스칼 내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정말 약간 있다고 가정하자. 그럴 경우,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헌시나고 그를 위해 싸우고 죽는 일에 당신의 고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건다면 더 낫고 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프로드 호일의 보잉 747과 고물 야적장
호일은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이 고물 야적장을 휩쓰는 태풍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낼 확률과 별 다를바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비율르 복잡한 생명체의 진화를 언급할 때 활용해왔으며, 그런 언급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각각의 요소들을 무작위로 뒤섞었을 때 완전한 말이나 딱정벌레나 타조가 될 확률은 '747영역'에 있다. 아주 간결하게 줄인 이것이 바로 창조롡자가 선호하는 논증이다.
당신이 설계자를 불러내어 설명하고자 하는 실체가 통계적으로 그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 설계자 자신은 그것보다 더 있을 법하지 않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신은 궁극적인 보잉747이다.
다윈주의를 깊이 이해하면 설계가 우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손쉬운 가정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하며, 서서히 복잡성이 증가해가는 계단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윈 이전에도 흄 같은 철학자들은 생명의 비개연성이 반드시 생명이 누군가에게 의해 설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저 대안을 떠올릴 수 없다는 의미임을 간파했다. 다윈 이후 우리 모두는 설계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비개연성 논증을 전개하고자 하는 창조론자들은 언제나 생물학적 적응이 대박 아니면 쪽박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대박 아니면 쪽박 오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눈은 보든지 못 보든지 둘 중 하나이며, 날개도 날든지 못 날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 중간 단계는 없다. 하지만 그 견해는 틀렸다. 현실세계에서는 중간 단계들이 많이 나타난다.
다윈은 눈이 특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 기관이라고 했다. "거리에 따라 초점을 조정하고,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고, 구면수차와 색수차를 보정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기능을 지닌 눈이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될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솔직히 고백하면 최고로 ㅂ루합리한 듯이 여겨진다"
창조론자들은 신이 나서 이 문장을 인용하고 또 인용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다음 문장들은 인용하지 않는다.
편형 동물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반쪽짜리 눈보다도 못한 눈을 갖고 있다. 앵무조개는 질적인 측면에서 편형동물과 인간의 중간에 해당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빛과 그늘을 감지하지만 상을 볼 수 없는 편형동물의 눈과는 달리, 앵무조개의 눈에는 상이 맺힌다. 하지만 그 상은 우리 눈에 맺히는 상과는 달리 뿌옇고 흐릿하다. 그 차이를 정확히 숫자로 표시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제정신이라면 이 무척추동물들의 눈과 다른 동물들의 눈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다윈주의는 다른 식으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운다. 진화한 기관들은 뛰어나고 효율적이지만 종종 결함도 보인다. 그것은 그 기관들이 진화된 것일 경우 예상되는 일이며, 설계된 것일 경우에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다른 책에서 그런 사례들을 다룬바 있다. 쓸데없이 목적지까지 멀리 우회함으로써 진화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되돌이후두신경이 한 예다. 요통, 탈장, 자궁탈출증, 굴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질병 중 많은 것들은 수억 년에 걸쳐 네 발로 걷도록 다듬어진 몸을 그대로 지닌 채 두 발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물들이다. 자연선태의 냉혹함과 낭비성도 우리 의식을 일깨운다. 포식자들은 먹이를 잡기 위해 아름답게 설계된 듯하며, 먹잇감들은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설계된 듯하다. 신은 도대체 누구 편일까?
우주생물학자들은 하늘을 훑어서 물의 흔적을 찾는다. 우리의 태양과 같은 항성 주위에는 이른바 골디락스 영역(Goldilocks Zone)이 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아서 그 영역에 있는 행성에는 물이 있을 수 있다. 그 얇은 띠 모양의 궤도대보다 더 멀어지면 물이 얼어붙고 더 가까우면 물이 끓는다.
또 생명 친화적인 궤도는 거의 원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잠정적으로 제나 라는 이름이 붙은, 새로 발견된 열 번째 행성의 궤도가 그렇듯이 심한 타원 궤도를 지닌 행성은 기껏해야 수십 년이나 수백 년에 한 번씩 골디락스 영역에 진입할 것이다. 제나는 지구 시간으로 560년마다 한 번씩 태양에 가장 근접하는데 그 때에도 골디락스 영역에는 진입하지 못한다. 핼리혜성의 온도는 근일점에서는 섭씨 약 47도이고 원일점에서는 영하 270도로 편차가 심하다. 행성들의 궤도가 다 그렇듯이 지구의 공전 궤도도 정확히 말하면 타원형이지만 원은 타원의 특수한 사례이고, 지구 궤도는 원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골디락스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태양계에서 지구는 다른 측면에서도 생명이 진화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거대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목성이 치명적인 충돌로 우리를 위협할 만한 소행성들을 가로막고 있다. 비교적 큰 지구의 달은 지구의 자전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을 부양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른 어떤 세계에 머물고 있든 간에 신은 거기에서 별안간 튀어나와 우리 세계로 요란하게 뚫고 들어오며, 인간의 뇌는 그 메세지를 수신한다. 그 현상이 과학과 아무 관계가 없단 말인가? 둘째,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시에 메세지를 수신할 수 있는 신은 절대 단수한 존재일 리가 없다. 그 엄청난 대역폭을 생각해보라! 신은 뉴런으로 이루어진 뇌나 실리콘으로 이루어진 CPU를 갖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있다는 권능들은 정말로 가지고 있다면, 그는 우리가 아는 가장 뛰어난 두뇌나 가장 뛰어난 컴퓨터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계획적으로 구축된 무언가여야 한다.
핵심 논증을 여섯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1.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의 지성에 도전한 가장 큰 과제들 중 하나는 우주의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설계처럼 보이는 것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2. 우리는 설계처럼 보이는 것을 실제 설계로 보고 싶다는 유혹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시계 같은 인공물의 경우, 지적인 공학자가 설계자였다. 같은 논리를 눈이나 날개나 거미나 사람에게 적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3. 그 유혹은 잘못된 것이다. 설계자 가설은 즉시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통계적 비개연성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카이축이 아니라 기중기가 필요하다. 기중기만이 단순한 것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복잡한 것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4.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강력한 기중기는 자연선택을 통한 다윈의 진화다. 다윈과 그의 후계자들은 경이로운 통계적 비개연성과, 설계된 듯한 모습을 한 생물들이 어떻게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화했는지 보여주었다. 현재 우리는 생물에게서 나타나는 설계라는 환각이 그저 환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우리는 아직 물리학에서는 상응하는 기중기를 찾지 못했다. 특정한 다중우주 이론이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 같은 설명 역할을 맡을 수도 있따. 그런 종류의 설명은 다위주의에 비해 덜 만족스럽다. 행운을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본 원리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직관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운을 가정할 수 있게 해준다.
6. 우리는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만큼이나 강력한 기중기가 물리학에서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설령 다윈주의와 맞먹는 아주 흡족한 기중기가 물리학 분야에는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비교적 약한 기중기들도 인본 원리로 뒷받침되면 지적 설계라는 자멸하는 스카이훅 가설보다 더 낫다.
종교의 뿌리
우리는 다윈 진화의 산물임을 알기에 우리는 처음에 종교적인 욕구를 충동질한 자연선택의 압력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다윈주의가 본래 경제성을 따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질문은 긴요한 것이다. 종교는 너무 낭비적이고 사치스럽다. 그리고 다윈의 선택은 습관적으로 낭비를 표적으로 삼아 제거한다. 자연은 푼돈까지 일일이 세고, 칼같이 시간을 따지며, 가장 미미한 사치까지 꾸짖는 인색한 회계사다. 다윈이 설명한 것처럼, 가차 없고 쉴 새 없이 자연선택은 모든 변이, 가장 사소한 변이까지 찾아내기 위해 매일 매시간 세계를 샅샅이 훑는다.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보존하고 추가하며, 언제 어디서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없이 눈에 띄지 않게 유기적 존재의 개선에 힘쓴다. 어떤 야생동물이 습관적으로 어떤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면, 자연선택은 시간과 에너지를 생존과 번식에 투자하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자연은 경박하고 기발한 착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령 늘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 냉혹한 실용주의가 이긴다.
진화론자에게 종교의식은 햇빛이 드는 숲 속의 빈터에 앉아 있는 공작 수컷들처럼 보인다. 종교적 행동은 개미 목욕이나 정자 짓기를 인간의 규모로 확대한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때로는 풍조의 깃털만큼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종교는 독실한 신자의 목숨뿐 아니라 남들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지키기 위해 고초를 겪었고, 서로 거의 구분이 안되는 다른 종파에게 박해를 받은 사례도 많다. 종교는 자원을 탐색하며 때로는 대규모로 빨아들이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종교의 혜택은 과연 무엇일까?
다윈주의가 말하는 혜택은 보통 개체가 지닌 유전자들의 생존에 어떻게든 기여한다는 의미다.
종교는 커다란 현상이며 그것을 설명하려면 큰 이론이 필요하다.
다른 이론들은 다윈주의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종교가 우주와,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관한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나 "종교가 위안을 준다" 같은 주장들이다. 거기에 어떤 심리학적인 진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주장들 자체는 다윈주의적인 설명이 아니다. 스티븐 핑거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위안 이론을 실랄하게 비판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마음이 거짓임을 빤히 알아차릴 수 있는 믿음에서 위안을 찾도록 진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추위에 떠는 사람은 자신이 따뜻하다고 믿어보았자 위안을 얻지 못한다. 사자와 맞닥뜨린 사람은 그것을 토끼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그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냉소적으로 이용되든 자발적으로 발현되든, 신에 대한 욕구를 궁극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일부에서는 이른바 궁극적 설명이라고 내놓는 것들은 집단 선택 이론임이 드러난다.
집단 선택은 다윈 선택이 종이나 집단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종교의 집단 선택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창의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대단히 호전적인 '전쟁의 신'을 섬기는 부족은 평화와 조화를 역설하는 신을 섬기는 경쟁 부족이나 신을 섬기지 않는 다른 부족과 전쟁하면 승리한다. 순교하면 곧장 낙원으로 간다고 굳게 믿는 전사들은 용감하게 싸우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종교를 지닌 부족은 부족 간의 전쟁에서 살아남고, 정복한 부족의 가축을 약탈하고, 그 부족의 여성들을 첩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성공한 부족은 딸 부족들을 많이 퍼뜨리고, 딸 부족들은 떨어져나가 더 많은 부족들을 퍼뜨린다. 그 부족들은 모두 같은 신을 숭배한다.
집단 선택을 경시하는 사람들도 원칙적으로 집단 선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문제는 그것이 진화에 의미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의 여부다. 그것이 더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과 맞붙었을 때, 낮은 수준에서의 선택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한 가상의 부족을 예로 들어, 부족을 위해 죽고 거룩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순교자들이 주류인 군대에 이기적인 전사가 한 명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투에서 몸을 사렸기에 그가 속한 군대가 이길 가능성은 약간 줄어들 것이다. 반면에 그는 순교한 동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큰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동료들보다 번식할 가능성이 더 높고, 순교를 거부한 그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순교하는 경향은 세대가 지날수록 약해질 것이다. 개인의 자기희생을 설명하는 집단 선택이론은 언제나 내부의 배신자에게 취약하다.
심리학자 폴 블룸은 아이들이 본래 이원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원론자는 물질과 마음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마음이 몸에 깃든, 일종의 육신 없는 영혼이므로 몸을 떠나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원론자는 정신병을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며 그 악령이 몸에 일시적으로 들어온, 따라서 '쫓아낼' 수 있는 영혼이라고 쉽게 해석한다. 이원론자는 틈만 나면 생명이 없는 물리적 대상을 의인화하며, 심지어 폭포나 구름에서도 영혼과 악마를 본다.
또 심리학자 데보라 캘러먼이 <아이들은 직관적인 유신론자인가>라는 논문에서 말하듯이, 아이들은 모든 것에 목적을 붙이기를 좋아한다. 구름은 비를 내리기 위한 것이다. 뾰족한 바위는 동물들이 가려울 때 대고 긁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만물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론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타고난 목적론자이며, 자란 후에도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천성적 이원론과 천성적 목적론은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로 향하게끔 우리에게 성향을 부여한다. 우리가 타고난 이원론은 영혼을 몸의 통합된 일부가 아니라 몸에 깃든 별개의 것이라고 믿도록 준비시킨다. 그런 분리된 영혼이 몸이 죽은 뒤 다른 어딘가로 옮겨진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우리는 신이라는 존재를 순수한 영혼이라고 즉, 복잡한 물질의 창발적 특성이 아니라 물질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의 목적론은 종교를 받아들이게끔 우리를 설정해 놓는다. 모든 것이 목적을 지닌다면, 그것은 누구의 목적인가? 물론 신의 목적이다.
인류학자 헬렌 피션는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에서 낭만적인 사랑의 광기와 그것이 엄밀히 말해 필요이상으로 과장되어 있음을 멋지게 표현했다. 그것을 이런 식으로 살펴보자. 한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아는 어느 여자가 그녀의 가장 근접한 경쟁자보다 100배 더 사랑스러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는 사랑에 빠졌을 때에는 그녀를 그렇게 묘사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수용하는 일부일처제보다는 일종의 다자연애(polyamory)가 언뜻 보기에는 더 합리적이다. (다자연애는 한 사람이 하나 이상의 포도주, 작곡가, 책, 운동을 애호할 수 있는 것처럼, 몇몇 이성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 이상의 아이, 부모, 형제자매, 교사, 친구, 애완동물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전적으로 배우자만 사랑할 것이라는 기대는 지극히 기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이성의 종교의 가장 큰 적임을 인식하고, 그 위험을 자주 경고하곤 했다. "이성은 신앙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경멸함으로써 신의 말씀에 맞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성으로부터 시선을 돌려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마음속에서 이성을 파괴해야 한다."
도덕의 뿌리 : 우리는 왜 선한가?
이곳 지구에서 우리는 입장이 좀 묘하다.
우리 각자는 잠시 이곳에 들를 뿐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이곳에 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언뜻 보기에 자연선택이 진화를 추진한다는 다윈주의 개념은 우리가 지닌 선함 즉, 도덕, 예의, 감정이입, 연민 같은 감정들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 듯하다. 자연선택은 배고픔, 두려움, 성적 욕망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생존이나 우리 유전자의 보존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우리가 울고 있는 고아나 외로움에 좌절한 늙은 미망인이나 아파서 낑낑대는 동물을 볼 때 느끼는, 가슴이 아려오는 측은지심은 어떠한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결코 만날 일도 없고 호의에 보답할 가능성도 없는, 세계 반대편에 있는 지진해일 희생자들에게 돈이나 옷을 익명으로 보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선함과 화합이 안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유전자가 생물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생존을 도모하는 상황들도 있따. 그 상황들은 지금은 꽤 많이 이해되고 있으며, 두 가지 주요한 범주로 나뉜다.
자신의 유전적 친족을 선호하도록 각 생물을 프로그램하는 유전자는 통계적으로 자신의 사본들에게 혜택을 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유형의 이타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다(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긁어주마). 그 원리는 인간의 모든 거래와 교역의 토대이기도 하다. 사냥꾼은 창이 필요하고 대장장이는 고기를 원한다. 이런 비대칭은 교환을 촉발한다. 생명의 왕국에는 그런 상리 공생 관계가 많다. 호혜적 이타주의는 필요와 그것을 충족시킬 능력의 비대칭 때문에 나타난다. 그것이 서로 다른 종 사이에서 유독 더 잘 나타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비대칭이 더 크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과 다소 방식은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동물학자 아모츠 자하비는 더 흥미로운 개념을 추가했다. 이타주의적 기능은 지배나 우월을 선전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그것을 포틀래치 효과라고 부른다. 경쟁관계에 있는 태평양 북서부 부족들의 족장들이 흥청망청 잔치를 벌여서 서로 우열을 겨루는 풍습에서 따온 말이다.
극단적일 때는 한쪽이 알거지가 될 때까지 번갈아 잔치를 벌인다. 이긴 쪽도 빈털터리가 되기는 마찬가지다.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 개념은 현대의 많은 연구자들에게 깊이 와 닿는다.
자하비는 작은 사회 집단을 이루어 공동으로 번식하는 작은 새인 아라비아노래꼬리치레(Arabian babbler)를 연구했다. 다른 새들처럼 위험이 닥치면 경고음을 내며 서로 먹이도 나누어 준다. 노래꼬리치레가 동료에게 먹이를 줄때 훗날 먹이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까? 아니면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척일까? 자하비의 해석은 예상밖이다. 서열이 높은 노래꼬리치레들이 서열이 낮은 새들을 먹임으로써 우위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개체들은 관대함을 과시하고 공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등 비용을 들여 우월성을 보여줌으로써 짝을 유혹하는 등 성공을 산다.
현재 우리는 개체들이 서로에게 이타적이고 관대하고 도덕적이 되려는 타당한 다원주의적 이유를 네 가지를 알고 있다.
1. 유전적 친족 관계라는 특수한 경우다
2. 호혜성이 있다. 받은 호의에 보답을 하고, 보답을 예견하면서 호혜를 베푸는 것이다.
3. 관대하고 친절하다는 평판을 얻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다윈주의적 혜택이다.
4. 자하비가 옳다면 과시적 관대함은 혹일 수 없는 진정한 광고의 역할을 한다.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겠는가?
종교인이 내게 그런 식으로 물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싶은 유혹을 순간적으로 느끼곤 한다. "당신이 선하고자 애쓰는 이유가 오로지 신의 인정과 보답을 얻거나 신의 불만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인가요? 그것은 당신의 모든 움직임, 심지어 온갖 속된 생각까지 감시하는 하늘의 거대한 감시 카메라를 돌아보면서 혹은 당신의 머리에 든 아주 작은 도청 장치에 대고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지 도덕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오직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 정신
성경의 상당 부분은 체계적으로 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이할 뿐이다. 수많은 익명의 저자, 편집자, 필사자 등이 9세기에 걸쳐 지리멸렬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한 선집에서 기대할 만한 바로 그런 양상을 보여준다.
아주 사랑받는 노아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부터 시작해보자. 동물들이 쌍쌍이 방주에 탄다는 전설을 재미있지만 노아 이야기에 나오는 도덕은 끔찍하다. 신은 인간을 탐탁찮게 생각했기에(한 가족만 빼고)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익사시켰고 덤으로 (아마도 죄가 없었을) 나머지 동물들도 익사시켰다.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때문이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여기서 내 주된 목적은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도덕을 이끌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내 목적은 우리, 그리고 대다수 종교인들이 사실 성경에서 도덕을 이끌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서 도덕을 이끌어냈다면, 우리는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킬 것이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처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신랑이 신부에게 만족하지 못했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이 처녀임을 증명할 수 없는 신부를 돌로 쳐 죽일 것이다. 우리는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처형할 것이다.
성경은 대량 학살, 외집단의 노예화, 세계 지배에 대한 명령들을 구비한 내집단 도덕의 청사진이다. 그러나 성경이 악한 목적을 지닌 것도, 살인이나 잔혹 행위나 강간을 찬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고대의 많은 작품들이 내집단 도덕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 아이슬란드 전설, 시리아의 옛 이야기, 고대 마야인의 암각화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일리아드>를 도덕의 토대로 판매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성경은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서로 판매되고 구매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대미문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인도가 분리될 당시,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폭동으로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그리고 1500만명이 고향을 떠나야했다). 누구를 살해할지를 정하는 꼬리표는 종교적인 것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을 분열시킨 것은 종교뿐이었다.
나는 인간이 종교가 없다고 할지라도 내집단에 충성하고 외집단에 적대하는 강향 성향을 보이리라는 사실을 붖어하지 않는다. 맞수인 두 축구팀들의 팬들이 그 현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그 피해를 증폭시키고 악화시킨다.
1. 아이들에게 꼬리표 붙이기. 아이들은 아주 일찍부터 구교아이, 신교아이 하는 식으로 묘사되며 그들이 종교에 관한 생각을 정립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렇다.
2. 분리된 학교. 아이들은 아주 이른 나이부터 종교적 내집단의 또래들과 함께 그리고 다른 종교 집단의 아이들과는 격리되어 교육을 받는다.
3. 이교도와의 혼인 금기. 이것은 반목하는 집단들의 혼합을 막음으로써 다툼과 복수가 대물림되도록 한ㄷ다. 집단 간의 혼인을 허용한다면 적대감은 자연히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종교는 매일 시시각각 당신의 모든 일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하늘에 살고있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당신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열 가지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 열 가지 중 어느 것이라도 하면, 그는 당신을 고문하고 고통을 주는 특수한 곳으로 당신을 보내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목이 메도록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신을 사랑한다! (조지 칼린)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의문 없는 신앙이 우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통해 질무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자살 테러범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종교로부터의 도피
모든 마을에는 횃불이 있다. 바로 교사다. 그리고 그 횃불을 끄는 사람이 있다. 성직자가 그렇다. (빅토르 위고)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신이 아마도 없을 것이고 도덕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신을 최후 수단으로 여기고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이른바 신의 심리적 또는 정서적 필요성이다. 사람들은 거칠게 묻는다. 종교를 버리면 그 자리에 무엇을 넣겠냐고 말이다. 신이 유일한 친구인, 죽어가는 확자들, 눈물짓는 유족들, 고독한 이들에게 무엇을 대신 제공할 것인가?
종교가 위로하는 힘이 있따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이 있다는 믿음이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안녕에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무신론자가 냉혹하기 그지없는 우주적 불안에 자살 충동을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종교 신앙이 진리라는 증거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비록 신이 없더라도 신이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있다.
신자들은 믿음을 확신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도록 신앙고백을 하라는 종용을 받는다. 아마 무엇인가를 충분히 자주 되풀이한다면, 그것이 진실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 모두는 종교 신앙이라는 개념 자체를 즐기며 그것을 공격하면 분개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마지못해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위로는 슬픔이나 고민을 줄이는 것이다. 나는 위로를 두 종류로 나누고자 한다.
첫째, 직접적인 신체적 위로가 있다. 헐벗은 산에서 밤새도록 헤매던 사람에게 따뜻하고 커다란 세인트버나드 개와 그 개의 목에 걸린 브랜디 통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훌쩍이는 아이는 강한 팔로 꼭 안고서 귀에 안심시키는 말을 속삭여주면 위로가 될 것이다.
둘째, 전에 인정받지 못한 사실을 발견하거나 기존 사실을 보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얻는 위로가 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은 뱃속에서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따거나 그가 영웅적으로 전사했따는 사실에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또 우리는 어떤 상황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철학자는 노인이 죽는 순간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한때 그였던 아이는 오래전에 죽었따. 갑자기 목숨이 끊어져서가 아니라 성장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말한 인간의 일곱 단계들 하나하나는 다음 간계로 서서히 넘어감에 따라 죽는다. 이런 관점에서 노인이 마침내 숨을 거두는 순간도 그의 평생에 걸쳐 진행된 느린 죽음들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성찰을 통한 위로의 한 사례일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죽음의 공포를 별 것 아니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였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태어나기 전 영겁에 걸친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고 그 사실은 내게 일말의 고통도 준 적이 없다." 관점이 바뀌어도 우리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사실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필연성을 대하는 다른 방식을 접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나는 DNA의 조합에서 나올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결코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로 행운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했따. 여기에 있는 행운을 누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거대한 시간의 잣대를 따라 나아가는 레이저처럼 가느다란 광점을 상상함으로써 삶이 상대적으로 아주 짧다는 것을 묘사했따. 그 광점의 앞쪽이나 뒤쪽에 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진 과거라는 어둠이나 미지의 미래라는 어둠에 잠겨 있다. 우리는 대단히 운 좋게도 그 광점 안에 놓여 있다. 우리가 빛을 쬐는 기간이 얼마나 짧든,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거나, 그것이 흐릿하다거나 시시하다거나 지루하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아예 살아갈 기회조처 제공받지 못한, 태어나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에게 심한 모욕을 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무신론자들이 표현했듯이, 우리의 목숨이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은 훨씬 더 소중해진다. 따라서 무신론적인 관점은 삶을 지지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한편, 삶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자기환멸, 안이한 생각, 은근히 스며드는 자기연민에 결코 오염되지 않는다.
신이 사라지면 틈새가 생길 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메울 것이다. 나는 현실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정직하고 체계적인 노력인 과학을 그렇게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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