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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투명사회 by 한병철

by hoyony 2017. 3. 19.

투명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4.03.11
Transparenzgesellschaft.


투명사회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게 아니라 통제사회다.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불가피하게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정치는 잡담처럼 얄팍해진다. 전명적인 투명성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에 일정한 시간의 굴레를 씌우는데, 그 속에서 천천히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지향적인 비전은 점점 희소해진다. 천천히 무르익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배려는 점점 더 줄어든다.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투명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킨다. 그리하여 모는 것은 정보로 전환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증가가 곧 생산성의 증대와 가속화를 의미한다. 반면 비밀스러운 것, 낯선 것, 다른 것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런 것들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소셜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가까워진다.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은 더 효과적인 감시를 위해 수감자들을 격리하고 서로 대화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이로써 그들은 디지털 파콥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사물은 모든 부정성을 떨쳐버릴 때, 매끈하게 다듬어지고 평탄해질 때, 아무 저항 없이 자본과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흐름에 순응할 때 투명해진다. 행위는 조작이 될 때, 즉 계산하고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과정에 종속될 때 투명해진다. 시간은 이용가능한 현재들의 평탄한 연속이 될 때 투명해진다. 그럴 때는 미래 또한 최적화된 현재로서 긍정성을 띄게 된다. 이미지는 모든 연출과 안무, 미장센이 제거될 때, 모든 해석학적 깊이가, 즉 의미가 사라질 때 포르노가 된다. 포르노는 이미지와 눈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사물은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오직 가격으로만 표현할 때 투명해진다. 돈은 모든 것을 비교가능하게 만들면서, 사물의 통약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완전히 철폐한다. 투명사회는 동일한 것의 지옥이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 속도에 도달한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인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인 특성이 있다. 획일화로 표현되는 새 단어 : 투명성.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즉흥성과 우발성, 자유처럼 삶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들은 투명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무의식이 거침없이 긍정하고 갈망하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니까 인간 정신은 균열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자아가 자신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근원적 균열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 투명해질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도 틈새가 벌어진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해 투명한 인관관계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타자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관계를 살아있게 해준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
긍정사회는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에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깊이, 위대함, 강인함은 바로 부정적인 것에 머무름으로써 나온다. 인간 정신도 산고의 결과이다. "영혼에 강인함을 심어주는 저 불행에 빠진 영혼의 긴장, 불행을 견디고, 버티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창의성과 용기, 그리고 예로부터 비밀, 가면, 정신, 계략, 위대함으로부터 영혼에 주어져온 것ㅡ그것을 영혼은 괴로움 속에서, 엄청난 괴로움의 훈육 속에서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영혼의 긍정화 흐름 속에서 사랑 역시 안락한 감정들, 복잡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흥분들의 평면적인 배합으로 전락한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


전시사회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거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모든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시의 강요는 '멂의 현상'으로서의 아우라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포르노는 에로스뿐만 아니라 섹스마저 파괴한다. 포르노적 전시는 오히려 사람들을 섹스의 쾌락에서 멀어진게 한다. 이에 따라 쾌락을 삶의 일부로 삼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은 여성에 의한 쾌락 퍼포먼스와 남성적 능력의 과시로 해소되어버린다. 전시된 쾌락, 구경거리가 된 쾌락은 쾌락이 아니다. 전시의 강제는 육체 자체의 소외로 이어진다. 육체는 최적화시켜야 할 전시 대상으로서 사물화된다. 이때 육체 속에 편안히 거주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육체를 전시하고 육체를 착취해야 한다. 전시는 곧 착취다.

본래 거주란 만족한 상태, 평온해짐, 평온 속에 머무르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항상적인 전시와 성과의 압박은 거주의 평화를 위협한다.

숨겨져 있는 것, 접근 불가능한 것, 비밀스러운 것과 같은 부정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 다름의 부정성이 전혀 없는 과다 커뮤니케이션의 매끄러운 흐름 역시 외설적이다. 모든 것을 커뮤니케이션과 가시성의 영역에 내던지는 강압적 힘은 외설적이다. 포르노적 구경거리로 내놓은 육체와 영혼은 외설적이다.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오늘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은 전염, 긴장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심미적 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심미화는 비심미적이다. 예컨대 '좋아요'와 같은 취미판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감상할 필요는 없다. 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잡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복합성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늦춘다. 비심미적인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가속화를 위해 복합성을 축소한다. 그것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보다 훨씬 빠르다. 의미는 느리다. 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 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더미는 공허에 대한 공포에서 생겨난다.

명백사회

짐멜에 따르면 "우리는 진리와 오류의 일정한 혼합을 삶의 필수적 기반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기본적인 그림 속에도 명확성과 불명확성의 일정한 혼합을 필요로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경우에도 매력이 유지되려면 그의 일부분은 불명확하고 비가시적이어야 한다."

환상은 쾌락의 경제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전혀 가려지지 않은 대상은 환상을 차단한다. 물러난 대상, 손에서 벗어나버린 대상만이 환상에 불을 붙인다. 실시간의 향락이 아니라 상상 속의 전희와 후의가, 시간적인 유예가 쾌락을 깊게 한다. 상상속의 서사적 우회로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향락은 포르노적이다. 과도하게 선명하고 뚜렷한 미디어 속의 극사실적 이미지들은 환상을 마비시키고 질식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상상력의 바탕은 놀이에 있다. 상상력은 확고하게 한정되지도 않고 분명한 윤곽선도 없는 놀이를 전제로 한다. 상상력은 선명하지 않은 것, 불명확한 것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자신에 대한 투명성은 이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성은 놀지도 않는 것이다. 이성은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일한다. 

전시는 얼굴을 비워내어 표현 이전의 장소로 만든다. 아감벤은 이처럼 비워내는 전시의 실천에서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형식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여자가 남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바다. 그러니까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식이 공허를 창출하고, 얼굴에 생기가 돌게 하는 표정의 작동 과정을 폭력적으로 중단시킨다. 모델과 포르노스타, 그외 다른 전시 전문가들이 꼭 습득해야 하는 것은 뻔뻔한 무관심이다. 내보인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내보이지 않기. 즉 절대적으로 미디어에 융합되기. 이런 식으로 얼굴은 거의 터져버릴 만큼 전시가치로 가득 차게 된다.

가속사회

사르트르에 따르면 몸은 단순한 살의 사실성으로 축소될 때 외설이 된다. 지시하는 것이 없는 몸, 방향이 없는 몸, 행동하지 않고 상황 속에 놓이지 않은 몸은 외설적이다. 과다하고 과잉된 몸의 운동은 외설적이다. 외설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이론은 사회의 몸, 그리고 그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과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거기에서 어떤 서사도, 어떤 방향도,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순간 사회의 몸은 외설적으로 되며, 이때 과다와 과잉은 비대화, 대량화, 마구잡이 증식으로 나타난다. 목적도 형식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사회의 몸은 외설적이다. 목적을 초과하여 가속화되는 과다 활동, 과다 생산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이러한 과다한 가속화는 진정한 활동성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그것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과다한 속도는 그 과도함 때문에 본래의 목표지점을 지나쳐버린다.

"운동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사라진다기보다는 속도와 가속화 속에서 사라진다. 운동은 운동보다 더 활발한 것 속에서 해체된다. 이렇게 표현활 수도 있을 것이다. 운동은 방향을 빼앗음으로써 운동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 속에서 해체된다."

사유는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나아간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측면이다. 이 점에서 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있는 계산과는 구별된다. 계산의 동일성은 가속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조건이다. 경험뿐만 아니라 인식도 부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인식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친밀사회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제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친밀사회는 제의화된 동작과 격식을 갖춘 행동을 불신한다. 그런 것들은 겉치레적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의는 탈개인화, 탈인격화, 탈심리화를 촉진하는 외면화된 표현 형식들로 이루어진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표현적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전시하거나 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의 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의 사회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슴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정보사회

투명사회는 빛이 없이 속이 비친다. 투명성은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원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명성의 매체는 빛이 아니라 빛이 없는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밝히는 대신 모든 것을 꿰둟고 들어가 속이 훤히 비치게 만든다. 방사선은 빛과 반대로 투과하고 관통한다. 또한 형이상학적 빛이 위계질서와 구별을 생성하고 이로써 질서와 방향성을 창출한다면, 방사선은 모든 것을 동질화하고 평준화한다.

통제사회

투명성과 권력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한다. 권력은 즐겨 비밀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기밀 유지의 관행은 권력의 기술 가운데 하나다. 투명성은 권력의 기밀의 영역을 해제한다. 그러나 상호 투명성은 오직 점점 도를 더해가는 영구적인 감시 경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은 감시사회의 논리다.

무리 속에서 _ 디지털의 풍경들

공공성은 무엇보다 존경심을 가지고 사적인 것에 대해 눈을 감는 태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거리두기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는 필수요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리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내밀한 영역이 공적으로 전시되고, 사적인 것이 공개된다.

거리가 소멸한 결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겐 사적 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미지가 되지 않는 영역,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첫 단어는 메닌, 즉 분노다. "노래하는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서양 문화 최초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서 분노는 노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분노는 일리아스의 서사를 지탱하고, 구성하고, 그것에 영혼을 불어넣고, 생명과 리듬을 부여한다. 분노는 영웅적 행동의 공간 그 자체다. 일리아스는 분노의 노래다. 이 분노는 일정한 행동을 촉발하기에 서사적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격분의 물결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화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디지털적 격분은 노래할 수 없다. 디지털 격분은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의 힘도 펼치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전박적인 산만함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사회는 분노의 서사적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한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학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래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격붆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디지털 매체가 만들어내는 참가의 강박은 전반적으로 대표의 원리를 위협한다. 대표는 종종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 필터의 기능을 담당한다. 대표는 선별 작업을 통해 정선된 것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출판사는 수준 높은 도서목록으로 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발전에 기여한다. 이로써 언어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진다. 기자들은 최고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때로 생명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탈매개의 경향은 많은 분야에서 대중화를 초래한다. 언어와 문화는 평이해지고 저속화의 길을 걷는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벨라 안드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책은 빨리빨리 나와요. 내 아이디어에 대해 먼저 에이전시를 설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난 독자가 원하는 책을 바로 쓸수 있습니다. 나는 곧 나의 독자인 셈이죠. "나는 곧 나의 독자"라는 말은 "나는 곧 나의 유권자"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진정한 정치가, 즉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비전으로 유권자를 한발 앞서 가는 정치가의 소멸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시간으로서의 미래는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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