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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우연과 필연 by 자크 모노

by hoyony 2017. 1. 7.

우연과 필연  Le hasard et la necessite


자크 모노
궁리
2010.06.28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누가 보더라도 즉각 알수 있고 아무런 애매함도 없는 듯이 보인다. 바위나 산, 강, 구름은 자연적 물체들이다. 칼, 손수건, 자동차는 인위적인 것, 즉 인공물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지를 분석해보면, 이러한 판단들은 결코 직접적으로 명료하지도 않으며 엄밀하게 객관적이지도 않음을 알게 된다. 칼이란 물체는 어떤 사용 목적을 위해, 즉 그것이 수행할 기능을 미리 염두에 둔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경우, 미리 존재하는 어떤 의도가 물체를 낳게 하는 것이며 이 물체는 그 의도를 물질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물체의 형태는 그것이 수행할 것으로 미리 예상되는 기능에 의해 설명된다. 강이나 바위와 같은 경우에는 다르다. 이들은 물리적인 힘들의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이러한 물리적 힘들은 어떤 의도를 갖고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자연은 객관적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공리에 수긍한다면, 우리는 실로 앞의 말대로 생각하는 셈이다.

이런 기준이 아닌 정말로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에 의해서 자연적인 물체들 ㅡ의도를 갖지 않은 물리적인 힘들의 활동에 의해 생기는 자연적 물체들 ㅡ과 대비되도록, 인위적인 물체들 ㅡ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의 산물들 ㅡ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이를 위해서는 규칙성과 반복성의 기준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힘들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자연적 사물들은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구조 ㅡ예컨대 평평한 표면이라든가, 직선으로 곧게 뻗은 윤곽, 각진 형태, 정확한 대칭성 따위 ㅡ를 띠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다. 반면 인공물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이같은 사실에서 규칙성이란 기준이 나왔다.
아마도 반복성이 가장 결정적인 기준일 것이다. 인공물이라면 어떤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며 어떤 사용 목표가 있을 것이므로 제작자의 항상적인 의도를 반영하는 많은 수의 유사한 인공물들이 만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제법 잘 규정된 형태를 띤 유사한 물체들이 다수 발견된다면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야생 꿀벌의 벌집을 조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대상이 인위적인 기원을 가진 것임을 알려주는 모든 기준들을 확실하게 발견할 것이다. 벌집을 구성하는 방들과 줄들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기하학적 구조는 인간의 집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러한 판단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벌집은 벌들의 행위의 산물로서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인위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벌들의 행위는 순전히 자동적으로 이워지는 것이지 의식적인 의도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도 충분히 많다. 게다가 꿀벌들을 하나하나 조사해가다보면, 대단히 복잡한 꿀벌의 구조가 매 개체마다 기막힌 정확성으로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꿀벌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는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서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물임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처럼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일견 직관적인 것으로 자명한 듯 보이지만 실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실제로 (거시적인) 구조상의 기준만을 가지고서 인공물을 가려낼 수 있는 완전한 정의 ㅡ인간이 제작해낸 산물들을 비롯한 모든 진짜 인공물들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결정 구조물이라든가 살아있는 생명체들과 같은 명백하게 자연적인 것들을 배제할 수 있는 정의 ㅡ에 도달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다. 

인공물의 본질적인 내용은, 인공물이란 무엇보다도 그것이 수행할 기능에 의해서, 그것의 발명자가 기대하는 성능에 의해서 정의되고 설명될 수 있다.

모든 인공물은 어떤 생명체의 행위의 산물이다. 생명체는, 이러한 인공물을 만들어냄으로써, 모든 생명체들을 예외 없이 특징짓는 기본적인 속성 중의 하나를 아주 명백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속성이란 생명체는 어떤 의도가 깃든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들의 구조는 어떤 의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들의 활동(예컨대, 인공물의 창조와 같은 활동) 또한 이 의도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는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로부터, 우리가 이제부터 '합목적성'이라고 부를 이 속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인공물을 태어나게 한 의도란 그 인공물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낸 동물에게 속한다고 지적해보아도 충분하지 않다. 영상의 포착이라는 의도 ㅡ 카메라가 나타내는 이 의도 ㅡ가 카메라 자체가 아닌 다른 물체에 속한다고 결정할 수 있을까 어떤 물체의 구조와 그 구조가 실행하는 기능만을 조사해봐서는,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어도 그 의도의 입안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입안자를 찾아내려면, 물체의 현 상태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기원 및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구성방식을 조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인공물의 경우, 일단 완성된 거시적 구조는 그것의 질료를 구성하는 원자들이나 분자들 사이의 내적 응집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낸 외적 힘을 나타낸다.
반면, 생명체의 구조는 외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전체 형태에서부터 가장 작은 세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자신 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형태발생적 상호작용에 의해 생긴다. 생명체의 구조는 그러므로 정확하고 엄밀한 자율 결정성을 보이며, 외적 조건들이나 힘들에 대해 거의 완전히 자유롭다. 외적 조건들이나 힘들은 이 내적 형태발생을 방해할 수는 있지만 그 발생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며 생명체에 유기적 조직성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생명체란 자기 자신의구조를 발생시키는 정보를 불변적으로 복제해내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극도로 복잡한 생명체의 구조를 발생시키는 것이므로 이 정보는 대단히 엄청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 모든 것이 전혀 아무런 손상 없이 완전히 보존된다. 우리는 이러한 속성을 '불변적인 복제' 혹은 간단히 '불변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합목적적인 의도의 본질은 종을 특징짓는 불변성의 내용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본질적인 의도의 성공에 기여하는 모든 구조와 성능, 모든 활동은 '합목적적'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떤 종의 합목적성의 수준에 대한 원칙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실로 모든 합목적적인 구조와 성능은 어떤 정보량, 곹 이 구조와 성능이 실현되기 위해 전달되어야 하는 정보량에 대응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적인 환상

오류들의 원천에는 확실히 인간중심적인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태양중심설도, 관성의 원리도, 객관성의 원리도 이 옛날의 신기루를 쫓아내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 진화론도 처음에는 이 환상을 사라지게 만들기는 커녕, 그것에 새로운 실체를 부여해주는 듯했다. 진화론은 인간이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은 아니더라도 모든 시간 동안 언제나 기다려온 우주 전체의 황태자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신은 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자리를 이 새롭고 위대한 존재가 대신 차지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몇몇 소수의 원리들로부터 실재 전체를 설명해내는 어떤 통합적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의기양양한 확신이 19세기의 과학주의적 진보론을 성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이런 통합적 이론을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엥겔스가 열역학 2법칙을 공식적으로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원리가 인간과 인간의 사유가 우주적 상향운동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확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그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생명권 : 제1원리들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독특한 사건

생명권은 미리 예측 가능한 대상이나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떤 특수한 사건을 다룬다. 이 사건은 물론 제1원리들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이 원리들로부터 연역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예측불가능하다.
내가 보기에 생명권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내손에 쥔 이 자갈돌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특수한 배열 상태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저 보편적인 이론에 의할 때, 지금 이 자갈돌은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연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할 수도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유(의무)는 없고 단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권리)만을 갖고 있다는 이 사실이 돌맹이의 경우라면 충분하겠지만, 우리 자신의 경우라면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를,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우리의 존재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기를 원한다. 모든 종교와 거의 대부분의 철학, 심지어 과학의 일부까지도 자기 자신의 우연성을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영웅적 노력의 증거다.

생명체의 구조적, 기능적 합목적성을 가능하게 하는 분자적 요인으로서의 단백질

합목적성이란 개념은 어떤 정해진 방햐을 향하여 정합적이고 건설적으로 이뤄지는 행위라는 관념을 포함한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단백질이야말로 생명체의 합목적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분자적 요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 생명체란 화학적 기계다. 모든 유기체들의 성장과 증식을 위해서는 수천 가지의 화학적 반응이 이뤄저야 한다. 이 많은 화학적 반응 덕분에 세포들의 주요 성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른바 '대사'라고 한다. 대사는 아주 많은 수의 경로들에 의해서 조직되는데, 이 경로들은 서로 갈라지거나 합쳐지고 순환하기도 하면서 각자 일련의 반응들을 포함한다. 이 거대한 미시적, 화학적 활동이 정확하게 정해진 방향을 따라 일어날 수 있고 높은 성과를 거들 수 있는 것은, 특이한 촉매 역하을 하는 모종의 단백질, 효소 덕분이다.

2. 하나의 기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유기체는 그 가장 단순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하나의 정합적이고 전체적으로 통합된 기능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복잡하고 게다가 자율적이기까지 한 화학적 기계의 기능적 정합성을 위해서는 수많은 지점에서 이뤄지는 화학적 활동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어떤 사이버네틱 시스템이 있음에 틀림없다. 이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전체 구조를, 특히 고등한 유기체의 그것을 완전히 해명하는 일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경우에 이 시스템의 본질적인 요인들은 이른바 '조절' 단백질이라고 불리는 단백질이며, 이 단백질들은 요컨대 화학적 신호를 탐지하는 역할을 한다.

3. 유기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계다. 그의 거시적인 구조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그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유기체는 그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건설적인 상호작용들에 의해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내적 발생의 메카니즘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직 불충분하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상태지만, 건설적인 상호작용들이 미시적인 것들이며 분자적인 것들이라는 점은, 그리고 여기에 관여하는 분자들은 전적으로 단백질이라는 점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따라서 단백질이야말로 유기체라는 화학적 기계의 활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이 기계의 기능이 정합적으로 이뤄지도록 해주며 또한 이 기계를 만들어내는 주역이다. 이와 같은 합목적적인 성능은 결국 단백질의 소위 '입체특이성'에서 기인한다. 즉 다른 분자들을 그들의 형태에 ㅡ이 형태는 그들의 분자구조에 의해서 결정된다ㅡ따라 알아볼 수 있는 단백질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문자그대로 무엇인가를 식별해낼 수 있는 속성을 갖는다. 생명체의 모든 합목적적인 작용과 구조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원칙적으로 하나의 단백질, 혹은 몇 개의 단백질, 아니면 아주 많은 수의 단백질의 이러한 입체특이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분석될 수 있다.

모든 단백질은그 수가 100개에서 10,000개에 이르는 아미노산 잔기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많은 잔기는 불과 스무 가지의 화학종에 속하는 것으로, 이 스무 가지 화학종은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된다. 생명체의 구성이 이처럼 단조롭다는 사실은, 생명체들의 거시적인 구조의 놀라운 다양성은 실은 미시적인 구조의 역시 놀랄만한 단일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예증하는 것이다.

공유결합과 비공유결합

공유결합은 두 개 이상의 원자가 전자쌍을 공유함으로써 생기는 결합이다.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유형의 상호작용으로 생기는 것이 비공유결합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유형의 반응에 관여하는 소위 '활성화에너지'상의 차이에 있다. 어떤 안정한 상태의 분자군을 다른 안정된 상태로 옮기는 반응은, 처음의 상태나 마지막 상태의 포텐셜 에너지보다 더 높은 포텐셜 에너지를 갖는 어떤 중간 상태를 거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처음 상태와 중간 상태 사이의 차이가 활성화 에너지다. 분자들은 이 활성화에너지를 일시적으로 얻어야지만 반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활성화에너지는 첫 번째 단계에서 얻어진 이후 두번째 단계에서 방출되기 때문에, 최종적인 열역학적 결산수치상에서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반응이 이뤄지는 속도는 이 활성화에너지에 의해 좌우된다.
높은 활성화 에너지가 필요한 경우, 상온에서라면 반응이 이뤄지는 속도가 거의 제로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반응을 일으키려면, 온도를 상당히 올리거나(그렇게 되면 분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얻게 되어서 분열할 것이다) 혹은 촉매를 사용하여야 한다. 촉매의 역할은 활성화 상태를 안정화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활성화상태와 처음의 상태 사이의 포텐셜 차이가 줄어들게 된다.

a) 공유결합이 관련되는 반응의 활성화에너지는 높다. 따라서 반응이 낮은 온도에서 이뤄지거나 촉매가 없는 가운데 이뤄지면, 그 반응속도가 매우 느리거나 제로가 된다.

b) 비공유결합이 관련되는 반응의 활성화에너지는 제로가 아니라면 매우 낮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응은 낮은 온도에서나 촉매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비공유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이뤄진 구조가 어떤 안정성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수의 비공유적 상호작용을 수반해야 한다. 게다가 비공유적인 상호작용이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원자들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울 때, 즉 이들이 거의 서로 붙어있을 때다. 따라서 두 개의 분자 사이에 비공유적 결합이 맺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두 분자의 표면이 각자 상대방에 대해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어서 한쪽 분자 속에 있는 여러 개의 원자들이 다른 쪽 분자의 여러 개의 원자들에 들러붙을 수 있을 때다.

유기체의 여러 다양한 성능들을 대규모적인 차원에서 상호 조정해주는 어떤 시스템이 동물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상호 조정의 역할을 하는 것이 신경계와 내분비계의 기능이다. 이런 시스템은 기관들이나 조직들 사이의 상호 조정을, 결국 세포들 사이의 상호 조정을 가능케 해준다. 그런데 거의 의런 시스템들만큼이나 복잡한 사이버네틱 망이 각각의 세포 내부에도 존재하며, 그리하여 그 덕분에 개별 세포 내부의 화학적 기계장치의 기능적 정합성이 확보된다는 사실은 지난 20년간의, 어떤 것은 불과 5년 내지 10년 간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조절 단백질과 조절의 논리

조절 단백질 중에서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알로스테릭 효소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이 효소들은 고적적 효소들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속성들을 갖는 특별한 종류다. 고전적 효소들과 마찬가지로, 이 효소들도 자신에게만 적합한 특이성을 가진 기질을 알아보고 그것과 결합하여 그것을 다른 물질로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이것뿐만 아니라, 이 효소들은 기질 이외의 다른 화합물들 ㅡ 하나 내지는 여러개 ㅡ도 선별적으로 식별하여 그것들과 결합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 결합의 결과, 기질에 대한 효소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거나 혹은 저해되는 변화가 생긴다.

무근거성이라는 개념

무근거성이라는 근본적인 개념, 즉 어떤 화학적 신호가 수행하는 기능과 이 기능을 통제하는 화학적 신호의 본성 사이에는 화학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이 개념은 알로스테릭 효소에 적용된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의 동일한 단백질 분자가 특이적인 촉매기능과 동시에 조절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이러한 알로스테릭 상호작용은 간접적인 것이다. 즉, 이 상호작요은 전적으로 단백질이 그것이 취할 수 있는 두 개의(혹은 여러개의) 서로 다른 상태들 각각에서 서로 다른 입체특이적 식별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의해 이뤄진다.

알로스테렉 효소의 기질과 이 효소의 활성을 촉진시키거나 억제하는 리간드 사이에는 아무런 화학적으로 필연적인 구조상의 관계나 반응상의 관계가 없다. 이러한 특이성은 서로 다른 상태들을 취할 수 있는 단백질의 구조에 전적으로 의거하며, 이러한 단백질 구조는 또한 유전자의 구조에 의해 자유롭게 또한 자의적으로 지정된다.
알로스테릭 상호작용의 작동원리는 그러므로 제어 시스템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허락해준다. 제어 시스템은 일체의 화학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됨으로써, 더더욱 오직 생리학적 요구만을 따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이러한 제어 시스템은 세포나 유기체에 더 많은 정합성과 효율성을 부여해 줌으로써, 그 덕분에 살아남도록 자연에 의해 선택받을 것이다. 결국 제어 시스템의 무근거성이야말로 분자적 진화에 실질적으로 무한한 모색의 장을 열어준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유기체의 행위들을 미시적이고 분자적인 차원에서 분석해 보면, 모든 것은 특이적인 화학적 상호작용들에 의해 ㅡ이 상호작용들은 조절 단백질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택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또한 자연선택에 의해 확실하게 된 것이다ㅡ완전히 해석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자개체 발생

생명체는 그 거시적인 구조나 기능에 있어서는 기계와 아주 닮아 있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생명체와 기계는 각자 만들어지는 방식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기계의, 즉 어떤 인공물의 거시적인 구조는 외부의 힘의 작용에 의해서, 즉 재료에다 형상을 덮어씌우는 외적 도구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대리석으로부터 아프로디테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조각가의 끌이지만, 이 여신 자신은 바다 파도의 포말로부터 태어났다. 이 포말로부터 여신의 몸은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 개화한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이러한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형태발생의 과정을 끝까지 분석해보면 결국 이 과정은 단백질들의 입체특이적 식별력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은 거시적인 구조에서 드러나기 이전에 그보다 먼저 미시적인 차원에서부터 일어난다.

좌우지간 여기서 검토해본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기능적 속성들을 가능케 하는 복잡한 구조가, 이 구조를 구성하는 단백질 요소들의 입체특이적이고 자발적인 결합이라는 과정에 의해서 구축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오직 자신의 파트너를 식별해내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활성이나 내재적인 기능적 속성도 일체 가지고 있지 않던 분자들의 무질서한 혼합으로부터 질서가 출현하며 구조적 분화가 일어나며 기능이 생기는 일이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전체의 구축을 위한 정보의 원천이 되는 것은 서로 결합하여 전체를 이루는 개별적 분자들 각각의 구조 자체다.
그러므로 이런 복잡한 구조가 후성적으로 발생하는 과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즉 다분자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물의 전체적인 조직은, 이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 구성요소들 각각의 구조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들 개별 구성요소들이 서로 결합해야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고 현실화되는 것이다.

완성된 구조 자체는 그 모습 그대로는 그 어디에도 미리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구조의 설계도는 그 구조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들 자체에 이미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가 그처럼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즉 어떠한 외부의 개입이나 새로운 정보의 주입도 없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전체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 구성요소들 속에 이미 주어져 있었지만, 다만 겉으로 표현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구조가 후성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드러남이다.

합목적적 구조의 궁극적인 근거

어떤 하나의 구상 단백질의 배열순서가 처음으로 완전하게 기술된 것은 1952년 상제에 의해서였다. 이 일은 비밀의 열림이면서 동시에 환멸이기도 했다. 이 단백질은 인슐린이었는데, 이 단백질의 구조를 관장하는, 따라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도록 이 단백질의 선별적 속성을 관장하는 그의 배열순서 속에는 어떤 규칙성도, 어떤 독특한 특징도,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이러한 자료들이 점점 축적되어가면 언젠가는 몇몇 일반적인 결합의 법칙이라든가 기능적 상관관계가 드러날 것이라고 한동안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유기체들로부터 뽑아낸 각양각색의 단백질들의 배열순서를 수백 종류 알고 있다. 분석과 통계의 현대적 기법을 이용하여 이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해본 결과,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우연의 법칙이었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우연적'이다. 즉 200개의 아미노산 잔기를 가지고 있는 단백질에서 그중 199개의 순서를 정확하게 알고 있더라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한개의 잔기가 어떤 것인지를 예측하게 해줄 어떤 이론적이거나 경험적인 규칙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설령 단백질의 1차 구조 일체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즉 폴리펩티드상의 매 연결고리가 가능한 20종의 아미노산 잔기 가운데 하나를 우연히 선택하여 이뤄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중요한 또 다른 의미에서는 지금 현재에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배열순서는 우연에 의해서 합성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배열순서가 특정한 단백질 분자들 속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아무런 실수 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복이 없다면, 일군의 단백질 분자 중 아미노산 배열순서를 화학적 분석을 통해 정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에 의해 정해진 아니모산들의 배열순서는 각각의 유기체에서 혹은 각각의 세포에서, 아주 오랫동안 매 세대를 거쳐 실제로 수천 번씩 혹은 수백만 번씩, 구조의 불변성을 아주 정확하게 보장해주는 매커니즘에 의해 반복되어 온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메세지의 해석 

이 메세지는 어떤 기준에서 보게 되더라도 우연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메세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의미는 선형 배열을 3차원적으로 번역한 것인 구상 단백질의 변별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드러난다. 이 상호작용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아주 직접적으로 합목적적이다. 어떤 하나의 구상 단백질은 이미 분자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진짜배기 기계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듯, 이 기계는 그 기능적 속성들에 의해서 기계가 되는 것이지 그 근본적인 구조에 의해서 기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근본적인 구조에서는 오직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아미노산 잔기들이 서로 짝지어지는 놀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불변성의 기구에 의해 포획되고 보존되고 반복되어 질서로, 규칙으로, 필연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맹목적인 우연의 놀이로부터 모든 것이 ㅡ심지어 시각 까지도 ㅡ다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능을 가진 단백질 하나의 개체발생 속에는 모든 생명체 전체의 기원과 혈통이 다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생명체가 나타내고 추구하고 실현시키는 의도의 궁극적인 원천은 단백질의 1차 구조가 전하는 이 메세지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해독 불가능한 이 메세지 속에서 말이다. 왜 해독 불가능한가? 왜냐하면 이 메세지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수행하게 될, 생리적으로 필수적인 기능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구조가 순전히 우연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실이야말로 태고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 메세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심원한 의미인 것이다.

불변성과 요란

서양 사상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년 전에 이오니아 제도에서 태어난 이래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개의 입자응로 양분되어 왔다. 이 중 한쪽에 따르면, 우주는 진정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전혀 변하는 일이 없는, 본질적으로 불변적인 형상들 속에 있다. 반대로 다른 한쪽에 따르면, 우주의 유일한 실재는 운동과 진화 속에 존재한다.
플라톤에서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지식의 이론은 실은 언제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정치적 입장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마치 선험적인 양 제시되고 있는 이들 이데올로기적 주장은 실은 미리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어떤 윤리, 정치적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차후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과학을 위한 유일한 선험적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객관성의 공리이다. 이 공리로 인해 과학은 저 오래된 두 입장 사이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아도 되었다. 혹은 오히려 이 논쟁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과학은 진화를 연구한다. 그것이 우주 전체의 진화이든 혹은 우주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체계들 ㅡ이를테면 인간을 포함한 생명권 ㅡ의 진화이든 상관없이, 과학은 진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체계의 구성요소들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구조 속에는 불변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결코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상들을 분석하는 데 과학이 구사하는 기본적인 전략은 불변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모든 수학적 전개와 마찬가지로, 어떤 불변적인 관계를 규정한다.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명제들은 불변적으로 보존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상정하는 보편적인 공리들이다. 어떤 현상이든, 그 현상에 의해 보존되는 불변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 그 현상을 분석할 수 있을 뿐이지, 그 밖의 다른 방식에 의해서 그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떤 실례를 선택하든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실례는 동역학의 법칙들이 제정되는 방식일 것이다. 동역학적 법칙의 제정을 위해서는 미분 방정식의 도입이, 즉 변화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에 의해서 변화를 정의하는 방법의 도입이 반드시 요구된다. 

화학적 불변성

오늘날 우리는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화학적 기계장치는 그 구조나 기능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1. 구조의 동일성 : 모든 생명체는 예외 없이 동일한 두 종류의 고분자로 구성된다. 단백질과 핵산이다. 더윽이 이들 고분자들은, 모든 생명체들에 있어서, 얼마 되지 않는 제한된 수의 동일한 잔기들이 서로 뭉침으로써 형성된다. 단백질은 스무 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고, 핵산은 네 종류의 뉴클레오티드로 구성

2. 기능의 동일성 : 화학적 포텐셜열의 동원이나 저장, 또는 세포 구성성분의 생합성 등의 기본적인 화학적 조작들은 모든 유기체들에게서 모두 동일한 반응들에 대해, 혹은 동일한 반응들의 연쇄에 의해 수행된다.

만약 모든 생명체들의 구성요소가 화학적으로 모두 동일하고 또한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경로에 의해 합성된다면 형태학적, 생리학적 다양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게다가 어떻게 해서 각각의 종은 자기 이외의 다른 종들과 동일한 재료, 동일한 화학적 반응을 사용하면서도, 그 자신의 특유한 구조적 규범 ㅡ 그 자신을 다른 종들로부터 구별되도록 특징짓는 이 구조적 규범 ㅡ을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함 없이 불변적으로 유지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구성요소인 뉴클레오티드와 아미노산은 논리적으로 일종의 알파벳과 같다. 이들 속에 생명체의 구조, 즉 그 특이적인 결합기능이 적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권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구조와 기능은 전부 이들 알파벳으로 적혀 있다. DNA속 뉴클레오티드들의 연쇄로 적혀 있는 텍스트가 각 세포 세대마다 불변적으로 복제됨으로써 종의 불변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진화 : 절대적 창조이지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물활론자에게 진화는 결코 진정한 창조가 아니다. 단지 아직까지 표현되지 않고 있던 자연의 의도가 그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배의 발생과 진화적 창발을 같은 논리에 의해 이뤄지는 것으로 보려는 성향은 이로부터 기인한다. 현대 이론에 따르면, 개시는 배의 후성적 발생에만 적용되는 논리이지 진화적 창발에 적용되는 논리는 아니다. 진화적 창발은 본질적인 예측 불가능성에 그 원동력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다. 베로그송의 형이상학이 지나간 길과 현대 과학이 나아간 길이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서로 수렴한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우연한 일치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생명의 원리가 곧 진화임을 말해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를 보는 바로 그곳에서 현대 생물학은 그와 반대로 생명체가 가진 모든 속성들이 분자적 보존이라는 근본적인 메카니즘에 근거하고 있음을 본다. 현대 생물학에서 볼때, 진화는 결코 생명체의 속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존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생명체만이 특권적으로 유일하게 가진 독특한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진화란 이러한 보존 메커니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름과 같이 말해야 하리라. 살아 있지 않은 시스템, 바로 자기를 복제하지 않는 시스템에게는 그 구조를 점차 허물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요란, 즉 소음이 생명체에게는 진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우연과 필연

하지만 일단 한번 DNA 구조에 새겨지고 난 다음에는, 이 (특이하고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우연적인 사건들은 기계적으로 충실하게 복제되고 번역될 것이다. 즉 증식되고 전파되어 수백만 수천만의 동일한 복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순전한 우연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필연의 세계로, 가차없는 확실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것은 거시적인 차원, 즉 유기체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은 실로 우연의 산물들에 대해서 작용하지, 다른 데서는 자신의 먹이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영역은 엄격한 요구가 지배하는 영역이며 모든 우연이 배제된 영역이다. 진화가 일반적으로 상향적인 방향성을 띠며 이뤄지는 것이나 점차적으로 더 화려하게 만개해가는 듯한 이미지를 주며 이뤄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엄격한 요구에 의한 것이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다윈 이후의 일부 진화론자들은 자연선택에 대해 논의하면서 내용이 매우 빈약하고 소박하며 잔인한 관념들 세상에 퍼뜨리는 경향이 있어왔다. 단순한 생존경쟁이라는 관념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사실 다윈 자신이 사용한 표현도 아닌 스펜서가 사용한 표현일 뿐이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돌연변이들이란 적어도 이 합목적적인 장치가 가지고 있는 정합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 장치가 이미 지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그 정합성을 더 강화시켜주는 것들이나, 혹은 이보다 훨씬 더 드문 경우지만, 이 장치를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이다.
돌연변이가 처음 나타날 때 이 합목적적인 장치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느냐가, 우연으로부터 태어난 이 새로운 시도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일지 혹은 연속적으로 받아들일지, 그것도 아니면 거부할지를 결정하는 최초의 본질적인 조건이 된다. 자연선택에 의해 심판받는 것은 합목적적인 기능 상태, 즉 건설적이고 제어적인 상호작용들의 네트워크가 갖는 속성들의 전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기 때문에 진화 자체가 어떤 의도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말해 조상대대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꿈을 계속 이어가고 확장해가려는 의도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원천의 풍요로움

생명체의 복제 장치가 지닌 보수성은 거의 완벽한 것으로서, 하나의 돌연변이는 개별적으로 볼 때는 극히 드문 사건이다. 우리가 이 주제를 다루려 할때 충분하고 정확한 자료를 갖고 있는 유일한 유기체는 박테리아인데, 이 박테리아의 어떤 한 유전자가 그에 대응하는 단백질의 기능적 속성에 눈에 띌 만한 변화를 가져올 돌연변이를 겪게 될 확률은 각 세포마다 100만분의 1내지 1억분의 1정도의 차원이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몇 cc의 물속에서 수십억 개로 증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단에서 생기게 될 특정한 종류의 돌연변이체의 수는 10, 100 혹은 1000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집단에서 생기게 될 모든 종류의 돌연변이체의 총수는 10만에서 100만 정도로 수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체군의 차원에서 보면 돌연변이란 결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고등 유기체들의 개체군은 박테리아의 개체군만큼이나 많은 수의 개체들로 이뤄져 있지 않다. 하지만,

1. 어떤 한 고등 유기체의 게놈은, 예컨대 포유류의 게놈은, 박테리아의 게놈보다 천 배나 많은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다.
2. 난자에서 난자로 또는 정자에서 정자로 이어지는 생식 세포의 가계에서 세포 세대 수는 대단히 크며, 따라서 돌연변이가 일어날 공산도 대단히 크다.

인간에게서 몇몇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이상의 이유 때문이다. 요컨대 현재 30억에 이르는 인류의 인구수 상황에서는 매 세대마다 1천억 내지 1조에 달하는 돌연변이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추산할 수 있다.

종의 안정성이라는 역설

어떤 종들은 수억 년 이래로 거의 눈에 띌 만한 진화없이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1억 5천만 년 전의 굴은 오늘날 사람들이 식탁에서 맛보는 굴과 똑같은 모습과 똑같은 형태를 가진 것이다.
몇몇 종들의 이와 같은 놀라운 안정성, 진화에 소요되는 수십억년이라는 긴 시간, 세포의 근본적인 화학적 설계가 지니고 있는 불변성, 이 모든 것들은 명백히 생명체가 가진 합목적적인 시스템의 극단적인 정합성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특징이며, 따라서 합목적적인 시스템의 이 극단적인 정합성이야말로 진화가 어떤 특정한 방향을 향하여 전개되어 나가도록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또한 진화가 너무 쉽게 일어나는 것을 막는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연의 룰렛 게임이 제공하는 무수한 변화의 기회중 오직 극히 작은 부분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항체의 기원

항체란 유기체에 침투해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 ㅡ예컨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ㅡ를 식별해내어 입체특이적으로 결합하는 성질을 가진 단백질이다. 하지만, 어떤 박테리아 종류에 특유한 입체적 모티브를 선별적으로 식별해내는 항체가 유기체 내에 생기게 되는 일은 이 유기체가 이미 적어도 한번 이 박테리아의 침투를 (자연적으로나 혹은 인위적인 예방접종을 통해서) 받아본 적이 있는 다음에만 일어난다. 게다가 유기체는 자연적인 것이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상관없이 거의 어떠한 항원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항체를 그때마다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항체의 입체특이적 결합 구조의 합성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항원 자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하지만 항체의 이러한 구조의 합성은 항원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밝혀진 사실이다. 실상이 어떠냐 하면, 유기체 내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전문화된 세포들이 만들어지는데, 이 세포들이 항체의 구조를 결정짓는 유전 정보의 단편을 가지고 일종의 룰렛게임을 하는 것이다. 이 전문화되고 대단히 신속하게 회전하는 유전적 룰렛의 정확한 작용은 아직까지 완전하게 해명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여기에 재조합과 돌연변이가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두 현상은 항원의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그야말로 우연에 의해서 일어난다. 항원이 하는 일이란 그저 선택권자의 역할을 하는 것 뿐이다. 즉, 다른 세포들을 제치고 오직 자신을 식별해낼 수 있는 항체를 생산하는 세포만이 증식되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알려진 가장 탁월하게 정교한 분자적 적응 현상의 기초에 이처럼 우연이라는 원천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극적인 일이다.

선택압의 방향을 정하는 요인으로서의 행동

자연선택설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이 이론이 선택을 행하는 요인으로 너무나 자주 오직 외적 환경의 조건마을 주장하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외적 조건들이 생물에 가하는 선택의 압력(선택압)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 생물의 합목적적인 작용과 독립적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생물 자신의) 합목적적인 작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 생물 자신의 유기적 조직화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러므로 다시 말해 외적 환경에 대한 이 생물 자신의 자율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비중이 점점 더 커지다 보면 고등생물에게는 합목적적인 작용이 더 결정적인 것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그들의 생존과 재생산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 좌우된다. 게다가 처음에 한 이런저런 행동이 대단히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언어와 인간의 진화

현대 언어학은 유일무이한 사건, 즉 인간의 상징적 언어가 결코 동물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소통수단들 ㅡ청각적, 촉각적, 시각적, 혹은 여타의 다른 수단들 ㅡ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로부터 곧 진화에서 인간과 여타 동물들 사이의 불연속성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거나, 혹은 인간의 언어가 처음부터 예컨대 대형 원숭이가 서로 교환하는 다양한 신호와 전달의 체계에서 전혀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용한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의 뇌도 틀림없이 자기 안에 정보를 새겨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서로 결합하고 변형하는 조작을 행하며 이 조작의 결과를 다시 개개의 행동을 통해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처럼 개개의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을 뿐, 자신이 아닌 다른 개체에게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원래의 독창적이며 사적인 조작을 그대로 전달 가능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는 바로 이런 일을 가능케 한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한 개체가 행한 창조적인 연결과 새로운 결합이 다른 개체들에게도 전달되어 더 이상 그 개체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원시적인 언어가 어떠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날 단일종인 인류의 모든 종족들에게 상징적 도구는 모두 동등한 수준의 복합성과 소통 능력을 갖도록 이미 발달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촘스키에 따르면 언어의 심층 구조는, 즉 그 형식은 모든 인간 언어에서 동일하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진화는 알려진 가장 먼 조상 이래로 무엇보다도 두개골의, 즉 뇌의 계속적인 발달에 의해 이뤄져왔다고 확언할 수 있다. 이런 뇌의 발달을 위해서는 200만년 이상의 세월동안 선택압이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것이 필요했다. 200만년이라는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은 것이기에 이 선택압의 강도는 대단한 것이었으며, 또한 어떤 다른 계통에서도 이와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 선택압은 인간의 진화에서만 특유한 유별난 것이었다.

뇌의 후성적 발달 과정 자체의 일부로서 프로그램되어 있는 언어 습득

인지적 기능의 발달은 출생 이후 이뤄지는 피질의 성장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언어의 습득은 이러한 피질이 후성적으로 발달하는 동안 이뤄지기 때문에, 언어와 인지적 기능이 그토록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언어와 그것이 나타내는 인지를 내성에 의해서 서로 분리해낸다는 것이 대단이 어려울 정도로 이 둘의 연관은 긴밀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언어를 단지 상부구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의 언어가 극히 다양한 것을 보면, 언어는 두 번째 진화의, 즉 문화적 진화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폭넓고 세련된 인지적 기능은 분명히 오직 언어 속에서만 또한 언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언어라는 도구가 없으면, 이러한 인지적 기능 대부분은 활용될 수 없는 것으로 마비되고 만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은 더 이상 한갓 상부구조로서 생각될 수 없다. 현대의 인간에게 그의 인지적 기능과 상징적 언어 사이에는 아주 긴밀한 공생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긴밀한 공생관계는 이 둘의 장기간에 걸친 공동 진화의 소산인 것이다.
촘스키와 그의 학파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극히 다양하지만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아래에는 모든 언어에 공통된 하나의 형식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식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고 종에 애초부터 내재하는 특징이어야 한다. 이같은 생각은 몇몇 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을 분노케했다. 이들은 촘스키의 이러한 생각에서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으로의 회귀를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에 함축된 생물학적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하등 분개할 것이 없다.
이는 곧 인간의 진화에서 불절화된 언어의 출현이 단지 문화적 진화만을 일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적 진화에도 결정적인 방식으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만약 실제로 그러했다면 뇌의 후성적 발달 과정 중에 나타나는 언어 사용능력은 오늘날 인간의 본성 자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지식의 최전선

생물학적 지식에서 현재 미개척인 영역

아마도 30억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어져온 진화의 장구한 여정이나, 진화가 창조해낸 놀랄 만큼 다양한 구조들, 혹은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기적처럼 효율적인 성능들 따위를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정말 거대한 우연적 놀이의 산물일 수 있을지, 우연히 뽑힌 숫자라는 눈먼 맹목적 선택에 의해 극히 드문 승자가 결정되는 그런 도박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지 다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생각만이 유일하게 사실들(특히 복제나 돌연변이의 그리고 번역의 분자적 메커니즘에 관한 사실들)에 부합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말해주는 축적된 증거들을 상세히 검토해보면, 이 생각이 옳다는 확신은 되찾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화 전체에 대한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이해를 한눈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적은 설명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들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화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단지 그 원리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상세한 세부적인 면까지도 정확하게 확인하고 있다. 우리가 찾은 해답은 종의 안정성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 자체 ㅡDNA의 복제적 불변성, 유기체의 합목적적 정합성 ㅡ가 또한 곧 진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메커니즘이라고 말하는 것이므로 더욱더 만족스러운 것이다.
진화라는 개념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더 풍부해지고 더 정확하게 다듬어져갈 생물학의 중심 개념으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에 관한 한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으며, 진화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지식의 최전선을 이루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에 지금 지식의 최전선은 진화의 양 극단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최초 생명체의 기원 문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나타난 것들 중 가장 강력하게 합목적적인 시스템 ㅡ인간의 중추신경계 ㅡ의 기능에 관련된 문제가 지식의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의 기원 문제

최초의 유기체가 출현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틀림없이 거쳤을 것이다.

1. 생명체의 필수적인 화학 성분인 뉴클레오티드와 아미노산이 지구상에서 형성되는 단계
2. 이들로부터 복제 능력을 가진 최초의 고분자들이 형성되는 단계
3. 이들 복제 능력을 가진 구조들 주위에 어떤 합목적적 장치가 구축되는 진화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원시 세ㅗ에 이르게 되는 단계

40억년전의 지구의 대기 및 지각상의 조건은 메탄과 같은 간단한 탄소 화합물이 축적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물도 있고 암모니아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간단한 화합물들에 비생물학적 촉매가 작용하게 되면 보다 복잡한 화합물들이 제법 쉽게 얻어지는데, 이들 가운데는 아미노산도 있었고 뉴클레오티드의 전구체인 함질소 염기와 당도 있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오늘날의 세포를 이루고 있는 구성성분과 똑같거나 유사한 화합물을 만들어내는 이와 같은 합성이 일어날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의 어느 한 시기에 어느 정도 용량의 물이 생체 고분자의 두 종류인 핵산과 단백질의 기본 성분들을 고농도의 용해상태에서 포함할 수 있었다는 것은 증명된 일로 간주할 수 있다.

깊은 흥미를 품게 하는 문제지만 그 해답을 보이지 않도록 가려놓은 수수께끼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같은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렇지만 생명권의 실제 구조를 고려해보건대, 생명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결정적 사건은 오직 단 한번만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그 선험적 확률은 거의 0이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유일무이한 사건에 대해서 과학은 아무런 말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과학은 오로지 집합을 이루는 사건들, 따라서 그 선험적 확률이 아무리 미소한 것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유한값을 갖는 사건들에 대해서만 설을 풀 수 있다. 그런데 유전암호를 비롯한 구조들의 보편성 자체가 모든 생명체들이 어떤 유일무이한 사건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사건들 중 한 특정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선험적 확률은 0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존재한다. 즉 일어나기 전에 그 확률이 아무리 미소하다 하더라도, 우주에는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생명이 지구상에 오직 단 한번 출현했다는 것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처지다.

이러한 생각은 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인가의 성향과 상충한다. 운명의 존재에 대한 이 진한 향수애를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현대 과학은 모든 내재성을 거부한다. 운명이란 그것이 진행되어 나가면서 쓰여지는 것이지, 결코 먼저 쓰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즉 생명권에서 유일하게 상징적 소통을 위한 논리적 체계를 사용할 줄 알게 된 이 종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쓰여 있던 것이 아니다. 인류의 출현은 또 하나의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로 모든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
우리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몬테-카를로의 도박장에서 우리의 번호가 우연히 운좋게 뽑힌 것과 마찬가지다.

중추신경계의 기능

뇌의 원래적인 기능을 열거하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 감각 입력에 맞추어 신경 지배 활동을 조절하고 통합한다.
2. 크고 작은 복잡한 행동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여러 회로들의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 또한 특정한 자극에 따라 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3. 감각 입력들을 분석하고 여과하고 통합하여 외부 세계를 재현해낸다. 이때 외부 세계에 대한 각 동물종의 재현방식은 종적인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르다. 즉, 각 동물종마다 자신의 종에게만 특유하게 적합한 방식으로 외부 세계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4. 각 종에 특유한 행동양식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저장하며, 그들을 유사한 것들끼리 묶어 집합들로 분류한다. 이 집합들을 그들 각각을 구성하는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ㅡ동시적으로 일어났느냐 순차적으로 일어났느냐에 따라ㅡ서로 연관 지운다. 이미 선천적으로 타고난 프로그램들에다 이런 경험들을 더 보탬으로써 보다 풍요롭고 보다 정묘화되도록, 또한 다양화되도록 만든다.
5. 상을 만들어낸다(상상한다). 즉 외부의 사건들이나 혹은 동물 자신의 행동의 프로그램을 표상하고 본뜬다.

처음 세 개 항에서 규정된 기능들은 일반적으로 고등동물로 분류되지 않는 동물들, 예컨대 절족동물 등의 중추신경계에 의해서도 수행되는 것들이다. 매우 복잡하면서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행동의 프로그램으로서 우리가 아는 가장 눈에 띄는 예는 곤충들에게서 발견된다. 네 번재 항의 기능은 모든 척추동물의 행동에는 물론이거니와 문어와 같은 고등한 비척추동물의 행동에도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기여한다.
실로 의도적(기획적) 이라고 할 만한 다섯 번째 항의 기능은 아마도 틀림없이 고등 척추동물들만이 가진 특권일 것이다.
1, 2, 3의 기능이 단지 조정적이고 외부 세계를 재현해내는 데 그치는 기능인 반면, 4, 5의 기능은 인지적 기능이다. 그리고 오직 5의 기능만이 주관적 경험을 창조해낼 수 있다.

감각의 분석

시야 속에 주어진 도형들을 분석하는 고양이의 신경회로에 대한 연구는 대상의 기하학적 속성을 알아보는 식별 능력이 신경회로의 구조 자체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신경회로가 망막에 주어진 이미지를 여과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신경회로 자체가 자신의 고유한 제한을 이미지에 가하여, 이 이미지로부터 몇몇 단순한 요소들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예컨대 몇몇 신경세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운 직선도형에만 반응하는 반면, 반대 방향으로 기운 직선도형에만 반응하는 신경세포들도 있다. 그러므로 기초 기하학의 관념들은 대상 자체 속에서 표상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대상을 지각하는 감각분석기에 의해서 표상되는 것이다. 대상을 지각하는 이 감각분석기가 대상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부터 이 대상을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본유주의와 경험주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부 동물행동학자들은 동물들의 행동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거나 아니면 경험에 의해 얻어진 것이거나 둘 중 어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두가지 방식을 서로에 대해 완전히 배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렌츠가 열정적으로 보여주듯이 이런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경험적인 것들의 이러한 포함은 동물들에게 이미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는, 즉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이 프로글매의 구조에 맞추어 필요한 학습이 이뤄지며, 따라서 학습되는 것은 미리 만들어져 있는 어떤 형식에 맞추어 ㅡ이 형식은 종의 유전적 유산에 의해 정해진다 ㅡ들어오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서 초기 언어 학습이 이뤄지는 과정은 틀림없이 이처럼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가 주창하고 경험론자들이 부정한 관념의 본유성(선천적으로 타고남)에 대한 오랜 논쟁은 표현형과 유전형 사이의 구분과 관련하여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을 도입한 유전학자들에게야 이 구분은 근본적인 것이고 유전적 유산에 대한 정의 자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유전학자가 아닌 생물학자들이 보기에 이 구분은 단지 유전자의 불변성이라는 공리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인위적인 장치에 불과한,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오직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상만을, 완전히 현전하는 대상만을 인정하려는 자들과 이런 구체적인 대상들 속에서 어떤 관념적인 형태가 변장하여 드러나는 것을 보려는 자들 사이의 대립이 여기에서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관념적인 것을 좋아하는 학자와 그것을 싫어하는 학자, 학자란 단 이 두 종류뿐이라고 알렝은 말했다. 과학적 발전을 위해서는 두 진영의 대립이 무척 중요하다. 그렇지만 과학적 발전은 관념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틀리다는 것을 ㅡ이들 역시 과학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므로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ㅡ늘 증명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중요한 어떤 의미에서 18세기의 위대한 경험론자들은 틀리지않았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을 비롯한 생명체의 모든 것은, 그것이 꿀벌들의 전형적인 행동이든 인간 인식의 본유적인 틀이든, 모두 경험으로부터 온다라는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것은 매 세대마다 각각의 개체에 의해 새롭게 얻어지는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종의 조상 전체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축적한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직 우연에 의해 건져올린 이러한 경험만이,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나지만 자연선택에 의해 오직 소수만이 걸러지는 이러한 시도만이, 중추신경계로 하여금 그것이 수행하는 특수한 기능에 적합한 시스템이 되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뇌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감각 세계를 종의 작용을 위해 적합한 방식으로 표상하고 직접적인 경험중에서 그 자체로는 써먹을 수 없는 소여들을 효율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는 시스템으로, 특히 인간의 경우 경험을 주관적으로 시뮬레이트하여 그 결과를 예측하고 적절한 행동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한 것이다.

시뮬레이션의 기능

인간 뇌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시뮬레이션 기능의 강력한 발달과 집중적인 사용인 듯 하다. 그렇지만 이 기능은 전적으로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주인이 산책나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기쁨을 표현하는 강아지는 그가 조만간 발견하게 될 것들과 그를 기다리는 모험, 주인이 함께 있기에 큰 위험 없이 그가 맛볼 수 있는 감미로운 두려움들을 분명히 상상한다.
동물에게서는, 또한 인간의 유아에게서도, 주관적인 시뮬레이션은 신경운동 활동과 단지 부분적으로만 분리되는 듯이 보인다. 이들에게서 시뮬레이션 작용은 놀이로 (몸짓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인간에게서는 주관적인 시뮬레이션은 전형적으로 고등한 기능, 즉 창조적 기능이 된다. 언어의 상징성에는 바로 이러한 주관적 시뮬레이션의 창조적 기능이 반영되는데, 언어는 주관적 시뮬레이션의 작용을 변환하고 요약하여 밖으로 표현한다. 이로 인해, 촘스키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언어는 그 가장 조야한 사용에 있어서도 거의 언제나 혁신적이게 되는 것이다. 언어가 이처럼 혁신적인 까닭은 그것이 주간적인 경험을, 언제나 새로운 독특한 시뮬레이션을 번역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 창조적인 마주침이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처음으로 시뮬레이트한 자의 죽음과 더부어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사유가 주관적 시뮬레이션 작용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인간에게서 사유가 고도로 발달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진화를 거쳐 이 상상적 체험이 가진 효율성이, 그것이 계속 살아남아야 할 가치가, 이 상상적 체험에 의해 준비되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자연선택의 과정에 의해 입증받아온 결과다. 시뮬레이션 장치는 자기 자신의 체험의 결과들을 축적해감으로써, 끊임없이 더욱더 풍부해져가는 예측 도구이자 발견과 창조의 도구가 된다. 이러한 시뮬레이션 장치의 주관적인 작용의 논리를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객관적인 논리의 규칙을 제정하고, 수학과 같은 새로운 상징적 도구들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원론적 환상과 정신의 현존

17세기 사람들에게나 현재의 우리에게나, 실제 사람들의 경험에서는 뇌와 정신이 서로 다른 것으로 체험되고 결코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존재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은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환상은 너무나 존재 자체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을 집적적으로 체험할 때 이 환상을 사라져버리게 할 수 있기를 바라거나 혹은 이러한 환상 없이 지적, 정서적으로 사는 법을 터득하려는 것은 거의 성공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영혼을 어떤 비물질적 실체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내부에 가지고 있는 유전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이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얻게 되는 개인적 체험이 아주 복잡하고 풍부하며 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갖는 것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유전적이고 문화적인 유산과 개인적 체험이 모두 합쳐져서 우리란 존재는 이뤄진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언을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존재뿐이다.

왕국과 어둠의 나락

인간의 진화에서 작용하는 선택의 압력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혹은 그와 동류인 어느 누군가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주관적 체험의 내용을, 즉 개인적 시뮬레이션의 내용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수 있게 된 순간부터 전혀 새로운 하나의 세계가, 즉 관념들의 세계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우리는 말했다. 새로운 진화가, 즉 문화의 진화가 그 순간부터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신체상의) 진화 역시 아직 오랫동안 계속 더 이뤄졌을 테지만, 이제부터는 언어의 진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이뤄지게 되었다. 인간의 신체상의 진화는 언어의 진화에 깊이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언어는 선택의 조건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현대인은 진화적 공생의 소산이다. 그 밖의 다른 어떤 가설로도 현대인이 어떻게 해서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도 그 수수께끼를 풀 수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또한 화석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안에, 자신을 이루는 단백질의 미시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자기 선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실 인간은 이중적 진화, 즉 신체상의 진화와 관념상의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동물종들보다도 훨씬 더 자기 선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수십만년 동안 관념상의 진화는 신체상의 진화를 아주 조금 앞서 나갈 뿐이었다. 단지 사활에 직접 관련되는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을 만큼만 대뇌피질이 아직 미약하게 발달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신체상의 미약한 진화 상태가 관념상의 진화가 크게 이뤄지지 못하도록 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뮬레이션하는 능력이 발달되는 방향으로, 또한 이 능력의 작동을 외부로 표현하는 언어 능력이 발달되는 방향으로 아주 강한 선택의 압력이 가해졌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진화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진화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가는 수많은 두개골의 화석이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진화를 촉진시켜주던 이 진화가 계속 전개되어감에 따라 관념상의 진화는 그간 중추신경계의 발달이 조금씩 점차적으로 극복해오던 제약조건들에 대해서 점차 더 많은 독립성을 쟁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점차 독립적인 발달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관념상의 진화 덕분에 인간은 인간 이하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지배범위를 넓혀나가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 세계가 감추어두고 있는 위험들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진화의 첫번째 단계를 이끌었던 선택의 압력은 따라서 이제 그 강도가 약해질 수 있게 되었으며, 좌우지간 이전과는 다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제부터 환경을 지배하게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신 앞에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심각한 적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인간중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투쟁이, 생사를 건 이러한 직접 투쟁이, 이제부터 인간종의 자연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동물의 진화에서는 극히 드물게만 나타난다. 오늘날 인간 이외의 다른 어떤 동물종에게서도 같은 종 안에서의 내부 투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거대 포유류들의 투쟁에서, 심지어 수컷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1대1 투쟁에서도, 패자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란 매우 드문 일이다. 모든 전문가들은 이러한 직접 투쟁이, 즉 스펜서식의 생존 투쟁이 동물종들의 진화에서는 단지 주변적인 역할만을 했다는 데 일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인간종의 발달과 확장이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른 순간부터, 종족 간의 혹은 인종 가의 투쟁이 진화를 결정짓는 핵심요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네안데르탈인들이 아주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은 우리 인간의 선조인 호모 사피엔스가 저지른 인종 말살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한 선택의 압력이 인류를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몰고 갔을까? 물론 지성과 상상력, 의지와 야망을 천부적으로 많이 타고 난 종족들이 세력을 훨씬 더 확장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개인 홀로의 용ㅇ기보다는 집단의 단결력과 호전성이, 개인의 창의적인 자발성보다는 부족 전체의 법률에 대한 복종이 더 많이 선택되는 방향으로 압력이 이뤄졌음에 틀림없다.
나는 결코 인간의 진화를 서로 구분되는 두 단계로 나누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문화적 진화뿐만 아니라 신체적 진화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을 핵심적인 선택의 압력을 열거하려고 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수십만 년에 걸친 이러한 인간의 문화적 진화가 인간의 신체적 진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동물에게서보다 인간에게서는, 그의 무한히 우월한 자율성으로 인해, 바로 그의 행동이 선택의 압력 방향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행동이 그저 자동적으로 행해지던 것을 넘어서 문화적 성격을 띠게 된 이후부터는 문화적 특징 자체들이 게놈의 진화에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가 죽 이어져 오다가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드디어 게놈의 진화와 완전히 동떨어진 채 저 혼자서만 계속 진화하는 시기가 오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유전적 쇠퇴의 위험

현대 사회에서는 분명 문화적 진화와 신체적 진화가 완전하게 분리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선택(도태)은 억제되고 있다. 얼마간의 선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다윈적 의미에서의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선택이 아직 작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가장 적합한 자의 존속을 유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해서, '가장 적합한 자의 유전자가 그 자손들의 번창을 통해서 존속'하는 데 선택이 이롭게 작용하지 못한다. 지성, 야망, 용기, 상상력 등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성공의 요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개인적 성공의 요인은 될지언정, 유전적 성공의 요인은 아니다.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유전적 성공의 여부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적 성공의 요인이 유전적 성공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지능지수(혹은 문화수준)와 커플 사이의 평균 자녀수는 서로 반비례한다. 또한 같은 통계자료에서 지능 지수가 높은 사람들끼리 커플로 결합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상황이다. 가장 뛰어난 유전적 잠재성이 그 번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점차 집중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이것 말고도 더 있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비교적 선진적인 사회에서도,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부적합한 자들에 대한 제거는 자연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져왔다. 이들 중 대부분은 사춘기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허나 오늘날에는 유전적으로 열등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충분히 호래 살아남아 자신을 재생산한다(자손을 낳는다). 즉 지식과 사회 윤리가 진보하여, 종의 쇠퇴를 ㅡ자연선택이 사라지면 종의 쇠퇴는 불가피하다 ㅡ막아주던 메커니즘이 단지 가장 심각한 결함을 지닌 자들에 대해서만 작용할 뿐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거의 작용하지 못한다.
자주 지적되는 이러한 위험들에 대해 사람들은 분자유전학의 최근 발전이 어떤 대책을 마련해주리라고 기대를 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책은 그러한 결함을 가진 개인에게만 유효할 뿐, 그의 후손에게까지 유효한 것은 아니다. 현대 분자유전학은 유전적 특징들을 조작하여 새로운 특징들을 갖도록 개선시키거나 유전적 초인을 창조해낼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제공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을 희망하는 것 자체가 그릇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놈이 미시적 차원의 존재라는 것 자체가 당분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영구히 이러한 조작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해주듯, 미시적 차원은 언제나 우발적 사건들로 들끓는 곳이기 때문에, 설령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조작을 하더라도 이 조작이 예측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예기치 않은 우발적인 결과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인간종을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선택을 단호하고 엄격하게 가동시키는 것 뿐이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선택에 의한 도태가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건, 혹은 오히려 반대되는 선택이 일어나도록 하는 조건이기에, 인간종에게 닥친 위험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위험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지만, 즉 10~15세대, 다시 말해 몇 세기가 지나야지만 그 심각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것 이외에도 또 다른 심각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관념상의 진화다.
핵폭탄의 위협과 마찬가지로 이 영혼의 질환도, 아주 간단한 생각으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은 객관적이라는 생각, 참된 인식(지식)은 오직 사유와 실제 경험 사이의 체계적인 대면 이외의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얻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류 사상사에 나타난 수많은 사상의 왕국들 가운데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사상에 해당한다.

사상들의 선택과 도태

사상의 선택과 도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진다. 정신 자체의 차원과 성능의 차원이다.
어떤 사상이 갖고 있는 성능상의 가치는 그 사상을 채택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그 사상이 가져오는 행동의 변화와 관련된다.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은 인간 집단에게 보다 많은 단결력과 야망, 자기 확신을 주는 사상이라면, 바로 그로 인해 그 집단은 보다 크게 팽창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며, 이 집단의 이와 같은 팽창은 역으로 그들의 사상을 더 크게 뻗어나갈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어떤 사상이 크게 뻗어나간다는 것과 이 사상이 얼마나 많은 객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어떤 종교 이데올로기가 어떤 사회를 위한 강력한 방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구조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구조가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구조가 사회에 군림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상에 대해서는 침투력과 성능상의 가치를 굳이 구분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상의 침투력 자체를 분석하는 일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렵다. 어떤 사상이 인간들의 정신 속을 파고들 수 있는 침투력은 인간 정신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조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해두자. 이들 구조들 중에는 문화에 의해 전수되어온 것들도 있을 것이며, 또한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확정하기 어렵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구조들도 일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침투력을 가진 사상들이란 인간에게 우주의 거대한 내재적 운명 속에서 그의 자리를 배정해줌으로써 인간을 설명하는 사상, 그리하여 이 내재적 운명 속에서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사상일 것이다.

(신화적) 설명의 필요성

수십만년 동안 인간 개인의 운명은 그가 속한 집단이나 부족의 운명과 하나였으며, 집단을 벗어나서는 개인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 부족은 그 구성원들의 단결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법이 개인들 각자의 마음속에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단결하게 하고 또 이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법에 대해 때때로 제동을 걸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 구조가 그토록 오랜 기간 거대한 힘을 가지고서 말 잘 듣는 놈은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놈은 도태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을 테이므로, 인간 뇌의 선천적인 사고 범주들의 유전적 진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 없다. 즉 이러한 유전적 진화는 인간의 뇌를 부족집단의 법을 잘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진화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에다 어떤 거대한 존엄성을 갖도록 그 근거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신화적 설명을 만들 필요성(요구)을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진화되도록 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들의 후손이다. 어떤 신화적 설명에 대한 요구,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매도록 만드는 불안. 이러한 것을 우리는 이들로부터 계승한 것이다. 모든 신화와 종교, 모든 철학과 과학은 이 불안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인류 이외에는, 동물계의 어디를 보아도 아주 고도로 분화된 사회적 조직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개미나 흰 개미, 꿀벌과 같은 몇몇 곤충들이 예외이기는 하나, 이들 사회적 곤충들이 형성하는 사회적 제도의 안정성은 모두 유전적으로 전수되어온 덕분이지 문화적 유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사회적 행동은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자동적인 것이다.

신화적 개체발생과 형이상학적 개체발생

불안을 잠재우고 법을 근거지우는 역할을 했던 설명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다. 거의 모든 원시 신화는 신적인 영웅(주인공)과 관련있다. 이 신적인 영웅의 행위 하나면 집단의 기원이 설명되고 집단의 사회적 구조를 불가침의 전통 위에 세울 수 있다. 역사(이야기)는 결코 다시 쓰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종교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위대한 종교들도 영감에 가득찬 어떤 예언자의 삶이 남긴 이야기(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이 예언자는 자신이 만물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를 대변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의 역사와 그들의 운명을 이야기해준다.
플라톤에서부터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철학 체계들은 설명적이면서도 동시에 규범적인 개체발생기를 제공하고 있다. 마르크스나 헤겔에게 역사란 어떤 내재적인 계획에 따라, 어떤 필연적이고 우호적인 계획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정신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해방을 약속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개체발생기적인 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물활론적인 옛날의 결속의 파괴와 현대인의 영혼의 질환

만약 어떤 전체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내가 앞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실제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이라면, 만약 이러한 설명의 부재가 깊은 불안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만약 이러한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설명 형태가 역사 전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곧 자연 전체의 계획 속에서 인간에게 어떤 필연적인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인간의 의미를 밝혀내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만약 진실처럼 보여서 불안을 제대로 잠재울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설명이 반드시 오랜 물활론적인 전통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라면, 사상의 왕국들 가운데 오직 객관적인 지식만을 참된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보고자 하는 사상이 나타나는 데 왜 그토록 수천 년의 세월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준엄하고 냉정한 사상은 어떤 설명도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밖의 모든 정신적 양식에 대한 희구를 금욕주의적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해온다. 그러니 이런 사상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불안을 진정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격화시킨다. 이 사상은 수만 년 된 전통을,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 자체와 하나된 전통을 한 방에 날려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 사상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오래된 물환론적 결속을 비판하고, 이 소중한 유대관계 대신에 고독하고 얼어붙은 우주 속에서의 근심에 찬 탐구만을 인간에게 허락한다. 어떻게 이런 사상이, 자신을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청교도적인 오만밖에 없는 이런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결코 그럴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은 아직까지도 여전하다. 이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상이 우리에게 육박해 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대단히 비범한 성능을 발휘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와 힘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과학이 주는 가장 심오한 메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실상 거의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진리를 찾기 위한 새롭고 유일한 원천에 대한 규정, 윤리의 기초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의 요구, 물활론적인 전통과의 단적인 결별에의 요구, 옛날의 결속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것으로 대신할 필요성의 제기 등등의 것을 말이다. 과학이 주는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또한 그것이 주는 모든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바로 이러한 과학에 의해 이미 그 뿌리까지 괴멸된 가치 체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우리 사회에 접어들어, 문명은 자신을 건축하기 위해 지식의 원천으로서는 물활론적인 전통을 완전히 포기하면서도 가치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이 전통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사회들은 그들의 도덕의 기반을 유대-기독교적 종교성과 과학적 진보주의가 서로 어울리지 않게 뒤섞인, 또한 인간의 자연적 권리에 대한 믿음과 공리주의적 실용주의가 서로 어울리지 않게 뒤섞인 역겨운 짬뽕을 두려워하고 있는 반면, 마르크스주의 사회는 언제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종교를 설파하고 있다.

현대인의 도덕적(정신적), 사회적 존재의 근저에 있는 이 허위가 바로 현대인이 겪는 영혼의 질환이다.
좌우지간 그것은 소외의 감정이다. 과학에 대한 염오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혼히는 과학의 기술적 응용의 부산물들에 대해서다.
원자폭탄, 자연파괴, 인구증가 같은 것들 말이다. 이 문제들을 겨냥하는 비판의 목소리들에 대해, 과학 자체는 거것의 기술적 응용과는 다른 것이라고, 원자력의 사용은 조만간 인류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리라고, 자연 환경의 파괴는 테크놀로지의 과잉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아직까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해마다 수백만의 아이들이 죽음으로부터 구제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그렇다면 그 아이들을 다시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하느냐고 대꾸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질환을 가져온 깊은 원인과 그 표면적인 징후를 혼동하는 피상적 논의일 뿐이다. 사람들의 거부감은 실은 과학의 본질적인 메세지 자체를 향해 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신성 모독, 즉 가치에 대한 파괴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다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실로 과학은 가치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이 직접적으로 가치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가치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무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담고 있는 메세지를 완전한 의미에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마침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자신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완전한 고독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이상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마치 집시처럼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즈는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그가 꿈꾸는 희망에도, 그가 겪는 고통이나 그가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무관심해할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죄를 규정할 것인가? 누가 선과 악에 대해 말할 것인가? 전통적인 체계들은 하나같이 윤리와 가치를 안긴의 힘이 미치는 영역 너머에 두었다. 가치는 인간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 따라서 인간은 가치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인간은 가치란 인간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 스스로가 이제 가치의 주인이 되자, 모든 가치들이 우주의 무정한 공허 속으로 해체되어 사라지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 인간은 마침내 과학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과학의 끔찍한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게 된 것이다.

지식의 윤리

지식의 윤리에 있어서는, 어떤 원초적인 가치에 대한 윤리적 선택이 지식을 근거지우는 기반이 된다. 이 점에 의해서 지식의 윤리는 물활론적 윤리와 근본적으로 차이를 갖게 된다. 모든 물활론적 윤리는 내재적인 어떤 법칙들, 즉 종교적이거나 자연적인 어떤 법칙들이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법칙들에 대한 지식(인식) 위에 자신들의 윤리를 근거 지우려고 한다. 하지만 지식의 윤리는 이처럼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인간 자신이 그것을 공리로 선택하여 모든 담론과 모든 행동의 진정성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즉 지식의 윤리는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어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것이다. 진정한 담론은 그리하여 이제 과학(참된 지식)을 근거 짓게 되며, 인간의 손아귀에 거대한 힘을 쥐어주게 된다. 이 거대한 힘이 오늘날 인간을 풍요롭게도 위태롭게도 만들며,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또한 예속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과학의 산물을 먹고 살면서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덤덤 더 많이 과학에 의존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가 물질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지식을 가능케 한 이러한 윤리 덕분이며, 정신적으로 허약한 것은 바로 이 지식에 의해 궤별된 가치 체계가 여전히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치명적인 것이다. 우리의 발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둠의 나락을 파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모순이다. 오늘날의 세계를 창조해낸 것은 바로 지식의 윤리다. 그러므로 이 지식의 윤리만이 오늘날의 세계와 공존할 수 있으며, 일단 제대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오직 이 지식의 윤리만이 오늘날의 세계를 계속 진화시킬 수 있는 참된 능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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