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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에밀 by 장 자크 루소

by hoyony 2016. 11. 12.

Emile 




한길사
2007 
Jean Jacques Rousseau
Emile ou de l'education 


머리말

사람들은 유년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유년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해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갈피를 못잡고 헤매게 될 것이다. 가장 현명하다는 사람들도 어린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어른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에 집착한다. 그들은 어른이 되기 전의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어린아이들에게서 늘 어른을 찾는다.
나의 방법 전체가 공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언제든지 내가 관찰한 바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가장 몰두해온 연구가 바로 이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아주 잘못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루어야 할 소재는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제자들을 더 제대로 연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라.

제1권
영유아기(출생~5세)

모든 것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완전하나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변질되고 만다. 인간은 어떤 땅에다 다른 토양에서 자랄 수 있는 산물을 키우려는가 하면 이 나무에다 저 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려한다. 그리하여 기후와 환경, 계절을 뒤섞어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개, 말, 노예의 사지를 잘라낸다. 그렇게 모든 것을 뒤집어 엎고 모든 것의 형태를 일그러뜨리면서 기형화 괴물을 좋아한다. 인간은 어떤 것이든 자연이 만들어놓은 그대로를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마저도 그러하다. 조련된 말을 다루듯 인간을 자신에게 맞게 길들여야 한다. 그리고 마치 정원수처럼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뒤틀어놓아야만 한다.

우리는 연약하게 태어나 힘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태어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또한 우리는 어리석게 태어나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태어날 때 갖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는 교육에서 얻는다. 이 교육은 자연이나 인간 또는 사물에서 우리에게 온다. 우리의 능력과 기관의 내적 발달은 자연의 교육이다. 이러한 발달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인간의 교육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작용하는 사물들에 대해 우리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사물의 교육이다.

자연인은 그 자신에게 전부다. 그러므로 그는 수의 단위인  1이고 절대적 전체이며 자기 자신이나 그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는다. 사회 속의 인간은 분모에 기인하는 분수의 한 단위에 불과하며 그 가치가 전체, 즉 사회 집단과의 관계 속에 있다. 훌륭한 사회 제도란 인간을 자연에서 최대한 이탈시켜 그에게서 절대적 존재를 빼앗고 대신 상대적 존재를 부여하는, 그리하여 단일한 전체 속에 '자아'를 옮겨놓을 줄 아는 제도다.
그 결과 각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을 단일한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지 않고 단일한 전체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며, 전체 속에서만 자신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 인간의 참된 연구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연구다. 나는 우리 가운데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가장 잘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진정한 교육이란 훈계보다 실제 훈련으로 이루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고대인들에게 교육(education)이라는 말은 '수유'를 의미했다. '산파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유모는 키우며, 교육자는 훈육하고 스승은 지도한다'라고 바로(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 철학자)도 말했다. 이처럼 보육, 훈육, 지도는 보육자, 훈육자, 스승이 서로 다른 만큼 그 목표가 서로 다른 세가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차이들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제대로 지도받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의 안내자만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견해를 일반화하고, 우리의 제자에게서 추상적인 인간, 즉 살아가면서 부딪칠 수 있는 온갖 사건들에 노출된 인간을 관찰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를 보호랄 생각만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그에게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를 보존하고 운명의 타격을 견뎌내는 법을, 또한 호사와 빈곤에 맞서 대항하고 필요하다면 아이슬란드의 얼음 속이나 몰타 섬의 불타는 바위 위에서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가 죽지 않도록 대비를 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죽게 될 것이므로.

가장 충실하게 삶을 산 사람은 가장 긴 세월을 산 사람이 아니라 삶을 가장 많이 느낀 사람이다. 100세에 땅에 묻혀도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그런 사람도 있다. 또 젊어서 죽었더라도 최소한 그때까지 충분한 삶을 구가했다면 그 편이 그 사람에게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교육이 필요 없다. 자기 신분에 따르는 교육은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외 다른 교육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자가 자기 신분에 따라 받는 교육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그에게 가장 부적합한 교육이다. 더욱이 자연의 교육이란 인간을 모든 인간 조건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게 가르치는 것보다 합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두 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숫자로 보면 벼락 부자보다는 몰락한 자가 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를 선택하자. 그러면 우리는 최소한 인간을 하나 더 만들어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인간이 될 수 있다.

몸이 정신에 복종하려면 건강해야 한다. 좋은 하인은 건장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무절제가 정념을 부추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때 육체를 쇠약하게 만든다. 고행과 단식도 종종 반대되는 이유로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육체는 약하면 약할수록 더 명령을 해댄다. 반면에 강할수록 복종한다. 모든 욕정은 나약한 육체에 깃들고, 나약한 육체가 욕정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육체는 욕정에 더욱 민감해진다.
나약한 신체는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농촌 여자들은 도시 여자들보다 고기를 덜 먹고 야채는 더 많이 먹는다. 이러한 채식요법은 그녀들과 아이들에게 해롭기보다는 유리한 듯하다. 농촌 여자들이 부르주아 가정의 젖먹이를 맡게 되면 사람들은 그녀들에게 포토프(고기와 야채를 삶은 스튜)를 준다. 그들은 고기를 삶은 국물이 더 질이 좋은 유미를 만들고 젖의 양도 더 많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자란 어린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설사도 더 잘하고 기생충도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부패한 동물성 물질에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반면 식물성 물질에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물의 몸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젖은 일종의 식물성 물질이다. 젖을 분석해보면 이러한 사실이 입증된다. 젖은 쉽게 산으로 변하며, 동물성 물질이 그런 것처럼 암모니아수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식물처럼 순수 중성염을 남긴다.
초식동물의 젖은 육식동물의 젖보다 훨씬 부드럽고 몸에도 좋다. 자기 본래의 것과 질이 같은 물질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초식동물의 젖은 그 본성을 더 잘 보존하고 있고 따라서 잘 부패하지도 않는다. 양으로 보더라도 전분질의 야채가 고기보다 혈액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 이외에 사물들이 있음을 배우게 되는 것은 오로지 운동에 의해서다. 또한 우리가 넓이의 개념을 얻게 되는 것도 오로지 우리 자신의 운동을 통해서다. 어린아이가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물건이든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이든 똑같이 손을 뻗쳐 잡으려 드는 것은 이러한 넓이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하는 노력은 여러분에게 일종의 지배력의 표시, 물건에게 다가오라는 명령 또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가져다달라는 명령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가 처음에는 머리로 그 다음에는 눈으로 본 동일한 사물들을 지금은 팔 끝으로 보고 또한 그가 닿을 수 있는 정도만을 넣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가 거리를 판단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아이를 자주 산책시키고 여러 장소로 데리고 다니며 장소의 변화를 아이가 느낄 수 있게 배려하라.

어린아이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려고 애를 쓸 경우, 그 아이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물건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손을 내밀면서 칭얼거리고 울때는 더 이상 거리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게 다가오라고 명령하거나 여러분에게 그것을 가져다달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라면 천천히 잔걸음으로 아이를 물건 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좋다. 두 번째 경우에는 그저 못 들은 척한다. 아이는 어른들의 주인이 아니고, 또 사물들은 아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일찍부터 어른이나 사물에게 명령하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이성만이 우리에게 선과 악을 인식하는 법을 가르쳐본다. 우리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게 만드는 양심은 이성과는 별개의 것이지만 결국 이성 없이는 개발될 수 없다. 철이 들기 전에 우리는 선인지 악인지 알지 못한 채 선과 악을 행한다.
찰학은 인간이 지닌 자만심, 지배성향, 이기심, 악의와 같은 자연적인 악덕에 의한 것으로 설명한다. 거기에 덧붙여 무력감이 어린아이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해서 스스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순환에 의해 다시 유년기의 나약함으로 되돌아간 허약하고 노쇠한 노인을 보라. 그는 꼼짝 않고 조용히 있으며 또한 자기 주변의 모든 것도 가만히 있기를 원한다. 아무리 조그만 동요도 그를 혼란하고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전 우주가 고요하기를 바랄 것이다.

최초의 원인이 달라지지 않고야 동일한 정념들에 결합된 동일한 무능력이 어떻게 두 시기에 그토록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아이와 노인의 육체적 상태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서 이 원인의 다양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둘 다에게 공통된 활동적 원동력이 한쪽에서는 발전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멸되고 있다.
하나는 형성중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되고 있다. 하나는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활력이 노인의 마음에 집중된다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는 활력이 흘러넘쳐 밖으로 뻗어나간다. 말하자면 어린아이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충분한 생명력을 자기 안에서 느끼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만들든 파괴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물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모든 변화는 활동이다. 만약 어린아이가 무엇을 파괴하려는 경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면 그것은 악의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드는 활동은 항상 느리게 진행되고 속도가 더 빠른 파괴 활동이 그 아이의 활달함에 더 맞기 때문이다. 조물주는 어린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활동적 원동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거기에 몰두할 힘은 조금만 남겨둠으로써 그것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주변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도구로 간주하게 되면, 곧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기 위해 또 자신의 나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은 남을 귀찮게 하고 폭군이 되며 자만하고 심술쟁이, 말썽꾸러리가 된다. 이는 타고난 지배적 성향에서 비롯된 발달이 아니라 발달이 아이들에게 이러한 성향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타인의 손을 빌려 행동하고, 혀만 움직여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를 깨닫는 데는 오랜 경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아이들은 힘을 얻어 조바심을 덜 내고 덜 수선스럽게 되며 더욱더 자기 내면으로 들어간다. 정신과 육체가, 말하자면 균형을 잡으면서 자연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움직임만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명령하고 싶은 욕망은 그 욕망을 생겨나게 했던 욕구와 함께 없어지지 않는다. 지배력이 자존심을 일깨워 그 비위를 맞추고 습관이 그것을 강화시킨다. 그리하여 변덕이 욕구를 뒤따라오고, 세상 평판에서 생겨나는 편견이 최초의 뿌리를 내린다.

제2권
아동기(5세~12세)

어린아이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덜 우는데 이러한 발전은 자연스럽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를 대체하는 것이다. "고통스럽다"고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고통이 너무나 격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아니라면 왜 울음으로 고통을 나타내겠는가? 그때도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운다면 이는 아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고통을 가장 덜 느끼는 시기인 유년기에, 철이 들고 나서 들일 수고를 면하도록 고생을 더 많이 시켜야 한다는데 과연 누가 여러분 마음대로 그렇게 조처할 수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던가? 그리고 여러분이 어린아이의 나약한 정신을 짓누르며 심어준 그 훌륭한 모든 가르침이 먼 훗날 그에게 유용하기보다 해로운 것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여러분이 아이에게 마음껏 퍼부은 고통으로 무엇인가를 면하게 해주었다고 누가 여러분에게 보장하는가? 왜 여러분은 현재의 불행이 미래의 짐을 덜어준다는 확신도 없이 어린아이의 상태가 내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그에게 부여하는가? 여러분이 그에게 고쳐주려는 나쁜 성향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여러분의 잘못된 보살핌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내게 입증할 것인가? 충분한 근거가 있든 없든 언젠가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희망으로 지금 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유감스러운 선견지명이여!

인간은 만물의 질서 속에 제자리를 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도 인생의 질서 속에 제자리가 있다. 어른은 어른으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 바라보아야 한다. 각자에게 자기 자리를 할당하고 그를 제자리에 앉히는 것, 인간의 체질에 따라 인간의 정념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 나머지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외부의 원인에 달려 있다. 우리는 절대적인 행복이나 불행을 알지 못한다. 인생에서 모든 것은 뒤섞여 있다.
육체가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성향도 연속적인 흐름을 탄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그 정도는 다양하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고통을 가장 적게 겪는 사람이다. 반면 가장 불행한 자는 기쁨을 가장 적게 느끼는 자다. 그런데 언제나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많은 법이다. 이렇게 즐거움의 양과 고통의 양이 차이가 나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일이다. 따라서 자신이 겪는 불행이 얼마나 적은지에 따라 행복을 가늠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고통의 감정은 거기서 벗어나려는 욕망과 불가분의 것이다. 또한 모든 기쁨의 관념도 그것을 즐기려는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모든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하며, 사람들이 느끼는 결핍은 모두 고통스럽다. 결국 우리의 비참함은 바로 우리가 가진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에 있다. 능력이 욕망에 버금가는 감각적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절대적으로 행복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혜 또는 진정한 행복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욕망을 감소히키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욕망이 능력에 못 미친다면 우리가 가진 능력 가운데 일부는 할일이 없고, 그러면 우리는 존재 전부를 즐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도 행복의 길이 아닌데, 욕망이 더 큰 비율로 동시에 확대된다면 우리는 그만큼 더 불행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길은 능력에 비해 과도한 욕망을 줄이고 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동등하게 만드는 데 있다.

현실 세계는 한계가 있지만 상상의 세계는 무한하다. 현실세계를 확장시킬 수 없다면 상상의 세계를 축소시키자. 왜냐하면 우리를 진정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고통은 오직 두 세계의 차이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힘과 건강과 자신이 선하다는 확신을 빼고 나면 이 생애의 모든 행복이란 남들의 평판 속에 있고, 육체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빼고 나면 우리의 모든 불행은 상상적인 것이다.

인간이 약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약하다는 말은 어떤 관계, 그 말을 적용시킨 존재가 갖는 어떤 과계를 지시한다. 곤충이든 벌레든 힘이 욕구를 능가하는 존재는 강한 존재다. 반면 코끼리든 사자든 정복자든 영웅이든 또는 신이든, 욕구가 힘을 능가하는 존재는 약한 존재다. 자기의 본성을 부인하고 반항했던 천사는 본성에 따라 평화롭게 사는 행복한 인간보다 더 나약한 존재였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만족할 때 매우 강하다. 반면 인간성을 뛰어넘으려 할 때 그는 매우 나약하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닌 능력을 확장시킴으로써 여러분의 힘을 확장시킨다고 생각하지 말라. 반대로 여러분의 자만심이 능력보다 더 커비면 여러분의 힘은 감소하는 것이다.
모든 동물은 정확하게 자기 보존에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만이 필요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여분의 능력이 인간의 불행을 만드는 도구라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의 시야를 죽음까지만 연장하고 그 이상 나아기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우리의 최악의 고통으로 만드는 것은 불완전한 지식과 그릇된 지혜밖에 없다.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현명한 인간에게는 삶의 고통을 견디는 하나의 동기에 불과하다. 사람이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삶을 보존하는 데 너무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오, 인간이여! 당신의 존재를 당신 안으로 좁혀라, 그러면 당신은 더이상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이 존재들의 사슬 속에 지정해준 당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그 어떤 것도 당신을 거기서 빠저나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연의 엄중한 법칙에 대항하지도 말고, 거기에 저항하느라 힘을 소비하지도 말라. 하늘은 그 힘을 당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거나 연장하는 데 쓰도록 당신에게 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이 원하는 대로, 또 하늘이 원하는 범위 내에서 당신의 존재를 보존하는데 쓰라고 주셨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능력은 자연이 부여한 힘이 확장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만 발휘될 뿐 그 이상이 아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예속 상태, 환상, 현혹에 불과하다. 지배자조차 남들의 평판에 매여 있을 때는 종속적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편견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데, 그 사람들의 편견에 당신이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 마음대로 그들을 이끌어가려면 당신이 그들의 마음에 들게 처신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이 자신의 힘에 대해 갖고 있는 권리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에게 자신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을 더욱 나약하게 만들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욕망이 나약함과 더불어 증대된 이유며, 바로 여기서 성년기에 비해 어린 시절의 나약함이 비롯되었다. 어른이 강한 존재이고 어린아이가 약한 존재라면 이는 어른이 어린아이보다 절대적으로 힘이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이 본래 자립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어린아이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른은 더 많은 의지를 가지고 있고 어린아이는 더 변덕스럽게 마련이다.
사회 상태에서 사는 부모들은 자식을 적절한 나이가 되기도 전에 사회 상태로 끌고 들어간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아이에게 부여함으로써 부모들은 그의 나약함을 보완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시킨다. 본성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아이에게 요구함으로써, 아이가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약간의 힘을 부모의 의지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아이의 나약함과 부모의 애정으로 이루어지는 서로의 의존성을 어느 쪽에서든 예속 상태가 되도록 바꾸어놓음으로써 그를 한층 더 나약하게 만든다.

현명한 인간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자기 자리를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제자리에 있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가 제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는 수많은 출구가 있다. 그를 제자리에 붙잡아 두는 일은 그를 지도하는 사람들의 몫인데, 그 일은 쉽지가 않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아야 하지만 그 때문에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 의존해야 하지만 복종해서는 안 된다. 요구할 수는 있지만 명령을 해서는 안 된다.
편견과 인간의 제도가 우리의 타고난 성향을 변질시키기 전에는, 어른들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행복도 그들의 자유를 사용하는 데 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에게서 자유는 그들의 나약함에 의해 제한된다. 만약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행복할 것이다. 이것이 자연 상태에서 사는 어른의 경우다. 만약 욕구가 자신의 힘을 초과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자는 누구나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어린아이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어린아이들은 자연 상태에서조차 불완전한 자유만을 누리는데 그것은 사회 상태에서 어른들이 행유하는 자유와 유사하다. 더 이상 타인들 없이 지낼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이런 측면에서 다시 나약하고 불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른이 되게끔 되어 있었는데 법과 사회가 우리를 다시 어린아이의 상태로 빠뜨려놓은 것이다. 부자와 귀족, 왕은 모두 남들이 열심히 그들의 불행을 덜어주려 하는 것을 보고 바로 거기서 유치한 허영심을 끌어내는 아이들이며, 그들이 성숙한 어른일라면 들어주지 않을 시중을 받고 매우 우쭐해한다.

아이는 여러분이 친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곧 심술궂게 될 것이다. 또한 여러분이 약하다고 생각하면 아이는 곧 고집스러워질 것이다. 거절할 생각이 없는 것은 항상 아이가 처음 욕구를 표현할 때 주어야 한다. 자주 거절하지 마라. 그렇지만 한 번 거절한 것은 절대로 철회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의 제자에게 복종의 의무를 납득시키려 하면서 여러분은 이른바 설득에다 강제와 위협을 덧붙이고 더 나쁘게는 아첨과 약속을 남발한다. 그리하여 결국 이해관계에 끌려서든 힘에 억눌려서든 아이들은 이치를 납득한 척 한다. 여러분이 복종인지 반항인지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곧 아이들은 복종이 자신에게 이롭고 반항이 해가 된다면 것을 잘 알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이들에게 불쾌한 일만 요구하므로, 또 다른 사람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므로,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숨어버린다. 아이들은 자기가 복종하기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발각이 되면 더 큰 화가 생길까 두려워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즉시 시인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의무의 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들의 나이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깨닫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 용서받으리라는 희망, 성가신 재촉, 대답하는 난처함으로 인해 아이들은 결국 어른들이 요구하는 고백을 모두 하게 된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들을 귀찮게 하거나 겁을 먹게 했을 뿐인데도 그들을 이해시켰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첫째, 여런분은 아이들이 깨닫지 못하는 의무를 강요함으로써 아이들이 여러분의 독재에 불만을 품게 한다.
마지막으로 은밀한 동기를 표면상의 동기로 감추는 데 익숙하게 만듦으로써, 여러분 자신이 직접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여러분을 속이고 그들의 진짜 성격을 여러분에게 감추며, 기회만 있으면 여러분과 다른 사람에게 빈말로 대답을 때우는 법을 가르치는 수단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단 하나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제외하고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왔다. 그 유일한 수단이란 잘 규제된 자유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라는 법칙만 가지고 어린아이를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갈 줄 모른다면, 아이를 교육시킬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가능한 것의 범위도, 불가능한 것의 범위도 아이는 똑같이 알지 못하므로 아이의 주변에서 그 범위를 원하는 만큼 넓히거나 좁힐 수 있다. 또 필연성이라는 유일한 끈을 사용하여 아이가 불평하지 못하게 한 채 아이를 복종시키게 유도하거나 제지할 수 있다.

여러분의 제자에게 말로 하는 어떤 종류의 교훈도 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체험에 의해서만 교훈을 얻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처벌도 가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이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절대로 용서를 빌도록 시켜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여러분에게 모욕을 주는 방법도 모를 테니까. 아이가 하는 행동에는 어떤 도덕성도 없기 때문에 아이는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 처벌이나 질책을 맏을 만한 행동을 결코 할 수가 없다.

귀족 가문의 자식과 농부의 자식을 한 방에 가두어보라. 전자는 후자가 제자리를 뜨기도 전에 모든 것을 뒤엎고 부수어놓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후자가 결코 한순간의 방종을 서둘러 이용하지 않는 데 반해, 전자는 서둘러 그 순간을 남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감히 한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가 구상하고 있는 본보기를 자기 안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아이가 아직 아무거도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은 아이에게 접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가 보아서 좋은 대상들만을 최초로 볼 수 있도록 조처할 시간이 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도록, 여러분 자신을 존경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고, 무엇보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하라. 여러분이 아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스승이 되지 못한다면 아이의 스승도 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그만둬라. 아이들이 목격하는 악은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르치는 악보다 그들을 덜 타락시킨다.

나는 사회 속에서 어린아이가 12세가 될 때까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와 인간 행위의 도덕성에 관해 어떤 관념도 심어주지 앟은 채 그를 지도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개념들이 가능한 한 늦게 아이에게 필요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또한 그러한 개념들이 불가피해질 경우 아이가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또 조심성 없이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그 개념들을 현재의 유용성으로 제한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둘러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 급하게 요구할 것이 없어져서 여유를 갖고 적절한 시기가 되었을 때만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면 아이는 조금도 나빠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움을 얻는 셈이다. 하지만 경솔한 교사가 어떻게 처신할지 몰라 아이에게 매 순간 이것저것 분별없이 아무렇게나 도를 넘어 약속을 하게 하면, 온갖 약속에 짓눌려 지쳐버린 아이는 그 약속들을 등한히 하고 잊어버리고 마침내는 무시하게 되며, 약속을 죄다 헛된 형식적인 말로 간주하고 장난삼아 약속을 하고 어기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가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기를 바란다면 약속을 신중하게 요구하라.

인간은 모방을 잘 하며 동물조차도 그렇다. 모방의 취향은 질서정연한 자연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속에서 악덕으로 변질된다. 원숭이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인간을 모방하지 그 자신이 무시하는 다른 동물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보다 나은 존재가 하는 행동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반대로 인간들에게서는 온갖 종류의 광대들이 아름다운 것을 타락시키기 위해 또는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모방한다. 그들은 천박한 감정을 가지고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필적하려고 애쓴다. 그들이 찬미하는 것을 모방하려고 애쓸 때도 그들이 선택한 대상에서 모방꾼들의 잘못된 취향이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이 더 훌륭해지거나 현명해지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거나 자기 재능이 칭찬받기를 훨씬 더 원한다. 인간에게서 모방의 근거는 언제나 자기 밖으로 나가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욕망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겉치레의 선은 없이 살아가야 한다.

제3권
소년기(12세~15세)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삶의 과정 전체는 비록 무력한 시기이지만, 이 최초의 시기에도 힘의 발달이 욕구의 발달을 넘어섬으로써, 성장하는 동물이 아직 절대적으로는 약하지만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어떤 시점이 있다. 욕구들이 모두 다 발달한 것은 아니므로, 그가 지니고 있는 현재의 힘은 그가 가진 욕구들을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매우 나약할지 모르지만 어린이로서는 매우 강하다.
인간의 나약함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힘과 욕망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념이다. 우리는 정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망을 줄이면, 그것은 여러분이 힘을 늘리는 것과도 같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여분의 힘을 지닌 셈이다. 그는 분명 아주 강한 존재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세 번째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은 넘치게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는 모자라게 될, 남아도는 역량과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필요할 때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에 그것을 사용하려고 애쓸 것이다. 즉 그는 현재 자기 존재의 여분을 미래에 투입할 것이다. 자신이 얻은 것을 진정으로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놓아두는 곳은 바로 자신의 팔 안, 머릿속, 자기 자신 속이다. 이 때가 바로 일과 학습과 공부를 해야 할 시기인데, 이런 선택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내가 아니며, 그 시기를 지시하는 것은 자연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그러나 도구와 책을 가지고 외딴 섬에 유배되어 여생을 그소에서 혼자 보낼 수 밖에 없는 것이 확실한 철학자를 가정해보라. 그는 더 이상 세계의 체계니 인력의 법칙이니 미분법이니 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마 평생 책이라곤 단 한 권도 펼쳐 보지 않겠지만, 그가 있는 섬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섬 구석구석까지 살펴보는 일은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되지 않는 지식들은 우리의 최초 연구에서 또 다시 몰아내고, 본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게 되는 지식들에만 국한하자.
인류의 섬은 지구다.

지성의 세계는 아직 우리에게 미지의 것인 만큼 우리의 사유는 우리 눈보다 멀리 나아가지 못하며, 우리의 이해력은 그것이 가늠하는 공간과 더불어서만 확장된다. 우리의 감각을 관념으로 변형시키자. 그러나 감각적인 대상들에서 지적인 대상들로 단번에 뛰어넘지는 말자. 우리가 후자에게 이르게 되는 것은 전자를 통해서다. 정신의 첫 번째 작용에서 감각들이 언제나 안내자가 되게 하라. 세상 외에 다른 책은 없고 사실 외에 다른 가르침은 없다. 읽을 줄 아는 아이는 생각하지 않고 읽기만 한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낱말만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의 제자가 자연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게끔 만들면 곧 그는 호기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호기심을 키워주기 위해서라면 결코 서둘러 호기심을 충족시켜서는 안된다. 아이의 이해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문제들을 내주고, 그가 그 문제들을 풀게 내버려둬라. 무엇이든, 여러분이 그에게 말해주었기 떄문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알게 해줘라.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창안해내게 만들라. 언젠가 여러분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이성을 권위로 대체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추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평판의 노리개에 불과해질 것이다.

아이가 말만 듣고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라. 아이가 좋다고 느끼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그에게 좋지 않다. 여러분은 아이를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앞서 나가게 하면서 여러분이 선견지명을 발휘하고 있는 듯이 생각하지만, 바로 그 선견지명이 여러분에게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결코 이용하지 못할 쓸데없는 도구를 그에게 갖추어주느라, 여러분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 도구인 양식을 그에게서 빼앗고 있다. 아이가 늘 끌려다니며 남의 손에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도록 길들이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이가 어렸을 때 유순하기를 바란다. 이는 그가 커서 귀가 얇고 속기 쉬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이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두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을 여러분이 하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여러분이 공부하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을 위해서다" 그를 현명하게 만들기 위해 지금 해주는 이 모든 근사한 말로써, 여러분은 장차 온갖 종류의 환상가나 연금술사, 협잡꾼, 위선자, 미치광이가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또는 그에게 자신의 터무니없는 짓거리들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그에게 건넬 말이 성공적으로 먹혀들게끔 미리 준비시켜두는 셈이다.

여러 기술에는 그것들의 실제적인 유용성에 반비례하여 주어지는 공적인 평가가 있다. 이러한 평가는 그것의 무용성 자체에 정비례하여 내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당연하다. 가장 유용한 기술은 돈을 가장 적게 버는 기술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수는 사람들의 요구에 비례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노동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도 지불할 수 있는 값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로지 한가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장인이라 불리지 않고 예술가로 불리는 대단한 사람들은 자신의 하찮은 작품에다 제멋대로 값을 매긴다. 이 쓸데없는 작품들의 가치는 오로지 평판에만 따르므로 그 값 자체가 가치의 일부를 이루며, 사람들은 그 가격에 비례하여 그것들을 평가한다. 부자가 그것을 존중하는 것은 그것의 쓸모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는 그 값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사물들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를 가르쳐라. 그 다움에 우리 눈에 그 사물들이 어떻게 비치는지 가르쳐주도록 하라.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평판을 진리와 비교할 줄 알게 되고 속된 군중을 넘어설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편견을 받아들이면 편견을 알아보지 못하게 디고, 민중을 닮게 되면 그들을 이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대중의 평판을 평가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대중의 평판을 가르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면, 여러분이 어떤 수를 쓰든 그 여론이 아이의 의견이 되고 말아 다시는 그것을 없애지 못하리라는 점을 명심하라. 내 결론은 젊은이를 분별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면 그에게 우리의 판단을 강요하는 대신 그의 판단력을 잘 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 앞에 자연과 기술의 산물들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살펴보게 하면, 또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호기심에 끌려가는 그를 뒤쫓아가면, 그 아이의 취미와 기질과 성향을 연구할 수 있는 이점과 아울러 그가 어떤 타고난 재능을 분명히 가졌다면 그것의 최초의 불꽃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이점도 있다. 하지만 여러분이 경계해야 할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우연한 결과를 열의에 찬 재능 탓으로 돌리고, 인간과 원숭이에 공통된 것으로서 무엇에 소용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자신이 본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모방 정신을 이런저런 기술에 대한 뚜렷한 소질로 간주하는 일이다.
세상에는 자신이 행하는 기술에 타고난 재능도 없으면서,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떠밀려 그 일을 하게 된 장인들, 특히 예술가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정들 때문에 결정을 내리고는 그들을 부추기거나, 그들이 전혀 다른 기술을 보았다면 곧 마찬가지로 그들을 그 기술로 이끌어갔을 표면적인 열성에 속아 그들을 부추기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북소리만 들어도 자신을 장군인 양 여긴다. 또 어떤 사람은 건물 짓는 것만 보고 건축가가 되고 싶어한다. 누구나 자신이 본 직업이 존경받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끌리는 것이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것과 그 일에 적합한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자신의 소질보다는 욕망을 훨씬 더 드러내 보이는 아이, 또 사람들이 소질을 연구할 줄 몰라서 늘 욕망을 보고 판단하는 아이의 진정한 재능과 취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제4권
(15세~20세)

이 지상에서 우리의 삶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가! 인생에서 처음의 4분의 1은 어떻게 인생을 활용하는지 채 알기도 전에 흘러갔고, 그 후 마지막 4분의 1 역시 인생의 즐거움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지나가버린다. 처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전혀 모르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젠 살아갈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쓸모없는 최초 시기와 최후 시기에 끼인 기간에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의 4분의 3은 수면, 노동, 고통, 억압 등 온갖 종류의 괴로움으로 소진된다.
인생은 짦은데, 그 이유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시간밖에 못 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중에서도 인생을 향유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이 탄생의 순간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동안의 기간을 잘 채우지 못했을 때 인생이란 항상 너무나 짧은 것이다.

제1준칙
인간의 마음으로는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의 편에서 생각할 수 없다. 단지 자기보다 더 동정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처지에 설 수 있을 뿐이다.

이 준칙에 예외가 있다해도 그것은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그럴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애착을 갖는 부자나 귀족의 위치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진실로 애정을 갖는 경우에도 단지 그들의 행복의 일부분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 불과하다. 때로 사람들은 그가 불행한 처지에 있을 때 그를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잘 나가고 있는 한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그 겉모습에 속지 않고 그들이 순조롭게 성공하는데도 그를 부러워하기보다 동정하는 사람밖에 없다.
사람들은 어떤 상태의 행복, 이를테면 전원의 목가적인 생활의 행복에는 감동을 받는다. 그 선량한 사람들이 행복한 것을 보면서 느끼는 선망에 의해서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 평화롭고 순박한 상태로 내려가 똑같이 행복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복을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즐길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것은 오로지 유쾌한 생각만을 불러일으키는 최후의 자산이다. 그것을 사용할 생각이 없을 때라도,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자산을 보고 자기 자신의 재산을 생각하는 데는 언제가 기쁨이 따른다.
그러므로 젊은이를 인간애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운명을 찬미하게 만드는 대신 그것을 비참한 측면에서 보여주어 그가 화려한 운명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그는 남이 걸어온 길과는 다른 행복의 길을 개척하게 될 것이다.

제2준칙
사람은 자기도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동정하지 않는다.

어째서 왕들은 자기 신하들에게 대해 동정심이 없는가? 그것은 그들 자신이 절대로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인정이 없는가? 가난한 사람이 될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귀족은 민중을 그토록 경멸하는가? 귀족은 결코 평민이 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 터기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친절한가? 완전히 전제적인 터키 정부에서는 개인의 권세와 부가 항상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서 사람들이 몰락이나 비참함을 전혀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학생에 불행한 사람의 고통이나 불쌍한 사람의 노고를 그가 영예를 누리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습관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그들을 동정하도록 가르치려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들의 모든 불행이 그의 발치에 있다는 것, 또 예측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수많은 사건들이 언제라도 그를 그런 상태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에게 잘 이해시켜야 한다. 그에게 운명의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그보다 더 높은 신분에 있다가 불행한 사람들보다 더 낮은 신분으로 떨어져버린 사람들의 실례를 찾아주어라.
모든 인간들을 끊임없이 둘러싸는 위험들로 그의 상상을 뒤흔들어 겁을 먹게 하라.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이 모든 심연들을 보게 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그 심연들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그곳에 떨어질까 두려워 여러분의 가슴에 매달리도록 하라. 여러분은 우리가 그를 소심한 겁쟁이로 만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중에 보도록 하고, 여하간 지금은 그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제3준칙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동정심은 그 고통의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감정으로 측정된다.

우리가 불행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동정받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한에서만 그렇다. 우리가 받는 고통에 대한 육체적 느낌은 보기보다 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통의 지속을 느끼게 해주는 기억력과 고통을 미래로 연장하는 상상력을 통해 고통은 우리를 정말 동정받을 만한 존재로 만든다. 인간과 동물에게 공통적인 감성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과도 동일시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의 고통보다 동물의 고통에 대해 더 무감각하게 만드는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풀을 뜯고 있는 양이 곧 도살될 것을 알면서도 동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이 자기 운명을 예견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의미를 넓혀서 말하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인간들의 운명에 무감각해진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면서도 그들은 우둔하니까 그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위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나는 각자가 자기와 같은 인간들의 행복에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지는 그가 인간들에게 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경의 정도에 따라 알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경멸하는 사람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정치가가 그렇게 경멸하는 투로 민중에 대해 말하고,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을 그렇게 사악한 존재로 취급하고 싶어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의 현자들이 말하기를, 모든 신분에는 동일한 양의 행복과 고통이 있다고 한다. 해롭고 참을 수 없는 격언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행복하다면 누군가를 위해 애쓸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해야 한다. 노예는 학대받고 병약자는 고통을 겪고 거지는 죽게 하라. 그들이 처지를 바꾼다 한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현자들은 부자의 괴로움을 열거하고 그가 누리는 허무한 쾌락이 덧없음을 보여준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궤변인가! 부자의 괴로움은 그 신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용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불행하다 해도 그는 조금도 가엾을 것이 없다. 그의 불행은 모두 자기 탓이고, 행복해지는 것도 그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고통은 세상사에서, 그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혹한 운명에서 온다. 그에게 피로와 쇠진과 배고픔에서 오는 육체적 느낌을 없애줄 수 있는 습관은 전혀 없다. 뛰어난 정신과 지혜도 그가 놓인 처지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모면케 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피, 상처, 비명, 신음, 고통을 주는 수술 도구 등 감각에 고통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모두 더 일찍부터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파멸의 관념은 좀더 복합적이기 때문에 똑같은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죽음의 이미지는 더 나중에야 또 약하게 충격을 준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기가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이미지가 정신 속에서 제대로 형성된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무서운 광경은 없다. 그때 죽음의 이미지가 감각을 통해 부여하는 완전한 파괴라는 관념때문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모면할 길이 없다고 확신하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좀더 강렬한 충격을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나치게 겉모습으로 행복을 판단한다. 우리는 조금도 행복이 없는 곳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는다. 명랑함은 단지 행복의 매우 모호한 표시에 불과하다. 명랑한 사람은 흔히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마음을 딴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불행한 사람일 뿐인 경우가 많다. 모임에서는 그렇게도 잘 웃고 호방하고 평온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기 집에서는 침울하고 잔소리가 많아, 그들이 사교계에 제공하는 재미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은 하인들이다. 진정한 만족감은 명랑한 것도 쾌활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감미로운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즐기면서, 그것을 생각하고 음미하며 밖으로 발산하는 것을 꺼린다. 진정 행복한 인간은 거의 말하지도 거의 웃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행복을 자기 마음 둘레에 집중시킨다. 소란한 놀이나 떠들썩한 즐거움은 싫증과 권태로움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우수(憂愁)는 기쁨의 친구다. 감동과 눈물은 가장 감미로운 즐거움을 동반한다. 그리고 극도의 기쁨 자체는 환호성보다 눈물을 이끌어낸다.

처음에는 수많은 갖가지 다양한 오락이 행복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한결같이 단조로운 생활이 처음에는 권태로운 듯 여겨지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로 영혼의 가장 유쾌한 습관은 욕망과 싫증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향락의 절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욕망의 불안정은 호기심과 변덕을 낳고, 야단스러운 쾌락의 공허함은 권태를 낳는다. 사람들은 좀더 유쾌한 상태를 알지 못할 때 결코 자기 상태에 대해 지겨워하지 않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야만인이 가장 호기심이 적고 가장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사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즐긴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생을 보내지만, 결코 지루한 줄을 모른다.
사교계의 사람은 완전히 가면속에 있다. 그는 거의 자신의 내면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방인이고, 그래서 부득이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면 불편을 느낀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그에게 전부다. 

일반적으로 난잡한 생활에 빠질 능력이 생기자마자 그런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보다는 젊었을 무렵 너무 이른 타락으로부터 보호되었던 사람들에게서 더욱 풍부한 영혼의 활력이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품행이 방저한 민족들이 그렇지 못한 민족들보다 보통 양식이나 용기에서 더 뛰어난 이유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후자는 그들이 재치니 명민함이니 섬세함이라고 부르는 어떤 사소하고 세세한 자질에서만 뛰어나다. 그러나 훌륭한 행위와 미덕, 또 참으로 유익한 배려를 기주능로 인간을 우대하고 존경하는 지혜와 이성의 위대하고 고귀한 작용은 거의 전자 외에서는 볼 수 없다.

만약 여러분이 그에게 베풀었던 보살핌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복종을 요구한다면, 그는 여러분이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여러분이 아무런 대가 없이 친절히 돌보아주는 척하면서 그에게 빚을 지게 만들고 그가 전혀 동의한 적이 없는 계약으로 그를 묶어놓으려 했다고 마음속으로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덧붙여 말해본들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한 가난한 사람이 누군가 그에게 거저 주는 줄을 알고 돈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징집을 당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부당하다"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의 학생이 전혀 수락한 적이 없던 보살핌에 대해 그 값을 치르라고 요구한다면 여러분이 훨씬 더 부당하지 않겠는가?

자신과 동류인 인간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관점을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가 갖는 커다란 결정들 중 하나는 그것이 인간을 좋은 측면에서보다 나쁜 측면에서 훨씬 많이 묘사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혁명이나 커다란 격변이 있는 동안만 흥미를 끌기 때문에, 어떤 국민이 평화로운 통치 아래 아무 일도 없이 성장하고 번영하는 동안에는 그 국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역사가 그 국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은 오로지 그 국민이 더 이상 자족할 수 없어서 자기 이웃 나라들의 문제에 끼어들거나 자기 이웃 나라들이 자기 나라의 일에 끼어들게 내버려둘 때뿐이다. 역사는 어떤 국민이 이미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 때만 그 국민을 유명하게 만든다. 우리의 모든 역사는 그것이 끝나야만 할 때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멸망하고 있는 국민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정확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번영을 이루고 있는 국민들의 역사다. 그들은 역사가 그들에 대해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충분히 행복하고 현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가장 잘 운영되고 있는 정부란 사람들의 입에 가장 덜 오르내리는 정부임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쁜 것밖에 모른다. 선이 역사에 남는 일은 거의 없다. 유명해지는 것은 악인뿐이며, 선인은 잊혀지거나 웃음거리가 된다. 바로 이렇게 역사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인류를 계속 중상모략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역사에 기술된 사실들은 그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된 것이 전혀 아니가. 그것들은 역사가의 머릿속에서 모습을 바꾸고, 그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물러지고, 그가 갖는 편견에 의해 착색된다. 어느 누가 어떤 사건을 그것이 일어났던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독자를 그 현장에 정확히 옮겨놓을 수 있겠는가? 무지나 편파성이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심지어 역사의 윤곽은 하나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관련된 상황들을 늘리거나 줄이면서 거기에 얼마나 다른 모습을 부여할 수 있는가! 같은 것이라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테지만, 바뀐 것이라고는 보는 사람의 눈밖에 없다. 나무가 하나 더 있었다든지 없었다든지, 바위가 오른쪽에 있었다든지 왼쪽에 있었다든지, 바람에 의해 먼지 회오리가 생겼다든지 하는 그런 일들이,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얼마나 여러번 전투의 결말을 결정지었겠는가! 그럼에도 역사가는 자기가 모든 곳에 있었던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패배와 승리의 원인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보기에는 소설들과 역사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소설가가 자기 자신의 상상력에 좀더 탐닉하고 역사가가 다른 사람의 상상력에 더 따른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리고 덧붙여 소설가는 좋든 나쁘든 어떤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있지만 역사가는 거기에 거의 관심이 없다고 말하겠다.
젊은이에게 최악의 역사가란 판단을 내리는 역사가다. 오직 사실을 보여주고,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간들을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저자의 판단이 끊임없이 젊은이를 인도하면, 그는 계속 작가의 눈을 통해 보며, 그 눈이 없을 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을 믿어야 한다' 이 잘못 이해된 교의는 잔인한 불관용의 원리이고, 인간의 이성에 말로 때우는 습관을 들게 해서 그것에 치명타를 가하는 모든 헛된 가르침들의 원칙이다.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한 자격을 갖기 위해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몇 마디 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천국은 어째서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찌르레기나 까치로 우글거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린아이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신앙은 지리상의 문제다. 그들이 메카보다는 차라리 로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때문에 상을 받겠는가? 마호메트가 신의 예언자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마호메트를 신의 예언자라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마호메트를 사기꾼이라는 말을 듣고 마호메트를 사기꾼이라고 한다. 이들이 서로 자리가 바뀌게 되면 저마다 상대방이 주장하는 것을 자기가 주장했을 것이다. 그렇게 비슷한 성향을 갖는 사람 둘을 놓고, 한 사람은 천국으로 또 다른 사람은 지옥으로 보낼수 있겠는가?

우리는 철이 들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라면 누구도 영원한 행복을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톨릭 신자들도 세례를 받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비록 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결코 없었다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신을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어린 시절이든 심신이 상실될 때든 인간의 정신이 신을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작용을 할 수 없을 때 생긴다.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신을 믿지 않고 노년을 맞은 사람이라도 그의 무분별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ㅡ나는 무분별이 항상 자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ㅡ신을 믿지 않았다고 내세의 삶을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도 병에 걸려 정신적 능력은 상실했지만 인간의 자격, 그러니까 창조자의 은혜를 받을 권리는 상실하지 않은 미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부터 모든 사회에서 격리된 채 완전히 야만적인 삶을 살아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얻게 되는 지식이 결여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왜 그럿을 인정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이와 같은 야만인이 진정한 신을 인식하는 데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양시킬 수 있기란 분명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우리에게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고의로 저지른 잘못에 의해서만 처벌받을 수 있으며, 불가항력적인 무지는 그 사람의 죄로 돌릴수 없다고 말한다.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

나는 사람들이 놀라울 만큼 다양한 의견들을 갖게 되는 으뜸가는 원인이 인간 정신의 불충분함이며, 오만함이 버금가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우주라는 이 거대한 기계를 측정하는 척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그 관계들을 산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최초의 법칙도 또 궁극적 목적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몰라서 자신의 본성과 활동 원리 또한 알지 못한다. 또 우리는 인간이 단일한 존재인지 복합적 존재인지도 거의 모른다. 어디서나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것들은 감각의 영역을 넘어선 곳에 있다. 그것들을 꿰뚫어보기 위해서 우리는 지성을 가졌다고 믿지만 우리에게는 단지 상상력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각자 이 상상의 세계를 가로질러 가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개척해나간다.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목적지에 이르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기를 원하며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한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우리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없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하기보다는 되는 대로 생각을 결정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것을 믿기를 더 좋아한다. 그 한계를 파악할 수 없는 위대한 전체의 작은 일부분인 우리가, 이 위대한 전체를 만든 존재가 그것을 우리의 어리석은 논의에 내맡겨두었다 하여, 정말 건방지게도 이 전체가 그 자체로 무엇이며 그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또 무엇인가를 결정하려 드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 중 누가 진리에 관심을 가지려 하겠는가? 철학자들은 저마다 자기 체계가 다른 사람들의 체계보다 더욱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제각기 그 체계가 자기 것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을 알게 된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 의해 발견된 진리보다 자기가 발견한 거짓말을 더 좋아하지 않는 철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슨 권리로 사물을 판단하며, 또 나의 판단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받아들이는 인상들에 의해서 나의 판단이 어쩔수 없이 끌려 다닌다면, 나는 이러한 탐구 때문에 쓸데없이 고생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탐구는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거나, 내가 그것을 수행할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나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도구를 알고,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신뢰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영향을 받는다. 바로 이것이 내가 강렬하게 느끼는 최초의 진리인데,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존재에 대한 고유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감각을 통해서만 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일까?
나의 감각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내 존재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감각이 내가 좋든 실든 나에게 작용하고 그 감각을 만들거나 없애거나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원인은 나와 무관하다. 그러므로 나는 '나'라고 하는 내 내부의 감각이 나의 외부에 있는 감각의 원인이나 대상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밖의 존재들, 즉 내 감각의 대상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이 단지 관념들에 불과하다고 해도 어쨌든 그러한 관념들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진실이다.

비록 세계의 목적을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는 판단한다. 왜냐하면 이 질서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부분들을 그것들끼리만 비교하고, 그 부분들의 협력과 관계를 연구하고, 그 조화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우주가 존재하는 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우주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 돕고 있는 내밀한 조화를 지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마치 뚜껑이 열린 시계를 보고, 그 시계의 사용법도 모르고 전에 문자판을 본 일이 없는데도 그 제작물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람과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이 전체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각각의 부속이 또 다른 부속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안다. 나는 제작자가 만든 제작물의 세부를 보고 그를 찬양한다. 그리고 나는 톱니바퀴들 모두가 오로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이렇게 일치 협력해서 움직인다고 정말 확신한다. 비록 내가 그 목적을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말이다."
개개의 목적, 수단, 모든 종류의 질서정연한 관계들을 비교해보자. 그리고 나서 내면의 감정에 귀를 귀울이자. 건전한 정신이라면 어떻게 이러한 감정의 증언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기 때문에 신이 나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감정으로 어쩔수없는 경우만 제외하고는, 결코 신의 본성에 대해 추론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항상 무모한 법이어서, 현명한 인간이라면 그런 추론에 빠져들 때는 언제나 불안에 떨며, 자신이 그것을 파고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신성에 대해 최대의 모독은 신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속송들 중 나에게 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들을 발견한 후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와, 신이 다스리는 그리고 내가 검토할 수 있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탐색한다. 나는 내가 속한 종으로 볼 때 명백히 최고의 지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를 둘러싼 물체들은 오직 물리적 운동량만을 갖고 나의 뜻에 거역하여 나에게 작용을 가하지만, 나는 내 의지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내 능력 범위 내에 있는 도구들을 갖고 나를 둘러싼 물체들에 작용을 가하고 또 내 뜻대로 그 물체들의 활동에 동참하거나 동참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물체들 중 어떤 것보다 더욱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나의 지성에 의해 모든 것을 조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제외하고 어떤 존재가 다른 모든 것들을 관찰할 줄 알고, 그것들의 운동과 결과를 측정하고 계산하고 예측할 줄 알며, 이를테면 보편적인 존재의 느낌을 자기 개인적인 존재의 느낌에 결부시킬 줄 알겠는가? 내가 모든 것을 자신과 결부시킬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들 그것이 그토론 가소로운 일이겠는가?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는 원인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의 지적인 능력이고 그의 판단력이다. 결정하는 원인은 인간 자체에 있다. 그것을 넘어서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확실히 나는 내 마음대로 내게 좋은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내게 나쁜것을 원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유는, 나와 무관한 것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접갛ㅂ한 것이나 그렇다고 판단되는 것밖에는 원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그러니 내가 마음대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해서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잠깐 두 사람에게 논쟁을 시켜보자.

영감을 받은 사람 : 이성은 당신에게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신의 이름으로 전체보다 큰 것이 부분이라고 당신에게 가르친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그런데 시이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고 나에게 감히 말하다니,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이성으로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신과 신의 이름으로 부조리한 것을 공포하는 당신 중 되도록이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영감을 받은 사람 : 나를 믿어라. 나의 가르침이 더욱 실증적이고, 또 나는 당신에게 나를 보내신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반박할 수 없게끔 당신에게 곧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뭐라고? 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당신을 보낸 것이 신임을 당신이 나에게 증명하겠다고? 당신은 어떤 종류의 증거를 들어 신이 나에게 부여한 이해력에 의해서보다 그대의 입을 통해 신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나를 설득시키려고 하는가?

영감을 받은 사람 : 신이 당신에게 준 이해력이라고? 허영심 많지만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 이전에도 죄를 짓고 타락한 자신의 이성 속에서 길을 헤매는 불신자들 중 단신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신이 보낸 인간이여, 당신이야말로 자신의 거만함을 자기가 맡은 사명의 증거로 내세우는 사기꾼들 중 처음은 아닐것 같은데.

영감을 받은 사람 : 뭐라고! 철학자들도 욕을 하는가?

이성을 따르는 사람 : 때때로. 성직자들이 철학자들에게 그 본보기를 보일 때는 말이다.

영감을 받은 사람 : 오! 나야말로 욕을 할 권리가 있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기 때문에.

이성을 따르는 사람 : 당신의 특권을 휘두르기 전에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제시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영감을 받은 사람 : 나의 자격은 틀림없다. 천지가 나를 위해 증언하리라. 제발 나의 추론을 잘 들어주길 바란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당신의 추론이라고! 농담이겠지. 나에게 내 이성을 속인다고 가르치는 것은 내 이성이 당신을 위해 나에게 해줄 말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가? 이성을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설득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추론으로써 나를 설득했따면, 당신이 내게 하는 말에 나를 복종케 하는 것이 죄로 인해 타락한 나의 이성인지 아닌지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게다가 증거라든지 증명이라는 것으로 자명한 이치를 타파해야 한다고 하는데, 자명한 이치보다 더 명백한 어떤 증거나 증명을 당신이 사용할 수 있겠는가? 부분이 전체보다 더 크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올바른 삼단논법이 거짓이라는 것도 똑같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을 받은 사람 :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의 증거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초자연적이라고! 그 말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영감을 받은 사람 : 자연의 질서에서 생겨나는 변화, 예언, 기적, 온갖 종류의 이적을 말한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이적과 기적이라! 나는 그런 것은 도무지 본 적이 없다.

영감을 받은 사람 : 당신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 구름 떼처럼 많은 증인들,,,, 많은 민족들의 증언...

이성을 따르는 사람 : 그 민족들의 증언이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하는가?

영감을 받은 사람 : 아니다. 그러나 그 증언이 일치하면 그것은 반박할 여지없이 확실하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이성의 원칙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으며, 사람들의 증언을 근거로 부조리한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시 한번 초자연적인 증거들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인류 전체가 증언한다 해서 그것이 초자연적인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영감을 받은 사람 : 오 냉담한 마음이여! 은총이 당신에게 전혀 말씀하시질 않는다.

이성을 따르는 사람 :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 말에 따르면 은총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미 은총을 받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총 대신 당신이 내게 말을 시작해보아라.

영감을 받으 사람 : 아,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인데,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예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성을 따르는 사람 : 먼저 말하건대, 나는 기적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예언을 들은 적도 없다. 그에 덧붙여 어떤 예언도 나에게는 권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둔다.

영감을 받은 사람 : 악마의 추종자여! 어째서 예언이 당신에게는 권위가 없는가?

이성을 따르는 사람 : 왜냐하면 이성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한데 그것들이 일치하기는 불가능하기 떄문이다. 즉 나는 그 예언을 들었던 증인이어야 하고, 그 사건을 본 증인이어야 하고, 그 사건이 우연히 그 예언과 일치할 수 없었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예언이 기하학의 공리보다 더 정확하고 명백하고 명쾌했다 할지라도, 되는대로 행해진 예언의 명백성이 그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 그 예언이 설령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그 예언을 했던 사람에게 유리한 아무런 증명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말하는 이른바 초자연적인 증명이니 기적이니 예언이니 하는 것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보라. 그것은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거하여 이 모든 것을 믿고, 우리의 이성에 말하는 신의 권위를 사람들의 권위에 복종시키는 꼴이 된다. 만약 나의 정신이 이해하는 영원한 진리가 무엇인가로부터 침해당할 수 있다면, 나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종류의 확실성도 없을 것이고 당신이 나에게 신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확신하기는 커녕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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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잘못 중 하나는 마치 인간이 정신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지나치게 있는 그대로의 이성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상상력에 호소하는 표징의 언어를 소홀히 함으로써 사람들은 언어들중 가장 힘찬 언어를 잃어버렸다. 말이 주는 인상은 언제나 약하다. 그리고 귀를 통해서보다는 눈을 통해서 마음에 훨씬 잘 파고들 수 있다. 추론에 모든 것을 부여하려고 하면서, 우리는 교훈을 말에만 그치고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따. 이성 혼자서는 조금도 활동적이지 않다. 이성은 가끔 제지하기는 하지만 여간해서는 부추기지 않으며, 어떤 위대한 일을 한 적이 없다. 항상 따지기만 하는 것은 소인들의 편집증이다. 강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정말 다른 언어를 갖고 있다. 사람을 설득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를 통해서다.
내가 보는 바로는,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더 이상 힘과 이익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면, 고대인은 표징의 언어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과 영혼의 감동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움직였다. 모든 협정은 엄숙하게 이루어져 그것을 지키지 않는게 더욱 어려웠다.
통치에서는 왕권의 엄숙한 장식이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위험의 표시물들, 왕좌, 왕홀, 자줏빛 곤룡포, 왕관, 왕이 이마에 두른 띠는 그들에게 신성한 물건이었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이러한 표징은 그것으로 장식하고 나타나는 사람을 그들에게 존엄한 존재로 만들었다. 병사가 없어도 위협을 가하지 않아도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성들은 그에게 복종했다. 이와 같은 표징을 없애려고 하는 지금, 이러한 무시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왕의 위엄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국왕들은 이제 군대의 힘만으로 복종을 얻어내며 백성들의 존경은 단지 징벌을 두려워하는 데서 생기고 있다. 국왕들은 더 이상 왕관을 쓸 필요도 없고, 고관들은 고위직을 나타내는 표시물을 부착할 필요도 없지만, 명령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십만의 상비군을 두고 있어야 한다.

고대인들이 웅변으로 해낸 일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러한 웅변이 단지 잘 늘어놓은 미사여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연설가가 최소한의 말로 이야기했을 때보다 웅변이 더 큰 효과를 낸 적은 결코 없었다. 가장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은 말이 아니라 표징에 의해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말로 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눈앞에 제시되는 대사은 상상력을 일으키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앞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정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종종 그 대상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말해진다.

젊은이들과는 결코 무미건조하게 이치를 따지려 들지 말라. 여러분이 그에게 이성을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이성에 살을 붙이는 것이 좋다. 정신의 언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의 마음을 거쳐가게 만들어라. 되풀이 말하지만 냉정한 논거는 우리의 견해를 결정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믿게 할 수는 있겠지만 행동하게 만들 수는 없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는 입증되지만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는 입증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면, 아직 감각에 둘러싸여 있는 그리고 상상하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는 더군다나 그렇다.

내 교제 관계의 유일한 유대는 상호간의 애정, 취미의 일치, 성격의 합치일 것이다. 나는 부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거기에 전념할 것이다. 만약 부유해지더라도 나에게 얼마간이나마 인정이 남아 있다면 나는 봉사와 선행을 널리 베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주위에 사교 모임을 갖고 싶지 궁정을 두고 싶은 것은 아니며, 친구들을 갖고 싶지 내게서 후원을 받는 사람을 두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는 나와 함께 회식하는 사람들의 후원자가 아니라 그들을 접대하는 집주인이 될 것이다. 독립과 평등으로 인해 내가 맺고 있는 교우 관계에서는 천진난만한 호의가 고스란히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무나 이해관계가 쓸데없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곳에서는 기쁨과 우정만이 지배할 것이다.
친구나 애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법이다. 돈을 갖고 여성을 손에 넣기란 쉬운 일이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어떠한 여자의 애인도 결코 될 수 없다. 사랑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돈은 반드시 사랑을 사라지게 만든다. 돈을 내는 남자는 그가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남자라 할지라도 돈을 지불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오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다른 남자 대신에 돈을 내게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남자가 그의 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사욕과 방탕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래서 사랑도 명예도 진정한 기쁨도 없는 이와 같은 이중 관계에서, 탐욕스럽고 부정하고 가련한 여자는 자기에게 돈을 주는 바보같은 남자를 그녀가 대하는 것과 같은 그런 대우를 돈을 받는 그 비열한 남자에게서 돌려받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두 남자들에 대해 주고받을 것이 없는 상태에 있게 된다. 나는 사랑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애인에 대한 이러한 성향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꼭 한 가지 알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고 그 다음부터는 그녀에게서 부양을 받는 일이다. 남은 문제는 이런 방법을 써도 괜찮을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쾌락을 독점하면 쾌락은 사라지는 법이다. 진정한 기쁨은 민중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다. 자기 혼자 갖고 싶어하는 기쁨은 이내 사라지게 마련이다. 내 공원 둘레에 담을 쌓아 올려 그곳이 음산한 출입 금지구역이 된다면, 나는 많은 비용을 들여 단지 산책의 즐거움을 자신에게서 빼앗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어쩔수 없이 산책의 즐거움을 찾아 먼 곳까지 가야 하는 내 꼴을 보라. 소유권이라는 마물은 그것이 만지는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부자는 어디서나 주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자신이 주인이 아닌 곳에서만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에게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부자가 된다 해도 내가 가난하던 시절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할 것이다.

제5권

사람들은 인생이 짧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려고 애쓰는 듯 하다. 시간을 이용할 줄 몰라 시간이 빨리 지나감을 한탄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시간이 사람들 뜻에 따라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듯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로만 생각이 가득 차서 자신과 목표 사이의 간격을 애석해하며 바라본다. 누구는 내일이 되기를, 누구는 다음달이 되기를, 또 누구는 10년 후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도 오늘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도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모두 현재가 너무 느리게 지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시간을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한탄할 때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여, 자연을 비방하기를 결코 멈추지를 않을 것이가? 인생이 여러분이 바라는 만큼 짧은 것이 아닌데, 왜 인생이 짧다고 한탄하는가?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지 않을 정도로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이 너무 짧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즐긴다는 것은 그에게 똑같은 것이 되어, 설령 젊어서 죽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기 생을 만끽한 채 죽을 것이다.

우리는 파발꾼이 아니라 나그네로서 여행하고 있다. 우리는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있는 간격도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여행 자체가 하나의 기쁨이다. 우리는 꽉 막힌 작은 감옥에 앉아 무기력하게 여행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야외의 공기도, 주위 사물들의 광경도, 마음이 내킬 때 그것들을 마음대로 바라보는 편의도 놓치지 않는다.
나는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유쾌한 여행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그것은 걸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원할 때 출발하고, 마음대로 멈추고, 내키는 만큼 많이도 적게도 걷는다. 그 고장 전체를 관찰하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우리의 마음에 드는 모든 것을 살펴보며 전망 좋은 곳에서 멈추어 선다. 강이 보이면? 강을 따라 간다. 우거진 숲이 보이면? 그 그늘 아래로 걸어간다. 동굴이 보이면? 그 안으로 들어가 본다. 마음에 드는 어느 곳에나 나는 머문다. 지겨워지면 곧 그곳을 떠난다. 말이나 마부에 매이지 않는다. 나는 잘 닦인 길도 편안한 길도 고를 필요가 없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지나간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고, 나 자신에게만 매여 있는 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모두 누린다. 날씨가 나빠 멈추어야 하거나 지겨워지면 그제야 말을 탄다.  

불확실한 인생에서는 무엇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그릇된 조심성을 피하도록 하자. 그것은 종종 앞으로 있지도 않을 것을 위해 지금 있는 것을 희생시키는 일이 된다. 너무나 애를 많이 쓰고도 행복해지기 전에 죽는 일이 없도록, 어느 나이에서나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자. 그런데 삶을 즐길 수 있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심신의 능력이 가장 큰 활기를 얻었고, 인생행로의 중간에 있어 사람에게 인생이 짧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출생과 죽음의 양 끝을 가장 멀리서 보게 되는 청년기의 끝 무렵이다. 무분별한 젊은이가 판단을 잘못 내리는 것은 즐기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이 없는 곳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며, 비참한 미래를 마련하느라 현재를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생이 짧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려고 애쓰는 듯 하다. 시간을 이용할 줄 몰라 시간이 빨리 지나감을 한탄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시간이 사람들 뜻에 따라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듯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로만 생각이 가득 차서 자신과 목표 사이의 간격을 애석해하며 바라본다. 누구는 내일이 되기를, 누구는 다음달이 되기를, 또 누구는 10년 후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도 오늘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도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모두 현재가 너무 느리게 지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시간을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한탄할 때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여, 자연을 비방하기를 결코 멈추지를 않을 것이가? 인생이 여러분이 바라는 만큼 짧은 것이 아닌데, 왜 인생이 짧다고 한탄하는가?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지 않을 정도로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이 너무 짧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즐긴다는 것은 그에게 똑같은 것이 되어, 설령 젊어서 죽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기 생을 만끽한 채 죽을 것이다.

우리는 파발꾼이 아니라 나그네로서 여행하고 있다. 우리는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있는 간격도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여행 자체가 하나의 기쁨이다. 우리는 꽉 막힌 작은 감옥에 앉아 무기력하게 여행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야외의 공기도, 주위 사물들의 광경도, 마음이 내킬 때 그것들을 마음대로 바라보는 편의도 놓치지 않는다.
나는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유쾌한 여행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그것은 걸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원할 때 출발하고, 마음대로 멈추고, 내키는 만큼 많이도 적게도 걷는다. 그 고장 전체를 관찰하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우리의 마음에 드는 모든 것을 살펴보며 전망 좋은 곳에서 멈추어 선다. 강이 보이면? 강을 따라 간다. 우거진 숲이 보이면? 그 그늘 아래로 걸어간다. 동굴이 보이면? 그 안으로 들어가 본다. 마음에 드는 어느 곳에나 나는 머문다. 지겨워지면 곧 그곳을 떠난다. 말이나 마부에 매이지 않는다. 나는 잘 닦인 길도 편안한 길도 고를 필요가 없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지나간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고, 나 자신에게만 매여 있는 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모두 누린다. 날씨가 나빠 멈추어야 하거나 지겨워지면 그제야 말을 탄다.

불확실한 인생에서는 무엇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그릇된 조심성을 피하도록 하자. 그것은 종종 앞으로 있지도 않을 것을 위해 지금 있는 것을 희생시키는 일이 된다. 너무나 애를 많이 쓰고도 행복해지기 전에 죽는 일이 없도록, 어느 나이에서나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자. 그런데 삶을 즐길 수 있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심신의 능력이 가장 큰 활기를 얻었고, 인생행로의 중간에 있어 사람에게 인생이 짧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출생과 죽음의 양 끝을 가장 멀리서 보게 되는 청년기의 끝 무렵이다. 무분별한 젊은이가 판단을 잘못 내리는 것은 즐기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이 없는 곳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며, 비참한 미래를 마련하느라 현재를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감정이 흔히 생각하는 만큼 자연적이지는 않다. 남자가 자기 아내를 사랑하게 하는 다정한 습관과, 그에게는 더 이상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대상의 공상적인 매력들로 그를 도취시키는 저 과도한 열정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자신만을 편애하기를 갈망하는 이러한 정념은, 모든 것을 요구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는 허영심이 언제나 부당한 데 비하여 요구하는 만큼 주는 사랑은 그 자체로 공정함으로 가득찬 감정이라는 점에서만, 허영심과 다르다. 게다가 사랑은 요구가 많을수록 쉽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랑을 야기하는 바로 그 환상으로 인해 사랑은 쉽게 사람을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이 불안하다면, 존경은 믿을만하다. 따라서 결코 존경 없는 사랑이 정직한 마음에 존재하였던 적이 없었는데, 누구든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서 자기가 존중하는 장점들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연령마다 사람을 움직이는 나름의 원동력이 있지만, 사람은 늘 동일하다. 10세 때는 과자에, 20세 때는 애인에, 30세 때는 쾌락에, 40세 때는 야망에, 50세 때는 탐욕에 이끌린다. 지혜만을 추구할 때는 언제인가? 자신도 모르게 지혜로 인도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목표로 그를 데려다주기만 한다면 어떤 길잡이를 이용하건 무슨 상관인가? 영웅들이나 현자들까지도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이러한 조공을 바쳐왔다.

기억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는 것이 큰 질병밖에 없듯이, 생활 태도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는 것으로는 커다란 정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우리의 취미나 성향이 변하더라도, 때로 매우 급작스럽기도 한 이러한 변화는 습관에 의해 누그러진다. 색깔들이 보기 좋게 빛이 바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성향에서도 능숙한 기술자라면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하고, 색조들을 녹여 혼합해야 하고, 어떤 색조도 튀지 않도록 몇 가지 색조를 작품 전체에 고루 펴놓아야 한다. 이러한 규칙은 경험으로 확인된다. 무절제한 사람들은 애정, 취미, 감정을 매일매일 바꾸어 지속적인 것이라고는 바꾸는 습관밖에 없다. 사지만 견실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자신의 오랜 습관으로 되돌아가, 어려서 좋아했던 즐거움에 대한 취미를 늙어서까지도 잃지 않는다.

어느 나라의 수도들이나 다 비슷하다. 그곳에서는 온갖 민족들이 뒤섞이고 온갖 풍습들이 뒤엉킨다. 국민들을 연구하러 갈 곳은 그런 곳이 아니다. 한 국민의 특성과 풍습을 연구하러 가야할 곳은 바로 외딴 지방인데, 그곳에서는 이동이나 거래가 적고 외국인들이 여행을 덜 오고 주민들이 이사를 덜 하고 재산과 신분의 변동도 덜 이루어진다. 수도는 지나가면서 보도록 하라. 하지만 지방은 멀리 찾아가서 관찰해보아야 한다. 프랑스인들이 있는 곳은 파리가 아니라 투렌이다. 영국인들은 런던에서보다는 머셔에서 더 영국인답고, 에스파냐 사람들은 마드리드에서보다 갈리시아에서 더 에스파냐 사람답다. 한 국민의 특성이 나타나고 그 국민이 다른 것과 뒤섞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서다. 그곳에서야말로 정부의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가 더 잘 느껴진다. 마치 좀더 큰 반지름의 끝에서 측정해야 효의 크기가 더 정확하듯이 말이다.

 

옮긴이 후기

계몽주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의 서구 사회는 인간과 사회에 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문제의 기원과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려는 철학자와 작가들로 넘쳐났다. 그들 가운데 루소만큼, 생전에도 사후에도 자신이 표명한 견해와 거기에 내포된 모순적이고도 내밀한 실존적 감정들로 인해 그렇게 많은 적과 맹목적인 추종자들을 동시에 갖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루소는 문제적인 작가였다. 문제적이라는 것은 루소가 그의 시대와 이질적이라는 것, 그 이질성 때문에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식을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예리하게, 근본적으로 폭로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누구나 루소가 남긴 저작들을 본다면, 그의 생각에 동의하든 터무니없다고 내치든 또는 그가 품고 드러내는 감정과 정서에 공감하든 반감을 갖든, 루소가 자기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내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힘겹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반성하려 노력했는지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남다르다. 이 점에서 루소의 글이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다. 글쓰기의 치열함 때문에, 또 인간을 꿰뚫어보고 예견한 그의 통찰력 때문에 루소는 근대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유와 성찰을 반사해볼 수 있는 깊고도 넓은 거울이 되고 있다.
18세기가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한 질문은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연 상태를 벗어난 인간이 사회 상태로 진입함으로써 발생하기 시작한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이 문제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합의한 '일반 의지'에 입각해서 확립된 사회계약의 개념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에밀'은 사회계약의 당사자인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공동의 이익에 일치시킨 '일반 의지'를 구현할 수 있도록 '시민'으로 키워내는 교육적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교육의 목표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욕망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고 도덕적 의지에 따라 생위를 조정하는 자율적인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루소가 말하는 교육은 제도로서의 교육 체계가 아니라, 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교육의 본질과 내용을 가리킨다. 이 교육에서 핵심은 각 개인에게 일반의지, 즉 본질상 도덕적인 의지를 마련하고 스스로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과연 사적인 이익을 포기하고 공적인 이익을 선택하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한 루소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사회적 자질에 관하여, 또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실존적 환경인 사회에 관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말하고자 한다. 사회의 악습에 물들어 있는 기존의 부분적인 교육은 오히려 교육을 망칠 뿐 결코 자율적 '시민'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책임지고 교육을 완성해가는 전면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이로부터 오직 아버지만이 아이의 교육을 맡아야 하고 맡을 수 있다면 루소의 주장이 나온다. 루소는 에밀의 가정교사로 그치지 않고 에밀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요구하며 차후에는 자신이 진짜 아버지라고까지 말한다. 그 과정을 구체적이고도 실현 가능하게 기술하면서 루소는 시민이 지켜야 할 의무와 의무를 뒷받침하는 권리를 제시한다. 이와 더불어 루소는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처음부터 따라올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에밀'은 인간에 관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말하기 때문에, 그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실로 엄청난 간격이 벌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육 방법론을 제시한 이론적인 교육서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서로 또한 에밀이라는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부닥치게 되는 실존적, 사회적 문제들을 깊이 고찰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로도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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