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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by 아르놀트 하우저

by hoyony 2016. 12. 4.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1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창작과비평사
2016
Arnold hauser 



제1장 선사시대

01 구석기 시대 : 마술과 자연주의

예술을 현실을 지배하고 통어하는 수단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에 순응하는 방도로 보느냐에 따라 한편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재현하는 자연주의적 작품이 예술활동의 최초의 형태였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삶을 양식화하고 이상화하는 엄격한 형식의 작품이야말로 가장 먼저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들 예술사가  및 고고학자가 전제주의 내지 보수주의로 기우는가 아니면 자유주의, 진보주의 경향을 띠는가에 따라 기하학적인 모양을 중심으로 한 장식예술과 자연주의적 , 모방적인 표현형식 중 어느 한쪽을 더 오래된 것으로 받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 차이야 어찌 되었건 실제 유물들을 살펴보면 자연주의적 예술양식이 먼저 나왔음이 분명히 드러나며, 이는 역사가 진전될수록 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자연에서 동떨어져 현실을 양식화하는 예술이 더 근원적이라는 주장은 점점 더 지탱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선사시대의 자연주의

그러나 선사시대의 자연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얼핏 보아 그보다 더 원시적으로 보이는 기하학적 양식에 앞서 나왔다는 사실이 아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자연주의 예술이 근대 예술사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발달 단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그림이나 오늘날 원주민들의 예술은 감각의 소산이라기보다 이지(理智)의 소산이다. 즉 그들은 실제로 그들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그리는 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이론적 종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상의 앞모양에 그 옆모양 또는 위에서 본 모양을 겹쳐 그리는가 하면, 그 대상의 속성에 관해 알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며, 생물학적으로 혹은 주제상 중요한 요소는 실물보다 크게 그리고, 반면에 그 자체로는 아무리 인상적이라도 당면 대상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무시해버린다. 그런데 구석기시대 자연주의 미술의 특징은, 근대 인상주의가 출현하기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순수하며 어떠한 이지적인 작용이나 제약도 받지 않은 형태로 시각적 인상을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석기시대의 그림에서 우리는 이미 현대 스냅사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동작묘사를 발견하는데, 예술사에서 이런 현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드가와 뚤루즈 로트렉의 회화에 이르러서다. 따라서 인상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의 눈에 흔히 구석기시대 그림들이 잘못 그려졌거나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생활의 방편으로서의 예술

이런 예술은 어떤 동기에서 무슨 목적으로 생겨난 것인가?
우리가 아는 바로 이 예술의 작가들은 비생산적, 기생적 경제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기보다 채집 또는 노획하던 원시적 수렵민들이다. 짐작건대 그들은 아직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유동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했고, 고립된 소수집단으로 나뉘어 사는 원시적 개인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신이라든가 피안의 세계 또는 내세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순전히 실용적 활동이 삶의 전부였던 이 시대에는 만사가 생존을 위한 노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이 분명하며, 예술이라고 해서 식량 조달과 무관한 어떤 다른 목적에 이바지했으리라고 가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흔적을 놓고 보더라도 예술은 마술적 행위의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수단으로서 철두철미 실용적이고 순전히 경제적인 목표와 직결된 기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마술은 우리가 흔히 종교라고 이름 붙이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던 듯하다. 기도라는 것도 없고, 신성한 힘이나 존재를 숭배하지도 않았으며 피안의 어떤 영적 존재들에 대한 신앙 같은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종교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 일컬어지는 요인을 갖추지 못했다. 그것은 전혀 신비스러울 것 없는 기술이자 사무적인 활동이며, 우리가 쥐덫을 놓는다든가 땅에 거름을 준다든가 수면제를 복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교나 밀의와는 무관한, 수단과 방법의 적절한 응용이었다. 이 시대의 그림은 이런 마술의 도구였던 것이다. 즉 그림은 짐승이 그 속에 걸려들게 되어 있는 함정이었다. 아니 이미 짐승이 걸려든 함정이었다고 말하는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었기 때문이다. 구석기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림속의 짐승을 죽이면 실제의 짐승도 죽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예비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마술적 시범에 뒤이어 실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아니 마술적 시범행위와 실제 행위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매개물인 시간과 공간뿐이므로 원하던 사건은 이미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의 마술은 결코 상징적인 대체행위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직접적인 행동이었다. 생각으로 죽인다거나 믿음으로써 기적을 이룬다는 식이 아니라 현실적인 행위 그 자체, 구체적인 그림 그 자체, 실제로 그림에다 대고 쏘는 행동 그 자체가 곧 짐승을 잡는 마술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예술과 마술

구석기시대 예술에 관해서는 다른 어떠한 해석도, 예컨대 그것이 장식욕이나 표현욕의 산물이라는 식의 여하한 설명도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을 반박할 자료는 얼마든지 많지만 무엇보다도 문제의 그림들의 위치가 가장 결정적인 반론이 된다. 즉 완전히 은폐되고 접근하기도 힘들며 조명이라곤 전혀 없는 동굴의 한귀퉁이에 그림을 그려놓아 장식으로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가 흔히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남겼다는 확증을 가질만한 가장 오래된 시대는 이 마술의 시대였지만, 이에 앞서 마술 이전의 단계가 있으리라고 추정된다. 마술이 완성되어 그 기술이 공식화되고 의힉이 고정되기까지는 그 준비기간으로서 아직 마술이 확립되지 못한 채 암중모색하는 실험적 실천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마술의 주문이나 양식은 하나의 틀을 이루기 전에 그 효력이 입증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단순히 추측이나 상상의 산물로 단숨에 생겨날 수 없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발견되고 점진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마술 이전 단계의 인간은 실물과 그 그림 속 사본의 관계를 아마도 우연히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단 발견했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강한 인강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서로 닮은 것들의 상호의존성이라는 원리에 입각한 마술의 세계 자체가 바로 이 경험에서 우러났는지도 모른다.

02. 신석기시대 : 애니미즘과 기하학적 양식

선사시대의 기하학적 양식

자연주의 양식은 구석기시대 끝까지, 그러니까 수천수만년간 지속되었다. 예술사에서 최초의 양식 변화를 이루는 전환점은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이행하면서 나타났다. 이때 비로소 체험과 경험에 개방적인 자연주의 경향이 물러나고, 경험세계의 풍성함을 등진 채 모든 것을 기하학적 무늬로 양식화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된다. 자연에 충실하며 그때 그때 모델의 특징을 애정과 인내로써 묘사하려는 그림 대신에 사물을 충실히 그려낸다기보다 상형문자처럼 가리키는 데 그치는, 획일적이고 인습화된 기호가 나타난다. 예술은 이제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보다 사물의 이념이나 개념 내지는 본질을 포착하려 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상징의 창조에 주력한다. 바위에 그려진 신석기시대의 그림들은 사람의 모습을 두어개의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암시하고 있다. 예컨대 수직선 하나로 몸뚱이를 나타내고 팔과 다리는 각기 위아래를 향한 반원 하나씩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히 추상화된 형식에 이르는 예술양식상의 변화는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가장 깊은 단절을 뜻한다고 할 문명 전반에 걸친 일대 변혁과 관련된 것이다. 이때 선사시대 인류의 물질적 환경과 정신구조에 일어난 변화는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어서, 돌이켜보건대 그전의 생활은 모두 단순히 동물적 본능이었던 데 비해 이후의 모든 변화는 목적의식을 지닌 하나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다. 그 결정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점을 이룬 계기는 바로, 인간이 식량을 채집하거나 수렵하는 식으로 자연의 혜약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대신 이제부터는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동물과 식물을 길들이게 되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목축업 및 농업의 발견과 더불어 인간은 이제 자연에 대한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며, 어느 정도는 운이라든가 우연이라든가 하는 운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살림살이가 조직화된 시대가 시작되며 인간은 노동하고 관리할 줄 알게 된다. 식량을 저장하고 장래를 고려하며 가장 원초적인 단계의 자본축적이 이루어진다. 토지개간, 가축사육, 노동기구, 식량저장 등의 최소한의 여건과 더불어 인류사회는 이제 계층 내지 계급의 분화가 시작되고 특권계급과 비특권계급, 착취자와 비착취자가 생겨난다. 노동의 조직화, 기능의 분업화, 직업의 분화가 나타나며 목축과 농업, 원료의 생산과 수공업, 공장생산과 가내노종,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 농지의 경작과 그 방위 등이 점차 분업화되어가는 것이다.

마술과 애니미즘

마술과 주술 대신 종교적 의식과 예배행위가 등장한다. 구석기시대는 종교가 없는 시대였다. 인간은 죽음에의 공포와 굶주림으로 가득 차 있었고 외부의 적과 식량의 결핍, 고통 또는 죽음으로부터 마술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을 방어하고자 했지만, 그에게 닥쳐오는 행운이나 불행을 그 현상의 배후에서 점지해주는 어떤 힘과 연결짓지는 않았다. 농경문화, 가축문화 등과 더불어서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일정한 섭리와 의도를 지닌 힘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날씨가 고른정도, 비와 햇볕, 천둥과 우박, 전염병과 가뭄, 토지의 비옥함이나 가축의 다산 여부 등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식은 축복 또는 저주를 가져다주는 선악 사이의 온갖 신령이나 정령의 개념을 낳으며 신비스러운 미지의 존재, 압도적인 위력을 가진 초인적 존재, 초월적이고 저대적인 존재에 대한 관념을 낳는다.

마술중심의 세계관은 일원론적으로 현실을 단순히 상호연결의 형태로, 빈틈이나 단절이 없는 연속체의 형태로 파악하는 데 반해, 애니미즘은 이원론적이어서 그 지식과 신앙을 이원적인 체계로 정립한다. 마술은 감각 본위로서 구체적인 것을 고수하는 반면, 이원론적인 애니미즘은 정신적인 것, 추상적인 것에 기운다. 전자의 경우 현세의 생활이, 후자의 경우 피안의 세계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구석기시대 예술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그려내는 반면 신석기시대 예술은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와 양식화되고 이상화된 초현실세계를 대립시키는데,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모습과 형체 대신에 상징과 암호, 추상과 생략, 일반적인 전형과 인습화된 기호 등이 사용되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현상이나 체험은 사유나 해석, 정리와 수정, 강조와 과장, 왜곡과 추상 등에 의해 대체된다. 예술작품은 이제 단순의 대상의 재현일 뿐 아니라 사유의 표현이며, 기억의 소산만이 아니라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구석기시대 그림의 작자는 그 자신이 사냥꾼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냥꾼으로서 예리한 관찰력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희미한 발자국이나 냄새만으로도 어떤 특징을 지닌 무슨 짐승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유사점과 차이점을 간파하는 날카로운 눈과 갖가지 음향을 식별하는 예민한 귀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외계를,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향하게 마련이었다. 이런 태도와 능력이야말로 자연주의 예술에 쓸모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신석기시대의 농사꾼에겐 이제 더이상 사냥꾼의 예리한 감각이 필요치 않다. 그의 감각적 예민성과 관찰력은 퇴화하고 그 대신 다른 능력, 무엇보다도 추상화 및 합리적 사고의 능력이 개발된다.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농경, 목축경제의 생산방시과 극도의 추상화, 양식화를 지향하는 당시의 형식주의적 예술에 똑같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03.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서의 예술가, 전문직업 또는 가내수공예로서의 예술

예술활동의 분화

선사시대 예술의 유물이 예술사회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각별히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당시의 예술이 후세 예술에 비해 현저하게 그 사회적 조건에 좌우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며, 주어진 사회적 조건과 예술형식의 관계가 이후의 그 어느 시대에서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술사의 모든 시기를 놓고 볼때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오는 과정만큼 예술양식의 변천과 그에 병행하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그처럼 뚜렷한 상호 연관성을 드러내는 예는 드물다. 선사시대의 문화가 주어진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발생한 흔적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과 달리, 그뒤의 문화에는 이전의 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일부는 이미 화석화된 형식과 더불어 아직 생동하는 새로운 형식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구대상이 되는 예술이 발전된 사회단계에 속할수록 제반 관계의 그물은 그만큼 더 복잡하게 얽혀있게 마련이고, 해당시기의 예술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적 배경을 꿰뚫어보기는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예쑬의 종류나 스타일 또는 장르가 오래된 것일수록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 자체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도정이 길게 마련이며, 어느 정도 자율적인 이런 발전 과정이 길면 길수록 주어진 예술형태의 복합적 요인 가운데 어느 한 요소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한 법이다. 신석기시대 바로 다음의 시대, 즉 농경문화가 공업과 상업에 기초한 유동적인 도시문화로 변모하는 시대만 해도 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너무나 복잡한 구조를 지니기 떄문에 그중의 어떤 현상에 관한 사회학적 해석도 만족스러운 것이 되기는 어렵다.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01. 고대 오리엔트 예술의 동적 요소와 정적 요소

단순한 소비에서 생산으로, 원시적 개인주의에서 공동작업으로의 발전이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면, 신석기시대와 다음 시대의 경계선을 이루는 것은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시작, 도시와 시장의 발생, 인구의 집중과 분화 등이다. 두 경우 모두, 비록 그것이 돌연한 변혁이기보다 점진적 개조의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인류생활을 전적으로 뒤바꿔놓았다. 권위주의적 지배형태, 자연경제의 부분적 온존, 예배 및 종교적 요소로 가득찬 일상생활, 기본적으로 엄격한 형식을 지키려는 경향을 지닌 예술 등 고대 오리엔트세계의 거의 모든 제도와 관습에서, 새로운 도시생활 형식과 더불어 신석기시대의 풍습과 관습이 존속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시대의 새로운 생활양식이 이전 시대의 그것과 구분되는 근본적인 변화는, 이제 원시생산이 역사적으로 가장 선진적이고 주도적인 활동이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이다. 부가 증대하고 경작지 및 자유로이 처분 가능한 비축식량이 비교적 소수자에게 집중됨으로써 수공업 생산품에 대해 이전보다 강력하고 다양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나며 분업화 과정이 크게 촉진된다. 정령과 신, 사람 들의 상을 만들고 장식이 달린 가재도구와 장신구 등을 만드는 일은 가내작업의 테두리를 벗어나 그 일만으로 생계를 영위해가는 전문가의 손으로 옮아간다.
작품의 수공업적인 완벽성, 다루기 힘든 재료의 완전한 장악, 그리고 이집트 예술을 이전 예술의 천재적 또는 딜레땅뜨적 자유분망함과 견주어볼 때 특히 눈에 띄는 그 흠잡을 데 없이 철저한 일솜씨 등은 모두 예술가가 전문적인 직업이 된 결과이며, 도시생활에서 갖가지 사회세력들 간의 경쟁이 확대되고 사원과 왕궁 및 도시의 문화적 중심에서 풍부한 경험과 높은 식견을 갖춘 전문가집단이 육성된 결과인 것이다.

도시문화와 도시예술

인구가 집중되고 이렇게 집중된 다양한 사회계층 간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정신적 자극이 풍부하게 마련인 도시, 변화 많은 시장을 갖고 있고 이 시장이라는 현상의 특성인 반 전통적 정신의 온상이 되는 도시, 외국과 교역하고 이국의 낯선 이들과 접촉하는 상인들이 사는 도시, 유치한 단계로나마 화폐경제가 성립하고 화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촉진하는 부의 편재 현상도 없지 않은 도시 ㅡ 이런 특색을 갖춘 도시의 출현은 문화의 모든 영역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예술에서도 신석기시대의 기하학주의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개성적이며 종래의 형식과 전형의 속박에서 훨씬 벗어난 양식을 낳았다.
예술을 단 하나의 원리만으로 설명하고자 예술 내부에 정적 요소와 동적 요소, 보수적 요인과 진보적 요인, 형식존중과 형식파괴의 요인들이 병존하고 있음을 무시한다면 이 예술의 본질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예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고루한 전통적 형식의 배후에서 실험적 개인주의와 탐구적 자연주의의 생동감을, 도시의 생활감정에서 우러나와 신석기시대의 정체적 문화를 와해시키는 힘들을 느껴야만 한다. 그렇다고 고대 오리엔트의 역사에 작용하고 있는 완강한 전통 고수의 정신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적어도 고대 오리엔트 시대 초기까지는 모든 것을 도식화하려는 신석기시대 농민문화의 형식의지가 단지 지속되었을 뿐만아니라 계속 새로운 변형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이런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사회 지도세력, 특히 왕과 사제층이 기존 체제를 고수하고자 하며 그 일환으로 전통적인 종교 및 예술의 형식을 가능한 한 불변의 상태로 유지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강제와 예술적 가치

이 경우 예술가의 작업에 가해지는 강제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어서, 오늘날 유행하는 자유주의 예술이론에 따른다면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업적은 처음부터 생겨날 수가 없었다고 말해야 옳다. 하지만 바로 이런 압박이 가장 심했던 오리엔트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의 상당수가 탄생했다. 이들 작품은 예술가의 개인의 자유와 작품의 미적 가치 사이에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증명해준다. 예술적 의지란 그물처럼 촘촘히 얽힌 장애물을 뚫고 나감으로써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예술작품은 일련의 목표 설정과 그에 대립하는 일련의 장애 ㅡ 부적합한 제재라든가 사회적 편견이라든가 대중의 미흡한 판단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장애와, 혹은 이런 장애를 이미 자체 내에 받아들여 동화시켰거나 아니면 그에 대해 공공연하고 완강한 대립관계에 서 있는 목표 설정 ㅡ 사이의 긴장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아무리 진보한 자유민주주의사회라 해도 도대체 예술가가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아무런 장애에도 부딪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강제라는 것이 그 자체로 예술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라면 완전한 예술작품은 완전한 무정부주의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예술작품의 심미적 가치를 좌우하는 여러 전제조건은 정치적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다.

02. 이집트 예술가의 지위와 예술활동의 조직화

예술 고객으로서의 사제층과 궁정

최초로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예술가에게 일자리를 준 유일한 고용주층은 사제와 제후 들이었고, 예술가들의 가장 중요한 일터 역시 고대 오리엔트 문화 전시기를 통해 사원 및 궁정 구역이었다. 가내 수공업을 논외로 한다면, 고대 오리엔트 예술은 우선은 이 고객들의 주문에 응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었다. 사제들은 왕과 제후를 자신들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을 신격화하는데 동조했고, 왕후들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사제와 신들을 위한 사원건립에 동의했다. 양자는 각기 상대방의 권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자 했으며, 양자 모두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한 투쟁에서 예술가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이집트에서는 애초부터 조형예술 작품들, 특히 무덤 장식을 위한 작품의 수요가 대단했던 만큼 예술가라는 직업이 상당히 일찍부터 독립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예술이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임이 철저히 강조되고 실용적 과업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 자신의 개인적 존재 같은 것은 완전히 작품의 이면으로 사라지고 만다. 화가와 조각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익명의 수공업자로서 그들 개인이 작품 표면에 드러나는 법은 결코 없다. 도대체 이집트 예술가들은 그 이름이 알려진 경우가 얼마 안되는데다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이름들조차 어떤 구체적인 작품과 확실히 연결시킬 길이 없다.

예술품 제작의 조직화

이집트에서 예술품 제작의 조직화, 조수의 고용과 그 다면적 활용, 개별 작업단계의 전문화와 통합 등은 거의 중세기 건축현장의 작업방식을 방불할 만큼 고도로 발달해 있었으며, 많은 점에서 개인주의 원리에 기초를 두는 후세의 모든 예술 생산방법을 훨씬 능가했다.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생산의 표준화에 목표를 두었고, 작업장 생산방식 자체도 애당초 이런 경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수공업적인 방법이 점차 합리화되어감으로써 예술 생산의 균일화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수요의 증가에 따라 초벌그림, 원형, 일정한 패턴 등을 기초로 제작하는 습관이 생기고, 갖가지 예술작품을 단지 규격부품을 뜯어 맞춤으로써 만들어내는 거의 기계적인 생산방법이 발달했다.

03.  중왕국시대 예술의 유영화

정면성의 원리

이집트 예술의 가장 뚜렷한 특색, 엄격한 양식화가 요구되던 시기뿐 아니라 자연주의 시기에도 많건 적건 간에 엿볼 수 있는 특색은 합리적인 묘사방법이다. 이집트인들은 신석기시대의 예술, 미개인의 조각, 아이들의 그림등에서 볼 수 있는 '개념상'으로서의 성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적은 전혀 없다. 또한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모순되기까지 하는, 그림의 각 부분을 합성하는 이른바 '봉합적 묘사방법'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들은 시각적 인상의 통일성과 독특함을 마치 현실인 양 구체적 형상으로 묘사하고야 말겠다는 식의 환각주의를 단념했다. 즉, 그들은 명확성을 위해서라면 원근법, 생략법, 중첩법 등을 포기했으며, 그 결과 자연에 충실하려는 의지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게 경직된 금기사항을 낳게 되었다.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 그중에도 특히 이집트 예술에서 보이는 모든 합리주의적 형식원리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정면성'의 원리이다. '정면성'의 원리란 랑게와 에르만이 발견한 인체묘사의 법칙으로서, 이 법칙에 따르면 인체는 그것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간에 가슴의 표면만은 그 전부가 감상자 쪽을 향하도록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무에 상체는 하나의 수직선에 의해 서로 똑같은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된다. 축을 중심으로 놓고 인체의 정면 중에 제일 폭이 넓은 부분을 전면에 부각시키려고 하는 이 태도는 대상이 구비한 갖가지 요소에 대한 일체의 오해나 혼란 또는 은폐를 방지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명확하고 간소한 인상을 제시하려 한 의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정면성의 원리에 따라 인체를 묘사할 경우 상체가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상자와의 어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감상자라는 존재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구석기시대 예술의 경우에는 정면성의 원리라는 것은 없었다. 구석기시대 예술이 자연주의라는 것은 감상자의 존재 따위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나섰다는 사실의 또다른 표현이다. 이와 달리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은 감상자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한다. 그것은 권위를 상징하는 예술이며 존경을 강요하는 예술인 동시에 존경을 아끼지 않는 예술이기도 했다. 감상자를 의식하는 그런 태도는 일종의 존경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예의이고 범절이었다. 감상자 또는 발주자에게 위안과 봉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니고 대면하는 예술인 것이다.
정면성의 원리에 입각한 예술은 자연주의 희곡이라는 과도기 단계를 거쳐 그 정반대 극인 '영화'로 나아간다. 영화는 관객 앞에서 사건을 전개해가는 것과는 반대로 관객을 사건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관객에게도 능동적인 역할을 하게 하는 동시에, 사건을 취사선택한 것은 완전히 우연이고 등장인물들도 전혀 뜻밖에 현장을 발각당했다는 듯이 그리려 하기 때문에, 희곡에서 볼 수 있는 허구나 인습이 최소한도로 줄어든다. 그 노골적인 환각주의와 거리낌없이 직접 관객의 피부에 호소하고 관객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경향을 지닌 영화예술은 모든 세계관적인 차이를 뭉개버리려는 자유주의적, 반권위주의적 사회질서가 낳은 민주주의적 예술관의 단적인 표현이다. 반면 궁정예술과 귀족예술은 무대의 틀, 무대 조명, 단상의 높이 등이 강조되는 점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인위적이고 주문에 응하여 만들어진 예술이며, 그 발주자는 환각 따위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그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라는 전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서적 형식

인물의 양다리는 항상 옆에서 본 모습으로, 양다리 모두가 안쪽, 즉 엄지발가락 쪽에서 본 것처럼 그려진다는 규칙이다. 그리고 또 내디딘 다리와 뻗은 팔은 ㅡ 아마 교차에 따른 좌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일 터인데 ㅡ 감상자 측에서 보아 먼 쪽으로 그려야만 한다는 약속이다. 끝으로 그림 속 인물은 오른쪽 측면만을 감상자 쪽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 약속, 규칙은 범할 수 없는 형식주의적 원리로서 중왕국시대의 사제층, 왕, 봉건영주, 관리 들에 의해 지극히 엄격하게 지켜졌다. 이런 사회정세는 힉소스족(기원전 1785-1580년경에 이집트에 침입하여 제 15,16조 왕조를 건설한 유목민족) 침입의 혼란속에서 발생한 신왕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변하기 시작했다.그리하여 외부와 고립된 채 자체의 민족전통에 침잠해 있던 이집트는 이제 물심양면에 걸쳐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원대한 전망을 가진 국가로서 초민족적인 세계문화의 단서를 열게 되었다.  

04. 아메노피스 4세 시대의 자연주의

새로운 감각성

위대한 정신적 개혁의 원동력이 된 아메노피스 4세는 일반적으로는 일신교의 이념을 발견한 교조로 알려져 있고 또 세계사에서 최초의 예언자 혹은 최초의 개인주의자로 일컬어지는데, 그는 또한 예술을 의식적으로 개혁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즉 그는 예술의 목표로서 자연주의를 내세워 의고풍 예술양식에 맞서는 새로운 업적을 이룩한 최초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중왕국시대에서 보이던 형식주의는 종교에서나 예술에서나 이 왕의 영향 아래 생생하고 자연주의적이며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변했다. 새로운 제재를 선택하고, 새로운 표상을 탐구하고 이제까지는 볼 수 없던 새로운 구도의 작품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개인 정신생활의 깊은 속을 묘사하려는 노력이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초상에 정신적 긴장, 좀더 고조된 감성, 거의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신경의 예민함 등을 불어넣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신왕국시대 자연주의의 표현수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연주의는 어느 시대에도 이집트 예술의 저류로서 존속하고 있었으며 공인된 양식과 나란히, 적어도 비공식적인 군소 예술의 일부에서나마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05.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진정한 문제점은 경제적으로 상업과 수공업, 화폐와 신용제도가 압도적인 비중을 점유하고 있던 이 나라의 예술이 농업 및 자연경제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던 이집트 예술보다 더 엄격한 규율에 매여 있고 변화와 신선함이 적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2000년대에 성립한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당시 바빌로니아에서는 이미 상업과 수공업, 부기와 신용제도 등이 비상하게 발달했고 제3자에 대한 지불과 고객 상호 간 채권의 상쇄 등 상당히 복잡한 은행업무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에 비해 이런 상거래와 금융제도가 월등히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 사람과 비교하여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을 경제적 인간이라 부르는 학자조차 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에 끼어 있던 이 나라에서는 농민과 대중의 손으로 만들어진 미술공예가 이룩한 역할이 고대 오리엔트의 다른 문명지역에 비해서도 더욱 적었고, 예술 생산은 예컨대 이집트에서보다도 더욱 비개인적이었다. 바빌로니아 예술가로서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는 만큼 바빌로니아 예술의 시대구분은 왕들의 통치기간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바빌로니아 및 아시리아 예술에서는 묘사의 추상화, 합리화가 이집트 예술의 경우보다도 철저하게 행해졌다. 인체묘사에서는 정면성의 원리가 엄격히 지켜지고, 얼굴은 제일 잘 보일수 있게 옆을 향하며, 얼굴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인 코와 눈이 굉장히 크게 그려진 반면 이마나 턱같이 그다지 사람의 흥미를 끌지 않는 부분은 매우 작게 되어 있다. 특히 정면성의 원리의 반자연주의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면에서는 아시리아 건축의 조각에 보이는 이른바 문지기들, 즉 날개를 단 사자와 황소에 따를 것이 없다. 모든 환각주의를 배제하고 양식화 일변도로 관철하려고 드는 예술관이 이처럼 철저하게 나타나는 예는 이집트 예술에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다.
이들 동물은 옆에서 볼때 네발로 걱도 있는 모습과 앞에서 볼 때 두발로 서 있는 모습을 합쳐서 다리가 다섯개로 조각되어 있다. 두 마리의 동물을 마주 뜯어맞춰놓은 셈이다. 이처럼 뚜렷하게 자연법칙을 무시한 것은 순전히 합리적인 동기 때문이다. 즉 이런 조각의 작자들은 분명히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완전무결하며 이치에 맞고 완벽한 형식을 갖춘 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01. 영웅시대와 호메로스 시대

호메로스의 서시시는 그리스어로 쓰인 문학작품 중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리스 문학 전체를 통해 최초의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최초의 문학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구조를 지녔고 내용 또한 풍부한 모순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애당초 호메로스에 관한 전설 자체도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문명화되고 회의주의적이며 때로는 경박하기까지 한 세계관을 지닌 서사시를 쓴 사람의 이미지와는 합치될 수 없는 요인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키오스 출신의 이 눈먼 늙은 가인에 관해 후세 사람들이 갖는 이미지는 주로 시인은 신들린 예언자이자 사제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기억들이 집약된 것이다. 그가 맹인이었다는 사실도 그가 내면적인 빛으로 충만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절름발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메로스가 이런 육체적 결함의 소유자라는 전설속에도 선사시대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고방식, 즉 시인과 하가, 조각가 등 예술품의 작자는 전쟁이나 전투에 부적합한 사람들 가운데서만 나올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나타나있다.

모든 원시시대 문학이 그렇듯이 선사시대 그리스 문학도 주문이나 신탁의 일종이요 축복과 기원을 위한 격식에 맞춘 문장들이거나 군가 또는 노동가요였다고 생각된다. 이들 장르에 공통된 하나의 특색은 모두가 종교적 의미를 지닌 집단적 문학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문과 신탁의 작자, 만가나 군가의 작사가들에게는 그 자신이 어떠한 개인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작품은 익명인 채 공동체 전체의 쓰임에 이바지했고, 공동체 전원의 공통된 사고방식과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조형예술 분야에서 이 비개성적, 종교적 문학에 대응하는 것은 어렴풋이 인간의 모습을 암시했을 뿐 아직 거의 조각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것으로서, 그리스인들이 옛날부터 그들의 신전에서 제사 지내던 주물, 돌멩이, 나뭇조각 등이다.

영웅시대와 사회윤리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시인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 상층을 차지하게 된 무사계급의 세속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문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은 동시에 시인의 역할까지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이제 사제층과는 달리 범접할 수 없는 익명의 권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문학은 집단의 권위를 대변하는 신성함을 잃었다. 기원전 12세기 아카이아의 왕과 귀족, 즉 이 시대에 영웅시대라는 명칭을 붙이게 해준 영웅들은 스스로 뭇 도시의 약탈자라고 자랑스럽게 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강도요 해적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세속적, 비종교적이고 그들 명성의 가장 빛나는 면류관에 해당하는 트로이의 전설은 그들의 약탈과 해적 행위를 시적으로 미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

영웅시

이런 역사발전에 대응해 영웅시대의 문학은 대중문학, 집단문학 또는 집단이나 합창대를 위한 서정시의 성격을 잃고 개인 작자가 개인의 운명을 노래하는 작품이 되었다. 문학의 사명은 이제 더이상 사람들을 싸움터로 몰고 가는것이 아니라, 승리로 끝난 싸움 뒤에 장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 이름을 칭송하며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 후세에 전하는 것이 되었다. 영웅시를 낳은 것은 무사귀족들의 명예심이었다.
영웅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것이 개별 장군을 노래한 문학작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를 부른 사람 역시 어떤 집단이나 합창단이 아니고 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서사시의 발생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전쟁과 모험이 바로 노래와 이야기의 재료가 되던 시기는 종말을 고했다. 도리스인은 자기들의 승리를 노래로 만들려는 풍류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고지식한 농경민족이었고, 그들에 의해 쫓겨난 영웅시의 주인공들도 소아시아 연안지방에 정착하고부터는 더이상 모험생활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무 위주의 군주제에서 농업과 상업 중심의 평화적인 귀족제로 바뀌고 그 결과 예전의 왕도 이제는 대지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전까지 왕과 제후, 그 측근들이 나머지 전체 민중을 희생시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것과 달리 이제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가 분배되고 상층계급의 호화로운 생활도 그만큼 덜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활은 좀더 검소해지고 새로 정착한 땅에서 조각가와 화가들에게 내린 주문 또한 적어도 초기에는 매우 약소한 분량과 규모였던 듯하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당시 문학작품의 장려함은 더욱 놀랍다. 쫓겨난 이민족들은 영웅시의 전통과 작품들을 새 고향이 된 이오니아에 가져왔고, 그리하여 이곳 이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낯선 여러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300여년의 세월을 거쳐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다수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이 작품이 오늘날 전하는 형태로 완성되기까지 어떤 한 시인의 독자적인 작업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개별적이고 이질적인 착상들이 모이고 끊임없는 수정을 거쳐 전해진 결과로 이른바 집단적 천재의 소산이라는 이 작품의 본래적 특성이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영웅시대의 시인이 사제층에서 분리됨에 따라 개인적인 성격이 증대하고, 개개의 독립된 시인이 만들어내던 문학작품은 또다시 집단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서사시는 이미 개별 시인의 작품이 아니고 하나의 시적 유파 전체의 ㅡ 어떻게 말하면 하나의 시 길드의 ㅡ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민족 전체의 창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동업공동체, 즉 정신적인 연대감을 가지고 공동의 전통과 기법으로 결합된 시인집단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문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형예술에서나 발견되던 예술활동의 새로운 조직이 등장한다. 즉 스승과 제자, 주인과 도제 사이의 분업이 문학 분야에서도 가능해진 것이다.
모든 문학에서 최고 모범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어느 개인의 창작이 아니요 그렇다고 민속문학의 산물도 아닌 익명의 고급 예술품이며, 다수의 우아한 궁정시인과 학식있는 문사들이 이룩한 집단 창작으로서 그 창작과정에서 어떤 특정 개인이나 유파 또는 세대의 기여를 분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19세기 미학 전체의 주춧돌이 되는 낭만주의 예술관 및 예술가관은 완전히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다. 낭만주의자들은 그 수수께끼와 같은 아름다움을 소박한 민중문학이라고 불렀고, 우리는 그것을 비전과 학식, 영감과 전통, 고유의 것과 외래적인 것 등 너무나 상이한 온갖 요소를 갖고서 막힘없이 흐르는 감미로운 어조와, 그 이미지들의 밀도 높고 동질적인 세계, 그리고 그 형상들의 의미와 실제의 완벽한 통일을 만들어낸 시적 창조력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헤시오도스

농민의 새활권에 자리 잡고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인 성격을 띤 최초의 문학은 헤시오도스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의 세계사적 의의는 그것이 사회적 긴장과 계급 간 대립의 최초의 문학적 표현이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물론 화해를 말하고 대립의 해소와 위무를 시도하지만 ㅡ 계급투쟁과 혁명의 시대는 아직 요원했다.ㅡ여하간 처음으로 문학 속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들려주었고, 사회정의를 주장하며 자의와 폭력을 규탄한 최초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때까지 시인에게 맡겨져온 종교와 예배, 궁정생활과 지배자 찬송의 임무를 처음으로 버리고 정치적, 교육적 사명을 떠맡아 피압박계급의 스승이자 충고자, 대변자가 된 것이다.

02. 아케이즘과 참주제하의 예술

기원전 700년경 농민적인 생활양식이 도시적인 양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할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에서도 기하학적 무늬 중심의 유연성 없는 형식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에 대신하여 새롭게 등장한 이른바 아케이즘 양식은 에게 해 동서쪽 예술의 종합으로서, 즉 도시경제 중심의 이오니아 예술과 여전히 거의 농업과 축산업에만 의존하던 그리스 본토 예술의 종합으로서 생겨난 것이었다. 미케네 시대가 끝나고 아케이즘 시대가 될 때까지 그리스에는 신전도 궁전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종류의 기념비적 예술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시대의 것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도자기 유품이 약간 있을 뿐, 그외의 분야에서는 전혀 예술활동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업의 번성과 부유해진 도시, 성공적인 식민활동의 산물인 아케이즘과 더불어 새로이 기념비적 건축과 조형예술의 시대가 열린다. 이것은 지방농민에서 도시지배층 수준으로 입신출세한 엘리트를 가진 사회의 예술이자 토지에서 거둔 수입을 도시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상공업에까지 손을 뻗기 시작한 귀족들의 예술이었다.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의 아케이즘은 아주 부유하고 아직 국가기구를 완전히 장학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정치, 경제 면에서는 그 지배적 지위를 위협받기 시작한 귀족계급의 예술이다. 그들이 도시 시민층에 점차로 경제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그들의 주요 수입원인 지대가 새로 발흥한 화폐경제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윤에 비해 가치를 상실해가는 과정은 아케이즘 시대 초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야 비로소 귀족계급은 자신의 본질적 특성을 의식하게 된다. 이제 처음으로 자기들의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하층계급과의 경제적 경쟁에서 열세를 보상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자명한 사실로서 여겨져 겨의 의식조차 하지 않던 그들의 혈통적, 신분적 특징이 이제 특별한 미덕과 장점으로 노래되고 그들이 지닌 특권의 정당한 근거로 주장된다.
종족, 혈통, 전통에 근거하여 신체적 우수함과 군인다운 기율을 중시하는 아레테(덕) 개념이라든가,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의 균형이라는 이념을 내세운 칼로카가티아(선과 미의 융합), 극기와 자체, 절도를 이상으로 하는 소트로시네(절제의 미덕) 개념이 귀족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덕목으로 확립된 것이다.

올림피아 경기의 승리자상

귀족계급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 육체적 미의 이상과 그들의 윤리관은 문학작품에서만큼 뚜렷하지는 않더라도 같은 시대의 조각과 회화의 여러 형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통 아폴론상이라고 불리는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한 귀족 젊은이의 입상이나 완벽한 육체와 기사적 자세를 보여주는 아이기나 지방의 페디먼트에 세운 조각들은 핀다로스의 송시가 갖는, 서민과의 차이를 강조하며 귀족적 영웅화를 추구하는 낡은 양식과 일치한다. 경기자의 기념상은 실물과 닮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이상화된 모습을 그린 것이고 승리를 기념하고 경기를 선전하는 데 쓰이면 족했던 것 같다. 조각가는 많은 경우에 승리자를 한번도 대면하지 못하고 그 인물에 대한 대충의 설명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필리니우스(로마의 박물학자)에 의하면 3회 우승을 하고 나면 자기 모습과 실제로 닮은 입상을 요구할 권리가 생겼다는데 이것은 아마 더 후대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케이즘 시대에는 실물을 닮은 입상이란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케이즘 시대에는 비록 개인주의를 향한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말하는 뜻의 초상이란 알려지지 않았다.

개인주의의 맹아

도시적인 생활양식과 상업이 발달하고 경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되면서 정신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표면에 떠로으게 되었다. 경제적 개인주의가 대두하면서 서사시 편찬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그리하여 이제 정신적인 것에 관해서도 개인 재산권의 관념이 등장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음유시인의 문학은 집단적 작품이자 유파나 길드 또는 그룹의 공동 재산으로, 개개 시인이 그들이 부르는 시의 어느 한 구절씩을 소유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아케이즘 시대의 시인들은 알카이오스와 사포 처럼 주관적 감정을 노래한 서정시인뿐 아니라 사상시와 합창대용 서정시 작가들까지도 청중에게 일인칭으로 직접 호소한다. 시의 종류도 이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각기 개인적인 성격을 띠는 수많은 표현양식으로 변하고, 그 어느 것에서나 시인은 직접 자기 감정을 표현하거나 청중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원전 700년을 전후한 이 시대에 와서 조형예술 분야에서도 작가의 서명이 있는 최초의 작품이 나왔다. 그 효시를 이루는 것은 아리스토노토스의 이름이 새겨진 크라테르로, 이것은 현존하는 예술작품 중 작자의 서명이 담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참주의 궁정

기원전 7세기 말엽 처음에는 이오니아의 주요 도시에서, 그리고 뒤이어 그리스 본토에서도 권력을 장악한 참주정치(고대 그리스에서 참주가 다스리는 정치형태, 그 전제적인 성격으로 인해 폭군정치의 어원이 되었으나 역사용어는 그리스사의 한 시대를 뜻할 분이다)는 혈연주의에 대한 개인주의의 결정적 승리를 뜻하며, 이 점에서도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참주정치는 그 본질적인 반민주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민주제의 성과를 앞질러 구현하고 있었다. 참주제는 권력의 군주제적 중앙집권이라는 점에서 귀족제 이전 단계로의 역행을 뜻하지만, 동시에 혈연국가 해체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자 지주귀족의 민중 착취에 한계를 긋고, 가정경제, 자연경제적 생산에서 교역과 화폐경제로의 전환을 완수함으로써 지주층에 대한 상인층의 승리를 초래했다.
참주들 자신도 대부분 귀족 출신의 부유한 상인들로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그리고 소수 특권층과 농민들 사이의 나날이 증대해가는 알력을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한 인물들이었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권력 찬탈자들처럼 그들도 구체적인 이익을 제공하고 외면적인 화려함을 과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이 정통에서 벗어난 것임을 잊어버리게 해야만 했다. 그들은 예술을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과 선전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을 현혹하는 아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형식의 자율화 

자의식이라는 것, 즉 당면한 현실적 필요의 차원을 넘어 자기 자신에 관한 총체적인 앎을 추구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최초의 위대한 추상행위였고, 개개의 정신활동을 그것이 인생 전체에서 그리고 통일된 세계상 내부에서 가지는 기능에서 해방시킨 것은 또 하나의 추상행위였다.
갖가지 형식의 자율화라는 결과를 낳은 추상적 사고능력 발달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요인으로는 식민활동이라는 특수사정에 얽힌 여러 경험 이외에 화폐경제의 실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교환수단의 추상적 성격, 온갖 물품이 화폐라는 공통분모로 표시되는 현상, 물물교환이 판매와 구입이라는 독립된 두 행위로 분리된 일 등은 인간을 더욱 더 추상적 사고에 익숙하고, 상이한 내용을 담은 동일한 형식이라든가 반대로 동일한 내용을 담은 각기 다른 형식을 상정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일단 내용과 형식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 내용과 형식을 각개 별개로 생각하고 형식을 하나의 독립적인 원리로 보는 단계도 멀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이 유감없이 활용되기 위해서는 화폐경제에 의한 부의 축적과 직업의 분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 중 일부가 자율적인, 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다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잉여노동력과 여가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지배계급이 목적 없는 예술이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술이 주술과 종교, 과학과 실용행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03. 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비극

비극이야말로 아테네 민주제의 특색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는 예술이다. 비극은 외적 형식 즉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 즉 소재가 된 영웅전설과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비극은 처음부터 좀더 넓고 다양한 관중을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철저히 귀족적 칼로카가티아의 화신인 위대한 개인, 평균 이상의 고귀한 인간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스 비극은 원래 합창대 지위자와 합창대 사이의 문답에서 생겨났고 합창이라는 집단적 형식이 희곡이라는 대화형식으로 이행한 것인 만큼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강한 공동체의식이 전제되고 비교적 넓은 사회층 사이에 평준화가 진행되어 있어야 하니, 진정한 의미의 비극이란 집단체험으로서밖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선전기관으로서의 극장

축제극장은 도시국가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선전시설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가 그 운영을  시인들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놓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비극시인들은 실상 국가의 녹을 먹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작품을 제공하는 사람들이었다. 비극은 경향문학이었고, 또 그외의 것으로 평가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현실정치를 다루었고 항상 귀족국가 대 시민국가의 관계라는 당시의 가장 절박한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만을 주제로 삼았다.
비극 공연이 국가적 축제와 결부되었고 신화에 대한 유권해석이 곧 비극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시인은 또다시 선사시대의 사제나 마술사와 흡사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참주제가 그랬듯이 민주제 역시 주로 민중을 국가에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했다. 특히 비극은 원래 종교와 예술, 비합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중간에 위치한 만큼 종교와 정치의 이러한 결합에서 가장 좋은 중개자 노릇을 했다.

조형예술의 자연주의

희곡에서는 엄격한 형식주의로 기울기 쉬운 비극과 자연주의적인 미무스가 서로 다른 두 장르를 형성하고, 비극의 경우에 그 자연주의적 성격은 대체로 줄거리의 논리적 개연성과 등장인물의 심리적 신빙성에 국한되는 데 반해, 조형예술에서는 자연주의적 현상화 양식화된 요소가 서로 한층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당시의 조각과 회화에서는 추한 것, 평범한 것, 사소한 것도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 묘사되었다. 미론의 작품 원반 던지는 사람에서도 그는 가장 찰나적이고 긴장에 차 있으며 가장 첨예해진 순간, 즉 원반이 손을 떠나기 바로 직전의 순간을 택했다.
이것은 서양미술사에서 환각주의의 역사를 여는 동시에 본질적 측면을 제시하는 데 치중하는 추상적, 관념적 묘사의 역사의 막을 닫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제는 어떤 미술작품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아릅답고 균형 잡히고 장식으로서 아무리 효과적인 형식이라도 경험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단계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는 자연주의의 성과들이 굳어진 전통의 체계 속에 억지로 뜯어맞춰져 제약당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묘사는 그 어떤 조건에서도 먼저 올바른 것이어야 하며, 묘사의 정확성과 전통이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후자가 양보하게 된 것이다.
생활양식은 구석기시대가 끝난 이래 한번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유동적이며 분방해졌고 고루한 전통과 편견에서 해방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던 외면적, 제도적 틀은 모두 제거되었다. 전제군주, 참주, 세습 사제층, 자치권을 가진 교회, 신성불가침의 경전, 신의 계시에 따른 도그마, 공공연한 경제적 독점, 자유경쟁에 대한 공식적 제한 ㅡ 이것들은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다. 모든 조건은 현세의 삶과 현재의 생활을 즐기며 순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예술의 발전에 유리해졌다. 그런데 유동적, 진보적인 이런 경향과 더불어 낡은 보수세력의 작용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는 했다. 자기의 특권에 매달려 혈연국가의 권위와 함께 자유경쟁 이전의 독점경제를 유지하려 애쓰던 귀족들은 예술에서도 엄격하고 고풍스럽고 정적인 형식의 지배를 그대로 존속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고전주의의 역사는 전시기를 통해 이들 두 대립하는 양식이 교대로 지배권을 장악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04. 그리스의 계몽사조

기원전 5세기가 끝나가면서 예쑬에서 자연주의적/개인주의적 요소, 주관적/감정적 요소들이 점점 그 범위와 비중을 더해갔다. 전형보다는 개성이, 모티프의 집중보다는 확산이, 절제보다는 풍성함이 갈수록 더 우세해졌다. 문학에서는 전기의 시대가, 조형예술에서 초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비극의 문체는 일상회화의 말투에 가까워지고 서정시에서 볼 수 있는 인상주의풍 색채를 띠게 되었다. 줄거리보다는 인물의 성격 쪽으로 관심의 초점이 옮아가고, 단순하고 정상적인 인물보다는 복잡한 성격과 유별난 인간 쪽이 더 매력을 갖게 되었다. 조형예술에서도 3차원 공간과 원근법이 강조되고 정면보다는 4분의 3을 더 많이 그리며 생략법, 중첩법 등이 즐겨 쓰였다. 묘석에는 정서적이고 친근감 있는 가정생활 정경이 새겨지고, 항아리의 장식화에도 우아하고 부드럽고 목가적인 풍경이 그려지게 되었다.

소피스트들의 교양이상

소피스트들은 인간에게는 무한한 교육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형통에 대한 예로부터의 신비적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덕은 후천적으로 계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기인식, 자제력, 비판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양 문화이념은 바로 소피스트들의 이러한 교양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서양 합리주의 역사 즉 도그마/신화/전설/인습 등에 대한 비판의 역사도 소피스트들에서 비롯한 것이다. 역사적 상대주의 개념 즉 과학적 진리, 윤리적 규범, 종교적 신조 등이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처음으로 인류사에 도입한 것 역시 그들이었다. 그들은 과학, 법, 도덕, 신화, 신 등의 모든 가치와 질서는 역사의 산물이요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꿰뚫어본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들은 맞고 틀림,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상대성을 발견하고 인간의 모든 가치판단의 배후에는 실용적인 동기가 숨어있다는 것을 간파했으며, 그리하여 휴머니즘 계통의 모든 계몽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계몽사조기의 예술양식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소피스트 철학의 영햐을 볼 수 없는 예술장르는 이미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신이 가장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은 프락시테렐스와 리시포스에 의해 창조되어 폴리클레이토스의 이상적 남성상을 대체하기에 이른 새로운 운동선수의 전형이다. 그들이 만든 헤르메스와 아폭시오메노스 상에는 이미 영웅적인 면모나 귀족다운 준엄함과 도도함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운동선수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용가 같은 인상을 준다. 그 용모 전체에 이지적인 성격이 나타나는데, 온몸에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신경이 바로 피부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전체적인 인상은 포착된 순간의 일회적인 성격을 부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피스트들이 모든 정신의 소산에 관해 지적하고 강조한 측면이다.

그리스문학의 대표자 가운데서도 플라톤만큼 전적으로 귀족문화를 옹호하고 나선 예는 드물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의 통치를 맡기고자 했던 정신적 엘리트란 예로부터 내려오는 상층 특권계급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일반 대중은 정치에 개입할 권리를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데아론은 정치적 보수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는 고전적이며, 모든 반동적 관념론의 원형이다. 시간을 초월한 이념, 절대적 가치, 순수가치 등의 세계를 경험과 실생활 세계에서 격려하려는 관념주의 철학은 모두 단순한 명상의 선으로 물러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현실을 개조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된다. 이런 태도는 결국 실증주의가 자기들에게 위험한 현실관임을 제대로 간파한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반해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계급에게는 실증주의라는 것이 전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된다.
플라톤의 예술론에서 엿보이는 아케이즘 지향적 요소도 그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직결된다. 그는 조형예술 영역에서 새로 일어난 환각주의 경향을 거부하고 페리클레스 시대의 고전주의 예술을 편애했으며, 영원불변의 법칙에 묶인 듯 보이는 형식 위주의 이집트 예술을 찬미했던 것이다.
전쟁과 패배의 시대, 전쟁경기와 전후경기의 시대, 개인경제가 번성한 시대, 그리고 풍부한 구매력을 지닌 사회계층이 대두하여 소득의 일부를 예술작품에 투자하며 예술작품을 소유하는 일이 점차 하나의 허영이 된 시대 ㅡ 이러한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예술을 과대평가하며 미적 가치를 근거로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 미적 기준으로 삶의 문제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반예술적 태도는 이러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비로소 설명할 수 있다. 예술의 표현수단이 감각적인 형식에 매여 있다는 순수한 이론적 인식만이 문제였다면 플라톤이 그처럼 예술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민적 취미

예술이 신흥 사회계층까지 널리 퍼진 결과 생활과 직접 연결된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고, 이제까지 경쟁자가 없던 상류사회의 전통적 교양에 뿌리박은 예술작품들은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소재 선택의 새로운 영역이 열리고 새로운 모티프와 장르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4세기 예술의 특색인데, 이것은 주로 새 시대의 풍조에 포함된 다음 두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새로운 주정주의, 즉 한층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는 당시의 일반적 풍조로서 새로운 비극 관객층의 감상적인 속물적 감정은 그 표현의 하나에 불과하다. 또 하나는 묘사 가능한 범위를 제약해온 터부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금지돼온 소재의 하나는 초상과 전기이고, 또하나의 대표적인 예는 여자의 나상이다. 새로운 예술 애호가층이 대두하여 취미가 변화하면서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서도 비교적 젊고 충동적인 신들 ㅡ특히 아폴론,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ㅡ이 즐겨 그려진 반면 제우스, 헤라, 아테나 등 비교적 나이 많고 엄숙한 데가 있는 신들의 인기는 점점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끝으로 이 시기 예술양식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색의 하나인 조형예술의 건축으로부터의 해방은 부유한 금리생활자 계층이 새로 발흥되면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5세기 말까지는 조각이라면 압도적 다수가 건축과 결부된 것이다. 분명히 건축의 일부가 아닌 경우에도 조각은 어떤 의미에서든 건축의 틀 안에 있었다. 그런데 국가를 대신하여 개인이 예술의 보호자로 등장함에 따라 소규모 조각, 사적 성격의 조각, 움직이기 쉬운 조각을 만드는 일이 점점 빈번해졌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는 이제 더이상 대신전이 세워지지 않게 되고, 건축계에서 조각가들에게 대량주문을 하는 일도 없어졌다. 이 시대에 큰 건축물이 만들어진 것은 동방에서였다. 따라서 기념비적인 조각의 새로운 발전도 그쪽에서 일어났다.

05. 헬레니즘 시대

사회적 평준화

헬레니즘 시대,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300년 동안에 예술사의 중점은 확실히 그리스에서 동쪽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그리스와 동방 사이의 영향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어서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인 혼합문화를 찾아보게 된다. 이 개별 민족문화의 평준화 현상이야말로 헬레니즘 문화가 지니는 두드러지게 근대적인 성격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계급 간 대립이 더욱 첨예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일종의 사회적 평준화가 이루어져 출생신분에 따른 갖가지 특권은 하나씩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세습군주제가 종말을 고한 이래 신분차별 철폐를 향해 나아온 일련의 발전과정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제국내 거주자는 주거지만 바꾸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도시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도시국가 시민이념의 소멸을 말해준다. 이제 시민이란 단순히 같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묶인 공동체의 성원을 뜻하는 것으로, 전통적 집단에 소속되기보다는 자유로이 이동함으로써 이득을 보장받았다. 이익공동체는 동일한 인종이나 동일한 국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주어진 기회의 동질성에 따라 구성되었다. 이제 추국가적 자본주의 단계가 찾아온 것이다. 국가는 경제적 능력의 우열에 따라 인재의 우열이 가려지도록 장려했는데, 그것은 생존경쟁의 승자가 세계제국 건설에도 유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른 계급 사람들과 격리해 혈통의 순수함과 전통문화를 지키는 일만을 생각하는 과거의 귀족계급은 그와 같은 세계 제국의 건설과 통치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새로운 제국은 이런 귀족을 기울어가는 그들의 운명에 내맡김과 동시에, 인종적, 신분적 선입견 없이 경제실력에만 의존하는 시민적 지배계층의 출현을 촉진했다. 그리고 이 신흥 상층계급은 그 경제적 유동성과 무의미해진 전통에서의 탈피, 그리고 융통성 있는 합리주의적 정신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그 세계관에서는 지난날의 중산층에 매우 가까우며, 헬레니즘 세계제국이 포괄하는 여러 민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는데 가장 훌륭한 접합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합리주의와 절충주의

이제 국가에서 가장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된 합리주의는 문화의 모든 영역에 진출했다. 즉 인종과 신분상의 차이가 평준화되고, 경제상의 자유경쟁을 저지하는 모든 전통이 폐지됐을 뿐만아니라 학문과 예술활동도 문학과 예술의 교류라는 형태로 초국가적으로 조직되며, 문명세계의 문인과 학자는 하나의 큰 작업공동체로 통합되고, 종합적인 연구소, 박물과, 도서관이 설치되었으며, 지적인 영역에서도 분업의 원리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합리주의 정신이 침투한 결과, 전통적인 각종 조직을 대신하여 특정한 과제를 목표로 한 작업공동체가 도처에서 생겨나고, 정신활동에서도 전통적인 태도나 지향보다 경쟁능력과 실적을 중시하게 되었다.  공동체 의식은 학문연구에서 그때까지는 꿈도 못 꾸던 학자간 협력, 연구과제 분담, 연구성과의 통합 등으로 나타나 오로지 업적을 목적으로 하는 합리주의적 연구방법을 가능케 함으로써 마치 경제적 합리주의 원리가 그대로 학문의 영역에도 적용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당시에도 이미 개인적인 요소가 배제되고, 연구과제는 세부적으로 분할되어 개인의 능력이나 기호와는 관계없이 공동 연구조직에 의해 분배되었다.
학문 연구가 이렇게 전문화되고 비인격화된 것의 필연적 결과는 오로지 지식의 축적만을 중시하는 풍조와 절충주의의 위험이었다. 절충주의는 헬레니즘 시대 학문적 업적의 근본 특징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예술작품의 근본 특색이기도 하다. 역사를 존중하며 고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과거 여러 형태의 예술유파에도 폭넓은 이해심을 보인 이 시대는, 필연적으로 자극에 무차별하게 반응을 보이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 예술의 발전을 한눈으로 둘러볼 수 있는 완벽한 조각진열관을 만들려고 했고, 또 중요 작품의 실물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경우에는 하다못해 복제품이라도 만들려고 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수집은 이런 학문적 계획성이라는 점에서 근대 박물관과 미술관의 선구 격이었다.

새로운 예술장르

문학에서 이 시대의 고도로 발달한 초상예술에 대응하는 장르는 당시 점점 더 인기를 차지하게 된 전기와 자서전이었다. 심리적 통찰력이 경제생활에서 경쟁에 필수적인 무기가 되자, 인간적인 기록이 갖는 가치는 한층 높아졌다. 이 시대의 높아진 심리적 관심은 이밖에도 또다른 두 예술장르를 낳았다. 장편소설과 부르주아 희극이 그것이다.

06. 제정시대와 고대 후기

헬레니즘 에술의 시대에 뒤이어 로마 예술의 세계지배 시대가 시작된다. 제정시대를 경계로 예술의 장래를 좌우할 만한 발전은 그리스 예술이 아니라 로마 예술에서 일어난다.  헬레니즘에서 과장적인 바로끄와 우아한 로꼬꼬가 막다른 골목에 도착한 끝에 이미 낡아빠진 형식만을 되풀이하게 된 반면 제정하 로마는 제국의 통일적 통치체제와 더불어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제국예술을 만들어냈고, 이 제국예술은 그 근대적 성격 때문에 머지 않아 도처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에서 그리스예술 애호가는 애초부터 교양있는 상류층에 한정되었고, 중산층은 이에 대해 그다지 이해가 없었으며 일반 대중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몇 세기 동안에는 귀족계급이 지배적 지위를 잃고 도시를 버렸으며, 장군이나 황제가 하급병사나 지방 하층계급에서 나오는 일도 드물지 않았고, 당시의 가장 중요한 종교운동(기독교)이 최하층 민중 사이에서 일어나 상류층으로 침투해가는 상황이었던 만큼, 예술 분야에서도 민중적 정신과 지방정신이 갈수록 힘을 얻어 고전주의 시대의 갖가지 이상을 차차 몰아내게 되었다.

로마의 초상조각

이러한 발전은 특히 초상조각에서, 그동안 로마 주택의 현관에 모셔놓은 선조의 상이라는 형태로 이어져오던 에트루리아(이탈리아 중북,북부 지방의 옛 명칭) 등 이탈리아의 토착적 전통과 결합하게 되었다. 이 초상조각을 대중적이라고 한다면 좀 과장일 것이다. 장례 때 선조들의 조각을 세워놓는 풍습은 원래 귀족만이 지닌 특권이다가 공화제 시대 말기에 서민층까지 퍼졌다고 하지만, 조상의 상을 놓고 제사 지내는 일은 역시 귀족계급의 장례식에 관계된 행사였고 일반 서민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초상예술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리스인들이 공적 기념비로 쓰기 위한 것 외에는 거의 초상조각을 만들지 않은 반면 로마에서는 그것이 대부분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각이 그리스 고전미술을 대표하는 것처럼 로마시대 후기와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의 민중예술, 즉 모든 사람을 향해 모든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는 예술이기도 했다. 회화가 당시만큼 대량으로 생산된 일은 이제껏 없었고 또 그것이 사호한 일시적인 목적으로 이용된 것도 전에는 없던 일이다. 일반대중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을 때, 어떤 큰 사건의 경과를 보고하려고 할 때,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납득시켜서 대중의 마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 ㅡ 이런 경우에는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예를 들면 개선행진을 하는 장군은 자기가 전쟁터에서 세운 공로, 정복한 도시, 적국의 항복 광경 등을 그림으로 그려 그 그림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도록 했고, 소송사건의 원고와 피고는 사건 관련 쟁점과 범죄의 내용, 피고의 알리바이 등을 그림을 통해 생생한 인상으로 재판관과 방청인에게 알리고자 했다. 또 재난을 면한 신자들은 그 재난의 내용과 그들 개개인의 중요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그림으로 그려 신에게 바쳤다.

로마시대의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로마시대 후기의 예술양식중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인상주의 양식이다. 이것은 연속적 묘사법에서 볼 수 있는 서사시적 양식과는 반대로 오히려 서정적인 것으로, 단 한번뿐인 통일된 시각상을 그 주관적인 순간성 그대로 포착하려는 것이다. 비크호프는 이 방법을 연속적 방법의 전제이자 그 유기적인 보완이라고 보지만 이 두 양식 사이에 그렇게 직접적인 연관성을 상정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이 두 양식은 출현한 시점도 다르고 외적, 내적 전제조건도 다르다. 즉 인상주의 양식이 1세기에 고전주의 미술의 분화과정의 정점에 등장했다면, 연속적 묘사법은 2세기에야 비로소 나타나며 원래 고대 그리스로마의 그것과는 다른 예술의욕이 상당히 거칠고 비속한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도, 비록 서사시적 양식과는 별개의 의미이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의 해체를 촉진하는 힘이 되었다. 즉 대상을 좀 더 가볍고 평면적으로, 좀 더 스케치풍으로 그림으로써 말하자면 대상의 물질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들 대상은 색채현상이나 분위기 효과의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됨으로써 물체로서의 중량감, 구조적인 단단함, 물질적인 밀도를 잃고 처음부터 어떤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이상을 표현하는 듯한 분위기를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주의적, 유물론적 경향을 지닌 인상주의는 그것과는 정반대 양식인 유심론적 표현주의의 길을 열었고, 이 점에서는 알다시피 신석기시대 기하학적 양식의 모태가 된 구석기시대 회화의 표현주의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07. 고대 그리스로마의 시인과 조형예술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를 통해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눈에 띌 정도로는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조형예술가를 판단하는 기준, 시인과 비교해 그의 상대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이 그것이다. 시인이 때때로 절대적인 추앙을 받아 선지자나 예언자, 인간에게 명예를 주고 신화를 해석하는 자로 간주되곤 했다면, 조형예술가는 비천한 장인의 위치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돈만 주면 그만인 부류로 여겨졌다. 이러한 차별관념이 생긴 동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조형예술가는 보수를 위해 일했고 또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지만, 시인은 경제적 의존상태가 가장 심했던 시대에도 자기에게 의식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의 손님으로 통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조각가와 화가의 일은 지저분한 재료와 도구를 사용하여 손을 더럽히는 것이라면, 시인은 산뜻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깨끗이 씻은 손을 간직할 수 있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이것은 현대 같은 기술중심시대가 아닌 당시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중대한 차이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조형예술가의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고 육체적인 노력이 따르는 고달픈 작업임에 비해 시인의 노고는 전혀 사람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하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경향과 모든 작업활동, 아니 일반적으로 모든 생산적 노동을 경시하는 풍조는 정치, 전쟁, 스포츠 등 상류층 본연의 일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에 비해 이런 행위가 아무래도 예속, 봉사, 복종을 상기시키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농경과 목축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그것이 주로 여자의 손으로 행해지던 시대에 이르면 남성의 주요한 일은 전쟁이고 수렵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스포츠가 된다. 전쟁과 수렵은 다같이 체력과 단련, 용기와 숙련을 요하는 것이고 바로 그 점에서 매우 명예롭게 여겨졌다. 이와 달리 끈기와 세심한 주의, 힘겨운 노동이 따르는 일은 모두 약함의 증거로 보였고 따라서 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괴리

육체노동에 대한 경멸과 예배수단이자 선전도구로서의 예술에 대한 존중이라는 내적 모순에 직면한 고대인들은 예술가 개인과 작품을 분리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았다. 즉 작자는 경멸하면서 그가 만든 작품은 존중하는 것이다. 예술가와 작품은 완전히 하나라는 신화는 일단 제쳐놓고 작품보다 오히려 작자 쪽을 중시하는 현대의 예술관을 이런 고대의 사고방식과 비교해본다면, 당시와 현재의 사고방식에서 노동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지배계급과 철학자 들에게는 충분한 여가야말로 모든 선과 미의 전제조건이었고, 그것을 가진 자만이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겼다. 여가가 있는 사람만이 지혜에 이르고 내면적 자유를 획득하여 인생을 지배하고 향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이 금리생활자층의 사회적 입장과 직결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칼로카가티아의 이념이라든가, 육체와 정신의 능력을 골고루 발달시킨다든가, 일면적인 전문지식이나 편협한 전문가 기질을 경멸한다든가 하는 것도 모두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고방식의 명료한 표현이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하면 어떤 민족이 노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그 민족의 생활이상을 낳은 생활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현대 서양의 생활이상을 낳은 중세 시민계급이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에서 모두 점차 귀족을 능가해간 반면, 그리스인들의 생활이상은 영웅시대 즉 유용성을 초월한 세계에서 발단한 것으로,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이 조상의 유산에 매달려왔던 것이다. 올림치아 경기에서 삶의 이상을 찾던 사고방식이 퇴색할 무렵이 되어서야, 즉 도시국가의 몰락과 때를 같이해서야 겨우 노동은 완전히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조형예술도 근본부터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로마는 이 점에 관한 한 전면적인 변혁은 끝내 수행하지 못했다.

예술작품의 시장

승리에 도취하여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려 했던 고전기 아테네에서는 조형예술의 의미가 유례없이 커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와 조각가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영웅시대와 홈로스 시대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다.  조형예술은 여전히 손재주로 인식되고, 조형예술가는 지식과 교양 같은 고급한 정신적 가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장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낮은 보수를 감수하면서 일정한 주소도 없이 방랑생활을 했으며, 고용된 도시에서도 이방인이고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국가는 미술품의 거의 유일한 큰 발주자였다. 미술품제작비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도시국가 이상의 주문을 하기는 커녕 이와 어깨를 견주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에서 조형예술가의 생활조건이 눈에 띄게 변한 것은 대왕을 위해 행해진 선전활동과 직결된다. 새로 일어난 영웅숭배 풍조에서 생긴 개인숭배 경향은 명예를 주는 자와 명예를 받는 자라는 이중의 측면에서 조형예술가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알렉산드로스 후계자들 궁정의 미술품 수요는 개인의 손에 부가 축적됨으로써 생겨난 수요와 함께 미술품 소비를 증대했고, 그 결과 미술품의 가치가 올라가고 조형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었다.
예컨대 화가 파라시오스는 그림에 서명을 하며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곤 했는데 이것은 얼마 전만 해도 생각조차 못하던 일이다. 또한 화가 제욱시스는 작품을 팔아서 예술가로서는 전대미문의 재산을 얻었고, 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을 뿐 아니라 그의 측근이기도 했다. 엉뚱한 짓을 하는 화가와 조각가에 관한 가십 따위에도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는 현대의 예술가 숭배를 연상케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제4장 중세
 

01. 초기 기독교 예술의 정신주의

중세의 개념

실제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띤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어쨌든 이 세 시기 사이에 놓인 단층은 중세 전체를 그 앞뒤의 시대와 갈라놓는 단층보다도 크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세 시기의 경계선을 긋는 여러가지 변동 ㅡ 공로에 따라 귀족이 될 수 있는 기사계급의 탄생이라든가 봉건적 자연경제에서 도시적 화폐경제로의 전환, 서정적 감수성의 탄생과 고딕 자연주의의 발달, 시민계급의 해방과 근세 자본주의의 맹아 ㅡ은 근대적 생활감정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르네상스가 가져온 정신적 업적을 오히려 능가할 만큼 중요했다.
일반적으로 중세예술의 특색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특징들, 그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단순화와 양식화 경향, 공간적 깊이와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와 기능을 무시한 자의적인 취급 등은 중세 초기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도시적 화폐경제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세 예술과 문화의 근본적인 특색으로서 일관된 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다. 즉 중세예술은 중체 초기에서 전성기로 넘어가면서 그때까지 엄격한 여러 구속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지극히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예술로서의 성격은 잃지 않았으며, 교회 중심으로 조직되고 기독교 일변도의 감정을 지닌 사회의 표현으로 남아있었다. 중세 예술이 이와 같은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각종 이단과 분파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집단이 정신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그들이 설치한 구원 기관인 교회의 사회적 권위가 본질적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고대 말기와 초기 기독교 예술의 정신주의

처음 수백년간의 초기 기독교 예술은, 로마시대 말기 예술의 단순한 아류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요컨대 그 연장이었다. 이 두 예술은 매우 닮은 것으로, 결정적인 양식상의 변화가 생긴 것은 이교도 시대에서 기독교 시대로 오면서였다기보다 고대의 고전시대와 이후 시대 사이의 일이었다. 제정시대 후기,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의 작품에는 초기 기독교 예술양식의 본질적인 특징이 이미 모습을 드러낸다. 즉 여기에 나타난 정신화/추상화 경향, 평면적이고 비육체적이며 그림자 같은 형상에 대한 선호, 정면성/상징화 및 위계적 차이를 유지하려는 노력, 생기발랄한 유기적/식물적 생명에 대한 무관심, 단순히 개별적/일회적/풍속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에 대한 냉담함 등은 요컨대 카타콤의 벽화나 로마 교회의 모자이크 예술 및 초기 기독교 필사본 등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동일한, 감각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비 그리스로마적 예술의욕인 것이다.

고전기 그리스로마의 사실주의에서 멀어져간 기독교 예술은 두 방향을 취하게 된다. 하나는 상징주의 방향으로, 거기서는 모사보다는 그려야 할 신성한 대상의 정신을 화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였고, 따라서 세부 묘사 하나하나가 모두 기독교적 구원을 가르치는 교리의 암호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초기 기독교 예술의 특징 가운데 그 자체로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이런 상징적, 관념적 의미가 예술작품 각 부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예컨대 그중에서도 현저한 특징으로 실물의 크기를 무시하고 대상의 정신적 중요성에 따라 비례를 조정하는 것이나, 주요 인물이면 비록 장면 뒤쪽에 있어도 앞쪽에 있는 조역들보다 크게 그리는 이른바 역원근법이라든가, 대표적 인물은 감상자의 주의를 끌도록 언제든지 유별나게 정면을 향하게 그린다거나, 부수적인 디테일은 아무렇게나 다루는 일 따위가 모두 그런 것이다.
기독교예술이 취한 또 하나의 방향은 정경이나 동작 또는 일화적인 사건 등을 보는 사람 눈앞에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서사시적, 설명적 양식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부조와 회화, 모자이크 들은 예배적 대상으로 생각한 것 외에는 모두 성서 이야기나 성자전을 그림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작자의 유일한 관심은 이야기가 명료하고 줄거리 진행에 분명치 않은 점이 하나도 남지 않게 하는데 있다.

교육수단으로서의 예술

새로운 기독교적 생활이상에 따라 먼저 변한 것은 예술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었다. 그리스로마 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미학적인 것이었는데, 기독교에서 예술작품의 가치는 미학 외적인 것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적 유산에서 제일 먼저 잃어버린 것은 형식의 자율성 원리였다. 중세에는 오로지 종교가 있을 뿐 학문을 위한 학문이 없었듯이 신앙과 무관한 자율적 예술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은 적어도 그 효과가 넓은 범위에 미치는 점에서는 학문보다 더 중요한 도구였다.
예술형식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서로마제국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는 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로마시대 후기의 표현주의는 이때에 비로소 이른바 초월적 표현양식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이제 예술은 현실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아니, 해방이 너무도 철저히 행해진 결과 그로 인한 현실 묘사의 포기는 그리스 초기의 기하학적 양식을 상기시킬 정도였다. 여기서도 장식적 배열원칙이 구도의 중심을 이루는데, 그러나 이 배열은 이미 단순한 장식적 조화의 표현이 아니고 어떤 신성한 계획과 우주적 조화의 표현이다. 인물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한다거나 군중을 닮은 꼴로 배치한다거나 인물의 동작을 리드미컬하게 처리하며 색채를 장식적 효과 위주로 조립하는 등의 단순한 장식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배열원리는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의 본당 모자이크에서 그 극치를 이루는 새로운 형식체계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자이크에 그려진 장면의 배경은 공기도 빛도 없고 깊이도 원근도 대기도 없는 공간이며, 인물은 납작하고 실물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으며 무게도 그림자도 담겨 있지 않다. 공간의 한 부분을 일관되게 그려냈다는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처음부터 전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인물은 각기 고립된 상태로 그려져 있으며 인물 상호간의 관계는 순전히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물들은 더욱더 움직임과 활기가 결여되며 더욱 정신화되고 딱딱해지고 현세와 인생에서 멀어져간다. 이런 효과를 거두기 위해 사용되는 예술적 수단의 대부분, 그 중에서도 특히 공간감각의 소실, 인물의 평면성과 정면성, 간소화와 단순화의 원리 등은 이미 로마시대 후기 예술과 아주 초기의 기독교 예술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런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의 독자적 양식을 형성한 것은 이 시대에 와서였다. 그전에는 이러한 여러 요소가 아직 개별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고 또 나타나더라도 어떤 특정한 구도상의 필요와 관련해서만 성립했다면, 새 시대의 반 현세적 경향은 이미 모든 부분에 완전히 침투하여 모든 것이 딱딱하고 생기 없고 차가운 형태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렬하고 지극히 본질적인 생명에 가득 찬 것으로 되었다. 즉 낡은 육체적 인간이 사멸하고 새로운 정신적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제2장 20절)라고 한 바울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더불어 그 시대가 추구하던 감각적 쾌감도 자취를 감추었다. 고대의 영광은 사라지고 로마제국도 무너져버렸다. 교회는 로마 지배계급의 정신으로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자칭하는 새로운 권세의 이름으로 승리를 구가했다. 그리고 절대권을 완전히 장악한 지금, 교회는 그리스로마와 거의 아무 공통점도 없는 예술양식을 스스로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02. 비잔띤 제국의 황제교황주의 체제하의 예술양식

비잔띠움의 비도시문화적 성격

서방 각지와 달리 그리스계의 동방지역에서는 민족대이동 시대에도 문화단절이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마제국에서는 거의 완전히 소멸한 도시경제와 화폐경제도 동방에서는 여전히 번성했고 그전보다 오히려 활기를 띠었다. 꼰스딴띠노뽈리스의 인구는 5세기에 이미 100만명을 넘었고, 당시 사람들이 이 도시의 부유함과 화려함을 얘기하는 것은 마치 남의 나라 예기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중세를 통해서 비잔띠움(현재의 터기 이스딴불, 꼰스딴띠노스 황제가 이곳으로 천도한 330년부터 동로마제국 시대에는 꼰스딴띠노뽈리스로 불림)은 무진장한 재물을 가지고 금빛 찬란한 궁전이 즐비하게 섰으며 일년 내내 축제가 끊일 날이 없는 경이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천하다고 생각하는 서방의 사고방식은 이해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궁정 자체가 여러가지 사업을 독점해서 마치 상공업을 두루 관장하는 거대 기업체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비잔띠움의 경제구조가 자본주의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재산을 만드는 주된 방법이 상업이 아니라 토지소유였던 가장 큰 원인은 궁정의 이와 같은 독점으로 인해 경제적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즉 상업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은 개인의 손안에 들어오지 않고 국가와 궁정에 귀속되었다.

비잔띤 제국의 통치형태는 황제교황주의, 즉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한 사람의 전제군주의 손에 집중되는 형태였다. 황제가 교회 위에까지 군림하는 근거가 된 것은 교부들이 전개하고 유스띠아누스 황제가 법률로 선포한 제왕신권설로 이것은 왕이 곧 신의 후예라는 이미 낡은, 기독교 신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신화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다. 비록 황제가 바로 신이라는 주장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 해도 황제는 적어도 신의 대리자, 유스띠아누스가 즐겨 쓴 말을 빌리면 신의 '대사제'는 될 수 있었다. 서방에서 비잔띤 만큼 완전한 제정일치가 행해진 나라는 없었고, 근세사에서도 군주에 대한 봉사가 신에 대한 봉사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는 점에서 비잔띤에 비길만한 국가는 없었다. 서방에서 황제는 언제나 세속의 권력자에 지나지 않았고, 황제 대 교회의 관계는 노골적인 적대는 아니라해도 적어도 부단한 경쟁관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동로마 황제는 교회, 군대, 행정조직이라는 세 위계질서 전부에 군림하며 교회도 국가권력의 단순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관료귀족

종교와 세속 양 세게에 걸친 독재권력을 확립하고 신하들에게 때에 따라서는 견딜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던 동로마제국 황제의 전제체제는 인민의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스스로를 전시하고, 위엄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감싸며, 신비적인 의식의 그늘에 숨을 필요가 있었다. 대중을 위축시킬 만한 장려함과 일체의 임기응변이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예법을 지닌 헬레니즘 시대 동방의 궁정은 이런 효과를 발휘하기에 아주 알맞은 장소였다. 그러나 비잔띤 궁정은 모든 정신생활과 사교생활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점에서는 헬레니즘 시대 궁정보다 더욱 독점적이었다. 특히 고급예술품 주문에서 궁정은 최대의 고객이었을 뿐 아니라 거의 유일한 고객이기도 했다. 예술이 이만큼 철저하게 궁정화된 것은 베르사유 시대에 와서나 다시 볼수 있는 일이다. 예술이 이만큼 철저히 종교적, 정치적 충성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일관한 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귀족계급이 군주에게 이처럼 의존적인 경우도 없었고, 귀족계급이 이토록 철저하게 관료귀족이며, 군주에 의해 만들어지고 군주의 뜻에 맞는 사람만 귀족이 될 수 있는 그런 관료계급을 가진 나라도 없었다. 즉 비잔띤의 귀족은 결코 혈통만 존중하고 다른 계급에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카스트가 아니었으며, 엄격한 의미에서 귀족도 못 되었다. 황제의 독재 밑에서는 세습적 특권이 출현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상류층 내지 권력게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관리계급과 동일했고, 특권을 누리는 것은 관직에 있는 동안에만 가능했다.

궁정양식과 사원양식

하지만 교회 자체가 절대적인 권력이 되고 스스로 세계의 지배자라는 인식을 갖지 않았다면 비잔띤 궁정예술이 곧 기독교 예술의 모범처럼 되는 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 예술이 존재하는 곳 어디나 비잔띤 예술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비잔띤 황제가 이미 누리고 있던 권력과 권위를 서방의 가톨릭교회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목적은 동서가 모두 같았다, 즉 절대적 권위, 초인적 위대함, 신비적 위엄 등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건축, 특히 교회의 내부구조에는 벽면을 장식하는 모자이끄를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제왕적이고 권위적이며 위용을 자랑하는 정신이 나타나 있다. 기독교 교회는 신을 모시는 곳이기보다 오히려 그 고장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건축 구성상 중점이 건물 외면에서 내부로 옮겨져 있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신전과는 애초부터 본질적으로 구별되었다 그렇다고해서 이것을 곧 민주적 원리의 표현이라고 보고 교회가 신전보다 대중적인 건축양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중점이 밖에서 안으로 이동하는 현상은 이미 로마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것만으로는 건축물의 사회적 기능을 단정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초기 기독교 교회가 로마의 관청 건축에서 이어받은 바실리까(고대 로마에서 재판소나 집회장 등 공동 용도로 쓰인 직사각형 건물로, 교회 건축에서는 대개 중앙 네이브(신랑)와 2열 또는 4열의 기중으로 분리된 좌우 측랑으로 구성된다) 형식은 건물 내부가 제각기 다른 격식과 가치를 가진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고, 특히 성직자 전용 콰이어(교회 건축에서 합창대석, 설교대 등이 있는 부분, 일반 신도가 앉는 공간보다 약간 높고 창살로 격리된 경우가 대부분)가 평신도가 앉는 자리와 격리된 만큼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귀족적 지향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비잔띤 건축은 초기 기독교의 이 바실리까 형식에다가 돔을 덧붙임으로써 건축물 내부의 갖가지 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이런 '비민주적' 공간구성을 다시 한걸음 진전시킨 결과가 되었다. 말하자면 건물 전체의 관이 되는 이 돔은 내부 공간의 여러 부분 사이의 격차를 한층 강조하고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03. 우상파괴운동의 원인과 결과

정치적 군사적 배경

페르시아인, 아바르인, 슬라브인, 아랍인 등을 상대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전쟁을 계속하고 있던 황제들의 제일 목표는 군대의 유지였고, 이 지상명령 앞에서 일체의 다른 고려는 포기해야만 했다. 우상숭배 금지도 이런 전시조치의 하나였다.
우상파괴운동은 실제로는 예술배척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 일반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예술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즉 공격대상은 종교적 내용을 가진 예술작품뿐이고, 박해가 가장 맹위를 떨친 시대에도 장식용 회화는 관대하게 봐주었다. 운동의 배경은 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반예술적 경향 자체는 이 운동의 동기들 가운데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는, 어쩌면 가장 덜 중요한 하나의 저류에 지나지 않았다. 교회는 기독교가 국가의 공인종교가 될 때까지는 조형예술 작품을 예배용으로 제공하지 못하도록 했고 카타콤에서도 엄격한 제한하에 겨우 허용하는 정도였다. 교회안에서 조형예술 작품은 일체 금물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는 우상숭배가 재발할 우려는 사라졌다. 그리하여 이제 조형예술은, 비록 이에 대한 반대와 제한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교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구세주상은 종교화의 표본처럼 되어 마침내는 일종의 부적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예술양식에 미친 영항

사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예술활동은 중단되었다기보다 단지 그 방향이 새로이 조정되었을 뿐이다. 더욱이 이런 방향 조정의 결과, 이미 지극히 형식주의적이 되고 너무나 신선미 없이 반복을 거듭하던 예술품 제작에 오히려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준 느낌마저 있다. 이제 화가들은 어쩔수없이 순전히 장식적인 과제만을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 헬레니즘적 장식양식이 부활하며, 동시에 교회의 요구를 고려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자연에서 취한 제재를 이제까지 허용되던 정도 이상으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제재가 수렵장면이나 전원풍경에 이르면 인물도 훨씬 유동적이고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지며, 입체감이 더해지고 정면성의 원리에 얽매이는 일이 적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세속적인 양식 시기의 자연주의적인 성과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교회 그림의 영역으로 확대한 9~10세기에 걸친 비잔띤 예술 제2의 전성기도 우상파괴운동의 결과의 하나로 보는 주장은 옳은 것이다.

04. 민족대이동기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문예부흥까기

어떤 자연체험을 말과 리듬으로 표현하는 것과 선과 색으로 묘사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 전자의 영역에서 우수한 작품을 내놓는 시대도 후자에서는 별 성과가 없을 수고 있고, 한 방면에서는 자연에 대해 아직 비교적 자유스럽고 신선한 관계를 보존하고 있는 시대가 다른 분야에서는 자연에 대해 이미 완전히 인습화되고 도식화된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문학작품에서는 "작은 새는 그 금빛으로 빛나는 부리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내고 녹음이 짙은 금빛 나무에 집을 짓는 티티새는 라이그 호 너머로 그 울름소리를 보낸다" 같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백조의 발단장'이라든가 '까마귀의 겨울코트' 식의 표현을 구사하던 아일랜드 사람들이 그림에서는 병아리인지 새끼 솔개인지 알 수 없는 새를 그려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러 예술 장르가 완전히 동일한 양식경향을 드러내려면 예술이 그 표현수단을 극도로 제한된 가능성 가운데서 쟁취할 필요 없이 여러가지 가능한 형식 중에서 어느정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발전 단계에 도달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구석기시대 회화는 고도의 자연주의 양식을 보여주지만 동시대 문학에는 ㅡ만일 구석기시대에 문학이라는 것이 있었다하더라도 ㅡ 이에 대응할 만한 것이 없었음에 틀림없다. 지금 우리가 거론하는 고대 아일랜드에서도 문학의 비유적 표현은 탁월한 자연묘사를 가능케 했지만 그보다 역사가 얕고 민족대이동 시대의 장식예술밖에는 참고할 것이 없던 당시의 회화는 그런 수단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교회의 교양 독점

5세기에는 문학과 예술을 즐기는 교양있는 귀족이 아직 도처에 있었지만 6세기에 이르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신흥귀족은 교양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귀족뿐 아니라 교회조차도 문화적 황폐의 시기를 경험했다. 교회 고위층에서도 문맹에 가까운 사람이 드물지 않았고, 이런 상태에 관한 보고를 남긴 뚜르의 그레고리우스 자신도 상당히 위태로운 라틴어를 쓰고 있는데, 이는 교회 공용어인 라틴어가 7세기에 이미 일반인들에게는 사어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교회 관련 학교 외의 학교는 점차 쇠퇴해서 없어졌다. 얼마 안 가 교육기관이라고는 성직자의 후계자를 확보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주교들이 관장하던 본당 부속학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교호가 서양사회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기관이 될 수 있었던 저 교양의 독점을 처음 이룩한 것은 이렇게 해서였다. 관리의 임명과 교육이 교회의 손에 맡겨졌다는 사실이 이미 국가가 성직자 중심으로 된 사실을 말해주거니와, 성직자 이외의 교양계층도 자기 자식의 교욱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본당 부속학교, 그리고 후에는 수도원학교였던 만큼 아무래도 교회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마련이었다.

05.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낭만주의 문학사가 내세우는 민중서사시는 원래 민중과 아무 관계도 없는 문학이었다. 서사시의 근원이 된 송가와 영웅가요는 에나 지금이나 가장 철저한 귀족계급의 문학이었다. 그것은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민중에 의해 불리고 전파된 것도 아니며 또 민중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민중의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도 아니었다. 철두철미하게 직업시인의 손으로 된 문학이고, 귀족예술이었다. 그것은 상류 무사계층의 전쟁에서의 공적과 경험을 내용으로 하고, 그들의 명예심에 영합하며 그들의 영웅적 자존심과 비극적 영웅적 도덕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들 상류 무사계층만을 청중으로 상정했을 뿐 아니라 적어도 최초 얼마동안은 그 작자도 이 계층에서 나왔던 것이다.
물론 옛날 게르만인들은 이런 귀족문학 이전에 또는 그와 동시대에까지도 일종의 공동체 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의식의 일부를 이룬 문구와 주문, 수수께끼, 격언과 사교적인 가벼운 노래 등의 시, 다시 말해서 무용곡과 노동요, 그리고 향연이나 장례식에서 불린 합창가 등이 있었다. 이런 문학은 반드시 그것을 여럿이서 함께 부르거나 읊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아직 분화되지 않은 공동체 전원의 공유재산이었다. 이런 공동체 문학에 비하면 송가와 영웅가요는 민족 대이동 시대에 이르러서야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음유시인의 유래

음유시인은 중세 초기의 궁정가인과 그리스로마 이래 미무스의 혼혈아라고 말해진다. 미무스는 고대 이래 계속 번창해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완전히 소멸해버린 시기에도 왕년의 미무스 광대들의 후예는 여전히 제국 영내를 다니면서 그 단순하고 서민적인 즉흥연기로 하층민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중세 초기의 게르만 여러 나라에서는 도처에서 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9세기에 이르기까지 궁정시인과 가인들은 그들과 엄격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와 다음 몇세대의 교회중심주의의 결과 이들 궁정시인은 상류사회의 고객을 잃고 하층민 사이에서 미무스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비로소 그 경재에서 견디기 위해 스스로 미무스 연기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가인과 희극배우는 둘 다 같은 계층 사람들을 상대로 활동하면서 서로 뒤섞이고 영향을 주고받게 되면서, 그 결과 얼마 후에는 양자를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돼버렸다. 이미 미무스 연기자도 궁정가인도 없고, 오직 음유시인만이 남은 상황이 온 것이다. 음유시인의 가장 큰 특징은 다면성이다. 신분이 높고 고도의 전문기술을 갖춘 영웅가요의 시인 대신에 이제 속된 팔방미인이 등장한다. 이미 그들은 결코 시인이나 가인만이 아니고 악사 겸 춤꾼, 극작가 겸 배우, 광대 겸 곡예사, 미술사 겸 곰재주 놀리는 사람, 한마디로 당대의 만능연예인이자 여흥진행 담당자였다. 전문성이라든가 높은 품위 또는 진지한 위엄 등을 거론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궁정시인은 아무에게나 만만한 광대로 몰락했고, 이러한 사회적 지위의 저하가 궁정시인에게 끼친 영향은 그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만큼 충격적이어서 그들은 끝내 이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이 시기를 경계로 그들은 떠돌이와 창녀, 수도원에서 도망친 수도사들과 추방당한 학생, 돌팔이 사기꾼과 거지 등 낙오자 대열에 들게 되었다.
음유시인들이 들려주는 곡조는 이미 힐데브란트의 노래(가장 오래된 게르만족의 영웅서사시) 같은 비장하고 침울하며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사시를 음송할 때에도 그들은 강렬한 자극, 대단원의 효과, 절체절명의 순간 등을 추구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자 했다.

예술 일반이 그렇듯이 서사시에서도 무엇보다 의식적인 능력과 배경지식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우리는 감정적인 것, 충동적인 것보다도 합리적인 것을 더 많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그 자체의 전설과 그 스스로의 영웅적 역사를 갖고 있다. 즉 그것은 시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만이 아니라 후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도 존속해간다. 모든 시기는 이들 작품에 자기 식의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것을 자기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각각의 해석들은 작품에 대한 직선적인 접근이 아니라 작품 주위를 천천히 맴도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다름 시대가 내리는 해석이 언제나 전보다 더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현재의 정신에서 출발한 모든 진지한 해석의 노력은 작품이 갖는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게 마련이다. 역사적 현실을 기반으로 영웅서사시를 새롭게 해석하는 이론도 모두 적극적인 의의를 띤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는 역사적 진실이나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대상의 핵심에 닿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방시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06.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의 조직화

카를대제의 재위기간이 끈난 뒤로 궁정은 이미 제국의 정신적 중심지가 아니었다. 학문, 미술, 문학 일체의 거점은 이제 수도원이고, 당대의 정신적 소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도원 부속 도서관, 서실, 사본 제작소에서 진행되었다. 기독교적 서양미술이 최초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이들 수도원의 노력과 재산 덕분이다. 특히 수도원의 발전에 따라 문화중심지의 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예술에서도 좀 더 다양한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육체노동

베네딕트회 계율은 학문적인 일뿐 아니라 육체적인 작업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오히려 육체노동을 더 중요시했을 정도였다. 귀족의 영지와 마찬가지로 수도원도 될 수 있는 대로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갖추고 필요한 것은 모두 자기 영지 내에서 생산하고자 했다. 수도사들의 활동범위는 밭일과 정원일에 그치지 않고 수공예 분야까지 미쳤다.
서양에 조직적인 노동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것은 수도원이었다. 중세 산업의 대부분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옛 로마시대 산업의 후예들인 수공업자들이 도회지에 아직 다수 남아있기는 했지만 도시경제가 다시 숨을 돌이킬 때가지는 극히 제한된 규모로 생산을 계속했을 뿐이고 수공업 기술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었다. 수공업은 수도원에서 비로소 가내경제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시간 관리가 최초로 행해진 것도 여기에서였다. 즉 하루의 시간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이용하며, 시간의 경과를 재어 종을 쳐서 알리는 등이 수도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분업의 원리는 생산의 기초가 되고, 개별 수도원 내부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수도원들 상호 간에도 실시되었다.
수도원 부속공장은 결코 물품 생산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한 시설이 아니요 일종의 공학기술연구소를 겸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베네딕트회 수도사 테오필루스는 11세기 말에 쓴 그의 교본 제반기예교정에 유리 제조법, 창에 끼우는 유리화 굽는 법, 유화물감 혼합법 등 여러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각종 발명을 많이 열거해놓았다.

미술학교로서의 수도원

떠돌이 예술가와 장인 들도 대부분은 수도원 부속 제작소 출신이었다. 수도원 부속제작소는 중세의 미술학교를 겸하여 젊은 기술자 양성에 특히 큰 힘을 기울였다.
수도원이 교회 건축 발달에 기여한 바는 대단히 크다. 도시가 성장하고 대성당 부속 건축소가 생기기까지 교회 건축에 종사하던 예술가와 장인 중에 교적을 지닌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생각되지만, 여하간 교회 건축의 대다수 또는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의 책임자는 수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사라기 보다는 건축주로서의 책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예술품보다는 역시 육체노동이 적게 드는 공예품이 수도원 부속 제작소의 정신에 가장 알맞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중세미술의 익명성

낭만주의자들은 장대한 교회 건축의 발생에 대해서도 영웅서사시의 발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해석을 했다. 그들은 민중문학이 그렇다고 믿었듯이 교회 건축도 이른바 유기적, 식물적 성장의 원칙에 따랐다고 생각하여 건축이 계획적으로 행해졌다든가 통일적인 지도원리에 따라 진행됐다든가 하는 사실은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서사시에 개인 작자가 있었음을 부정한 것과 같은 논법으로 이들 건축 배후에 있는 건축가의 존재를 부정했다. 바꿔 말하면 그드릉ㄴ 예술에서 결정적이 역할을 하는 것은 숙련된 예술가의 계획적인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전통에만 따르며 소박하게 창작하는 장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예술가가 항상 익명으로 일했다는 것도 중세에 관한 낭만주의자들의 신화에 속한다. 근대적 개인주의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그들은 무명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대함의 표현이라고 보며, 오로지 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작품을 만들고 스스로는 수도실의 어둠 속에 숨어서 개인의 이름은 전혀 표면에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던 무명 수도사의 존재를 유독 강조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세 예술가로서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거의 수도사들뿐이며, 더구나 예술활동이 수도사의 손에서 속인의 손으로 넘어오던 바로 그 무렵부터 익명의 작품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즉 교회미술 작품에 작자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수도사들 자신이었던 만큼 그들이 자기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 즉 수도사에게 우선권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술가의 이름을 기록하곤 했던 연대기의 작자들도 ㅡ그들 모두가 예외없이 수도사였으며 ㅡ자기와 같은 교단에ㅐ 속하는 작자에 한해서나 그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하더라도 중세예술이 원칙적으로 익명예술이었다는 것은 낭만파의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 미니아뛰르 영역에서는 서명이 든 작품의 예가 무수하게 있고, 더욱이 그것은 어느 시기의 작품에나 다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또 건축물의 경우에도 중세 건축 가운데는 파괴된 것도 많고 기록이 없어진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판명된 예술가의 이름이 실로 25,000개에 달한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아무개가 만들었다고 새겨진 경우에도 그것은 중세적 표현방법에 따라 실제 일에 종사한 건축사가 아니라 건축주 내지 주문자인 경우가 매우 많다는 점, 또 이렇게 이름이 남은 주교, 수도원장, 기타 고위성직자들도 대개는 건축사나 건축감독이 아니고 말하자면 건축위원회 위원장에 불과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됨은 물론이다.

07. 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귀족계급과 수도사집단

로마네스끄 예술은 수도원의 예술인 동시에 귀족계급의 예술이기도 했다. 이 사실이야말로 수도사집단과 귀족계급 사이의 정신적 연대관계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점이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고위 제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세 교회의 요직도 귀족계급 출신자에게만 개방되어 있었다. 막대한 재사과 다수의 부하를 거느린 수도원장들을 포함한 수도회들은 또한 막강한 교황들을 배출했고 황제나 왕에 대한 가장 강력한 조언자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경쟁자이기도 했던 만큼, 일반 민중에게는 세속의 권력자나 마찬가지로 아득하게 높은 존재였다. 그들의 귀족적인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끌뤼니 수도원에서 발단한 금욕적인 개혁운동 이후의 일이며, 민주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말할 수 있는 것은 13세기에 금욕주의적 쇄신운동이 일어난 다음부터다. 광대한 소유지를 갖고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마치 요새처럼 거대한 벽을 세운 수도원은 왕과 제후의 성과 저택만큼이나 일반 민중으로서는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특권층의 주거였다. 따라서 이들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미술품이 세속 귀족계급의 정신과 일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봉건제도의 발달

프랑크 왕국의 군인귀족과 관료귀족에서 출발하여 이미 9세기 말에는 완전히 봉건화되어 있던 귀족계급은 이 무렵에는 사회의 최첨단에 서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과 이들 귀족의 관계는 역사가 진전함에 따라 완전히 역전되었다. 즉 원래는 왕위가 세습적이고 왕은 그때그때 조언자나 관리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귀족의 특권이 세습되고 왕은 오히려 선출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중세 초기 게르만계와 라틴계 여러 나라가 직면한 갖가지 어려운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이미 고대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당시 사람들도 콜로나투스 제도라든가 물납세 도입, 국가 세입에 대한 지주책임제 등 이미 봉건적 색채를 띤 여러 제도로 그에 대처하려 했다. 행정기구와 군대를 유지할 재원의 부족, 이민족의 침략 위험과 이에 맞서 광대한 영토를 방위하는 어려움 같은 문제들은 이미 로마시대 말기부터 있었는데, 거기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훈련된 관리의 부족, 이민족 침략 위험의 증대와 장기화, 그리고 주로 아랍인에 대항하기 위해 장갑기병대를 도입할 필요성 등으로 인해 새로운 난제가 추가되었다.

봉건제도는 9세기의 국가가 이런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의 권한, 예켠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 대신 군사적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런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새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새로운 것은 이렇게 주어진 토지가 봉토의 성격을 띠고 토지를 받은 사람이 토지를 준 사람에 대해 가신의 관계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말을 바꾸면 이제까지의 단순한 종속관계 대신에 이제는 계약에 의한 의리관계, 상호봉사와 상호책임의 관계, 쌍방이 서로 의리와 개인적 충성을 맹세하는 관계가 봉건제도와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최초에는 다만 토지에 대한 기한부 수익권에 지나지 않던 봉토가 9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세습적인 것이 되었다.
실질적인 통치자는 대지주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관리나 용병, 총신이나 벼락감투를 쓴 사람, 영지를 받았거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영주의 자격으로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제 등장한 지배계급은 통치에 따르는 모든 특권, 행정기구 전체, 군대의 모든 중요한 지위, 교회 위계질서에서 높은 자리 전부를 자기 것으로 삼고, 그리하여 국가 내부에서 일찍이 어떠한 사회계급도 가져보지 못한 막강한 지위를 획득했다.

폐쇄적 가정경제

봉건제도는 화폐경제나 교역 없이 토지소유가 유일한 수입원이자 재산형태였던 중세 초기에는 나라의 통치와 방위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의 가장 편리한 해결책이었다. 이미 고대 로마 말기에 시작된 문화의 농촌화 현상은 이제 여기서 완성되기에 이른다. 경제는 전적으로 농업화하며 생활은 완전히 시골생활이 되었다. 도시는 매력을 잃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여기저기 고립해 흩어져 있는 작은 촌락에 국한되기에 이른다. 화폐도 교통수단도 없고 도시와 시장도 거의 없어진 만크 사람들은 되도록 외부 세계에 의존하지 않아야 했고, 외부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모두 단념해야만 했다. 그 결과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생산하게끔 하는 아무런 자극이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일의 경제학자 카를 뷔허는 이 제도를 '폐쇄적 가정경제"라 부르고 화폐도 교역도 없는 완전한 자급자족체제를 그 특징으로 보았다.
이런 경우에 '교환행위가 없는 자연경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시장을 갖지 않은 경제'라고 수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뷔허가 열거한 중세적 가정경제의 특색은 사실을 과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저부 꾸며낸 것은 아니다.

전통주의적 사고방식

중세 초기 경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인 동시에 이 경제가 당시의 정신문화에 가장 깊이 영향을 끼친 측면은 자급에 필요한 한도를 넘어서 생산하려는 의욕이 전혀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 따라서 기술적인 발명이나 생산체제의 개혁을 전혀 외면한 채 전통적인 생산방법과 생산속도가 언제까지나 온존되었다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좀바르트도 말했듯이 당시의 경제는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순수한 '지출경제'이고 따라서 경제성이라든가 이윤이라는 개념, 계산과 투기에 대한 감각, 또는 주어진 자원을 목적에 맞게 합리적으로 사용한다는 관념 따위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경제가 이처럼 전통주의적, 비합리주의적인 데 상응하여 사회형태도 정체되어서 계층간의 장벽은 견고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신분의 구별은 단순히 의미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분질서의 장벽을 무시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신의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되었다. 경제와 사회를 전통에 묶어놓는 것과 동일한 경직된 태도가 학문과 과학에서 새로운 사고의 발전을 지체시키고 예술에서 새로운 체험양식을 지연시키며 로마네스끄 예술 역사에서 거의 200년 동안 어떤 중대한 양식상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한, 거의 둔중할 만큼 안정된 면모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경제 역역에서의 합리주의 정신, 정밀한 생산방법에 대한 이해, 타산적인 투기능력이 전혀 없고 실생활에서 정확한 숫자와 시간, 가치 일반의 수량화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는 상품, 화폐, 이윤 등의 개념을 기초로 한 사고범주를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중세 초기에는 진보 개념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며 새로운 것을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중요시한다는 생각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오히려 오래된 것, 옛날부터 전해진 것을 충실하게 지켜나가려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근대과학의 진보 개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권위에 의해 보증된 기존의 진리를 해석하는 데에도 해석의 독창성보다는 진리 그 자체를 확인하고 확증하는 편을 훨씬 중요시했다.
당시의 형이상학적, 종교적 세계관은 모든 지상적인 것, 인간저인 것을 피안적, 신적인 것과의 관계에 놓고 보며, 만물을 어떤 피안적 의미와 신적 의도의 표현으로 해석했으며, 교회는 이를 무엇보다 성직자들에 의해 실현되던 당시의 신정체제에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로마네스끄 건축

하지만 교회의 절대주의적 문화정책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10세기 말 이후, 즉 끌뤼니 수도원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으로 새로운 정신주의적 경향과 지적 경직성이 대두한 이후부터였다. 이제 수도사들은 그들의 전체주의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괴로운 세상을 피해 죽음을 동경하는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람들을 만성적인 종교적 흥분상태에 가두어두며,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관해 설교하고, 순례와 십자군을 조직하며 황제나 왕을 파문하기도 했다. 교회는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전투적 정신 아래 중세문화의 건설이라는 대사업을 완성하는데, 중세문화가 이렇게 독자적이고 통일적인 존재로 등장한 것은 1000년대 무렵에 들어서였다.

로마네스끄 양식의 거대한 교회가 건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인데,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중세미술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다. 이러한 문화적 융성, 그중에서도 건축의 획기적인 발전은 이 시기에 교회재산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교단개혁의 시대는 동시에 수도원을 위한 막대한 기부와 헌납의 시대이기도 했다. 교단의 재산만 등가한 것이 아니라 주교구의 재산도 크게 늘어났는데, 이런 경향은 왕들이 반항적인 신하를 억압하기 위해 주교들을 자기편으로 삼고자 했던 독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왕들의 이런 재정 원조에 힘입어 이제 거대한 수도원 교회와 나란히 거대한 주교좌 성당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널리 알려진바와 같이 당시의 왕들은 일정한 주거지를 갖지 않은 채 신하들을 대동하고 다니며 주교좌나 수도원에 머물곤 하는 생활을 했다. 수도와 거처를 갖지 않았던 만큼 직접 자신의 건물을 건립할 일이 없었고, 다만 주교들의 계획을 원조함으로써 자신의 건축의욕을 충족했다. 이들 로마네스끄 양식의 교회는 건축주의 의향이 의향이었던 만큼 절대권력과 무진장한 재산의 표현으로 사람을 위압하는 장대한 건축물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신의 성채'라 불렀는데, 실상 그것은 당시의 성채나 궁전과 마찬가지로 견고하고 웅장했으며 그것들이 위치한 고을이나 촌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컸다.
로마네스끄 미술의 엄숙함이라든가 묵직하고 큼직한 맛, 답답하리만큼 평온하고 진지한 점 등르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를 로마네스끄 미술의 아케이즘적 요소, 즉 단순하고 양식화된 기하학 형식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과 결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로마네스끄 예술의 종교적 성격도 중세 사람들의 생활이 속속들이 종교화되어 있었던 데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로마네스끄 예술의 종교적 성격은 궁정사회, 도시당국, 국가의 중앙권력 등이 붕괴한 결과 실질저긍로 교회가 예술품의 유일한 고객이 되었다는 사정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하여 정신문화가 완전히 교회화된 나머지, 예술품은 이미 미적 감정의 대상이 아니고 '예배, 제물, 헌납의 연장'으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보다도 중세가 선사시대에 가까웠다.
교회의 선전수단의 하나였던 중세미술의 사명은 대중을 어떤 막연하게 종교적이고 엄숙한 기분에 끌어들이는 것 이상일 수 없었다. 종교적 묘사에 포함된 흔히 난해한 상징적 의미나 세련된 예술형식을 일반 신도들은 이해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었다. 로마네스끄 예술의 형식이 초기 기독교 예술의 형식보다 간결하고 단순했던 것은 결코 그것이 더 민중적이고 순진해서가 아니다. 형식이 간소화된 것은 대중의 취미와 이해력에 맞게 타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교양보다 권위를 내세우는 지배계급의 예술관에 영합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수난.

로마네스끄의 그리스도 수난상은 천대받고 고난에 찬 신의 묘사를 거부하던 과거 시대와 구세주의 상처를 일일이 들추는 데서 오히려 쾌감을 맛보던 이후 시대 사이의 중간지점에 서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은 초기의 기독교들에게 구세주가 죄인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좀 난처한 것이었다.

궁정적, 기사적 낭만주의

고딕의 발생은 근대 예술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자연에 대한 충실, 감정의 깊이, 감각성과 감수성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양식상의 이상은 고딕의 소산이었다. 고딕 예술에서 볼 수 있는 감수성과 표현방식에 비하면 중세 초기의 미술은 유연성이 없이 딱딱할 뿐 아니라거칠고 매력없다는 인상마저 준다. 미술은 고딕에 이르러서야 또다시 정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미술이란 말의 본래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담은 작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까닭은 무엇인가? 이처럼 현대인의 감각에 접근한 새로운 예술관은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일까?

도시의 재흥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낸 서양은 중세 초기의 사회보다는 도시경제가 발달한 무렵의 고대 그리스로마에 가까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한때 고대 세계에서도 그랬듯이 생활의 중심은 또다시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모든 새로운 것이 도시에서 발생하며, 모든 길이 도시로 통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여행자는 수도원 소재지를 중심으로 여행계획을 세운 반면, 이제부터는 또다시 도시가 사람들의 합류점, 접촉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도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도시국가와는 달랐다. 중세 도시와 고대 도시국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추자가 주로 행정의 중심지였던 데 반해 전자는 거의가 그저 물품 교역의 중심지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중세 도시의 오래된 안정적인 생활형태의 붕괴는 고대세계 도시공동체에서보다 더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행되었다. 물품 판매는 생산자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12세기 이후로는 원생산자 이외에 독립해 있을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도시 수공업자들과 독자적인 직업계층을 구성하는 전문화된 상인층이 발생하게 된다.
뷔허의 경제단계 이론에서 말하는 도시경제란 이제까지의 자급자족경제에 대립하는 의미에서의 주문생산, 즉 상품이 그것을 생산한 경제단위 속에서는 소비되지 않는 경제체제를 뜻한다. 이것이 바로 다음단계인 국민경제와 다른 점은 상품의 판매가 여전히 직접교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 즉 대개의 경우 상품은 생산자에게서 소비자로 직접 옮겨가며, 재고 비축이나 자유시장을 위한 생산은 일절 이루어지지 않고 생산자에게 알려진 특정 고객의 직접 주문에 응한 생산만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화폐경제

주문생산과 시장생산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이루는 '투자의 위험부담'은 아직 거의 전적으로 상인만의 것이었고, 여하간 시장이라는 예측하기 힘든 요소의 변동에 가장 직접적으로 매달린 것은 상인층이었다. 그들은 화폐경제의 정신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대표했으며, 이윤과 영리를 중심으로 움직여나가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가장 진보적인 인간형이었다. 특히 이제까지 단 하나의 중요한 재산형태였던 토지소유 이외에 유동적인 영리자본이라는 새로운 부의 형태가 생겨난 것은 그들의 공적이었다.

문화의 세속화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도시의 예술이자 시민적인 예술이었다. 즉 수도원과 귀족의 예술이던 로마네스끄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도시적, 시민적이었고, 대성당 건축에서는 비성직자 계층의 발언권이 더욱더 증대하고 이에 비례하여 성직자들의 영향이 감소했다는 의미에서도 도시적, 시민적이었으며, 끝으로 이들 교회 건축은 한 도시의 재산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고 이미 교회의 어느 고위성직자가 자기의 재력만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에서도 도시적이고 시민적이었다. 그런데 시민적 세계관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비단 대성당 건축뿐만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사문화 전체가 옛날부터의 봉건적 위계질서적 생활감정과 새로운 시민적, 자유주의적 사고방식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시민계급의 영향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것은 문화의 세속화 현상이다. 이미 예술은 보통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소수자만이 나눌 수 있는 암호가 아니라 거의 누구에게든 이해될 수 있는 표현수단이었다.
중세초기의 안정된 사회와는 달리 이제 인구의 많은 부분이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을 수행하고, 신자들은 순례의 길에 나서며, 상인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녔고, 농민은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가 하면 장인과 예술가는 각지의 건축장인조합을 돌아다니고,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에서 대학으로 이동했으며, 방랑문인 사이에서는 방랑생활을 찬미하는 일종의 로맨틱한 풍조마저 일게 되었다.

기사계급

12세기에 일어난 사회구조상의 변화는 결국 출생에 따른 신분차이에 직업에 의한 신분차이가 중첩된 것이었다. 기사계급이라는 것도 나중에 세습신분으로 변했지만 처음에는 직업에 의해 형성된 신분이었다. 원래 기사는 직업군인 계층이었고 그중에는 온갖 잡다한 가문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한때는 제후와 귀족, 대지주 들이 모두 군인이었고 그들의 소유지는 주로 군사적 봉사에 대한 포상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 봉토에 따랐던 의무는 시간이 갈수록 잊혔고, 전쟁에 익숙한 오래된 귀족계급 수는 아주 줄어들었거나 원래부터 매우 적었기 때문에 쉴새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싸움의 필요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제 전쟁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ㅡ 이제까지의 제후치고 전쟁을 하려 들지 않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ㅡ이제까지의 가신들보다도 신용할 수 있는 또 수직적으로도 많은 군인계층의 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큰 봉건영주의 궁정이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종신으로는 영주의 재산 및 토지 관리인, 궁정 부속 각종 공방의 감독, 친위대와 경비대 무사 등이 있었고, 특히 이들 친위대와 경비대에 시중드는 소년, 마부, 하사관 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기사는 이 계층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원래는 신분이 자유롭지 않았다. 기사집단이 하나의 계급으로 확립될 때까지는 양자가 모두 귀족의 종신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제후과 대지주 모두가 말을 탄사들과 헌신적인 가신을 꼭 필요로했다. 하지만 자연경제하에서 이들 가신의 수고에 보답할 길이라고는 봉토를 주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봉 해위는 11세기에 시작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봉토에 대한 종신들의 욕망은 거의 채워졌다. 영지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종신이 귀족이 되는 첫걸음이었다.

기사의 계급의식

기사라는 귀족의 탄생도 농노를 시민으로, 부자유스러운 농민을 자유신분의 임금노동자나 독립경영인의 소작인으로 바꾸어놓은 당시 사회 일반의 유동화 경향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난다. 기사계급은 12세기 말 13세기 초에 이르러 다른 집단과 엄격히 구별되는 폐쇄적인 계급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기사의 자제만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귀족으로 대우받을면 영지를 받을 능력이나 높은 생활수준으로는 이미 불충분했다. 여러가지 엄격한 전제조건을 채운 위에 엄숙하고 격식을 갖춘 의식을 거쳐서 정식으로 기사로 임명되어야만 했다. 즉 귀족 신분으로 진출하는 길은 또다시 폐쇄적으로 된 것이다.
생활태도와 도덕체계의 여러 원리가 기사적 서사시나 서정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명확성과 엄격성을 띠게 되는 것은 이 시대에 이르러서다. 어떤 특권계급에 새로 가담한 사람들은 그 계급의 범절이나 체면과 연관되는 갖가지 문제에 관해서 원래 그 계급의 대표자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며, 그 계급에 단일성을 부여하고 다른 계급과 구별해주는 온갖 이념을 그 이념 속에서 자라나온 사람들보다 훨씬 강하게 의식한다는 것은 사회계급의 역사에서 흔히 되풀이되는 널리 알려진 현상이다.

기사계급의 도덕체계

교회는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 이러한 기사귀족의 형성을 촉진하고, 이들의 새로운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함으로써 사회적 신용을 높이고, 약한자, 학대받는 자에 대한 보호를 그들의 손에 맡겨 말하자면 그들을 예수를 위한 전사로 취급했고, 그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다. 교회의 명백한 본래 의도는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화의 세속화 과정을 막으려는 것이었는데, 이런 경향은 대부분 거의 아무런 재산도 없고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이들 기사들에 의해 촉진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기사계급 속에 잠재한 세속적 경향은 매우 강했으므로, 교회의 가름침을 그대로 따르면 여러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교리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기껏해야 타협적인 데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도덕체계, 새로운 연애관, 그리고 이 연애관의 산물인 그들의 문학 등 기사계급의 모든 문화적 업적은 세속적 경향과 종교적 경향, 감각적 경향과 정신적 경향 사이의 대립관계의 표현인 것이다.
기사계급의 새로운 생활감정이 가장 순수하게, 또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특색인 기사도의 덕목과 좁은 의미의 귀족적인 덕목이다. 즉, 한편으로는 패자에 대한 관용, 약자의 보호와 여성에 대한 존중, 훌륭한 범절과 여성에 대한 멋스러운 예우 등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말하는 신사에게 남아 있는 특성들, 예컨대 너그러움, 돈과 이해관계에 대한 초연함,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경위 바르고 체면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려는 태도 등이다.

궁정적의 개념

중세 기사계급의 문화는 궁정을 중심으로 한 문화로는 최초로 근대적인 것이었다. 궁정의 주인과 그의 신하와 거기 있는 시인 사이에 진정한 정신적 유대가 이루어진 궁정 문화는 이제까지 없었던 것이다. 이들 뮤즈의 궁정들은 이제 제후의 정치적 선전도구나 그의 보조금으로 경영되는 교육기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생활양식을 발명하는 사람과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 등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문화역군으로서의 여성 

중세 궁정문화가 이전의 모든 궁정문화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 뚜렷하게 여성적 성격을 띤 문화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여성의 영향이 이미 강했던 헬레니즘 시대 왕궁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중세 궁정 문화는 여성이 궁정의 정신생활에 참가하고 또한 문학작품의 방향 결정에도 참여했다는 의미뿐 아니라, 남성 자신이 여러가지 면에서 여성적 사고방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여성적이었다. 옛날의 영웅문학과 그 뒤의 샹송드제스뜨와는 달리 프로방스의 연애가요나 브르따뉴의 아서왕 설화는 무엇보다도 여성을 위해 씌여진 것이었다. 시인들은 여성을 염두에 두고 시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보았다. 고대에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요 전리품 쟁탈의 대상이며 노예에 지나지 않았는데, 중세 초기에도 아직 그들의 운명은 가족이나 영주의 자의에 맡겨져 있었다. 이런 여성이 이제 와서는 얼핏 보아서는 이해가 안될 정도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기사계급의 연애관

고대 및 중세 초기의 문학과 비교할 때 기사문학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색은, 기사문학에서는 연애가 정신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플라톤이나 신플라톤학파처럼 철학적 원리가 되지 않고 그 감각적 성애적 성격을 보존하면서 바로 이런 성격의 연애로서 도덕적 인격의 재생을 이룩하는 힘이 된다는 점이다. 연애가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찬미의 대상이 되고 사랑은 아끼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라는 감정을 낳았다는 점에서 기사문학은 새로운 것이었다.
노예 약탈과 부녀 납치가 다반사였던 고대와 영웅시대에는 남자쪽에서 구애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실은 남자 쪽에서 여자의 사랑을 구하는 것은 민중의 풍속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궁정적 연애서정시가 외부에서 받은 영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중세 라틴어로 씌어진 수도원 문학에서 왔다고 생각된다. 비록 기사문학의 연애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일부는 수도사들로부터 계승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 세속시인의 연애관이 전적으로 수도원 문학을 모범으로했다는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다. 기사계급 등장 이전부터 수도사들 사이에 연애의 봉사 전통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학자도 있으나 그것은 사실무근하다. 수도사나 수녀 사이에 오간 우애의 서한을 보면 이미 11세기에 일종의 과열된 감상적 관계가 엿보이는데, 그것은 우정이라고도 열애라고도 할 수 없는 관계였고, 그 속에는 기사적 연애에서 볼 수 있는 정신적인 경향과 관능적인 정신적 혁명의 한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기사계급의 연애서정시와 중세 수도원 문학의 관계는 직접적인 영향이나 차용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평행선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건 기사문학의 시인들은 작품 기법 면에서는 성직시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처음으로 시작을 시험할 때 교회 노래의 리듬과 형식을 염두에 두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궁정적, 기사적 연애에서 볼 수 있는 정신주의적 요소의 근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에 있다.

08. 고딕 예술의 이원성

고딕의 범신론과 자연주의

고딕시대의 정신적 유동성은 문학작품보다 조형예술에서 대체로 더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학활동은 그 중심을 이루는 사회층이 계속 변했기 때문에 그 발전이 때로는 상호 관련이 없는 개별적인 여러 단계의 축적이고 말하자면 단속적인 것이었던 데 반해, 조형예술 활동은 이 시대 전체를 통해 하나의 비교적 통일적인 직업층과 결부되어서 거의 단절없이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정체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의 원동력인 시민계급의 정신이 문학에서보다 조형예술에서 훨씬 신속하고 전면적으로 자기를 관철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혀예술 작품에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에서보다 한 층 명료한 형태로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지는 서양 정신의 일대 전환, 즉 신의 나라에서 인간세계의 좀 더 범상한 문제로의 복귀가 나타나 있으며, 예술적 관심의 중심이 위대한 상징이나 형이상학적 종합 같은 데서 떠나 직접 체험 가능한 것, 감각적이고 일회적인 것의 묘사로 이동하는 경향도 문학에서보다 먼저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종말 이래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했던 유기적 생명은 이제 다시 명예를 회복하고, 경험적 현실세계에 속하는 개개 사물이 예술적 묘사의 대상이 되기 위해 미리 피안적, 초자연적 권위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이러한 정신적 변혁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실계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덧없는 것일지라도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제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신을 표현하며, 따라서 예술의 관점에서도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비록 모든 것이 우선은 그것이 신을 증거함으로써만 존중받고 따라서 그것에 포함된 신성의 정도에 따라 엄중히 등급이 붙여지기는 하지만, 아무리 급이 낮은 존재라 하더라도 전혀 무가치하다든가 신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든가 따라서 예술가의 주의를 끌 자격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신이 세계의 밖에 서 있다는 사고방식 대신에 사물 자체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신적인 힘이라는 관념이 우세해진다. 신이 '세계를 외부로부터 움직인다'라는 사고방식이 봉건제도 초기를 지배한 독재적 세계관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자연계의 모든 존재에 내재하여 작용하는 신의 관념은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좀 더 자유로워진 사회의 세계관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만물의 서열이 형이상학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사회가 여전히 신분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그러나 최하급 존재도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이미 이 시대의 자유주의 경향이 나타나 있다.

꽃이 만발한 들판, 얼음 덮인 강, 봄과 가을, 아침과 저녁은 모두 영혼이 머무는 단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 영혼의 상응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보는 개인적인 시각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으며, 자연묘사는 여전히 경직된 틀에 박힌 것이고, 시인 각자에 의해 변형되거나 개인의 정열이 담기는 일은 전혀 없었다. 연애시에 나오는 봄 경치나 겨울경치는 똑같은 것이 백번이라도 되풀이되며 결국에는 공허하고 순전히 인습적인 형식으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애당초 자연이 예술의 대상으로 사람의 관심을 끌고 그 자체로서 묘사할 가치가 있다고 보이게 된 것만도 이미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자연 속의 어떤 개별적인 차이점을 발견하려면 우선 자연에 대해 눈이 열려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현장과 제작소

중세미술의 발전방향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미술가의 작업장이 점차로 건축현장과 분히되었다는 사실이다. 로마네스끄 시대에는 아직 예술가의 모든 이이 건물 자체에 딸린 것이었다. 교회의 그림장식은 모두 벽화였으므로 다른 곳에서 마무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건물을 장식하는 조작도 현장의 발판 위에서 제자리에 고정한 뒤에 작업을 했다. 즉 석공이 이미 벽면에 끼워넣어놓은 돌을 깎고 새겼던 것이다. 12세기에 들어서 건축장인조합의 발생과 더불어 여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즉 조합은 조각가에게 건축현장의 발판보다 쾌적하고 도구가 잘 갖추어진 작업장을 마련해주었다. 이제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조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뜰리에에서, 교회당 안에서가 아니라 교회 옆에서 하게 되었고, 조각품은 완성된 뒤에 건물에 설치되었다. 회화에서도 패널화의 대두로 벽화가 쇠퇴하면서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예술가가 일하는 장소는 완전히 건축현장과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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