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of Art
예경
2010
Ernst Gombrich
서론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색깔 있는 흙으로 동굴 벽에 들소의 형태를 그리는 그런 사람들이 미술가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물감을 사서 게시판에 붙일 포스터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미술이라 부르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며 고유 명사의 미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한 이러한 모든 행위를 미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그림을 볼 때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가지들을 연상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기억들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즐기게 도와준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다만 우리가 우려해야 할 점은 어떤 엉뚱한 기억이 우리들에게 편견을 갖게 할 때이다. 예를 들어 등산을 싫어하기 때문에 산 그림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등을 돌린다든지 할 때에는 그 그림을 즐기는 것을 방해한 혐오감의 원인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한다. 미술 작품을 싫어하는 것은 여러 가지 그릇된 이유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우리는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의 진실은 또한 표현의 진실과 같다. 사실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의 표정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을 좋아하게 만들거나 싫어하게 만들 때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좋아하며 그 때문에 깊이 감동받기도 한다.
미술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다른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실제 생활에서 본 것들을 똑같이 그려내는 화가의 솜씨를 칭찬하고자 한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실물과 꼭 같이' 닮아보이도록 그린 그림이다. 물론 이같이 실물처럼 표현해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가시적인 세계를 충실하게 표현하는 데 쏟아부운 그들의 끈기와 솜씨는 정말 찬양할 만하다.
그러나, 실물과 꼭 같이 보이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스케치 풍의 화법만이 아니다. 그들이 더 더욱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생각되는 것들로서, 특히 거기에 대해서 미술가가 '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현대의 작품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사실 현대 미술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흔히 들리는 불평인 자연 형태의 왜곡의 문제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미키 마우스는 실제의 취를 닮은 데가 거의 없지만 독자들은 그 꼬리의 길이에 대해서 신문에 격분한 투서를 보내지는 않는다. 디즈니의 매혹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더 이상 고유 명사의 '미술'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이 디즈니 쇼를 보러갈 때에는 미술전시회에 갈 때와 같은 편견으로 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현대 화가가 어떤 것을 자기 나름대로 그렸다면 그는 더 이상 더 잘 그릴 수 없는 솜씨가 서툰 사람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 미술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이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 설령 그들이 정확하게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은 그들의 이유는 월트 디즈니의 이유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정확성을 가지고 흠을 잡으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물이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을 성급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인습적인 형태와 색깔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초록색 풀과 푸른 하늘에 관해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것을 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면, 혹은 마치 우주 탐험 여행중에 다른 혹성에서 돌아와 지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본다면, 우리는 주위의 사물들이 엄청나게 놀라운 다른 색채들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가들은 때때로 그러한 우주 탐험을 다녀온 것같이 느낀다. 이러한 선입견을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단 거기에 성공한 미술가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때가 많다. 이러한 화가들은 우리에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룸다움의 존재를 자연에서 찾으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우리 자신의 창에서 벗어나 그들의 세계를 한번 힐끗 내다보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과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주제을 뜻밖의 방법으로 표현한 그림을 대했을 때 그것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하곤 한다. 우리는 작품에 표현된 이야기를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예전과 비슷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성경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는 감정이 격앙되기 쉽다.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대체로 대단한 열정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본 모든 그림을 잊어버리고,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있고 목동들이 아기 예수를 찬미하러 찾아오고, 어부인 베드로가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의 정경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성경을 참신한 안목으로 읽으려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이러한 노력이 분별 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격분하게 만든 경우도 수도 없이 발생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술작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만든 물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림이 액자에 끼워져서 벽에 걸리면 우리들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박물관에서는 으례히 전시된 작품을 만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원래 소으로 만지고 다듬어서 완성된 것이며, 거래의 대상이 되고 논쟁과 물의를 일으킨 대상이었다. 그리고 작품의 여러 가지 특징들 하나하나가 미술가의 결단에 의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화가는 그 특징들을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것들을 여러번 고쳤을 것이며, 저 나무를 배경에 남겨둘지 아니면 다시 그릴지 여러번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르고, 우연히 그은 붓획이 햇빛을 받은 구름에 예기치 않은 생동감을주는 것을 보고 흡족해 하거나, 또는 고객의 성화에 못이겨 어떤 인물을 더 그려넣었을지도 모른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그림과 조각 작품들은 원래 미술품으로서 진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술가가 작품을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그 작품을 만드는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우리는 꽃이나 옷이나 음식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까다롭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그처럼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으로 보이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미술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의 가치를 발휘할 때가 많다. 형태를 배합하고 색을 배열하는 문제에 있어 미술가는 언제나 '까다롭다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괴팍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화가는 우리들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명암과 질감의 차이를 식별할수 있다. 더구나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것들 보다는 훨씬 더 무한하며 복잡하다. 그는 두 세가지의 형태, 색깔, 또는 취향을 조화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형태와 색깔과 취향을 교묘히 다루어서 요술을 부려야 한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제대로' 되었다고 보일 때까지 화폭 위해서 수백 가지 색조의 농담과 형태를 조화시켜야 한다.
미술가가 올바른 균형을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있는 일이지만 만약에 우리가 그에게 왜 이러저러하게 바꾸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떤 고정된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그가 가야 할 방향을 느낌으로 갈 뿐이다. 사실상 어떤 시기의 일부 미술가나 비평가들이 그들의 미술의 법칙을 공식화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즉 신통치 않은 미술가들은 이러한 법칙을 적용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반면에 위대한 대가들은 그러한 법칙을 깨트리면서도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형태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각 시대의 미술가들이 이룩하려고 고심해온 그런 종류의 조화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이러한 조화에 대하 눙리의 느낌이 풍부해질수록 그만큼 더 그런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게 될 것이다. 차를 마시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 종류의 차가 다른 종류의 차와 맛이 다르다는 것을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차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맛을 음미할 여가와 의지와 기회가 있다면 그들은 선호하는 차의 유형과 혼합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감식가로 발전할 것이며 또 그들의 보다 큰 지식이 최상의 차를 즐길 수 있는 데 보탬이 되어줄 것이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분명히 음식과 술에 대한 것보다는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미묘한 맛을 발견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훨씬 진지하고 중요한 것이다. 결국 위대한 대가들은 미술 작품에 그들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 작품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으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최소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미술작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있는 것이다.
1. 신비에 싸인 기원
선사 및 원시 부족들 : 고대 아메리카
우리는 언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만약에 우리가 미술이라는 말이 사원이나 집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거나 문양을 짜는 것과 같은 행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세상에 미술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반면 미술이라는 단어를 어떤 종류의 아름다운 사치품, 박물관이나 전람회에서 진열되는 어떤 것, 또는 화려한 응접실을 꾸미는 값진 장식품같은 어떤 특별한 물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미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며 과거의 많은 건축가나 화가, 조각가들은 그런 것들을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세워진다. 이러한 건물들을 예배나 유희의 장소로, 또는 주거의 장소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건물을 무엇보다도 실용성이라는 기준에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성과는 별도로 사람들은 그 구조물의 디자인이나 비례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며 실용적일뿐만 아니라 '제대로' 지은 훌륭한 건축가의 노력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과거에는 회화와 조각에 대한 태도도 이와 비슷했다. 그것들은 순수한 예술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일정한 기능을 가진 물건으로 간주되었다. 건물이 세워지게 된 동기를 모르면 그것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대 미술품이 만들어진 목적을 모르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미술 작품의 제작 목적들은 더 명확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욱 생소해진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원시인'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우리보다 더 단순해서가 아니라(그들의 사고과정은 우리들보다 훨씬 더 복잡할 때가 많았다) 모든 인류가 거쳐온 문명 이전 상태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시인들에게는 실용성에 관한 한 집을 짓는 것과 상을 만드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의 오두막 집은 비바람과 햇볕으로부터,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만들어낸 정령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상도 그들이 자연의 힘처럼 현실적으로 여기는 다른 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림과 조각은 주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처럼 미술의 신비한 기원을 이해하려면 원시인들이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실용적' 위력이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금 만든 체험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영원을 위한 미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기하학적 규칙성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의 결합은 모든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형성한다. 우리는 무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와 회화에서 이런 점을 제일 잘 연구할 수 있다. 사실 '장식'이라는 단어는 죽은 사람의 영혼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미술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런 작품들은 감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살아있도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 아주 무시무시하고 까마득한 옛날에는 세력자가 죽으면 그의 하인과 노예들을 그의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는 그들을 희생히ㅕ서 그의 신분에 걸맞는 수행원을 대동하고 저승에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후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너무나 잔인하고 사치스럽다고 생각되었을 때 미술이 그 구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지상의 세력자들에게 진짜 하인들 대신에 그 대용물로서 하인들의 형사을 주었다.
이집트 미술은 미술가가 주어진 한 순간에 무엇을 볼 수 있느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나 장면에 대해 그가 알고 있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원시 시대의 미술가가 그가 구사할 수 있는 형상들을 가지고 그 상을 만들었듯이 이집트의 미술가들도 그가 배웠고 알았던 형태들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이집트 미술가가 그의 그림 속에 구현한 것은 단지 형태나 모양에 대한 그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 형태들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지식이기도 했다. 영어에서 우두머리를 big boss라고 하듯이 이집트 미술가는 우두머리를 그의 하인이나 그의 아내보다 더 크게 그렸다.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의 형식들이 마치 한 가지 법칙에 따라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창조물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규칙을 양식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양식을 구성하는 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눈으로는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이집트 미술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개개의 작품에 균형과 엄숙한 조화라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집트의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법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한다. 좌상의 경우 두 손은 무릎위에 올려야 하며, 남자의 피부는 여자의 피부보다 검게 칠해야 한다. 모든 이집트 신들의 모습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하늘의 신인 호루스는 매나 매의 머리 모향으로 그려야 하며, 장례의 신인 아누비스는 자칼이나 자칼의 머리 모양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미술가는 아름다운 문자 필기를 배워야만 했다. 그들은 상형문자의 형상과 상징을 명확하게 긜고 정확하게 돌에 새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일단 이러한 규칙들을 완전히 터득하게 되면 그의 수습 생활을 끝난다. 아무도 그가 배운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도 그에게 '독창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과거에 추앙을 받았던 기념비들과 가장 비슷한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3천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기간 중에 이집트 미술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집트가 파국적인 침략을 받은 후에 건설된 '신왕국'으로 알려진 제18대 왕조 시대의 아멘호테프 4세로 알려진 이단자였다. 그는 오랜 전통에 의해 숭상되어온 많은 관습들을 타파했다. 그는 그의 백성들이 믿는 이상하게 생긴 많은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신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아톤(Aton)으로 그는 이 신을 숭배했고 그를 태양의 모양으로 그리게 했다. 그럿은 끝에 손이 달려 있는 광선들을 발산하는 원반 형태였다. 그는 이 신의 이름을 본떠서 자기 이름을 아크나톤이라고 불렀고 그의 왕궁을 다른 신들을 믿는 사제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 즉 현재 텔엘아미르나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옮겼다.
그가 화가들에게 그리게 했던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볼 수 없고 대신에 그가 태양의 신 아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그들의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크나톤의 후계자는 투탕카멘인데 많은 보물들이 들어 있는 그의 무덤이 1922년에 발견되었다. 이들 중 어떤 작품들은 여전히 아톤 종교의 현대적 양식을 띠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특히 가정적인 목가풍의 배경 속에 왕과 왕비를 그려놓은 왕좌의 뒷면이 그러하다.
제18대 왕조 시대에 왕이 이러한 개혁을 쉽게 할 수 있었떤 것은 그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덜 엄격하고 굳이 있지 않은 외국의 작품들에 주의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섬나라인 크레타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어쓴데 그곳의 미술가들은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왕궁이 19세기 말에 크노소스에서 발견되었을 때 기원전 2천년 전에 그렇게 자유스럽고 우아한 양식이 개발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러한 양식의 작품들은 그리스 본토에서도 발견되었다 미케네에서 발굴된 사자 사냥용 단검은 운동감과 유연한 선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작품들이 당시 신성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던 이집트 장인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이집트 미술의 이러한 해방은 오랫동안 계속되지 못했다. 이미 투탕카멘의 통치 시대에 옛 종교가 다시 부활되었고 외부 세계로 열린 창문을 다시 닫혀버리고 말았다.
팔레스타인은 나일강변의 이집트 왕국과,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변에서 일어난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제국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스 말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계곡을 의미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미술은 이집트의 미술보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이는 어느정도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계곡에는 채석장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건물들은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풍화 작용으로 먼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돌로 만든 조각조차도 드물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까지 비교적 적은 수의 작품만이 전해내려오게 된 사실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주요한 이유는 아마도 이 민족들은 이집트인처럼 인간의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가려면 육체와 그 형상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메르 족이라고 불리우는 한 민족이 고대 도시 우르나를 통치했고 상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모든 가족들과 노예들을 함께 매장했었다. 이 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현재는 대영박물관에서 이 고대의 야만적인 왕들이 그들의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고도로 세련된 미술적 솜씨가 원시적인 미신이나 잔인성과 공존할 수 있었는지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미술가들은 무덤의 벽면을 장식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지만 그들 또한 이집트 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자가 내세에서도 계속 살아가게 도와줄 형상을 그려내야만 했다. 아주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전쟁에 패배한 종족들과 빼앗은 전리품에 대해 기록하는 전승비를 세우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시리아인들은 오래된 미신, 즉 그림 속에는 그림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미신의 지배를 그때까지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부상당한 아시리아 병사들을 그려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전통은 매우 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과거의 전쟁 왕들을 기리는 기념비들을 보면 전쟁에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거기에는 왕이 나타나기만 하면 적은 추풍 낙엽처럼 모두 쓰러지고 만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3. 위대한 각성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 그리스
오리엔트 전제 군주들의 통치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미술 양식이 생겨난 곳은 태양이 무자비하게 작열하여 강에 연해 있는 땅에서만 식량이 생산되는 거대한 오아시스 땅이었다. 이러한 양식들은 수천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존속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제국들과 인접하고 있는 동부 지중해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과 그리스와 소아시아 반도들의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끼고 있는 보다 온화한 기후를 가진 지역들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달랐다. 이 지역들은 한 사람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 광활한 바다를 항해하면서 무역이나 선상 강도질을 해서 얻은 엄청난 재화를 성이나 항구에 축적해놓고 있는 모험적인 뱃사람이나 해적왕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이들 지역의 중심지는 원래 크레타 섬으로 크레타의 왕은 한때 이집트에 사신을 보낼 만큼 부유하고 강했으며 크레타의 미술은 그곳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크레타 섬을 지배했던 종족이 누구이며 그리스 본토, 즉 미케네의 미술이 어디서 이식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최근의 발견에 따르면 크레타 인은 그리스 어의 초기 형태를 사용한 것 같다. 그 후에 대략 기원전 천 년경에 유럽으로부터 호전적인 종족들의 새로운 물결이 그리스의 험준한 반도와 소아시아의 서사시를 통해서만 이러한 장기전에서 파괴된 당대 미술의 뛰어남과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는데 새로운 정복자 가운데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그리스 종족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이 그리스를 처음 지배했던 초기 몇 백년 동안 그들이 만들어낸 미술품은 매우 조잡하고 원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크레타 양식의 쾌활한 운동감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딱딱한 점에 있어서는 이집트 미술가들을 능가하는 것 같다. 그들의 도기는 단순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어떤 정경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이 엄격한 디자인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단순성과 명쾌한 배열이 어느정도 그리스 인들이 초기에 도입했던 건축양식에 영향을 미친 것같이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도시와 마을에도 그런 양식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기원전 600년경에 그리스 인들은 단순한 건축 양식을 돌로 모방하기 시작했다. 나무 기둥들은 돌로 된 대들보를 받치는 원주로 바뀌었다. 이 대들보를 아키트레이브(Architrave)라고 부르며 원주위에 얹혀 있는 수평부분은 모두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라고 한다. 우리는 이 윗부분에서 목재 구조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마치 들보의 끝부분들이 나와 이쓴ㄴ 것처럼 보인다. 이 들보의 끝부분은 언제나 세 갈래의 홈으로 길게 파여 있어서, 이것을 그리스 어로 '세 개의 홈'이라는 뜻인 트리글리프(triglyph)라고 부른다. 이러한 들보 사이에 있는 벽면을 메토프(metope)라고 한다. 목재 건축물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이들 초기 신전들에서 놀라운 점은 전체의 단순성과 조화이다. 만약에 건축가들이 단순한 정사각형이나 원통형의 기둥을 사용했더라면 이 신전들은 육중하고 어설프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신에 원주의 모양을 중간 부분이 약간 부풀어오르게 만들고 위로 갈수록 차츰 가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기둥들은 탄력성 있게 보이며 기둥이 짓눌려 그 모양새가 찌그러진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채 지붕의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타아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짐을 지고 있는 것같이 보이게 한다. 이런 신전들 중에는 크고 당당한 것들도 있지만 이집트의 건축물처럼 거대하지는 않다.
이러한 신전들은 인간에 의해서 지어졌고 인간을 위해서 건립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 그리스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노예화하려고 했던 신격화된 지배자는 없었다. 그리스 종족들은 여러 개의 작은 도시들과 항구 도시에 정착하고 살았다. 이런 작은 공동체들 사이에는 경쟁과 마찰이 많았지만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공동체들 위에 군림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아티카(Attica)의 아테네는 미술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미술사 전체를 통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라운 혁명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 혁명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리스에 최초의 석조 신전들이 세워진 기원전 6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그 이전까지 고대 오리엔트 제국의 미술가들은 그들 특유의 표현방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충실하게 그들 선조의 미술을 본받으려고 애썼으며 그들이 배운 신성한 규칙들을 엄수하려고 했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돌을 가지고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남긴 업적을 발판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집트 조상의 것보다 설득력이 덜 하더라도 옛날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 자신의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제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 이미 만들어진 기존의 공식을 배운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스의 모든 조각가들은 특정한 인체를 표현하는 '자기의 방법'을 알고자 했다. 이집트 인들은 배워서 익힌 지식을 기초로 미술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혁명이 시작만 되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조각가들은 작업실에서 인체를 표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며 다른 작가의 혁신을 열심히 받아들여서 그들 자시의 발견에 더해갔다. 어떤 작가는 끌을 가지고 몸을 파는 방법을 발견했고 다른 작가는 입상을 만들 때 두 발을 모두 땅에 고정시키지 않는 것이 작품에 더 생동감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다른 작가는 입 모양을 약간 위로 구부리면 미소를 띠게 되어 얼굴이 더 생기 있게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집트의 방법이 여러가지 면에서 더 안전했으며 그리스 미술가들의 실험은 실패할 때가 많았다. 미소가 어색한 웃음으로 보이기도 하고 덜 굳어보이려고 만든 자세가 가식적인 인상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움 때문에 당황하거나 겁먹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을 따라 출발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의 회화가 어떠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보는 길밖에는 없다. 이들 그림이 그려진 그릇들을 일반적으로 화병이라 부르지만 원래 그것들은 꽃보다는 술이나 기름을 담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테네에서는 화병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주요 산업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공방에 고용된 미천한 장인들도 다른 미술가들처럼 최신의 제작 방식을 그들 제품에 도입하는데 매우 열성적이었다. 기원전 6세기에 그려진 초기의 화병들에는 아직까지도 이집트의 여러 화법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일단 고대의 규칙들이 깨지고 미술가들이 자신들이 본 것에 의지하기 시작하자 진정한 사태가 전개되었다.
화가들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발견, 즉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인체를 그림 표면과 경사지게 또는 직교하도록 배치하여 투시도법적으로 감축되어 보이게 하는 화법)을 반견했던 것이다.
기원전 500년 조금 전에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서 본 것을 그리는 시도를 감행했을 때 그것은 미술역사상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우리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수천 점의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미술품들 중에도 이와 같은 화법으로 그린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형태와 단축법을 발견한 그리스 미술의 대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해던 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이 시기는 바로 그리스 도시 국가의 시민들이 신들에 관한 오랜 전통과 전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편견 없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또한, 이 시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의 과학과 철학에 대해서 인류가 처음으로 눈을 뜬 때이며, 연극이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축제의 단계로부터 벗어나 처음으로 발전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가들이 도시 국가의 지식 계급에 속해 있었따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도시 국가의 정사를 맡고 시장에서 끝없는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던 부유한 그리스의 시민들은, 어쩌면 시인이나 철학자들까지도 대부분 조각가나 화가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얕잡아 보았을 것이다. 미술가들은 손으로 일을 했으며 또한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했다. 그들은 땀과 때에 절은 주물 공장에 앉아 일반 노역자들과 같이 일을 했으므로 교양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국가에 있어서의 그들의 비중은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장인들보다는 엄청나게 컸다. 왜냐하며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 특히 아테네는 부유한 속물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이들 보잘것 없는 노동자들도 어느 정도 국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된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는 바로 그리스의 미술이 그 발전의 최고봉에 도달했던 때이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후 시민들은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페르시아 침략군이 파괴한 것들을 다시 재건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성스러운 암반인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신전들이 이 대리석으로 다시 건립되었는데 그 전보다도 훨씬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페리클레스는 속물이 아니었다. 고대 저술가들은 그가 당대의 미술가들을 그와 동등한 사람들로 대접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페리클레스는 신전의 설계를 건축가 익티노스에게 위임했으며 신상들의 제작과 신전의 장식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에게 일임했다.
사실 고대의 고의 모든 유명한 조각 작품들이 없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기독교가 승리한 뒤로 이교도의 신상은 어느 것이나 때려부수는 것이 신성한 의무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관에 소장된 대부분의 조각품들은 여행자나 기념품 수집가들을 위해서, 또는 정원이나 대중 목욕탕을 장식하기 위해서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들이다. 우리는 이 복제품들에 대해서 감사해야만 한다. 이것들로 인해서 적어도 그리스의 유명한 걸작품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이 보잘것없는 모조품들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스 미술이 생기가 없고 차갑고 무미건조하며, 그리스의 조각상들은 진부한 미술 교육 시간을 생각나게 하는 창백한 얼굴과 무표정한 얼굴 표정을을 하고 있다는 통념은 바로 이 로마 시대의 모조품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의 조각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과 장엄한 고요함과 힘이 고대의 규칙들을 잘 지킨데서 나온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규칙들은 더 이상 미술가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애물이 아니다. 신체의 구조, 즉 신체의 각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하자면 주요 관절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옛부터 내려오는 생각은 미술가로 하여금 뼈와 근육의 해부학적 구조를 탐구하고 옷자락에서도 드러나 보이는 인체의 신빙성 있는 묘사를 이룩하도록 박차를 가했다. 사실 그리스 미술이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처럼 찬양받는 것은 규칙의 준수와 규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이 예술의 지침과 영감을 얻기 위해 거듭 그리스 미술의 걸작들로 눈을 돌리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자주 주문을 받았던 작품의 유형은 그들에게 사실적인 인체에 대한 지식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올림피아에 있는 신전들은 신에게 바쳐진 우승한 경기자들의 조각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한 풍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우승 선수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 하더라도 승리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교회에 증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를 위시한 그리스 인들의 큰 운동경기들은 오늘날의 운동경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리스 운동경기는 그들의 신앙과 의식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여기 참가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나 직업선수가 아니라 그리스 명문가의 자제들로서 경기에 이긴 승자는 신들로부터 무적의 마술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기를 개최하게 된 것은 승리의 조각상을 당대의 제일 유명한 조각가에게 의뢰한 것은 이 같은 신의 은총의 징표를 기념하고 또 영원히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올림피아의 발굴에서 이런 유명한 조각상들을 받치고 있던 받침대들은 수업이 발견되었으나 조각상 자체는 거의 없어졌다. 그 조각상들은 대부분 청동으로 주조되었기 때문에 중세에 와서 금속이 귀해지자 녹여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남아있는 흔적들만 가지고도 그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또 그들 육체의 근육이 얼마나 명확하게 표현되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단축법은 이미 이 미술가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술가는 그리스 미술이 이집트 인들로부터 배운, 그리고 '위대한 각성'의 시기 이전의 기하학적인 패턴의 훈련을 통해 얻은 구성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에 있는 모든 세부를 그처럼 명료하고 제대로 묘사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솜씨의 정확성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기의 모든 그리스 작품들은 인물들을 배치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지혜와 기술을 보여주고 있지만 당시에 그리스 인들이 그보다 더 중요시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즉 인체를 어떤 자세나 운동 상태로 재현할 때 쓰이는 새로 발견된 자유를 인물의 내적인 삶에 반영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각가로 훈련을 받은 바 있는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이것을 미술가들에게 강조했다는 말을 그의 제자들로부터 전해듣는다. 미술가들은 '감정이 육체의 움직임에 미치는' 과정을 정확하게 관찰함으로써 '영혼의 활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4. 아름다움의 세계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자유를 향한 미술의 위대한 각성은 대체로 기원전 520년경부터 기원전 420년경 사이의 백년동안에 일어났다.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면서 미술가들은 그들의 실력과 숙련됨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었으며 일반인들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여전히 장인으로 대접받았으며 어쩌면 속물 같은 귀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미술의 종교적, 혹은 정치적 기능뿐만 아니라 미술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미술 '유파'들의 업적을 비교했다. 말하자면 각 도시 국가들이 대가들에 따라 다른 다양한 방식과 양식 및 전통들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러한 유파들 사이의 비교와 경쟁이 미술가들을 자극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만들었고 또 우리가 그리스 미술에서 찬양하는 그런 다양성을 창조해내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건축에서는 여러 양식들이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 양식(Doric style)으로 건설되었으나 그 후의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건물들에는 소위 이오니아 양식(Ionic style)이 도입되었다. 이오니아 식 신전들의 기본형은 도리아 식과 같지만 전체적인 외관과 성격은 다르다. 이러한 점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건물이 에렉테움 신전이다. 이오니아 식 신전의 원주들은 도리아 식 신전의 원주들보다 견고하고 강한 느낌이 훨씬 덜하며 보다 날렵하고 가냘픈 기둥으로 보인다. 주두(capital)는 더 이상 단순하고 장식이 없는 쿠션 형태가 아니라 양 옆이 나선형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이 장식이 다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를 지탱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오니아 식 건물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세부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한없이 우아하고 아늑한 인상을 준다.
그 당시 미술은 전형과 개성이 새롭고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인간의 가장 완벽한 균형들을 재현한 것으로 후세의 사람들이 칭찬하는 고전 시대의 걸작들 대부분은 기원전 4세기 중엽인 이 시기에 만들어진 복제품이거나 변형물이다.
기원전 4세기 최대의 미술가인 프락시텔레스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의 매력과 감미롭고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특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로 찬양했던 그의 가장 유명한 걸작품은 사랑의 여신인 젊은 아프로디테가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해지지 않고 19세기에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한 작품을 그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고전 시대의 유명한 비너스 상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밀로(Milo)의 비너스>(멜로스(Melos)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운다)이다. 아마 이 조각상은 다소 후기에 만들어진 여러 비너스와 큐피드 상에 속하는 일부이겠지만 프락시텔레스가 이루어 놓은 업적과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옆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우리는 여기서 이 조가가가 아음다운 육체를 리모델링할 때 사용한 명료성과 단순성, 그리고 거칠거나 모호한 점이 하나도 없이 신체의 주요 부분을 구분해서 보여주는 방법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초상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4세기 말까지는 그리스 인들의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그 이전 시대에도 초상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조각상들은 아마도 실물과 그다지 많이 닮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장군의 초상도 투구를 쓰고 지휘봉을 들고 있는 잘생긴 군인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조각가는 장군의 코의 생김새나 이마의 주름살 같은 개인적인 표정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얼굴에 특별한 표정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조각상이나 회화에 묘사된 두상들은 둔감하고 공허해 보인다는 면에서 표정이 없는 것도 아니나 그들의 얼굴은 어떤 강한 감정의 표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활동'이라고 불렀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 당시의 그리스 거장들이 사용한 것은 육체와 그것의 움직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굴의 움직임은 두상의 단순한 규칙성을 왜곡시키거나 파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프락시텔레스 다음 세대인 기원전 4세기 말에 와서 이러한 제약이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해 미술가들은 아름다움을 파괴하지 않고도 얼굴의 표정을 살리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개개인의 '영혼의 활동'을 포착하는 방법과 인상의 개인적인 특징을 포착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의미의 초상을 만드는 것도 터득했다.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새로운 초상화법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한 저술가는 아첨꾼들과 알랑거리는 자들의 염증나는 꼬락서니들을 풍자하는 글에서 그들은 항상 그들 후원자들의 초상이 놀라울 정도로 실물과 꼭 닮았다고 소리 높여 칭찬했다고 쓰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도 왕실 조각가인 리시포스가 자신의 초상을 조각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당시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였던 리시포스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은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시포스의 알렉산더 상들은 아시아를 정복한 실제의 사람 모습이라기 보다는 신의 모습과 훨씬 닮았다고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알렉산더와 같이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천부의 재능을 타고 났지만 오히려 계속적인 성공에 의해 약간 거만해진 사람의 모습은 치켜올라간 눈썹과 활기찬 얼굴 표정을 가진 이 흉상처럼 보였을 거라고.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 제국이 건설됨에 따라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 언어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후기 시대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들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그리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은 그리스 본토에서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상이한 요구를 했다. 건축에 있어서까지도 도리아 양식의 간결한 형태와 이오니아 양식의 평이함과 우아함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 원주가 선호되었는데 그것은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것으로 코린트(Corinth)라는 부유한 상업 도시의 이름을 따서 코린트 양식이라고 불렀다.
코린트 양식에는 주두를 장식하기 위해서 이오니아 식의 소용돌이 장식에 입사귀 모양을 첨가했으며 일반적응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양식은 동방에 새로 건설된 도시에 거대한 규모로 설계된 호화로운 건물과 잘 어울렸다.
헬레니즘 미술은 거칠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후세에 최대의 명성을 날린 고전적 조각 작품 중에는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1506년에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이라는 군상이 발견되었을 때 미술가들과 애호가들은 이 비극적인 군상의 효과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이 오래 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 종교적 연관성을 거의 상실했던 것 같다. 미술가들은 그들의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그러한 극적인 싸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미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였다.
부자들이 미술 작품들을 수집하고, 원작품을 손에 넣을 수 없으며 그 유명한 작품들을 복제하게 하고,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이며 또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저술가들은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미술가들의 생애를 글로 썼으며 그들의 기이한 행동에 관한 일화들을 수집하여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 책자들을 만들었다.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 중에는 조각가보다 화가가 더 많았으나 우리는 전해내려오는 고전 시대의 미술 서적에서 일부 발췌된 작품에서 알 수 있는 것 외에는 그들의 작품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이 화가들 역시 그들의 작품이 종교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데보다는 그들의 기술에 관한 특수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는 그 당시의 거장들이 일상 생활 속의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이발소나 연극의 한 장면 등을 그렸다고 전해들었으나 이 모든 개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폼페이를 비롯한 기타 장소에서 발굴된 장식적인 벽화와 모자이크를 보는 길밖에 없다. 폼페이는 부유한 전원 도시였는데 기원후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 밑에 매몰되었다. 이 도시의 거의 모든 집과 별장에는 벽이나 원주, 전망대에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틀에 끼워진 복제 그림이나 무대를 모방한 장치가 있었다. 물론 이 그림들이 다 걸작품은 아니지만 이처럼 작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시에 그런 좋은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서는 풍경이 인간 생활이나 군사적인 원정의 배경 장면으로밖에는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페이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는 인간이 미술가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테로크리토스 같은 시인들이 목동들의 소박한 삶의 매력을 발견했던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가들 또한 복잡한 도시 거주자를 위해서 전원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그림들은 특정한 시골집이나 아름다운 장소와 같은 실제적인 모습이 아니라 목가적인 풍경을 구성하는 모든 것, 이를테면 목동과 소, 소박한 사당과 멀리 보이는 별장과 산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다만,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가들은 우리가 원근법이라고 부르는 법칙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학교에서 그리곤 하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멀어져가는 저 유명한 포플러가 늘어서 있는 길의 원근법이 당시 화가들의 기본적인 과제는 아니었다. 미술가들은 먼 곳에 있는 물건은 작게 그리고 가까운 데 있거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렸다. 그러나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 대상의 크리를 일정하게 줄여가는 방법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조망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구도의 틀을 고전 시대 사람들은 채택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적용되기까지는 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이리하여 고대 미술 가운데 가장 최신의,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가장 자신 있는 작품일지라도 우리가 이집트의 회화 기법을 다룰 때 논의했던 원칙의 잔재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개별적인 대상의 특징적인 윤곽에 대한 지식은 눈을 통해서 얻는 실제의 인상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러한 성질을 유감스럽다거나 수준이 낮은 작품에 있는 결함으로 여기지 않고 어떤 양식 안에서든디 예술적인 완성은 이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왔다. 그리스 인들은 초기 오리엔트 미술의 엄격한 제약을 철저하게 타파하고 관찰을 통해 종래의 전통적인 이미지에다가 점점 더 많은 특성들을 첨가하는 발전의 항해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자연의 말초적인 세부까지 낱낱이 반영하는 그런 거울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은 언제나 그것들을 만들어냈던 지성의 각인을 지니고 있었다.
5. 세계의 정복자들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우리는 앞서 로마의 한 도시였던 폼페이가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었던 것을 살펴보았다. 이는 로마 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왕국들의 폐허위에 그들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에도 미술은 그다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작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인들이었으며 대부분의 로마 수집가들은 그리스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복제품들을 사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미술도 어느정도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아마도 토목 공학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도로나 수로, 공중 목욕탕 등에 관해 잘 알고 있다. 폐허가 된 이러한 건물들은 아직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로마의 거대한 기둥들 사이를 걸어가다보면 마치 자신이 개미처럼 왜소해진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로마 건출물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콜로세움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경기장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일종의 실용적인 구조물로서 내부에 광대한 원형 경기장의 관람석을 받쳐주는 층층이 쌓아올린 세 단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의 건축가는 이 아치들의 정면에 일종의 그리스 식 칸막이 벽을 세웠다. 사실 그는 그리스 신전에 사용되었던 세 가지 건축 양식을 전부 응용했다.
1층은 도리아 식의 변형으로서 메토프와 트리클리프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층은 아오니아 식이고, 3층,4층은 코린트 양식의 반원주이다. 로마 식 구조와 그리스 형식, 또는 그리스의 기둥 양식들과의 결합은 그 이후의 건축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주위의 도시를 둘러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영향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인이 그들의 제국 전역에 , 즉 이탈리아, 프랑스,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세운 개선문들보다 더 영원한 인상을 남긴 건축물을 없을 것이다. 그리그 건축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유니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콜로세움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개선문에서는 기둥 양식을 사용해서 중아의 큰 입구를 프레임하여 강조하고, 양 옆의 약간 작은 두 개의 문이 중앙의 큰 문을 장식한다. 그것은 음악에 화음이 사용된 것과 같이 건축 구성에 사용된 배열이다.
로마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 그리스 건축가들도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스 건축에서는 아치가 거의, 아니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쐐기 모양의 돌로 하나하나 아치를 쌓아돌리는 일은 토목공학이 이루어낸 대단히 어려운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일단 이 기술을 습득하게 되자 건축가는 이것을 점점 더 대담한 설계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리나 수로의 기둥들 사이를 아치로 연결시킬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이런 방식을 사용해서 궁륭(vault)으로 된 천장을 만들 수도 있었다. 로마 인들은 여러가지 기술적인 고안에 의해서 궁륭을 만드는 예술의 위대한 전문가들이 되었다. 이러한 건물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것은 판테온이라 불리우는 만신전이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예배의 장소로 남아 있는 고전 시대의 유일한 신전인데 기독교 초기에 개조되었기 때문에 황폐화되지 않아서이다.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따다가 그것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는 것이 로마 인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런 식으로 했는데 그들이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물을 꼭 닮은 초상이었다.
이러한 초상은 로마 인들이 장례 행렬에는 선조의 밀랍 초상을 들고 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뒤에 가서 로마가 제국이 되었을 때 황제의 흉상은 종교적인 경외감을 가지고 우러러보아야 했다. 모든 로마 인들이 충성과 복종의 표시로 이 흉상 앞에서 분향을 해야 했으며 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상의 엄숙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미술가로 하여금 그리스 인들이 했던 것처럼 실물을 조금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초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폼페이우스, 아우쿠스투스, 티투스, 네로의 생김새를 마치 화면에서 그들의 얼굴을 보았던 것처럼 잘 알고 있다.
로마인들이 미술가들에게 맡겼던 또 하나의 새로운 과제는 우리가 고대 오리엔트에서 배운 관습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로마 인들 역시 그들의 승전을 선포하고 그들의 전투 이야기를 널리 전하기를 원했다. 로마 인들은 본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무훈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세부의 정확한 묘사와 자세한 설명을 보다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미술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미술의 주된 목적이 이제는 조화나 아름다움, 또는 극적인 표현에 있지 않았다. 로마 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들로 공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한 영웅의 행위를 이야기하는 그들의 회화적인 방법은 이 광대한 제국과 접축을 갖게 되었던 여러 종교에 커다란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신과 영웅들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인간들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은 또한 인도 사람들에게도 불타의 형상을 창조하도록 도와주었다.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또 하나의 오리엔트 종교는 유태교였다. 실제로 유태교의 율법은 우상숭배를 경계하여 형상의 제작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의 도시에 있는 유태 식민지에서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회당의 벽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림들 중의 하나가 최근에 두라에우로포스라고 불리우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한 작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에서 발견되었다. 유태교의 회당에서 나온 이 초라한 벽화가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까닭은 기독교가 동방에서부터 전파되고 미술을 그 종교적인 목적에 봉사하게 만들었을 때 이와 유사한 사고 방식들이 미술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옛날 그리스 미술의 영광이었던 세련미와 조화에 관심을 가졌던 미술가들은 이제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조각가들도 더 이상 끌을 가지고 대리석을 다듬을 끈기가 없었고 그리스 조각가들의 자랑이었던 섬세함과 심미안을 가지고 대리석을 처리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칠고 손쉬운 방법, 예를 들면 얼굴이나 신체의 주요한 양상을 표시하는 데 기계적인 드릴을 사용했다. 흔히 이 무렵에 고대 미술이 쇠퇴했다고들 말한다. 찬란했던 시대에 개발된 기법상의 많은 법칙들과 예술적인 신비가 전쟁과 반란, 침략이라는 사회 전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상실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단순한 묘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6. 기로에 선 미술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 로마와 비잔티움
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엄청난 것이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대에는 공공 예배 장소를 건립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나 회당들은 규모가 작고 보잘것없었따.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예배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신전의 내부는 보통 신상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을 뿐이었고 제사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다. 반면에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모든 회중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교도의 신전을 본뜨지 않고 고전기에 '바실리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커다란 집회소 형태를 본뜨게 되었다. 바실리카란 대충 '큰 회당'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건물들은 지붕으로 덮여 있는 시장이나 공공재판소 같은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커다란 장방형의 방과 기둥들로 구분된 양 옆의 보다 좁고 낮은 복도로 구성되어 있다. 맨 끝에는 흔히 반원형의 감실이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집회의 장이나 재판관이 앉는 자리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는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러한 바실리카를 세우게 했다. 그래서 바실리카라는 말이 이런 형태의 교회당을 의미하게 되었고 반원형의 감실 또는 후진은 예배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높은 제단으로 사용되었다. 제단이 위치해 있던 이 부분은 나중에 성가대석으로 되었다. 신자들이 모이는 중앙의 커다란 방은 뒤에 신랑(身廊)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배(船)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양 옆의 낮은 천장의 복도는 측랑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날개라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바실리카에서 천장이 높은 신랑은 흔히 목재로 지붕을 했으며 들보는 노출되어 있었다. 측랑은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기둥들은 대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초기의 바실리카들 중에 변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이래로 오백년 동안에 이루어진 변형화 개수(改修)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건물이 일반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바실리카를 어떻게 장식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신중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형상을 종교에 사용한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당에는 어떠한 조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했다. 조상은 성경이 매도하고 있는 우상이나 이도교들의 신상과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제단 위에 신이나 성인들의 조상을 안치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 듯 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종교로 이제 막 개종을 한 소박한 이교도들이 만약에 그러한 조상들을 교회에서 본다면 어떻게 그들의 옛날 신앙과 새로운 복음과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아마도 페이디아스의 신상이 제우스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 조상이 진실로 하느님을 나타낸다고 너무도 쉽게 믿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를 그의 모습으로 창조하고, 유일하고 전능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을 파악하기란 한층 더 어려운 일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은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이 그들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가르침을 회중에게 상기시켜 주고 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로마제국의 서부 지역인 라틴 계 사람들이 주로 이러한 견해를 지지했다.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이 방침을 택했다. 그는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기시켜 주었다. 즉 많은 신도들이 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시키려면 이러한 형상들이 마치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에 있는 그림들처럼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막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회화를 옹호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은 교회의 형상의 사용이 비난받을 때면 언제나 교황의 이러한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용인된 미술의 유형은 상당히 제한된 성격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만약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주장대로라면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명확하고 단순해야 하고 또 이 주되고 성스러운 목적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꼴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제해야만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술가들이 로마 시대의 미술이 발전시킨 설명조의 이야기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점차 엄격하게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중하게 되었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혀하는 데 있어서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들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우리가 기원전 500년경에 그리스에서 소생하는 것을 보았던 자연의 관찰력이 기원후 500년경에는 다시 잠들어버렸다. 미술가들은 더 이상 그들의 공식들을 현실에 비추어 검토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인체를 표현하는 방법이나 깊이를 실감나게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해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진 발견들은 결코 상실되지 않았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은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몸을 구부리거나 넘어지는 인물상들에 관한 무한한 인체의 표현 방식을 제공해주었다. 이 모든 유형들은 이야기들 서술해가는 데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열심히 모사했고 또 새로운 작품 속에 끊임없이 적용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작품은 그 제작 의도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시대의 그림들이 외견상 고전 미술의 흔적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교회에 있어서 미술의 정당한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유럽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비잔티움(일명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동로마제국, 즉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 어를 사용하는 동부 지역이 라틴 계 교황의 지배를 거부한 중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로마 교회 중의 일파는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 모든 형상에 대해 반대했다. 이들을 성상 파괴주의자 또는 우상 파괴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들이 745년 득세한 뒤로 동로마 교회에서는 모든 종교적인 미술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형상이 단지 유익할 뿐만 아니라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견해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던 논거들은 그들의 반대파가 사용했던 것만큼이나 미묘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그의 자비심으로 그리스도라는 인간의 형상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결심했다면 어째서 그와 똑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 속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꺼려하겠는가? 우리는 이교도들처럼 형상 그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런 변명의 논리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미술사에 있어서의 중요성은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 파가 백 년 동안 억압을 받다가 다시 득세하게 되자 교회 내에서는 회화는 더 이상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도 같은 것으로만 간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림들은 초자연의 세계를 신비스럽게 반영하는 것으로 우러러보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동로마 교회는 미술가들이 그들의 상상에 따라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할 수가 없었다. 성모의 참된 성상, 즉 이콘(icon)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어떤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에 의해서 신성시된 그런 틀에 박힌 유형이었다.
이리하여 비잔틴 사람들은 전통의 준수에 있어서는 이집트 인들처럼 엄격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비잔틴 교회는 성상을 그린 화가에게 고대의 모델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옷 주름이나 얼굴 및 몸집의 묘사에 사용된 그런 유형들에 관한 그리스 미술의 관념과 업적을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7. 동방의 미술
2세기에서 13세기까지 : 이슬람과 중국
다시 서양으로 돌아와서 유럽의 미술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수백 년간의 격동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정황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그렇게 사로잡았던 형상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두 위대한 종교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7세기와 8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모든 것을 다 휩쓸어버리고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정복한 중동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보다 더 엄격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금기라고 해서 예술을 그렇게 쉽게 억압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창조해냈다. 회교권 밖에서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중동의 양탄자를 통해서 이러한 신비한 문양들에 친숙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교한 디자인과 풍부한 색채의 배합 설계를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어쩌면 마호메트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술가들의 마음을 현실 세계의 사물로부터 선과 색채라는 환상의 세계로 돌리게 했던 것이다. 후기의 몇몇 회교 종파들은 형상의 금지라는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덜 엄격했다. 종교에 관계가 없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인체와 삽화를 그리는 일이 허용되었다. 14세기 이후의 페르시아와 그 뒤에 무굴 왕조 때의 인도에서 제작된 연애나 역사, 우화 등을 묘사한 삽화들은 당시의 화가들이 문양의 디자인에만 국한되었던 훈련에서 배운 바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종교가 미술에 끼친 영향이 이슬람의 경우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매우 일찍부터 청동의 주조 기술에 뛰어났으며 고대의 청동 제기들 중에는 기원전 천 년 또는 그 이상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중국 미술의 기원에 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회화와 조각에 관한 기록은 이 제기들처럼 오래가지는 않는다. 1세기를 전후해서 중국에서는 어딘가 이집트 인들을 연상시키는 매장 풍습이 생겨났는데 그 묘실에는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생활과 풍습을 반영하는 생생한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이미 그 당시에 우리가 전형적인 중국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발전되어 있었다. 중국 미술가들은 딱딱하고 모가 진 이집트 식 표현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더 선호했다. 날뛰는 말을 묘사해야 할 때 중국 미술가는 그것을 여러 개의 둥근 형태에서 만들어내는 것같이 보인다. 중국 조각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점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뒤틀리고 구부러진 것같이 보이지만 결코 확고부동함과 견고함을 잃지 않는다.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 가지고 있었떤 것과 유사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미술을 과거의 황금 시대에 있었던 도덕의 위대한 모범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현재까지 보존된 옛날 두루마리 그림책 중에는 유고정신에 따라 쓰여진 덕망 있는 여인들의 훌륭한 모범을 모아놓은 것이 있다. 그것은 4세기의 화가 고개지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여사잠도>이다.
그러나 중국 미술을 가장 힘있게 자극하고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이와는 다른 종교, 즉 불교의 영향이었다. 불교의 승려나 고행자들은 가끔 놀랄 만큼 사실적인 조상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귀와 입술, 볼의 윤곽을 이루는 곡선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곡선들이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우연의 효과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은 주지 않으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전체 효과를 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불교가 중국 미술에 끼친 영향은 단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공해준 데 그치지 않았다. 불교는 그림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법을 도입시켜 미술가의 업적을 매우 존중하게 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 시대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화가를 영감을 받은 시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동양의 종교는 올바른 명상, 즉 선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명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에 대해 그것을 마음속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동일한 신성한 진리를 여러 시간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하여 그 본체를 상실함이 없이 모든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동양인들에게는 이것이 일종의 정신적 훈력으로 서양 사람들이 육체적 운동이나 스포츠에 부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종교 미술은 중세의 기독교 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부처의 전설이나 중국 사상가들의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명상의 실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앙심이 깊은 미술가들이 어떤 특수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단순한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깊은 명상의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 존경의 염으로 산과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단 두루마리에 그린 이런 그림들은 아름다운 상자 속에 보관하였다가 조용한 시간에 꺼내어 마치 시집을 들고 아름다운 시를 음미하듯 펼쳐서 감상하거나 음미하곤 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중국 산수화의 위대한 걸작들이 의도했던 바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중국 미술가들은 소재를 직접 대하고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 사생하지는 않았따. 먼저 직접적으로 자연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탐구함으로써 소나무나 바위, 구름 등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기법을 완전히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여행길에 올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사색하고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겨 집으로 돌아와서, 마치 시인이 산책을 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짜맞추어 시를 짓듯이, 소나무와 바위와 구름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들을 한데 결합하여 그 분위기를 다시 화면에 재현하였다.
그들의 영감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을 붓과 먹으로 단숨에 그려낼 수 있는 능란한 필치를 얻는 것이 중국 대가들의 양심이었다. 그들은 종종 같은 비단 두루마리 위에 시를 몇줄 쓰고 그림도 그렸다. 그렇기에 중국인들은 그림에서 세세한 것을 찾아내어 현실 세계와 비교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림 속에서 미술가의 감흥이 가시화된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자연에서 몇 개의 단순한 주제를 선정해서 그것을 절도있게 전개시키는 중국 미술의 방법은 경탄할만 하다.
그러나 이런 회화에 대한 사고 방식에도 위험은 수반된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대나무를 그린다든가 또는 험준한 바위를 그리는 필치의 모든 유형이 공식으로 정해지고 전통에 의해서 고정되어 과거의 작품만을 지나치게 찬양한 나머지 미술가들은 점점 더 그들 자신의 영감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수백년 동안 중국과 (중국의 화풍을 따른)일본에서는 회화의 수준이 계속 높아졌으나 마치 세련되고 까다로운 놀음도 그 술수가 알려져서 흥미를 잃듯이 예술도 점점 더 그런 식으로 되어갔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 서양 미술의 업적을 새로 접하게 되자 비로소 일본 미술가들은 새로운 주제에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을 응용하기 시작했고 서양 미술에 값진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8. 혼돈기의 서양 미술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
우리는 이제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까지, 나아가 일반인들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데 형상(形象)이 유용하다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칙령이 받아들여진 6세기까지의 서양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 초기 기독교 시대를 뒤이은 시대, 즉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암흑 시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우리가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암흑상태에 빠져서 그들을 인도할만한 지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제국들이 대략 형태를 갖추고 생겨나기 이전의 혼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기는 대략 500년경부터 1000년경까지 계속되었는데 사실상 500년이라면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오랜 기간이며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이고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갈등이 겨우 마무리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는 암측기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과 계급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뒤죽박죽의 시대였다. 특히 수도원과 수녀원에는 계속해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남녀들이 있었고 또 이들은 도서관과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고대 세계의 작품들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학식있고 교육 받은 수도사나 성직자들은 왕국의 궁정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 그들이 그렇게 경탄했던 고대의 미술을 부활시키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들과 예술관이 전혀 다른 북쪽의 무장 침략자들의 새로운 전쟁과 침략 때문이었다.
전 유럽을 기습해서 약탈을 일삼던 여러 튜턴 족의 부족들인 고트 족, 반달 족, 색슨 족, 데인 족과 바이킹 족들은 문화와 미술 분야에서의 그리스와 로마의 업적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어던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들은 야만인이었으나 그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낄 줄 모른다거나 그들 나름의 고유한 미술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 중에는 정교한 금속 세공을 하는 장인이나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의 장인들에게 비길 만큼 탁월한 목공예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용들이 몸을 꼬고 있거나 새들이 신비스럽게 얽혀 있는 것 같은 복잡한 문양을 좋아했다. 바이킹 족의 썰매와 배에 있는 용의 조각상들이 이 미술의 성격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켈트 족의 아일랜드와 색슨 족의 잉글랜드의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이러한 북방 민족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 지방의 장인들이 사용했던 목조 건물을 모방해서 교회와 첨탑들을 돌로 건축했다.
우리는 앞에서 미술가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근대적 관념을 과거 대부분의 민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아왔다. 이집트나 중국, 비잔틴의 미술가들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면 그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서유럽의 중세 미술가들은 교회를 짓고, 성찬배를 디자인하고, 성경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전례들로 훌륭하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왜 구태여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의 수호 성인의 유골을 모실 새 예배당을 건립하려는 신앙심 깊은 기증자는 미술가에게 그가 살 수 있는 가장 값진 재료를 구해주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성인의 전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오래되고 존경받는 표본을 미술가에게 제공해주려고 했을 것이다. 미술가 또한 이런 류의 주문 때문에 구속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음악에 대한 접근방법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음악가에게 결혼식에서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할 경우 우리는 그가 그 결혼식을 위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작곡해주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중세의 미술 애호가가 예수의 탄생 그림을 부탁했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창안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원하는 종류의 음악과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의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의 규모를 지정해준다.
이 시대의 그림에서 고대 오리엔트 미술이나 고전 미술이 하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화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러한 그들의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중세의 미술 작품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을 그럴 듯하게 닮게 그리거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들에게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미술가들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9. 전투적인 교회
12세기
연대(年代)는 역사라는 태피스트리를 거는 데 없어서는 안될 못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1066년이라는 연대(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영국을 정복한 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점으로 미술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편리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영국에서는 색슨 시대의 건물들 중에서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유럽에도 그 시기의 교회가 잔존하는 예는 거의 드믈다. 그러나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 인들은 노르망디 및 그 이외의 지방에서 그들 세대 중에 형태를 갖추었던 발전된 건축 양식을 들여왔다. 영국의 새로운 영주가 된 사제들과 귀족들은 구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해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건물들을 세운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Norman)양식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트(Romanesque)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양식은 노르만 침략 이후 백년 이상이나 번창하였다.
교회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시골의 몇몇 옛 마을에서 겨우 교회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는 그 부근에서는 유일한 석조 건물이었으며 몇 마일에 걸쳐서 유일하게 볼만한 건물이었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 첨탑이 하나의 이정표였다. 일요일과 예배가 행해지는 기간에는 온 주민들이 거기에서 만났을 것이고, 이 높은 건물과 주민들이 살았던 원시적이고 초라한 집들과의 대조는 가히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마을 전체가 이 교회 건물에 관심을 가졌고 또 그 교회의 장식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경제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회 건물의 건축은 마을 전체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둘을 채석해서 그것을 운반하는 일, 적당한 골조를 세우는 일, 그리고 먼 고장의 소식을 전해주는 떠돌이 장인들, 이 모든 것이 아득한 옛날에는 큰 사건이었다.
암흑시대라고는 해도 최초의 교회로 사용된 바실리카의 기억과 로마 인들이 그들의 건축에 사용한 양식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후진(apse)과 성가대석(choir)에 이르는 중앙의 신랑, 그리고 그 양쪽의 이중 또는 사중의 측량으로 이루어지는 평면 설계는 그 이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간단한 평면 설계를 몇몇 부속물들을 붙여서 화려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어떤 건축가들은 교회를 십자형으로 짓는다는 발상에서 성가대석과 신랑 사이에 수랑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첨가했다. 그러나 이들 노르만 양식의 교회, 즉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의 일반적인 인상은 옛날 바실리카와는 대단히 달랐다. 초기의 발실리카에는 수평의 '엔타블레이처'를 받쳐주는 고전적인 원주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로마네스크나 노르만 식 교회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육중한 각주가 받쳐주는 둥근 아치들이다. 이런 교회들이 주는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 중후한 힘이다. 이런 교회 건물에는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으며 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달은 벽과 탑뿐이다. 이교도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얼마 전에 개종한 농민과 전사들의 땅에 세어진 이 강력하고 거의 도전적인 석조 건물들은 바로 '전투적인 교회'라는 관념, 즉 이 지상에서 최후의 심판날 승리의 여명이 밝을 때까지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교회 건축과 관련해서 모든 훌륭한 건축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인상적인 석조 건물에 어울리는 석조 지붕을 올리는 것이었다. 바실리카 성당에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목조 지붕은 위엄이 없고 불이 날 경우 타버릴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큰 건물에 궁륭(둥근 지붕)을 올리는 로마의 기술은 이미 대부분 잊혀지고 만 엄청난 양의 기술적인 지식과 계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1세기 12세기는 끊임없는 실험의 시기가 되었다. 주 신랑의 전체 폭을 궁륭으로 덮는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강에 다리를 걸치는 것처럼 신랑의 양쪽 기둥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들 다리의 아치를 떠받치게 될 엄청나게 큰 기둥들이 양편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궁륭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견고하게 접합을 시켜야 하고 또 거기에 필요한 돌의 무게가 엄청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처럼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려면 벽과 기둥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 초기의 터널식 궁륭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양의 석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노르만 건축가들은 이와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 그들은 지붕 전체를 그렇게 무겁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로지르는 몇 개의 단단한 아치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를 가벼운 재료로 메우면 충분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늑재를 서로 엇갈리게 걸쳐놓고 나서 이 늑재 사이의 삼각형 부분을 메우는 것이었다. 얼마 안가서 건축 방법에 대한 일대 혁명을 가져온 이 발상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노르만 양식의 더럼 대성당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는 십자군의 세기였다. 그래서 자연히 12세기는 그 이전보다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많아져서 그 시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동방 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들을 모방하고 서로 지지 않으로고 애썼다. 사실상 로마네스트 양식의 전성기 외에는 유럽 예술이 이런 종류의 동방 미술의 이념에 접근했던 시기는 없었다. 우리는 아를의 성당에서 엄격하고 엄숙한 조각의 배치를 보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12세기의 많은 채색 장식 필사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미술가들이 사물을 본대로 그리려는 야심을 버리게 되면서 그들의 눈 앞에 전개된 가능성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색채 또한 형태와 마찬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술가들은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음영의 농담을 연구하고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금세공 작품들의 빛나는 황금색과 맑은 푸른색, 필사본의 삽화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색깔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과 짙은 초록색들은 이 대가들이 자연으로부터의 독립을 잘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계를 모방할 필요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은 이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10. 교회의 승리
13세기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을 비잔틴 미술 및 고대 오리엔트 미술과 비교해보았다. 그러나 서유럽은 동유럽과 심각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미술 양식들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또 그것들이 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이 보였으나 서유럽은 이런 불변성을 전혀 몰랐다.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미술가들이 교회에 궁륭 천장을 만들어 새롭고 장엄한 방식으로 그들의 조각상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또 다른 참신한 이념이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을 볼품없는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새로운 이념은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고딕(gothic) 양식의 원리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것을 단지 기술적인 혁신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결과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서로 교차하는 아치를 이용하여 교회의 둥근 천장을 만드는 방법은 노르만 건축가들이 꿈꾸었던 것 이상으로 일관성 있고 보다 훌륭한 건축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만일 기둥들이 또 다른 석조로 메워져 있는 궁륭의 아치를 지탱할 수 있다면 기둥들 사이의 육중한 벽돌은 모두 불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일종의 돌의 골조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가느다란 기둥과 좁다란 늑재 정도였다. 그 골조가 주저앉을 위험이 없는 한,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은 다 없애도 상관없었다. 육중한 돌로 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지고 그 대신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온실을 짓는 것과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짓는 것이 건축가들의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강철로 만든 문틀과 철로 만든 대들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것들을 석재로 대치했고 거기에 따른 대단히 조심스러운 계산이 필요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정확하다면 전혀 새로운 종류의 교회를 짓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돌과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에서 발전된 고딕 식 대성당 건축의 중심 원리였다.
물론 늑재를 서로 교차해서 사용하는 원리만 가지고는 이 같은 혁명적인 양식의 고딕 건축을 세우기에는 불충분했다. 이러한 기적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기술적인 혁신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로마네스크 식의 둥근 아치들은 고딕 식 건축가들의 목적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두 기둥 사이를 반 원형 아치를 가지고 메울 경우, 그것을 해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궁륭 천장은 일정한 정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높지도 더 낮지도 않다. 만일 그 높이를 더 올리고 싶다면 아치의 경사를 더 가파르게 해야 하낟. 이런 경우에 최선의 방법은 둥근 아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활 모양의 늑재를 접합시키는 것이다. 첨형(尖形) 아치는 이런 발상에서 나왔다. 이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건축물의 요구에 따라서 평평하게 만들수도 좀더 뾰족하게 만들어 높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공륭을 만드는 무거운 돌들은 아래쪽으로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를 당긴 활처럼 양 엽으로도 압력을 주게 된다. 이 점에서도 첨형 아치가 둥근 아치의 개량형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둥만을 가지고 외부의 압력을 지탱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건물 전체가 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궁륭 천장을 가진 측랑 부분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없었다. 밖에 부벽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높은 신랑(身廊)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경우에는 측랑의 지붕을 가로질러 외부에서 지탱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건축가들은 고딕 궁륭의 뼈대를 완성시켜주는 '공중 부벽'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딕 식 교회 건물은 마치 자전거 바퀴가 거미줄 같은 살에 의해서 그 형태를 유지하듯, 가냘픈 돌 구조 사이에 걸려서 그 하중을 지탱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전거 바퀴나 고딕 건물의 경우나 다같이 전체의 견고함을 유지하며 그 구조에 필요한 자재를 점점 줄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각 부분에 무게를 균등하게 배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들을 단지 공학 기술상의 업적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고딕 건축가들은 우리들이 그들의 설계의 대담함을 느끼고 즐길 수 있게 배려한다. 고딕 성당의 내부에 들어서서 보면 아찔할 정도로 높은 궁륭형 천장을 지탱시켜주는, 서로 밀고 당기는 복잡한 힘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는 빈 벽이나 육중한 기둥 같은 것은 없다. 내부 전체는 가느다란 기둥과 늑재로 짜여진 것같이 보인다. 그 망이 천장을 덮고, 주랑의 벽을 타고 내려와 가느다란 돌 가지들을 묶어놓은 것같이 한데 모여 합쳐진다. 창문들조차도 트레이서리(tracery)라고 알려진 엮어짜여진 선으로 덮여 있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의 대성당들은 주교들 자신의 교회(대성당이라는 말의 어원인 cathedra는 주교의 보좌를 의미한다)로서, 대부분이 너무나 대담하고 장대한 규모로 구상되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처음에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완성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계획이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대한 내부로 들어가보면 그 규모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사소한 것들은 모두 왜소하고 하찮게 느껴지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하고 엄격한 건물들만 보아온 사람들이 이와 같은 건물에 들어와서 받았을 인상을 우리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과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아마도 그 힘과 권세에 있어서 악의 공격에 대해서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전투적인 교회'라는 인상을 주었을 테지만 이 새로운 고딕 성당들은 신자들에게 전혀 다른 세로운 세계를 엿보게 했다. 신자들은 설교와 찬송가를 통해 진주로 만든 문과 값진 보석, 순금과 투명한 유리로 된 천상의 예술살렘(요한 계시록 21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 성당들의 벽은 차갑거나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성당의 벽은 루비나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졌다. 기둥과 늑재, 창의 트레이서리 장식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육중하고 세속적이고 단조로운 것은 모두 제거되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관조하는데 넋을 잃은 신자들은 물질 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 미술과 고딕 미술, 즉 신전 미술과 성당 미술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 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그리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작품을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위안과 교화를 받게 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근육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성모를 쳐다보는 그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했음에 틀림없다.
13세기에 이르러서 일부 미술가들은 석상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도에 있어서 한층 더 깊은 발전을 보였다.
13세기 북유럽 조각가들의 주된 업무는 성당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반면 당시 북부 화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맡았던 일은 필사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삽화들의 기풍은 엄숙한 로마네스크 양식과는 상당히 달랐다. 강렬한 감정의 표현과 인물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실제적인 정경 묘사를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예술가들이 그들에게 흥미가 있는 것을 그리기 위해서 표본이 되는 서적을 때때로 참조하지 않게 된 것은 13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가는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 기분이 날 때는 언제나 실물을 스케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중세 미술가들의 훈련이나 양성 과정은 지금과는 대단히 달랐다. 중세의 미술가는 그 시대 대가의 견습생으로 시작해서 처음에는 스승의 지시에 따르고, 그림 속에서 비교적 덜 중요한 부분을 그려넣어서 그의 스승을 도왔다. 그는 점차 예수의 제자를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는 옛 서적들에 실린 장면을 모사하거나 재배치해보고 그것들을 다른 구조 속에 맞게 만들어서 마침내는 그가 모르는 유형의 장면도 그릴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능력를 습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스케치북을 들고 실물을 보고 그릴 필요성에 부딪힐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왕이나 주교 같은 특정 인물을 그리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도 흔히 우리가 알듯이 닮은 모습을 요구하는 초상화를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세에는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초상화는 없었다. 모든 미술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인습적인 인물상을 하나 그리고 직함을 나타내는 표상, 즉 왕에게는 왕관과 홀(笏), 주교에게는 주교관이나 홀장(笏杖) 등을 그려넣고 보는 사람이 잘못 알아보지 않도록 초상 아래쪽에 이름을 써넣었다.
대성당들의 시기인 13세기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국가였다. 파리대학교는 서양 세계의 지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도시 국가들로 분영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독일과 영국에서 그처럼 열광적으로 모방하던 위대한 프랑스 대성당 건축가들의 구상이나 방법이 처음에는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 조각가가 자연을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프랑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모방하고 고전 건축의 표현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비잔틴 제국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또 이탈리아의 장인들도 파리보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영감과 지도를 받았다. 13세기에도 이탈리아의 교회들은 여전히 그리스 풍의 장중한 모자이크로 단장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이 다가오자 비잔틴 전통의 확고한 바탕이 이탈리아 미술가로 하여금 북유럽의 대성당 조각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 전체에도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우리는 자연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조각가의 작업이 그와 유사한 목적을 가진 화가들의 작업보다 훨씬 수월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다. 조각가는 단축법이나 명암을 통해 입체감을 나타냄으로써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조각상은 실제의 공간과 빛 속에 서 있다. 그래서 스트라스부르나 나움부르크의 조각가들은 13세기의 회화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실물과 거의 같은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북유럽의 회화가 현실의 환영을 만들어내겠다는 모든 핑계를 다 포기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구성과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원칙들이 전혀 다른 목적에 의해서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인들에게 조각과 회화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뛰어넘게 만든 것은 비잔틴 미술이었다. 왜냐하면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서유럽 암흑 시대의 필사본보다더 오래 살아남았고 더욱이 헬레니즘 화가들의 발견들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명암법의 활용과 단축법의 법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무장을 하였기에 비잔틴 보수주의의 주문을 깬 한 천재가 신세계로 감히 뛰어늘 수 있었으며 고딕 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삽입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천재적인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 1267~1337)에서 확인되어진다.
미술사 책에서는 대개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위대한 화가의 출현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벽화, 즉 프레스코들이다(프레스코라는 명칭은 벽에 바른 석고가 채 마르지 않은, 즉 적어(fresh) 있을 때에 그림을 그린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파도바에 있는 조토의 한 프레스코 벽화를 비슷한 주제의 13세기 세밀화와 비교해보면 혁신의 범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세밀화에서는 화가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장면을 표현하는 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인물들이 그 페이지에 다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물들의 크기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화가는 공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토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기록된 문자의 대용품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 미술이 이야기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여져야 한다는 고대 오리엔트의 미술 개념으로 되돌아가 거의 이집트 식 미술에 가까워진 것을 기억한다. 조토는 그러한 미술 개념들을 다 무시했다.
조토의 명성은 널리 세상에 퍼져서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겼다. 이것 역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가들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알려지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미술가들을 마치 우리가 훌륭한 가구를 만든 사람이나 재단사를 생각하드시 생각했다. 미술가 자신들조차도 명성이나 평판을 얻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대부분 자기 작품에 서명조차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우리는 샤르트르 대성당이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조각 작품들을 만든 거장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당대에 충분히 평가 받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러한 명예는 그들이 봉사했던 대성당으로 돌렸다. 이러한 점에서도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미술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다. 그의 시대 이후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11. 귀족과 시민
14세기
13세기는 거대한 대성당들의 시대로 이 대성당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 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 사업은 14세기와 그 뒤로도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그것은 미술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일어났던 커다란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딕 양식이 처음 발전했던 12세기 중반의 유럽은 아직 인구가 적은 농부들의 대륙이었고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는 수도원과 귀족들의 성이었다. 그들 자산의 위세당당한 대성당을 갖고자 하는 대주교들의 야심은 도시의 시민적 자부심이 일깨워졌음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였다. 그러나 약 150년 뒤 이 도시들은 상업의 번화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더 이상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음침하게 격리되어 살기보다는 안락과 유행하는 사치가 있는 도시로 이주해서 권력자의 궁전에서 그들의 부를 과시했다. 만약 기사와 시골 유지, 수도승과 장인들이 등장하는 초서(Chaucer)의 서사시를 되새겨본다면 14세기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14세기에는 장대한 것보다는 세련된 것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이 식의 건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국에서는 소위 '초기 양식'이라고 알려진 초기 대성당들의 순수한 고딕 양식과 이런 형식들이 발전하여 그 후에 생긴 소위 '장식적 양식'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구분된다. 그 명칭 자체가 취향의 변화를 말해준다. 14세기 고딕 양식 건축가들은 벌써 초기 성당의 분명하고 장엄한 외관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서 그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교회를 짓는 일이 더이상 건축가들의 주된 과업이 아니었다. 나날이 발전하고 번창하는 도시에서는 시청 청사라든가 조합 사무실, 대학, 궁전, 다리와 성문 등과 같은 세속적인 건물들이 필요했다.
14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조각 작품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만들어졌던 수많은 석조물들이 아니라 당시 장인들의 뀌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귀금속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들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성당의 조각품들처럼 엄숙한 초연함 속에서 진리를 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것이었다.
화가들의 관심은 가능한한 명료하고도 인상적인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의 일면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점차 변해왔다. 14세기의 거장들이 했더 것처럼, 그리고 그 후의 다른 대가들이 해왔던 것처럼 종교 미술에 적용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임무는 변했다.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배우고 이러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훈련은 충분했다. 이제 미술가의 작업에는 다른 기수을 포함하게 되었다. 미술가는 자연으로부터 스케치할 수 있어야 했고, 또 이것을 그의 그림에 옮겨담을 수 있어야 했다. 그는 스케치북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들의 스케치를 비축해두어야 했다.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그림속에 얼마나 많은 양의 뛰어난 세부 묘사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꽃이나 동물의 세부 묘사에 숙달되는 새로운 기술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시각의 법칙을 개척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이 했듯이 인체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토대로 조각과 그림을 제작하려 하였다.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런 방향으로 변하자 중세 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우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12. 현실성의 정복
15세기 초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생이라는 관념이 이탈리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조토 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인이나 화가를 칭찬하고 싶을 때는 그의 작품이 고대의 것만큼 훌륭하다고 말했다. 조토는 이런 식으로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낸 거장으로 칭송되었다. 즉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미술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이 칭송했던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의 걸작만큼 훌륭하다는 의미에서 이런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탈리아 인들의 마음속에 품은 부흥이라는 관념은 '위대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다보는 고전 시대와 그들이 이제 희망하는 재생의 새로운 시대 사이에 놓인 기간은 단지 하나의 슬픈 막간, 즉 '중간시대'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재생, 즉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중간의 시대가 '중세'라는 관념을 낳게 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 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물건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짓을 가리킬 때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중간 시기의 미술을 고딕(Gothic) 미술이라고 부르고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탈이아 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기껏해야 실제적인 역사의 흐름에 대한 거칠고 매우 단순화된 상황파악에 불과할 뿐이다. 앞에서 우리는 고트 족의 로마 침입으로부터 우리가 지금 고딕 양식이라고 부르는 미술이 생기기까지는 대략 7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또한 미술의 부활이 암흑 시대의 충격과 혼돈 뒤에 서서히 진행되어 오다가 고딕 시대에야 급속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북쪽에 사는 사람들보다 미술의 이러한 점진적인 성장과 개화를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세의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었기 때문에 조토의 새로운 업적들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혁신으로 보였고, 예술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모든 것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4세기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고전시대에 번창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도시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15세기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lippo Brunelleschi)였다. 당시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고딕 성당으로 브루넬레스키는 고딕 전통의 일부를 형성하는 기술적인 창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명성은 궁륭형 천장을 만드는 고딕 식 방법을 알지 못했으면 불가능했을 구성과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을 거대한 돔으로 덮기를 원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이런 돔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낼 때까지 이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에 거대한 공간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새로운 교회나 다른 건물의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전통적인 양식들은 모두 다 버리고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시안을 채택하기로 결심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이런 고대 건물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 이런 건물들은 15세기 피렌체의 요구에는 채택되기 힘들었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새로운 건축 방법의 창조였으며 그러한 의도 내에서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거의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 열주(列柱)나 박공(牔栱)과 같은 고전적인 형식을 이용한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몇 건축가들이 그의 방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브루넬레스키가 고딕 전통에 반기를 든 것처럼 르네상스 식 전통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금세기가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건축되고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 심지어 원주나 그와 비슷한 장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물에까지도 아직 문이나 창틀의 쇠시리 장식(moulding)에서, 또는 건물의 치수와 비례 등에서 고전적 형식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가 새로운 건축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 성공한 셈이다.
부르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년 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perspective)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foreshortening)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 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수가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도나텔로나 브루넬레스키는 미술을 재생시키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로마의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에 관한 이런 연구가 미술의 재생, 즉 르네상스를 야기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 브루넬레스키 주변의 미술가들은 미술의 부활을 너무나 열렬히 갈맹했기 때문에 그들의 새로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연과 과학과 고대의 유물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과학과 고전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얼마 동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전유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것보다 더 자연에 충실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려는 정열적인 의지는 부쪽에 사는 같은 세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피렌체에서 도나텔로의 세대가 국제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세련미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힘 있고 장중한 인물상을 창조하기를 갈망했던 것처럼, 알프스 북쪽에서도 한 조각가와 그의 선배들이 섬세한 작품들보다는 실감나고 보다 솔직한 미술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조각가는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로 당시의 부유하고 번창하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Dijon)에서 1380년경부터 1405년까지 일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한 유명한 순례지에서 샘을 표시하는 커다란 십자가 밑부분을 이루는 예언자 군상이 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을 표현한다고 느껴지는 혁명적인 창의성을 보인 사람은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였다. 슬뤼테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전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현재 벨기에로 옛날에는 네덜란드에 속해 있던 지방에서 일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헨트 시에 있는 여러 장면이 그려진 거대한 제단화이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그림 속에 거의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묘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원근법적인 선으로 틀을 짜는 것으로 시작해서 해부학과 단축법의 법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인체를 구축해갔다. 반면 반 에이크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시계의 거울처럼 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미세한 세부까지 묘사하면서 자연의 환영을 만들었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미술은 이런 면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차이를 보여왔다. 물건이나 꽃, 보석 또는 천의 아름다운 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 북유럽 화가 특히 네덜란드의 화가가 그린 것이고, 반면에 대담한 윤곽석과 원근법이 명확하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한 그림은 아탈이아 화가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현실의 세세한 부분들을 비춰주는 거울을 창조하기 위해 반 에이크는 회화의 기법을 개량해야만 했다. 그는 유화의 발명자로 알려져있다.
그가 발명한 유화는 원근법의 발견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따. 그가 이룬 업적은 안료를 화면에 칠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처방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그 당시의 화가들은 튜브나 상자 속에 들어있는 기성품으로 된 물감은 구입할 수 없었따. 그들은 대부분 색깔이 있는 풀이나 광물질에서 사용할 안료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이것을 맷돌 같은 것으로 갈거나 도제들을 시켜서 용매를 첨가했다. 이렇게 반죽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중세까지는 이 용매의 주된 성분은 달걀이었다. 달걀을 너무 빨리 마르는 점을 제외하면 아주 적합한 것이었따. 이러한 식으로 안료를 준비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템페라(tempera)라고 불렀다.
반 에이크는 이런 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색깔들이 서로 섞여들어가는 부드러운 변화를 원했다. 달걀 대신 기름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여유있게, 그리고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투명한 층, 또는 겉칠(glaze)에 이용할 수 있는 광택 있는 색채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뾰족한 붓으로 반짝이는 하이라이트를 찍어넣을 수 있게 되었으며 경이로운 정확한 묘사를 성취하여 그의 동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유화를 가장 적합한 매체로 받아들여 널리 쓰이게 만들었다.
13. 전통과 혁신 Ⅰ
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15세기 초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Flanders)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들은 유럽 전체에 파문을 일으켰다.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 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미술에 있어서 이 거대한 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15세기의 미술을 사로잡고 있던 이 모험 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절의 한 영향으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대략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갔다. 프랑스, 아탈리아, 독일과 부르고뉴 등지의 지도적인 거장들의 목적이 모두 다 비슷했기 때문에 이 식의 고딕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양식을 국제 양식이라고 한다. 물론 민족적인 차이는 중세 전반을 통해서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ㅡ 우리는 13세가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상이성을 기억한다ㅡ전체적으로 보면 이 차이점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예술의 영역에서 두 라틴 어를 말하고 쓸줄 알았으며 그들이 파리 대학에서 가르치건 파도바나 옥스포드 대학에서 가르치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그들 사이에 기사도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이나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자신이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의 옹호자라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점차 봉건 영주의 성보다 중요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모든 점들도 점차 변해갔다.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태어난 고향의 말을 했고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들에게는 일치 단결해서 대항했다. 각 도시는 교역과 산업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지위와 특권에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경게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세에는 훌륭한 거장이라면 이 건축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다니며 작업할 수 있었고, 한 수도원에서 추천받아 다른 수도원으로 갈 수도 있었으며,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도시들이 큰 세력을 얻게 되자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guild)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가지 점에서 노동조합과 유사하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했는데, 그가 하나의 기술면에서는 완전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런 다음에 자기의 공방을 열 자격이 주어지고 견습공을 고용해서 제단화, 초상화, 채색된 가구, 깃발과 문장 등의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길드와 시 의회는 보통 시의 행정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가장 부유한 집단으로, 그들의 도시를 번창하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미화시키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페린체와 다른 도시의 길드를, 예를 들어 금세공사, 모직물업자, 무기 제조자 등의 길드들은 그들 기금의 일부를 교회 설립이나 조합의 건물을 짓는 데, 그리고 제단과 예배당을 세우는 헌금으로 바쳤다. 이런 점에서 예술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반면에 회원들의 권익을 열심히 보호했고 따라서 다른 지방의 미술가가 일자리를 얻거나 그들 사이에 정착하지 못하게 했다. 단지 가장 유명한 미술가들만이 때때로 이 저항을 물리치고 대성당들이 건축될 시절에나 가능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정이 미술사에 영향을 미쳤다. 도시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고딕 국제 양식은,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아마도 유럽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국제적 양식이었을 것이다. 15세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school)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는 그 나름대로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14. 전통과 혁신
15세기 북유럽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15세기는 미술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것은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 세대가 이룩한 발견과 혁신이 이탈리아의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며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분리되는 미술의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15세기 북유럽의 미술가들이 목적으로 했던 바가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그것과 아마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는 대단히 달랐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분야는 건축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물에 고전적인 모티프를 사용하는 르네상스적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피렌체에서의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 미술가들이 그의 예를 따른 것은 그로부터 한 세기나 뒤의 일이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15세기 내내 전 세기의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건물들의 형태는 뾰족한 아치나 공중 부벽과 같은 고딕 건축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지만 시대적인 취향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우리는 14세기의 건축가들이 우아한 레이스 세공과 같은 형태와 풍부한 장식들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엑서터 대성당의 창문에 디자인된 '장식적 양식'도 기억하고 있다. 15세기에는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인 장식에 대한 이러한 취향이 더욱 강해졌다.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우아양(Flamboyant, 타오르는 불꽃모양) 양식'이라고 불리워지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설계자가 장식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변화무쌍한 장식물로 건물 전체를 뒤덮어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건물들은 무한히 풍요홉고 새로운 창안으로 가득 찬 동화의 세계와 같은 요소가 넘쳐 흐르고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어도 북유럽의 건축가들이 보다 더 큰 단순미를 갖는 새로운 양식을 반전시켰으리라는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특히 영국에서 소위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경향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수직 양식이란 명칭은 장식에 있어서 그 이전 시대의 장식적인 트레이서리의 곡선과 아치보다 직선을 더 빈번하게 사용한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영국 건축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 양식으로 가장 유명한 예는 1466년 착공된 케임브리지의 킹스칼리지 예배당이다. 이곳의 형태는 그전 시대의 고딕 양식의 내부 형태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 측량이 없기 때문에 기둥과 가파른 아치도 없다. 건물 전체에서는 중세의 교회라기 보다는 오히려 천장이 높은 홀 같은 인상을 준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회화와 조각의 발전은 이러한 건축의 발전과 어느 정도까지는 나란히 갔다. 즉, 르네상스가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거둔 반면, 15세기의 북유럽은 아직 고딕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 에이크 형제의 위대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라기 보다는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 생각되었다. 수학적 원근법의 이론, 과학적 해부학의 비밀, 로마 유적들에 대한 연구 등등은 북유럽 거장들의 평온한 정신 상태를 동요시키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알프스 산맥 이남에 사는 그들의 동료 미술가들이 이미 '근대'에 속하는 반면 그들은 아직도 '중세 미술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프스 이남이나 이북의 미술가가 당면한 문제는 놀랄만큼 비슷한 것이었다. 얀 반 에이크는 그림 전체가 꼼꼼한 관찰로 꽉 찰때까지 조심스럽게 세부를 하나씩 첨가함으로써 그림을 자연의 거울로 만드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유파 즉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당시에 프랑스의 선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인 장 푸케(Jean Fouquet)가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1447년에 로마에 가서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
로마를 방문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북유럽 화가는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Rorier van der Weyden)이었다.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나름대로 미술의 새로운 요구와 미술이 오랫동안 복무해온 종교적인 목적을 융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15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 중 한 사람인 후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북유럽 화가들 가운데 개인적인 일화들이 전해져오는 몇 안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만년에 자진해서 어떤 수도원에 은거하여 죄책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15세기 중엽에 독일에서는 미래의 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미술뿐 아니라 인쇄술의 발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대단히 중요한 미술 기법이 발명되었다. 이로써 그림을 인쇄하는 것이 책을 인쇄하는 것보다 수십 년 앞서게 되었으며 성인들의 성상과 기도문이 들어있는 작은 책자들은 인쇄되어 순례자들과 신도들의 신심을 위해서 배포되었다. 이러한 성상을 인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후에 문자인쇄를 위해 발달한 기술과 동일하다. 목판화 하나를 선택해서 인쇄 후에 나타나지 않을 부분을 모두 칼로 도려내면 된다. 최종 제품에서 하얗게 보일 부분은 다 파내고 검게 나타날 부분만 좁은 선으로 남겨두면 된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고무 도장과 같이 보인다. 종이에 인쇄하는 원리도 동일한데 기름과 검댕이를 섞어서 만든 인쇄 잉크를 그 표면에 바르고 종이를 눌러 찍는 것으로 판 하나로 그것이 닰아 없어질 때까지 많은 양을 찍어낼 수 있다. 그림을 인쇄하는 이 간단한 기술을 목판화술(woodcut)이라고 한다. 그것은 대단히 값싼 방법으로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목판화를 여러 장 함께 사용하여 일련의 그림들을 인쇄하여 책으로 묶기도 했는데 이렇게 전부 목판화로 찍어 낸 책을 목판인쇄본이라고 불렀다. 목판화와 목판인쇄본들은 곧 일반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트럼프와 같은 놀이 카드도 이같이 제작되었고 신앙 수련을 위해 유머러스한 그림과 판화들도 만들게 되었다.
구텐베르크가 목판화 대신에 틀 속에 활자를 모아 인쇄하는 방법을 발명해내자 그러한 목판 인쇄본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쇄된 본문과 목판화 삽화를 결합하는 방법이 뒤이어 발견되어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많은 책들에서는 목판화로 삽화가 곁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목판화는 그림을 인쇄하는 데는 조잡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미술가들은 세부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관찰력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판화가 적합치 않았다. 그래서 이 대가들은 보다 더 정교한 효과를 내게 해주는 다른 매체를 선택했다. 그들은 나무 대신에 동판을 사용하는 것이다. 동판화(copperplate engraving)를 만드는 원리는 목판화와는 조금 다른데 목판화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선 외에는 모두 다 파내야 한다. 동판화의 경우에는 뷰린(burin)이라는 특수한 동판용 조각칼을 가지고 동판을 눌러 긁는다. 이렇게 금속판 표면에 새긴 선들 위에 물감이나 인쇄 잉크를 바르면 그 선 속에 그것이 들어가게 되므로 인쇄 잉크를 동판 위에 고루 바르고 난 다음에는 동판 표면을 깨끗하게 닦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 다음 동판을 종이에 힘껏 누르면 뷰린으로 새긴 선 속에 남아 있던 잉크가 종이에 묻어 나오게 되므로 판화가 된다. 목판화는 동판화와 정반대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뷰린으로 선의 깊이와 강도를 조절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지만 일단 이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목판화에서보다는 동판화에서 훨씬 풍부한 세부 묘사와 미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에는 만테냐와 보티첼리 풍의 동판화가 제작되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에는 다른 유파의 동판화들이 제작되었다. 판화는 유러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들의 미술 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 준 또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다른 미술가로부터 아이디어와 구성을 베껴오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군소 대가들은 동판화를 그들의 아이디어와 구성을 빌려오는 견본책으로 이용했다. 마치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주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가지 원동력 중의 하나였으며 오직 위대한 거장들만이 극복할 수 있을 미술의 위기를 이들 나라에 초래하게 만든 요인중의 하나였다.
15. 조화의 달성
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이제까지 우리는 15세기 말 보티첼리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까지 살펴보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15세기를 그 특유의 말솜씨로 '콰트로젠토', 즉 '400년대'라고 부른다. 16세기, 즉 '친퀘첸토(500년대)' 초엽은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또한 전 역사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와 조르조네, 북유럽의 뒤러와 홀바인 등 기타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이탈리아에는 명예와 특권을 얻고자 안달이 난 군소의 궁정들이 많이 있었다. 훌륭한 건물을 짓는다거나 화려한 무덤을 조성하도록 주문한다거나, 대규모 프레스코의 제작을 의뢰한다거나 유명한 교회의 높은 제단에 그림을 봉헌하는 일 등은 그 사람의 이름을 영원히 남게 하고 이승에서의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기념물을 확보하는 확실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가장 유명한 거장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많은 도시들이 경쟁했으므로 거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미술가들에게 호의를 베풀던 사람은 군주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거의 지나가고 그 역할이 거꾸로 바뀌게 되었따. 미술가가 주문을 수락함으로써 부유한 왕자나 군주에게 호의를 베풀게 되었던 것이다. 미술가들은 마음대로 주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한 그들의 작품을 고용주의 변덕과 기분에 맞추어 만들 필요가 없게되었다. 장기적으로 볼 이 새로운 힘이 미술을 위해서 순수한 축복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 결정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여하간에 처음에는 이것이 엄청난 양의 억눌려 있던 에너지를 방출하는 해방의 효과가 되었다. 마침내 미술가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 분야에서 제일 두르러지게 나타났다. 브루넬레스키 시대 이래로 건축가는 고전 시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고대 건축의 기둥양식에 적용했던 법칙들, 즉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식 기둥과 엔타블레이처의 올바른 비례와 치수를 연구해야 했으며 고대의 유적들을 찾아가 측량해야 했다. 또한 비트루비우스와 같은 고전 시대 저술가들의 필사본을 열심히 탐구해야 했다. 그리스와 로마 건축가들의 관례들을 편찬한 비트루비우스의 저작은 재능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이라도 파악하기에 어렵고 애매한 대목이 많았다. 학식 높은 거장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한 일은 신전과 개선문을 짓는 것이었지만 후원자들은 그들에게 도시의 궁궐과 교회의 건축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물의 쓰임새와 상관 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부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물의 실용적인 요구에 집착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균형과 균제를 갈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건축가들 중의 한 사람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무색케 할 당당한 건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전통과 편의성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유력한 후원자를 만났을 때 그것은 정말 기념할만한 순간이었다.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세워졌던 고색 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어내고 1506년에 그 자리에 교회 건축의 오랜 전통과 신에게의 봉사라는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이 이 일을 맡긴 사람은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열렬한 옹호자인 도나토 브라만테였다.
그 후 교황은 이 거장에게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맡겼는데 그는 이것이 기독교 세계에서 정말 놀랄만한 업적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브라만테는 일천 년 동안 내려온 서유럽의 전통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서유럽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교회는 미사가 집전되는 주 제단이 동쪽으로 향해 있는 장방형의 홀이 되어야 했다. 그 건물에만 어울릴 수 있는 그리스 고전기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면서 그는 거대한 십자형 홀을 중심으로 둘레에 대칭적으로 예배당을 배치한 정방형의 성당을 설계했다. 그러나 고대인들의 미술을 흠모하며 전대 미문의 작품을 만들어내겠따는 야심은 실행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이 거대한 건물이 돈을 너무 많이 삼켰기 때문에 충분한 기금을 모으려 애쓰다가 교황은 종교 개혁을 유발시킬 위치를 자초하고 말았다. 독일의 루터로 하여금 최초의 공개 항의를 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대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한 행위였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조차 브라만테의 계획에 대한 반대가 커지고 있었다. 교회 건물이 상당한 진척을 보일 무렵 사방이 대칭인 교회를 짓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 거대한 규모를 제외하고는 원래의 계획과 일치되는 것이 거의 없다.
브라만테의 대담하고 진취적인 기상은 1500년경을 전후로 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특징이다.
유명한 거장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에서 화가이며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경영하는 유수한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따. 베로키오의 명성은 당시 대단히 유명했으므로 베네치아 시는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의 기념물 제작을 그에게 맡겼다. 콜레오니는 베네치아 장군의 한 사람으로 그의 특별한 무공 때문이라기보다는 많은 자선 기관을 세워준 것을 시민들이 감사하게 생각하여 기념물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갑옷을 입고 있는 장군과 말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집중된 에너지와 어느 시점에서 보더라도 뚜렷한 윤곽에 작품의 위대성이 있다. 이러한 걸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방에서 젊은 레오나르도는 확실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학자들의 책에서 얻은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연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고 창의적 정신으로 이 모든 것에 도전했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화되리라고 확신한 비행 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음의 조화 등이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빛나게 한 두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아래였지만 그가 죽은 뒤로 45년을 더 살았다. 그의 긴 생애 동안에 그는 미술가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이 이룩해놓은 것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도 다른 장인들과 같은 훈련 기간을 지냈다. 그는 13살의 소년으로 콰트로젠토 말엽 피렌체의 지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분주한 공방에 들어가 3년 간 도제 생활을 했다. 기를란다요는 천재적인 작가의 위대함보다는 당시의 화려한 생활을 흥미있게 반영해주는 작품들을 남겨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마치 그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의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서 방금 일어난 사건처럼 재미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성공적인 화가의 공방에 안주하고자 하지 않았다. 미술에 관한 그의 이념은 전혀 달랐다. 그는 기를란다요의 안이한 방법을 배우는 대신 조토, 마사초, 도나텔로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과 메디치 가의 소장품 중에서 본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 공방을 나왔다. 30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천재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수 있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거장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 시는 영광스럽게도 그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일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다. 이 두 거장들이 명예를 걸고 경쟁한 것은 미술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1506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돌아갔으며 미켈란젤로는 그의 열정에 다시금 불을 지른 또 하나의 부름을 받게 된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로마로 초청하여 기독교 세계의 대왕에 상응하는 자신의 영묘를 세우게 한 것이다. 그는 갖가지 형상들로 들끓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채석장에서 대리석을 선별하는데 6개월을 보냈다. 그는 돌 속에서 잠자고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돌아와 작업에 착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사업에 교황의 열정이 상당히 식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그의 마음속에 다른 계획, 즉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려는 계획과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영묘는 원래 옛날 성당 건물 안에 안치될 계획이었는데 그것을 헐고 나면 그 영묘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가 움브리아 지방의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그는 바로 라파엘로 알려져 있는 라파엘로 산티였다. 그는 소위 '움브리아 파'의 지도자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미켈란젤로의 스승 기를란다요나 레오나르도의 스승 베로키오와 같이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도 주문 받은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줄 솜씨 좋은 많은 도제들을 필요로 했던 대단히 성공한 미술가들의 대열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페루지노는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통해 일반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그런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전의 콰트로첸토의 미술가들이 그처럼 열심히 씨름했던 문제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 중에는 그가 전체적인 화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깊이를 묘사하는 방법과 인물들이 거칠고 딱딱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를 구사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이러한 스승의 화풍을 재빨리 익히고 흡수한 젊은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자기보다 서른살 위인 레오나르도와 여덟살 위인 미켈란젤로가 그 이전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미술의 새로운 차원을 확립해갔다.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상은 후대들에게 성모의 진정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묘사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되듯이,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 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그가 <요정 갈라테이아>를 완성했을 때 어떤 귀족이 라파엘로에게 도대체 그렇게 아름다운 모델을 어디서 찾아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어떤 특정한 모델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브라만테가 1514년 사망한 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사업의 책임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그는 또한 건축가가 되어 교회를 설계하고, 별장과 궁궐을 짓고 또 고대 로마의 유적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최대의 경쟁자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그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분주한 공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라파엘로는 거의 모차르트만큼 젊은 나이인 37회 생일날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는 짧은 인생동안 놀랄 만큼 다양한 예술적 업적을 남겼다.
16. 빛과 색채
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무역을 통해 동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베네치아는 르네상스 양식, 즉 건축에 고전적인 형식을 적용한 브루넬레스키의 방식을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보다 더디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단 르네상스 양식을 받아들인 후에는 새로운 경쾌함과 따뜻함이 이 양힉에 더해져서 근대의 다른 어떤 건축 양식보다 더욱 밀접하게 헬레니즘 시대의 대상업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크의 장대함을 연상케 해주고 있다. 이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건물 중 하나는 산 마르코 성당의 도서관이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는 피렌체 출신의 야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1570)인데 그는 자신의 양식과 작풍을 그 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화려한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적응시켰다. 이처럼 경쾌하고 단순한 건물을 분석한다는 것은 양간 현학적인 취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건물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의 거장들이 몇 가지 안되는 간단한 요소들을 엮어서 어떻게 전혀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냈는지를 아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활기 넘치는 도리아 식 원주(圓柱)를 가지고 있는 건물 아래층은 가장 전통적인 고전 양식을 취하고 있다. 산소비노는 콜로세움에서 볼 수 있는 건축법을 많이 따르고 있다. 그는 이와 동일한 전통을 고수해서 이오니아 식으로 건물 위층을 꾸밀 때에도 난간을 얹고 또 그 위에는 조각상들을 배영한 소위 아티카(attica: 건축에서 조각상들을 놓는 대좌 구실을 함)를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산소비노는 기둥양식들 사이의 아치 형태가 콜로세움의 경우처럼 기둥 위로 놓이지 않고 또 다른 한 쌍의 가늘고 작은 이오니아 식 원주로 받치게 함으로써 상이한 기둥 양식들이 서로 엉켜 풍요로운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건물에 난간과 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트레이서리를 연상시키는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친퀘첸토의 베네치아 미술을 유명하게 만든 이 도시 특유의 취향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물의 예리한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고 휘황찬란한 빛 속에 사물의 색채들을 뒤섞이게 하는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의 분위기가 이 도시의 화가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의 화가들이 해왔던 것보다 더 신중하고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이나 그 곳의 모지아크 장인들과 접해왔던 것도 어쩌면 이러한 경향을 낳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색채에 관해서 말을 한다거나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작품의 크기가 매우 축소된 도판으로는 색채에 역점을 둔 걸작의 참모습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예를 들면 중세의 화가들은 사물의 진정한 형태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만큼 사물의 진정한 색채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밀화와 에나멜 세공과 패널화에서 그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값비싼 색채들, 이를테면 빛나는 황금색과 티 하나 없는 군청색 등을 배합해서 고루 칠하기를 즐겼다. 피렌체의 위대한 개혁자들은 색채보다는 소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 그림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데 색채를 주된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채색하기 전에 원근법이나 구도로써 그러한 통일된 구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베네치아에 있는 산 차카리아의 작은 교회에 가서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가 그의 말년기인 1505년에 제단에 그린 그림을 보면 색채에 대한 그의 접근법이 매우 달랐던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르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조반니 벨리니는 벨로키오,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등과 같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으로 이 세대들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유명한 친퀘젠토의 거장들이었다. 그 또한 대단히 바쁜 공방의 우두머리였든데 그의 공방에서는 친퀘첸토의 유명한 베네치아 거장인 조르조네 티치아노를 배출했다. 중부 이탈리아의 고전기 화가들이 완전한 화면 구성과 균형잡힌 구도로써 그들의 그림 속에 새롭고 완전한 조화를 이룩했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핵채와 빛을 그처럼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조반니가 보여준 모범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화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는 바로 이런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이 미술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그의 진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겨우 다섯 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작품만으로도 그는 새로운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못지 않는 명성을 충분히 굳혔다. 이상하게도 이들 그림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의 하나인 <폭풍우>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고전 작가나 고전을 모방한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한 장면을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이 특별히 세심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고 구도에서도 별다른 기교가 엿보이지 않지만 이 그림은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뇌우의 섬뜩한 빛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또한, 이 그림이 시초일 듯 싶은데, 그림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되는 풍경이 이제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풍경은 그 나름대로의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인물로부터 이 작은 패널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풍경을 번갈아 살펴보며 조르조네가 그의 선배나 동시대 화가들과는 달리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인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회화는 그 자체의 비밀스런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위대한 예술이 되었다.
조르조네는 이 위대한 발견의 모든 결실을 얻지 못하고 너무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성과는 모든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티치아노(Tiziano:1485?-1576)를 통해 얻게 되었다. 티치아노는 알프스 남부의 카도레에서 출생했는데 그가 흑사병으로 죽을 때는 99세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긴 생애동안에 그는 미켈란젤로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하게 되었다. 초기의 전기 전작들은 황제 카를 5세조차도 그가 떨어뜨린 붓을 집어줄 정도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그가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미켈란젤로의 거침없는 소묘 솜씨에 필적하는 화가였다. 이런 뛰어난 솜씨가 그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를 보면 그의 미술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 <성모와 성인들>보다 불과 약 15년 뒤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에서처럼 성모 마리아를 그림의 중앙에 두고 시중드는 두 성인을 대칭되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하사였는데 이것은 거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티치아노 시대의 사람들은 구도의 오래된 규칙들을 과감히 뒤엎은 그 대담성에 놀랐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그림이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은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없이 오히려 생기있고 활기차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써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의 소읍인 파르마에서도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기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던 한 화가가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일면 코레조(Corrdggio)라 불리운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 1489-1534)였다. 코레조가 그의 대표작들을 그렸을 때 이미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는 사망했고 티치아노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당대의 미술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도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들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후대의 여러 유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명암법에 관한 것이다.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가 초 : 독일과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이 이룩해놓은 위대한 업적들과 창안들은 알프크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문의 부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대 그리스의 로마의 지혜와 보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이탈리아를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술에 있어서의 진보를 말할때 학문에서의 진보와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딕 양식의 미술작품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위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럽의 걸작들을 접하게 된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그들의 미술이 갑자기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이라고 지칭할 수 있었던 것이 세 가지 있었다. 그것은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과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 양식에 관한 지식이었다.
건축가들은 원주나 프리즈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다시 말해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 형식을 가미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건축 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건물의 본체는 고딕 식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프랑스, 영국, 독일에는 궁륭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주두를 달아서 외면상으로는 원주로 변형시키거나, 트레이서리로 완성된 고딕 식 창문의 뾰족한 아치를 둥근 형태의 아치로 바꾼 교회들이 있다. 또한 환상적인 병(甁) 모양의 원주들을 지닌 수도원들도 있고 소탑과 부벽들이 촘촘히 세워져 있지만 고전적인 디테일로 장식된 성들도 있었으며 고전적인 프리즈들과 흉상들로 박공 구조를 이룬 도시의 주택들도 있었다. 고전적인 규칙이 완벽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이 이런 북방 건축물을 본다면 혐오감으로 등을 돌렸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런 건물들을 현학적인 아카데믹한 기준으로 평가하고자 하지만 않는다면 이 조화롭지 못한 양식에 포함된 창의력과 기지를 보고 감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원주가 아치와 같은 어떤 분명한 형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군소 화가들만이 그들이 입수한 이탈리아의 판화에서 인물의 형태나 제스처를 빌려오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그러나 진정한 미술가라면 미술의 새로운 원칙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원칙의 유용성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위해한 미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뒤러는 헝가리에서 이중하여 번창하는 도시 뉘른베르크에 정착했던 유명한 금세공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이 소년 시절부터 소묘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며 제단화와 목판화 삽화를 제작하는 가장 큰 공방에서 수습 기간을 보냈다. 이 공방은 뉘른베르크의 거장 미하엘 볼게무트가 운영하는 것이었다. 수습을 마친 뒤에 중세의 모든 젊은 장인들의 관례에 따라 여행길에 올랐다. 뒤러는 당시 학문과 서적 교역의 중심지 스위스 바젤로 갔다. 거기서 목판화 삽화를 그리다가 다시 여행을 계속하여 이탈리아로 갔다.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남유럽에서 배우 수 있는 모근 기법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뒤러는 환상적이며 환영적인 세계를 그리는 거장이며 대성당들의 현관을 창조했던 고딕 미술가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보여주었지만 이러한 업적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북유럽의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준 얀 반 에이크 이래,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보다 더 끈기있게 그리고 중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였음을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고딕 미술이 거의 도외시되었으나 이제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은 바로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여기에서 뒤러는 반 에이크의 아담과 이브와 같이 꼼꼼하고 충실하게 묘사된 경우조차도 실제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조해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 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뒤러에게는 이러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를 지도해줄 확고한 전통이나 확실한 직관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줄 확실한 법칙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그는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그러한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인들의 표현과 비례측정은 다소 모호했으나 뒤러는 그러한 난제 때문에 단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체결을 일부러 왜곡시켰다.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로르퍼(Alberecht Altdorfer:1408?-1538)는 숲과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변화이다. 자연을 그렇게 사항했던 그리스 인들조차도 목가적인 장면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풍경화를 그렸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다. 화가의 묘사력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는 그림을 팔 수가 있었다.
18. 미술의 위기
16세기 후반 : 유럽
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들은 모든 미술 애호가들이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등은 그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그들에게는 소묘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하나도 없었으므로, 또 주제상의 어떠한 문제도 그들이 감당하기 벅찰 만큼 복잡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올바르게 결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심지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조각 작품들까지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장차 위대한 미술가가 되고자 하는 소년에게 그 당시의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는 결코 듣기에 기분좋은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위대한 거장들의 경의적인 작품들에 제아무리 감탄했따 할지라도 미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미술 지망생들은 이러한 생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미켈란젤로가 연구했던 것을 열심히 배우고 최선을 다해서 그의 수법을 모방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들을 그대로 베껴서 그것이 그들의 그림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이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한 결과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울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성경 이야기를 그린 장면에 젊은 운동 선수들같은 우람한 체격의 나체 인물들이 가득 등장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터무니없이 기발한 착상으로 그들을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상징적인 의미와 해박한 지식으로 가득찬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데, 사실 그러한 지식이란 굉장한 학식을 지닌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이집트의 상형 문자나 지금은 반쯤 잊혀진 고대 저술들의 의미를 아는 사람 정도나 해독할 수 있는 애매모호한 그림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또 다른 미술가들은 이전 세대의 자연스럽지 못하고 애매하고 덜 단순하거나 조화롭지 못하게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주장했던 것 같다. 거장들의 작품은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영원히 흥미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러한 작품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놀랍고 기발하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그런 것을 추구하려고 한다.물론 고전적인 거장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능가하려는 젊은 미술가들의 강박 관념에는 건건치 못한 데가 있었다. 이것은 심지어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까지도 괴상하고 기교에 치우친 쓸데없이 복잡한 실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선배들을 능가하려는 이들의 미친듯한 노력 그 자체가 그들이 과거의 거장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박학했던 사람은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80)였다. 비젠차 근처에 있는 그의 유명한 별장인 <빌라 로톤다>이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기발한 창안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면이 동일하며, 하나의 중앙 홀을 중심으로 각 면이 신전의 정면 형태를 한 현관을 가지고 있어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구성이 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이것은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 기발함과 이상적인 효과에 대한 추구가 건축의 일반적인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북쪽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유럽의 미술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 초래된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칼빈 교도 중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다. 이런 것이 교리상 허용된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기후와 건물의 양식이 이탈리아 귀족들이 그들의 궁전에 그리게 했던 그런 대규모의 프레스코 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있는 곤경에서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일찍이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체의 표현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꽃, 나무, 마굿간, 양떼 같은 것을 그릴 때 필요한 절대적인 인내력과 정확성에 있어서는 플랑드르(Flanders) 화가들이 쉽게 그들을 앞지를 수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따라서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또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회화의 영역이 보다 제한된 이상, 이제 화가들은 전문화의 길을 따라나서게 된다. 그들은 중세 필사본의 여백에 그려진 희화의 시대, 그리고 15세기 미술에 묘사된 일상 생활의 장면들로 거슬러 올라가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발전시키려 했다. 북유럽 화가들이 주제를 어떤 종목 또는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 특히 일상 생활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은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Gene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장르 페인팅의 장르Genre는 프랑스 어로 종류 또는 분야를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나라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프랑스 중세 미술의 굳건한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미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수의 상류 계급이 마침내 받아들인 이탈리아 양식은 첼리니 유형의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이었다.
19. 발전하는 시각 세계
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미술의 역사는 흔히 다양한 양식들의 역사, 즉 여러 양식들이 계승되고 발전되어지는 이야기를 설명할 때가 많다. 원형 아치를 기본으로 하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또는 노르만 양식이 어떻게 첨형 아치의 고딕 양식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고딕 양식을 대신하여 들어선 르네상스 양식이 어떻게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점차 유럽의 모든 나라에 그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가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오늘날까지도 건축가들은 원주, 벽기둥, 코니스, 엔타블레이처, 쇠시리 장식 등과 같은 동일한 기본 형태들을 사용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본래 고전 시대의 유적에서 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브루넬레스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건축에 관한 많은 책들은 이 기간 전체를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취향과 유행은 그 오랜 기간 동안에 당연히 많은 변화를 거쳐왔으므로 이 변화하는 양식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각 양식마다 개별적인 명칭을 붙이는 것이 편리하다.
오늘날 이러한 양식들을 가리키는 어휘들 대부분이 그것이 처음 쓰여진 당시에는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였다는 사실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고딕'이라는 단어도 처음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들이 야만적으로 생각하는 양식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로마의 도시를 약탈했던 고트 족이 이 양식을 이탈리아에 도입했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남아있다.
'바로크'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것을 조롱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었다. 바로크라는 말은 사실은 터무니 없다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 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이러한 비평가들에게는 고대 건축의 엄격한 규첵을 무시하는 것이 통탄할만한 취향의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양식을 바로크라고 불렀다.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우리는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 회화에서 점점 더 많은 중요성을 띠게 되는 새로운 이념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를테면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회화는 매너리즘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은 아니었다. 미술이 매우 상투적인 방식에 빠졌으며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로마에서는 그 당시의 미술가들 사이의 다양한 동향이나 운동에 관해 토론하고, 그들을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과 비교하며 미술가들 사이의 다툼이나 음모에 가담하여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즐기는 교양있는 신사들이 많았다. 그러한 논쟁 자체는 미술 세계에서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주된 쟁점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와서 아주 정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화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사람은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1560-1609)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p:1573-1610)이다. 이들은 둘 다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매너리즘의 기교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대단히 달랐다.
안니발레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 특히 코레조 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대단히 존경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그가 과거의 모든 거장들이 가지고 있던 장점만을 골라서 모방하려 했따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종류의 계획(절충적 계획)을 세웠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계획은 사실 뒤에 그의 작품을 모델로 삼았던 아카데미나 미술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카라치 자신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만큼 졸렬한 화가가 아니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훌륭한 화가였다.
카라치의 수법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카라바죠와 그의 일파들은 그의 회화 방식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두 화가는 참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물론 이러한 우정은 걸핏하면 쉽게 화를 내고 사람을 칼로 찌른 일도 있는 격한 성미의 카라바조에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카라치와는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에게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멸할 만한 약점으로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 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주로 관중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화가이며 아름다움과 전통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이 쏟아지는 비난을 받은 최초의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그의 예술관이 비평가들에 의해 하나의 문구로 집약되었던 첫번째 화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사실상 카라바조는 너무나 진지하고 위대한 예술가였으므로 떠들썩한 화젯거리나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의 작품은 그로부터 삼백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주 대담하게 보인다.
로마는 그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유럽 전역의 미술가들이 로마로 모여들어 회화에 대한 논쟁에 참가해서 유파 간의 싸움에 편을 들었고,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최신의 미술 운동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로마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즌시킨 이탈리아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귀도 레니(Guido Reni:1575-1642)일 것이다. 볼로냐 출신의 이 화가는 한동안 어느 파에 들어갈지 머뭇거리다가 카라치 파에 입문하기로 결심한다. 스승인 카라치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그의 명성은 현재의 평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났었다. 한때 그는 라파엘로와 비등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사실 레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가 모방하고자 했던 위대한 화가 파라엘로를 생각하게 되기를 원했다. 현대 비평가들이 레니의 업적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모방때문에 도리어 레니의 작품이 순수한 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너무 자의적이고 또 지나치게 신중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레니의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사실상 라파엘로와 레니가 회화에 접근하는 방법은 아주 달랐다. 라파엘로의 작품이 지닌 미적 감각과 평온한 느낌은 그 자신의 성격과 예술관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반면, 레니의 그림에서는 이와 같은 화법의 선택이 일종의 원칙에서였다고 느껴진다.
만약 카라바조의 제자들이 그에게 그가 잘못하고 있따고 말해주었다면 그는 다른 양식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의 문제가 세워지고 또 그것이 당시의 화가들의 정신과 대화 속에 침투해 들어간 것은 레니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미술은 이제 미술가들 앞에 놓인 여러 방법들 중에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만 될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레니가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취한 방법, 즉 비속하고 추하며 그의 고상한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그의 노력이 얼마나 훌륭한지 찬미할 수 있다.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non-classical)', 또는 '아카데믹한(academic)' 방침이라고 부른다.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이었다. 그는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서 살며 작품을 제작했다. 푸생은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와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이탈리아로 귀환한 또 한 사람의 프랑스 작가인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82)으로 푸생보다 여섯살 아래였다. 로랭은 캄파냐(로마 평원), 즉 아름다운 남부의 색조 속에 위대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장엄한 유적들이 있는 로마 주변의 평원과 언덕들을 그렸다. 부유한 영국인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클로드의 꿈을 모델로 해서 그들의 소유지 내의 정원에 자기들만의 소자연을 꾸며놓으려고까지 했다.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카라치의 방침을 그대로 실천한 이 프랑스화가의 영향은 이런 식으로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들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북유럽 사람으로 카라치나 카라바조 시대의 로마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접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플랑드르 출신의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로 푸생과 클로드보다 한 세대 위였고 귀도 네니와 비슷한 연배였다. 1600년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스물세 살의 나이로 로마에 왔다. 그는 기질적으로 여전히 플랑드르 인이었고, 반 에이크와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및 브뢰헬을 배출한 나라의 화가였다. 네달란드 출신의 이들 화가들은 항상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따. 그들은 옷감과 살아 있는 신체의 감촉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탈리아 화가들이 신성시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품위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벤스는 카라치와 그의 유파가 고전적인 전설과 신화를 주제로 그린 것을 부활시키고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감동적인 제단화를 구성한 방법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카라바조가 자연을 연구할 때 보인 타협없는 성실성 또한 높이 평가했다.
1608년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왔을 때 루벤스는 31세의 청년으로 알프스 이북에서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전의 티치아노보다도 루벤스는 한층 더 붓질을 그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입체감을 표현한 채색 소묘는 아니다. 그것은 소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화적인' 수단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그 점이 생명감과 활력의 느낌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이다.
루벤스의 유명한 많은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1599-1641)다. 그는 루벤스보다 스물두 살 아래였으며 푸생과 클로드 로댕의 세대에 속했다. 그는 사물의 질감과 표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루벤스의 모든 기법을 터득했으나 기질과 분위기는 그의 스승과 대단히 달랐다. 반 다이크의 그림에는 힘이 없고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바로 이러한 자질 때문에 제노바의 근엄한 귀족들과 찰스1세와 그의 왕당파 당원들이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1632년 찰스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고 그의 이름도 영국식으로 안토니 반다이크 경으로 표기했다. 오늘날 거만한 귀족적인 태도와 궁정적인 세련미를 숭상하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간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된 것은 반 다이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하던 중에 젊은 화가를 만났는데 그 젊은 화가는 루벤스의 제자 반 다이크와 같은 해에 출생했고 반 다이크가 찰스 1세의 궁전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슷한 지위를 마드리드의 펠리페 4세의 궁전에서 누리고 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599-1660)였다. 벨라스케스는 그때까지 이탈리아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된 카라바조의 발견들과 그의 수법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연주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20. 자연의 거울
17세기 : 네덜란드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자 네덜란드와 같은 조그만 나라의 미술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벨기에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은 그 당시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다. 네달란드의 북쪽 지방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신교 상인들의 취양은 국격 너머 가톨릭을 믿는 나라들과 아주 달랐다. 즉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도시가 점차 안정된 기반을 확보해가지고 그들의 부가 축적됨에 따라 그들의 세계관도 성숙해갔다. 그러나 이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를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조차 이들은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중세 유럽의 다른 지역 못지 않게 미술이 번창했던 영국과 독일에서도 이 미술의 위기 상황은 매우 심각하여 화가나 조각가라는 직업이 그 나라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신교 사회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런 회화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증명해주듯이 바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어했으며, 시장이나 시의원으로 선출된 명사들은 그들의 직위를 나타내는 표지가 들어 있는 초상화를 원해따. 더욱이 네덜란드 도시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방의 의원회 및 자치 단체의 임원들은 회의실이나 모임 장소에 그들의 집단 초상화를 자랑삼아 걸어놓는 관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고객들의 취향에 맞도록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비교적 안정적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양식이 유행에 뒤지면 몰락하기 마련이었다.
자유로운 신생 네덜라드에서 최초로 출현한 거장인 프란스 할스(Frans Hals:1508?-1666)는 그와 같은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부모들은 신교도였으므로 가톨릭 권인 네덜란드 남부를 떠나서 부유한 도시인 하를렘에 정착했다.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은 모두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주문한 사람의 위엄과 귀족적인 혈통을 암시하기 위해 주문자의 자세에 세심한 배려를 했다. 그러나 할스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특정 순간에 포착해서 그렸다는 인상을 준다. 그의 초상화는 초기의 초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우 대칭은 아니다. 그렇대고 해서 한쪽으로 치우쳐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할스도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의 화가들 중 초상화를 그리는 소질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은 주문을 받아 그리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달리 그들은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런 식이고 우리도 여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화가가 그의 화실 안에서 그림을 그린 다음 그것을 포장하여 팔려고 내놓는다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사정이 초래한 변화를 상상하기 힘들다. 어떤 면에서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업에 간섭을 하고 때로는 그들을 못살게 굴었던 후원자들을 제거하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었다. 이제 미술가는 한 사람의 후원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횡포한 주인, 즉 자기 작품을 구매하는 대중을 상대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이나 장날을 찾아가서 작품을 팔거나 중간상인, 즉 화상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했다. 네덜란드의 각 도시에는 점포에 그림을 진열해놓고 파는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별로 이름이 나지 않은 군소 화가가 명성을 이룰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화의 특수한 분야, 즉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대중들은 어느 분야의 그림에서 누가 유명한 작가인지를 알고싶어 했다. 전쟁화를 그려 명성을 얻으면 대개 그는 정쟁화만을 손쉽게 팔 수 있었다. 또는 풍경화로 성공을 거두면 풍경만을 그리는 것이 안전했다. 16세기 북유럽의 나라에서 시작된 전문화의 경향은 17세기에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아마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1606-69)를 들 수 있다. 그는 프란스 할스나 루벤스보다는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이고 반 다이크나 벨라스케스보다는 일곱살 아래였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나 뒤러처럼 그가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처럼 후세까지 그의 말이 전해지는 존경받는 천재도 아니었다. 또 당시의 지도적인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던 루벤스처럼 달필의 외교 사절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도 그를 친숙하게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적이고 인기있는 화가였던 젊은 시절부터 파산의 비애와 진실로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관한 놀라운 기록인 일련의 자화상들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자화상들이 일종의 독특한 자서전인 셈이다.
렘브란트는 1606년 대학 도시 레이덴의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가서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그 당시의 학자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을 크게 칭찬했다. 스물다섯살에 상업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 딸과 결혼하고 집을 장만해서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면서 쉬지 않고 작업한다. 1642년 그의 첫부인이 사망하면서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지만 대중들에 대한 렘브란트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면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14년 후 그의 채권자들이 그의 집을 팔고 수집품들을 경매에 부쳐서 처분해버렸다. 다만 그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룸으로 완전한 몰락의 경지에서 벗어나는데 미술품을 거래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형식적으로 그를 회사의 고용인으로 만드는 협정을 한다. 그 덕택으로 그는 만년에 위대한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충실한 반려자들은 그보다 먼저 죽었고 1669년 그의 인생이 막을 내렸을 때 그에게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렘브란트는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이며 후에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된 얀 지크스의 초상화와 같은 위대한 작품을 그렸다. 그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할 권리는 화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한 완성은 '화가가 그의 목정을 달성한 때'라고 했으며 그래서 그는 얀 지크스의 장갑낀 손을 단순한 스케치 형태로 남겨둔 채 완성해버렸다.
당대의 다른 미술가들처럼 렘브란트도 카라바조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카라바조와 마찬가지로 렌브란트도 조화와 아름다움이라는 진실과 성실성을 더 중요시했다. 그의 자유로운 제작태도는 인물군을 배치하는 데 얼마나 많은 예술적 지혜와 기술을 사용했는지 잊게 만든다. 물론 그의 예술이 한층 더 심오하고 타협을 모르는 경지로 들어감에 따라 초상화가로서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비극과 파산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미술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 예나 지금이나 진짜 비극은 명성만으로는 먹고 살수 없다는 데 있다.
21.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
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 할수록 로마 교회는 더욱 열렬하게 미술가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이리하여 종교 개혁과 과거에 그처럼 자주 미술의 진로에 영향을 끼쳤던 우상 숭배라는 말썽 많은 문제들이 다시 바로크 양식의 발전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가톨릭 세계는 중세 초기 미술에 부여했던 단순한 임무, 즉 글을 못 읽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술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변형시켜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거의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교회당 내부에서 중시되는 것은 세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주는 전반적인 효과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내부를 로마 교회의 장려한 의식의 틀로 보지 않는다면, 또한 제단 위에 촛불이 켜져있고 분향의 향기가 교회 내부에 감도는 가운데 오르간과 성가대의 선율이 우리를 별세계로 인도하는 장엄한 미사에 참석해 보지 않는다면 이같이 호화찬란한 교회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올바르게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실내 장식가들이었으며 치장 회반죽 세공과 대형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치장 회반죽 세공과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들은 어떠한 성이나 수도원의 홀도 장관을 연출할 무대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리기에도 재미있었을 것이며 보기에도 역시 즐겁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이렇게 재치가 넘치는 작품들이 그 이전 시대의 보다 차분한 작품들보다 영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에 단 한 가지의 특수한 분야에서만 새로운 이념들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특징적인 것으로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과거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광을 감탄하기 위해서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은 흔히 돌아갈 때 갖고 갈 기념품을 원했다. 특히, 그 경치가 화가를 매혹시킨 베네치아에서 이러한 수요를 만족시켜주는 한 유파가 생겨났다. 이들 중의 한 화가가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1712-93)였다. 그가 그린 베네치아의 풍경은 티에폴로의 프레스코처럼 베네치아 미술이 그 특유의 화려함과 빛과 색채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아르디는 17세기 화가들이 연구했던 움직임과 대담한 효과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화가가 일단 한 장면의 일반적인 인상만을 제공해주면 나머지 사소한 세부들은 보는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의 전경>작품 속의 곤돌라 사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능숙하게 배치된 몇 점의 색채들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면 그 환영은 완벽한 효과를 연출한다.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인간에게 감명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는 예술의 힘을 발견한 것은 로마 교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권력을 과시해서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고심했다. 그들 또한 자신이 신권에 의해 받들어진, 평범한 인간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이는 17세기 말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떤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왕권의 화려함과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 베르니니를 파리로 초빙했다. 루이 14세의 또 다른 궁전은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너무나 거대해서 사진을 통해서는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다. 정원에 면해 있는 창문이 각 층에 적어도 123개씩 있고, 가로수길, 테라스와 연못들이 수 마일에 걸쳐 정원을 이루고 있다.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장식적인 세부때문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르네상스 식 형태들만으로 단순하게 조합했더라면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정면은 단조로웠을 것이나, 조각상들과 항아리, 전승 기념품 등의 도움으로 다양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건물에서 바로크 형태의 기능과 목적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열풍은 다음 세대로 번져나갔다. 남부 독일의 작은 공국들도 모두 나름대로 베르사유 궁전을 가지고 싶어했고, 또 오스트리아나 스페인에 있는 작은 수도원들조차 화려함에 뒤지지 않으려 했다. 1700년을 전후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소도시 전체가 마치 무대 장치처럼 이용되었으며 넓은 시골 들판은 정원으로, 시냇물은 폭포로 변형되었다. 미술가들은 그들 마음에 맞게 자유자재로 설계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광경은 돌과 도금된 치장 회반죽 세공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설계를 현실화하기 전에 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엄청난 창작 활동의 결과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의 많은 소도시들의 경관은 완전히 변형되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융합된 지역은 특히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독일 남부였다.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17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지도적인 화가들과 비견되는 거장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 같다. 이 거장은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1684-1721)이다. 그는 태어나기 불과 몇 해 전에 프랑스에 점령당한 플랑드르 출신으로 파리에 정착해 살다가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 역시 궁정 사회의 축제와 유흥에 적합한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 왕과 귀족들의 성의 실내 장식을 디자인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상의 공원에서 즐거운 야유회를 즐기는 꿈 같은 생활로 비도 오지 않으며 군녀들은 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모든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지 않고 번쩍이는 비단 옷을 집고 있는 사회, 마치 미뉴에트 춤의 연속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형을 말한다.
그러나 바토는 단순히 당대의 유행의 대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예술가였다.
23.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신교 국가들은 한껏 위세를 펼치던 이 바로크 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 청교도적인 취향과 세계관을 싫어했던 왕정 복고 시기에도 그랬다. 이 시기에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는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1621-1723)이었는데 영국은 1666년의 대화재를 입은 런던의 교회당들을 재건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그가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을 불과 20년 전에 로마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렌은 로마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바로크 건축가들의 건물 배치 방법과 장식적인 효과에 큰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렌의 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보다 규모가 훨씬 크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과 양쪽의 탑들과 고대 신전의 정면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정면 현관들이 주는 인상은 대단히 다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어서 운동감을 암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인함과 안정감을 준다. 보로미니나 멜크 수도원을 지은 건축가의 자유분망함에 비하여 렌은 은근하고 침착한 인상을 준다. 신교와 가톨릭의 교회 건축의 대조는 렌이 설계한 교회,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월브룩 교회와 같은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면 훨씬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같은 교회는 주로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서 만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그 목적은 천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도들의 생각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많은 교회에서 렌은 엄숙하고 동시에 간소한 느낌을 주는 이러한 공간의 테마에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다.
교회들이 그랬듯이 성(城)들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어떠한 왕도 베르사유와 같은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모을 수 없었고 영국의 귀족들 또한 사치와 방종의 면에서 독일의 제후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18세기 영국의 이상은 성이 아니라 교외의 저택이었다.
교회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그들이 고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규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고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법칙을 따르는 것이었다.
고전 시대 건축들의 유적을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측량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건축가들과 장인들에게 표본을 제공해주기 위해 그들의 연구 조사결과를 교과서로 출판했다. 이 교과서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저술한 것인데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건축에 관한 모든 취향을 규정하는 최고의 교과서로 간주되었다. 자기의 별장을 팔라디오 식으로 짓는 것이 유행의 첨단으로 여겨졌다.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식예술에도 반대했다.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켄트 같은 사람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으로서 영국의 풍경 정원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건축에 있어서의 이성과 취향의 척도를 한 이탈리아 건축가의 권위에서 찾았듯이 경치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남유럽의 한 화가에게 의존했다.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취향과 이성의 척도에 의거한 영국의 화가나 조각가들의 입장이 반드시 부러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신교의 승리나 성상이나 사치에 대한 청교도들의 절대 의식이 영국의 미술 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회화에서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한 영역은 초상화 부문이었는데, 이러한 기능마저도 주로 홀바인이나 반 다이크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벌링턴 시대의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외부의 세계에서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지 않았다. 저택에 그림을 걸 경우 차라리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사려 했던 것이다.
18세기에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역시 베르사유 궁전의 중후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18세기 초에 오면 바토의 로코코 양식과 같은 보다 섬세하고 친근한 감각효과에 밀려 유행에서 벗어났다. 이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24.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수백년 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수많은 가설들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우리는 진정으로 밝아오는 근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첫번째 변화는 이른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많은 건축가들이 팔라디오의 책 속에 나오는 규칙들이 훌륭한 건물을 위한 올바른 양식을 보장해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관해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말할 사람들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일이 바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은 스트로베리 힐에 있는 자신의 시골 별장을 다른 사람들처럼 정통 팔라디오 양식으로 짓는 것은 너무 따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별장을 낭만적인 고성처럼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월폴의 고딕 식 별장이 세워진 1770년 당시에는 이 건물이 골동 취미를 과시하려는 기벽으로 간주되었으나 그것은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이 건물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만든 자의식의 첫번째 징후였다.
물론 대다수의 건축가들은 여전히 르네상스 건축을 고전 양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들조차도 과연 무엇이 올바른 양식인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해온 건축상의 관례와 전통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례 중 많은 것들이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증거를 발견했다. 그들은 15세기 이래 고전 건축의 규칙들로 통용되어오던 것들이 놀랍게도 다소 퇴폐적인 시기의 로마 시대 유적의 일부에서 취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열성적인 여행가들에 의해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신전들이 재발견되었고 발굴되었으며, 이렇게 재발견된 신전들은 팔라디오의 책에 나오는 고전 건축의 원칙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따라서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 했다. 월폴의 '고딕 복고'와 견줄 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룬다.
이때는 영국의 많은 온천들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는데 '그리스 복고' 형태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러한 온천 마을이었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건국 공로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 자신의 저책 몬티첼로를 확실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에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가나 장식가들의 화사하고 낙천적인 전통은 이제 흘러가버린 과거지사가 되었다. 그러한 것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성에 사용된 양식이었던 반면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태어난 아테네의 자유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고딕 양식의 부활은 이러한 순수한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부활과 나란히 존재했다. 특히 이성의 힘이 세상을 개조하는 데 실망하고 이른바 신앙의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던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것은 훨씬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이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장인으로부터 도제로 그 지식이 전승되는 보통의 직업이 아니었다. 그림이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철학과 같은 하나의 과목이 되었다. '아카데미'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 자체를 암시하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제자를 가르쳤던 올리브 숲 이름에서 나온 말로서, 나중에는 지혜를 추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을 가리키게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레이놀즈와 같은 아카데미의 교사들이 젊은 학생들에게 과거의 걸작들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그들의 기교를 익히라고 재촉하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는데, 왕 스스로가 왕국 내의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술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왕립기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그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을 기꺼이 사려고 하는 구매자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여기에서 어려움이 생겨났다. 아카데미에서는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이 사실이 후원자들로 하여금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 보다는 거장의 작품을 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했다. 오늘날 화가와 조각가들이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 구매자를 찾기 위해 전시회를 열고 또한 그것을 위해 작품을 주로 제작한다는 관념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였는지 깨닫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에 화젯거리를 제공해주는 사회적 행사였으며, 미술가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빼앗아가기도 했다. 요구하는 것이 무언지 분명한 개인 후원자들이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대신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는 화려하고 가식적인 것이 단순하고 진지한 것을 압도해버릴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화가들에 있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림의 주제를 멜로드라마적인 것으로 선택하고 작품의 규모를 크게 하거나 요란한 색채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정말 큰 유혹이었다. 따라서 몇몇 미술가들이 아카데미의 '관학적'인 미술을 경멸했으며, 대중의 취향에 호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소외 당한 사람들 사이의 의견 충돌이 그동안 미술이 발전해온 공통의 기반을 파괴해버릴 위험을 몰고 왔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가 즉각 불러일으킨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림의 주제가 당연히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대다수가 성경에서 따온 종교적 주제들이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고 있다.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제에 있어서 좁은 한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프랑스 대혁명 시대에 매우 급속히 변해버렸다. 갑자기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했다.
유럽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구세계에서 신성시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인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1737-1815)는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화가였다. 코플리는 찰스 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탄핵된 다섯 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받았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끌어낸 이같은 일화는 그때까지 대규모 그림의 주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코플리가 이러한 과제를 위해 선택한 방법도 전례없는 것이었다. 그의 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그 주제를 구한 것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 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1748-1825)였다. 그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 화가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중 한 사람인 마라(Marat)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를 대의 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마라는 목욕탕에서 집무하는 버릇이 있었고 욕조에는 간단한 책상이 붙어 있었다. 자객은 그에게 청원서를 건네주었고 그가 서명하려는 순간 그를 찔렀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의 근육과 힘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배웠다. 또한 중심적인 효과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그림 속에는 잡다한 색채도 없고 복잡한 단축법도 없다.
구태 의연한 주제를 내팽개친 다비드 세대의 미술가들 중에는 위대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가 있다. 고야는 유화 작품을 통해서만 과거의 인습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렘브란트처럼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애쿼틴트(acq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의 주제이든 역사적인 주제이든 또는 풍속적인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가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기서도 전통은 도움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었다.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명의 영국 풍경화가가 얼마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한 명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 M. W. Turner:1775-1851)이고 다른 한 명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1837)이다. 터너는 그의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에 종종 화제를 자아냈던 성공한 화가였따. 그는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일생의 야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국가에 기증하면서 그 중 한 작품을 항상 클로드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터너는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이었으며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그의 최고 걸작들은 웅대한 자연의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꾸밈없는 화가가 자리할 곳은 충분해"라고 1802년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날의 가장 큰 악덕은 허세야. 그것은 진실을 넘어서려 하지." 아직도 클로드를 모범으로 받드는 유행을 뒤쫓던 풍경화가들은 문외한이락도 그럴듯하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게 하는 손쉬운 속임수를 많이 만들어냈다. 예컨대 전경의 인상적인 나무 한 그루가 화면 중앙에 펼쳐진 원경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게 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채색법도 일목요연했다. 따뜻한 색깔들인 갈색이나 황금색 계통의 색조들은 전경에 사용해야 하고 배경은 연한 푸른 색조로 배어들게 해야했다. 구름을 그리는 방식이 있었고 옹이 투성이 참나무 껍질을 그럴듯하게 그리기 위한 특별한 요령도 있었다. 컨스터블은 이러한 틀에 박힌 수법들을 경멸했다. 한 친구가 전경에 낡은 바이올린의 빛깔인 부드러운 갈색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충고하자 그는 바이올린을 꺼내어 풀밭 위에 올려 놓고 실제 눈으로 보이는 선명한 초록색과 인습이 강요하는 따뜻한 색조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옆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며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25. 끝없는 변혁
19세기
전통의 단절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특징지으면서, 당시 미술가들의 생활과 작품 활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카데미와 전시회, 비평가들과 감식가들은 '예술'과 단순한 '기술'간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동원했다. 이제 미술이 존재 근거로 삼아왔던 바탕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업 현명은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트려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작업장은 대공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직접적 결과는 건축에서 잘 드러났다. 견실한 장인 기술의 결여는 '양식'과 '미'에 대한 이상한 집착과 함께 이 시기의 건축을 말살시켰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보면 19세기 건축물이 이전 시기에 지어진 건물 수보다도 훨씬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과 미국 전역의 도시들이 급속도로 팽창하여 모두 '건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변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후죽순 생겨나는 건물들은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양식을 지니지 못하였다. 시의원들은 새 공장이나 기차역, 학교, 박물관을 세우는 데 있어 자기 자신의 취향을 고집했다. 예를 들면 일단 기타 세부 사항이 합의된 후에는 건축가에게 문은 고딕양식으로, 건물은 노르만 양식이나 르네상스의 궁전 혹은 오리엔트 회교 사원 양식으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성당은 대개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고딕 양식이 소위 '신앙의 시대'에 지배적인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에는 과장된 바로크 양식이 선호되었고, 성이나 관공서에는 위엄있어 보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몇몇 19세기 건축가들은 이같은 딜레마를 극복하여 엉터리 고딕 양식도 아니고 어설픈 창작도 아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런던의 국회 의사당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회화나 조각의 경우에는 건축에서와 같은 '전통적인 양식'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통의 단절'이 미친 영향이 건축에 비해 미약하리라 생각되기 쉽지만 실은 다르다. 기존 화가들은 후원자들이 요구하는 제단화나 초상화 그림을 그렸고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껏 능력을 발휘하여 불후의 명작을 낳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그의 지위는 안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안정감이 19세기에 이르러 무너지게 된다.
먼저 전통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었다. 이제 소재가 풍경화인지 과거의 극적인 장면인지, 주제의 경우도 밀턴의 작품인지 아니면 고전 문학인지, 또 방식에 있어서도 다비드 식의 고전주의인지 환상적인 낭만주의인지 하는 모든 결정이 화가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가의 선택권이 확대되면 될수록 화가 자신의 취향과 대중 취향 간의 간극은 점차 멀어져갔다.
보통 그림을 사려는 사람은 어떤 것을 살지 미리 염두에 두고 다른데서 이미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을 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욕구가 쉽게 충족되었다. 왜냐하면 화가에 따라 그림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동시대의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단일한 전통이 없어졌기 때문에 미술가와 후원자 간에 종종 마찰이 빚어졌다. 후원자의 취향은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반면 미술가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생활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 후원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그들은 '양보'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고 위신도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미술가들은 관례를 따르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 하는 부류로 크게 나뉘어 이 둘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져갔다. 게다가 산업 혁명과 장인 기술의 쇠퇴, 전통성이 결여된 새로운 중산 계급의 등장, '예술'을 빙자한 값싸고 조잡한 상품 생산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일반 대중의 취향 수준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술가들과 대중사이의 불신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적인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보기에 미술가들은 대수롭지 않은 작품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고 반면에 미술가들은 거만한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 미술가들은 스스로를 별개의 인종으로 여기기 시작하여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벨벳이나 골덴 옷을 입었으며 챙 넓은 모자에 헐렁한 타이를 매고 다녔다. 그리고 소위 '고상한' 관습들에 대해 경멸을 퍼부었다. 물론 이러한 상태를 건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미술가들의 길에 함정들이 있긴 했지만 변화된 상황이 이를 메꾸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함정이란 뻔한 것이었다.
자신의 영혼을 팔아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려는 미술가들과 작품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과장하는 미술가들은 모두 파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유약한 화가들에게만 절망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택의 폭이 확장되고 후원자의 변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 외에도 그들이 치른 대가는 다음과 같느 이점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사상 처음으로 미술가 ㅡ미술가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개성을 지녔다는 전제하에 ㅡ개성 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물론 미술이 '표현' 수단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가. 예컨대 이집트 미술가는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이는 양식의 규치과 관습이 너무 엄격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이 없는 곳에는 표현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는 옷 입는 방식에서 '개성을 표현한다'고 말할 경우 우리는 여자가 옷을 선택한 방식이 그 여자의 취향과 기호를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얘기한 것이다. 여자가 모자를 사는 것을 지켜보면서 왜 그녀가 이 모자를 제쳐놓고 다른 모자를 고르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선택은 그녀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해주길 원하는지 암시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 행위를 통해 그녀의 개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제복을 입어야 한다면 어느 정도 '표현'의 여지가 남아 있다해도 그 폭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양식이란 바로 이 제복과도 같은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전시회와 화실에서 기대하는 것은 더 이상 평범한 기교와 과시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미술이 더불어 얘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과 만나게 해주길 원했다. 그 대상은 바로 작품을 통해 때묻지 안은 순수함을 보여주며 남의 것을 모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술적 양심에 부합될 때에만 붓을 휘둘렀던 화가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세기 회화사를 살펴본다면 이전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에는 기랴이 뛰어나고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문 제작을 받아서 유명해진 미술가들이 그 시대의 지도적인 대가들이었다. 조토나 미켈란젤로, 홀바인, 루벤스, 심지어 고야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대개는 미술과들과 애호가들 사이에 서로 공유하는 통념 같은 것이 있었고 따라서 명작에 대한 기준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성공한 화가들ㅡ소위 관전파 화가드르과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은 '이단자'들 사이의 구별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는 기묘한 역설을 보여준다. 오늘날까지도 19세기 '관전파 미술'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전문가가 거의 없다. 물론 시민광장에 서 있는 위인들의 기념비나 시청 벽화, 성당이나 대학의 스테인드글라스 등 이러한 관전파 화가들의 작품과 친숙하기는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너무 진부해서 마치 우리가 구식 호텔에서 보곤 하는 한때 유명했던 전시회 작품들의 복제품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듯이 이들도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19세기의 미술사는 결코 가장 성공하고 가장 돈을 잘 번 거장들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19세기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하겠다.
이 새로운 미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파리에서 일어났다.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 피렌체, 17세기 로마를 거쳐 19세기는 파리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전세계 미술가들이 당대의 지도적인 미술가들에게 배우기 위해, 무엇보다도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미술의 본질에 대한 토론에 함께 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19세기 전반기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오퀴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였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였으며 다비드처럼 고전기의 영웅 미술을 숭배했다. 앵그르는 학생들에게 대사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앵그르의 반대자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1978-1863)였다. 들라크루아는 위대한 혁명가 중 한사람이었으나 거의 일기를 보면 정작 자신은 열광적인 반하아로 간주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대상의 정확한 묘사와 그리스로마 시대 조상의 끝없는 모사를 거부했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따. 앵그르와 그 유파가 장중한 양식에 몰두하여 푸생과 라파엘로를 찬탄하고 있는 동안 들르크루아는 베네치아 파와 루벤스에 주목하였따. 그는 아카데미 화가들에게 요구하는 진부한 주제에 싫증이 나서 1832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아랍세계의 눈부신 색채와 낭만적인 풍속을 연구했다.
당시 아카데미는 고상한 그림은 반드시 고상한 인물을 그려야 하며 노동자나 농민은 네덜란드의 전통적 풍속화에나 적합한 주제라고 믿고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 시기에 일군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에 모여 컨스터블의 지도 아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이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이다. 그는 풍경화에서의 이러한 관점을 확장하여 농부들의 진솔한 생활 모습과 그들이 들에서 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혁명'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 이전까지 농부들은 브뢰헬의 그림에서 보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밀레의 유명한 작품 <이삭 줍는 사람들>은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고 줄거리도 없다. 다만 세 명의 농부들이 추수가 한창인 넓은 들판에서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세 명의 농촌 아낙네들은 아카데미 파의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보다 오히려 더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허술한 듯한 구성은 고요한 균형감을 지탱해주고 있다.
이러한 운동에 명칭을 부여한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bet:1819-77)였다. 그는 1855년 파리의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것을 '사실주의 (Le Reslisme), G. 쿠르베 전'이라고 불렀다.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어떤 면에서 그의 개성과 방식은 카라바조와 유사했다. 즉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안녕하십니까, 푸르베 씨>라는 제목의 작품은 관전파의 요란한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유치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 화가가 자기 자신을 셔츠 차차림의 부랑아처럼 묘사한다는 발상 자체가 소위 '점잖은 화가들'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당시의 널리 인정된 인습에 대한 항의가 되길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랬으며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해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했다. 1854년의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으로 먹고 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원칙을 벗어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 또 누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네."
평범한 효과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세계를 본 그대로 표현하려는 쿠르베의 노력은 다른 많은 미술가들을고무하여 인습을 경멸하고 오직 스스로의 예술적 양심만을 따르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왜 미술이 이처럼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들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스스로를 소위 '장중한 양식'과 라파엘로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미술은 라파엘로로부터, 또 라파엘로를 통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 분명했다. 진실을 희생시키면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낸 것은 라파엘로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따라서 미술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라파엘로 훨씬 이전의 시대ㅡ미술가들은 '하느님께 정직했던' 장인들이었으며 땅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최선을 다해 자연을 모사했던 시대 ㅡ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라파엘로에 이르러 미술이 불순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고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前派, Pre-Raphaelite Brotherhood)'라 불렀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82)는 이탈리아 망명자의 아들로, 이들 중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혔다.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출발점은 밀레나 쿠르베와 비슷했지만 그들의 정직한 노력은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순수해지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너무나 자기모순적이어서 성공하기 힘들었다.
프랑스 미술의 세번째 혁명의 물결(첫번째 들라크루아, 두번재 크르베)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쿠르베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하여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회화의 인습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전통 미술의 주장이 그릇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전통 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델이 포즈를 취하는 장소는 창문이 있어 빛이 들어오는 화실이었으며 둥글고 입체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밝은 부분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점차 변화를 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처음부터 이러한 명암의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그림을 그리도록 교육받았다. 학생들은 처음에 고대 조상을 본딴 석고상을 그리면서 명암의 농도에 따라 조심스럽게 입체감을 나타내었다. 일단 이런 방법이 몸에 밴 후에는 모든 물체에 이것을 적용했다. 또 대중들은 이러한 방법에 익숙해져서 밝은 햇빛 아래서는 어듬에서 밝은 부분으로의 그와 같은 변화과정을 볼 수 없다는 사실까지 망각하게 되었다. 햇빛 아래서는 강렬한 명암 대조가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눈을 믿는다면, 그리고 사물을 반드시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아카데미의 규칙을 탈피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처음에는 과장된 이설로 간주되었던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미술의 발자취를 살펴오면서 우리는 "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해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아왔다. 오히려 르네상스 시기에는 세계가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중요성이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과 해부학의 강조를 통해 감소되기는 커녕 더욱 득세하였다. 그러므로 마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색채 혁명은 그리스 인들이 했던 형태 표현에서의 혁명에 비견할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발견했떤 것은 우리가 옥외에서 자연을 볼 때 각 대상들이 그들 고유한 색깔을 가진 개별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마네와 손을 잡고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는 데 협력한 화가들 중 르아브르 출신의 가난하지만 고집 센 젋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였다. 그는 옥외에서 작업하기에 좋은 스튜디오 용 작은 배를 한 척 가지고 있었끼에 강가의 풍경이 지니는 분위기와 효과들을 탐색하는 작업이 가능했다. 자연 혹은 모티브는 구름이 해를 가리거나 바림이 수면에 파장을 일으킬 때 시시각각 변화한다. 대상의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예전의 대가들처럼 갈색조 바탕 위에 겹겹이 덧칠하는 것은 물론, 색채들을 혼합하고 어울리게 배치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서 물감을 칠해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완전한 마무리, 즉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이었따. 심지어 마네가 그의 초상화나 인물 그림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된 후에도 모네 주변의 화가들은 그들의 비정통적인 회화가 살롱 전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1874년 함께 모여 어느 사진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그 전시회에는 <인상:해돋이?라는 제목이 달린 모네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비평가들중 한 사람은 이 그림의 제목이 특히 우습하도 생각하여 그 전시회에 참가한 그룹 전체를 '인상주의자들(Impressionists)'이라고 조롱 섞인 투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순간의 인상을 회화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고 착각하는 무리들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어서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인상주의 그룹의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원리들을 풍경화에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장면 어디에나 적용시켰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1841-1919)가 1876년에 그린 야외 무도회의 장면을 보면 알수 있다.
1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우리는 왜 그 그림이 그렇게도 당시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분노를 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의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스케치 풍으로 보이는 것이 경솔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예술적인 지혜의 소산이라고 어려움 없이 인식한다. 15세기 화가들이 처음으로 자연을 반영하는 방법을 발견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충돌이 일어났다. 또 자연주의와 원근법의 승리가 형상들을 다소 엄격하고 딱딱하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형태들을 의도적으로 어두운 그늘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수법, 즉 스푸마토(sfumato)라고 불리는 기법을 고안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 오로지 레오나르도라는 천재에 의한 것임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인상주의자들은 레오나르도가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어두운 그늘이 옥외의 밝은 광선 아래에서는 발생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전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의도적으로 윤곽선을 흐릿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눈이 놀라운 도구임을 알고 있었다. 눈에 적절한 암시를 주기만 하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을 거라고 알고 있는 전체 형태들을 짜맞추어 보여준다.
19세기 사람들이 세계를 좀더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도와준 두 조력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인상주의자들의 승리가 그처럼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는 사진술이었다. 회화는 저명 인사의 초상이나 시골 저택의 기록으로 사용되었고 화가는 사물의 순간적인 성질을 극복하고 어떤 대상의 외관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17세기의 한 네덜란드 화가가 멸종 위기 직전의 도도새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도도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의 사진술은 회화가 지닌 바로 이러한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이것은 신도교들의 성상 폐기 만큼이나 미술가들의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화가인 친구를 도와줄 의도가 아니라면 더이상 초상화를 남기기 위해 화가 앞에 마주않지 않았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점차적으로 사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였다. 18세기의 일본 미술가들은 동양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를 포기하고 채색 목판화를 위한 주제로서 하층민의 생활 장면들을 선택했다. 이런 채색 목판화는 최고의 장인이 지닌 기교의 완벽성과 매우 대담한 의도가 결합된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일본이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교역 관계를 강요받았을 시기에 이러한 판화들은 물건을 싸는 포장이나 빈 곳을 메우는 종이로 자주 사용되었고, 차(茶) 상점에서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마네 주변의 화가들은 그 판화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것들을 열심히 수집한 최초의 부류였다. 이 판화들 속에서 그들은 프랑스 화가들이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던 아카데믹한 규칙과 상투적 수법에 의해 훼손당하지 않은 전통을 찾아내었다.
일본인들은 사물의 우연적이고도 파격적인 면을 즐겼다. 일본 판화의 거장인 호쿠사이(1760-1849)는 우물의 발판 뒤로 언뜻 보이는 후지 산의 정경을 재현했고, 우타마로(1753-1806)는 판화 가장자리나 대나무 발로 인해 잘려나간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이 항상 어느 장면의 모든, 또는 관련되는 부분들을 다 보여주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러한 가능성에 깊은 감명을 받은 화가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43-1917)였다. 드가는 모네나 르누아르보다는 다소 나이가 많았다. 그는 마네와 동년배였고 비록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대부분 동감했지만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앵그르를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다. 드가는 가장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나는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가 옥외 장면보다도 발레 장면을 주제로 선택하기 좋아했던 이유다.
조각도 곧 '모더니즘(modernism)'의 찬반에 대한 열렬한 존쟁 속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위대한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은 모네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자였으므로 그와 전통 미술간의 근본적인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커다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런 그의 작품도 비평가들에게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상주의 반항아들의 작품과 함께 취급되기도 했다.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그도 '마무리'된 외관을 혐오했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을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도 했다.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비평가와 미술가들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수공예 기술의 전반적인 쇠퇴에 불만을 느꼈고 한대 그 자체로 의미와 기품을 지녔던 장식물이 기계에 의해 값싸고 천박한 싸구려 복제품으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반감을 갖게 되었다.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사람들은 미술과 수공예의 철저한 개혁과, 싸구려 대량 생산물 대신 양심적이고 가치있는 수공예품이 자리를 되찾길 꿈꾸었다. 비록 그들이 옹호했던 변변찮은 수공예품이 현대에 와서는 엄청난 사치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들의 비평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기계적 대량 생산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야기한 문제들에 대중의 눈을 뜨게 했고 순수하고 단순한 손으로 만든 소박한 것에 대한 기호를 확산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러스킨과 모리스는 중세적 조건에 복귀함으로써 미술이 쇄신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많은 미술가들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각각의 재료가 갖고 있는 가능성과 디자인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의 '신미술'을 갈망했다. 신미술 즉 아르누보(Art Nouveau: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어, 당시 심미주의적이고 장식적인 경향의 미술운동을 가리킨다)의 가치는 1890년대에 올려졌다.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은 마네보다 일곱살 아래였으며 르누아르보다 오히려 두 살 위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가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평판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 떠들썩거리는 비판 소리에 상관없이 그의 예술의 문제들을 탐구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바는 푸생과 같은 과거의 고전적 대가들은 그들 작품에서 놀라운 균형과 완벽성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세잔이 인상파의 방법과 질서의 필요성을 어떻게 결합시킬까 고민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그보다 한참 어린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1859-91)가 이 문제를 마치 수학방정식 풀듯 해결하려 했다. 그의 점묘법(Pointillism)은 모든 윤곽선을 무너트리고 모든 형태를 다양한 색깔의 점으로 분할했으며, 그 결과 그의 그림은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릴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쇠라는 극단적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서 회화 기법을 보완하였다.
1888년 겨울, 쇠라가 파리에서 주목을 끌고 있고 세잔은 은거하며 작업을 하고 있을때 젊고 성실한 한 네덜란드 화가가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온다. 그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다. 그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는데, 밀레의 작품과 거기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큰 감동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상의 상점에서 일하던 그의 동생 테오가 그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가 남프랑스의 아를에 온지 1년만이 채 못된 1888년 12월, 정신이 쇠약해져 발작을 일으켰고 1889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890년 7월 고흐는 스스로 몫숨을 끊었고 그 나이는 라파엘로와 같은 3세였다.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10년이 채 못되며, 더욱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은 정신적인 위기와 절망으로 작품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마지막 3년 동안에 그려진 것들이다.
고흐는 정확한 묘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자신이 그린 사물들에 대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했으며, 그가 입체경적 현실감(stereoscopic reality)이라고 말한 것, 말하자면 자연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만 들어맞으면 사물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변화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같은 시기 세잔이 도달했던 것과 비슷한 지점에 세잔과는 전혀 다른 길을 통해 도달했다.
두 화가는 모두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물론 이유는 각각 달랐다. 세잔은 정물을 그릴때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고 자신의 특수한 실험에 필요할 때에만 이른바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다. 반면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하다면 언제든디 형태를 왜곡시켰다. 두 사람 모두 옛부터 내려오는 미술의 규범을 타파하려고 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제3의 화가가 1888년 남프랑스에 나타났다.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이다. 그와 친하게 지내길 무척 갈망했던 고흐는 영국의 라파엘 전파가 지녔던 화가들간의 우정을 꿈꾸면서 자신보다 다섯살 위인 고갱을 설득하여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다. 인간적으로 고갱은 고흐와 아주 달랐다. 그는 고흐가 지닌 겸손함이나 사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반대로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화가 사이에는 몇 가지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화가로서는 비교적 늦게 출발했고(고갱은 이전에 유능한 주식 중매인이었다), 거의 혼자서 공부했다. 두 화가의 우정은 결국 불행하게 끝을 맺는데 발작적인 저인 착란을 일으킨 고흐가 고갱에게 달려들었고 고갱은 그 길로 파리로 도망쳤다. 2년 후 고갱은 유럽을 완전히 떠나 소박한 삶을 찾아 이른바 '남양 군도'의 하나인 타히티 섬으로 떠난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유럽에서 축적되어 온 모든 재능과 지식이 인간의 가장 귀중한 능력, 즉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빼앗겨버렸다는 확신을 한다.
유럽 미술이 일본 미술로부터 습득한 수법은 특히 광고 미술에 적합하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다. 20세기가 되기 이전에 드가의 재능 있는 추종자였던 앙리 드 풀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은 절제된 회화 수단을 포스터라는 새로운 미술에 활용했다.
아르 누보 양식이 유행하던 시기에 많이 사용된 찬사의 말은 '장식적'이라는 것이었다. 회화와 판화는그것이 무엇을 표사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기 전에 먼저 시각적인 즐거운 화면 구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같이 장식적인 것을 추구하는 유행이 미술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회화나 판화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수만 있다면 소재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따위는 이제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부 미술가들은 점차 이러한 모든 추구 가운데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미술에서 사라졌다고 느꼈고, 그것을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세잔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순간순간의 감각에만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의 굳건하고 지속적인 형태는 소홀히 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미술이 강렬한 정열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즉 강렬한 정열을 통해서만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부에 대해 철저하게 불만을 느꼈다. 그는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원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 세 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해결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를 일으켰고, 반 고흐의 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켰다. 고갱의 해결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즘(Primitivism)을 이끌어냈다.
27.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기
표현주의의 가능성을 반 고흐보다 더 깊이 탐구한 최초의 미술가들 가운데 노르웨이 화가인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1863-1944)가 있다. 그가 1895년 제작한 비명(The scream)이라는 제목을 가진 석판화는 갑작스런 정신적인 동요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서 사람들이 당황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연의 형태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가 아름다움과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주의자들은 인간의 고통, 가난, 폭력, 격정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느꼈기에 미술에서 조화나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직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들은 삭막한 현실을 직시하고 불우하고 추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려고 했다.
표현주의 이론은 실험해볼 필요가 있을 때는 실제로 실험해볼 것을 권장했다. 만약 미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자연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색채와 선을 선택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표현주의의 이론이 옳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주제를 모두 없애고 색조와 형태의 효과에만 의존하면 미술이 더욱 순수해지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당시 뮌헨에 살았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였다. 칸딘스키는 다른 많은 독일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와 과학의 가치를 싫어하고 순수한 정신성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기를 바랬던 신비주의자였다. 그가 지은 다소 혼란스럽지만 열정적인 저서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1912)라는 책에서 순수색의 심리학적 효과, 이를테면 밝은 빨강색이 트럼펫 소리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정신과 정신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여 전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추상 미술(abstract art)'이라고 불리는 것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
칸딘스키의 표현적인 색채 원리보다 더욱 철저하게 유럽 회화의 전통에서 탈피했던 미술운동인 입체주의가 파리에서 일어난다. 입체주의는 대상을 재현하려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았으며 단지 대상을 다른 형태로 바꾸려고 했다. 순간적인 인상을 스냅사진 찍듯이 어지럽고 빛나는 색채로 그린 인상주의 작품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된 19세기 말의 화가들이 질서, 구성 그리고 형태를 추구하려는 절실한 욕구를 가졌음을 살펴본 바 있다. 단순화된 아름다운 형태를 탐구하려는 이러한 활동은 한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즉 아름다운 평면적인 형태와 입체성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미술에서 입체감은 소위 명암이라는 밝고 어두움의 정도에 따라 성취된다. 그러나 입체감을 무시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의 도입으로 제기된 문제, 즉 현실감의 묘사를 명료한 구도와 조화시켜야 하는 필요성과 불가피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제 그 문제는 역전되었다. 장식적 구도에 역점을 둠으로써 그들은 명암으로 모든 형태를 모델링하는 오래된 관례를 희생시킨 것이다. 반 고흐와 고갱의 작품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영향이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섬세한 묘사를 거부하고 강렬한 색채와 대담하고 '야만적'인 조화를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1905년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레 포브(Les Fauves), 즉 '야수' 또는 '야만'을 뜻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였다. 그는 장식적인 단순화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마티스는 오리엔트의 양탄자와 북아프리카 경치에서 색채의 짜임새를 연구했고 현대 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양식을 발전시켰다.
마티스 자신은 한순간도 세련된 멋을 포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밝은 색채와 단순한 윤곽에서는 어딘가 어린아이의 그림에서 보이는 장식적인 효과 같은 것이 있다. 이는 그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곤경은 세잔의 그림이 알려지고 연구되기 시작한 때, 즉 세잔이 1906년 사망한 후 파리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복되었다.
그의 위대한 계시를 누구보다도 감명깊게 받아들인 사람은 바로 스페인 출신의 젊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였다. 그는 데생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열아홉살 되던 해에 파리로 갔는데 그 곳에서 표현주의자들이 즐겨 다루었던 주제인 거지, 부랑아, 서커스의 광대 등을 그렸다. 그러나 여기에 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갱이나 어쩌면 마티스도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 원시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화가들은 자연의 형태를 평면적인 패턴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러나 평면성을 피하면서도 사물을 단순하게 그리고 동시에 입체감과 깊이감을 유지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피카소로 하여금 세잔의 방식으로 돌아가게 한 것도 이러한 문제였다. 한 젊은 화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세잔은 자연을 구, 원추, 원통의 견지에서 보라고 충고하였다. 아마도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자연을 이같은 기본적인 입체의 형태를 염두에 두라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피카소와 친구들은 이 충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구, 원추, 원통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대상의 형상을 구축하는 이러한 방법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입체주의 창시자들은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러한 방법도 어느 정도 익숙한 형태에 한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에 나타난 다양한 조각들을 서로 연관시킬 수 있으려면 바이올린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입체파 화가들이 기타, 병, 과일그릇, 때로는 인물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를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28. 끝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
다음은 현대 미국 회화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비평가인 해롤드 로젠버그가 대서양 건너편의 미술에 대해 논평한 것이다. 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는 1963년 4월 6일자 뉴요커지 기사에서 1913년 뉴역에서 열린 아모리 쇼라는 첫번째 전위 미술 전시회를 보았던 대중의 반응과 그가 전위 관중(Vanguard Audience)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류의 관람객들이 보인 반응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전위 관중은 어떠한 것에도 개방적이다. 그들의 열성적인 대표자인 미술관장, 연구원들, 그리고 미술 교육가와 화상들은 캔버스의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석고가 굳기도 전에 전시회를 구상하고 작품의 설명서를 준비해 놓는다. 협조적인 비평가들은 미래의 미술을 점찍어 선두주자로서의 더 나은 평판을 듣기 위해 마치 운동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것처럼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샅샅이 찾아 다닌다. 미술사가들은 카메라와 노트를 준비하여 어떤 새로운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새로운 것의 전통은 다른 모든 전통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미술의 역사, 그것도 현대 미술의 역사를 쓰려는 사람은 이처럼 그의 활동으로 인해 어떤 의도하지 않았던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만 할 것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은 변화에 대한 관심이다. 물론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서도 미술사에만 그 탓을 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사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우리 사회 내에서 미술가와 미술의 지위를 변화시켜 왔고 미술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시류를 타게 만든 여러 요소들이 빚어낸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요소들을 요약해보고자 한다.
1. 첫째 요인은 진보와 변화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미술은 중요한 '시대의 표현'이다. 미술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면 그리스의 신전, 로마의 극장, 고딕 양식의 성당이나 현대의 마천루들이 각기 다른 정신성을 '표현하고' 각기 다른 사회의 형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 시대의 미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무익할 뿐더러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양식이나 실험이 '동시대적인 것으로 선언되었을 때, 비평가들로서는 이를 이해해야하고 장려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비평할 용기를 잃고 대신 사건들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처지로 떨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철학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비평가들이 당시의 새롭게 일어난 미술 운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태도 변화를 정당화시킨다. 특히 인상파 화가들을 박대했던 것과 관계가 깊다. 이는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전설을 낳게 했으며 대중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미술도 더 이상은 거부하거나 조롱하지 않는 가상한 노력을 기울이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미래의 전위를 대표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아닌 우리가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적어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사로잡히게 된다.
2. 두번째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관계가 깊다. 미술가들은 과학의 힘과 권위에 크게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험을 존중하는 건전한 의욕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난해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존중하는 건전하지 못한 믿음 또한 갖게 되었다. 그러나 미술 비평가들에게는 그런 명확한 실험 방법이 없다. 또한 어떤 것이 새로운 실험으로써 의미가 있는지를 가려낼 시간이 없다고 느끼고 있다. 만약 그것을 일일이 따지고 든다면 그는 그만큼 뒤처질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과거의 비평가들에게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진부한 믿음을 고집한다면 막다른 벽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늘 열린 마음으로 새로이 나타난 방법에 기회를 주어야 한다.
3. 세번째는 미술은 과학이나 기술과 보조를 맞추기를 원하는 동시에 이 괴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미술가들은 기계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피해 자발성과 개성을 강조하는 무언가 신비로운 믿음을 신봉한다. 미술이야말로 아직 개인적인 취향과 변덕스러움이 여전히 허용되며 오히려 그것이 옹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인 것이다.
4. 네번째로 이와 같은 생각들은 일종의 심리학적인 가정에 상당히 물들어 있다. 낭만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아의 표혀이라는 이념이 있으며, 그 후 프로이트의 발견은 심오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프로이트 자신이 적용하려 했던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예술과 정신적 고뇌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술은 '시대의 표현'이라는 점차 커가는 신념과 더불어 이러한 확신은 모든 자아 통제를 내팽개치는 것이 예술가들의 권리이며 의무이기까지 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감정의 분출이 지켜보기에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면 이는 우리 시대 자체가 아름답지 못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 세계의 현실을 직시해서 우리의 어렴움을 진단해내는 데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 즉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완전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라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도피주의'라고 배척받고 있다. 심리학이 불러일으킨 흥미는 미술가나 대중에게 자극을 주어 전에는 혐오스럽고 터부시되었던 인간 심리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도록 했다. 도피주의라는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 그 이전 세대라면 외면했을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5. 이제까지 네 가지 요인은 조각과 회화는 물론 문학이나 음악이 처한 상황에서도 똑같이 영향을 미쳤다. 이제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다섯 가지 요인은 어느 정도 미술에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대개 수단에 덜 의존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책은 반드시 인쇄되고 출판되어야 하고 연극은 공연되어야 하고 작곡된 곡은 연주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단적인 실험을 하기에는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 수 있다. 그러므로 회화야말로 이 모든 예술 형태 중 가장 급진적인 혁신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물감을 부어버리고 싶다면 붓을 쓰는 대신 그렇게 할 수 있고 당신이 네오다다이스트라면 쓰레기 뭉치를 전시회에 출품하여 주최즉에서 그것을 거절하는지 않는지 실험해 볼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건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느낄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미술가도 중간 수단인 매개물이 필요하다. 즉 그의 작품을 전시해주고 선전해주는 화상이 필요한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다.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모든 문제점들은 미술가나 비평가들보다는 화상들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될 것이다. 변화의 척도를 주시하며 시대의 추세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내는 것은 화상의 몫이다. 그가 유망주를 제대로 고르기만 한다면 돈을 버는 것은 물론 그의 고객들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6. 미술 교사들의 경우라면 다를 수도 있다. 현대 교육에서 개혁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아동들의 미술 교육에서였다. 20세기 초에 미술 교사들은 영혼을 파괴하는 엄격한 전통적인 교수 방법을 버린다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어린아이로부터 얻어낼 수 있을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상주의의 승리와 아르 누보의 실험으로 인해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의문이 생겼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수법으로부터 해방 운동을 벌인 선구자들 중에 빈의 프란츠 치제크(Franz Cizek:1865-1946)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예술적인 기준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원했다. 개성의 표현이라는 이상이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 바로 이 교실에서였다.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폭넓은 관용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그들 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오락으로 삼게 되었다.
7. 다음은 회화와 라이벌 관계에 서게 되는 사진의 보급이다. 전 시대의 회화가 전적으로 현실의 모사만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보아왔듯이 자연과의 연계성은 수세기에 걸쳐 미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중요한 문제였으며 비평가들에게는 최소한 피상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사진술은 19세기 초로 그 발명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 같다라는 말이 화가들이나 미술 감상을 도와주는 교사들 사이에서는 경멸의 뜻을 지닌 단어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종종 반감을 갖는 이유는 변덕스럽고 부당할지도 모르겠으나 미술이 이제는 자연의 재현 외에 다른 가능성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8. 여덟번째 요인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지구상의 많은 곳에서 정해진 것 이외의 다른 새로운 가능성의 탐구가 미술가들에게 금지된 곳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전의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해석된 마르크시즘 이론은 20세기 미술의 모든 실험을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의 징후로만 여겼다. 건강한 공산주의 사회의 미술은 쾌활한 트랙터 운전수를 그린다든가, 건장한 광부를 그려서 일하는 기쁨을 찬양해야 했다. 위로부터 미술 제작을 규제하는 이러한 획책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축복임을 알게 해준다. 불행히도 이러한 획책은 또한 미술을 정치 무대로 끌어냈고 냉전 무기의 하나로 이용했다.
9. 실제로 독재 국가의 단조로운 획일성과 자유 사회의 밝은 다양함 사이의 대조로부터 이끌어낸 교훈이 있다. 공감과 이해심을 갖고 오늘날을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새로움에 대한 대중의 강한 관심이나 유행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우리 생활에 흥미를 더해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대중의 그러한 열렬한 관심은 미술과 디자인에 새로운 착상과 대담한 활력을 자극했으며 이러한 것들 떄문에 구세대는 신세대를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
서구 세계는 서로를 능가하려는 미술가들의 야망에 크게 힘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야망이 없었다면 미술의 역사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어느 때보다도 미술이 과학이나 기술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때이다. 사실상 미술의 역사는 미술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풀어온 자취를 밟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미술에 있어서 진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왜냐하면 어떤 부분에서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 잃는 것이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든 현재든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관용을 얻는다면 그 결과 기준을 잃게 될 것이고 새로운 흥미만을 쫒다 보면 옛미술 애호가들이 정평 있는 그림에 집착해서 그 그림의 비미을 캐내려들던 그러한 인내심은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과거에 대한 존경심은 현재 살아 있는 작가들에 대해 소홀하게끔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자신의 은신처에서 유행과 담을 쌓고 대중에 영합하지 않으며 고독한 작업을 하고 있는 진정한 천재를 우리가 소홀하게 놓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더군다나 현재에만 몰두할 때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쉽게 멀어져서 그것을 단순히 새로운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벗겨내야 할 껍질 정도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박물관이나 미술사 서적들이 이런 위험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그곳에는 토템 기둥, 그리스의 조각품, 성당의 창문, 렘브란트의 작품들과 잭슨 폴록의 작품들이 모두 무리지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작품들이 서로 다른 연대를 지녔지만 모두 다름없이 미술이라는 인상을 너무 쉽게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의 역사는 우리가 왜 그렇지 않은지를 깨닫고, 왜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다른 상황과 제도와 유행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응을 했는가를 이해하려 할 때 비로소 뜻이 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 다른 추세의 변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1975년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라는 젊은 건축가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그는 현대 건축과 동일시되어 왔고 또 비평한 기능주의 원리에 식상한 사람이었다. 모더니즘 운동의 청교도들은 그것을 대중들에게 멀리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이러한 장식이 이제 구세대의 나이든 비평가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좋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충격이라는 것을 독창성의 한 징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about Humanit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by 아르놀트 하우저 (0) | 2016.12.04 |
---|---|
에밀 by 장 자크 루소 (0) | 2016.11.12 |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by 프리초프 카프라 (4) | 2016.10.14 |
종수곽탁타전 (0) | 2016.10.12 |
데카르트 연구 by 최명관 (0) | 2016.10.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