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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by 프리초프 카프라

by hoyony 2016. 10. 14.

The Tao of Physics




범양사
2006
Fritjof Capra

서 문
이 책은 현대 물리학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관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며, 그 새로운 세계관이 동양의 고대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비교하는 데 주력한 것이었다.
즉 20세기에 들어와서 물리학이 다루게 된 극대세계와 극미세계의 현상은 인간 경험의 좁은 영역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기계론적 자연관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그 기계론적 자연관은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지 않을 수 없음을 그는 역설한다. 기계에서는 정태적으로 분리된 각 부분의 작동이 전체의 기능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유기체에서는 역동적인 부분들이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부분은 전체의 필요에 따라 역할하는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다.
서구 문명을 과거 300여 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주로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일(一)에서 다(多)를 보는 것이지만, 동양의 철인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다(多)에서 일(一)을 보려 했던 것이며, 시간의 축에서 생멸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로(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소립자의 세계와 코스몰로지의 세계를 다루게 된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과학 운동의 거장들은 동양 고대의 사상의 자연관을 지적인 면에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동양의 가치관에 동조한다. 서구의 과학은 객관을 관찰하기 위하여 관찰의 과정에서 모든 주관적인 것을 배제했던 것이며, 그 결과로 가치 중립의 과학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의 학문은 그 궁극적인 목적을 선의 실천에 두고 주관적인 마음을 항시 수련함으로써 도덕성을 함양하여 인격의 완성을 기하는 것을 학문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카프라 박사는 오늘의 산업 문명이 중병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객관적 지식의 대가로, 가치 문제를 소홀히 한 가치 중립의 과학에도 책임이 있다 하여 오늘의 서구 학계에 맹성(猛省)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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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물리학이라 함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뉴턴 이래 물리학의 위대한 발전과 그 물리학의 방법에 의하여 각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과학은 18, 19세기의 서양인들에게 물리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이 자신감은 19세기의 라플라스의 호언으로 대변되었다 할 수 있다. 라플라스는 인간이 우주의 현재의 모든 상태와 그 운동을 다 알게 되는 날에는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고전 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전지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오만의 극에 달했던 고전 물리학은 태양에 도전했다가 추락한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처럼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난 것이며, 자연은 그 신비의 자태를 되찾게 되었다. 고전 물리학을 키워 온 기본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 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고전 물리학에서 생각했던 단순한 질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고전 물리학의 기본 태도는 순수한 객관주의였다. 관찰의 대상체는 주관과는 관계없이 '거기 존재해'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객관적 존재의 불변적 특성인 수량적 제 속성의 파악에 물리학은 전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며, 따라서 관찰의 과정에서 가변적이요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주관은 배제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주관적인 감각에 속하는 색이나 음의 본질은 객관적인 파장이나 진동의 수로 대체되고 감각작용은 사진기, 진동막, 한란계 등등으로 대체된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 등의 동양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그 사변적인 방법으로 일에서 다를 보려 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데 반해서 동양사상은 그 직관적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하고 일체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즉 4차원적 시공의 차원에서 보려 한다.
19세기 말경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자장 현상의 이론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게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은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순수객관주의의 물리학에 처음으로 관찰자의 입장, 즉 주관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은 더 깊고 더 넓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양자 물리학은 여기서 한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찰자의 설문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주고, 어떠한 대답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은 그 관찰의 대상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그 존재의 기술로써 양자 물리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관찰의 경험을 정리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그 설문의 방식을 통하여 관찰 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되므로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객관적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극미 세계의 원자의 구조가 극대 세계의 태양계의 구조와 거의 같듯이 이 우주의 제 현상 간에는 엄청난 유사성이 있는 것이며, 고도로 민감하고 언제나 통찰하는 예술 정신은 삼라만상간의 상징을 보고 그 만뢰속에 공명의 화음을 들으며 육합에 차 있는 친화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광대한 우주의 공간 속에 티끌처럼 떠도는 지구의 표면에서 영겁의 일순을 살다 가는 우리의 존재는 무엇이냐는 원초적 질문은 우리의 생의 기반에 담겨 있는 비정의 수수께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설문 속에 담겨 있는 공간, 시간, 존재 등의 개념들이 현대 물리학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새롭게 다루어져야 하고, 또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의 한계성이 이미 드러난 것이라면 이 설문의 내용과 방식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는 종교나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은 예술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서양 예술과 동양 예술의 주류가 양극적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 예술의 주류가 동적인 것인 반면, 동양 예술의 주류는 정적인 것이다. 서양의 인물화가 정서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산수화는 그것을 침잠시키는 것이며, 교향악이나 오폐라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아악을 위시한 우리의 전통 음악의 주류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율동을 본질로 하는 무용에 있어서도 우리의 것은 발레나 스페인 춤에서와 같이 동의 미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델리커시와 동중정의 미를 추구한다. 시에 있어서도 동양의 전통은 감상적이거나 극적인 것이 아니라 관조적인 것이 주류를 이룬다. 고유한 무념의 경지에서 생명의 힘을 표현하는 동양의 고차적 예술인 서도와 같은 것은 서양에는 없다. 동서양의 양극적 기질의 대조는 예술이나 문화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생활의 실천면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일음일양의 상보적 관계에서 파악하고 그 조화의 도를 따르는 것은 현대사회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1부> 물리학의 길
1. 현대 물리학 ㅡ 마음을 담은 길?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학파의 현인들은 이러한 구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피지스(physis, 자연)'라 불렀던 사물의 본질, 즉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물리학(physics)'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동양사상과의 유사성이란 면에서 본다면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서 뚜렷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지한 존재란 거짓된 바탕 위에 놓여진 것이며, 그의 보편적 원리는 만물의 부단한 활동과 변화를 상징하는 불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 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쌍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다. 이 대립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 불렀다.
이 통일체의 분영은 엘레아(Elea) 학파로부터 시작된다. 이 학파는 제신과 인간의 위에 신성한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이 원리는 처음에는 우주의 통일체와 동일시되었으나 후에 와서는 이 세계의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는 지적이요, 인간적인 신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끝내는 정신과 물질의 분열, 즉 서양철학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 간 사조가 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세차게 맞선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방향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그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불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서양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심히 대립적인 관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존재라는 이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한 생성 이념을 융화시키기 위해 불변의 실체를 갖는 어떠한 것 속에 '존재'가 현시된다고 보고 이것의 결합과 분리가 이 세계 내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에서 명료하게 표현된 원자ㅡ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의 개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정신과 물질을 명확히 구분했으며, 물질은 몇 개의 기본적 구성체로 만들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것들은 빈 공간 속에 떠돌고 있는 완전히 피동적이며, 본질적으로 죽은 입자인 것이다. 그 운동의 원인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물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적인 근원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의 힘가ㅗ 자주 연관되어 언급되곤 했다. 이러한 사고는 그 이후 서양사상의 기본 요소가 되는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을 이루게 된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라는 아이디어에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의 영혼과 윤리의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원전 4,5세기 그리스 과학과 문화의 전성 시기 이래 2000년 이상이나 서양사상을 사로잡는다.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는데, 그는 그 이래 2000년 동안이나 서구 우주관의 기초과 된 한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중세를 일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이다.
서양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발전한다. 15세기 이후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사변적인 아이디어를 실증하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진다.이러한 발전은 수학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과 병진했기 때문에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고, 실험에 바탕을 둔 적정한 과학적 이론을 마침내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갈릴레오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정신, 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활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해서 그의 기계론(적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 모형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사상을 지배했다.
이리하여 자연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불변한 신의 법으로서 보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고전 물리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몫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일반적 사고방식에 끼친 영향도 지대한 바가 있다. Gogito ergo sum 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그의 활동이나 재능, 감정, 신앙 등에 따라서 수없이 쪼개진 많은 분야로 더욱 분열되어 갔고, 이것은 한없는 갈등을 일으켜 형이상학적 혼란과 좌절을 끝없이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자연과 인류 동포로부터 소외시켰다. 그것은 자연 자원을 대단히 부당하게 분배시켜 경제적 무질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적인 분활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따.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과 기술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
2. 아는 것과 보는 것
이론적 지식은 추정하고 정량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 과학을 그 영역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방법들로써 획득한 어떠한 지식도 그 한계가 현대 과학에서 점점 두드러지고 있느며, 특히 우리를 가르쳐 온 현대 물리학에서는 더욱 분명하다.
이 개념적 지식의 한계나 상대성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일은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실재에 대한 표상이 실재 그 자체보다 훨씬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 개념들과 상징들을 실재 그 자체로 곧잘 혼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혹을 떨쳐 버리게 하는 일이 바로 동양 신비 사상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도가의 현자 장주는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우리 언어의 부정확성과 모호성은 잠재 의식층과 그 연상 작용에 따라 시작(詩作)을 하는 시인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반면에 과학은 명료한 정의와 모호하지 않은 연결을 목적으로 하며, 따라서 언어의 의미를 한정하고 논리의 규율에 따라서 그 구조를 표준화함으로써 언어를 더욱 추상화시키는 것이다. 언어가 기호로 대체되고 그 기호의 연결 작용이 엄격히 제약되는 수학에서 이 추상은 극대화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학자들은 정보를 하나의 등식으로, 통상 언어로써는 몇 페이지나 필요할 것을 단 한줄의 기호 속에 압축해 넣는 것이다.
수학이 극단적으로 추상되고 압축된 언어라는 견해가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상 많은 수학자들은 수학을, 단지 자연을 기술하는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내제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 신조의 창시자는 "만물은 수(數)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매우 독특한 수학적 신비론을 발전시킨 피타고라스였다. 이리하여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종교의 영역에 논리적 추리를 도입시켰는데, 이것은 버틀란드 러셀에 의하면 서구의 종교 철학에 결정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신학과 수학의 결합은 그리스와 중세와 칸트에 이르기까지 근세의 종교 철학을 특징지원 주고 있다. 플라톤, 성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제 철학자 속에는 종교와 이성의 밀접한 융합 및 영원한 것에 대한 논리적 찬탄과 도덕적 소망이 한데 녹아든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속성은 피타고라스로부터 유래해서 유럽의 지적인 신학을 아시아의 보다 솔직한 신비주의와 구별짓게 하고 있는 것이다"(B. Russell,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과학적 추상방법은 아주 효율적이고 강력하지만 우리는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 우리의 개념 체계를 더 정확히 정의하고, 그것을 더욱 능률화시키며, 그 연결을 더욱 엄밀하게 한다면 그것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코지프스키의 지도와 영토의 비유를 다시 한번 쓴다면 일상 언어는 그 본래의 부정확성 때문에 영토의 구부러진 모양을 어느 정도 따를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진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그것을 더욱 엄격하게 한다면 그 융통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며, 수학 언어는 실제와의 연결이 희박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 그 기호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의 관계가 불분명하게 된다. 약간 모호하고 부정확하지만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다시 사용하여 언어적 해석을 기함으로써 수학적 모형과 이론들을 보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것은 실재의 철학적 모형과 다를 바 없으며, 그래서 양자는 잘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적 신비론들은 경험에 그 지식의 기반을 두고 잇고 이것은 과학적 지식이 실험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과 유사하다. 이 유사성은 신비적 체험의 본성에 이해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동양적 전통에서는 지성의 영역 밖에 있고, 생각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직접적 통찰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즉 스스로의 안에서 바라보는 것에 의해서, 관조에 의해서.
도교에 있어서 관조의 뜻은 본래 '본다'는 것을 뜻하는 '관(觀)'이란 도가의 사원 이름 속에 구체화되어 있다. 도인들은 그들의 사원을 관조의 장소로 여겼다. 중국의 선종에서는 개오(開悟)를 자주 '도통'이라고 불렀으며 불교의 모든 종파에서는 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의 기초로 여겼다. 자아 실현을 위한 불교적 처방전인 팔정도의 첫 항목은 정견(正見)이고 그 다음 정식(正識)이 뒤따른다.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양쪽 다 그 관찰은 해석되고 이 해석은 자주 언어에 의해 소통된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물리학에 있어서의 실험의 해석을 모형이나 이론이라고 부르며, 모든 모형이나 이론들이 근사치란 것을 깨닫는 것이 현대 과학 연구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이런 경구를 말했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분석방법과 논리적인 추론이 자연 현상의 전 영역을 당장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현상의 특정한 일군(一群)을 뽑아 내어 그 일군을 설명할 수 있는 모형을 세우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다른 현상들을 무시하게 되고, 따라서 그 모형은 실제 상황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하지 못한다.
고려대상에서 제외되는 현상들은 그것들을 산입해 봐야 이론을 크게 변개시킬 수 없는 미미한 효과를 가진 것이거나, 또는 어떤 이론이 수립될 대 그것들이 미처 감지되지 못해 빠져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공기의 저항이나 마찰의 효과는 보통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뉴턴의 기계론 모형 속에 계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탈락과는 별도로 뉴톤의 기계론은 뉴턴의 이론에는 빠져 있던 전자 및 자장 현상이 발견될 때까지는 자연 현상에 대한 최종적 이론으로서 오랫동안 간주되어 왔다. 이들 새로운 현상들이 발견됨으로써 뉴턴의 모델은 다만 현상의 특정한 일군, 특히 고체의 운동에만 적용될 수 있는 불완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뉴턴적인 모형은 원자의 구성 단위가 많은 물질과 광속에 비견해서 작은 속도에만 타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첫번째의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고전적 기계론은 양자론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고 두 번째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상대성 이론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뉴턴의 이론이 꼭 '틀리다'거나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맞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모든 모형들은 현상의 어떤 범위에만 타당한 근사치일 따름이다. 이 범위를 넘어서면 그것들은 자연에 대해 만족할 만한 기술을 더 이상 줄 수 없게 되며, 다라서 옛것에 대신할 새로운 모형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과학적 모형과 이론들은 근사치밖에 안 되고 그것의 언어적인 해석도 우리의 언어가 지닌 애매모호성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생각은 금세기 초 새롭고 전혀 예기치 않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널리 받아들여졌다.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원자와 아원자적인 실체를 기술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 점을 신비가들은 언제나 인지해 왔지만 과학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문제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천변만화하는 자연 현상의 배후에 잇는 자연의 기본 법칙을 탐구해왔다. 이러한 현상들은 과학자들의 거시적 환경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들 언어의 지적 개념과 이미지는 바로 이런 경험에서부터 추상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데 충분하고도 적절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적 속성에 관한 질문은 고전 물리학에 있어서는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 모형에 의해 해답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모든 현상을 더 이상 깨어질 수 없는 단단한 원자들의 운동과 상호작용으로 귀납시킨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식의 모형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이러한 원자의 속성은 당구공과 같은 거시적 개념, 따라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다. 이런 개념이 실제로 원자의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았다. 그것은 실로 경험적 차원에서 조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자 물질의 궁극적 본질에 관한 질문을 실험으로써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구성체를 찾아서 물질의 껍질을 하나씩 차례로 벗겨버렸따. 이리하여 원자의 존재를 실증하고 잇달아 그것을 구성하는 핵과 전자를 발견했으며, 마침내 핵의 구성물인 양자와 중성자 및 기타 수많은 아원자 입자들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현대 실험 물리학의 정교하고도 복잡한 기구는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는 환경으로부터 까마득한 자연의 영역인 미시적 세계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서 그것을 우리들의 감각에 와 닿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컨대 가이거 계수관(방사능 측정기)의 똑똑 소리나, 사진판상의 흑점과 같은 결과를 내는 일련의 연속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은 결코 탐구된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러한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원자와 아원자 세계 자체는 우리들의 지각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의 세계에서 그 이미지를 취하는 우리의 통상적 언어는 이렇게 관찰된 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무한히 작은 세계로의 여행에서 철학적 견지에 서 보아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그 첫걸음, 즉 원자 세계로 들어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과학이 논리와 상식에 그의 절대적 확실성을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도 이제 비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신비가들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 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
4. 새로운 물리학
고전물리학
모든 물리적 현상이 일어났던, 뉴턴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 공간이었다. 뉴턴 자신의 말에 의하면 절대 공간은 그 자체의 본성에 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며 정지의 상태를 계속한다.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변화는 시간이라는 별개의 차원에 의해 묘사되는데, 그것 또한 물질적 세계와 아무런 관계 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절대적인 것이었따. "절대적이고 진정한 수학적 시간을 저절로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한결같이 흘러간다"고 뉴턴은 말했다.
이 절대적 공간, 절대적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뉴턴적 세계의 요소들은 물질적 입자들이었다. 수학적 등식에서 그것들은 '질점'들로서 취급되었고, 뉴턴은 그것들을 모든 물질을 만드는 작고 견고하며, 파괴할 수 없는 대상물이라고 간주했다.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매우 단순하며, 오직 입자들의 질량과 상호 거리에만 의존한다. 그것은 중력인데, 그것은 그 작용을 받는 물체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거리에 상관없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생소한 가정이기는 하였으나 그 이상 연구되지 않았다. 입자들과 그것들 사이의 힘들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그 이상의 분석을 받지 않았다. 뉴턴은 그의 광학(光學)에서 신이 물질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였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태초에 신이 일엏게 물질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견고하고, 질량을 지니고, 딱딱하고, 꿰똟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입자로써 물체를 빚어 내시고 당신의 창조 목적에 가장 잘 이바지할 수 있도록 거기에 그러한 크기와 모양과 그러한 속성과, 그리고 공간에 대한 그러한 비율을 내리셨으리라. 저들 견고한 원초적인 입자들은 고체이므로 그것은 포개어 이룬 구멍이 있는 어떤 것보다 비할 바 없이 더 단단해서 그것들은 결코 닳지도 부서져 조각나지도 않는다. 신이 몸소 빚어 내신 이 최초의 창조물을 세속의 힘으로는 절대 나눌 수 없으리라.'
뉴턴의 견해로는, 태초에 신이 물질적 입자들과 그것들 사이의 힘들을, 그리고 운동의 근본적 접칙들을 창조했다. 이렇게 해서 전우주는 운동하게 되었으며, 그 후 항상 불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기계처럼 우주는 계속 운동하여 왔다. 이와같이 자연의 기계론적 견해는 엄격한 결정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거대한 우주 기계는 완전히 인과적인 것, 결적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라플라스의 유명한 말에서 가장 분명한 표현을 발견한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자연에서 작용하고 있는 모든 힘을,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 지성은, 만일 이 지성이 이러한 자료를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아주 풍부하면 가장 거대한 것들과 가장 미세한 원자들의 운동을 똑같은 공식으로 파악할 것이다. 즉 그것에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미래도 과거와 같이 그 눈앞에 보일 것이다.'
이 엄격한 결정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근본적인 구별에 그 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결과로 세계는 객관적으로, 즉 인간이라는 관찰자에 관해 전혀 언급함이 없이 기술될 수 있다고 믿어졌고, 자연에 대한 그러한 객관적인 기술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18, 19세기는 뉴턴 역학의 어마어마한 성공을 보았다. 뉴턴은 그의 이론을 유성들의 운동에 적용시켜서 태양계의 근본 특색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성 모델은 아주 단순화시킨 것이어서, 예를 들면 유성들 상호간의 중력의 영향을 무시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규칙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러한 불규칙한 것을 바로잡으려고 우주 안에 항상 존재하는 신을 가정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위대한 수학자 라플라스는 뉴턴의 계산을 정련하고 완전하게 하는 야심적 과제에 착수하였는데, 그 결과는 중력에 관련되는 조수의 흐름과 기타의 현상들, 뿐만 아니라 유성들과 위성들, 그리고 혜성들의 운동을 아주 세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설명하는데 성공했던 <천체 역학>이라는 5권으로 된 방대한 저술을 낳았다. 그는 뉴턴의 운동 법칙이 태양계의 안정성을 확실히 하고 우주를 완전한 자율적인 기계로 취급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천문학에서의 뉴턴 역학의 눈부신 성공에 고무되어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유동체의 연속 운동과 탄성체의 진동에까지 확장시켰다. 마침내 열이란 분자들의 복합적인 진동 운동에 의해 생겨나는 에너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열 이론까지도 역학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물의 온도가 상승될 때 물 분자의 운동도 증가되어 마침내 그 분자들이 속박하고 있는 힘을 넘어서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져 날아가버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물은 수증기로 변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물이 냉각되면서 열 운동이 가라앉으면 결국 분자들은 얼음이라는 새로운 더욱 딱딱한 모형으로 고착되어 버린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많은 다른 열 현상이 순수한 역학적인 관점에서 아주 잘 이해될 수 있다.
이 기계적인 모델의 엄청난 성공은 19세기 초의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우주가 진실로 뉴턴의 운동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거대한 역학적 체계라고 믿게 되었는데 그 뒤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델의 한계가 나타나게 되고 그 모델의 어느 특성도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새로운 물리적 실재가 발견되었다. 이 발전 가운데 첫 번째 것이 전기 및 자기적 현상의 발견과 탐구였는데, 이것은 역학적 모델로는 적절히 기술될 수가 없는 것이었고, 새로운 타입의 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중요한 진전은 패러데이(Faraday, Michael)와 맥스웰(Maxwell, clerk)에 의해 수행되었다. 패러데이가 구리 코일 가까이 자석을 움직임으로써 전류가 흐르게 하고, 그리하여 자석을 움직이는 기계적 일을 전기 에너지로 전환시켰을 때 그는 과학과 기술에 하나의 전기를 이루었던 것이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의 혀과를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힘의 개념을 역장으로 대체시켰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뉴턴 물리학을 최초로 넘어서게 되었다.
앵성과 음성 전하 사이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단순하게 두 전하가 뉴턴 역학에서의 두 질량처럼 서로 끌어당긴다고 말하는 대신에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각 전하는 다른 전하가 나타나면 어떤 힘을 느끼도록 그 주위에 공간에 '산란(散亂)' 혹은 어떤 '조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어떤 힘을 일으키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에서의 이와 같은 조건을 장(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일 전하에 의하여 생겨나며 다른 전하가 들어와서 그 효과를 느끼게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물리적 실재에 관한 개념의 가장 심오한 변화였다. 뉴턴의 견지에서는 힘이 그 작용하는 물체와 단단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제 그러한 힘의 개념이 그 자체의 실재를 갖고 물질적인 것들과 아무런 관계 없이도 연구될 수 있는 훨씬 미묘한 장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빛이 파동의 형태로 공간을 통화하는 급속히 교체하는 전자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 전기역학이라고 불리는 이론의 정점을 이룬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물리학자들은 상이한 현상들에 적용하는 두 개의 성공적인 이론을 갖게 되었으니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기 역학이 그것이었다. 이리하여 뉴턴적 모델은 더 이상 모든 물리학의 기초가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
현대 물리학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기본적인 고체 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히 부서졌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 어느 것도 물리학이 현재 뚫고 들어가고 있는 새로은 영역에로 확장될 수 없었다.
1905년에 간행된 두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두 혁명적인 추세를 창도했다. 그 하나는 특수 상대성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적 복사에 대한 새로운 고찰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그 후 원자 현상에 대한 이론인 양자론의 특성이 되었다. 완전한 양자론은 25년 후 물리학자들의 전체 팀에 의해 이룩된 반면, 상대성 이론은 거의 전적으로 아인슈타인 자신에 의해 완전한 형태로 수립되었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관찰자들이 관찰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들은 사건들을 시간상으로 다르게 볼 것이다. 그러한 경우, 어느 관찰자에게는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다른 관찰자들에게는 다른 시간차를 가지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그 절대적 의미를 상실한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는 데 이용하는 전체계의 수정을 초래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도 그 질량 속에는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유명한 등식 E=mc2에 의해 주어진다.
빛의 속도인 불변수 c는 상대성이론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광속에 가까운 속도를 가진 물리적 현상을 기술할 때에는 언제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전자기적 현상에 적용되며, 빛은 전자기 현상의 한 예에 불과한 것이다. 1915년에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중력, 즉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들의 상호 인력을 포함하는 데까지 확대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창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2차원적인 평면 기하학이 구의 표면에 적용될 수 없는이 평범한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러한 휘어진 공간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상대성 이론은 3차원 공간이 실제로 휘어져 있고, 그 만곡(彎曲)이 질량을 가진 물체의 중력장에 의해 야기됨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항성이나 유성 같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주위의 공간이 휘어져 있으며 그 곡률은 물체의 질량에 좌우된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이 시간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듯이 시간 역시 물체의 존재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우주의 여러 영역에서 각각 다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절대적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관전히 폐기시킨다.
고전 물리학의 역학적 세계관은 '빈 공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견고한 물체'의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빈 공간'은 전우주에 관한 과확인 천체 물리학이나 우주론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였으며, 견고한 물체라는 개념은 무한히 작은 것의 과학인 원자 물리학에 의해 분쇄되었다.
양자론의 개념은 수학적 공식이 완성된 후에도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리더퍼드의 실험은 원자들이 견고하고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극도로 미세한 입자들이 운동하고 있는, 공간의 광막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 주었으며, 양자론은 이제 이러한 입자들조차 고전 물리학적인 견고한 물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물질의 아원자적 단위는 양면성을 띠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때때로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중성은 또한 전자기파 혹은 입자의 형태를 취하는 빛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물질과 빛의 이러한 성질은 매우 기묘한 것이다. 어떠한 것이 입자, 즉 매우 작은 영역 속에 국한된 실체며 동시에 파동ㅡ공간의 넓은 영역에로 뻗어 나가는 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하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모순은 종국에 가서는 양자론으로 공식화된 것이긴 하지만 많은 역설들을 유발케 한 원인이었다.
이 모든 발전은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열복사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에너제 다발들'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을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에너지다발을 '양자'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자연의 근본적인 한 양상으로서 인정하였다.
그는 빛가 기타 전자기적 복사의 다른 모든 형태는 단지 전자기파로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양자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였다. 광양자는 양자론이란 명칭의 유래가 되는 것이지만 그 후 진정한 입자로 받아들여졌고, 지금은 광자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빛의 속도로 진행하는 특별한 종류의 입자인 것이다.
입자상과 파동상 사이에 존재하는 외견상의 모순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 즉 물질의 실재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편이다. 양자 이론의 형식론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확률로써 표현되며 파동의 형태를 취하는 수학적인 양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파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특정 지점과 특정한 시간에 입자를 찾아내는 확률과 관계 있는 파동의 모든 특유한 속성을 가진 수학적 양인 '확률파'다.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양자론은 이렇게 견고한 물체와 엄격한 결정론적인 자연 법칙이라는 고전적인 개념들을 말소시켰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물체는 파동과 같은 확률 모형들로 분해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 연관의 확률을 나타낸다. 아원자적 입자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의 준비와 그 다음의 측정 사이에 있는 상호 연관으로서만 단지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그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인 기술이라는 고전적 이상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테카르트적 구분은 원자적 물질을 다룰 때에는 성립할 수가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양자론은 원자들의 놀랄 만한 성질들이 그 전자들의 파동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무엇보다 물질의 견고한 성질은 파동, 입자의 이중성과 관련돼 있는 전형적인 양자효과의 결과며, 이것은 거시적인 데서는 유사물을 찾을 수 없는 아원자적 세계의 특징이다. 하나의 입자가 공간의 한 작은 영역에 같히게 되면 언제나 그 주위 안쪽을 빙글빙글 돌아 이 제한에 반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 제한의 범위가 작을수록 그 입자는 그 안에서 더욱 빨리 맴돌게 된다. 원자속에는 대항하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한편에서는 가능하면 가까이 묶어 두려는 전기력에 의해 전자들이 핵에 매여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주위를 맴돎으로써 그 제한에 반작용을 하는 것인데 그것들이 핵에 단단히 묶이면 묶일수록 그 속도는 더 높아진다. 사실상 원자 속으ㅔ서는 전자의 속박은 매초 약 600마일의 엄청난 전자의 속도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높은 속도는 마치 빨리 회전하는 프로펠러가 원판처럼 나타나듯이 원자를 고정된 구처럼 나타나게 한다. 원자를 더 압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이렇게 해서 그것은 물질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견고성을 부여한다.
극도로 다양한 원자 현상의 세계에서 원자핵들은 극도로 작고 안정된 중심으로서 전자력의 원천을 형성하여, 분자 구조에 있어서 많은 다양한 골격들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조들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현상의 대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화와 질량보다도 핵에 관해서 더욱 알아보아야 한다. 즉 물질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물질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 질량의 모두를 함유하고 있는 원자핵을 연구해야 한다.
1930년대에 원자핵의 구조, 즉 그 구성요소 그리고 그것들을 매우 단단하게 속박하고 있는 힘들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주요 과제였다. 원자핵의 중요한 구성요소는 중성자인데, 이것은 양성자와 거의 동일한 질량 ㅡ전자 질량의 약 2000배ㅡ을 가지고 있지만 전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중성자들은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전자기적인 원천이 될 수가 없었다. 물리학자들은 곧 그들이 지금 핵 이외의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자연의 새로운 힘에 처음으로 마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자핵은 전체 원자에 비해 10만분의 1의 크기로서 매우 작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의 질량의 거의 모두를 함유하고 있다. 실로 만일 인간의 신체가 핵의 농도로 압축된다면 그것은 핀의 대가리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핵자(核子)들 ㅡ양성자와 중성자라고 종종 불린다ㅡ은 전자들처럼 동일한 양자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제한에 높은 속도를 가지고 반응한다. 핵 물질은 아마도 기껏해야, 가장 맹렬하게 끓으며 거품을 일으키고 있는 지극히 농도 짙은 액체의 미세한 방울들로 묘사할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은 입자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본질적으로 바꾸게 함으로써 우리의 물질상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전 물리학에 있어서의 물체의 질량은 모든 것들이 그것의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던 불가분의 물질적 실체와 연관되어 있었다. 상대성 이론은 질량은 어떤 실체 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 없는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에너지는 활동 또는 작용과 관련된 동적인 양이다.
입자의 질량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은 입자가 이제는 정지된 물체로서 이해될 수 없고, 역동적 모형으로 여겨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입자의 질량으로 나타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입자들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견해는 디랙(Dirac)이 전자들의 동태를 기술하는 상대론적 방정식을 정립시켰을 때 그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디랙의 이론은 원자 구조의 세세한 내용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성공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근본적인 대칭성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전자와 질량에서는 동일하나 상반되는 전하를 가진 반전자의 존재를 예언해 주었다. 지금은 양전자로 불리는 양성 전하의 이 입자는 디렉이 그것을 예언한 2년 후에 실제로 발견되었다.
상대론적 입자 물리학 이전에는, 물질의 구성 요소들은 언제나 불가분의 기본적 단위이거나 그 구성하는 부분들로 분해될 수 있는 복합적인 물체로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근본적인 의문은 물질이 계속하여 거듭 분해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결국엔 어떤 최소의 불가분적 단위에 도달되는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 디랙의 발견 이후 물질의 분할에 관한 모든 질문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두 개의 입자들이 높은 에너지로 충돌하면 일반적으로 쪼개지는데, 이 조각들은 원래의 소립자들보다 더 작지는 않다. 그것들은 역시 동일한 종류의 입자들로서 충돌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운동 에너지로부터 생겨난다. 그리하여 물질을 분할하는 모든 문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해결되었다. 아원자적 소립자들을 더 이상 분할하는 유일한 방법은 높은 에너지를 포함한 충돌 과정에서 그것들을 함께 부딪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물질을 거듭해서 분해할 수는 있지만 더 작은 조각들을 얻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그 과정에서 수반된 에너지로부터 입자들을 생성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원자적 입자들은 파괴할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충돌 과정에서 충돌하는 두 개의 입자의 에너지는 새로운 모형을 형성하는 데 재분배되며, 만일 충분한 양의 운동에너지가 가해진다면 이 새로운 모형은 입자들을 더 추가해서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아원자적 입자들의 고에너지 충돌은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입자들의 속성을 연구하는 데 이용되는 주된 방법이다. 그러므로 입자 물리학은 또한 고에너지 물리학이라고 불린다. 충돌 실험에 필요한 운동 에너지는 그 양성자들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된 다음, 다른 양성자들이나 중성자들과 충돌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원주가 몇 마일이나 되는 커다란 원형 기계인 거대한 입자 가속기에 의해 얻어진다.
이러한 충돌에서 생겨나는 대부분의 입자들은 100만분의 1초보다도 훨씬 더 작은 극도로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며, 그 뒤에는 다시 양성자들, 중성자들과 전자들로 붕괴된다.
지난 수십년간 행해진 고에너지의 산란 실험들은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입자 세계의 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물질은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로 바꾸어질 수 있다. 그것들은 에너지에서 생겨나 에너지로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소립자', '물질적 실체' 혹은 '독립된 물체'와 같은 고전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전우주가 따로 떼어질 수 없는 에너지모형들의 역동적인 그물로서 나타난다.
상대성 이론은 입자에 관한 우리의 개념뿐만 아니라 이 입자 간의 힘에 관한 이미지에도 철저하게 영향을 미쳤다. 입자들 사이의 힘, 즉 그 상호의 인력과 척력인 입자 상호 작용들의 상대론적 기술은 다른 입자들의 교환으로서 표시된다. 이것은 아원자적 세계의 4차원적 시공 특성의 결과이며, 우리의 직관이나 언어로는 이러한 이미지를 잘 다루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아원자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다. 이것은 물질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힘을 다른 구성 요소들의 속성과 관련시켜 힘과 물질의 두 개념을 통일하는 것이나, 이 두 개념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 이후 줄곧 근본적으로 매우 다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제 힘과 물질은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역동적인 모형들에 그 공동의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입자들이 그 자신을 다른 입자들의 교환으로서 나타내는 힘을 통하여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은, 더욱이 아원자적 세계가 무엇때문에 구성요소들로 분해될수 없는가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거시적 수준으로부터 핵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물체를 함께 묶어 주는 힘들은 비교적 약하며, 물체가 구성 요소들로 형성되어 있다고 대체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한알의 소금은 소금 분자들로, 소금 분자는 두 종류의 원자들로, 그런 원자들은 원자핵과 전자들로 , 그리고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자의 단계에 오면 사물을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볼 수는 없게 된다.
최근 몇 년간 양성자와 중성자들 역시 복합적인 것이라는 증거가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함께 묶어 주는 힘이 매우 강하므로 ㅡ구성요소들이 갖게 되는 속도가 매우 높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만 ㅡ힘들이 또한 입자라는 상대론적 상이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구성입자들을 속박하는 힘들을 형성하는 입자들의 구별이 희미해지고, 대상이 구성 성분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대략적으로 말할 수 없게 된다. 입자의 세계는 기본적 구성 요소들로 분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제2부> 동양신비주의의 길
5. 힌두교
힌두교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불릴 수도 없고 또한 잘 정의된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종파와 의식의 철학적 체계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하고도 복잡한 사회 종교적 유기체이며,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잡다한 남신과 여신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교 의식과 예식 및 정신적 계율을 포함하고 있다. 여태껏 지속되고 있는 복합적이고 강력한 전신적 전통의 여러 단면들은 광막한 인도 대륙의 지리적,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복합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힌두교는 그 정신적 원천을 <배다 경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배다의 '예언자들'인 무명의 현자들에 의해 쓰여진 고대의 성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배다경>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그중 최고의 것이 <리그베다>다. 인도의 성어인 고대 산스크리트로 쓰인 <배다경>은 힌두교의 종파에 대하여 지상의 종교적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비전통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배다경>은 각기 다른 시기, 아마도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몇 부분들로 구성돼 있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성스런 찬가와 기도문이고, 그 다음 부분의 두 가지는 찬가와 관련된 제사의식을 다루고 있으며 <우파니샤드>라고 불리는 마지막 부분은 베다의 철학적 실천적 내용을 완성한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힌두교의 정신적 메세지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일반 대중들은 우파니샤드를 통하지 않고 웅대한 서사시에 수집되어 있는 민간 설화ㅡ이것은 방대하고 다채로운 인도 신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ㅡ를 통하여 힌두교의 가르침을 받아 왔다. 그 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리타>에는 인도인들이 애송하는 경정인 <바가바드 기타>라는 아름다운 영적인 시가 실려 있다. 보통 '기타'라고 줄여서 불리는 이것은 크리슈나 신(the god krishna)과 전사인 아르주나(Arjuna) 사이에 주고 받은 대화다. 아르주나는 <마하바리타>의 주된 줄거리를 이루는 대종족 전쟁에서 그의 종족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큰 절망감에 빠진다. 크리슈나 신은 아르주나의 전차 몰이꾼으로 변장하고 두 군대 사이로 전차를 몰고 들어가서 전장이란 이 극단적인 무대에서 아루주나에게 힌두교의 가장 심오한 진리를 밝혀 보여주기 시작한다. 신이 입을 떼자 두 종족 간의 전쟁이란 현실적인 배경은 금세 퇴색해 버리고, 아르주나의 싸움은 인간의 영혼적인 투쟁이요, 깨달음을 찾아가는 전사의 싸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크리슈나 신이 몸소 아르주나에게 충고한다

그러므로 네 심장 속 무지에서 움터 난 의심을 지혜의 칼로 베어 버려라. 자기 조화 안에서, 요가(명상) 안에서 하나가 되어라, 그리고 깨어나라, 위대한 전사여, 깨어나라

대부분의 힌두교가 그렇듯이 크리슈나의 정신적 교시의 기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사물이나 사건들이 다 같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실일 뿐이라는 사사에 있다. 브라만(Brahman)이라고 불리는 이 실재는 힌두교가 수많은 남신과 여신을 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일원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통일 개념이다.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만물의 영혼 또는 내적 정수로 이해된다. 그것은 무한하고 모든 개념을 넘어서있다. 그것은 지성으로 이해될 수 없고, 언어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도 없다. "브라만, 시작이 없는 지상의 것 : 유를 넘어서고 무를 넘어서는 것 ㅡ지상의 영혼은 불가해하고, 무량하고, 태어나지도 않고,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생각이 미치지도 않는 것이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실재에 관해 말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특히 신화를 좋아하는 힌두 현자들은 브라만을 신성하게 그렸고 신화적 언어 속에 담아 얘기한다. 그 신성의 제각기 다른 모습에 맞추어 힌두교도의 숭배를 받는 다종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주어졌으나 이런 모든 신들은 하나의 궁극적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경전은 분명히 하고 있다.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되는 것을 '아트만(atman, 自我)'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피니샤드>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가장 순수한 정수ㅡ온 세상의 영혼, 그것은 실재다
그것은 아트만이다. 그것은 당신이다.

힌두 신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기 희생에 대한 세계 창조라는 주제가 반복하여 나온다. ㅡ'거룩하게 한다'는 원래 의미에서의 희생에 의해ㅡ신은 이 세계가 되고, 종국에 가서는 또다시 신으로 되돌아간다.
이 신성의 창조적인 활동은 '릴라(lila)', 즉 신의 유희라고 불리며, 이 세계는 그 성스런 유희의 무대로 간주되는 것이다. 힌두 신화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 릴라의 신화도 마술적인 취향을 강하게 풍긴다.
브라만은 스스로를 세계의 형상으로 변용시키는 가장 위대한 마술사이며, <리그베다>에서는 마야(maya)의 본래 의미인 '창조적인 마력'으로써 이 공업을 수행한다. '마야'라는 말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의미를 바꿔왔다. 애초엔 신선한 행위자와 미술가의 '권능'이나 '힘'이었던 것이 나중엔 마술에 걸려 있는 어떤 사람의 심리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가 신성한 릴라의 무수한 형태를 혼동하고 이를 모든 형태 아래 놓여 있는 브라만의 통일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
'마야'는 그러므로 흔히 잘못 말해지듯이 이 세계가 환상이란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형상들과 구조들, 사물들과 사건들이 우리의 이리저리 재고 간추리는 마음이 낳은 개념일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의 실재라고 생각하는 한, 단지 그러한 관점 속에 우리의 환상이 자리잡는 것일 뿐이다. 마야는 이러한 개념을 실재로 간주하는, 지도를 영토로 혼동하는 환상이다.
힌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마야이며, 위대한 마술사의 신성한 유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거룩한 '릴라'는 율동적이고 힘찬 유희인 까닭에 이 마야의 세계는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다.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karma)'인데 이는 행위를 의미한다. <기타>경전의 말로 표현하자면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
카르마의 의미는 마야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우주적인 단계에서 인간적 수준에까지 점차 떨어져 심리학적 뜻을 띠게 된다. 우리가 단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마야의 주술 아래 놓여,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全一性)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기타>경전은 이 점에 관해 매우 잘 밝혀주고 있다.

모든 움직임은 자연의 힘이 교직(交織)하는 대로 다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망(迷忘)에 사로잡여 그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의 힘과 행위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자연의 어떤 힘이 다른 자연의 힘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되며, 그리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moksha)', 즉 인도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정수(精髓)다.
힌두교는 해탈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교도들이 같은 방식으로 신성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각기 다른 깨달음의 양태에 맞추어 상이한 개념과 의식과 정신적 수련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의식 중에 많은 것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브라만이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힌두교의 특성인 대자 대비한 관용과 포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베단타(Vedanta) 학파는 그중 가장 주지적인 학파로서 <우피니샤드>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브라만을 어떤 신화적 내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비개별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도로 차별적이고 지적인 수준에도 불구하고 베단타의 해탈 방법은 서양 철학의 어떤 학파와도 사뭇 다른데, 그들은 브라만과의 합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날의 명상과 다른 정신적 수련을 수반하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해탈 방법은 '요가(yoga)'로 알려져 있는데, 요가란 말은 '잡아매다', '붙이다'라는 뜻이며, 여기에서는 개개의 영혼을 브라만과 합치시키는 것을 지칭한다. 거기에는 몇 개의 학파, 즉 요가의 '육도'가 있는데, 이들은 몇몇 기본적인 육체적 단련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 각기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상이한 정신적 수준에 맟추어 의도된 다양한 정신적 규율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의 일반 신도들이 신성에 접근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하나의 인격적인 남신이나 여신의 형태로 신성을 숭배하는 일이다. 인도인의 풍부한 상상력은 문자 그대로 수천의 신들을 수없는 표현을 입혀 창조해냈다.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숭배되는 세 신은 시바(shiva)와 비슈누(vishnu)와 성모다. 시바는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인도 최고의 신들 중 하나다. 그가 브라만으로 충만된 인격신으로서 현신(顯身)할 때 '마헤스바라(mahesvara)', 즉 상제신(上帝神)이라고 불린다. 그는 또한 하나하나 별개의 모습으로 신성을 체현시킬 수도 있는데, 그 가장 유명한 시현은 '나타리자(nataraja)', 즉 무도자의 왕이다. 우주적 무도자로서의 시바는 춤을 추어 우주의 끝없는 율동을 유지하는 창조와 파괴의 신이다.
비누슈 또한 여러가지 변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가바드 기타>의 크리슈나 신이다. 대체로 비누슈의 역할은 이 우주를 보존하는 데 있다. 이 삼위 중 세 번째 신이 샤크티(shakti), 즉 성모로서 자신의 여러 많은 형태를 가지고 이 우주의 여성적인 에너지를 나타내는 원형적인 여신이다.

샤크티는 또한 시바의 아내로서 나타나는데, 이 양자는 웅대한 사원의 조각 작품에서 정열적인 포옹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이것은 서양의 종교 예술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비상한 관능성을 내뿜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대부분의 서양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가 인간 존재와 불가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고 신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육욕을 의식적인 의지로써 제어하려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전존재로써 스스로 깨닫는 데 목표를 두었다.
힌두교는 중세의 탄트라 밀교(Tantrism)라는 한 분파로까지 발전돼 갔는데, 여기에서는 개오(開悟)를 감각적인 사랑 ㅡ이 속에서는 서로서로 양성이다 ㅡ의 깊은 체험을 통하여 추구했다.
힌두의 여신들은 성처녀로서 나타나지 않고 뇌쇄(惱殺)적일 만큼 아름다운 관능적 포옹상으로 나타난다.
서양인들은 힌두교의 신화를 다양한 모습과 육화를 통해 꽃피게한 남신과 여신의 그 황당무계할 정도의 엄청난 숫자에 혼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힌두교도들이 이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모두 다 같은 거룩한 실재의 갖가지 현시이며, 무한하고 무소부재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브라만의 다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6. 불교
불교는 싯다르타 고타마(Siddhartha Gautama)라는 단일한 창시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기원전 6세기 중엽의 공자와 노자,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시기에 인도에서 생을 누렸다.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이 세계의 기운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인간적 좌절의 기원과 그 극복 방법을 교시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 마야, 카르마, 니르바나 등의 인조 전통 개념을 받아들였다.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小承佛敎)와 마하야나(大承佛敎)라는 두 주류로 발전한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소승 종파는 실론, 버마, 타이에 정착했고, 대승은 네팔,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어 마침내는 두 종파 가운데서 더 중요시되었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수세기를 지나면서 융통성있고 동화력있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부처는 결국 여러 얼굴을 가진 비슈누 신의 한 화신(化身)으로 간주되었다.
지성의 직접적 신비체험 ㅡ불교에서는 각(覺)이라고 부른다ㅡ에의 길을 밝혀주는 한 가지 수단으로 비치는데 이 체험의 본질은 지적인 분별과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야친타, 즉 무사의(無思議)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실재가 분할되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 진여(眞如)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싯다르타가 숲 속에서의 7년의 고생끝에 어느날 밤 겪었던 체험이다. 그는 정각수(正覺樹)라고 하는 유명한 보리수 아래서 깊은 명상속에 잠겨 좌정해 있던 중 '더 능가할 것이 없는 완전한 깨침' 가운데서 그가 찾고 의심하던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확연히 청정(淸淨)해짐을 얻었고, 이로써 불타, 즉 각자(覺者)가 된 것이다.
불가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깨우친 직후, 이전의 동료 은자들에게 그의 교리를 설법하기 위해 베나레스의 녹야원으로 갔다. 그는 유명한 사성제의 형태로써 그의 핵심적 교리를 밀도있게 표현했는데, 그것은 마치 맨 먼저 질병의 원인을 검진하고, 다음으로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법을 처방하는 의사의 화법과 다르지 않다.
제1성제는 인간 상황의 두드러진 특성인 '두카' 즉 고뇌 또는 좌절이다.
이러한 좌절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다는 생의 근본적인 실상에 직면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부처는 말하는데, 이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근본 모습이라는 사상은 불교의 근저를 이룬다. 고(苦)란 불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생의 유전에 저항하여 온통 마야인 고정된 형태에ㅡ그것이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간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ㅡ그것들에 집착하려 할 때 생겨나는 괴로움이다. 이러한 무상의 교리에는 자아, 즉 변화무쌍한 체험의 지속적 주체로서의 자기도 없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독립된 개별적 자아라는 생각은 하나의 환상, 즉 마야의 또 다른 형태이고 실체가 없는 지적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념들에 매달리는 것은 또 다른 고착된 사고 범주를 고수할 때처럼 역시 좌절로 이끌어 간다.
제2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 즉 집착 또는 욕심이다.
이것은 불교철학에서 아비댜, 즉 무명(無明, 無知)라고 불리는 잘못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무익한 욕심이다. 이 무명 탓으로 우리는 지각된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열된 사물로 쪼개고, 이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낳은 이 고착된 범주에다가 실재의 유동하는 형태를 붙잡아 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좌절에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이 불교에서는 삼사라, 즉 윤회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인과응보의 끝없는 사슬인 카르마(karma, 業)에 의해서 몰아쳐진다.
제3성제는 괴로움과 좌절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삼사의 악순환을 초탈해서 카르마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마침내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경지에서는 개별적 자아라는 잘못된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생명이 전일(全一)하다는 감정이 지속된다. 니르바나는 힌두교의 모크샤와 동일어로서 모든 지적 개념을 넘어선 의식 상태며, 그것은 그 이상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 즉 불성을 얻는다(見性成佛)는 뜻이다.
제4성제는 일체고(一切苦)를 여의는 부처의 처방으로 불성의 경지로 이끌어 주는 자기계발의 팔정도다. 이 길의 처음 두 가지는 바르게 보는것(正見), 바르게 아는 것(正思)으로서, 인간 상황을 꿰뚫어 보는 냉철한 통찰력과 연관된 것이며 필수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 다음 네 가지는 바른 행위(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불교적 생활 방식에 맞는 규율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양극 사이의 중도(中道)다. 마지막 두 가지는 바르게 명상(正念)하는 것과 관계있고 최종 목표인 실재에 대한 직접적 신비체험(正定 : 무상무아無常無我의 선정禪定)을 기술하고 있다.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를 얻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가 이 세계에서 말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무상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임종 때 부처가 한 마지막 말은 그의 세계관과 교사로서의 자세와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쇠퇴(衰退)는 모든 복합적 사물에 고유한 것이다.(生者必滅) 그러하니 정근정진(正勤精進)하라.
믿음이란 요소는 대승불교의 정토종(淨土宗)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 학파는 모든 인간 존재의 본성이 부처의 본성이라는 불교 교리에 입각하고 있는데, 열반, 즉 정토에 들기 위해서 사람이 해야 할 것은 스스로의 본래의 불성을 믿는 것으로 다한다는 주장이다.
대승불교가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될 때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의 마음을 고취시킨 경전은 <화엄경>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철학자들이 인도의 종교적 천재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경전중 하나인 아바탐사카를 번역하고 해석하기 시작했을 때 이 양극은 새로운 역학적인 통일체로 결합하여, 그 결과 중국에서는 화엄사상이 나왔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화엄철학이 나와 불교 사상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7. 중국 사상
중국 철학의 지상 목표는 사회와 일상성의 세계를 초월하여 의식의 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현자의 단계이다. 중국의 현자는 인간 본성의 상보적인 두 면 ㅡ직관적 지혜와 실용적 지식, 관조와 사회활동 ㅡ을 자기 안에서 통일하는데, 중국인들은 현자와 왕의 이미지로 이를 완성시켰다. 그들은 고요함으로 해서 현자가 되고 움직임으로 해서 왕이 된다.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철학 유파로 발전한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 교육 제도와 사교적 예절의 엄격한 관습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 목적은 복합적인 구성과 조상 숭배의 의식을 지닌 중국의 전통적 가족 제도에 윤리적 기초를 형성시켜 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 도를 찾아내는데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유교란 명칭은 공자에서 유래했다. 그의 가르침은 육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의 철학적 사상서인 '예', '악', '시', '서', '역', '춘추'로 중국 고대의 성스런 현자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 자신의 사상은 <논어>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편찬된 금언집이다.
도교의 창시자는 노자이다. 공자보다 연상인 동시대인이다. 그의 경구집은 그냥 <노자>라고 불리는데 서양에서는 <도덕경>, 즉 <길과 힘의 경전>이라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대개 알려져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도가의 책은 <도덕경>보다 장문인 <장자>로서, 이 책의 저자인 장주는 노자보다 약 200년 후의 사람이다.
중국인들도 인도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관찰하는 삼라만상의 배후에는 그것을 통일시켜주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 실재를 '도'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주의 길이요, 도정이요, 자연의 질서였다. 도는 궁극적이며 규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이런 점에서 힌두교의 브라만과 불교의 다르마카야와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역동성이 우주의 본질이라는 중국의 관점에서 볼때 인도의 개념들과는 달라진다. 도는 만물이 거기에 포함되는 우주의 진행과정이며, 따라서 이 세계는 부단한 유전과 변화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깨달아야 할 우주의 길의 유형은 무엇인가?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라고 노자는 말했다. 이 사상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 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도의 운동에 있어서 순환양식이란 아이디어는 두 정반대 극인 '음양'의 도입에 의해 명확한 구조가 된다. 그것은 변화의 주기를 한정시켜 주는 두 극이다.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중국적 관점에서의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난다. 이러한 사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고, 한쌍의 원형인 음양의 상징에 대해 여러 세대에 걸쳐 연구가 가해져 마침내 중국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음은 현자의 고요하고 명상적인 정적이요, 양은 왕의 강하고 창조적인 활동이다.
8. 도교
노자와 그들이 따랐던 자들이 그들의 세계관을 펴 나갔던 바로 그 시대에 이 도가의 관점과 본질적으로 모습을 같이 하는 것이 그리스에서도 또 한 사람에 의해 가르쳐졌다는 사실은 놀랄만 한 일이다. 그 또 한 사람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오직 단편적으로만 알려져있고, 아직도 종종 오해되고 있는데 그는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였다. '만물은 유전한다'는 유명한 말에서 표현한 것처럼 부단한 변화를 강조한 점에서 노자와 궤를 같이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변화가 순환적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현대 물리학과 연관해서는 자주 언급되지만 도교와 관련해서는 좀체 얘기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도가의 변화개념을 두고 얘길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원리이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가들에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럿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직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교 현자들의 행위는 그의 직관적 지혜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 그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나 자기 주변의 어떤 것도 강제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도의 운동에 자기의 행위를 순응시켜 나갈 따름이다.
이러한 행동방식을 도교에서는 무위(無爲)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글자 그대로 비행동을 뜻하는데, 이것은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는 것을 뜻한다.
무위는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는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
9. 선(禪)
기원후 1세기경 중국 정신이 불교 형태의 인도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두 가지 발전이 나란히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불경을 번역하는 일이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하여 그들 자신의 철학적 조명 아래서 인도 부처의 가르침을 해석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무한히 풍요한 사상의 교류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의 화엄종과 일본의 게곤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다른 한편 중국 정신의 실용적인 면을 인도 불교의 실제적인 상에 집중하여 보통 명상으로 번역되는 찬(禪의 중국식 발음)이란 이름의 특별한 정신적 수련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도 불교의 영향에 대응했다. 이 찬 철학은 기원후 약 1200년경 결국 일본에서 채택돼 젠(Zen, 선의 일본식 발음)이란 명칭 아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전통으로서 그곳에서 꾸준히 계발되어 왔다.
선은 이처럼 상이한 세 문화의 철학과 특질이 독특하게 융합된 것이다. 그것이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하나의 생활 방식이지만 여전히 인도의 신비주의, 도가의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사랑, 유교 정신의 철저한 실용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선은 본질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불교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적이 부처 자체, 즉 선에서 사토리(각覺의 일본식 발음)로 알려진 체험적 개오의 얻음 이외에 다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오의 체험은 동양 철학의 모든 학파의 핵심이지만 특히 선은 오직 이 체험에만 전념하고 더 이상의 해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선의 체험은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교리나 철학, 형식적 강령이나 독단적 교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고착된 신조로부터의 해방이 진실로 정신적이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선에 있어서 개오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을 뜻하지 않고 그 반대로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실제적이고 생산적인 생활과 가족 영속의 관념에 큰 중요성을 붕해서 인도 불교의 수도원적 성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중국적 정신에 어필하는 바가 무척 많았다. 중국의 선사들은 마조(馬祖)가 선언했던 바와 같이 찬, 또는 젠이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이며 평상심이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일상사의 한복판에서 꺠달음을 얻는다는 데 그들의 역점이 놓여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생활을 개오로 나아가는 도정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오 그 자체로서 보았던 점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 일본에는 교시의 방법을 제각기 달리하는 선의 두 주류가 있다.
임제종, 즉 돈오파는 공안법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산젠이라고 부르는 스승과의 주기적이고 공식적인 문답에 중점을 두어, 이 자리에서 제자는 그가 풀려고 하는 공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도록 요구받는다. 공안을 푸는 것은 치열한 정신 집중의 오랜 기간을 거쳐서 돌연히 개오의 통찰에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스승이라면 제자가 돌연한 개오의 벼랑 끝까지 다다른 때를 알고 죽비로 내리치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는 것과 같은 예상 밖의 행동으로 그 제자를 개오의 체험 속으로 들도록 충격을 가할 수 있다.
조종동, 즉 점수파는 임제종의 충격법을 피하고 '꽃망울이 피어나도록 쓰다듬는 봄날의 미풍처럼' 선 제자들을 점진적으로 성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정좌(靜坐)와 범사(凡事)의 활용을 명상의 두 가지 형태라고 주창했다.
조동종과 임제종은 둘 다 날마다 선방에서 여러 시간 동안 행하는 좌선, 즉 앉아서 하는 명상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러한 형태의 명상에 수반되는 바른 자세와 호흡은 모든 선 제자들이 배워야 할 제일 첫번째 일이다.
<제3부> 대비
10. 만물의 통일성
일상적 생활에서는 우리는 만물의 통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계를 개별적 사물들과 사건들로 나눈다. 물론 이 분할이 우리의 일상적 환경을 다루는 데에는 유용하고 필요하나 그것이 실재의 참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분별하고 범주화하는 지성이 궁리해 낸 하나의 추상이다. 개별적 사물들과 사건들이라는 우리의 추상적 개념을 자연의 실상이라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이 망상이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마음에서 생겨난 무명(無明)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동양의 신비적 전통들의 주목적은 명상을 통하여 마음을 집중시키고 가라앉혀서 재조정하는 것이다. 명상에 대한 범어 사마디는 '정신적 평형'을 의미한다.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
다음에 이어질 논의는 이른바 양자론의 코펜하겐 해석이라 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1920년대 말기에 ㅂ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아직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델이다. 코펜하겐 해석의 출발점은 물리적 세계를 관찰되는 체계(대상)와 관찰하는 체계로 나누는 것이다. 관찰되는 체계는 원자, 아원자적 소립자, 원자적 작용 등등이 될 수 있다. 관찰하는 체계는 실험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나 몇 명의 관찰자를 포함할 것이다.
관찰하는 체계는 고전 물리학의 용어로 기술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관찰되는 대상의 기술에도 시종 여일하게 사용될 수는 없다. 고전적 개념들이 원자의 단계에서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우리의 실험을 기술하고 그 결과를 진술하는 데에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역설로부터 벗어날 도리는 없다.
관찰되는 체계는 양자론에서 확률에 의해 기술된다. 이것은 어떤 시간에 아원자적 소립자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혹은 원자적 작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확실히는 결코 예견할 수 없다. 기껏해야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이다. 양자론에서는 확률을 물질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들을 지배하는 원자적 실재의 근본적 특성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아원자적 입자들은 일정한 시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원자적 사건들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확실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원자론은 우주의 본질적인 상호 연결성을 드러내준다. 이는 세계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질을 들고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그것이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데모크리토스나 뉴턴적 의미에서의 기본적 구성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실제적 견지에서 유용한 이상화에 불과하며 근본적 의의는 없다. 닐스 보어의 말을 빌리면 "독립된 물질적 입자들이란 추상물로서 그들의 속성은 다른 체계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정의되고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원자적 단계에서는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물질적 대상들은 확률 모형으로 융해되었으며, 이러한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의 확률을 표상한다.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들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 보게한다. 그런데 동양의 신비가들이 세계를 체험했던 방법으로서, 그들 중의 몇몇은 그 체험을 원자물리학자들이 쓴 것과 거의 같은 말로 표현했다.

물리적 대상들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된다. ... 그밖의 자연의 배후 또는 환경에서 따로 떨러져 있는 객체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통일체의 불가분한 일부요, 그 미묘한 표현이기도 한 다른 무서이 되는 것이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원자물리학자에 의한 다음의 두 진술은 이번엔 자연의 신비적 체험에 관한 기술로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한 소립자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석 불가능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상, 밖으로 다른 것들에 미치는 일련의 관계다.
따라서 세계는, 그 안에서 복합적인 사건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연결들과 교체하고 겹쳐지고 종합되어서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대 물리학에서 도출되는 상호 연결된 우주적 망이란 상은 동양에서 자연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전단하는 데 널리 쓰여왔다.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브라만은 우주적 망을 통일시켜 주는 망사로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반이다.
우주적 망의 이미지는 불교에서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인 <화엄경>은 그 핵심 부문에서 이 세계를 완벽한 상호 관계의 망으로서 그리는데, 거기에서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은 무한히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작용을 주고받고 있다. 우주적 망은 마침내 대승 불교의 일파로서 서기 3세기경 인도에서 기원하여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주종파를 이루고 있는 탄트라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종파의 경전들은 <탄트라>라고 불리는데, 산스크리트 어원은 '엮는다'는 뜻이며, 만물의 교직과 상호 의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이 우주적 상호 연결성에는 언제나 관찰자와 그 의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점은 물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원자의 단계에서, '대상들'은 준비와 측정의 과정 사이에 있는 상호 작요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연쇄 과정의 종국점은 언제나 관찰자의 의식에 놓여 있다. 측정이란 우리의 의식에 감각을 일으키는 상호 작용 ㅡ예를 들면 섬광이나 사진의 감광판 위에 있는 흑점의 가시적 섬광 ㅡ이며 원자 물리학의 법칙들은 만약 우리가 원자적 대상으로 하여금 우리와 상호 작용하게 된다면 어떠한 확률로 일정한 감각을 초래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원자물리학의 결정적인 특성은 어떤 대상의 속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관찰자가 반드시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속성들을 정의하는 데에도 관찰자란 존재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자 물리학에서 우리는 대상 그 자체의 속성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 작용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 관찰자는 그가 어떻게 자기의 측정을 진행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이 조정에 따라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결정지어진다. 실험상의 배열이 변경되면 이번에는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이 변할 것이다.
양자론의 중요한 법칙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두 양은 동시에 정확히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입자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고 운동량(속도)에 관해서는 완전히 모르는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 양에 대해 대략적이고 부정확한 지식만을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계가 측정 기술의 불완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자적 실재에 고유한 원리상의 한계다.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하면 그 입자의 운동량이 정확하지 않게 되고 운동량을 측정하려고 하면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게 된다.
원자 물리학에서 과학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단지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에 그가 미치는 정도만큼 자신이 관찰하는 바로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존 휠러(John Wheeler)는 관찰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을 양자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기고, '관찰자'라는 말을 '참여자'로 대치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양자론은 20센티미터의 관유리 조각을 사이에 두고 관찰자와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저 바깥에 놓여있는' 세계라고 하는 개념을 깨뜨렸는데, 양자론에 관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전자와 같이 그렇게 작은 대상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까지 그는 유리를 부수고 그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그가 선택한 추정 장치를 설비해야 한다. 그가 위치를 측정할 것인지 운동량을 측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다. 어느 하나를 측정하기 위한 장치를 설비한다는 것은 곧 다른 것에 대한 측정 장치를 가로 막고 배제하는 일인 것이다. 더욱이 측정은 전자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우주는 그 후 결코 동일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관찰자'라는 낡은 말을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참여자'라는 새로운 말을 집어 넣어야 한다. 좀 이상하지만,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다.

<우피니샤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원성이 있는 곳은 말하자면 하나가 다른 것을 보고, 하나가 다른 것을 냄새 맡고, 하나가 다른 것을 맛보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곳에서는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본단 말인가?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냄새 맡는다는 것인가?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맛본단 말인가?

이는 곧 만물의 통일에 대한 궁극적 파악이다 신비가들이 말하는 대로 이것은 개별성이 차별없는 일자(一者)에로 용해되어서, 감각의 세계는 초월되고 사물의 개념이 없어진 그러한 의식 상태에 도달된 것이다.
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과 그 부분들과의 나의 연결은 없어졌다. 나의 감각 기관들은 폐기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물질적 형체를 떠나고 나의 지식에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대통(大通)'과 하나가 된다. 이를 나는 앉아서 고스란히 잊는 것(坐忘)이라 부른다.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동양의 신비가들이 모든 사물들을 기본적인 전일자의 현신으로서 경험한다고 할때,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은 아니다. 그들은 사물들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 모든 상이성과 대비점들이 일체를 포용하는 통일체 속에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대조적인 것들의 통일성이라는 것, 특히 대립자들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의식으로서는 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만 동양인의 세계관의 바로 근원에 들어 있는 통찰이다.
대립자란 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개념에 주의를 집중하는 바로 그 우리의 행위 때문에 그 개념의 대립자가 생겨난다.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美)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醜)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중국인들은 음과 양의 배후에 놓여 있는 통일체를 '도'라고 부르고, 그것을 음양의 상호 작용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보았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유래되는 대립 개념의 체계가 아원자 소립자의 세계를 다루기에는 너무 한정적이다. 상대성 이론은 이러한 세계를 기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분리되어서 조화될 수 없는 실체들도 상대성이론에서는 3차원에서 4차원적인 세계로 넘어감으로써 통일을 이루게 된다.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인 세계는 힘과 물질이 통일된 세계다. 이곳에서는 물질이 비연속적인 입자들이나 연속된 장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통일성을 이 이상 더 잘 그려볼 수는 없다. 물리학자들이 4차원의 공간 ㅡ시간의 세계를 그들 이론의 추상적인 수학적 형식화를 통해서 '경험'할 수는 있지만, 시각 상상 ㅡ다른 모든 사람의 상상처럼 ㅡ은 감각의 3차원 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 패턴은 이런 3차원의 세계에서 계발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 실재를 다루기에는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자적 단계에서 보면 물질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나타나는 양태는 상황에 따라 바뀐다. 어떤 상황에서는 입자적인 면이 우세하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오히려 파동처럼 움직인다. 이러한 양면성은 또한 빛과 모든 다른 전자기적인 복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은 단지 입자가 물결 모양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함으로써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파동의 성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파동 모형에 있어서 움직이고 있는 입자들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수파(水波)에 있어서 물의 입자들은 파동을 따라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동이 지나갈 때 원운동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파에 있어서도 공기의 입자는 단지 전후로 진동할 뿐 그 파동을 따라서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파동을 따라서 이동하는 것은 파동 현상을 일으키는 교란이지 어떤 물질적인 입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양자론에서 우리들이 입자도 역시 하나의 파동이라고 말할 때 입자의 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본뜻은 전체로서의 파동 모형은 입자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동하는 파동의 상은 이동하는 입자의 상과는 전혀 다르다.
12. 공간-시간
공간과 시간에 관한 우리의 개념들은 실재에 대한 지도 위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것들은 우리 주변의 사물들과 사건들에 질서를 부여해 준다. 어떠한 물리 법칙도 그 법칙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 의해 제기된 이들 기본적인 개념들에 관한 일대 수정은 과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였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를 따르는 3차원의 절대적 공간과, 이와는 별개의 차원으로서 물질적 세계에서 독립되어 있는 일률적으로 흐르고 있는 절대적 시간이란 두 개념은 고전 물리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기하학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조 체계의 부분으로서보다도 오히려 자연에 있어서 고유한 것이라고 하는 믿음은 그리스 인의 사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논증적인 기하학은 그리스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의심할 수 없는 공리로부터 출발하여 이로부터 연역적인 추리에 의해서 정리를 도출해내는 기하학적 방법은 그리스 인의 철학적 사고의 특색이 되었다. 아테네에 있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정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진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기하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수학적 정리가 실재의 세계에 대한 영원하고도 정확한 진리를 표현해주며, 기하학적인 형상들은 절대적인 미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기하학은 논리와 미가 완전히 일치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신성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플라톤은 "신은 기하학자다"라고까지 선언했다.
그후 수세기에 걸쳐서 그리스 기하학은 서양 철학과 과학에 계속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금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유럽의 표준 교과서였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은 2000년 이상 공간의 참된 본질이라고 인정되어 왔다.
기하학은 자연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자연에 부과한 것이라고 깨닫게 하였던 것은 아인슈타인이었다. 헨리 마르게나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성 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식은 기하학이 지성의 한 구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발견이 받아들여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다룰 수 있고,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를 살펴볼 수 있으며, 관찰과 일치하는 공식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인도인과 중국인도 제단을 짓는다든지, 땅을 잰다든지, 천체들을 그릴때에는 사용했지만, 결코 추상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규정하는 데에는 이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고대 동양의 과학이 일반적으로 자연을 직선이나 완전한 원의 도식 속에 맞추어 넣을 필연성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또한 반영된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전문학에 관한 조지프 니덤의 진술은 흥미롭다.

중국인(천문학자)들은 (기하학적인) 설명의 형식을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우주 유기체 내에 있어서의 요소적 유기물은 각기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서 그들의 도에 따랐으므로 그것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비표상적인' 대수학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가장 완전한 도형으로서의 원에 대한 유럽 천문학자들의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고, 그들은 또한 투명한 구체의 감옥이라고 하던 중세인들의 경험을 겪지도 않았다.

이처럼 고대 동양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의 기본 태도와 같은 태도를 이미 취하고 있었다.
초속 18만 6000마일(30만 킬로미터)인 빛의 속도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떠한 속도와 비교해도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그 사건들을 관찰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틀리다. 빛이 그 사건으로부터 관찰자에게 도달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간은 너무도 짧기 때문에 빛의 전달은 거의 동시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가 관찰되는 현상에 대하여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관찰할 때, 사건 발생과 그것을 관측하는 사이의 시간 간격은 사건의 순열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경우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는 사건들의 시간상 서열을 다르게 매길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시간의 상대성은 뉴턴의 절대 공간 개념을 방기(放棄)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한 공간은 각 순간에 있어서의 물질의 일정한 배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성이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좌우되는 상대적 개념임이 밝혀진 이상, 전체 우주를 두고 그러한 일정한 순간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젠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관측자에 대해서 어떤 특정한 순간에 발생하는 먼 사건이, 다른 관측자에 대해서는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주어진 한순간의 우주'를 절대적인 거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관측자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공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발전의 근본적 중요성은 멘델 작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명핵하게 표현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비롯된 진정한 혁명은 공간-시간의 좌표계가 제각기 독립된 물리적 실체로서의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하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신하여 상대성 이론은 공간-시간 좌표계는 관측자가 그의 환경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하나의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겨우 16세 때 광선을 따라서 빛의 속도로 여행하는 관찰자에게 빛의 방사선속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골똘히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 관찰자는 움직임이 없이, 즉 파동을 형성함이 없이 전후로 진동하는 전자장으로서 빛의 선속(線束)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현상은 물리학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젊은 아인슈타인에게는 한 관찰자에 의해서 관찰된 잘 알려진 전자기 현상, 즉 광파는 다른 관찰자에게는 물리학의 법칙과 모순되는 현상으로 비쳐질 것이라고 여겨졌다. 수년 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는 모든 공간적, 시간적 설명이 상대적일 경우에만 전자기적 현상에 관한 만족할 만한 기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3차원 좌표에 시간을 결합시킴으로써, 관찰자에게 상대적인 4차원 좌표라는 공통되는 '상대적인' 구조 안에서 비로소 운동하는 물체의 현상을 다루는 역학적 법칙과 전기와 자기에 관한 이론인 전기 역학 법칙이 성립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기본적 요소며, 그것들이 수정되면, 우리가 물리학에서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구조 체계가 바뀌게 된다. 새로운 구조 체계에서는 공간과 시간이 동등한 자역으로 취급되며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상대성 물리학에 있어서는 시간에 관한 언급 없이는 결코 공간을 논의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 새로운 구조체계는 고도의 속도를 포함하는 현상을 기술할 때에는 언제나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전 물리학에서는 막대기가 운동하고 있을 때나 정지하고 있을 때나 그 길이는 똑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한 물체의 길이는 관찰자에 의대해서, 그것의 운동에 따라서 상대적이며 또 그것은 그 운동 속도에 따라서 변화한다. 그 변화란 물체가 그것의 운동 방향으로 단축된다는 것이다. 막대기는 그것이 정지해 있을 때의 관계구조에서 최대의 길이를 가지며 속도가 증가할수록 관찰자에게는 상대적으로 짧아진다. 고에너지 물리학의 산란 실험에서 입자가 지극히 빠른 속도로 충돌할 경우 그 상대적인 축소가 너무도 심하기 때문에 둥근 입자가 찹살떡 모양으로 납작하게 찌그러진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어떤 사람의 그림자의 실제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한 물체의 진정한 길이를 묻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림자란 3차원 공간에 있는 점들이 2차원 평면 위에 투영된 것이며, 그래서 그 길이는 투영의 각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4차원의 시공 속에 있는 점들이 3차원의 공간에 투영된 것과 같으며, 그것의 길이는 관계 구조에 따라서 달라진다.
참된 길이는 참된 시간차를 나타내며, 그것들은 역시 관계구조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간적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관찰자에 대해서 상대적인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더욱 길어진다. 이것은 돌아가고 있는 시계가 더 느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더디어지는 것이다.
돌아가고 있는 시계의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잘 입증된 것이다. 대부분의 아원자 입자들은 불안정하다. 그것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입자로 붕괴된다. 그와 같은 불안정한 입자의 수명은 그것의 운동상태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무수한 실험들이 입증했다. 그거은 입자의 속도에 따라 증가한다. 빛의 속도의 80%(초속 24만 킬로미터)로 운동하는 입자는 약 1.7배 오래 지속한다. 그리고 빛의 속도의 99%로 운동하는 것들은 약 7배나 더 오래 지속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만큼 입자의 본래 수명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입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의 수명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러나 실험실의 관찰자의 관점에서 어떤 입자의 '실질적 시계(internal clock)'는 느려지게 되며, 따라서 그만큼 그것은 오래 지속된다.
이들 모든 상대론적 결과들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단지 3차원적인 상들을 관찰할 수 있을 뿐 우리의 감각으로는 4차원의 시공의 세계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상대성 이론은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운동체들은 물론 전기 및 자기와 연관돼 있는 현상을 기술하는 데 하나의 일반적인 체계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 체계의 기본적 특성은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과 그것들의 4차원적인 시공으로의 통합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확대되어 중력을 포함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중력의 영향으로 시-공은 만곡(灣曲)된다는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크 리만에 의해서 19세기에 순수히 추상적인 관념으로서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공간은 실제 휘어져 있다는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을 때까지는 그 이상의 것으로는 고려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공간의 만곡은 질량체의 중력장에 의해서 일어난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물체 주변의 공간은 휘어져 있으며, 그리고 그 휘어진 정도는, 즉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정도는 그 물체의 질량에 달려 있다.
공간의 곡률과 그 공간 속의 물질의 분포를 관련시킨 방정식은 아인슈타인의 장(場)방정식이라고 불린다. 이들 방정식은 항성과 행성의 근처에 있어서의 국소적인 만곡 편차를 정하는 데 적용될 뿐만 아니라 그곳에 큰 규모로 일반적인 공간의 만곡이 있는가를 발견하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실제 우주 구조에 부합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것이 오늘날 우주론의 중요한 과제이다.
휘어진 시공에 있어서 만곡 때무에 야기되는 왜곡은 기하학에 의해 기술된 공간 관계뿐만 아니라 시간 간격의 길이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간은 '평면적인 시공'에서처럼 동일한 비율로 흐르지 않으며, 따라서 질량체들의 분포에 따라서 곡률이 이리저리 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변화한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의 이러한 변화는 그 변화를 지금까지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시계로부터 다른 곳에 남아 있는 관찰자에게만 보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그 관찰자가 시간의 흐름이 더 느린 곳으로 갔다고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시계 또한 말할 필요없이 느려질 것이며, 그래서 그는 그러한 효과를 측정할 방도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드 브로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공에 있어서 우리들 각자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구성시켜 주는 모든 것은 하나의 덩어리로서 주어진다.  ... 각 관찰자는 자신의 시간이 흐를 때 그에게는 물질 세계의 연속적인 면으로서 나타나는, 말하자면 시공의 새로운 조각들을 발견한다. 비록 실제로는 시공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전체적 앙상블은 그것에 대한 관찰자의 인식에 앞서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상대성 물리학에 있어서 시공에 관한 온전한 의미다. 공간과 시간은 전적으로 대등하다. 그것들은 입자의 상호 작용들이 어떠한 방향으로도 뻗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4차원 연속체로 통일된다. 만일 우리가 이들 상호 작용을 도식화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공간의 전영역은 물론 시간의 모둔 순간을 총망라할 수 있는 하나의 '4차원 스냅사진' 속에 그려 넣어야 한다.
비록 물리학자들이 4차원 시공에 있는 한 덩어리 상호작용을 그리기 위해 수학적 공식과 도표를 사용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각 관찰자는 단지 시공 부분의 한 연속체, 즉 시간적 계기에 속하는 현상만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와는 반대로 신비가들은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 시공의 전순간(찰나, 즉 영원)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사 도원(道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은 흐른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은 현재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다고 하는 이 생각이 아마도 시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지나가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시간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해핼 수가 없는 것이다.

13. 역동적인 우주
양자론에 따르면입자는 동시에 파동이며 이와 같은 사실은 그것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원자적 입자가 작은 공간 영역에 제한될 때에는 언제나 빙빙 돎으로써 그 제한에 반응한다. 제한의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입자들은 그 속에서 더욱 재빠르게 움직인다. 이러한 동작은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아원자적 세계의 독특한 모습잉, 전형적인 양자효과다.
만일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좀 더 정확하게 하고자 하면, 즉 우리가 입자를 좀 더 작은 영역에 제한하려 한다면 그 파속을 이 영역 안으로 압착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파속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결과 입자는 빙빙 돌게 된다. 제한을 가하면 가할수록 입자는 더 빨리 움직이게 될 것이다.
운동함으로써 제한에 반작용하는 입자의 성향은 아원자 세계의 특징인 물질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양자론에 의하면 물질은 결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운동의 상태에 있다. 거시적으로는 우리 주위의 물질적 대상들은 부동이며 활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생명 없는 돌이나 금속을 확대해서 보았을 때에는 그것들은 활성으로 충만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다 가까이 보면 볼수록 더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물질적 대상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원자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상호 연관을 맺어 엄청나게 다종다양한 분자구조를 형성하는 바, 그 분자구조는 경직된 것이나 부동의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온도에 따라서, 또는 주변 환경의 열진동에 보조를 맞추어 진동하는 것이다. 진동하는 원자 속에 들어있는 전자들은 가능한 한 가까이 끌어당기는 전기력 때문에 원자핵에 속박당하며 이러한 제약에 대한 반응으로서 전자들은 극도로 재빠르게 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자핵에서는 양자와 중성자는 강한 핵력에 의해 좁고 좁은 영역 속에 속박돼 있으므로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회전한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은 물질을 부동적이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율동의 패턴이 분자, 원자, 핵의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연속적인 율동과 진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또한 동양의 신비가가 물질 세계를 보는 방식과 같다.
우리는 별과 은하계와 같은 넓은 우주의 영역에 있어서도 동적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
수소가스의 소용돌이치는 구름떼들은 응축되어 별이 되는데, 그 응축 과정에서 열도를 올려 마침내 천공의 타오르는 불이 된다. 그 불타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소용돌이치며 그중의 일부는 외계의 공간으로 물질을 방출하고 그 방출물은 항성 주위를 도는 유성으로 응축된다. 몇 백만년이 지나 마침내 수소 연료가 대부분 소진되었을 때, 별은 팽창하고 다시 그 최종적인 중력적 붕괴를 통해서 수축한다.
회전하고, 수축하고, 팽창하고 혹은 폭발하는 별들은 여러가지 형태ㅡ평평한 원반형, 구형, 나선형 등ㅡ의 은하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 역시 회전하고 있다. 우리 은하계인 은하수는 마치 거대한 바퀴처럼 공간을 돌고 있는 커다란 원반 모양의 별들과 가스다. 그리하여 태양과 그 유성들을 포함하는 모든 별들이 그 은하계의 중심 둘례를 돌고 있다. 우주는 사실상 우리가 볼 수 있는 전공간에 우리의 은하계처럼 돌고 있는 은하계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수백만의 은하계를 가지고 있는 우주를 전체적으로 연구할 때, 우리는 최대 규모의 시간과 공간을 다루게 되는 것이지만 이 우주적 수준에 있어서도 역시 우주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현대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계들로부터 오는 빛의 세밀한 분석은 은하계들의 전체적인 성운군이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조화로운 방법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은하계의 퇴행 속도는 그 은하계의 거리와 비례한다.
이것은 우리의 은하계로부터 측정된 거리에 대해서 참일 뿐만 아니라 관련 있는 어떤 지점에서도 적용된다.
당신이 어떤 은하계에 있게 되더라도 당신은 다른 은하계들이 당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 있는 은하계들은 매초 수천마일의 속도로, 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좀 더 높은 속도로,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들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멀어져 간다. 그 이상의 거리에 있는 은하계들로부터 발사되는 빛은 우리에게 도달되지 못한다. 그것들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우리로부터 멀어져가기 때문이다.
불교도들은 현대 물리학자들과 같이 모든 대상들을 우주적인 흐름에 있어서의 작용으로 보고 어떤 물질적 실체의 존재 같은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중국 사상은 근본적인 실체로의 환원보다는 그 상호 관계에 더욱 관심이 깊었다. 조지프 니덤은 "유럽 철학이 실체에서 실재를 찾으려고 했던 반면에 중국 철학은 그것을 관계에서 찾으려고 했다."라고 쓰고 있다.
14. 공과 형상
고전적인 기계론인 세계관은 공허한 공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견고하고 파괴되지 않는 입자라는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은 이러한 상에 혁신적인 수정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입자들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공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을 철저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는 이른바 장(場)이론에서 이루어졌다.
장의 개념은 19세기 패러데이와 맥스웰에 의하여 전화와 전류 사이의 힘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전기장이란 그 공간에서 어떤 다른 전하에 힘을 산출할 수 있는 전하체 주위의 공간 상태이다. 그리하여 전기장은 전하체에 의해서만 느껴질 수 있다. 자기장은 운동중에 있는 전하에 의해, 즉 전류에 의해 산출되며 그 결과인 자기력은 다른 움직이는 전하에 의해서만 느껴진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에 의해 그 이론이 성립된 고전 전기 역학에서는 장들이 아무런 물질적인 것들과 관련짓지 않고도 연구될 수 있는 원초적인 물리적 실체들이었다.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은 전파, 광파, 혹은 다른 종류의 전자기적 복사의 형태로 공간 속을 통과할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은 전하와 전류, 전기장과 자기장의 개념을 통일시킴으로써 전기 역학의 구조를 한층 훌륭하게 만들었다. 모든 운동이 상대적이므로 ㅡ관찰자에 대해서 움직이는 좌표계에서는 ㅡ모든 전하는 전류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전기장 역시 자기장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하여 전기 역학의 상대성 이론 공식화에 있어서는 두 장이 단일한 전자기장으로 통일된다.
장의 개념은 전자기력과 결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광대한 세계에 있어서의 또 다른 주 힘인 중력과 결부되었다. 중력장은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에 의해 생기고 감지되며 그로부터 나오는 힘은 언제나 인력인 데 반하여 전하에 의해서만 감지되는 전자기장은 인력과 척력을 일으킨다. 중력장에 적합한 장 이론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며, 이 이론에서 질량을 가진 물체의 주위의 공간에 대한 영향은 그에 상응하는 전기 역학에서의 전하체의 영항보다 훨씬 심대하다. 여기에서도 대상체 주위의 공간은 다른 대상체가 힘을 느끼게 하는 상태에 있게 되나, 이번에는 그 상태가 기하학, 즉 공간의 구조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질과 공허한 공간 ㅡ충만과 진공 ㅡ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별개 개념으로서 데모크리토스와 뉴턴의 원자론이 바로 이 위에서 성립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이 두 개념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 질량체가 있는 곳엣는 언제나 중력장이 있게 되는데, 이 장이 그 무레를 둘러싸고 있는 만곡된 공간을 채우며 그것을 휘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둘은 구별될 수가 없다. 즉 장이 곧 만곡된 공간인 것이다.
물리적 대상들은 주위 공간의 구조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주위 환경에 의해 본질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에 의하면, 물체의 관성 ㅡ가속되는 것에 대한 물체의 저항 ㅡ은 물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다른 것과의 상호작용의 척도라고 한다. 그의 견해로는 물체란 단지 다른 물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관성을 가지게 된다. 어떤 물체가 회전할 때의 관성은 원심력을 낸다. 마흐의 원리로 알려지게 된 이 관성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반 상대성 이론을 확립하는 동기가 되었다.
물질적 대상과 그 주위 환경 사이의 통일성과 상호 관계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거시적인 규모로 나타나지만 원자적 단계에서는 한층 더 놀랄만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아원자적 소립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하기 위해서 고전적인 장 이론의 개념과 양자론의 개념은 통합된다. 고전적 장 이론인 전기 역학은 양자론과 병합돼 '양자 전기 역학'으로서 아원자적 소립자들 사이의 모든 전자기적 상호 작용을 설명해 준다. 이 이론은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을 병합시킨 것이다. 그것은 현대 물리학 최초의 양자-상대론적 모델이었으며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다.
양자 전기 역학의 놀라운 새 특징은 전자기장의 개념과 전자기파의 소립자 발현으로서 광자의 개념을 통합하는 데서부터 나온다. 광자도 전자기파이며 이러한 파는 진동하는 장이므로 광자는 전자기장의 발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양자장, 즉 양자 또는 입자들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장의 개념이 성립한다. 이것은 아원자적 모든 소립자들과 그 상호 작용들을 기술하는 데까지 확대된 전혀 새로운 개념인데, 여기에서 각종의 소립자는 각기 그에 상응하는 다른 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양자장 이론에서 견고한 입자들과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 간의 고전적인 대조는 완전히 극복되었다. 양자장은 근본적인 물리적 실체, 즉 공간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연속적인 매체로 여겨진다. 소립자들은 단지 그 장의 국부적인 응결들에 불과하다. 에너지의 집결로서 그것들은 왔다 가 버림으로써 개체의 특성이 상실되고 바닥의 장으로 융합된다.
중국 철학에서 공허하며 형체가 없으나 모든 형상들을 산출할 수 있는 도의 개념 속에 장의 관념이 함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氣)의 개념도 명백히 표시되어 있다. 이 용어는 중국 자연철학의 거의 대부분의 하가, 특히 신유학파(송대의 유교학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학파는 유교, 불교, 도교의 종합을 꾀한 학파였다.
'기'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가스 혹은 에티르를 뜻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호흡이나 우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인체에서의 '기의 통로'가 전통적인 한방의 기초가 되고 있다. 침술의 목적은 이 채널을 통하는 기의 소통을 자극하는 데 있다. 기의 소통은 또한 무사의 도교식 무용인 태극권의 흐르는 듯한 몸놀림의 기본이기도 하다. 양자장처럼 기는 공간의 도처에 미만(彌滿)해 있으며 견고한 물체로 응축될 수 있는, 묽으면 감지될 수 없는 형태의 것으로 여겨진다.
양자장에서와 같이 장(場)ㅡ또는 기(氣)ㅡ은 모든 물체의 기초가 되는 본질일 뿐만 아니라 파동의 형태로서 서로의 상호 작용을 수행한다. 다음에 인용된 발터 티링에 의한 현대 물리학에서의 장의 개념과 조지프 니덤에 의한 물리적 세계에 대한 중국의 견해는 밀접한 유사성을 나타낸다.

현대 이론 물리학은 물질의 본질에 관하여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주안점을 가시적인 것 ㅡ입자들 ㅡ으로부터 그 기초가 되는 실체인 장으로 옮겨 놓았다. 물질의 현존은 단지 그 장소에서의 장의 온전한 상태를 교환하는 것, 즉 무언가 우발적인 것으로서 단지 하나의 '흠(blemish)'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소립자들 사이의 힘을 기술해 줄 단순한 법칙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기초가 되는 장 안에서의 질서와 대칭이 찾아져야 한다.

고대와 중세에 있어서 중국의 물리적인 우주는 완전히 연속적인 전체였다. 감촉할 수 있는 물질로 응축된 기는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개별화된 것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다른 대상들과 함께 적용을 주고받은바...결국에는 음과 양의 두 기본적인 힘의 율동적인 교체에 의존하는 파동이나 진동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개개의 대상들은 그 본래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세계 조화의 일반적 모형에 통합된다. 

양자장 이론에서 모든 소립자의 상호 작용은 시-공 도식에 표식될 수 있으며 각 도식은 그에 상응하여 일어날 수 있는 작용의 확률을 계산해 낼 수 있는 수학적 표현과 연관되어 있다. 그 도식과 수학적 표현 사이의 정확한 상응 관계가 1949년 리처드 파인먼에 의해 수립되었으며, 그 이래로 그것은 파인먼 도식으로 알려져 왔다.
현대 물리학의 장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인 입자와 허공 사이의 고전적인 구별을 버리게 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이론과 양자장 이론은 둘 다 소립자들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한편 그것들은 그 공간의 구조를 결정하는 반면에 독립된 실체로 여겨질 수 없고, 전 공간에 미만해 있는 연속적인 장의 응결로서 이해되야 한다. 양자장 이론에서 이러한 장은 모든 소립자들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의 바탕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장은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제거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물질적 현상의 수레다. 그것은 양성자가 그것으로부터 파이 중간자들을 생기게 하는 허공이다. 소립자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단지 장의 운동 형태에 불과하다.
어떤 핵자나 다른 강하게 상호 작용하는 소립자가 없더라도 가상적 소립자들이 허공으로부터 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을 때, 결국 물질과 빈 공간 사이의 구별은 버려져야 했다.
물리적 현상을 담는 빈 그릇으로서의 역할에서부터 허는 이제 가장 중요한 동적인 양으로 나타났다. 현재 물리학의 결과는 중국의 현인 장재의 말을 더욱 확증해 준다.

태허(太虛)가 기(氣)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때 무(無)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15. 우주적 무도
아원자적 입자들의 상호작용들은 입자들의 교환으로서의 그 자신을 나타내는 에너지의 그칠 줄 모르는 유통을 포함한다. 에너지 모형의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입자들이 끝없이 생겨나고 소멸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입자 상호작용들은 물질 세계를 형성하는 안정된 구조를 낳게 하지만 그 물질계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동적인 운동을 하며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 우주는 끊임없이 운동과 활동을, 즉 에너지의 지속적인 무도(舞蹈)를 하고 있다.
우리 주위의 모든 형태의 물질들은 필연적으로 양성자, 중성자, 전자라는 질량을 가진 단지 세 가지의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네 번째 소립자인 광자는 질량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전자기적 복사의 단위를 표시한다. 양성자와 전자와 광자는 모두 안정된 소립자들이다. 이것은 그것들이 소멸될 수도 있는 충돌 작용에 말려들지 않는다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중성자는 자발적으로 붕괴될 수 있다. 이 붕괴는 '베타 붕괴'라고 불리며 어떤 유의 방사능에 있어서는 기본 작용이 된다. 그것은 전자와 중성 미자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질량을 갖지 않은 입자를 생기게 하는 데 수반되어 중성자가 양성자로 전환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양성자나 전자와 같이 중성 미자도 역시 안정되어 있다.
방사능 물질의 원자들에 있어서 중성자들이 양성자로 전환되는 것은 이들 원자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원자들로 전환되는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전자들은 생물학, 의학, 그리고 공업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강력한 방사선으로 방출된다. 한편, 중성 미자들은 비록 같은 수로 방출되지만 질량도 없고 전하도 띠지 않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매우 힘들다.
모든 입자에는, 동일한 질량을 가졌으나 반대의 전하를 가진 반입작가 존재한다. 광자는 그 자신이 반입자이고, 전자의 반입자는 양전자라 불리며, 반양성자, 반중성자, 반중성 미자가 있다. 베타 붕괴에서 생기는, 질량을 갖지 않은 입자는 사실상 중성 미자가 아니라 반중성 미자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입자들은 오늘날에 알려져 있는 아원자적 입자의 단지 일부분에 불과하다. 여타의 입자들은 불안정하며 금세 다른 입자들로 붕괴되는데, 그중 일부는 안정된 입자들로 결합해서 남게 될 때까지 다시 붕괴될 수도 있다. 불안정한 입자들은 연구하는 데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용된다. 매번 조사할 때마다 충돌 작용을 통해 새로 생겨나게 해야 하는데, 이에는 거대한 입자 가속기나 기포 상자, 입자 탐지를 위한 극도로 정교한 다른 장치를 수반해야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불안정한 소립자들은 인간이 가진 시간 척도에 비하면 100만분의 1초보다도 작은 극도로 짧은 시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명 역시 극미한 그네들의 척도로써 생각되어야 한다. 이같이 볼때 그것들 중 많은 것은 비교적 오랜 시간 존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100만분의 1초란 입자의 세계에서는 굉장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1초 동안에 자기 몸의 몇 배 되는 거리를 횡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입자에 있어서의 동등한 시간의 길이는 그 크기의 몇 배 되는 거리를 횡단하는 데 요하는 시간일 것이다. 이것이 '입자초'라고 불릴 수 있는 시간의 단위다.
중간 크기의 원자핵을 가로지르기 위해 입자들이 충돌 실험에서 운동하는 것처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통과한다면 약 10입자초가 필요하다. 많은 수의 불안정한 입자 중에서 붕괴하기 전에 적어도 몇몇의 원자를 가로질러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약 24개 정도다. 이것은 그 크기의 약 10만배나 되는 거리며, 몇 만 입자초의 시간에 해당한다. 불안정한 입자들은 붕괴하기 전에 사실상 1센티미터 혹은 몇 센티미터까지 진행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오래 존재하는(100만분의 1초) 것은 붕괴하기 전에 그 크기와 비교하면 엄청난 거리인 수백 미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모든 입자들은 '공명'이라고 불리는 범주에 속한다. 그것들은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존재하여 몇 입자초 후에는 붕괴하므로 그 크기의 몇 배밖에는 더 진행할 수 없다. 이것은 그것들을 기포 상자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의 존재는 단지 간접적으로 추론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소립자들은 충돌 작용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 각개는 또한 가상적 입자로 교환될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입자들 간의 상호작용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많은 수의 입자 상호 작용을 낳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아직 그 이유는 모르지만, 다행히도 모든 상호작용들이 뚜렷이 서로 다른 강도의 상호 작용을 지닌 네 가지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강한 상호 작용들
전자기적 상호 작용들
약한 상호 작용들
중력 상호 작용들
이 가운데에서 전자기적, 중력 상호 작용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거시적인 세계에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중력 상호작용은 모든 입자들 사이에서 작용하지만 매우 약하기 때문에 실험상으로는 탐지될 수 없다. 그러나 거시적인 세계에서, 질량체를 만드는 막대한 수의 입자들은 그것들의 중력 상호 작용을 결합하여 우주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힘인 인력을 산출한다. 전자기적 상호작용은 모든 전하 입자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강한 상호 작용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원자핵 속에 함께 속박한다. 그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힘들 가운데 가장 강한 핵력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전자들은 약 10단위(전자볼트)의 에너지로 전자기력에 의해서 원자핵에 묶여 있지만 핵력은 약 1000만 단위의 에너지로 양성자와 중성자를 함께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핵들만이 강한 상호 작용을 하는 유일한 입자는 아니다. 사실상 대다수가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이다. 오늘날 알려진 모든 입자들 중에 겨우 5개(그리고 그 반입자들)만이 강한 상호작용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광자와 4개의 경입자(lepton)이다.
따라서 모든 소립자들은 두 가지의 광범위한 그룹으로 구분된다. 경입자들과 '강입자'들로서 곧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소립자들이다. 강입자들은 더 나뉘어 '중간자'와 '중입자'로 구분되는데 모든 중입자들은 별개의 반입자를 가지고 있는 반면, 어떤 중간자는 그 자신이 반입자가 될 수 있다.
경입자들은 네 번째 상호 작용인(위 순서에서는 세번째) 약한 상호작용에 포함된다. 반면 강한 상호작용은 원자핵을, 전자기적 상호작용은 원자와 분자를, 중력 상호작용은 유성과 항성과 은하계를 속박한다.
강입자들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은 다른 강입자들과의 교환에 의해서 전달된다. 그러한 좁은 영역에서 강한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질량을 가진 입자들의 교환이다. 그것들은 단지 몇 개의 입자 크기의 단거리에만 미칠 뿐이므로 결코 거시적인 힘을 형성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강한 상호 작용은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전자기적 상호작용은 질량이 없는 광자들의 교환에 의해 전달되므로 그것들의 수명은 무한히 긴데, 이것이 바로 전기력과 자기력들이 대규모적 세계에서 부딪치게 되는 이유다.
중력 상호작용 역시 중력자라고 불리는, 질량을 갖지 않은 입자에 의해 전달되는데 그것은 매우 약하므로 비록 그 존재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없지만 중력자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에너지 물리학의 많은 충돌 작용에서 강하고, 전자기적이고, 약한 상호작용들이 종합되어 일련의 복잡한 사건들이 산출된다. 최초에 충돌하는 입자들은 종종 붕괴되고 몇몇 새로운 입자들이 탄생되는데, 그것들은 더 충돌하거나 붕괴를 하며 때로는 그 몇 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안정된 입자가 된다.
16. 쿼크 대칭들 ㅡ 하나의 새로운 공안(公案)?
입자 세계의 모형들은 원자 세계의 모형과 아주 유사하다. 대부분의 입자들은 마치 팽이와 같이 축의 둘레를 자전한다. 그것들의 자전은 몇몇 기본 단위의 정수의 배수인 일정한 값에 한정된다. 따라서 중입자족은 중간자들이 0, 1, 2 등으로 자전하는 것과 같이 1/2, 3/2, 5/2 등으로만 자전할 수 있다. 이것은 전자가 정수의 배로만 제한되는 일정한 값의 회전량만을 원자 궤도 안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서로 강하게 상호 작용하는 입자들, 즉 강입자들이 서열을 이루며 그 서열상 동일한 질량과 자전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원자 모형과 닮았다는 유추를 뒷받침해준다. 이 서열상에서 높은 수들은 '공명'이라 불리는 매우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인데, 지난 10년간 상당히 많은 수가 발견되었다. '공명'의 질량과 자전은 각기의 서열 안에서 아주 정연하게 증가하며 그것은 무한히 연장되는 것 같다. 이러한 규칙성은 원자의 여기상태(excited state)를 연상케 하며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강입자의 높은 수는 가장 낮은 질량을 가진 동료 입자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여기 상태라고 보게 한다. 원자와 마찬가지로 강입자 역시 회전(혹은 자전)과 에너지(혹은 질량)의 보다 큰 양을 지니고 짧은 시간 여러가지 여기 상태에 존재할 수 있다.
원자의 양자 상태와 강입자 사이의 유사성은 강입자 역시 '여기(勵起)'할 수 있는 내부적 구조를 가진 혼합적 대상들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재로서는 어떻게 이러한 모형들이 형성되는지 알 수 없다.
소립자들의 구성요소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방대한 에너지를 동반하는 충돌 과정에서 그것들과 함께 충돌시켜 파괴해 보는 일이다. 그러나 이 충돌 후 남게 되는 조각들은 본래의 소립자들의 아주 작은 조각들이 아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양성자를 빠른 속도로 충돌시켰을 때 그것은 수많은 조각으로 부서지게 된다. 그러나 그 조각들 중에 결코 양성자 조각들은 발견해 낼 수 없다. 그 조각들은 항상 운동 에너지와 충돌한 양성자의 질량으로 이루어진 모든 강입자들인 것이다. 소립자가 그것의 구성 요소들로 분해된다는 것은 대단히 분명치 않으며 그때의 충돌 과정에 포함된 에너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입자들이 충돌 과정에서 조각들로 부서지는 방식은 어떤 규칙에 의해 결정되며, 그 부서진 조각들 역시 같은 종류의 입자들인 만큼 이러한 규칙 또는 입자 세계에서 관찰될 수 있는 규칙성을 설명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입자들이 발견되고 소립자 '족'이 나타나기 시작한 60년대에 대부분 물리학자들은 입자 모형의 역동적 원인을 발견하려는 지난한 문제에 힘을 쏟기보다는 새로 드러나는 규칙성을 도식화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대칭의 개념은 이러한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입자 물리학에서 대칭이란 반사와 회전 외에도 많은 다른 작용에 연관되어 있다. 즉 이런 것들은 통상적 공간(그리고 시간)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추상적 수학적 공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것들은 입자나 입자 집단에 적용되고 있으며, 입자의 속성들은 그 상호 작용과 분리될 수 없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 대칭은 입자들을 포함하는 과정인 상호 작용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대칭 조작이 유용한 이유는 그것들이 보존 법칙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자 세계의 한 과정이 어떤 대칭을 나타낼 때는 거기에 '보존되어 있는' 추정할 수 있는 양이 존재한다. 그 양은 과정상에서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런 양들은 아원자 물질의 복잡한 운동 속에서 불변의 요소를 마련해 주며 그리하여 입자의 상호 작용을 기술하는데 이상적이다.
모든 과정에 있어서 관찰되는 듯한 네 개의 기본적 보존 법칙이 존재한다. 그중 세개는 공간과 시간의 간단한 대칭 작용과 연관된다.
모든 입자들의 상호 작용은 공간상에 옮겨 놓아도 대칭적이다. ㅡ그것들은 런던에 있어서나 뉴욕에 있어서나 분명히 동일하게 보인다. 그것들은 또한 시간상으로도 변이를 시켜도 대칭적이다. 월요일에나 수요일에나 동일한 방법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대칭들의 첫째는 운동량의 보존에 연관되어 있으며, 둘째는 에너지의 보존에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한 상호작용에 개입된 모든 입자의 전체 운동량과 총에너지는 상호 작용 이전이나 후나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번째의 기본적 대칭은 공간에 있어서 방위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소립자 충돌에서 충돌하는 입자들이 서로간에 남북 방향의 축을 따라 접근하든지 동서 방향의 축을 따라 접근하든지 어떤 차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대칭성의 결과로서 한 작용에 포함되어 있는 회전의 총량은 항상 보존된다. 마지막은 전하의 보존이다. 한 상호작용에 개입되어 있는 모든 입자에 의해서 운반되는 총 전하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입자 세계에 있어서의 대칭적 모형들의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모형들이 자연의 기본 법칙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게 하였다. 지난 15년 동안 알려진 모든 입자들을 통합하고, 물질의 구조를 설명할 궁극적인 기본적 대칭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목적은 고대 그리스 인으로부터 물려받아 수 많은 세기를 거쳐 발전되어 온 철학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대칭은 기하학과 더불어 그리스의 과학, 철학, 예술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거기서는 대칭은 미와 조화, 그리고 완성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 학파는 대칭적인 수 모형들을 만물의 본질로 보았으며, 플라톤은 네 개의 원자 요소들이 일정한 고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또 대부분의 그리스 천문학자들은 천체가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원이야말로 지고의 대칭성을 지닌 기하학적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대칭에 대한 동양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산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동양의 예술 형식들은 비대칭을 현저하게 편애했으며 완전히 규칙적이거나 기하학적 형상은 종종 기피되고 있다. 선의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일본의 회화는 소위 여백(餘白, onecorner) 양식이라는 기법으로 자주 그려졌다. 또한 일본 정원에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부석은 극동 문화의 이런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립자 물리학에서 기본적 대칭을 탐구하는 것은 현대 과학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일반적인 세계관에 다소 맞지 않는 것 같은 우리의 헬레니즘적 유산의 일부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대칭에 역점을 두는 것은 소립자 물리학에서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정적'인 연구방법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동적'인 사유학파가 있어 왔는데, 이것은 소립자 모형들을 자연의 근본적인 모습으로 보지 않고 다만 그것들을 동적 본성과 아원자 세계의 본질적인 상호 관계의 결과로서 이해하려고 한다.
17. 변역(變易)의 모형
입자 세계에 있어서의 대칭을 역동적인 모델, 즉 입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기술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당면 과제중의 하나다.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동시에 고려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입자 모형들은 원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유사한 것들이기 때문에 입자들의 '양자적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입자 물리학에서 그 모형들은, 포함된 에너지가 매우 높아서 상대성 이론이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양자론의 구조 체계에 들어 있는 파동 모형들로서는 설명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직 소립자의 양자-상대론적 이론만이 관찰된 대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양자장 이론이 그러한 계통의 첫 번째 모델이었다. 그것은 전자와 광자 사이의 전자기적 상호 작용에 대해서는 훌륭한 설명을 제공해 주었으나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입자를 설명하는 데에는 적절치 못했다.
이러한 입자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물리학자들은 그것들 각각을 기본 장과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리고 입자 세계가 상호 연결된 작용의 좀 더 복합적인 조직으로서 그 스스로를 드러냈을 때 그들은 이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재를 밝혀줄 다른 모델을 찾아야만 했다. 필요한 것은 엄청나게 다양한 강입자 모형들을 역동적으로 기술해 줄 수 있는 수학적 형식론이었다. 그것들의 다른 것에로의 끊임없는 변형은 다른 입자의 교환을 통한 서로의 상호 작용, 둘 혹은 그 이상의 강입자들의 '속박 상태'의 형성, 또 여러가지 입자 배합으로의 붕괴 등을 기술할 수 있어야했다. 종종 '입자반응'이라고 일반적 명칭이 붙여진 이러한 모든 작용들은 강한 상호 작용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에 강입자의 양자-상대론적 모델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강입자와 그것들의 상호 작용을 묘사하는 데 가장 알맞은 것으로 보이는 구조체계는 'S행렬 이론'이다. 기본 개념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1943년에 제기되었고 그후 복잡한 수학 구조로 발전되었다. S행렬은 강입자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반응에 관한 확률의 집합이다. 행렬이라 부르는 그러한 종류의 무한한 배열속에 정렬된 가능한 강입자 반응들의 전체 집단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S자는 소립자 반작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충돌 ㅡ혹은 산란 ㅡ작용을 지칭하는 명칭인 '산란행렬(scattering matrix)'을 계승한 것이다.
물론 실제에 있어서는 강입자 작용들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몇몇 특별한 반응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S행렬이 아니라 단지 연구중인 작용에 관계되는 그 부분들의 행렬 혹은 '요소들'만을 취급한다.
S행렬 이론에서 중요한 새로운 개념은 강조점을 대상물로부터 사건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그 기본 관심이 입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반응에 있다는 것이다. 대상물로부터 사건으로의 전이는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 둘 모두에 의하여 요구되고 있다. 아원자 입자가 고립된 어떤 하나의 대상물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건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시키는 어떠한 발생 혹은 사건인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는 세계를 대상물들의 여러가지 그룹으로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연결관계의 그룹으로 세계를 나눈다. ...식별될 수 있는 것은 어떤 현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관계의 모습이다. ... 따라서 세계는 사건들의 복잡한 조합으로서 나타나며 그 안에서 다른 종류의 연결 관계들이 서로 엇갈리거나 겹쳐지거나 결합하고, 이렇게 하여 천체의 구조를 결정짓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자와 동양의 신비가는 양편 다, 변화와 전환의 세계에 있어서 일체의 현상이 역동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이러한 상호 관계를 우주적 법칙, 곧 업(業, karma)의 율법으로 보고 있지만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건들의 우주적 망 속에 들어 있는 어떤 특별한 모형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편 운동과 변화를 역시 강조하는 중국 철학은 도의 우주적 유동 가운데에서 연속적으로 형성되었다가 다시 이산하는 역동적인 모형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왔다. <역경>, 즉 <변역의 서>에서 이러한 모형들은 이른바 육효라는 원형적 상징의 체계로 다듬어져 왔다.
<역경>에서 그 모형들의 기본적 배열 원리는 음과 양이라는 대극의 상호 작용이다. 양은 외줄로 된 선(ㅡ)으로 표시되고 음은 갈라진 선(ㅡ ㅡ)으로 표시되며 여섯 효의 전체계는 자연히 이 두선에 의해 형성된다. 그것들을 쌍으로 묶음으로써 네 개의 배열이 얻어진다.
그리고 각각에 세 번째 선을 덧붙임으로써 여덟 개의 삼효괘가 생긴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 삼효괘가 모든 가능한 우주적 그리고 인간적 상황을 나타낸다고 간주되었다. 그것들은 건(乾), 곤(坤), 진(震) 등과 같은 그 기본적 특성을 반영하는 생활로부터 취한 많은 이미지와 연결되었다. 또한 기본 방위와 1년의 사계절과 관련도 되었다.
가능한 조합의 수를 더 늘리기 위해 여덟개의 삼효괘는 그 하나를 다른 것 위에 놓음으로써 한 쌍씩 묶여진다. 이러한 방법으로 64개의 외줄의 선이나 갈라진 선의 6개 선으로 구성된 중괘들이 얻어진다.
64개의 중괘들은 우주적 원형들이며 예언서로서의 <역경>은 이것을 기초로 한다.
<역경>에서 단괘와 중괘는 음과 양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되며, 우주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상황들 속에서 반영되는 도의 모형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들은 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적인 흐름과 변화 속에서의 단계로 보여진다.
변화와 번역에 의해 생성되는 그 역동적인 모형들의 개념으로 인하여 <역경>은 어쩌면 동양사상에서는 S행렬 이론에 가장 가까운 비유가 된다. 두 체계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상물보다는 작용면에 있다.
18. 상호 관통
지금까지 현대 물리학에 의해 제시되어 온 세계관에 관한 우리의 탐구는 물질의 '기본적 구성체'라는 생각이 이미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거듭 보여주었다.
과거에 이런 개념은 물리적 세계를 몇몇 원자들고써 설명할 때는 유용했다. 원자의 구조를 전자에 의해 둘러싸인 몇몇 핵에 의해 설명하고 마침내 핵의 구조는 양성자와 중성자라는 두 개의 핵 '구성요소'로 잘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원자와 핵, 그리고 강입자들이 차례로 '기본적인 입자들(소립자)'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것들 중의 어느것도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떄마다 이러한 입자들은 그것 자체가 복합적인 구조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리하여 물리학자들은 그 다음에 나타날 구성 요소들이 결국에는 물질의 궁극적 성분으로서 그것들 자체를 드러내 주었으면 하고 기대했다.
다른 한편 원자와 아원자 물리학의 이론들은 기본적 입자들의 존재를 점점 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했다. 그 이론들은 운동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그 입자들이 대항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행 작용들이라는 것을 제시하면서 물질의 근본적인 상호 연관성을 드러내 보였다. 이 모든 진전들은 기본적인 구성체라는 단순한 기계론적인 상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복합적인 구조를 더 단순한 구성요소로 분해하여 설명하려는 해묵은 전통은 서양의 사고에 아주 뿌리깊게 박혀 있어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체에 대한 탐구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소립자나 근본적인 장과 같은 기본적인 실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른 입자 물리학파가 있다. 그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상호간에도 그 자체로도 어느 쪽으로나 모순되지 않는 자체 조화를 통해서만 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S행렬 이론과의 관계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부트스트랩(bootstrap:구두꾼)' 가설로 알려져 있다. 이 이론의 주요 주창자는 제프리 추(Geffrey Chew)인데 그는 이 생각을 한편으로는 자연의 일반적인 상호 작용의 철학에로 발전시켜 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S행렬이라는 말로 형식화된 입자들의 특정한 모델을 작성하는 데 그것을 이용하였다.
부트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최종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뉴턴의 우주는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기본적인 실체로부터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으므로 그 이상의 분석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실체들의 집합으로서는 이 세계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부트스트랩 가설이 명백히 표명했을 때까지는 이러한 개념은 자연과학의 모든 이론에 절대적이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있어서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으로 보이게 되었다.
부트스트랩 가설은 물질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법칙이나 등식, 원리 등의 근본적 실체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수백 년 동안 자연과학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어왔던 또 다른 개념을 파기한다.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들이라는 개념은 유대-그리스 도교적 전통에 뿌리 박고 있는 신성한 입법자라는 신앙에서 유래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름과 같이 말하였다.

전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영원한 법칙, 즉 이성이 신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나니.

이러한 자연의 영원하고 신성한 법칙이라는 개념은 서구의 철학과 과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데카르트는 '신이 자연에 부여한 법칙'에 관하여 글을 썼고, 뉴턴은 그의 과학 연구의 최고 목적이 '신에 의하여 자연에 새겨진 법칙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연의 궁극적인 근본 법칙을 발견한다는 것이 뉴턴 이래로 3세기 동안 자연 과학자들의 목적이 되어 온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현재 매우 다른 태도가 전개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기술하는 법칙들을 포함하여 자연 현상에 관한 그들의 이론 모두가 인간 마음의 소산, 즉 실재 그 자체라기보다 실재에 관한 우리의 개념도(conceptual map)의 속성들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적인 도식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과학적 이론과 자연법칙이 그러하듯이 필연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근사적이다.
모든 자연현상은 궁극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때문에 그 중 어느 하나를 설명하려고 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전부 알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을 그토록 성공적으로 만들어 준 거서은 근사치가 가능하다는 발견이다. 만일 우리가 자연에 대한 근사적인 '이해'에 만족한다면 덜 관련된 다른 현상들은 무시하고 현상의 선택된 그룹을 이런 방법으로 기술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현상을 몇몇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할 필요가 없이 근사적 방법으로 자연의 상이한 국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과학적 방법이다. 모든 과학적 이론들과 모델들은 사람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서 근사치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근사치에 포함되어 있는 오차가 종종 아주 작아 그러한 연구방법을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예를 들면 입자 물리학에서 입자들 간의 중력의 상호 작용은 다른 상호 작용보다 등급이 약한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무시된다. 비록 이러한 생략에 의해 초래될 오차는 매우 작지만 중력 상호 작용이 미래에 좀 더 엄밀한 입자 이론들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이론의 불완전성은 일반적으로 그 임의적인 매개변수 혹은 '근본적인 불변수'에서 반영된다. 즉 그 양적 값들이 이론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경험적으로 결정된 뒤에 그 이론에 삽입되어야 한다. 양자론은 전자의 질량에 사용된 값을, 장 이론은 전자의 전하의 크기를, 상대성 이론은 빛의 속도의 크기를 설명할 수 없다. 고전적인 견해에서는 이러한 양들이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자연의 '근본적인 불변수'로서 여겨졌다. 현대적인 견해에서 그것들의 근본적인 불변수로서의 역할이 일시적이며 현 이론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근사적인 이해에 만족한다. 그러나 동양의 신비가들은 근사적이고 '상대적'인 지식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인생 전체의 이해를 위한 '절대적' 지식에 관심을 갖는다 우주의 본질적인 상호 연관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다른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양의 현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설명하는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물의 통일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비지성적인 경험을 체득하는 데에 더욱 흥미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생의 의미, 세계의 기원, 열반(nirvana)의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고귀한 침묵'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부처의 태도다.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과학가 문화에 대한 연구에서 원래 신성한 입접자를 암시하는 자연의 근본 법칙이라는 서구적인 개념이 어떻게 하여 중국의 사상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것이 없는가를 길게 논의하고 있다. 그는 "중국인의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들의 조화로운 협동은 외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권능의 명령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것들이 우주의 모형을 이룩하는 전체 위계 속에 들어있는 한 부분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나오며, 그리하여 그것들은 자체 본성의 내적인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고 했다.
말과 설명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것이 동양 신비주의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다. 우리가 사물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한 업(業)에 의해 속박된다. 우리의 개념의 그물이란 덫에 걸리게 된다. 말과 설명을 넘어서는 것이 곧 업의 속박을 깨뜨리고 해방을 얻는 길이다.
동양 신비주의의 주요 학파들은 우주란 하나의 상호 연관된 전체고, 그 안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결코 더 근본적인 것은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은 다른 모든 부분의 속성으로부터 결정된다는 부트스트랩 철학의 견해와 일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모든 부분들은 다른 모든 부분들을 포함하며 상호 구현에 대한 투사가 진실로 자연에 관한 신비적 체험의 특성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개개에 있어서의 전체, 그리고 전체에 있어서의 개개'라는 개념은 종종 불교 사상의 궁극적인 정점으로 간주되는 대승 불교의 화엄종에서 그 최대의 정교함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부처가 정각을 얻고 나서 깊은 명상에 잠겨 설교했다고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믿고 있는 <화엄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방대한 경전은 지금까지 어떠한 서구의 언어로도 번역된 일이 없는데 '개체라고 하는 완고한 테두리가 녹아 없어지고 유한성의 느낌이 더 이상 우리를 압박하지 않을 때' 깨달은 의식 상태에서 세계가 어떻게 파악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부트스트랩 개념이 과학적 맥락에서 공식화될 때, 그것은 한계가 있고 근사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강한 상호작용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무시함으로써 그 주요한 근사치가 얻어진 것이다. 이러한 강한 상호 작용력은 전자기적인 상호작용보다 거의 100배나 강하며, 약한 상호 작용이나 중력의 상호 작용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그러한 근사치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과학적 부트스트랩은 강하게 상호 작용하는 입자들, 즉 강입자들에게만 유독히 관계하며, 따라서 강입자 부트스트랩이라고 종종 불린다. 이것은 S행렬의 이론체계에서 공식화되었으며, 그 목적은 자체 조화의 필요조건으로부터 독자적으로 강입자들의 모든 속성과 그것들의 상호 작용을 도출해 내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모든 입자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부처의 그것처럼, 그 자체의 법칙들을 갖는 어떤 실재를 기술한다. 강입자 부트스트랩의 경우에 있어서 주요 근본 개념은 입자들을 함께 묶어 주고 있는 힘들이 그것들 스스로가 교차 채널에서 교환되는 입자들이므로 이들 법칙들은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의 법칙이다. 이러한 개념은 어떤 정확한 수학적 의미가 주어질 수는 있지만 뚜렷이 눈앞에 떠오르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특히 부트스트랩 이론의 상대론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4차원적 시공 세계의 직접적 체험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어떻게 하나의 단일한 입자가 다른 모든 입자들을 포함하고 동시에 그것들 각각의 일부분이 되는가를 상상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대승관인 것이다.

하나가 다른 모든 것에 맞대여 놓여 있을 떄 그 하나는 그것들 모두에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서, 또한 동시에 그 자체 속에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이와 유사한 이미지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세계를 모나드(monad)라고 불리는 근본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는데 그 각각의 단자는 전 우주를 비추고 있다. 이것은 그들 대승 불교의 견해 그리고 강입자 부트스트랩과 유사하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에서 다름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질의 각 부분은 초목으로 가득 찬 정원으로서, 그리고 물고기로 가득 찬 연못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초목의 모든 가지와 동물의 모든 종류와 모든 물방울 하나하나가 또한 정원이요, 연못이다.

그러나, 단자들 사이의 실제적 상호 관계에 관한 한 강입자 부트스트랩과의 주요 차이는 단자는 서로간에 상호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창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단지 서로 반영할 뿐이다. 그 반면에 강입자 부트스트랩에서는 대승 불교에서와 같이 그 강조점이 모든 입자들의 상호 작용 또는 '상호 관통'에 있다. 더군다나 부트스트랩 이론과 대승 불교의 물질관은 둘 다 대상을 사건으로서 보는 '시공' 관(space-time view)이며, 그것들 서로 간의 상호 관통은 공간과 시간 역시 상호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맺음말
동양의 종교적 철학들은 추론적인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말로는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무시간적이며 신비적인 인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현대 물리학의 관계는 다른 여러 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결정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체험되어야 한다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물리적 현상 같은 것의 기술에는 유용하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을 다루는 데에는 적절하다. 그리고 또한 기술 공학의 근본으로 매우 성공적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미시적 영역에 있는 물리적 현상의 기술에는 부적당하다. '유기적'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신비가들의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불가분하고 조화된 전체의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 개념에 반대된다. 유기적 세계관은 기계를 조립하거나 인구 과잉의 세계에 있어서 기술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는 유리하지 않다.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가 유기적 우주관 둘 다 정당하며 유효하다. 전자는 과학과 공업에, 후자는 균형있고 충만된 정신 생활에 대해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의 차원들을 넘어서면 기계론적 개념들은 그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신비가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들과 매우 흡사한 유기적 개념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논의의 주제가 되어왔던 현대 물리학의 본질적인 경험이다.
물리학자들과 신비가들의 견해 사이의 유사성은 서로 다른 연구방법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다른 유사성들을 상기할 때, 한층 더 그럴듯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방법은 철두철미 경험적이다. 물리학자는 그의 지식을 실험으로부터 유도해 내고, 신비가는 명상적 통찰로부터 끌어낸다. 둘 다 관찰 행위인데, 이 두 영역에 있어서 이러한 관찰의 대상은 다르다. 신비가는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다양한 관계에서 그의 의식을 탐구하는데, 거기에는 마음의 현신으로서의 육체를 포함한다. 사실 육체의 경험은 많은 동양의 전통에서 강조되며, 세계에 대한 신비적 체험의 관건으로서 종종 이해된다. 우리가 건강할 때 우리의 몸속 각 기관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한 전체로서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이 안녕과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 유사한 방법으로, 신비가는 신체의 연장으로서 경험되는 전우주의 전체성을 자각한다.
신비가와는 대조적으로 물리학자는 사물의 본질적 성질에 관한 그의 탐구를 물질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서 시작한다. 물질의 심층 영역을 꿰뚫고 들어가면서 그는 모든 사물과 사건의 본질적 통일성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는 또한 그 자신과 그의 의식이 이 통일성의 불가결한 일부분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신비가와 물리학자는 하나는 내적 영역으로부터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외적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견해들 사이의 조화는, 외부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이 내부의 실재인 아트만과 일치한다는 ㅡ범아 일여(梵我一如)ㅡ고대 인도의 지혜를 확인해 준다.
과학과 신비주의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물리학자는 추론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신비가는 직관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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