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주석에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에 필시 구합苟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에 실이 없다 하였습니다.
구합은 정견없이 남을 추수함이며 무실은 선자의 편이든 불선자의 편이든 자기의 입장을 갖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견이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없고 그 역도 또한 참이고 보면 논어의 이 다이얼로그가 우리에게 유별난 의미를 갖는 까닭은,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더욱 중요하게 파당성에 대한 조명과 지지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효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정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精髓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처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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