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시간이란 유수流水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實在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00살, 300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미래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나는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새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미래 담론의 기본 구도는 두 가지 관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채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 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 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 있다. 밀레이넘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 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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