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관중의 10분의 1이 제대로 구경을 못하게 하는 극장을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엉터리라고 부른다. 만일 잔치를 치르면서 손님의 10분의 9에게 대접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음식을 적게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바보 또는 그보다 더 심한 말로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빈곤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기독교리를 설교하는 성직자마저 우주의 위대한 설계자께서, 오묘한 자연을 만드는 능력을 갖추신 그분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볼품없이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그분이 피조물인 대다수의 인간이 결핍과 고통과 잔인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정신력의 발전을 위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래서 전 생애를 단순한 생존을 위해 바쳐야 하는 존재로 운명 지워졌다고 한다.(사회문제)
생명은 생명유지에 필요한 힘을 소진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우주에 태어났고, 우리가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 인간은, 육체만을 본다면 물질이 일시적으로 취하는 한 형태이며, 운동이 변화하는 한 방식이다. 물질은 남고 힘은 지속된다. 줄어든 것도 없고 약해진 것도 없다. 이런 관계로 인구에 대한 지구의 한계는 공간의 한계뿐이다.(진보와 빈곤)
자연이 척박한 곳에서 20명이 일하면,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 한 사람이 생산하는 부의 20배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인구가 조밀할수록 노동의 분업이 더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생산과 분배의 경제성이 더 높아진다. 즉 멜서스의 학설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인구가 증가한다면, 문명 상태가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부의 상대적 생산량도 많고 필요물자를 조달하기도 쉽다.(진보와 빈곤)
토지소유자라는 사람도 물론 자신의 노동이나 자본으로 생산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이기 떄문에 기여한다거나 토지 소유권을 통해 기여한다고 누가 생각한다면 마치 자신이 달을 소유하기 때문에 달빛이 환하다고 믿는 것처럼 웃기는 일이다.(정치경제학)
학자, 철학자, 교사, 예술가, 시인, 성직자는 부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부를 생산하는 목적이 되는 효용과 만족을 생산한다. 그뿐 아니라 지식을 획득하고 전파하며 정신력을 자극하고 도덕심을 높임으로써 부의 생산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연료만 부으면 그만큼 동력을 내는 엔진이 아니다. 고된 일을 하는 선원에게는 좋은 노래가 근육과 같으며, 훌륭한 군가는 전투에서 총검과 같은 작용을 한다. 기분 좋은 웃음, 고귀한 생각, 조화에 대한 인식은 물질을 다루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심신의 노력을 통해서 부의 총량을 증가시키거나 인간의 지식을 늘리거나 인간의 삶을 더 높이 더 충실하게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넓은 의미의 생산자요, 일하는 자요, 노동자이며, 임금을 정직하게 버는 사람이다.(보호무역과 자유무역)
정부 공채는 자본이 아니며 자본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정부가 공채로 조성한 자본이 비생산적으로 소모되어 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대포의 화염으로 사라졌고, 전함으로 소비되었고, 행진, 제식훈련, 살상, 파괴를 하는 군인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되었다고 하자. 공채는 이미 파괴된 자본을 대표할 수 없다. 이런 공채는 자본을 전혀 대표하지 않는다. 공채는 정부가 어느 시기에 가서 국민이 당시에 축적한 것 중에서 조세로 징수해 공채 금액만큼 변제한다. 또한 공채는 변제기까지 공채 금액에 해당하는 자본을 실제로 소유한다고 할 때,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얻을 수 있는 증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재원을 조달해 수시로 보상하는 엄숙한 선언일 뿐이다. 현대 국가에서 국민의 생산물 중에서 엄청난 액수를 떼어 정부 부채에 대한 이자로 지불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이 생산한 것도 아니고 자본의 증가분도 아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자가 아니고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부과하는 조세라고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임금도 줄고 진정한 의미의 이자도 줄어든다.(진보와 빈곤)
부는 노동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다. 노동이 인간의 욕루를 직접 만족시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생산적 노동, 즉 원료에 가치를 부여하는 노동에서는 부가 목적이자 결과이다. 자연은 인간의 노동 없이 부가 될 수 없으며, 노동을 하더라도 욕구를 만족시키는 힘을 갖는 유형적인 생산물이 나오지 않으면 부가 되지 않는다.(진보와 빈곤)
사실 부가 축적될 수 있는 양은 아주 조금밖에 안 되며, 사회도 대부분의 개인과 마찬가지로 손에서 입으로 먹고 산다. 몇가지 사소한 형태를 제외하면 부를 많이 축적할 수 없다. 우주의 물질은 노동에 따라 원하는 형태로 변했다가 끊임없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형태의 부는 몇시간, 어떤 것은 며칠, 어떤 것은 몇달, 어떤 것은 몇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형태의 부는 드물다. 매우 유용하고 수명이 긴 형태, 예를 들어 선박, 가옥, 철도, 기계류 따위의 부를 보더라도 노동을 통해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못 쓰게 된다. 어느 사회에 노동이 중단되면, 마치 분수로 흘러가는 물을 잠그는 것처럼 부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노동이 다시 시작되면 부는 금방 되살아난다. 축적된 부가 사회 유기체에 대해 하는 역할은 축적된 영양이 신체 유기체에 대해 하는 역할과 같다. 얼마간 축적된 부는 필요하며, 긴급 상황에 이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세대가 만든 부는 현재 세대의 소비를 감당할 수 없다. 마치 작년에 먹은 음식이 현재 힘을 공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진보와 빈곤)
노동이 생산한 것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경제적으로 부의 범주에 속한다.(정치경제학)
인간 행동의 기본 원리는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정치경제학에서 갖는 뜻은 물리학에서 중력의 법칙이 갖는 뜻과 같다. 이 원리와 자유의 조건 아래에서 타인을 고용하려면 임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할까? 분명히 그 임금은 노동자가 자가노동을 할 때의 소득과 같을 것이다.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자가노동의 소득 이상을 지불할 리가 없고, 때로는 노동자에게 작업 전환에 드는 비용을 지불할 수는 있겠지만, 노동자도 그 이하를 받을 리가 없다. 어느 노동자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경쟁을 통해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 고용주가 이보다 더 낮은 임금을 제시한다면 노동자는 자가노동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므로 아무도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용주가 아무리 적게 주려고 해도 또 노동자가 아무리 많이 받으려고 해도 임금은 자가노동의 가치에 따라 정해진다. 일시적으로 임금이 이 수준을 초과하거나 미달한다고 해도 그 수준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곧 발생한다.(진보와 빈곤)
인간이 창조주의 허락을 받아 평등하게 이 땅에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하사품을 평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또한 자연이 공평하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도 갖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권리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이것은 또 모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취득하는 권리이며, 생존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동일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약될 수 있는 권리이다. 자연은 상속 무제한 토지소유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합의해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살 수는 없다. 인간은 지구에 임시로 세 들어 가는 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후세대가 세 들어 살 권리를 우리가 대신 결정하다니, 도대체 우리가 지구를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진보와 빈곤)
잔치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고 해서 연회석의 의자를 돌려 놓고서 자기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할 권리가 있는가? 극장에 제일 먼저 표를 내고 입장했다고 해서 극장 문을 닫아 걸고 자기 혼자서만 공연을 관림할 권리가 있는가? 기차에 가장 먼저 탔다고 해서 자기 짐을 온 좌석에 흩어 놓고 뒤에 타는 승객을 세워 둘 권리가 있는가?(진보와 빈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을 가로질러 이동할 때 굶주림에 시달리자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그 양이 충분해 모든 사람이 먹고 구제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막이 사유토지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1평방 마일을, 또 한 사람은 20평방 마일을, 또 한 사람은 100평방 마일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발을 붙일 땅 조각 하나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만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다수 백성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한 양의 만나를 내리셨지만 만나는 토지 소유자의 사유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토지 소유자는 사람들을 고용해 만나를 끌어 모아 쌓아 두고 배고픈 동포에게 팔았을 겁니다. 만나를 사고파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드디어 몸에 걸치 옷가지마저 내놓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만나와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닥나면 백성들은 굶주리고, 토지 소유자는 만나 더미가 수북이 쌓이자 만나가 과잉생산 되었다고 불평할 것입니다. 만나의 양이 풍족한데도 굶주리는 사람이 존재하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빈곤이라는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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