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의 부상>
동종선호(homophily)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인간의 오래된 특징. 인간은 일정 수준까지는 인종, 나이, 성별, 계층, 심지어 정치적 견해까지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과 교류하도록 설계된 듯 보인다. 현재 소셜 미디어는 대대적인 붐을 이루고 있고(전 세계 사용자가 약 25억 명에 달하고 점점 증가추세), 사람들의 동종선호는 한층 더 심각.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은 알고리즘의 지시에 따라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용자들이 점점 더 많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당연히 반대 의견은 차단하는 효과가 일어남. 동종선호와 소셜 미디어의 상호작용은 이중적인 결과를 초래. 문화산업들이 점점 더 소수의 초대형 흥행작들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동종선호는 문화의 동질화에 기여. 반면 동종선화의 결과로 생겨난 반대 의견 차단 효과는 정치적 토론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극단주의를 낳을 수 있다. 동종선호의 결과는 역설적. 유사성 혹은 동질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가 인간을 점점 더 비슷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의 차이를 더 고착시키고 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21세기 초반, 영국에서 CCTV의 녹화범위를 놓고 큰 논란. 런던 시민 한 사람이 하루에 300차례까지 카메라에 잡힌다는 뉴스 보도는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림. 이 보도는 과장된 것으로 밝혀지고 노출 횟수는 겨우 70번에 불과. 그러나 숫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공공장소에 머무는 동안 CCTV에 의해 감시받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75년 <감시와 처벌>을 출간. 1757년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붙잡힌 하인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엥이 군중앞에서 잔인학게 고문당하고 능지처참하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 이어지는 1840년대 프랑스 메트레이 비행소년시설의 어린 죄수들의 감내해야 했던 규율은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
그러나 푸코가 보기에 1757년과 1840년에 일어난 일은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권력의 이동에 불과. 직접적인 폭력으로 국민을 통치했던 왕의 절대 권력이 ‘파놉티콘’으로 대표되는, 좀 더 은근한 형태의 권력으로 바뀌었을 뿐. 마음대로 인간의 사지를 찢을 수 있었던 권력은 이제 대중의 마음을 조종해 순응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의 형태로 모습만 바꾼 것. 왕이 군중 앞에서 죄수의 신체를 망가뜨렸다면, ‘인간적인’ 감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수의 ‘영혼’을 파괴.
더 심각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감옥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 푸코는 메트레이 비행소년시설의 엄격한 규율이 당시 학교나 군대에서 싹트고 있던 획일적인 규칙과 훈련을 통해 확산되었다고 주장. 조직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구성원들을 손쉽게 통제하려는 분위기가 보편화된 것.
간접적인 힘을 행사하는 권력자들의 최종 목적은 사람들을 표준화시키는 것. 파놉티콘의 죄수들, 교실 책상에 앉은 학생들, 행진 중인 군인들은 마치 하나처럼 움직임. 말, 행동, 자세, 움직임 등을 규정한 규칙, 즉 표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처벌. 이러한 징계 규정들과 발맞춰 생겨난 새로운 학문 분야인 사회학, 범죄학, 정신의학 등은 이상적인 행동과 마음가짐에 대한 기준을 제시. 이 학문들은 획일적인 기준, 즉 사회적 표준이라는 것을 만들고는 벗어나는 행위들을 성도착이나 상습범죄와 같은 일탈로 못박았음.
어린 시절은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다양한 기준에 따라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평가받음.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받거나, 정신과 의사에게 신경질적 성격에 대해 상담 받거나, 내과 의사에게 해로운 식습관을 빠짐없이 고백하고, 각종 시험에 응시하고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평균’과 ‘정상’에 가까운지 끊임없이 확인.
명령은 원하는 바를 강요하지만, 권력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행동하게끔 조종.
<해킹과 권력의 함수>
정복이나 지배의 관점에서 보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해킹의 핵심 개념. 해킹이란 설계자의 의지에 반해 시스템의 통제권을 빼앗는 행위. 본래 시스템은 통제권을 가진 사람에게만 절대적인 권한을 허락하는데, 예외적으로 해커들은 해킹한 사이트 내에서 평범한 인터넷 사용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중력의 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현대인은 주변을 둘러싼 소프트웨어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커들은 이러한 체계가 이 시대의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강력한 권력 구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금을 포함한 사유재산부터 공적, 사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정보를 은밀하면서도 꼼꼼하게 분류.
디지털 세상에서는 무지는 곧 무능력. 정보가 그 자체로 권력이 되는 까닭은 단순히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 태도를 포함한 규칙 자체가 정보를 가진 자에 의해 재단되기 때문. 당신의 권력을 빼앗은 자들에게 맞서고 싶다면, 일단은 적절한 질문과 경고, 정보에서 시작해야 함.
<권력을 빼고 도덕을 논한다는 것>
“정의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질문은 집어치워.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의 말을 반박하며 인기를 얻으려는 수작도 그만두고. 당신도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잖아. 당신의 대답을 들려줘.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들려달란 말이야.”
소크라테스는 요청을 거부했지만, 트라시마코스는 그에게 정의의 진정한 본질을 깨우쳐주겠다고 제안. 소크라테스의 동료인 글라우콘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트라시마코스는 당당히 선언한다.
“정의는 강한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에 대한 깨달음은 도덕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주장들과 획일화된 더덕관을 향한 반대 의견, 도덕 시스템의 진화와 변천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찾아왔다. 나는 마침내 객관적이고 더덕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 도덕은 객관적 진실이라기보다 인간이 사회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발명된 일종의 문화기술.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도덕의 탐구는 하나의 정답만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형태를 벗어날 수밖에 없음. 애초에 이 논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 대신 우리는 사회 모든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따라야 할 규칙을 정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해야 함. ‘진실을 추구하는 논쟁’에서 ‘규칙을 정하는 협상’으로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
대부분의 규범들은 직간접적으로 권력자들에게 혜택. 종교 지도자에게 헌금 받을 권리를 주고, 카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 면책 특원을 주고, 봉건 영주에게 농노들을 지배할 권리를 주고, 남성들에게 가부장적 권리를 휘두를 권리를 주고, 근대적 자본가에게 노동자들을 기계 부품처럼 소모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할 권리를 주는 것이 바로 도덕규범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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