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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타타르인의 사막 by 디노 부차티 (강추☆)

by hoyony 2021. 5. 18.

문학동네, 2021.02.26.

그때껏 그는 아무 걱정 없는 청년기를 보내왔다. 어린 시절부터 영원할 것만 같은 어떤 길이었다. 그 길에서는 세월이 천천히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가기 때문에 아무도 그 출발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걷는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고, 어느 누구도 뒤에서 떠밀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함께 길을 걷는 친구들 역시 장난을 치느라 자주 멈춰서며 아무런 생각 없이 그 길을 따른다. 집에서, 대문에서 어른들은 다정하게 인사하고, 활짝 핀 미소로 지평선을 가리킨다. 그래서 심장은 영웅적이고 관대한 야망들로 뛰기 시작한다. 우리보다 앞서 기다리고 있는 놀랍고 환상적인 일들을 미리 맛본다. 아직 그 일들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것에 다다르리라는 것은 틀림없으며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신뢰에 찬 기다림 속에서 걸음은 계속된다. 하루하루 날은 길고 평온하다. 태양은 다시 하늘에서 높이 빛나고, 결코 석양으로 저물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러면 등 뒤에, 돌아갈 길이 막힌 채 빗장이 질린 철문이 보인다. 그 순간 무언가 변했음을 느낀다. 태양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빠르게 이동한다. 아, 태양은 벌써 지평선 경계 쪽으로 기울어서 그것을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 넓고 푸른 하늘에서 구름은 더 이상 고요히 흐르지 않고 서로 포개어지며 도망쳐간다. 구름은 너무나 급히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시간이 흘러 어느 날 길은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드로고는 요새에 남기로 결정했다. 어떤 욕망에 이끌린 결정이었지만 단순히 비장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순간 그는 어떤 고귀한 일을 해냈다고 믿으며 자신한테 생각지도 못한 선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다만 겨우 몇 달만 지나도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며 요새를 떠나지 못하도록 그의 발목을 붙들던 비참한 것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나팔소기라 울리고 군가가 들리고 북쪽에서 전행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오고 했더라면, 만약 그것뿐이었더라면, 드로고는 처음의 결심대로 요새를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이미 무감각하게 길든 습관들이, 군인으로서의 다소 과한 자부심과 이제 일상이 된 성벽을 향한 가족 같은 애정이 자리잡은 터였다. 단조로운 리듬으로 이어진 군복무는 넉 달 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유혹하고 남았다.
처음에는 견디기 힘든 고역 같던 수비교대 근무도 어느새 그에게는 습관이 되었다. 그는 요새의 규칙과 말하는 방식은 물론, 상관들의 압박과 보루의 지형, 경비병들의 위치, 바람이 불지 않는 사각지대, 그리고 나팔 신호까지 조금씩 훌륭하게 소화해나갔다. 병사들과 부사관들의 사기가 상승하는 걸 보면서 맡은 소임의 지휘권자로서 특별한 기쁨을 얻기도 했다. 심지어 트롱크까지도 드로고가 얼마나 진지하고 신중한지 알아차렸고, 그에게 거의 충성하다시피 했다.
또한 그가 이제 잘 알고 지내는 동료들과의 생활 역시 익숙한 습관이 되었다. 비록 가장 세밀한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저녁마다 그들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도시의 소식은 그들에게 끝없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편안한 식당과 밤낮으로 늘 켜놓는 대기실의 아늑한 벽난로, 그곳의 유능한 당번병인 제로니모의 친절한 태도 역시 익숙한 습관이 되었다. 제로니모 또한 서서히 드로고의 특별한 열망을 깨달아갔다. 가끔 모렐 중위와 멀지 않은 지역을 돌아다니는 가벼운 여행도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말을 타고 두 시간 정도면 좁은 골짜기를 가로지르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는 여관도 한 곳 알게 되었다. 새로운 얼굴들을 볼 수 있고, 성대한 식사가 마련되거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젊은 여인들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그의 방, 조용하고 평온한 밤의 독서, 침대에서 보면 터키인 머리처럼 보이는 천장 틈새, 저수조에서 나는 물 빠지는 소리, 시간이 흐르면서 친숙해진 것들, 그의 몸에 눌려 푹 꺼지 매트리스, 처음에는 그토록 꺼려졌지만 지금은 편안하게 마련된 이불들, 석유램프를 끄거나 책상에 책을 놓아두기 위해 거리에 딱 맞게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움직임, 이 모든 것이 드로고에게는 습관이 되었다. 이제 그는 아침에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할 때면 어떻게 위치를 잡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마치 세숫대야에 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붓거나 고장난 서랍 자물쇠를 열 때 열쇠를 살짝 아래로 구부려가며 돌리듯이, 그는 알맞은 각도에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게 했다. 우기에 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평소 창문 안으로 달빛이 비쳐드는 지점과 시간에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그 움직임, 매일 밤 정확히 한시 반에 아랫방에서 들려오는 니콜로시 중령의 뒤척임도 그에게는 습관이 되었다.
이 모든 일상이 지금은 그의 것이 되었고, 그것들을 포기하는 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한데 이제 드로고는 요새를 떠나려면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하는지, 또 요새의 삶이 하루하루 별반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얼마나 어지러운 속도로 삼키게 될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어제는 그제와 똑같았고, 그는 그날들을 더는 구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흘 전 일이든 열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든 똑같이 까마득하게 여겨질 터였다. 그렇게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도피하고 있었다.
고귀하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예감이ㅡ아니면 단순히 희망이었을까ㅡ그를 요새에 남게 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그저 보류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결국 예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많았다. 어떤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여인들, 먼 곳에 있는 사랑스러운 그 존재들도 삶의 평범한 순리에 따라 확실히 약속된 행복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벌써 청춘은 저물어가기 시작했건만 삶은 그에게 지칠 줄 모르는 집요한 환영으로 나타났다. 드로고는 시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신들이 그렇듯이, 눈앞에 수백 년의 젊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불행일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단순하고 평범한 삶, 인간다운 짧은 청춘, 고통스러운 은총의 소유자였으니, 모두 열 손가락으로 세기에 충분하고 미처 알기도 전에 사라져버릴 것들이었다. 앞에 놓인 시간이라니! 그는 생각했다. 듣기로는 어느 시점에서 죽음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고들 하지만, 익히 잘 알려진 이 부조리한 죽음은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과거에 그의 걸음소리는 마치 정해진 어떤 신호처럼 어머니를 잠에서 깨우곤 했다. 밤중에 들리는 다른 소리는, 그게 아무리 큰 소음이라 해도 그녀를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도로를 지나는 마차소리도,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도, 개가 짖는 소리나 부엉이 우는 소리도, 덧문이 부딪치는 소리나 처마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비가 오는 소리나 가구가 삐걱거리는 소리도 어머니를 깨울 수 없었다. 어머니는 오직 그의 발소리에만 깨어났는데, 그 소리가 대단히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오직 그가 아들이라는 사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아니었다. 그가 전과 똑같은 목소리와 어머니가 잘 아는 바로 그 발소리를 내며 인사를 건넸지만, 멀어져가는 마차소리 외에는 아무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떨어져 있던 시간과 거리가 그 둘 사이에 서서히 이별의 장막을 드리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홀로 있을 때 무언가를 믿기가 어려워진다. 누군가와 그 얘기를 나눌 수도 없게 된다. 바로 그 무렵,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상관없이 인간이란 항상 멀리 있음을 드로고는 깨달았다. 누군가 고통을 겪는다면 그건 온전히 그의 몫일 뿐, 그 고통의 작은 부분이라도 다른 누군가 대신 짊어져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 괴로워할 때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 해도 그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지는 않으며, 바로 여기서 삶이 고독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지지 않았다. 만일 다시 말을 탄다면, 계단을 뛰어오른다면, 아주 훌륭하게 해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문제는 그가 도무지 더는 그럴 의욕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 식사 후에 돌투성이 평지를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보다는 햇빛을 쬐며 나른하게 있기를 더 좋아한단 사실이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오직 이것이 지나간 세월을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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