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도둑을 잡아라>
오늘날 우리는 관심경제(attention economy) 시대를 살고 있다. rhkstalrudwp에서 가장 값진 상품은 인터넷 사용자들의 시선과 뇌를 사로잡는데, 광고주들은 이 타깃 고객에게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접근하기 위해 광고비를 지불한다.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한데도,우리는 이같은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좁은 범위로 한정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소셜 미디어가 갖는 센세이셔널리즘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존 언론이 겪게 될 일만 걱정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온라인상의 오락거리를 비교적 사소한 장애물 정도로만 여긴다. 하지만 진짜 위협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영위하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다.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 윌리엄 제임스는 “내 경험은 내가 관심을 쏟기로 동의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달리 말하면, 관심이 곧 인생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한 사람의 관심 범위를 채우는 요소들의 총합이다.
문제는 패배주의다. 실제로 개개인이 의지를 다지고 실력을 길러 관심경제의 정보 수집가들에 맞서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패배주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반대편에 가담한 세력이 훨씬 막강하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강한 집중력은 타고난다면서 “집중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연습하거나 훈련해도 높은 수준의 집중력을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한정된 시간만 지구상에 머물 수 있다. 그 시간 동안 우리의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결국 인생을 결정한다. 우리는 의미 있는 관계와 올바른 일에 대한 몰입, 정신을 확장하는 경험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다. 반대로 수박이 터지는 광경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도 있다. 그 선택은 온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시간은 왜 늘 부족할까>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늘고 있다. 1965년 이후로 아버지의 여유 시간은 거의 세 배가 늘었다. 어머니의 시간도 늘었다. 요즘 어머니들은 1960년대 어머니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자녀와 보낸다. 이들 연구는 오늘날 다수 부모가 항상 시간의 압박을 느낀다는 사실도 함께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시간이란 사회적 독립체(social entity)이므로 어느 정도는 항상 불일치가 있기 마련이다.
20세기는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등의 백색가전 덕분에 집안일을 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크게 줄었다. 스마트폰과 이메일 때문에 하루가 짧아졌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압박감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실질적인 변화는 분명 있다. 제도화된 일과가 사라졌다는 점, 기계가 원인은 아니더라도 그것으로 일상 활동의 해체가 빨라졌다는 점 등이 그 변화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더 많은 협의와 결정이 필요해졌다. 근본적으로는 일과 가정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오늘날 노동 시간은 조상들이 살던 시대와 같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집에서도 일하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카페에서 일하며, 여행 중에 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직장과 가정생활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 근무 시간이 지났는데도 퇴근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항상 해야할 일이 있다고 느끼고, 몇 분 정도는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이 여가에 침투하면 여가를 즐기기 어려다. 시간을 절약해주는 가전제품이 있어도 집안일이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
반면 빅토리아 시대 신사들에게 바쁘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마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이 바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지체 높은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언이 100년전에 <유한계급론>에서 설명한 것처럼, 상층계급은 과시적 여가(conspicuous leisure)를 즐겼다. 당시 노동은 열등함의 표시였다. 오늘날은 그 반대이다. 주로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바쁘게 일하고, 집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이 명성을 얻는다. 분주하고 아슬아슬한 삶은 성공했다는 표시이자 명예로운 훈장이다.
일과 가정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고, 사생활을 짓누르는 막대한 부담을 덜어내야 한다. 다소 반복적인 생활과 질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은 각각의 ‘지금’들의 총합이다>
만약 시간이란 말로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온갖 일을 정의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없었을 때는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이때의 시간이란 기억을 의미한다. 만약 기억이 없다면 그런 종류의 시간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란 말로 단순히 사건의 발생을 셈하거나 시계바늘의 위치를 지칭한다면, 시간은 분명히 인류 이전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시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핵심은 시간이 단일한 단위 개념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시간의 개념은 다층적이다. 우리가 우주의 일반적 양상을 더 많이 연구할수록 일반적 속성은 줄어든다.
전 세계적인 ‘지금’을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말은 우리가 현실에서, 우주에서 공통적인 ‘지금’이 흘러간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는 각각의 ‘지금’들의 총합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신의 ‘지금’, 나의 ‘지금’이 있어서 우리가 의사소통할 수는 있지만 그러자면 시간이 걸린다. 우주에서의 시간성이란 이런 각각의 시간성을 이어붙인 조각보와 비슷하고, 전 우주에서의 보편적인 현재란 무의미하다.
시간은 우리에게 감정적인 비용을 요구한다. 우리가 언젠가 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대상을 잃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계속 무언가를 얻고 또 잃어 가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이다. 불교는 무상을 받아들이는 데 따른 어려움이 우리 슬품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시간은 정서적인 비용을 요구한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키에르케고르는 진정한 예술가란 그릴 만한 것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것의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반 고흐는 구두를 그렸고, 파블로 네루다는 소금에 관한 시를 써서 평범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런 생각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했다. “진정한 탐험은 새로운 땅을 찾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얻는 일이다.”
<내일을 위해 여전히 알람을 맞추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숙소를 떠나 집으로 가는 여행자처럼 행동하다가도, 숙소가 편하게 느껴지면 거기에 남기로 한다. 그럼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숙소는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거쳐 가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리를 소유하지 않으며, 잠시 머무르다 다음 사람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여행자에 불과하다. 세네카는 우리에게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사는 동안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가 보기에 시간은 한정적이고, 자신이 죽는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인생을 의미 있게 살게 된다. 그는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는 대단히 어리석다. 사람들은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작고 값싼 물건을 빌릴 때는 고마워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조차도 갚을 수 없는 빚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만약 아무것도 지나오지 않았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는다면 미래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아무것도 없다면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가지 시간, 다시 말해서 이미 지나가버렸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시간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현재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과거로 흘러가지 않은 채 쭉 현재로만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현재가 시간에 포함되는 것은 과거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존재가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려는 성향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 불멸의 시간>
그가 온갖 일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시간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젊은 시절의 순수한 멜로디가 담긴 표현 수단은 파괴되었고, 말년의 성숙함이 농익으리라 생각했던 충만한 평온함은 도둑맞았다. 그의 젊은 시간과 불멸의 시간을 빼앗아간 주범은 수천 가지 사건과 사고, 의무로 점철된 매일의 일상이었다. 그러한 일상 뒤에는 죽음이라는 훨씬 더 위협적인 도둑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 죽음은 작은 징후들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남은 생을 매일 하루씩 없애고 있다. 이러한 나날은 하늘에서 거대한 죽음의 손이 내려와 그에게 더 이상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매 순간 ‘나’라는 존재는 시간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의무에 매달려 살아간다. 이처럼 절망적인 사람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지 않았던, 죽음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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