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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사람에 대한 예의 by 권석천

by hoyony 2021. 10. 17.

 

시시한 인생, 인간마저 시시해지면

죽음에도 돈이 있다. 카톡 대화 하나하나가 개인적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자살임을 말해주고 있다. 극단적 선택 앞에서 서로의 가난을 털어놓으며 동지애를 나누는 모습이 이토록 짠할 수가 없다. 판결문은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된 피고인들이 전혀 일면일식조차 없던 상태임에도 솔직하고 진지하게 나눈 마지막 대화가 자살에 대한 것이고, 사심 없는 순수한 생의 마지막 호의가 죽음의 동행이라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리라고 했다. 판결문은 사회의 관심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인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판결문 30)

 

사랑은 우릴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이다

작가 정세랑의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은 조금은 이색적인 사랑을 다룬다. 2만 광년을 날아온 외계인, 그것도 몸의 40%가 광물 성분으로 된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한아는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네가 내 여행이다. 너와 만나면서 나는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시공간으로 간다.

사랑은 우릴 어디론가, 어디에든 데려다줄 것이다. 그곳이 태양계 바깥에 있는 행성이든, 사람이란 또 하나의 우주든. 우린 사랑을 통해 지금까지와 다른 존재가 된다. 다른 느낌을 갖게 되고, 다른 마음을 품게 되고,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을 꿈꾸기 어려워진 세상에서 그래도 다른 사랑의 세계를 일주해보라고, 당신에게 권유하는 이유다.

 

편견이라는 미세먼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믿는 것들이 주변의 영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사무실에,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 공기처럼 떠다니는, 크고 작은 편견의 미세먼지들이 뭉치고 뭉쳐서 내 가치관이 되고, 신념이 된 것은 아닐까. 그 가치관과 신념이 얼마나 균형감각이 있고, 상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악이 승리하기 위한 필요조건

우리는 선에게서 배워야 한다. 침묵하면 그 다음은 내 차례란 것을. 내가 침묵하면 나 자신도 꼼짝없이 금 밟은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당신과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진짜 금 안 밟았어. 내가 다 봤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왕따당하고 마녀사냥하는 이를 위해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변호한 적이 있는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할 자신이 있는가.

혹시 내가 다른 이들을 향해 금 밟았어!”를 합창하고 있지는 않는가. “무슨 냄새 안 나느냐며 코를 막고 있진 않은가. 이렇게 화살표가 우리 안을 향할 때 물음은 완벽해진다. 집단 따돌림과 마녀사냥은 동조자들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조자들은 대개 착하고 평범하게 생긴 얼굴들이었다.

 

싸가지 좀 없으면 안 되냐고, 싸가지 있게 말하는

한국의 진보는 대개 착하고 점잖게 행동하려 애쓴다. 별똥별이 하늘을 긋듯 예외적 인물이 한 번씩 출현하는 것 말고는.

,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자. 진보란 가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거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받아들이자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생각이 삶과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 아닌가. 생각은 진보인데 삶과 행동은 남들과 같다면 뭔가 이상한 거 아닌가.

한국의 진보는 대부분 정장 차림이고, 이성애자이고, 윗분들 말씀을 고분고분 따르고, 큰 소리로 싸우려 들지 않는다. 너무도 열심히 기성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고, 그 시스템 안에서 생각으로만 다양성을 추구하려고 한다. 혹시 욕먹을까 봐 어떤 정해진 규범이나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한마디로 유교 문화의 안전한 모기장 안에 얌전히들 있다.

이렇게 평균화된 인성이 평가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소수자들이 설 곳은 없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도 다들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보통 사람들은 목소리 볼륨을 키우지 않으면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없는 자가 큰 소리로 말하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막말이라는 잘 드는 칼이 있지 않은가. 사전을 찾아보면 되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이란 뜻이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은 가려서 해야 한다. 틀린 지적이 아니다. 다만 상황과 맥락을 따지지 않은 채 불문곡직 막말이란 딱지를 붙이면 아무 말도 못 하게 된다. 아무리 존댓말을 쓰더라도 말의 내용이 막말인 때가 있듯 아무리 속되게 말하더라도 말의 내용이 귀중한 때가 있다

생존권이 짓밟히고 인격이 무시되는 노동 현장에서도, 말도 안 되는 정치적 짓거리 앞에서도 막말하지 말라는 것. 그것은 정신적인 폭력 아닐까. ‘어느 상황에도 막말하지 말라는 것, 그게 바로 막말 아닐까. 우린 개성도, 야성도 거세된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들이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건 그렇게라도 자유를 느끼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우릴 소름끼치게 하는 것들

영화에서는 죽는 게, 현실에서는 사는 게 공포입니다. 영화와 현실 중 어느 쪽 공포가 더 클까요? 답은 현실입니다. 영화관은 화살표를 따라 나오면 되지만 현실은 빠져나갈 출구가 없습니다. 영화는 눈을 감으면 되지만 현실은 눈을 감아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똑같은 공포와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의심해보게 하는 것, 낯선 눈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문학이 지닌 힘이라고 믿습니다. 이 글을 읽는 작가, 작가 지망생, 그리고 한국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께 부탁드립니다. 때로는 우릴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눈을 돌려 우릴 소름 끼치게 하는 것들을 바라보기를. 곤히 잠든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작품을 쓰고 읽어주기를. 그리하여, 강철로 된 방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작은 희망의 느낌들을 떠올려주기를.

 

스스로 착취하라 말하는 시대에 산다는 것

사장님, 회장님들은 말한다. “생존 경쟁의 시장에서 널 살아 남게 하는 건 오직 실력뿐이다. 뭐 하나라도 비교 우위에 있는 사람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계속해서 도태될 것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성과로 우릴 설득하라.”

그 결과 개인적 자아는 과잉 발달하지만 사회적 자아는 증발된다. 타인을 자신의 엄폐물로 여기고, 피해자를 패배자라 비웃고, 이기심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와 내 가족만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로 넘쳐난다. 이런 세상에선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초등학교 입학한 때부터 퇴직자가 될 때까지 자기 안의 것을 파먹다 생을 마친다. 나무에 달라붙어 죽어라 울어대다 빈껍데기만 남고 마는 매미들처럼.

각자도생의 이념은 개인주의라는 숙주에서 자란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주의는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와의 균형을 잃으면 모든 책임을 개인화하는 신자유주의, 보수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된다.

 

국가에 대한 맹세가 싫은 이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보라. 내가 1970년대 배웠던 맹세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국게 다짐합니다였다. 2007년 맹세가 바뀌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

조국과 민족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고치고, ‘몸과 마음을 바쳐를 뺏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당신은 국기에 대한 맹세가 가슴에서 우러나는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4.19, 유신, 5.18...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는가. 국민은 대체 언제까지 국가에 충성만 해야 하는가. 국가는 왜 국민에게 충성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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