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은 현대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즐거운 감정이 아닌 기술.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는 배경이 된 세 가지 전제.
첫째,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스러워지는가의 문제. 남자들은 성공해서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려고 하고, 여성은 몸을 가꾸고 치장하여 매력을 갖추는 것 등이 이용됨. 유쾌한 태도, 흥미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는 것. 즉 벗을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기 위한 방법.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경우,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인기와 성적 매력이 뒤섞여있다는 뜻.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혼동하는 것. 합일의 순간은 유쾌하고 격앙된 경험이며,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더욱 촉진되지만, 강렬한 열중, 서로 미쳐버리는 것은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가 아니며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입증할 뿐.
2, 사랑의 이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의 고독과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인간의 실존을 감옥으로 만든다.
분리 경험은 모든 불안의 원천. 분리는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며 무력하다는 것을 의미.
인간의 절실한 욕구는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감이 사라질 때 완전한 고립의 공포를 극복.
원초적 결합에서 벗어날수록, 인류는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려는 욕구도 강렬해졌으며,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 성적 오르가슴은 황홀경에 의해 발생하는 상태 또는 마약 효과와 비슷한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 공동체의 성적 난행 의식은 원시 의식의 일부. 도취 상태가 부족 내 공통 관습으로 행해지는 한, 불안감, 죄책감은 없으며 무당이나 사제에 의해 인정되고 모든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에 미덕으로 수용.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 개인의 자아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 만일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구제. 독재체제는 일치로 이끌어가기 위해 위협과 공포를, 민주국가는 암시와 선전을 이용.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는 달라짐. 자동 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동일성을 의미. 추상적 동일성, 곧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 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
인간은 평균화되고 노동력 또는 사무원이나 관리자의 관료적 힘의 일부가 된다.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일은 관리하는 조직에 의해 지시됨. 조직의 전체적 구조에 의해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지시된 방식에 따라 수행. 오락도 상투적.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에 의해 선택. 휴식역시 일정.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전의 연속물, 사교파티 등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근대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문제 :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 동료, 자연으로부터 소외.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안간ㅇ는 오락의 규격화,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절망을 극복.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개념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참아낼 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것.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성적 행복은 오히려ㅡ심지어 이른바 성의 기교에 대한 지식조차도ㅡ사랑의 결과.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오늘을 살지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대해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다른 사람들의 가공적인 경험에 참여함으로써 대상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든, 사랑의 경험이 현재에서 과거 또는 미래로 옮겨가든, 이와 같이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과 분리감을 완화해주는 마취제로서 작용.
우리의 세속적 생활이 의거하는 원칙은 무관심과 이기주의의 원리. 종교적 문화를 익힌 사람에게는 조력자로서의 아버지가 필요한데, 이를 아버지의 가르침과 원칙을 자기 생활에 받아들이기 시작한 여덟 살 난 어리아이와 비교가능. 현대인은 오히려 세 살 난 어린아이, 곧 아버지가 필요할 때는 아버지를 찾으며 울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놀이를 할 수 있는 한, 전적으로 자기만족을 느끼고 있는 어린아이. 신의 원칙에 따라 생활을 바꾸지 않고 갓난아이처럼 신인동형적 신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세의 종교적 문화보다는 오히려 우상 숭배를 하는 원시부족에 가까움.
4. 사랑의 실천
기술의 실용에 요구되는 4가지.
① 훈련 : 훈련된 방식으로 실행해야 숙달. ‘그럴 기분이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재미있는 취미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 기술에 숙달하기는 불가능.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자기 나름의 것이 아니라 일의 리듬에 의해 그에게 지시된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루 8시간씩 자기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항은 유아적 자기방종의 형태. 게으름을 피우려는 소망은 주로 생활의 규격화에 대한 반발.
② 정신 집중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떠들고 담배 피우고 읽고 마시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불가능.
③ 인내 :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기술 습득은 불가능. 현대인은 일을 신속히 처리하지 못할 때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 그럼에도 이렇게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
④ 최고의 관심 : 기술이 최고로 중요한 것이 아니면, 견습공은 명장이 되지 못하고 애호가로 남을 뿐.
⑤ 한가지 더 보충하자면, 기술 습득 전 다른 많은 일들의 사전 습득 필요. 목공 기술을 배우는 자는 나무를 깎는 법부터 배워야,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자는 음계연습부터.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 하루 일정한 시간을 명상, 독서, 음악 감상, 산책 등에 할당하는 것, 최소한의 시간 이상으로는 탐정 소설이나 영화 같은 도피주의적 활동에 탐닉하지 않는 것, 과식하거나 과음하지 않는 것 등은 초보적 규칙.
정신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의미.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님.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황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는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가능.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권위자나 대다수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기초. 비합리적 신앙은 압도적으로 강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느껴지는 힘에 굴복하고,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을 포기하는 데 뿌리박고 있지만, 합리적 신앙은 경험에 바탕. 우리 자신의 관찰과 사고의 소산. 많은 사람들에게 권력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성취 중 가장 불안정한 것이 권력임을 입증. 신앙과 권력은 상호 배척하기 때문에, 본래 합리적 신앙을 바탕으로 수립되었던 모든 종교와 정치체계는, 권력에 의지하거나 권력과 결탁할 때 부패하고 마침내 종교와 정치체제가 갖고 있던 힘을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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