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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New Philosopher (vol 3) :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

by hoyony 2021. 3. 25.

<인생의 목표>

존 스튜어트 밀은 “스스로 행복한지 묻는 순간 행복하지 않게 된다”고 썼고, 그 후로 연구자들은 행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행복을 경험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입증했다. 진정한 행복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행복이 지나간 후에야 행복이 찾아왔었음을 깨닫는다.
융 학파 심리치료사 제임스 홀리스는 일상의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행복해질 방법이라고 믿는 바에 따르지 말고, ‘이 길과 이 선택이 나를 더 크게 만들까 작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따라 행동하라고 제언한다. 이것은 인생의 초점을 ‘행복’에서 ‘의미’로 옮기는 강력한 질문이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질문과 달리, 그 답은 종종 놀라울 만큼 명쾌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인생의 목표로서 의미를 추구하는 데 여전히 문제가 있다. ‘의미’가 아니라 ‘추구한다’는 부분에서 말이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의미나 다른 추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그런 결실을 조금이라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현재에 그것을 맛보지 못하게 된다. 앞서 밀의 말을 바꿔 표현하자면, 스스로 지금 하는 일이 진짜 의미 있는지를 묻는 순간 그 일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순간을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일부분으로 바라보면, 현재 순간을 수단으로 여기게 되면서 그 자체의 가치보다 미래나 향후 목표의 구성 요소로서 가치를 두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의 어떤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집착하는 부류의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결심 또한 인생의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데 집착하는 일이다. 즉 의미나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대신 현재의 순간을 진심으로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는 사람으로 변하겠다는 한 가지 목표 말이다. 이렇게 따지면, 결국 실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지 않을 인생 목표에 관한 철학은 없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인생>

당신이 한 해 동안 겪은 일을 전부 기록한다고 생각해 보자. 크리스마스카드를 쓸 때 지난 일 년을 돌아보듯, 막연하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 열두 달 동안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글로 남기는 것이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면 당신은 그동안의 인생에 대한 완벽한 기록을 손에 넣게 된다. 그 기록을 다시 읽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 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 가끔씩 닥쳐오는 재난과 비극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 작년과 올해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들려 달라고 청한다면, 당신은 결코 판에 박힌 일상을 그대로 나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요청을 받았을 때 매일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가령 열한 살 생일 때 누구와 아침을 먹었는지, 혹은 살면서 사슴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나열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단어의 나열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란 적당한 사건을 추려 내고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 냈을 때 만들어진다. 이야기에는 구조와 논리와 의미가 필요하다. 좋은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빨아들이지만, 맥락과 흡입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애초에 이야기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우리는 삶을 그냥 사는 대신 이끌어 나간다. 비록 우리의 의지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한 번 시작된 인생은 더 이상 일어난 일의 집합이 아니라 매일같이 창조되어 나가는 무언가로 바뀐다. 삶을 이끄는 인간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다. 시시포스의 신화가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끝없는 노동에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시포스의 삶을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까닭은 매일 바위를 굴리는 형벌이 단조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 끝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이야기 대신 끝없는 반복으로 가득 차 있고, 그의 노력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처럼 삶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관점은 우리에게 인생을 단순히 나쁜ㄴ 경험과 좋은 경험의 합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 준다. 좀 더 분명한 비교를 위해, 20년의 역경과 20년의 행복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인생을 한번 살펴보자. 두 인생은 정확히 같은 정도의 기쁨과 고난을 담고 있다. 즐거운 경험과 괴로운 경험의 숫자나 강도 또한 완벽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 20년간 행복을 누리다가 뒤따른 20년을 고통 속에 보낸 반면, 다른 사람을 20년간 고난을 겪다가 남은 20년 동안 영광에 찬 세월을 보냈다. 행복과 불행을 더한 값이 똑같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후자의 인생을 고를 것이다. 승리 혹은 구원을 향해 가는 인생이 그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인생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지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자에서 거지가 된 이야기보다 거지에서 부자가 된 이야기가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일상을 따분하게 버티며 지낸다. 하지만 따분하다고 해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겉보기에는 똑같이 칙칙해도 자세히 보면 저마다의 무늬와 형태가 있다. ‘단추를 잠갔다 푸는’ 식의 반복뿐인 지루한 일상이라도, 크게 보면 한 편의 음악처럼 리듬과 강세가 있고 상승과 하강이 있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끼어들거나 갑작스레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연주는 끝까지 계속된다.

<나의 죽음>

죽음이란 실제로 삶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죽는 사람에게 모든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죽어 가는 과정을 의식할 수는 있지만, 만약 죽음이 경험의 끝이라면 그것은 경험이 될 수 없다. 죽음 자체는 의식이 멈추고 영원히 빛이 꺼지는 순간이다. 아무도 죽음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삶이 잘 굴러갈 때조차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특별히 실존적(혹은 비실존적)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죽음과 관련한 고통 대부분이 자기 사후에 벌어지는 일을 죽은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공상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던 에피쿠로스의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그래서 삶의 질이 어떻든 상관없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생명을 연장하려고 고군분투하는 행위는 내게 터무니없어 보인다.

<무의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수행, 철학>

철학은 서로 마주칠 수 없는 것들을 접목시키고, 그 내부로 침투하며, 상호적으로 융합하는 사유의 방식. 철학은 모든 대상에 열려져 있어야 하고, 철학하는 사건과 현상의 새로운 발견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에서 발현된는 것. 철학은 자명한 것, 즉 상식, 대화, 지혜 너머로 나아가려는 사유의 도약 속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빛을 내는 행위. 철학은 그 본질에서 논쟁술이 아니라 사유의 약동이고 도약술.
철학은 왜 중요할까? 철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생각하는 존재, 의미의 존재, 오성의 존재로 다시 살게 한다. 삶이 생각, 의미, 오성에 의해 매개될 때 무지와 소외와 광기에 매몰된 존재에서 벗어나는 계기적 찰나와 마주친다. 그리고 삶의 무의미의 밋밋함에서 벗어나면서 돌연 생생해진다. 철학이 삶이라는 테두리에 의미와 광휘를 두르게 하기 때문. 우리를 자기 성찰 속에서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철학의 위대함. 현대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함의 계기적 찰나를 무의미한 행위로 대체한 점.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소비하는 패턴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찾으려고 함. 물질주의에 매몰될 때 생각함이 개입할 여지는 사라짐. 생각함을 폐기하고 배제하는 물질주의적 태도는 곧 의미의 탕진, 삶의 탕진. 물질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무지와 소외와 광기로 내몰게 됨. 사람들이 공허와 뜻 없음에서 허덕이는 이유가 그 때문. 우리가 어리석음에서 해방되려면 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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