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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군중과 권력 by 엘리아스 카네티

by hoyony 2018. 3. 21.

MASSE UND MACHT



바다출판사
2012. 2. 1
Elisa Canetti


군중(Die Masse)

군중은 생겨나는 순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세하길 바란다.
군중의 내부에는 평등이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평등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군중은 밀집상태를 사랑한다. 군중에게 과밀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어느 것도 군중의 내부 틈새로 끼어들거나 군중을 갈라놓을 수 없다.
군중은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군중은 항상 동적이다.

모르는 것에 의한 접촉보다 인간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무언가 우리를 붙잡으려 하면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며, 아니면 적어도 사태의 가닥이라도 대충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낯선 것과의 접촉을 피한다. 밤에 또는 어둠 속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접촉에 의한 두려움은 심리적인 공황 상태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인간이 접촉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군중 속에 있을 때뿐이다. 이때는 두려움이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한다. 이때 인간은 밀집된 군중, 즉 몸과 몸이 밀착되어 누가 누구를 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물리적으로 뺵빽이 들어찬 군중을 필요로 한다. 군중 속에 놓이는 순간 인간은 닿는 게 두렵지 않게 된다. 이상적인 경우에 거기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어떠한 구별도 없으며 성별 차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민 자가 곧 밀린 자요, 밀린 자가 곧 민 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갑자기 모두가 한 몸이 되어 행동하는 것 같아진다. 접촉 공포의 전도, 이것은 군중의 본질에 속한다. 군중의 밀도가 높을수록 그 구성원의 안도감은 그만큼 커진다. 

군중 내부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방전(entladung은 방전 외에도 폭발, 방출, 해방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책에서 방전은 구속 상태로부터의 해방, 에너지의 폭발과 방출현상을 포괄적으로 함의하고 있다)이다. 방전이 일어나기 전의 군중은 본질적으로 군중이 아니다. 방전이 있어야만 비로소 군중이 생성된다. 방전의 순간에 군중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간의 차이를 제거하고 평등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차이란 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들, 즉 계급, 신분, 재산 따위의 차이를 말한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항상 이런 차이를 의식한다. 이 차이는 개개인들에게 중압감을 주고 그들이 상호 고립되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광활한 평원 위에 우뚝 서 인상적으로 움직이는 풍차와도 같다. 그리고 이때 그 풍차와 이웃 풍차 사이에는 간격이 있을 뿐이다. 모든 삶이 이 간격 속에 펼쳐진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재산을 넣어두는 집, 그가 차지한 지위, 그가 바라는 계급, 이 모든 것들이 간격을 만들고, 확고하게 하며, 확대시킨다. 누구도 남의 곁으로 다가가거나 남의 지위를 넘볼 수 없다.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 위계질서가 확립돼 있어서 인간은 자기보다 고귀한 자를 건드릴 수도, 자기보다 미천한 자로 내려올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사회마다 이 위계간의 간격은 제각기 고유의 균형을 취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출신의 차이에 역점이 주어지지만 때로는 직업이나 재산의 차이에 중요성이 부여되기도 한다.

인간은 함께 모임으로써만 간격의 질곡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군중 속에서 일어난다. 방전을 통해 온갖 괴리가 사라지고 모든 구성원이 평등감을 느끼게 된다. 몸과 몸이 밀리는, 틈이라곤 거의 없는 밀집 상태 속에서 각 구성원은 상대를 자기 자신만큼이나 가깝게 느끼게 되며, 결국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남보다 위대할 것도 나을 것도 없는, 이 축복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 인간은 군중을 형성하는 것이다. 

군중은 와해된다. 군중은 와해될 것이라는 예감 속에 늘 두려워한다. 군중은 새로운 가담자들이 계속 생기고 그 내부에서 방전 과정이 계속 진행되어야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이처럼 군중은 계속 성장해야만 그 구성원들이 각자의 짐에 짓눌려 이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닫힌 군중 구성원이 지닌 특유한 심적 상태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들은 항상 종교적, 군사적 또는 축제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다. 그리고 이 목적의 특수성이 그들의 심적 상태를 신성하게 만든다. 모든 예배 의식과 종규는 군중을 사로잡는 데 그 기본 의도가 있다. 이들 예배 의식과 종규는 불안정한 세계 전체보다도 우선 교회에 가득 찬 안정된 군중을 확보하고자 한다.

닫힌 군중이 갑작스럽게 열린 군중으로 전이하는 현상을 나는 분출이라고 명명하겠다. 이것은 빈번히 일어나는 일로, 공간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잘 비호된 어떤 공간으로부터 군중이 넘쳐흘러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한 도시의 광장이나 길거리를 채우는 경우는 흔히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군중이란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군중은 제가 집어삼키지 못한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배고파한다. 그러나 군중의 존속을 위한 노력은 비교적 무력한 면이 있다. 군중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희망은 한 군중이 다른 한 군중과 힘을 겨루는 이중 군중의 형성에 있다. 이 두 라이벌은 힘과 열기 면에서 백중하면 백중할수록 그만큼 둘 다 오랫동안 존속하게 될 것이다.

군중의 중요한 특징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1. 군중은 언제나 성장하기를 원한다. 군중의 성장에는 원래부터 한계란 있을 수 없다. 인위적으로 어떤 한계(예를 들면, 닫힌 군중을 보존하기 위해 각종 제도를 설립하는 것)를 설정한다 해도 군중의 분출현상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이따금 일어난다. 군중의 성장을 영원히 막을 수 있는 절대적 수단으로서의 제도란 있을 수 없다.

2. 군중의 내부에는 평등이 지배하고 있다. 이 점은 절대적이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군중 자체조차도 이 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점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을 절대 평등의 상태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 

3. 군중은 밀집상태를 사랑한다. 군중에게 과밀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어느 것도 군중의 내부 틈새로 끼어들거나 군중을 갈라놓을 수 없다. 

4. 군중은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군중은 항상 동적이다. 군중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인 이 방향은 군중의 평등감을 강화시킨다. 개개 구성원의 바깥에 존재하며 전원에게 공통인 이 목표는 군중 자체에 치명적인 모든 상이한 개인적 목표들을 땅 밑으로 쫓아낸다. 군중의 존속을 위해서는 방향이 필수적 요소이다. 군중은 늘 와해를 두려워하므로 어떤 목표라도 받아들이려 한다. 군중은 도달하지 못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한 항상 존재한다. 

느린 군중은 방전에 이르는 과정을 길게 늘이는 경향이 있다. 위대한 종교들은 이 지연 작업에서 대가다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 종교들의 관심은 자기들이 획득한 추종자들을 유지하는 일인데, 이를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추종자를 신규로 획득하기 위하여 종교들은 이따금 그 추종자들을 집결시켜야 한다. 이 집결이 일단 방전으로 이끌려가게 되면, 이 방전은 되풀이되어야 하고 또 가능한 한 더욱 더 격렬해져야 한다. 최소한 신도들의 단결이 상실되지 않기 위해서 방전의 규칙적 반복은 필수적이다. 율동적 군중이 행하는 것과 같은 유의 예배중에 일어나는 일들은 원격 조종이 되지 않는다. 이 지배는 오직 군중 사건을 의식적으로 늦출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세상에서의 방전은 순간적이지만, 저 세상으로 옮겨진 방전은 영속성을 갖는다. 

군중은 그들이 지니는 감정 내용에 따라 다섯 가지 형태로 구분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서 깊은 형태는 추적 군중도주 군중이다. 이 두 형태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발견된다. 인간은 이 형태의 군중 형성에서 수시로 동물들의 실례를 참고했음이 거의 틀림없다. 이에 비해 금지 군중역전 군중 그리고 축제 군중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군중 형태이다.

추적 군중은 재빨리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고려함으로써 형성된다. 그 목표는 군중에게 이미 알려져 있고, 뚜렷이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까이에 있다. 이 군중은 살생을 위해 출현한 군중이며,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이 군중은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간다. 목표를 공포하는 것, 즉 죽어야만 할 자가 누구인가를 널리 알리는 것만으로도 이 군중은 충분히 형성된다. 그것은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활동 단위인 사냥 무리에서 유래한다. 추적 군중은 일단 제물을 쟁취하고 나면 아주 급속히 와해된다. 위기에 처한 지배자는 이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군중의 성장을 방지하기 위해 제물을 군중에게 던진다. 정치적 처형은 대개 오로지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꾸며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급진파 정당의 지도자는 위험한 적의 공개 처형이 적대 정당보다는 오히려 자기 당의 몸을 더 깊게 찌르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도주 군중은 위협을 느끼는 데서 생겨난다. 달아나는 자는 모두 여기에 속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위험에 직면한다. 위험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집중되며 무차별적으로 작용한다. 그 위험으로 인해 위협당하는 대상은 한 도시의 거주자들일 수도 있고, 특정 종교의 신도들일 수도 있으며,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일 수도 있다. 군중 도주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그 방향이 가지는 힘이다. 군증은 위험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 온통 쏠린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 확보되는 목표와 그 목표까지의 거리뿐이므로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금지에 의해 생겨나는 특수한 종류의 군중이 있다. 수만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해왔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집단적으로 거부한다. 금지는 갑작스러운 것이며, 군중이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다. 금지 군중의 가장 단적인 본보기는 동맹 파업이다. 이 조직은 군중의 형성을 야기했던 금지를 해제해야 할 시점에 당도했는지 여부를 알아내야 한다. 만약 이 조직의 통찰이 군중의 감정과 일치된다면 이 조직은 금지를 해제하고 스스로를 해체시켜야 한다.

역전은 계급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보다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는 그런 계급 구분이 한동안 계속되고, 이것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감지되다가 상황을 역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한다. 모든 명령은 이를 따라야 할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가시를 꽂는다. 이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하나는 자기가 하달받은 명령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하위자가 있어야 하고, 이 하위자가 전가된 명령의 수행을 수락할 태세로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상위자에게 그때까지 받은 수모를 몽땅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무력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개인은 이런 행운을 얻을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런 자들끼리 모여 군중을 형성한다면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했던 일을 성취할 수 있다. 혁명적 상황이란 이런 역전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명령이라는 가시로부터 집단적으로 해방하는 데서 방전이 일어나는 이 군중을 가리켜 역전 군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형식의 군중은 축제 군중이다. 제한된 공간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게 있고 근처에 있는 자는 누구나 여기에 한몫 낄 수 있다. 축제가 열리는 동안에는 삶과 향락이 모두 보장되어 있다. 온갖 금지와 차별은 철폐되어 평소엔 전혀 없던 상호간의 접근도 허용되고 환영받는다. 개개인이 느끼는 분위기는 방전이 아니라 이완된 분위기다. 모든 사람이 함께 협동해서 도달해야 할 공동의 목표 같은 것은 없다. 축제 자체가 목표이며, 그들은 이미 그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밀도는 매우 높지만, 평등은 대체로 방종과 향락의 평등이다.

군중이 자신을 존속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그리고 때로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와 관련된 제2의 군중이 존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양쪽의 크기나 강도가 너무 우세한 적이 없어야 하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적이 지나치게 우세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맞설 수가 없다는 열패감이 일단 들고나면 사람들은 군중 도주로써 목숨을 건지려 한다. 이것마저 가망이 없다면 군중은 공황 속에서 와해되어 각자 뿔뿔이 도망쳐버린다. 이 체계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세 가지 기본적인 대립 관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첫째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남과 여의 대립이고, 둘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대립이다. 셋째는 친구와 적의 대립인데,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두 군중을 이야기할 때, 항상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를테면 적군의 대열을 성기게 만드는 것이다. 죽여도 무더기로 죽여야 한다.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적이 쓰러져서 살아짔는 적들의 위협적인 군중이 시체더미로 변해야 한다. 전쟁에서 대치하는 적이란 바로 이웃에서 성장하고 있는 군중이다. 이웃의 증가는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이웃의 성장 속에 함축된 위협만으로도 공격적인 군중이 형성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고대어를 보나 현대어를 보나 전쟁에 관한 사건을 묘사해놓은 글귀들은 모두 위와 같은 점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학살, 도륙, 궤멸이라든가, 강물이 선혈로 물들었다든가, 최후의 한놈까지 베어버렸다든가, 사지를 찢어 죽였다든가 따위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결코 관용이 있을 수 없다.

무리(Die Meute)

영국의 여우사냥 풍속, 불과 몇 사람을 태운 조그만 보트로 하는 대양횡단, 수도원에서의 기도하는 공동체, 미지의 땅을 찾는 탐험대, 그리고 몇 사람과 함께 인간의 노력이 없어도 모든 것이 잘 자라는 자연의 낙원을 찾아가 거기서 살고 싶다는 꿈 ㅡ 이러한 모든 고대적 상황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리 시대의 점증하는 중압감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소박한 자연 속의 존재로 돌아가고자 하는 향수, 바로 무리로 복귀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군중결정체와 군중은, 어휘의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둘 다 더 오래 된 어떤 단위 집단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는데, 그 오래된 단위 집단이 바로 무리이다. 무리는 인간이 10명, 20명씩 소규모의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동체적 흥분의 형식이다. 
무리의 특징은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리의 바깥쪽은 완전 공백이며, 거기에는 추가로 가담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무리는 더 많아지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인 사람들의 집단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냥이건, 전투이건 함꼐 해야 할 일에서 그들의 수가 좀더 많았더라면 더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중의 네 가지 특징 중에서 두 가지는 무리의 경우에서는 허구적인 욕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무리는 그 두 가지 특징도 마저 가지기를 워하며, 그래서 마치 그것들을 갖춘 듯이 연기를 하나. 즉, 성장과 밀도는 그저 연기될 뿐이고, 평등과 방향성은 현실로 존재한다. 뒤의 두 가지 중 더욱 현저한 것은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는 방향이다. 한편 평등은 무리를 구성하는 모든 개개인이 동일 목표(예를 들면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어던 사냥감의 탐색 따위)에 다함께 노심초사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무리는 발생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네 가지 다른 형태, 다시 말해 기능이 있다. 이 네 가지는 유동적이고, 서로가 다른 것으로 쉽게 변화한다.

가장 자연발생적이고 순수한 무리형태는 무리의 어원에 해당하는 사냥 무리이다. 사냥 무리는 분배라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분배가 언제나 사냥이라는 전 단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단계의 목적은 포획물이다. 그리고 이 포획물이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오로지 이 포획물만이 그리고 그것의 행동과 성질만이, 이 포획물을 목표로 형성된 무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무리의 둘째 형태는 전투 무리이다. 그것이 다른 형태의 무리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더욱 더 사냥 무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투 무리는 당연히 적대적인 제 2의 무리를 전제하고 있다. 설령 제2의 무리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일지라도 그런 무리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고 이 가상의 적에게 맞서려 한다. 가장 초기 형태의 전투 무리는 대개 보복을 필히 감행해야 할 개인을 목표로 삼았다. 살해되어야 할 제물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전투 무리는 사냥 무리와 특히 유사하다.

셋째 형태는 애도 무리이다. 이 무리는 구성원 중의 하나가 죽음으로 인해 집단에서 떨어져나갔을 때 형성된다. 애도 무리는 주로, 죽어가는 자를 되살리려는 데, 다시 말해서 그자가 완전히 죽어 없어지기 전에 그자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생명력을 낚아채서 섭취하는 데 관심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애도 무리는 죽어가는 자가 장차 죽은 자들이 있는 저승에 갔을 때 살아 있는 자의 적이 되지 않도록, 죽어가는 자의 영혼을 위로하려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로, 나는 그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성, 즉 증식되려는 욕망을 가진 일련의 현상들을 하나로 요약하고자 한다. 이것이 증식 무리이다. 이 무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의도하는 각종 생물들이 더 늘어나게 하기 위해서 형성된다. 증식 무리는 확고한 신비적 의미가 부여돼 있는 어떤 춤에서 여실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든 못 거두었든 간에, 시간이 흐르고 나자 축제와 의식들은 결국 대규모 군중 형성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아록 있다. 그와 가까웠던 자들만이, 또는 그가 누구였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들만이 애도 무리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그들의 고통은 그에 대한 친밀도에 비례해서 증가하며, 그를 가장 잘 알던 사람이 가장 슬퍼한다. 그 중에도 가장 슬픈 사람은 자기의 자궁으로부터 그를 나오게 한 그의 어머니이다. 낯선 자의 죽음은 누구도 애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애도 무리는 아무나 죽었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관련된 이 확정성은 모든 무리의 특성이다. 하나의 무리에 속하는 잘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잘 안다. 사냥을 나갈 때는 사냥감이 무엇인지를, 전쟁터에 나갈 때는 적이 누구인지를, 애도를 할 때에는 그 애도를 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ㅈ증식의 의식을 거행할 때는 증식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무리의 확정성은 무서울 정도로 변하지 않는다. 무리가 설정해 놓은 목표는 언제나 동일하다. 이 끝없는 반복성은 인간의 모든 생활 과정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리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확정성과 반복성은 놀라울 정도로 엄격한 항상성을 가진 인적 조직 형태, 즉 무리를 탄생시켰다. 이 항상성으로 인해 조직체들은 매우 복합적인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당당히 한 몫을 해내게 되었다.   

무리와 종교(Meute und Religion)

종교의 핵심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애도이다.
사람들은 남을 박해하는 존재로서 살아왔고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살을 추구한다. 그들은 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먹고산다.
그러나 죄와 불안은 끊임없이 자라나고 부지불식간에 그들은 구원을 열망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을 위해 죽은 사람에게 자신들을 결부시키고, 그 사람을 애도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박해를 받는 자라고 느낀다. 
인간들이 무리들 안에서 살육을 그만 두지 않는 한,
애도의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기 위해서 불가결한 것이다.

무리의 모든 형태는 장차 변모될 형태와 반대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반대 형태로의 이같은 변화 외에도 전혀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 있다. 독특한 무리 형태로의 상호 변화가 그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살해되면 그의 종족 구성원들은 그를 애도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전투대형으로 형성되어 동료의 죽음에 대해 적에게 복수를 한다. 애도 무리가 하나의 전투 무리로 바뀌는 것이다. 무리의 변환은 하나의 특별한 과정이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발견되며 인간 행동의 영역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변환 중 어떤 것들은 더 광범위한 맥락에서 추출되어 고정된 것도 있다. 그런 변환은 특별한 의미를 얻어 의식이 된다. 의식은 똑같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재현된다. 여기서 의식은 모든 중요한 신앙 행위의 핵심이 된다. 무리의 동태성 및 무리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독특한 종류가 세계 종교의 발생 기원을 설명해 준다. 

내면적인 것이든, 혹은 무리에 관계되는 것이든 전쟁의 역학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다. 죽은 자의 주위에 모인 애도 무리로부터 복수를 목적으로 하는 전투 무리가 형성되며,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경우 전투 무리로부터 의기양양한 증식 무리가 형성된다. 모든 사람에게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첫번째의 죽음이다. 전쟁을 촉발시키는 데 첫번쨰로 죽은 자의 역할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지배자들은 그들이 첫번째의 희생자를 내거나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재빠르게 형성된 애도 무리는 군중결정체로 작용한다. 그것은 자신도 그와 똑같은 위협을 받고 있따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애도 무리의 정신상태가 전투 무리의 그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전쟁의 종교로서의 이슬람교

독실한 이슬람교도들은 네 가지 방법으로 모인다.

1. 저 높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따라 매일 수차례씩 기도를 위해 모인다. 이때 형성되는 율동적인 소규모 집단들은 기도의 무리라고 부를 수 있다. 각각의 동작은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고, 메카 쪽으로만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금요 기도회 때에는 이들 무리들이 군중으로 성장한다. 
2. 이교도를 상대로 한 성전(聖戰)을 위해 모인다.
3. 대규모 성지 순례 기간 동안 메카에 모인다.
4. 최후의 심판일에 모인다.

이슬람교에서 군중의 양분은 절대적인 것이다.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분리되어 서로 싸우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종교 전쟁은 신성한 의무이며, 따라서 최후 심판일의 이중 군중은 덜 포괄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속세의 모든 전투에서도 그 성격이 나타난다. 

이슬람교를 위한 전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것보다도 그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신의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예언서인 코란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성한 달들이 지나면 이교도들을 죽여라. 어느 곳에서 그들을 발견하더라도, 그들을 체포하라, 그들을 포위하라. 그들을 매복하여 습격하라."

카톨릭에 비하면 인류 역사의 모든 통치자는 통치능력 면에서 유치한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이 보인다. 카톨릭의 경우 제의는 다른 종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신중하다. 빳빳하고 무거운 의복을 걸친 사제의 둔중한 몸놀림과 신중한 걸음걸이며 끝을 길게 늘이는 말씨 등은 모두 애도감을 끝없이 묽게 하는 거서럼 보인다. 이러한 희석이 수세기에 걸쳐 고르게 지속되면서 이제는 죽음의 갑작스러움이나 이에 대한 고통의 격렬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신도간의 결합 역시 몇 가지 방식으로 방해를 받고 있다. 어느 신도가 다른 신도에게 설교하지 못한다. 평신도의 설교에는 아무런 신성함이 깃들지 못한다. 신도가 소망하는 모든 것은, 또 그를 짓누르는 갖자기 억압을 덜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보다 높은 권위에서 주어진다. 그는 설명받은 것만을 납득할 수 있을 뿐이다. 거룩한 말씀은 잘 씹어서 적절히 조제된 상태로 그에게 주어진다. 말씀의 신성함은 그 평신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야 한다. 그가 지은 죄까지도 사제에게만 고해해야 한다. 다른 평신도에게 털어놓아 보았자 그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영성체를 행하는 방식에서도 함께 성체를 영하는 신도들이 그 자리에서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다. 영성체를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성체를 받는다. 영성체의 차례를 기다리는 신도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있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앞에서 있는 사람이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관심은 일상생활에서 동료들에게 보이는 관심에 훨씬 못 미친다. 영성체는 신도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교회와 연결시키지만, 그 자리에 있는 회중들로부터 그를 밀어낸다. 성체를 영한 사람들은 보물을 발견해서 이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의 집단에서와 같은 일체감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카톨릭이 매우 중요시하는 이런 절차 속에서, 우리는 군중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카톨릭교회의 조심성을 엿볼 수 있다. 교회는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를 약화시켜 부드럽게 만들고, 대신 머나먼 공동의 신비스런 어떤 것을 내세운다. 그것은 신도들이 없어도 성립하는 것이며, 신도가 살아있는 한 그것과 신도 사이의 경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행렬은 교회의 위계질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행렬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각각 위엄에 찬 복장을 하고 입장하며,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알려지고, 이에 따라 호칭이 정해진다. 그리고 축복은 강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줄 수 있다. 행렬의 이러한 편성 방식은 관람자들이 궁중적 상태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관람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상이한 지위의 사람들을 보게 되고, 이들 상이한 지위들의 평준화나 통일은 불가능하다. 어른이 된 관람자라도 자신을 결코 신부나 주교와 동일시할 수 없다. 사제들은 항상 그와는 구별되며, 그보다 높은 사람들로 평가된다. 그러나 신앙심이 독실하며 할수록 그는 자신보다 훨씬 고귀하고 거룩한 사제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더욱 애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행렬의 목표다. 행렬은 신도들로부터 공통된 존경심을 확보하려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공통적인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칫하면 통제 불능의 행동이나 감정의 폭발을 야기하지 때문이다. 바늘처럼 찌르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고는 없다. 그 존경심은 마치 밀물처럼 서서히 차분하게 밀려와서 정점에 도달한 다음 다시금 썰물처럼 천천히 빠져나간다.  

군중과 역사(Masse und Geschichte)

'국민이란 무엇인가'를 규정해보려는 시도들 중 대부분은 본질적인 결점이 있다. 즉, 그런 시도들은 국민성의 일반적인 개념을 정의하는 데 그쳤다. 사람들은 옳은 정의만 찾아내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믿으면서, 국민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일단 그런 정의가 발견되면, 그것이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어나 영토, 문학, 역사, 정부 형태 또는 이른바 국민감정들을 인용했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나 예외가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작업은 마치 겉옷을 부여잡으면 옷 속에 있는 것이 손에 잡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객관적인 이같은 접근방법과는 달리, 단 하나의 국민, 즉 자기 국민에만 과심을 두고 나머지 모든 국민에게는 무관심한, 좀 더 순진한 또 하나의 접근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자기 국민의 우월성, 즉 자기들의 위대함에 대한 예언적 비전과 도덕적인 것과 잔인한 것이 뒤섞인 자부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 이데올로기들이 모두 똑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따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지 그 이데올로기들을 비슷하게 만드는 절박한 요구가 있을 뿐이다. 그 이념들은 똑같은 것을 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다. 그 이념들은 확장을 원하며, 증식으로써 이 확장을 실증한다. 

사람들은 국민적 요구의 구체적 내용과, 그 요구 배후에 있는 진정한 이데로로기는 서로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각 국민마다 무엇이 독특한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도 그 국민의 탐욕에 감염되지 않을 채 해야 하는 것이다. 각 국민들은 오랜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각 국민의 상당 부분이 이런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가는 충분히 선포되어 알려지는 일이 흔하지만,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싸우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신이 될 만한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으로서, 또는 독일인, 영국인, 또는 일본인으로서 싸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말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인플레이션과 군중

자신의 갑작스런 가치 하락을 잊을 사람은 없다.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겐가 떠넘길 수 없는 한, 그는 나머지 생애 동안 그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런데 남에게 전가시킨 군중조차 결코 그 쓰라렸던 경험을 잊지는 않는다. 그 이후의 자연적인 추세는 자신보다 못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 자신이 경멸당했던 만큼 경멸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에게 자신이 당했던 경멸감만 주어서는 만족할 수 없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비하시키는 동적인 과정이 뒤따른다. 마치 인플레이션 기간 동안에 돈의 가치가 점차 떨어졌듯이, 무엇인가를 점점 가치가 떨어지도록 취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완전히 무가치한 상태로 전락할 때까지 이 과정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인플레이션 기간 동안 히틀러가 이런 과정을 위해 써먹도록 찾아낸 대상은 유태인들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돈과 맺어온 그들의 인연, 돈의 유통과 경기 변동을 전통적으로 잘 이해하는 그들의 습성, 투자에 관한 그들의 기술, 금융 시장에 함꼐 모이는 그들의 방식, 독일인들의 이상인 군인적 품행과는 지극히 대조적인 그들의 행동, 이런 모든 사실들이 돈에 관한 의심, 불안, 적대감이 팽배하던 시절에는 유태인들을 믿을 수 없고 적대적으로 보이게 만들 도리밖에 없었다.   

권력의 내장(Die eingeweide der Macht)

어떤 사람이 쓰러질 경우, 그 장면은 우리 자신이 추저해서 쓰러뜨린 어떤 동물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쓰러져서 웃음을 유발하는 모든 사태는, 그것이 무방비 상태임을 드러내고, 또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쓰러진 것은 먹잇감으로도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연상시키는 데서 비롯한다. 만약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먹어버린다면 우리는 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먹는 대신에 웃는 것이다. 웃음은 우리들의 잠재적인 음식물을 놓쳐버리는 데 대한 우리들의 육체적인 반응이다. 

한쪽의 다른 쪽에 대한 의도는 접혹하는 순간부터 구체적인 것이 된다. 최하등 생물의 경우에도 이 순간은 접촉에 관한 어떤 결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태초의 공포를 포함하고 있다. 접촉을 당하는 쪽은 보통 몸부림치며 저항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앞에 닥친 힘이 당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노력을 포기할 것이다. 모든 저항이 가망이 없어 보이기 때무에(특히 미래에도) 몸을 내맡겨버리는 그런 접촉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체포라고 부른다. 체포할 권리를 가진 손이 자기 어깨에 닿는 것을 느끼기만 해도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 항복해버린다. 

이빨의 명백한 특성인 매끄러움과 질서는 바로 권력의 속성이 되었다. 돌로부터 금속으로의 도약은 매끄러움이 증가하는 방향으로의 가장 큰 도약일 것이다. 돌을 아무리 잘 갈아본들, 처음엔 구리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철로 만들었던 칼만큼 매끄러울 수는 없었다. 오늘날의 기계와 운반 수단의 경우 매끄러움이 증가했으며 또한 작동도 아주 부드러워졌다. 언어는 이런 사실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만사가 매끄럽게 돌아간다" 든지 "순조롭게(매끄럽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어떤 과정이 완벽하게 방해받지 않고 우리의 힘의 영역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현대 생활에서는 이전에는 기피하던 분야들에까지 매끄러움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퍼졌다. 오늘날 매끄러움은 우리의 강고들과 벽, 그리고 우리가 가옥에 들여놓은 모든 물건들을 정복해버렸다. 오늘날 장신구와 장식품은 경멸당하고 있으며 고약한 취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따. 우리는 기능, 선(線)의 명확성 및 유용성을 운운하지만 정말 승리를 거둔 쪽은 매끄러움 쪽이며, 그 매끄러움이 감추고 있는 권력의 비밀스런 위엄이다.

살아남는 자(Der Uberlebende)

편집광적인 권력자의 유형이란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멀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에 도전하고 위험과 대결하며 자신에게 불리해질 수도 있는 싸움에서 단호한 결단을 내리기도 해야 하는 대신에, 그는 위험이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용의주도하고 간교한 수단을 강구한다. 그는 주위를 조망하기 좋은 공간을 구축한다. 그리고는 위험이 다가오는 모든 징후들을 관찰하고 평가한다. 

어떤 종족이든 간에 죽은 자에 대한 감정은 동일한 것 같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죽은 사람은 어떤 패배를 당한 것처럼 보인다. 패배란 다른 사람들을 남겨두고 더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이 상처를 달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그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죽은 자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남겨놓고 먼저 죽은 자이다. 모든 사람, 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함께 죽는 드물게 보는 대규모 재앙에서만 이런 상황이 달라진다. 어쨌든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개별저깅고 고립된 죽음에서는, 죽은 자는 한 사람으로 그의 가족과 집단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시체더미를 만들어내는 세 가지 중요하고도 낯익은 현상들이 있다. 그 현상들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그 현상들의 차이점을 분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그 현상들이란 바로 전토와 집단 자살과 전염병이다. 
전투의 목적은 적군의 시체더미다. 적군의 수와 비교해서 자기편의 수가 더 많아지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적군의 수가 줄어들어야만 된다. 전투 과정에서 자기편도 죽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목적은 적군의 시체더미이며 각 전투원은 이 목적을 위해 전력투구한다. 집단자살에서는 이같은 활동이 자기편 사람들에게 향해진다. 파괴가 완벽해서,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전혀 없도록 하기 위해 불이 사용되기도 한다. 전염병의 결과는 집단 자살과 같다. 그러나 전영병의 경우에는 그 결과가 자발적이 아니며,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처럼 보인다. 도달해야 될 목적지는 더욱 멀어지고, 사람들은 다같이 두려운 기대감 속에 살아가며, 모든 통상적인 관계가 폐지된다. 

권력의 요소(Eemente der Macht)

폭려과 권력

고양이는 쥐를 잡아 발톱으로 쥐었다가 결국 죽일 때는 폭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때는 다른 요소가 나타난다. 고양이는 쥐를 얼마쯤 도망치게 버려두기도 하고 쥐에게서 등을 돌리기까지 한다. 이때는 쥐가 폭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쥐가 고양이의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으며, 쥐는 다시 고양이에게 잡힐 수도 있다. 만일 쥐가 그 테두리를 뛰쳐나오면 고양이의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잡힐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지배하는 공간, 고양이가 쥐에게 허용하는 희망의 순간들, 그러나 잠시도 눈을 딴 데로 돌리지 않는 면밀한 감시와 해이해지지 않는 관심, 그리고 쥐를 죽이려는 생각. 이것을 모두 합친 것, 다시 말하면 공간, 희망, 빈틈이 없는 감시와 파괴적인 의도를 권력의 실체, 좀 더 단순히 말하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다.

폭력과 권력의 차이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도, 예컨대 다양한 형태를 보이는 종교적 헌신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신의 권력 안에 머물러 있으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신의 권력과 타협하고 그 권력에 순응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의 폭력으로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그런 힘이 강려하게 개입하고 직접적으로 발휘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신의 명령을 기대하고 살고 있으며, 신이 통치자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의 적극적인 의지와 그들의 적극적이고 명시적인 복종이 바로 그들 종교의 핵심이 된다. 이와 같은 경향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종교가 이슬람교와 칼뱅주의이다. 이런 종교의 추종자들은 신의 폭력을 갈망한다. 신의 권력은 너무 먼 거리에 있고 사람들을 너무 자유롭게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투가 생명의 진정한 표현이라 여기고 실제로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와 같은 신앙인을 만든다. 

권력과 속도

권력의 영역에 속하는 속도는 추적의 속도이고 포착의 속도이다. 사람은 이 두 가지 속도의 모델을 동물에서 찾았다. 먹이를 향해 달려가는 늑대와 같은 맹수를 보고 먹이를 추적하는 법을 배웠고, 고양이에게서는 먹이를 덮쳐서 포착하는 법을 배웠다. 권력자는 남보다 먼저 선수치는 것이 자신에게 허용될 뿐만 아니라 의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도 권력자는 별로 가책을 받지 않는다. 가면의 본질은 복잡하기 때문에 언제나 과오가 있을 수 있다. 권력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신속하게 행동을 취하지 못하여 적을 놓치는 것이다. 

질문과 대답

모든 질문은 일종의 침입이다. 질문이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희생자의 살을 도려내는 칼과도 같다. 심문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외과의사처럼 인간의 내부에 파고든다. 그는 더 확실한 것을 알아내기 위해 신체의 어떤 기관을 마취하지 않은 채 고의적으로 고통을 주는 외과의사인 것이다.

질문은 심문자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에 대해 고양된 감정을 갖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그는 더 많은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피심문자가 굴복하면 할수록 그만큼 질문을 더 자주 한다. 개인의 자유는 대부분 질문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데 있다. 가장 강력한 폭군은 가장 강력한 질문을 하는 자이다.   

질문을 더 계속하지 못하게 하는 대답을 하는 것은 영리한 일이다.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질문으로 맞설 수도 있다. 질문으로 맞설 수 없는 사람은 완벽하고 진지하게 답변하거나(이것은 심문자가 바라는 것이다) 더 이상 캐묻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심문자를 추켜세워 그의 우월감을 만족시켜 준다면 그 심문자는 권력을 과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더 흥미롭고 유익한 대답을 할 만한 다른 사람에게로 질문을 돌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질문에는 모두 고의적인 목적이 숨어 있으며, 아이들이나 바보의 질문처럼 목적이 없는 질문은 무력하며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짧고 간결한 답변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몇 마디의 말로 심문자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다. 그러한 질문을 막아내는 가장 조잡한 방법은 귀머거리인 척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척하는 것인데, 이 방법은 대등한 입장일 때에만 도움이 된다.

침묵에 부딪친 질문은 방패나 갑옷에 맞고 튕기는 무기와 같다. 침묵은 극단적인 형태의 방어이며 그 장단점은 동일하다. 말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기보다도 더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의 침묵은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 실제보다 더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하게 만들어 석방을 어렵게 만든다. 완고한 침묵은 고통스런 추궁과 고문을 자초한다.  

질문할 때 처음에는 신원을 묻고 그 다음에는 장소에 관해서 묻는다. 이 두가지는 "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두심문이 없던 고대에도 그것에 상응하는 상황이 있었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 왜냐하면 장소와 신원 가운데 한 가지가 없다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시작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맨 처음에 하는 질문은 장소에 관한 것이다. "~은 어디인가?" 그리고 나서 하는 질문은 "저것은 무엇인가?" 혹은 "~은 누구인가?"등이다. '왜?'로 시작되는 질문은 그 후, 만 세 살이 가까울 때 하게 된다. 그리고 '언제?'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등 시간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어린이들이 진정한 시간의 개념을 갖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질문을 받기 전에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흔히 있다. 질문은 찬성이나 반대를 결정하도록 강요한다. 

비밀

권력자는 비밀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권력자는 그 비밀에 관해 정통하며 비밀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무엇을 위해 자신이 매복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 경우 어떤 자의 도움이 필요한지도 안다. 그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비밀이 많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상호 감시하도록 하기 위해 비밀을 체계화시킨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비밀을 털어놓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비밀을 털어놓아 그 비밀이 유지되는가를 지켜보기도 한다. 권력은 그 내면을 간파당해서는 안 된다. 권력자는 다른 사람을 꿰똟어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권력자를 꿰뚫어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누구보다도 말이 적어야 하며 그의 신조나 의도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 

침묵의 힘은 언제나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입을 열게 하려는 무수한 자극을 물리치고 질문을 무시하며, 다른 사람의 말이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벙어리가 아니라 바위처럼 침묵을 지키는 자를 의미한다.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어떤 말인지를 정확히 안다. 실제로 영원히 침묵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떄문에 그 사람은 말을 할 수 있는 경우와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경우를 잘 선택한다.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 침묵할 수 있다. 침묵은 말하는 것보다 명확하고 더 가치가 있다. 침묵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 못하도록 지켜줄 뿐만 아니라 주의력도 더욱 집중시켜 준다. 침묵하는 자는 어떤 경우에나 더 집중적으로 행동한다. 침묵하는 자를 보면 사람들은 그가 많이 알고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침묵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침묵을 지키는 자는 침묵을 지키지 않는 자보다 더 고독하다. 그러므로 자립의 힘은 그런 사람에게 있다. 그 사람은 보물의 수호자이며 그 보물은 바로 그 자신 속에 있다. 

독재에 부수되는 위엄의 대부분은 비밀의 집중된 힘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비밀이 여러 사람들에게 분산되어 그 힘이 약화된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일이 없고, 모두가 자기의 주장이 있으며, 모든 일에 참견하고, 모든 것이 사전에 알려지기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말은 피상적으로는 우유부단에 대한 불평이지만 실제로는 비밀이 없는 데 대한 불평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불시에 폭력적으로 나타날 경우에는 잘 참는다. 보잘것없는 인간은 자신이 권력자의 뱃속에 들어감으로써 일종의 노예적인 쾌감을 느낀다. 

판단과 악평

나쁜 책, 나쁜 그림이라고 할 때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척한다. 우리는 항상 친구나 타인, 그리고 우리 자신조차 악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런 악평을 할 떄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쾌감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나은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열등한 집단에게 무엇인가를 전가하는 데 있다. 인간은 남을 격하시킴으로써 자신을 격상시킨다. 상반되는 가치를 대변하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이 선이든 그것은 항상 악과 대조를 이룬다. 어떤 것이 선과 악에 속하는가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인간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을 집단으로 분류하려는 강한 욕구를 갖는다. 서로 느슨한 관계밖에 없고 형체가 정해져 있지 않는 사람들을 대립적인 두 집단으로 분류함으로써 일종의 밀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전투대형처럼 배열된 이 집단들은 배타적이 되고 서로 적의를 갖도록 만들어진다. 

명령(Der Befehl)

모든 명령은 강박(强迫)과 가시로 이루어져 있다. 강박은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명령의 내용에 맞게 행동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가시는 명령을 받은 사람 속에 남는 것이다. 명령이 기대한 대로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때 가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시는 명령을 수행한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은 채로 변함없이 남아있다. 명령의 내용은 명령이 떨어진 순간에 결정되어 가시의 형태로 보존된다. 그것은 몇 년 혹은 몇 십 년이고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다시금 꼭 같은 모습으로 출현한다. 명령에 제일 많이 시달리는 자는 어린이들이다. 어린이들이 ㅁ여령의 수레바뀌 아래에서 부모와 교사의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어린이들이 크면 자기 자식들에게 마찬가지로 가혹한 명령을 내릴 것이다. 아주 평범한 어린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괴롭협던 명령을 하나라도 잊어버리거나 용서하는 일이 결코 없다. 

수행된 명령만이 그 명령을 따른 사람에게 가시를 남긴다. 명령을 회피한 사람은 가시를 지닐 필요가 없다. 자유인이란, 명령을 받은 뒤 명령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리 명령을 피할 줄 아는 사람일 뿐이다. 명령을 피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나 명령을 피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명령은 화살과 같다. 명령을 쏘아지고 맞혀진다. 명령권자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목표를 설정한다. 그는 자신의 명령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맞히게 된다. 명령이라는 화살은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갖는다. 명령이라는 화살은 맞은 사람에게 꽂힌 채로 있다. 그 화살에 맞은 사람은 화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화살을 뽑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야 한다. 이처럼 명령을 전가하는 과정은 마치 화살을 맞은 사람이 그 화살을 뽑아내어 자신의 시위에 걸쳐서 다시 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화살을 맞은 사람의 몸에 있는 상처는 아물지만, 그 상처는 흉터를남긴다. 모든 흉터에는 사연이 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어떤 특정한 화살의 흔적이다.

명령의 잦은 반복에서 생겨나는 특수한 종류의 불안이 있다. 나는 그것을 명령의 불안이라 칭하고자 한다. 명령을 단지 떠넘기기만 하는 자에게는 이 명령의 불안이 매우 작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명령의 원천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 명령의 불안은 점차 커진다. 명령을 받았던 모든 사람, 죽음의 위협을 받았던 모든 사람은 아직도 살아있고 그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 반기를 든다면 명령을 내린 사람은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험에 대한 예깜은 명령을 내린 사람의 마음속에 언제나 남아 있다.  

혼자서는 제거될 가망이 없는 명령의 가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해방되기 위해 역전 군중이 형성된ㄷ. 수많은 사람들이 단결해서 명령을 내렸던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 반기를 든다.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병사들이라면 실제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던 모든 장교가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이 만약 노동자라면 그들의 노동을 제공받았던 모든 기업가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이같은 순간에 새로운 계급과 신분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인 것처럼 행동한다. 지위가 향상된 하층 계급은 밀집된 하나의 군중을 형성하고, 우세한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한 상층 계급은 공포에 질려 도주를 하려 하는 일단의 무리를 형성한다.

명령과 책임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만약 자신들이 놓여 있었던 상황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자신들이 한때 명령의 폭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이 깨달음은 모든 일이 지나간 다음 너무 뒤늦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옛 상황과 똒같은 새로운 상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그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위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명령에 무방비 사애로 내맡겨져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 그들은 명령을 하나의 숙명으로 받아 들인다. 그들은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러한 맹목성에 마치 유별나게 사내다운 어떤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랜 역사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단단하고 확고한 형태를 가지게 된 명령은 여러모로 보더라도, 인간의 공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이다. 인간은 명령과 대결하고 명령의 횡포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더 많은 수의 인간을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는 여러가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명령은 우리의 피부를 스치는 정도 이상의 압력을 가져서는 안된다. 가시는 한번 슬쩍 치면 떨어져 나가는 그러한 것이 되어야 한다. 

변신(Die Verwandlung)

권력자는 자신이 타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은 변식에 대해서 불쾌감을 느낀다. 그는 그에게 유용한 사람은 승진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루어진 사회적 변신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그의 세력 내에 전적으로 속해야 한다. 사람들을 승진시키고 강등시키는 것은 그가 결정한다. 아무도 멋대로 이동할 수는 없다.
권력자는 자발적이거나 통제되지 않는 변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한다. 그가 이 싸움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변신의 과정과는 정반대의 것, 즉 가면을 벗기는 일, 변신의 박탈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을 자주 행하게 되면 세계가 위축되어버린다. 현상 형태의 풍요함이 무시돼 버리고 다양성이 경멸당하게 된다. 나무에 달린 모든 잎들이 다 바싹 말라 먼지가 되어버린다. 모든 빛이 적의에 가득 찬 밤 속에 희미하게 사라져버린다.

변신의 금지

카스트제도의 계급 구분은 더욱 엄격하다. 한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회적 변신도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아주 엄격하게 서로 구분된다. 하위 계급과의 접촉은 모두 금지된다. 결혼도 같은 카스트 내에서만 이루어지며, 한 카스트 구성원은 모두가 동일 직업을 가져야 한다. 일의 종류를 바꾸어 다른 카스트로 변신될 수도 없다. 변신 금지의 고립된 형식, 다시 말해 한 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한 개인과 관련된 변신 금지의 형식은 초기 상태의 왕국에서 발견된다. 

노예제도

물건의 본질적인 특성은 '불침투성'이다. 그것은 끌리거나 밀릴 수는 있지만 그 어떤 명령도 받아들일 수 없다. 법률은 노예를 소유 물건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노예는 소유 동물이다. 사람들은 일찍이 노예를 개에 비유했다. 개는 그들 무리로부터 떨어져나와 고립되어 있으며 주인의 명령을 받는다. 개는 자기의 의도가 주인의 명령과 상치될 때에는 자기의 의도를 포기해야 하며 그 대가로 주인으로부터 먹이를 얻는다. 

노예와 개는 모두가 동일한 출처, 즉 주인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먹이를 얻게 되며, 이 점에서 그들은 어린애와 상당히 비슷하다. 어린 아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그들의 변형과의 관계이다. 어린 아이는 놀이를 통해 훗날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온갖 변형을 연습하며, 그 부모들은 어린 아이가 새로운 변형을 습득하도록 계속해서 북돋아 준다. 어린애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계속 성장하며 변형을 자유자재로 할 경우에는 보다 높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한 인간이 여러 가지 작업을 수행해도 좋다고 허락되는 한, 분업은 인간의 변신에 대해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작업만을 하도록 제한받게 되고, 게다가 가능한 한 짧은 시간내에 많은 일을 하도록 요구를 받는다면, 소위 생산적으로 되어야 한다면 그런 인간은 노예로 정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노예 제도가 만연하게 된 가장 강렬한 동기이다. 이러한 욕망의 에너지는 그 반대, 즉 짐승을 인간으로 바꾸려는 욕망의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 다윈 학설이나 윤회설과 같은 위대한 정신적 형성에도 도움을 주었으나, 동물에게 옷을 입혀 흥행을 노리는 대중오락에도 그 잔재가 남아있다. 사람들이 마치 가축 떼를 모으듯 엄청난 수의 노예들을 한데 모으는 일에 성공하자마자, 이미 국가 및 전제 군주제에 대한 기초가 이루어진 셈이다. 국민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지배자의 마음속에는 전체 국민을 노예나 짐승으로 소유하려는 소망이 더욱 더 강렬해질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권력의 양상(Aspekte der Macht)

예로부터 서열과 권력에 따라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가 결정되었다. 사람들이 정렬해 있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권위의 정도를 쉽게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주위에 서 있는 경우, 반대로 한 사람은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주위에 앉아 있는 경우, 어떤 사람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는 경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무릅을 꿇는 경우,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앉으라는 말 한 마디 없는 경우, 이런 경우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두서없이 몇 가지를 나열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권력이 언어만이 아닌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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