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1997. 7. 26
김영사
제1부 : 사상 최초로 세계정치가 다극화, 다문명화되었다. 경제와 사회의 현대화는 의미를 지닌 보편 문명을 낳지 못하고 비서구 사회를 서구화하는 데도 실패했다.
제2부 : 서구의 상대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아시아 문명의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이 확대되고 이슬람권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슬람 국가들과 그 인접 국가들의 세력균형이 위협을 받으면서, 비서구 문명들은 전반적으로 자기 고유문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제3부 : 문명에 기반을 둔 세계질서가 태동하고 있다. 문화적 친화력을 갖는 사회들은 서로 협조한다. 한 사회를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이전시키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국가들은 자기 문명국의 주도국 혹은 핵심국을 중심으로 뭉친다.
제4부 : 보편성을 차지하는 서구의 자세는 다른 문명, 특히 이슬람,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국지적 차원에서는 주로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 사이의 단층선 분쟁에서 형제국들의 규합을 통해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상존한다. 분쟁을 저지하려는 핵심국의 노력도 두드러진다.
제5부 : 서구의 생존은 미국이 자신의 서구적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자기 문명을 보편이 아닌 특수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비서구 사회로부터 오는 위협에 맞서 힘을 합쳐 자신의 문명을 혁신하고 수호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문명 간의 대규모 전쟁을 피하려면 전 세게지도자들이 세계정치의 다문명적 본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유지하는데 협조해야 한다.
제1부. 문명들의 세계
1. 새로운 세계 정세
1980년대 말 공산 세계가 무너지면서 냉전 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다. 바로 문화다. 민족과 민족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지금까지 그런 질문 앞에서 내놓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들은 부족, 민족 집단, 신앙 공동체, 국민,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문명 패러다임이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세계에는 통합력이 실재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문화적 자기주장과 문명적 자기의식의 저항력을 낳고 있다.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양분되어 있지만 그 중요한 구분선은 지금까지 주도권을 행사해온 서구와 자기들끼리의 공통성을 거의 갖지 않은 나머지가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세계는 하나의 서구와 다수의 비서구로 나뉘어져 있다.
국민국가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세계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겠지만, 국민국가의 이해관계, 결속, 갈등은 점차 문화적, 문명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
세계는 실제로 부족 갈등과 민족 갈등으로 점철된 무정부 상태에 있지만 안정을 저해하는 가장 큰 위협을 낳는 갈등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나 집단 간의 분쟁이다.
2. 과거와 현재의 문명
문명의 본질
문명사회는 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원시사회와 다르다. 문명화되었따는 것은 좋은 것이고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쁜 것이다. 문명의 개념은 사회를 평가하는 판단 기준을 제공했으며, 19세기 내내 유럽인은 비유럽 사회가 유럽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일원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문명화되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를 정교하게 구축하는 데 상당한 지적, 외교적,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을 가리키고 있다. 문명은 크게 쓰인 문화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주어진 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세대들이 우선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하는 가치, 기준, 제도,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브로델에 다르면 문명은 하나의 공간, 하나의 문화 지역, 문화적 특성과 현상의 집약이다. 월러스틴이 정의하는 문명은 모종의 역사적 총체를 형성하면서 이런 현상의 이형들과 공존하는 세계관, 구조, 문화의 특수한 연쇄다. 도슨이 이해하는 문명은 특수한 민족의 업적인 문화적 창조성의 특수하고 독창적인 과정의 산물인 반면, 뒤르켐과 모스에게 있어 문명은 그 안에서 개별적 민족 문화는 전체의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다수의 민족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윤리적 환경이다. 슈펭글러는 문명을 문화의 피치 못할 운명... 발달한 인류의 종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외현적이고 인위적인 상태... 하나의 결론, 과정물을 승계한 완성물이다라고 파악했다. 문화는 문명의 정의에서 사실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공통 주제다.
문명은 가장 상위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결집체이며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적 동질성이다. 그것을 인간을 다른 종으로부터 구분짓는 본질적 특성이다. 문명은 언어, 역사, 종교, 관습, 제도 같은 공통된 객관적 요소와 사람들의 주관적 귀속감에 의해 정의된다. 사람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귀속감을 느낀다. 한 개인이 속해 있는 문명은 그가 강렬한 귀속감을 느끼는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공동체다.
종교는 문명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이다. 베버가 말한 세계 5대 종교 중에서 넷(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거대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일찌감치 2개의 가지로 갈라졌으며 그리스도교처럼 자신이 발생한 땅에서는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1세기에 들어와 중국에 유입된 대승불교는 다시 한반도, 베트남,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이들 사회에서 불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토착 문화(중국의 경우는 유교와 도교)에 의해 변형 및 수용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억압당했다. 불교는 이들 문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지만 이 사회들은 스스로를 불교 문명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으며 실제로도 그렇지 않다. 그러나 소승불교에 바탕을 둔 문명은 지금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 존재하고 있다. 한편 티베트, 몽고, 부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대승불교의 변형인 라마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이들 사회는 제2의 불교 문명 지역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도로 보았을 때 불교는 인도에서 사실상 소멸의 길을 걷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기존의 문화에 편입되고 통합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거대 종교이기는 하지만 거대 문명의 바탕이 되지는 못했다.
20세기의 거대한 정치 이념으로 우리는 자유주의, 마르크시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기독교 민주주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서구 문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정치 이념은 한결같이 서구에서 나왔다. 반면에 서구는 주요한 종교를 낳지 못했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모두 비서구 문명의 산물이며, 대부분의 경우 서구 문명보다 앞서 탄생했다. 서구가 주도하던 단계를 세계가 벗어나면서 후기 서구 문명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한 이념들의 자리를 종교 또는 문화에 바탕을 둔 정체성과 헌신의 형식이 차지하게 되었다. 서구 문명의 독특한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종교와 국제정치의 베스트팔렌식 분리는 막을 내리고 에드워드 모티머가 강조하듯이 종교가 점차 국제 문제로 침투해 들어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서구가 잉태한 정치 이념 사이의 문명 내적 충돌은 문화와 종교의 문면 간 충돌로 대체되고 있다.
3. 보편 문명, 근대화와 서구화
어떤 문명이나 문화에도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언어와 종교다. 보편 문명이 출현하고 있다면 보편 언어와 보편 종교가 나타나는 추세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30여년(1958~1992) 간의 기간을 놓고 볼 때 세계의 언어 사용 양태는 전반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 사용자의 비율은 의미 있는 하락세를 보였다. 중국어 사용자의 비율도 소폭으로 떨어졌다. 반면 힌디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아랍어, 뱅골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의 사용자 비율은 늘어났다. 1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서 영어 사용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8년에 9.8%이던 것이 1992년에는 7.6%로 떨어졌다. 세계 인구의 92%가 낯설어하는 언어가 세계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른 언어 집단,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나누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면, 다시 말해서 혼성국제어, 언어학적 용어로 세계의 주요 광역 소통어를 뜻한다면, 사정은 물론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영어는 어디까지나 문화와 문화의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체다. 국제어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수단이지 그것을 해소하는 방책은 아니다. 또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지 정체성과 귀속감을 낳는 원천은 아니다.
보편 문명이라는 개념은 서구 문명의 특징적 산물이다. 보편주의는 비서구 문화 앞에 서구가 내놓은 이념이다. 보편 문명이라는 발상은 다른 문명에서 거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서구가 보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비서구는 서구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서구가 미디어의 세계적 확산을 지구의 부드러운 통합이라고 선전할 때 비서구인은 거기서 사악한 서구 제국주의를 본다.
지금 세계에서 수많은 형태의 권위주의, 민족주의, 협동조합주의, 시장공산주의가 얼마든지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속적 이념의 용어로 파악되는 세계의 바깥에는 무수히 많은 종교적 대안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종교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동원하는 중심적인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힘이다. 소련 공산주의가 몰락했다고 해서 서구가 세계 역사에서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고 이슬람, 중국, 인도 등이 서구식 자유주의를 너도 나도 유일한 대안으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오만한 발상이다.
쇄국주의, 케말주의, 개량주의는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두고 상이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쇄국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근대화와 서구화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고 둘 다 거부해야 마땅하다. 케말주의는 근대화와 서구화가 모두 바람직하고 서구화는 근대화의 전제조건이며 둘 다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개량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서구화를 대폭 수용하지 않고도 바람직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쇄국주의와 케말주의는 근대화가 바람직한가를 놓고서 대립하고 케말주의와 개량주의는 서구화 없이 근대화가 가능한가를 놓고서 대립한다.
제2부. 변화하는 문명의 균형
4. 서구의 쇠퇴 : 세력, 문화, 토착화
서구는 21세기 전반기에도 여전히 강력한 문명의 위치를 고수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 토대, 연구 및 개발 능력, 민간 군사 양면에서 이루어지는 혁신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계속 견지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장악력은 비서구 문명의 핵심국과 주도국으로 점차 분산된다. 서구의 장악력은 192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그 후 불규칙하지만 뚜렷한 하강세에 있다. 절정기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0년대의 서구는 세계 영토의 24%(절정기에는 49%), 세계 총인구의 10%(절정기에는 48%), 사회적으로 동원 가능한 인구의 15~20%, 세계 총생산의 30%(절정기에는 70%), 제조업 생산량의 25%(절정기에는 84%), 전 세계 병력의 10% 미만을 차지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의 소생은 원리주의 종파의 활동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종교의 부활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노동, 정부의 관심사와 정부가 세우는 계획에서 두루 감지된다. 세속적 유교 문화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긍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문화적 부활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종교적 가치를 긍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종교의 부각은 옛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념의 붕괴가 남긴 공백을 채우면서 종교적 부활이 알바니아에서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을 휩쓸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정교가 크게 세력을 만회했다.
범세계적으로 종교의 부활을 가져온 가장 명백하고 두드러지고 강력한 원인은 종교의 죽음을 야기할 것으로 예측되던 원인이었다. 그 것은 바로 20세기 후반부 세계를 휩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근대화 과정이었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정체성의 원천과 권위체계가 산산조각 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뿌리를 잃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거나 실업자로 전전했다. 그들은 낯선 군중 속에 섞이고 새로운 관계틀에 노출되었다. 그들에게는 정체성의 새로운 뿌리가 필요했다. 안정된 공동체의 새로운 형식,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도덕률이 필요했다. 주류 종파이든 원리주의 종파이든 종교는 사람들의 그런 욕구에 부응했다.
5. 경제와 인구, 도전하는 문면
인구 증가는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구밀도가 높거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나라의 국민은 밖으로 진출해 영토를 점유하면서 인구 압박이 덜한 나라에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인구 증가는 이슬람 세계의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이슬람교도와 다른 민족들 사이의 분쟁에 핵심적 요인으로 등장한다. 인구 압력과 맞물린 경제 침체는 이슬람 인구를 서구와 그밖의 비이슬람 사회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이들 사회에서 이민 증가는 주요한 사회 문제도 대두된다. 한 문화의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와 다른 문화의 서서히 늘어나거나 성장이 멈춘 인구의 병존 상태는 양쪽 문화 모두에서 경제 및 정치구조 변화의 압력 요인으로 작용한다.
제3부. 문명의 새로운 질서
6. 세계정치의 문화적 재편
세계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념과 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제휴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해 가는 추세에 있다. 냉전 시대의 블록을 대신해 문화적 결속이 등장했으며 문명과 문명의 단층선이 세계정치에서 주요 분쟁선으로 변모하고 있다.
문화적 동질성이 사람들의 결속과 응집을 낳고 문화적 이질성이 반목과 갈등을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문화적 정체성은 다른 차원의 정체성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다. 낮은 수준에서 문화적 정체성이 부각되면 높은 수준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둘째, 개인적 차원에서의 혼라과 소외의 한복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정체성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사회적 차원에서 비서구 사회의 실력과 힘이 증대함에 따라 토착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근대화의 결과다.
셋째, 정체성은 어떤 차원에서든 타자, 곧 다른 개인, 부족, 인종, 문명과의 관련성 속에서 정의된다.
넷째, 상이한 문명 배경을 가진 국가나 집단 사이의 갈등 원인은 인간 집단 사이에서 갈등을 낳던 원인들과 대체로 유사하다. 가령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세속 이념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해소되지 않더라도 논의는 할 수 있다.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절충이 가능하며 원만히 타협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문화적 사안은 그렇지 않다. 아요디야에 신전을 지어야 하느냐 모스크를 지어야 하느냐를 놓고 힌두교와 이슬람교도가 벌이는 갈등은 그곳에 두 건물을 다 짓는다고 해서, 혹은 아예 어떤 건물도 짓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모스크와 신전을 절충한 형태의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사안들은 전부 아니면 전무, 다시 말해 제로섬 선택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분쟁의 보편성이다. 증오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과거의 경우 국가 간의 교역 양태는 동맹에 뒤이어 나타나거나 그와 맥락을 같이 했다. 앞으로의 세계에서 무역의 양태는 문화가 결정한다. 기업가들은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거래를 한다. 국가들은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비슷한 성향의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적 결사체에 주권을 양도한다. 경제 협력의 뿌리는 문화적 동질성에 놓여 있다.
호주의 지도자들은 아시아를 지향한 반면, 다른 분열국(터키, 멕시코,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사회를 서구에 통합시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고유문화가 얼마나 완강하고 회복력이 강하고 끈끈하며 스스로를 쇄신하고 서구로부터의 유입물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억누르고 수정하는 능력이 뛰어난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서구를 무조건 배격하는 입장도 불가능하지만 서구를 무조건 긍정하는 케말주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비서구 사회가 근대화에 성공하려면 서구의 방식이 아닌 자기 고유의 방식을 추구해야 하며 일본처럼 자신의 전통, 제도, 가치관의 바탕 위에서 차곡차곡 쌓아 나가야 한다.
제4부. 문명의 충돌
8. 서구와 비서구 : 문명 간의 관계
새로운 세계에서는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과 집단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고 대체로 적대적인 경향을 띨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관계는 문명 간의 관계다.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폭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층선은 이슬람과 이웃한 정교, 힌두, 아프리카, 서구 그리스도 문명 사이에 놓여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지배적 대립은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가장 격렬한 대립은 이슬람 사회와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날 것이며,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할 것이다.
9. 문명 중심의 세계정치 구도
문명의 갈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국지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단층선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인접국들 사이에, 한 국가 안의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간에, 옛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낡은 질서의 파편 위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선하려고 시도하는 집단들 간에 발생한다. 단층선 분쟁은 특히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버나드 루이스의 지적에 따르면 천 년 가까이 무어인이 스페인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부터 터키가 빈을 2차 포위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끊임없이 이슬람의 위협에 시달렸다.
1820년부터 1929년까지 발생한 상이한 종교를 가진 국가 사이에 벌어진 전쟁 가운데 절반이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발생했다. 갈등은 두 종교의 본질과 이들 종교에 바탕을 둔 문명의 성격에서 나온다. 한편으로 갈등은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고 초월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이슬람을 고수하는 이슬람교의 가치관과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이 빚는 대립의 산물이다. 그러나 갈등은 유사성에서도 기인한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일신교인데, 일신교는 다신교와는 달리 자기 외부의 신성을 좀처럼 수용하려 들지 않으며 세계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원적 구도로 파악한다. 둘 다 하나의 유일한 신앙을 모든 인간이 추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보편주의를 내건다. 이교도를 참다운 유일 신앙으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가 신앙인에게 있다고 보는 점에서 이 둘은 모두 포교에 커다란 비중을 둔다. 자하드 전사와 십자군이라는 평행선상에 놓인 개념은 서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주요 종교들과 이 두 종교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문명들이 역사를 순환적이거나 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함께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이해한다.
10. 과도기 전쟁에서 단층선 전쟁으로
전쟁은 모든 비이슬람 세력에 맞서 이슬람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열의를 가진 이슬람 기구들의 불안한 동맹관계를 남겼다. 전쟁은 또한 전투경험이 많은 노련한 전사들, 막사, 훈련장, 병참 시설, 이슬람 세계를 두루 연결하는 정교한 인적・조직적 연계, 소재 파악이 안된 300~500기에 이르는 스팅어 미사일을 포함한 막대한 양의 군사 장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 새로운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유산으로 남겼다.
아랍 및 이슬람 국가들은 처음에는 전쟁에 대해 분열된 입장을 보였다. 후세인이 신성한 국경선을 침해하자 1990년 8월 아랍국가연맹은 그의 행동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다수의 지지로 통과시켰다. 이집트, 시리아는 미국이 결성한 반이라크 동맹군에 상당수 군을 파견했고 파키스탄, 모로코, 방글라데시는 그보다 작은 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터키는 이라크에서 자국 영토를 거쳐 지중해로 뻗은 송유관을 폐쇄했고 연합군에 자국 공군 기지를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 이집트는 외채를 탕감받았고 시리아는 레바논을 얻었다. 반면에 PLO(팔레스타인배당기구), 하마스, FIS(이슬람구국전선)뿐 아니라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리타니, 예멘, 수단, 튀지지 등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았던 나라들이 이라크를 지지하면서 서구의 개입을 반대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타 이슬람 국가들은 중간적 입장을 취하거나 입장 표명을 유보하려고 애썼다.
단층선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나 무리 사이의 집단 분쟁이다. 단층선 분쟁은 폭력으로 비화한 분쟁이다. 이 전쟁은 나라들 사이에서, 비정부 집단들 사이에서, 혹은 나라와 비정부 집단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 나라 안의 단층선 분쟁은 지리적으로 명확히 구분된 지역에 다수의 인구가 거주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다. 이 경우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집단은 대체로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어느 정도의 요구 조건이 관철되었을 때는 투쟁을 멈추기도 한다. 날 안의 단층선 분쟁은 또 지리적으로 혼재한 집단들 사이에서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말레이시아의 이슬람교도와 화교처럼 지속적인 긴장 관계가 때때로 폭력으로 분출되든가 아니면 신생국이 들어서면서 국경선이 확정되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려는 야만적 시도가 강행되어 전면전으로 치닫기도 한다.
11. 단층선 전쟁의 역학관계
전쟁이 발발하면 복수적 정체성은 퇴색하고 분쟁과의 관련성이 가장 높은 정체성이 전면에 나선다. 그 정체성은 거의 예외 없이 종교가 정의한다. 종교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이교도 세력과의 싸움을 정당화하는 심리적 위안과 자긍심을 제공한다. 현실적으로 종교 공동체 또는 문명 공동체는 분쟁에 연루된 국지적 집단이 지원을 호수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공동체다.
정의상으로 단층선 전쟁은 더 광범위한 유대관계를 가진 국지적 집단 사이의 국지전이며, 따라서 분쟁 당사자들의 문명의 정체성을 고조시킨다.
제3부. 문명들의 미래
서구, 문명들, 문명
문명의 보편국가가 등장하면 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토인비가 말한 대로 ‘영속성의 망상’에 눈이 멀어 자기네 문명이 인류 사회의 최종 형태라는 명제를 신봉하게 된다. 로마 제국이 그러했고 아바스 왕조가 그러했으며, 무굴 제국과 오스만 제국도 다를 바 없었다.
문명이 쇠퇴하는 것은 잉여를 새로운 혁신에 투입하는 노력을 중지할 때다. 현대적 용어로 우리는 그것을 투자율의 저하라고 부른다. 이것은 잉여를 관리하는 사회 집단이 잉여를 소비로 돌릴 뿐 좀 더 효과적인 생산방식을 제공하지 못해 비생산적이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목적에만 사용할 때 발생한다. 사람들이 자본을 고갈시키면 문명은 보편국가의 단계에서 쇠락의 단계로 이행한다.
쇠락은 다시 그 문명이 스스로를 방어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자위력을 상실하여 야만족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침공의 단계로 이어진다. 침략을 감행하는 세력은 대체로 더 젊고 강력한 문명에서 나온다.
모든 문명이 출현, 상승, 쇠락의 과정을 밟는다. 서구가 다른 문명들과 차이나는 점은 문명의 전개 과정이 아니라 남다른 가치관과 제도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다원주의, 개인주의, 법치주의가 포함된다. 서구는 이런 자산을 활용해 근대성을 창안하고 전 세계로 팽창하면서 다른 문명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런 특성들의 조화는 서구만의 것이다. 서구 지도자들은 서구 문명의 고유한 특성을 견지하고 수호하고 쇄신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러한 책무를 앞장서서 떠맡아야 한다.
앞으로 대규모 문명 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핵심국들이 다른 문명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국가들, 특히 미국 같은 나라는 이 엄연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 남다른 어려움을 겪는 듯하다. 핵심국이 다른 문명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제의 원칙은 다문명, 다극 세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으뜸가는 전제 조건이다.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은 핵심국들끼리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이나 국가 간의 단층선 전쟁을 억제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해 타협을 해야 한다는 공동 중재의 원칙이다.
어떤 미국인들은 국내에서 다문화주의를 부르짖고 또 어떤 미국인들은 해외에서 보편주의를 부르짖는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둘을 모두 요구한다. 국내의 다문화주의는 미국과 서구를 위협하며 해외의 보편주의는 서구와 세계 전체를 위험하게 만든다. 이들은 서구 문화의 독특성을 부정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지구 차원의 단일 문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미국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국내의 다문화주의자들은 미국을 세계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다문화적 미국이 불가능한 이유는 비서구적 미국은 미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문화적 세계가 불가피한 이유는 세계 제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서구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서구적 정체성의 쇄신이 필요하다. 세계 안보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다문화주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일 문명은 수준 높은 윤리, 학문, 예술, 철학, 기술, 물질생활이 복합적으로 섞인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사회,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고 교육과 계몽이 확산되면서 근대화와 인간 윤리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 발전은 다시 더욱 수준 높은 문명을 자극하는 지속적 동인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에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문명의 수준은 문명들의 진화에서 나타나는 한 양상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문명이 처음 출현했을 때 대체로 사람들은 활기 있고 역동적이고 잔인하고 이동성이 높으며 팽창주의로 흐른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덜 문명화되었다. 문명이 어느 정도 발전하면 그 문명은 안정을 추구하며 자신을 좀 더 문명화시키는 기술과 기교를 닦아 나간다. 문명을 구성하는 성원들 사이의 경쟁의식이 희박해져서 보편국가가 등장하면 문명은 가장 높은 문명의 수준에 도달한다. 윤리, 예술, 문학, 철학, 기술,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한 문명이 쇠락기로 접어들면 문명의 수준도 하락하여 종국에는 더 낮은 문명 수준을 가진 새롭게 부상하는 다른 문명의 침입을 받으면서 사라지고 만다.
다가오는 세계에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은 세계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며,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질서만이 세계대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어수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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