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蒙自述 : 我的人生哲學
왕멍은 도가의 중심 사상인 무위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익하고 무효하고 무취하고 무료한 일, 더구나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 효율의 원칙이요 양생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예술이요 경지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자존이요, 사회와 역사에 대처하는 인내요 총명이라 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술(無術:술책을 쓰지 않는 것), 무모(無謨:모략이 없는 것), 무명(無名:이름을 쫓지 않는 것), 무공(無功:공을 세우지 않는 것) 등 네 가지가 없는 것(四無)의 추구를 최선으로 삼았지만, 현실 속에 보통사람은 모두 시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일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사무의 추구를 통해 술책과 모략을 멀리하고, 명망과 이욕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현실적 이해와 노력을 요구했다.
인생은 명랑한 항해
인생이 한 척의 배라면, 세계는 바다가 되고, 우리 자신은 그 배의 선장이 될 것이다. 역사의 질곡과 시대의 흐름은 마치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물의 흐름 또는 크고 작은 바람이리라. 인생은 또한 한 줄기 물의 흐름이기도 하다. 역사는 수많은 강줄기들이 한곳으로 모인 거대한 강이기에, 당신의 삶은 결코 이 강을 떠날 수 없다. 때때로 당신은 강바닥에 깔려 있는 돌들에 부딪칠 것이고, 비가 오고 광풍이 이는 것에 몸서리칠 때도 있을 것이다. 이 강물은 극격하게 굽이치거나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며, 흐름이 막히거나 어느 곳으로 흘러갈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도 당할 터이다. 당신은 그러한 여정을 통해 인생이 기나긴 길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야 당신은 길이 얼마나 짧았는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당신은 이유도 모른 채 길 위에 던져진 것이며, 이 길 위에서 멈출 수 없다. 당신은 휘청거리며 앞을 향해 나아가며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평탄하기를 기원한다. 당신은 이 길을 통해 정상에 이르거나 낙원에 도달하기를, 또는 쾌락, 성공, 행복, 아니면 최소한 편안한 종착지에 도착하여 안식에 이르기를 갈망하지만, 실제로는 한평생 하루라도 편한 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과 사람의 운명은 저마다 얼마나 다른가! 여기서 말하는 운명이란 주관적인 조건들ㅡ즉, 당신 개인이 가진 모든 특징, 모든 인식과 자세를 의미하며, 따라서 당신이 처해 있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 회피할 수 없는 것이거나 우연히 있게 된 바로 그 좌표ㅡ과 생존의 환경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우연의 존재인가. 항간에서 말하는 운수라는 것이 있고, 사람의 지위에는 높낮음이 있으며, 그가 가진 부에는 많고 적음이 있고, 수명에는 장단이 있으며, 체격에는 강약이 있다. 또한 개인의 사회환경과 자연환경에는 우열, 미추美醜, 공정과 불공정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다 비교하다 보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운명이 보다 좋아지기를 바란다.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키를 제 손에 틀어쥐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때때로 당신은 인생이란 복권 당첨과 같아서 남들은 행운 때문에 잘 풀린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남들이 산 복권은 그들에게 총명, 천부적인 자질, 좋은 가정환경, 절호의 기회, 주변으로부터의 많은 도움을 뜻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복권이 평범한 재능이거나, 재능이 있어도 기회를 얻을 수 없거나, 모든 일을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리거나, 오해, 억울함, 주변의 시기와 질투, 자신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들에 당첨되었다고 생각한다.
겨우 몇 편의 글을 썼고, 조금 더 세상 구경을 했을 뿐인 칠순 늙은이인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값진 충고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경험이나 충고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희망과 소망이 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맑고 밝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맑고 밝다'를 의미하는 명랑(明朗)이란 무슨 뜻인가? 한 사람의 성공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그의 처지는 순조로울 수도 있고, 역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떠나 마음이 평안하고, 홀가분하고, 상쾌하며, 티없이 맑고 떳떳하며, 건강하고 즐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소설가이자 시인인 나는 분노, 우수, 고통, 모순, 광분, 자멸, 자포자기, 자살, 자괴에 대한 갖가지 찬양과 찬미를 알고 있다. 또한 나는 '고통스러운 일에는 내가 앞장서고, 즐거운 일에는 남보다 뒤어 선다'는 도리와 '분노가 시를 낳는다', '지식인의 사명은 비판이다', '지혜의 고통' 그리고 '고통은 사람을 승화시킨다'라는 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의 피로 강산을 물들일 것이다', '생로병사', '내가 지옥에 뛰어들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뛰어들 것인가'라는 명언도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절대부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재능과 운명은 언제나 비껴 선다'와 같은 명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결코 백치에 가까워지는 평안함을 주장하거나 전수할 마음은 없다. 내가 말하는 쾌락과 건강, 마음의 평안과 홀가분함, 상쾌함은 노자가 말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명랑'은 초월과 비약으로 도달하는 인생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환과 고통을 이겨낸 후의 명랑함이며, 역경과 위험에 봉착했을 때의 차분함이며, 모든 인생의 고난을 능히 반추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인생의 액운에 대한 자신감이며,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책임, 사명, 비판과 분투를 평상심으로 담담하게 대할 수 있는 자세이며, 골백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백절불굴白折不屈의 의지와 대담함이다. 고난을 향해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불 속이나 물 속에서도 평지에서와 다름없이 걸을 수 있는 인생. 또한 지혜의 고민과 곤혹의 고통을 품고 있긴 하지만, 지혜의 맑음과 분명함의 기쁨도 소유하고 있기에 더욱 깊은 지혜를 포용하는 인생. 그런 삶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고아하고, 이국적인 것 같지만 토속적이며, 모든 경박함, 헛소리, 세상 사람들의 음모술수와 자만, 옹졸함, 허세를 멀리하는 인생이다.
인생의 돛단배를 몰고 한바탕 즐거운 항해를 떠나라.
당신의 항해를 더욱 맑고 즐겁게 하라.
지혜와 광명, 명랑한 지혜와 지혜의 명랑함이 당신의 삶에 영원토록 함께 하게 하라.
그런데 과연 지혜와 광명이 우매함과 어둠을 영원히 뿌리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논하고자 하는 바이다.
인생이란 집을 짓는 것
인생을 논하려면, 우선 생존에 대한 이야기부터 언급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행위는 정당한 것이며, 회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근심하지도 않고, 일을 하지도 않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밥을 먹고, 주어진 옷을 입고, 주어진 집에서 평안히 살면서 배불리 먹은 사람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면 그의 견해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을 것이다. 그의 삶은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방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에 모든 이의 삶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참고할 만한 가치는 더더욱 없다. 사람들의 생존 조건과 그 가치에 대해 무관심한 이론들은 모두 구름 한 귀퉁이처럼 비어 있는 것이거나 부당한 것이다. 무릇 생존을 위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종사하는 사업, 노동, 사유, 그리고 이에 바친 매일매일, 한 달 한 달, 일 년 일 년은 모두 값지고 달콤하며 건강한 것이다. 적어도 당신의 인생은 정당하고 정상적이며 올바른 것이다. 비록 기쁨이 생존 자체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삶의 기쁨은 생존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생존의 밖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생존은 경시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문제이며, 또한 가장 기초적인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한 국가에서는 이미 단순히 산다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만족해서도 안된다. 그런데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존 다음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했는가'이다. 그것이 삶의 가치와 질을 결정한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살아오면서 어떠한 일을 했는지 묻는 것이다.
나의 경우 대답은 두 글자, '학습學習'이다. 나의 생활 구석구석에 녹아 있는 인생의 줄거리는 바로 배움이다. 나는 배우는 것을 시종일관 멈춘 적이 없었고, 그 가치나 의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움은 언제나 나를 고무시켰고, 힘을 주었으며, 존엄과 신념, 즐거움과 만족을 주었다. 내게 배움은 가장 명랑한 것이며, 가장 홀가분하고 상쾌한 것이다. 또한 가장 즐거운 것이며, 가장 건강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티없이 깨끗하고 떳떳한 것이며, 가장 진실한 것이다.
사실은 역경에 처해 있을 때가 가장 배우기 좋은 상황이다.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여서 그 효과도 가장 크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시기에는 쉽게 방만하게 되며, 주위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ㅡ친구, 추종자, 이름을 듣고 찾아온 사람,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는 사람 등등ㅡ이 몰려든다. 이 시기에 당신은 강연을 하고, 글을 쓰며, 의견을 발표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또한 이 시기의 당신은 신념으로 가득 차 타인의 결점만 볼 것이다. 당신은 사회와 대중이 당신에게 거는 기대를 뿌듯하게 생각하고, 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각종 행사와 회식에 참석하는 횟수와 시간이 늘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당신이 확실히 그 자리에 있었음을 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역경에 처해 있을 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 구석에 던져져 있을 때, 그리고 '접촉불가', '혁명불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을 때가 바로 아무런 방해 없이 배움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이며, 사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또한 경험을 집약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반성하며 되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통해 당신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굳건하게 키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을 얻고 재주를 익히며, 자신에 대해 각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라 하겠다.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배움은 없다.
한 가지 이상의 언어를 더 배운다는 것은 단순하게 창문 하나를 더 열어 지식의 새로운 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두뇌와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번역을 통해 학습하고 교류하는 것과 직접 원문을 통해 학습하고 교류하는 것은 그 느낌과 효과가 완전히 다르다. 인류의 모든 사상, 지성, 각성, 감정 활동 내지 감각적 반사는 모두 언어와 떼어놓을 수 없다. 사상의 가장 정밀하고 미세한 부분, 감정의 가장 미묘한 부분, 도리의 가장 심오한 부분, 깨달음의 가장 오묘한 부문은 모두 원문 속에만 깃들여 있다.
배움은 내가 아직 젊다는 것, 나도 여전히 진보할 수 있다는 것, 부단히 나를 채워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배움은 내 자신의 잠재력과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고,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에 하루 한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배움은 타향에서의 고독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배움은 조잡한 취미활동과 무료한 다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고상하고 잘난 척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배움에 빠져 있으면 정말 시시콜콜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지식이며 수단이며 교량이다. 그러나 언어와 언어 학습이 당신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교류와 의사전달의 편리성뿐만 아니라, 우리 밖의 다른 민족의 특별한 지식과 간접적인 경험을 가져다준다. 즉 이것은 보다 넓은 아량, 보다 개방적인 두뇌, 새로운 사물에 대한 흥취, 더 넓은 가능성, 비교하고 감별하는 사색의 습관을 선물한다. 다 떨어진 낡은 것도 버리기 아까워하는 보수성,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황당함과 폐쇄성, 남이 뭐라 말하면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맹목성, 이것이 아니면 곧 저것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향유이다. 넓은 세계의 풍부함과 다채로움을 향유하는 일이며, 인류 문화의 모든 화려함과 상호작용하면서 인생의 쾌락을 끝없이 향유하는 일이다.
학습은 나의 뼈와 살
학습은 나의 뼈(구조)이며 나의 살(재료)이다. 학습은 나의 정신이며, 추구이며, 사명이며, 분투이다. 학습은 나의 쾌락이며, 게임이며, 지적 체조이다. 학습은 나의 기둥이자 영원히 차지할 수 없는 교두보이다. 학습은 나에게 불패의 자리를 지키게 해주는 든든한 원군이다. 학습은 사악한 세력에 대한 저항이다. 사상을 박탈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습도 박탈할 수 없다. 학습은 총칼의 위협에서도 나를 견강하게 한다. 누군가 내 몸을 위협하고나 억압할 수는 있지만, 내가 눈을 감고 묵상에 들어가 당시를 읊고, 송사를 외우고, 영국의 14행시를 암송하는 것을 제한할 수는 없다.
배움을 열망하는 학생은 피로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자만이나 자족이 무엇인지 모르며, 사람이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모든 꿈과 꿈이 없는 것, 달고 향기로운 것과 쓰고 떫은 것, 안정되고 평안한 것과 전전긍긍하는 것, 만족스럽거나 고토으러운 수면조차 다 인생의 일부부능로 인생에 계시를 주며, 몸과 마음이 더 청명하고 개방적이고 고상하고 숙련되고 건강할 것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인생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실천 중에 사상을 얻어, 관점과 원칙 그리고 방법을 익히는 사람이 사상가이다. 때무에 우리는 경험과 감각을 모아 사상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있는 사람을 사상가라고 해야 한다. 여러분 또한 좀더 깊이 있게 학습한다면, 그냥 외우거나 암기하는 단계를 지나 사상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분석, 개괄, 연상, 계몽, 가설 등이 모두 사상이다. 적어도 이것들은 초보적인 사상이다. 우리는 때로 어떤 사람을 속이 깊다고 칭찬한다. 이것은 그가 실천 속에서 사색하고 판단하며, 이를 총합하여 분석하고 탐색해서 종합할 줄 안다는 말이다. 지혜의 깊이와 실력은 우매, 미신, 무지, 천박, 무능을 제거한다.
배움은 건설의 행위와 같다. 땅을 팔 때부터 고층 건물이 세워질 때까지 한 단 한 단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과 배움의 행위는 일치한다. 또한 배움은 정신의 유람이다. 배움은 당신의 정신 공간과 깊이를 확대시킨다. 유한한 생명으로 무한한 우주와 시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배움은 또한 유한한 생명에 대한 도전이다.
입신경지에 이르기 위해
당신은 자기 주변의 모든 사물,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및 정신현상에 대해 자신만의 평가와 예측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모든 현상과 현상의 변화는 당신이 예측하고 평가한 것과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대개 당신은 한 가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목표에 대한 예측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백 퍼센트 자기 목표를 실현한 예는 드물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 봉착했을 때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무엇 떄문에 어긋났는가? 무엇 때문에 불완전한가? 당신은 미리 조언을 들었을 수도 있다. 물론 조언을 해준 그 사람은 명망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가 말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예측한 것이 당신이 예측한 것보다 더 나을 게 없을 수도 있다. 무엇 때문인가?
전심전력으로 추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는데, 자연스럽게 일을 할 때는 아주 순탄하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정성 들여 뿌린 꽃씨에서는 싹이 트지 않고, 무심하게 심은 버드나무는 잘 자라는 경우다.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은 순조롭게 되는데, 정성 들여 추진한 일은 왜 성사되지 못했는가? 무엇 때문인가?
사람의 일생에는 소중한 기회가 많이 있다. 이 기회를 통해 당신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도리를 터득할 수 있으며, 학문을 이룰 수 있다. 이 기회는 당신을 몰라보게 성장시키고 승화시키며 지혜와 광명을 획득하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는가? 하늘이 준 기회를 수없이 지나쳤고, 진리와 대도 그리고 지혜와 광명을 그만 못 보고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왜 그런가?
훌륭한 학생은 독서와 생활을 연계시키는 사람이다. 심오한 이론, 미묘한 개념, 기이한 상상을 생활 속에서 승화시킨다. 사소한 일상생활 속에 스민 심오한 도리와 재미있는 지식과 사람들의 가슴을 확 트이게 해주는 깨우침을 얻는다.
생활을 하나의 큰 책으로 보고, 한 권 또 한 권의 책을 생활의 지침과 참고로 삼거나 대화와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학습도 생활도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독서하고 사리를 터득하며 세월과 함께 전진한다면, 책과 사물은 끝이 있을지라도 사색은 무궁무진하고 응용도 무궁무진하다. 이때라면 입신경지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현실초월
품격, 풍채와 사교, 처세, 남들에게 주는 인상도 모두 오성을 필요로 한다. 총명하지만 어떤 사람은 교활한 인상을 주고, 어떤 사람은 각박하다는 인상을 주고, 어떤 사람은 폼 잡는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지가 있고 예민하다는 인상을 주며, 인의와 후덕과 대도가 있다는 인상을 준다. 똑같이 고아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시샘을 잘한다느 인상을 주는 데 반해,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다같이 학문이 박식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학문을 자랑하는 인상을 주는 데 반해, 어떤 사람은 성실 근면하며 본색을 잃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아무리 가슴을 치며 주장을 해도 그를 믿는 사람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방비를 엄격하게 한 것 같지만 너무도 빈틈이 많다. 어떤 사람은 정색해서 질책하지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이 모든 것은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하고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자기 스스로 깨닫는 데 달렸다.
학습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하나이고 둘은 둘이라는 식으로 암기만 하는 학습은 일반적인 학습이다. 하나를 배워 여럿에 통하고, 하나의 사리를 통해 다른 여러 사리에 이르며, 학습을 통해 학습 방법을 파악하고, 학문 법칙을 파악하고, 학습과 학문의 맥락을 깨우친다면 들인 공부다 훨씬 큰 효과를 보게 된다. 이때라면 마치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 것과 같으며, 눈앞이 환하게 열리며 문득 깨우치게 된다. 이것을 오성이라 한다.
속담에 "사리를 아는 사람과 다툴지언정 얼떨떨한 사람과는 상대도 안한다"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의 목적은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을 아는 데 있으며, 쉽게 파악하는 것과 어렵게 파악하는 것을 아는 데 있으며,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것과 눈길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을 아는 데 있으며, 표면적인 것과 내면의 속깊은 이치를 구별하는 데 있다. 때문에 이런 사람과는 논쟁하는 일조차 아주 상쾌하지 않겠는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상투 끝까지 성을 내고,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가장 잘난체하고, 유치한 사람일수록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게다가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을 적대시한다.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대인관계
인간관계의 문제는 결국에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래서 덕망이 높고 품위가 있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 같은 문제는 귀담아듣지도 않는다. 인간관계의 문제에는 과장과 포장된 내막과 화풀이가 많으며, 억지로 꾸며대거나 중요한 것은 피하고 가벼운 것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말을 꾸며대고, 흑백을 뒤바꾸는 짓이다. 당신은 도리의 올바름과 하늘의 도리와 자신의 양심을 수호한다고 분분히 날뛸 터이지만, 사람들은 당신의 고민에 관심이 없으며, 인간관계의 분쟁에는 깊이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당신들의 끝도 없는 갈등을 지극히 재미없는 노릇이라고 여기고 있다. 반드시 명심할 일이다.
열병을 피하듯 갈등의 그물을 가급적 피해야 하며, 의미 없는 갈등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또한 누구와 동맹을 맺는 것을 피해야 하며, 누구를 적대시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가 가장 훌륭한 처사이다. 그런데 왜 누군가와 동맹을 맺는 것도 피해야만 하는가?
첫째, 동맹을 맺으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처음 당신은 같은 지향점과 이념이 있어 동맹을 맺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동맹은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변한다. 이익집단으로 변하면 한 사람이 망함에 따라 같이 망하고, 한 사람이 흥함에 따라 같이 흥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이 민중의 적이나 깡패 집단이나 사교의 이용 도구로 전락했던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당신도 그 동맹에서 일정한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동맹은 하나의 세력이 되어 당신은 그 어디를 가든 동맹의 힘을 업고 호가호위한다. 내가 당신을 돌봐주고 당신이 나를 돌봐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응원대에 과연 성인이 몇명이나 되겠는가? 당신은 소수의 사람들을 자기 주변에 묶어 두겠지만, 정작 더 많은 사람들의 노여움과 미움을 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나쁜일을 저질렀을 때 당신은 그들을 대신하여 책임을 져야 하며, 그 욕을 대신 받아야 한다.
인간관계란 절대로 일방통행이 아님을 기억하라. 남들에게 당신이 하는 대로 따르라고 지시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들의 모든 일을 돌봐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간이나마 자신의 이익을 포기했다면, 당신은 그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노여움을 살 준비를 해야 한다.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의무는 다른 사람에게 감당하라고 요구하지 말하야 하며, 당신이 희생할 생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똑똑한 체하며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를 대신해 적을 치는 것을 원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뒤에 숨어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한다. 사실 이것은 교활한 속임수이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가변적인 것이다.
오늘은 매우 사이가 좋지만 내일은 틈이 생길 수 있으며, 오늘은 아무런 불편없이 협조가 잘 되다가도 내일이면 딴 주머니를 찰 수도 있다. 주변사람들과 관계를 잘 처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알력과 곤혹이 생기고 의심이 생기는 것에 너무 마음 아파할 필요는 없다. 화를 내거나 당황하거나 어쩔줄 몰라 할 것이 아니라, 한 가닥 웃음으로 흘려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천리에 집을 지어놓아도 헤어지지 않는 파티는 없는 것이니. 기쁘게 모였다가 기쁘게 헤어지는 것이 군자의 사귐이다.
세상에는 당신 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다. 도리가 분명하고, 기세가 당당하며, 언어가 비수처럼 예리하다 하더라도, 권위가 하늘에 걸린 해와 같다 하더라도, 당신이 비판하고 설명해도 그가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뿐이다. 이 경우 당신은 자신의 관점만 설명하면 된다. 이때 편견이 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고 당신의 관점을 알게 된다. 그러나 늘상 경우에 맞지 않게 행동하며 우쭐대는 사랑은 쟁론을 일삼는다. 임금이 되어 어딜가나 환호성이 터지는 그런 날이 있을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정말 그런 날이 온다 한들 그것은 지극히 무료한 일이며, 영원히 믿을 바가 못된다.
인간관계란 소홀해서 손해를 보는 것보다 너무 총명하고 타산적이어서 손해를 보는 것이 더 하책下策이다. 명심할 일이다.
무위란 무엇인가?
무위란 것은 본래 도가철학이다. 여기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무위는 무효하고 무익하고 무의미하고 무료하며, 해롭고 상처를 주며, 손해를 주거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은 한평생 많은 일을 하게 된다. 하루에도 많은 일을 한다. 성과ㅡㄹㄹ 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이 성과를 거두었을 때 질투하지 않는 것이다. 쓸데없는 논쟁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옹졸하게 손해를 볼까 근심걱정하지 안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큰소리를 치지 않는 것이며, 떠들썩하게 자기를 포장하지 않는 것이다. 쓸데없는 말을 빨랫줄 마냥 길게 늘어놓지 않는 것이다. 실현하지 못할 많은 일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통행으로 많은 정력과 활동을 소모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가장 쉽게 범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착오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표준으로 삼아서 남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표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남을 너무 낮게 평가한다. 뒤의 경우는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남들도 선호한다고 오판하여 자기의 표준이 바로 우리 모두의 표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먼저 남을 낮게 평가하는 문제를 논해보자. 대부분의 위인들은 자신을 하향 평가하여 전진해야 할 때 전진하지 못해 승리를 놓친 예가 거의 없다. 또 지나치게 겸손해 중요한 임무를 남에게 맡긴 예도 아주 드물다. 그런데 세상을 호령하는 데 익숙한 이런 사람들은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점진적으로 일을 추진해야 하는 것에는 약하다. 말하자면 호풍환우하기는 쉬워도 질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일은 몹시 어려워한다. 그는 첫 시작을 크게 전개하기는 해도 훌륭한 결말을 짓지는 못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결함을 잡아내기는 쉽지만 자기 결함을 알기는 어렵다.
인생의 연소 원칙
다양한 인생의 유형과 결과는 청년시절에 그 실마리가 있다 그 시기에는 생활에 몰입하고, 사랑과 배움에 몰입하고, 일에 투신하며, 사회와 인간에 대해 당연히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생활은 어렵고, 사랑은 보일 듯 말 듯 하고, 배움의 길은 아직 멀고도 멀며, 사회는 알 듯 모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해 불평이 많다. 하지만 당신은 청년 시절에 모든 정력을 다 바쳐야 하며, 모든 힘을 경주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당신이 쟁취할 수 있고 쟁취해야만 하는 모든 지쳬와 가치를 획득해야 한다.
나는 큰 포부를 세워야 한다는 중국 고대 철인들의 슬로건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은 사회와 대중, 국가와 민족, 나아가 인류에 공헌을 해야 마땅하다. 확실히 전력투구하고, 충분히 연소하여 열과 빛을 냈다면,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향유한 것이다. 한 사람은 한 에너지의 발원지이다. 사람의 일생은 곧 연소이다. 즉, 에너지의 충분한 방출이다. 에너지를 방출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연소해야 한다. 빛과 열이 없고, 연소하지도 않는다면, 조금 타다가 불을 끈다면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너무 커다란 고통일 것이다.
인생이란 생명이 한차례 연소하는 과정이다. 생명의 연소는 아름다운 빛을 뿌릴 수 있고,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다. 빛과 열이 제한되어 있을지라도 일 할의 열이 있으면 일 할의 열을 방출하고, 일 할의 빛이 있으면 일 할의 빛을 낸다.
당신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몇십년 생명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신은 덕망이나 공훈, 학설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의 에너지는 충분히 방출해야 한다. 당신의 모든 노력은 보답이 없을 수도 잇다. 예술 창작에 투신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거나, 경영에 투신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거나, 전투에 참가했지만 패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을 '결재'하는 날에 자신 있게 전력투구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당신은 포부도 있고 장래성도 있는 확실한 길을 선택했으나, 조건이 구비되지 못해 승리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포부도 없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노력도 하지 않고, 의지가 박약하고, 마음이 좁고, 요행만 바라며 불평만 하다가 아무 성취도 이루지 못했는가? 당신은 이것을 구분해야 한다. 앞의 경우라면, 나는 당신에게 비장한 경의를 표하며 당신의 이야기를 글로 엮어 독자들이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반면 뒤의 경우라면, 과연 누가 그것을 시정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미봉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동정하겠는가?
인생은 하나의 과정이며, 시간이며, 에너지 방출 반응이다. 중요한 것은 참여이며, 투입이며, 있는 힘을 다 바치는 것이다. 이긴다면 물론 기쁜 일이지만, 져도 영광이다. 오직 전력투구했다면, 인생을 결재할 때는 패자의 눈물조차 뜨거울 것이며, 무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하지 않고 세월을 흐지부지 흘려보냈다면, 눈물을 흘리려고 해도 흘릴 눈물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지향과 열정, 기대와 경험, 능력과 신심, 의지와 정신의 집중력은 때로 균형을 잡지 못한다 젊었을 때는 열정이 높고, 지향이 크며, 기대가 간절하다. 그 대신 경험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며, 신심이 부족하여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즉, 정신적 수용력이 부족하다.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 자신이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 파악되었다면, 그때는 좌절도 두렵지 않다. 그 대신 이미 습관화되었기 때문에 격동이 적고, 신선한 감각도 없다. 물론 이때 자신을 다시 연소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젊었을 때 고생하는 것은 객관적 조건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이 든 사람보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당신은 어느 한 영역에서 인정받게 되고 신뢰받게 된다.
자기를 표준으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선호를 기준으로 객관적 존재를 판단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추운 북방에서 오신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에게 두툼하게 옷을 입힌다. 온몸에 땀을 흘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의 옷을 벗긴다. 부모가 배고프니까 아이들한테 더 먹으라고 한다. 부모가 배부르면 아이들이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꾸짖는다. 부모가 자려 하면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고 꾸중한다. 부모가 독서를 즐기려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꾸중한다. 부모가 속상할 때면 무턱대고 아이들을 못 살게 군다.
초탈
초탈은 한 순간 한 곳의 무모한 열정에서 일탈하는 힘이며, 개인의 이해관계에서 일탈하는 힘이다. 그리고 냉정함을 유지하고, 전반적 국면을 유지하며, 사색과 선택을 쉬지 않으며,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초탈은 가장 열렬하면서도 동시에 맑은 정신과 자제력으로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한다.
초탈이 없으면 경지가 없어 객관적이 되지 못하고, 전면적이 되지 못하며, 자신을 정시하지 못하고, 자아 조절을 하지 못하고, 발전과 진보가 없다. 자신을 과장하여 자기 자랑만 하고, 공연히 남을 원망하고, 객관적 견해를 탓하고, 울고 불며 자기 공헌을 확대하고, 공연히 격동되어 자기 감정을 토로하는데, 이는 정말 꼴불견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중국 고대 속담 중에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진한다(知其不可而爲之)"는 말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비장한 말은 없다. 당신은 입신경지에 도달하거나 마음의 평온함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가능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정신이 있어야 하며, 성공과 고상함과 높은 경지를 추구함과 동시에 좌절과 실패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결단과 용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추진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행위가 아니다. 더군다나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자기의 주장이나 견해를 보여주는 것은 입에 발린 구호가 아니다. 잘 우는 고양이가 취를 못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용맹하다는 사람이 공을 세운 것이 없고, 덕을 쌓았다는 사람이 명망이 없는 것처럼 때가 되지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마치 메가폰을 들고 높은 소리로 고독을 제창하는 것과 같다. 이런 짓은 제발 그만 두는 것이 좋다.
젊은이들의 교향곡은 금방 연주를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으며, 훌륭한 기록을 남길 수 있다. 역사를 정시한다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행운인지 알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그것을 추진해야'하는 숙명에 처해 있지 않다. 그들은 무엇을 하면 반드시 할 수 있다. 노력하는 만큼 반드시 잘된다. 반드시 크게 된다. 무엇 때문에 주저하고, 무엇 때문에 하지 않는가? 물론 다른 저쪽에서는 무가치한 유혹이 당신의 눈을 흐리고 있다. 권세에 아부하여 자기 생존의 텃밭을 가꾸려고 하는 것, 다리 저는 노루가 한 곬에 모인다는 속담처럼 공동의 사욕을 위해 모략을 짜는 것, 법규를 위반하는 것,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짓는 것 등도 당신의 눈을 가리려 한다. 이때 당신은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지혜와 광명을 발휘할 수 있는가 없는가? 명쾌하고 환한 인생의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 사악을 피하고, 편협을 피하고, 야만을 피하고, 우둔함과 범법을 피할 수 있는가 없는가?
당신들의 성공을 충심으로 충원한다.
마음만 늙지 않는다면 행복이 오네
"석양은 한없이 아름다우나 황혼이 멀지 않네"
이 시에는 감상적인 면도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면도 없다. 고금의 사람들이 인생의 황혼을 어떻게 미화하든 시인은 이를 한 마디로 일축했다. 황혼은 적어도 아주 장려한 미가 있다. 당신이 이 미를 감상하지 않고, 감상하려 하지 않고, 감상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 아름다운 풍광마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노년기를 향유한다'라는 말이 있다.
'황혼 철학'은 노년기에 진입한 사람들에게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에게도 의의가 있다. 노년기에 진입했을 때 충분하게 회고할 밑천마저 없으면 만년에 생명을 즐길 재능과 취미마저 없다면 그것은 인생의 비애이다. 이제 우리 함께 '마음만 늙지 않는다면'이란 노래를 부르자. 생명은 한결 더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 친구가 나에게 나이 들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기 일이고, 둘째는 친구이고, 셋째는 취미라고 말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노년기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 풍파를 겪어보았으며, 견식이 있고, 자유로우며(적어도 시간을 분배하는 문제에서), 성숙되었고 초탈했다.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고, 인생을 담론하고, 젊은이들과 담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추억과 상상의 날개를 달고 사상을 자유자재로 비상시킬 수 있다. 추억과 상상의 날개를 달고 사상을 자유자재로 비상시킬 수 있다. 힘이 닿는 대로 할 만한 일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별미일 것이며, 분석과 진리 탐구의 취미일 것이다 즐길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휴식과 조용한 관찰과 양생과 추억이 많아질 것이다. 독서와 음악과 서화에 심취하여 도끼자루 썩는 줄 몰라도 좋고, 모르거나 마작이나 트럼프나 장기를 두며 음풍농월을 해도 좋고 등산도 좋다. 사람이 늙으면 자연히 승패에 대한 집착이 적어지고, 경쟁심이 적어지고, 긴장과 압력이 느슨해진다.
인생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시간과 경험과 학문과 순수하고 깨끗한 심정이다. 그러나 늙으면 이 방면의 '밑천'이 많아진다.
노년은 향유의 계절이다. 생활을 향유하고, 사상과 경험을 향유하고, 관찰을 향유하며, 푸근함을 향유하고, 외로움을 향유하고, 적당한 고독을 향유한다. 추억을 향유하고, 희망을 향유하며, 우의와 취미를 향유하고, 자유로움을 향유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철학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노년은 또한 화해의 나이다. 운명과 생명과 삶의 한계와 역사 법칙과 천도와 우주 자연, 인류 문명과 화해하는 나이이다. 화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내막을 알 수 있고, 그 내막을 다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터득하는 바 있으며, 터득이 없더라도 의문과 의심이 풀려 개운함을 느낄 것이다.
세상의 많은 일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굳이 시비를 가리고 장단을 가리려고 하는 것은 취할 바가 아니다. 나는 말 한마디에 의기투합하지 않는다고 즉시 절교하겠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과거 한때 당신과 아주 친밀한 친구가 요즘은 왠지 전보다 내왕이 뜸해졌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 의아해하며 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정말 무의미한 일이다. 교류가 많고 연계가 많은 것은 물론 기쁜 일이지만, 그렇다고 교류가 적고 연계가 적은 것이 우려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바쁜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든 친구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 진행하고 경영하고 추진하는 일들이 따로 있다. 이 모든 것을 모든 친구들에게 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누구는 전화요금을 적게 쓰기 위해, 누구는 급한 일에 봉착하여, 누구는 심기가 불편하거나 몸이 불편해서 당신 앞에 웃음을 보여줄 수 없는 처지에 있을 것이다. 가령 당신이 이처럼 요구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남들에게 밉게 보이지 말라
가장 밉게 보이는 사람들은 아는 체하는 안하무인이며, 사람을 만나면 자기 자랑에 급급해 남을 공격하는 사람들이다. 남들이야 듣든 말든 자기 말을 계속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위협하여 남을 지배하려 든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하찮은 취미라도 있기를 축원한다. 마작이나 트럼프라도 몇 번 더 하기를 바란다. 하다못해 불륜의 정사라도 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방책일 것이다. 법률과 도덕이 그들을 통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활의 주인
우리는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될수록 일찍 자기의 취미와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 좋다. 그 중에서도 학습에 습관과 취미를 붙이는 것이 가장 좋다. 자기의 학습 세계를 개척하는 것은 정말 인생 최고의 취미이다. 배우는 거은 비준하는 것도 아니고, 기한을 따로 연장할 필요도 없고, 초빙하는 것도 아니다. 학습은 인생의 낙이며, 특기는 든든한 의탁처이다.
인생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이 인생에 관심을 갖는 것인가? 아니다. 인생 자체가 바로 생활의 철학이다. 인생에 대해 깊이 사색한다면 짝을 이루는 개념이 저절로 눈 앞에 나타난다. 이를테면 희열과 감상, 선략과 추악, 관용과 질투, 고상함과 속됨, 미와 추, 경박함과 점잖음, 환락과 번뇌, 세속적 정서와 엘리트 추구, 사업과 가정 등 상대적인 개념이 당신의 해석을 기다린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매일 봉착하는 생활이며, 모든 사람이 완전히 피해 가지 못하는 문제들이다.
생활 자체가 철학이라 할 때 우리는 철학적 자세로 생활에 응해야 한다. 이런 철학의 입장은 실제적이어야 하며, 이원론적이어야 한다. 형이상학적이고 편면적이며 즉흥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인생의 고비를 피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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