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bout Humanities

성찰 by 르네 데카르트

by hoyony 2016. 10. 3.

Meditation on First Philosophy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탐구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2012 
Descartes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파리 신학부에 보내는 편지

 

가장 현명하고 가장 고명한 신성한

파리 신학부의 학부장 및 박사님들에게

 

제가 이 책을 여거분에게 헌정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이유에서이며, 여러분께서 이 책의 의도를 이해하신다면, 이 책을 보호하는 매우 정당한 이유를 가지시라고 확신하므로 이 책을 여러분께서 좋다고 인정하시기를 바라면서, 제가 이 책에서 의도한 것을 간단히 말씀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과 영혼이라는 두 가지 문제는 신학보다도 오히려 철학에 의해서 논증될 문제들 중 가장 주요한 것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멸하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신앙에 의하여 믿으면 되는 것이지만, 비신자에게는 이 두 가지 것을 먼저 자연적 이성에 의하여 증명해 주지 않으면 어떠한 종교나 또 거의 어떠한 도덕상의 덕도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신자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이 두 가지 것을 증명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하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두 문제에 관하여 위대한 사람들이 내어 놓은 거의 모든 논거는 잘 이해되기만 하면 논증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 이미 다른 사람이 내어 놓지 않은 새로운 논거를 생각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모든 논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을 주의깊게 찾아내어 아주 엄밀하고도 명확하게 해명하여, 이것이야말로 참된 논증이라고 앞으로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한다면, 철학에 있어서 이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에게 드리는 서언

 

하나님과 인간의 정신에 관하여 나는 이미 조금 전에 1637년 프랑스어로 간행된 <이성을 잘 인도하고 뭇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서설>에서 약간 언급한 바 있다. 난 거기서 이 문제들을 철저히 다루지는 않고, 다만 지나가는 길에 언급하여, 독자들의 판단을 듣고 후일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알려고 했을 따름이다.

 

하나님의 현존을 공격하기 위하여 무신론자들이 내어 놓은 의론은 언제나 다음의 두 가지 것 중 하나에 의존한다. 하나는 인간적인 정념들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과 하셔야 할 일을 결정짓고 이해하려고 할 만한 많은 힘이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직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이해를 초월하여 계시고 무한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논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아무 두려움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사람들의 판단을 알게 되었으며, 여기서 다시 하나님과 인간 정신의 문제를 논함과 동시에 제1철학 전체의 기초를 논하고자 한다.

나는 먼저 이 여러 성찰에서 나로 하여금 진리의 확실하고 명증적인 인식에 도달케 했다고 여겨지는 여러 고찰을 전개하고, 나를 설득시킨 여러 근러로써 다른 사람들도 설득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려 한다.

 

<성찰 1>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이미 여러해 전에 나는 깨달은 바 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많은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 왔고, 그 후 내가 그것들 위헤 세운 것은 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므로 학문에 있어서 언젠가 확고부동한 것을 세우려고 한다면 일생에 한번은 전에 받아들였던 모든 의견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토대를 쌓기 시작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일이라고 여겼으므로 나는 이 일을 하기에 더 적합한 때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성숙한 연령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연기해 왔으므로 아직도 주저하여, 남아있는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면, 이제부터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다행히 오늘 내 정신을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고 평온한 여가를 얻어 홀로 조용히 들어 앉아 있으므로, 진지하고도 자유롭게 전에 내가 가졌던 모든 의견을 온통 무너뜨리는 일을 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내가 참되다고 여겨 온 모든 것을 나는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는 이 감각들이 가끔 속인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한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하여는 결코 전폭적인 신뢰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과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들에 관하여는 감각이 가끔 우리를 속이지만,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 가운데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가령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난롯가에 앉아 있다는 것, 겨울옷을 입고 있다는 것, 이 종이를 쥐고 있다는 것, 이 밖에 이와 비슷한 것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 나의 이 손과 이 몸이 내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내가 미친 사람들 축에 끼여 들어가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연학, 천문학, 의학 및 이 밖에 복합된 것들의 고찰에 의존하는 모든 학문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들이지만, 대수학, 기하학 및 이런 성질의 학문들은 극히 단순하고 극히 일반적인 것들만을 취급하고, 또 이런 것들이 자연 속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내가 깨어 있건, 잠들어 있건 2에 3을 더하면 언제나 5이고, 4각형은 네 변밖에 가지지 못하며, 또 이와 같이 분명한 진리들이 허위의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참되다고 믿은 것들 가운데 지금 내가 의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바, 이렇게 의심함은 무시나 경솔함 때문이 아니요, 아주 유력하고 숙고된 이유에서이며, 따라서 내가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찾고자 한다면, 이러한 의론에 대하여도 분명히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처럼 조심하여 이제부터는 동의를 삼가야 되겠다고.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런 것들을 항상 염두에 두도록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오래된 의견들이 줄곧 되돌아와서는 이를테면 오랜 습관과 친숙하게 된 연줄로 말미암아 이 의견들에 매여 있는 나의 쉽게 믿는 마음을 내 의사에 거역하면서까지 점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 의견들을 사실 있는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동안은 즉 방금 위에서 말한 것처럼 좀 의심스럽기는 하나 그래도 매우 그럴듯하기도 하여, 그것을 부정하기 보다는 믿는 것이 훨씬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나는 결코 그 의견들에 동의하고 신뢰하는 습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지를 아주 반대 방향으로 돌여 나 자신을 속이고 얼마 동안 이 의견들이 거짓되고 공상적인 것이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마침내 쌍방의 편견의 무게가 평형을 얻도록 하여, 다시는 삐뚤어진 습관이 내 판단을 사물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하련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은 조금도 부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한다고 해도 아무 위험도 잘못도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또 지금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식에 관한 것이므로, 아무리 불신을 일삼아도 지나치지는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리의 원천인 최선의 하나님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고 유능하고 교활한 어떤 악한 영이 온갖 재주를 부려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하련다. 하늘, 공기, 땅, 빛깔, 모양, 소리 및 모든 외적인 것은 악한 영이 내 쉽사리 믿는 마음을 움켜쥐기 위하여 사용하는 환영이요 속임수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련다. 또 나 자신은 손도 없고 눈도 없고 살도 없고 피도 없고 아무 감각 기관도 없고, 다만 잘못하여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련다.

나는 완강하게 이 생각을 견지하련다. 이렇게 하면 어떤 참된 것을 인식하는 것이 내 힘에 겨운 일이라 할지라고 거짓된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저 기만자가 아무리 유능하고 교활하더라도 나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련다.

 

그러나 이거은 힘든 기도요, 조금만 게을러도 나는 평소의 생활 태도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마치 꿈속에서 공상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는 죄수가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할 때, 잠을 꺠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달콤한 환상을 그대로 즐겨 가기를 갈망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슬그머니 옛 의견들에 다시 잠겨 들다가 그 잠에서 때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다. - 그 안락한 휴식 다음에 고통스러운 각성이 계속되고, 빛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방금 위에서 제기된 난문들의 빠져 나오기 어려운 암흑 속에서 지내야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성찰 2> 인간의 정신의 본성에 관하여 ; 정신은 신체보다 인식되기가 더 쉽다는 것 

 

나는 내가 보는 모든 것이 거짓되다고 가정한다. 망상으로 가득 찬 기억이 나에게 보여 주는 것은 모두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믿기로 한다. 아무 감각기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물체, 모양, 연장, 운동, 장소는 환영일 따름이라고 믿기로 한다. 그렇다면 참된 것은 무엇인가?

아마 한 가지, 즉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방금 위에서 내가 든 것들과는 다른 것으로서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 어떤 하나님이, 혹은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치 한으면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은데, 어떤 전능자가 이러한 생각들을 내 속에 넣어 주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왜 나는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나 자신이 이러한 생각들의 창조자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어떤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이미 내가 어떤 감각 기관과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무엇이 귀결될까 하면서 주저한다. 나는 신체나 감각 기관에 매여 있어서 이것들 없이는 현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세계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하늘도 땅도 정신도 물체도 없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나도 없다고 설득한 것이 아니었던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떤 것을 설득했다고 하면 확실히 나는 있었따.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있어서, 온갖 재주를 부려 항상 나를 속이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나를 속인다고 하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가 마음껏 나를 속이게 하라.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어떤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이리하여 여기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고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나서 다름과 같이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라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말할 때마다 혹은 정신에 의하여 파악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그러나 나는 이제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내가 무엇인지 아직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색을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나를 무엇이라고 믿고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련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가졌던 의견들 가운데서 위에 말한 이유들에 의해 조금이라고 틀렸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제거해 가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오히려 전에 나란 무엇인가를 고찰했을 떄마다 저절로 내 본성에 인도되어 내 정신 속에 떠오른 것이 무엇이었던가에 주의해 보고자 한다. 그때 맨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얼굴, 손, 팔 및 모든 지체로 된 기ㅣ계 전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기계는 시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나는 이것을 신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다음에 내 정신 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영양을 섭취하며 걸어 다니며 감각하며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모든 활동을 영혼에 관련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주의하지 않거나, 혹은 그것이 바람이나 불이나 공기와 비슷한 미세한 어떤 것으로서 신체의 투박한 부분들 속에 퍼져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체 즉 물체에 관하여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본성을 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하나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지하며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상상하며 감각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고 할진대, 확실히 이것은 적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왜 이것들이 속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 거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러나 몇 가지 것을 이해하고, 이 한 가지 것만은 참된 것으로 긍정하고,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고,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며, 속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많은 것을 상상하며, 또 감각으로부터 온 많은 것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아 나 자신이 아닌가?

 

나는 또 상상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앞서 상정한 바와 같이 비록 상상한 것들이 모두 참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상하는 힘 자체는 참으로 있고, 내 생각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는 또한 감각하는 자이다. 즉 물체적인 것들을 마치 감각 기관을 통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보며 들으며, 몸이 따뜻해짐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이야말로 본래 내 속에서 감각된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성찰3> 하나님에 관하여 ; 그는 현존하신다는 것

 

내 생각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를테면 사물의 상들이요, 오직 이것들에 대해서만 본래 관렴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그런데 다른 것들은 이 밖에 다른 어떤 형상들을 가지고 있다. 가령, 내가 무엇을 원할 때, 두려워할 때,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 나는 물론 언제나 어떤 사물을 내 생각의 대상으로 파악하지만, 또한 이러한 생각을 통하여 그 사물의 관념에 무엇인가 더 보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종류 가운데, 어떤 것은 의지 혹은 감정이라 불리고, 어떤 것은 판단이라 불린다.

 

관념들은 그 자체로만 보고 다른 것들과 관련시키지 않으면, 본래 거짓된 것일 수 없다. 내가 산양을 상상하건, 키마이라를 상상하건, 상상한다는 것 자체는 그 어느 경우나 똑같이 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의지 자체나 감정 자체에서도 허위가 끼어들 수 있을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사악한 일을 바랄 수 있고, 심지어 어디에도 없는 것을 바랄 수 있기는 해도, 내가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은 참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판단에 있어서 저지르기 쉬운 중요하고 가장 흔한 오류는 내 속에 있는 관념이 내 밖에 있는 사물과 닮았다, 혹은 일치하고 있다고 내가 판단하는 데서 성립한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관념들을 오직 내 생각의 양식으로만 보고, 이것들을 내 밖에 있는 것에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할 수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념들 중 어떤 것은 생득적인 것이고, 또 다른 것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온 외래적인 것이고, 또 다른 것은 나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는 사물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는데, 이런 이해를 나는 다름 아닌 내 본성으로부터 얻고 있는 듯싶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태양에 대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관념을 내 속에서 발견한다. 그 중의 하나는 감각에서 생긴 것이요, 위에서 내가 외래의 것이라고 한 종류에 속하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면 나에게는 태양은 극히 작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천문학상의 여러 이유에서 가지게 된 것, 즉 내가 타고난 어떤 생득 개념에서 가지게 되었거나, 혹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 나 자신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서, 이것에 의하면 태양은 지구보다 몇 배나 커 보인다. 물론 이 두 관념은 어느 것이나 내 밖에 있는 동일한 태양을 닮고 있는 것일 수는 없다. 그리고 이성은 태양 자체로부터 직접 나온 것으로 보이는 관념이 태양을 가장 닮지 않은 것임을 나에게 확신시킨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내가 나와는 다른 것들이 내 밖에 있고, 그것들이 내 감각 기관을 통해서, 혹은 다른 어떤 수단으로 그 관념들 혹은 형상들을 내 속에 보낸다고 믿은 것은 확실한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어떤 맹목적인 충동에 의해서였음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내 속에 그 관념이 있는 것들 가운데 내 밖에 정말 현재하는 것이 있는지를 찾는 데는 또 하나 다른 길이 있다. 즉, 그 관념들이 단순히 어떤 사고방식인 한 나는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모두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중의 어떤 관념은 이것을, 다른 관념은 저것을 나타내고 있는 한, 그 관념들은 서로 크게 다르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실, 실체를 나에게 나타내어 주는 관념은 그저 양태, 즉 우유성만을 보여주는 관념보다 틀림없이 더 큰 어떤 것이요, 이를테면 더 많은 객관적 실재성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에 의하여 내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관념, 즉 영원하고 무한하고 전능하며,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관념은 유한한 실체들을 나에게 보여 주는 관념들보다도 더 많은 객관적 실재성을 자기 속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작용적이고 전체적인 원인 속에는 적어도 그 결과 속에 있는 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결과는 그 원인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로부터 그 실재성을 얻을 수 있는가? 또 원인은 자기 속에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실재성을 결과에게 줄 수 있는가? 여기서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길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더 완전한 것, 즉 더 많은 실재성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덜 완전한 것으로부터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적 즉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 결과에 있어서만 아니라, 또한 그저 객관적 실재성만이 고려되는 관념에 있어서도 분명히 참되다.  

 

내 속에 있는 관념들은 마치 영상과 같은 것이요, 그것들은 거기서 나온 사물들의 완전성을 잃기는 쉬우나, 이 사물들보다 더 큰 것, 더 완전한 것을 포함할 수는 절대로 없다.

만일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 중 어떤 것의 객관적 실재성이 대단히 커서 그 실재성이 형상적으로도 또 우월적으로도 내 속에는 없고, 따라서 나 자신이 그 원인일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라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나 혼자만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이 관념의 원인인 다른 어떤 것도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관념뿐이요, 이 관념 속에 나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은 어떤 것이 없는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는 것은 무한하고, 독립해 있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나 자신을 창조하였고, 또한 나 이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의 실체이다. 실로 이 모든 성질은 주의 깊게 살펴볼수록 나 혼자부터만 나왔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늬 무한한 실체의 관념이 참으로 무한한 어던 실체로부터 나와서 내 속에 있게 되지 않는 한, 나는 그러한 관념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에 의하여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써 지각하고, 어둠을 밝음의 부정으로써 지각하듯이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써만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무한한 실체 속에는 유한한 실체 속보다 더 많은 실재성이 있다는 것, 따라서 무한자, 즉 하나님의 개념은 유한자 즉 나 자신의 개념보다도어느 의미에서 먼저 내 속에 있음을 내가 명백히 이해하기에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의심하고 바라고 한다는 것을 내가 이해하는 것은, 즉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아주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내가 이해하는 것은, 보다 완전한 어떤 존재의 관념이 내 속에 있고, 이것과 비교하여 내 결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긜고 아마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것처럼 항상 있었다고 가정해도 위의 추리의 힘을 피할 수는 없고 하난님이 내 현존을 있게 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생애의 시간 전체는 무수한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전혀 의존하지 않으므로 내가 조금 전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은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다시 한 번 창조하는 일, 다시말하면 나를 보존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사실, 시간의 본성을 주의하여 살피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이나 그것이 지속되는 각 순간에 보존되려면, 그것이 아직 있지 않았을 때에 새로 창조되는 데 필요했던 것과 똑같은 힘과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보존과 창조는 다만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있어서만 다를 뿐이요, 실지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도 역시 명백한 일들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지금 있는 나를 조금 뒤에도 있게 할 수 있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그런데 나는 하나의 생각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므로, 혹은 적어도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나 자신 속에서 생각하는 부분이므로, 만일 그러한 힘이 내 속에 있었다고 하면 확실히 나는 그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이 있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실로부터 내가 나와는 다른 어떤 존재에 의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러나 이 존재는 하나님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부모나 하나님만큼은 완전하지 못한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인 속에는 적어도 결과 속에 있는 것만큼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생각하는 것이요, 또 내 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 무엇이 내 원인이 되건 그것 역시 하나의 생각하는 것이요, 내가 하나님께 돌리는 모든 완전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찰4> 참과 거짓에 대하여

 

확실히 나는 인간의 정신에 관하여 그것이 하나의 생각하는 것이고, 길이, 넚이, 깊이에 있어서 연장을 가지지 않고, 물체에 속하는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인 한, 어느 물체적 사물의 관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또 내가 의심한다는 것, 즉 내가 불완전하며 의존적이라는 것에 주의할 때, 하나의 독립해 있고 완전한 존재, 즉 하나님의 관념이 아주 명석하고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관념이 내 속에 있다는 것, 혹은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내가 있다는 한 가지 사실로부터 나는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것과 내 존재 전체가 모든 순간에 그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아주 명증적으로 결론짓는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의 정신에 이보다 더 명증적이고, 또 이보다 더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즉, 첫째로 나는 하나님이 나를 속인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무릇 속인다는 것 속에는 어떤 불완전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 속일 수 있다는 것은 명민하거나 혹은 힘이 이쓴ㄴ 것을 드러내는 표적인 듯싶기도 하지만, 속이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악의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니, 따라서 하나님 속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내 속에 어떤 판단 능력이 있음을 경험하거니와 분명히 나는 이것을 내 속에 있는 다른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속이려고 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 능력을 올바로 사용할 때에도 잘못하도록 이 능력을 나에게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이 학실하다. 만일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다고 하면,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잘못하는 능력을 전혀 주시기 않았다고 하면, 나는 결코 잘못하지 않을 듯싶으니 말이다. 사실 내가 하나님에 관해서만 생각하고, 내 정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내 속에 오류 혹은 허위의 원인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곧 뒤이어 나 자신에게 돌아오면, 나는(그렇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무수한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보면, 내 속에는 하나님, 즉 최고로 완전한 존재의 실재적이고 적극적인 관념만이 아니라, 또한 무, 즉 모든 완전성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먼 데 있는 것의 어떤 소극적인 관념도 있다는 것, 나는 마치 하나님과 무 사이의 중간자, 최고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자로서, 최고 존재에 의해 창조된 한에 있어서는 나를 속이거나 나를 오류로 이끌어가는 것이 내 속에 전혀 없으나, 내가 또한 어느모로 무 즉 비존재에 참여하는 한에 있어서는,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최고 존재가 아니고 무수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는 잘못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오류란 그것이 오류인 한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어떤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결함일 따름이라는 것, 따라서 잘못하는 데는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참을 거짓으로부터 가려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능력이 나에게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오류한 한갓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결여이다. 즉 내 속에 있어야 할 인식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에 주의할 때, 그 유에 있어서 불완전한 어떤 능력, 즉 본래 그것에 있어야 할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내 속에 두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만일 장인의 솜씨가 훌륭하면 할수록 그가 만든 작품이 더욱 완전할진대, 만물의 최고의 창조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모든 점에서 완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하나님이 나를 조금도 잘못하지 않게끔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요, 또 그가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원하신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한다는 것은 전혀 잘못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

 

먼저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그 이유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해도 나는 결코 놀라서는 안된다는 것과, 또 하나님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지으셨는지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이 밖에 많이 있음을 내가 결험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지으신 것들이 완전한가 어떤가를 탐구할 때에는 언제나, 어떤 한 가지 피조물을 따로 떼어 고찰해서는 안되고, 모든 피조물을 함께 전체적으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단독으로는 아주 불완전하다고 여겨져서 당연한 것도 이 우주 전체의 부분으로서는 다시 없이 완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이어, 내가 범하는 오류들이 어떤 것인지를 고찰해 볼 때 나는 이것들이 동시에 작용하는 두 개의 원인에 의존한다는 것, 즉 내속에 있는 인식의 능력과 선택의 능력 즉 의지의 자유에, 다시 말하면 오성과 동시에 의지에 의존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오성만으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며, 다만 (사물들의) 관념들을 파악할 따름이요, 이 관념들은 내가 판단을 내릴 때의 재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성 속에는,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오류는 전혀 없다. 세상에는 아마 내가 그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무수히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래는 그러한 관념들이 나에게 결여되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다만 부정적으로 내가 그 관념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만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현재 나에게 주신 것보다 더 큰 인식 능력을 나에게 주셔야만 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하나님이 몇몇 작품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완전성을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모조리 넣어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충분히 광대하고 완전한 의지, 즉 자유 의지를 주시기 않았다고 불평할 수도 없다. 의지가 어떤 한계 안에도 갇혀 있지 않음을 나는 분명히 경험한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지의 힘은 매우 광대하고 또 그 유에 있어서 완전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결코 오류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 또 이해의 힘도 내가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을 나는 으레 올바르게 이해할 터이요, 이 이해에 있어서 내가 잘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오류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 내가 범하는 오류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가지 일로부터 즉 의지는 오성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미치는 것인데 내가 의지를 오성과 같은 한계 안에 머물게 하지 않고, 내가 이해하고 있지도 않은 것에까지 미치게 하는 일로부터 생긴다. 이런 것에 대하여 의지는 비결정 상태에 있으므로 쉽사리 참과 선으로부터 떨어져나와 그리하여 나는 잘못하고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하나님이 현재 나에게 주신 것보다 더 큰 이해력, 즉 더 큰 자연의 빛을 주시지 않았다고 불평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한히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유한한 오성의 본질에 속하며, 유한하다는 것은 창조된 오성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에게 빼앗겼다거나, 하나님이 나로부터 다시 찾아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또한 하나님이 나에게 오성보다도 더 넓은 범위에 미치는 의지를 주셨다고 불평할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의지는 오직 한 가지 것, 이를테면 불가분의 것으로 되어 있어서, 그 본성은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제거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지니 말이다. 그리고 확실히, 의지가 광대하면 할수록 그것을 주신 자에게 더욱더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자유롭고 또 유익한 인식을 가졌더라도 나로 하여금 결코 잘못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즉 하나님이 내 오성 속에 내가 언젠가는 숙고해야 할 모든 것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을 주시든가, 혹은 명석, 판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내 기억속에 깊이 아로새겨 결코 내가 이것을 잊지 않게만 해주시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만을 고찰하되 마치 세상에 나밖에 없는 양 생각하는 한에서, 만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결코 잘못하지 않드록 지으셨다고 한다면 나는 현재의 나보다 훨씬 더 완전했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우주의 어떤 부분은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모든 부분이 한결같은 경우보다, 우주 전체로서는 어느 의미에서 더 큰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나를 세계 안에 두시되 그 속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완전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려 사시지 않았따고 불평할 권리가 전혀 없다.

 

또 나는 위에서 말한 첫째 수단, 즉 내가 숙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명증적 인식에 의존하는 수단으로는 오류를 막을 수가 없으나, 적어도 다른 수단 즉 그 진리가 분며이 않은 모든 것에 대하여는 판단을 내리기를 삼가야 함을 상기하는 데 의존하는 수단으로 오류를 막을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내 본성이 약하여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생각을 줄곧 내 정신 속에 간직할 수 없음을 내가 경험하지만, 주의를 기울인 그리고 자주 거듭되는 성찰에 의해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생각을 상기하고, 그리하여 다시는 오류에 빠지지 않는 습관을 얻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인간의 크고 주요한 완전성이 있으므로 나는 오늘의 성찰에 의하여 오류 및 허위의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적지 않은 수확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내 의지를 내 인식의 한계 안에 붙들어 두고 오성에 의해 명석, 판명하게 의지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도록 하기만 하면, 내가 잘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완전히 이해하는 모든 것에 충분히 주의하고, 이것들을 내가 불분명하게 또 불명료하게 밖에는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기만 하면, 나는 틀림없이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 이렇게 하도록 조심하여 노력하자.

 

<성찰5> 물질적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 ; 그리고 다시 하나님에 관하여, 그는 현존하신다는 것

 

확실히 나는 하나님의 관념을, 즉 최고로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어떤 모양 혹은 어떤 수의 관념 못지 않게 내 속에서 발견한다. 또 나는 항상 현존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을, 어떤 모양 혹은 수에 대하여 내가 논증하는 것이 그 모양 혹은 그 수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경우 못지않게 명석, 판명하게 이해한다. 따라서 설사 지난 여러 날 동안에 내가 성찰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현존은 내 정신 속에서 지금까지 수학의 모든 진리가 확실했던 것 못지않게 확실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얼핏보아 전혀 명백히 보이지 않고 오히려 궤변인 듯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모든 것에서 현존을 본질로부터 구별하는 습관이 있어서, 하나님의 현존도 그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쉽게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좀 더 주의하여 생각해보면, 나는 하나님의 현존이 그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삼각형의 본질로부터 그 세각의 합이 2직각이라는 것이 분리될 수 없고, 또 산의 관념으로부터 골짜기의 관념이 분리될 수 없는 것 못지않게 명백함을 발견한다. 따라서 현존 없는(즉 어떤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골짜기 없는 산을 생각하는 것처럼 모순이다.

 

그러나 골짜기 없는 산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현존 없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가 골짜기 있는 산을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부터 도대체 이 세상에 산이 있다는 것이 귀결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곧 이로부터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귀결은 나오지 않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속에야 말로 궤변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골짜기 없는 산을 내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는 어디엔가 산과 골짜기가 있다는 것이 귀결되지 않고, 다만 산과 골짜기가 있건 없건, 어느모로나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될 따름이지만, 한편 내가 하나님을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부터는 현존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은 참으로 현존한다는 것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한갓 내 생각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요, 또 내 생각은 사물들에다가 아무런 필연성도 부여하지 않는다.

 

 

 

 

 

 

 

 

 

 

 

 

 

 

 

 

 

 

 

 

 

 

 

 

 

 

 

 

 

 

 

 

 

 

 

 

 

 

 

 

 

 

 

 

 

 

 

 

 

 

 

 

 

 

 

'about Humanit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수곽탁타전  (0) 2016.10.12
데카르트 연구 by 최명관  (0) 2016.10.07
방법서설 by 르네 데카르트  (0) 2016.10.02
소유냐 존재냐 By 에리히 프롬  (0) 2016.09.25
국가 by 플라톤  (0) 2016.09.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