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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데카르트 연구 by 최명관

by hoyony 2016. 10. 7.

데카르트 연구


최명관

2012 
Discours de la methode : pour bien conduire sa raison et chercher la verite dans les sciences


 

제1장 주체성의 문제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인 Cogito, ergo sum은 주체성의 기본적 방향을 원초저긍로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Cogito, ergo sum이라는 원리 위에 현대 철학이 건설되었다고 하면, 우선 그 원리는 중세적 세계관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것은 첫째로 신 중심의 그리고 권위주의의 우주관과 사회 체제를 해체시키고 나아가서는 자연을 정복하여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려는 현대적 인간의 주체성 확립의 선언이 아닐까?

나는 있다라고 하여, 생각, 사색, 정신적 활동을 나의 근거, 존재 이유로 내세운 것은 나의 주체성, 나아가서는 인간의 주체성이 생각의 주체성에서 비롯하며 또 그 위에 세워져야 함을 제시한 중대한 발언이라 하겠다.

제2장 데카르트의 철학관

1. 참된 원리들의 탐구인 철학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의 원리를 프랑스어로 옮긴이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그것을 그 책의 서문으로 삼았는데, 이 서문은 데카르트의 철학관이 표명된 유일한 글이다.

"철학이라는 말은 지혜의 탐구를 의미한다. 지혜란 그저 처세를 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활을 해 나아가기 위해서나 건강의 유지 및 모든 기술의 발견을 위해서나,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 지식이 그런 것이 되려면, 그것이 제1원인들로부터 연역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을 획득하려면 ㅡ이렇게 하는 것이 본래 철학이라 하는 것이거니와 ㅡ이 제 1원인들, 즉 원리들의 탐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원리들은 두 가지 조건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그것들이 아주 명석하고 명증적이어서, 인간의 정신이 주의 깊게 그것들을 고찰할때 그것들의 진리성을 의심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사물들 없이도 이 원리들은 인식될 수 있지만, 거꾸로 이 원리들 없이 다른 사물들이 인식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탐구>라 하는 것은 정신의 훈련, 습작, 활동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 "지혜란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라는 구절이 있어 데카르트가 철학을 모든 학문의 총체로 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학문이 인간의 지식으로서 <완전한>것이 되려면 철학이 없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철학은 다른 모든 학문이 인간의 지식으로서 성립하는 기초 내지 원리를 제시하고 혹은 밝혀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본다.

첫째 단계는 아무런 성찰을 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아주 명석한 생각들만을 포함한다.

둘째 단계는 감가의 경험이 알게 해주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셋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과의 담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포함한다.

넷째 단계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쓴 책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이다. 우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이 네가지 수단만으로 얻게 되는 지식이다.

지혜에 이르는 다섯째 단계는 이상의 네 가지 것에 비하여 훨씬 높고 확고한 단계이다. 그것은 제1원인들과 참된 원리들을 찾는 것이다. 이것들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의 이유를 연역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가장 높은 단계의 지혜에서 인간 생활의 최고선이 성립한다고 보고, <철학의 원리>에서 제시된 원리들이야말로 이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의 제1원리와 거기서 연역된 원리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하는 사람도, 그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이 추리하는 그것, 즉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의심할 수 없으면서도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하여는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체라고 부르고 있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혹은 우리의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임을 고찰하고 이 생각의 존재, 즉 현존을 제1원리로 삼았고, 이거으로부터 아주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연역하였다. 즉 한 신이 있으며, 그는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지은이요, 또 그는 모든 진리의 원천이므로 우리들의 오성을, 그것이 아주 명석하게 그리고 아주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서는 결코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 이것들이 비물질적 사물들, 즉 형이상학적 사물들에 관하여 내가 사용하는 원리의 전부인데, 이것들로부터 나는 명백하게 물체적 사물, 즉 자연과학적 사물들의 원리들, 즉 길이, 넓이 및 깊이에 있어서 연장된 물체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갖가지 모양을 가지고 있고 또 갖가지 모양으로 운동한다는 것을 연역하였다. 결국 이것들이야말로 내가 거기서 다른 사물들의 진리를 연역해내는 원리의 전부이다.

요컨대 <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정신 내지 생각>이라는 것 ㅡ이것이 데카르트의 제1원리요, 여기서 금방 나오는 둘째의 중대한 원리는 신이 있다는 것과 이 <신은 진리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들로부터 자연학의 원리가 연역된다는 것이다.

신에서부터 자연의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자연의 빛인 이성에 의하여 인식된다. 이렇게 볼 때 데카르트의 철학은 시종 일관하여 이성에 대한 신뢰로 차 있다고 할수 있다.  

2. 철학의 효용

철학은 인간의 정신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에 미치므로, 오직 철학만이 우리를 가장 미개하고 야만적인 자들과 구별케하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또 어느 나라나 그 국민들이 더 잘 철학할수록 더 개화하고 세련되는 것이요, 참된 철학자들을 가진다는 것은 한 국가 안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선임을 믿어야 한다.
뿐더러 각 개인에게서도, 이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느 것이 무엇보다도 좋은 일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 길을 걸어가며, 또 여러가지 색채와 빛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눈을 감고 남의 인도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일임과 같다. 하기는 이 후자의 경우도 눈을 감고 혼자서만 길을 더듬어가는 것보다는 나아도 말이다. 철학함이 없이 산다는 것은 눈을 감고 한 번도 떠보려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야에 펼쳐지는 모든 사물을 보는 즐거움은 철학에 의하여 발견하는 것들의 인식이 주는 만족에 결코 비할 바가 못된다. 그리고 끝으로 이 연구는 우리의 눈의 사용이 우리의 보행을 인도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고 이 인생에 있어서 우리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사나운 짐승들은 그저 신체만 보존하면 되므로 먹을 것을 얻는 데 항상 골몰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주요한 부분이 정신이므로 정신의 참된 양식인 지혜의 탐구를 주요한 관심사로 해야 할 것이다.

제3장 방법적 회의

1.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에 아이였으므로, 또 우리의 이성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여, 우리의 감각에 주어진 사물들에 대해서 갖가지 모양으로 판단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들로부터 해방되려면 조금이라도 불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일생에 한번은 의심해 보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다.

2. 무엇이 아주 확실하고 가장 알기 쉬운가를 더운 분명하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모든 것을 거짓된 것으로 보고 버리는 것이 더욱 유익한 것이다.

3. 그러나 누가 우리를 지었건, 그리고 그가 아무리 전능하고 우리를 속이기를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믿기를 삼감으로써 우리가 결코 속지 않도록 조심하는 자유를 우리속에 경험한다.

이상은 <철학의 원리>의 제1,26항이다. 철저한 회의에 의하여 과거의 모든 불확실한 지식체계들을 붕괴시키고 아주 새로운 그리고 다시는 흔들리는 일이 없는 확고부동의 기초를 세우려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이렇게 하면 인간의 지식이 확실한 진보의 길에 들어서서 마침내 인류가 밝고 건전한 이성적 세계를 이룩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참되다고 여겨온 모든 것을 나는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감각들은 가끔 속인다는 것을 나는 경험하였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하여 결코 전폭적인 신뢰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여기서 <감각으로부터>라 함은 빛깔을 본다거나 소리를 듣는다든가 하는 시각 혹은 청각 같은 감각에 직접 의지하는 것이요, <감각을 통하여>라 함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억상이나 남의 감각에 의거하는 것처럼 간접적으로 감각에 의거함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인식론적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플라톤은 <테이테토스>에서 <감각 즉 인식>이라는 설을 논박한 바 있다.

데카르트의 사색은 불투명한 의식 속에도 어떤 확실한 것들이 드러나지 않나 살펴본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하자. 지금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 머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 손을 뻗치고 있다는 것 같은 특수한 사실들이 헛된 착각이라고 가정하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이나 몸도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잠잘 때에 꿈에서 본 것들이 마치 정말 현실에 있는 것들의 모양을 따지 않고서는 그려질 수 없는 그림이요, 따라서 적어도 눈이라든가 머리라든가 손이라든가 또는 몸 전체라든가 하는 일반적인 것들은 공상적인 것이 아니고, 참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화가들이 세이레네스, 사튀로스를 극히 기묘한 모양으로 그리려고 애쓸 때에도 이것들에다가 아주 새로운 형상이나 성질을 붙여 줄 수는 없고, 다만 갖가지 동물들의 부분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뒤섞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설사 화가가 아주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취하여 우리가 여태까지 그와 비슷한 것을 본 적도 없는, 따라서 아주 허구요 허망이라 할수 있을 만큼 새로운 어떤 것을 고안해 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그림을 구성하는 빛깔만큼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설사 일반적인 것들, 즉 눈, 머리, 손 그리고 이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이 공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것들 보다도 좀 더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우리들의 생각 속에 자리 잡는 모든 사묻의 상들은, 참된(즉, 현실적인) 것이건 거진된(즉, 공상적인) 것이건, 앞서 본 바와 같이, 전혀 새로운 것들이 현실의 빛깔에서 구성되는 것처럼, 그러한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들이 섞여서 구성되었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일반적으로 물체의 본성 전부, 그리고 그 연장이요, 또 연장이 있는 것들의 형체, 그 양이나 크기 및 그 수요,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 그것들이 지속하는 시간, 그리고 이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이다.

이런 까닭에 자연학, 천문학, 의학 그리고 이밖에 복합된 물건들을 고찰하는 다른 모든 학문들은 매우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지만, 이에 반하여 산술, 기하학 그리고 이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 즉 극히 일반적인 것들만을 다루며 이런 것들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를 깊이 따지지 않는 학문들은, 어떤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깨어있건 잠들고 있건, 둘에 셋을 더하면 다섯이 되고, 또 사각형은 네 개 이상의 변을 가지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과거의 습관이 얼마나 짖궂은 것인가를 절감하며, 각자기 고난이 얽힌 이성적 사고의 생활보다 안이한 옛 생각에 젖어 지내기를 택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응시한다. 회의는 고달프다. 좀 불확실해도 옛 신앙이나 관습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편한 일인가! 그러나 진리 탐구의 용사는 이 관습에, 자기가 예전에 가졌던 낡은 견해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근저에서부터 의심하고 뿌리째 뒤흔들어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해야만 새롭고 참된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확실한 지식으로만 구성하는 학문의 체계를 세워볼 희망이 있다.

1620년 봄부터 9년동안, 여행하면서 희의하며 사색했던 일에 관하여 쓴 <방법서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회고의 말을 하고 있다.
"무슨 문제에서나 의심스럽고 잘못 생각하기 쉬운 점에 대하여 특히 잘 살펴본서, 전에 내 정신 속에 스며들어올 수 있었던 모든 오류를 말끔히 뽑아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저 의심하기 위하여 의심하는 그리고 늘 비결정의 태도를 취하는 회의론자들을 흉내내지는 않았다.
이와 반대로 내 계획 전체는 나 스스로 확신을 얻고 동요하는 흙과 모래를 젖혀 버리고 바위나 진흙을 찾아내는 데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회의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니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흔들림없는 토대 위에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방법으로서의 회의>이다. 곧, <방법적 회의>이다.

제4장 Cogito, ergo sum의 의미

1. Ergo sum의 발견

아르키메데스는 "나에게 설 자리를 달라, 그리하면 내가 우주를 움직이리라"라고 말하였다. 즉 그는 전 우주를 움직이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서 전 우주를 움직일 확고부동한 한 점밖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이런 정신과 원리를 따라 데카르트도 다행히 극히 작은 것일망정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어떤 것을 찾아낸다면, 자기도 위대한 일들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는다. 이 확실하고 흔들맂 않는 어떤 것을 찾아 데카르트는 몸부림치며 용기를 내어 회의를 뚫고 사색을 계속한다.

데카르트는 고된 회의의 여로 끝에 , 그가 바라던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도달하였다. 이제 이점, 이 자리에 서서, 그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절대로 확실하기만 한 지식의 총체를 조직하고 체계를 세울 원대한 꿈을 꾼다. 인간의 지식은 무한히 증대하며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진실이 의지할 튼튼한 기초는 바로 데카르트가 세운 것인 바, 곧 그가 발견한 이 cogito, ergo sum의 원리이다.

2. 생각의 중요성

"생각한다"는 것을 데카르트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지식의 작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판단, 의욕, 감각의 작용을 아울러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의 원리에서는 "생각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생각한다는 말로써 내가 이해하는 것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되 우리 자신이 직접 의식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이해한다는 것, 바란다는 것, 상상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감각한다는 것도 생각한다는 것과 같다.

<성찰>의 둘째 성찰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이해하고, 긍정하고, 의지하며,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상상하며, 감각하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하여간 생각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우리의 정신활동 전체이다.

데카르트의 논적 '삿상디'는 <생각>뿐만 아니라 인간의 어떠한 활동으로부터도 그 현존이 귀결될 수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데카르트를 논박하였다. "우리들의 자연의 빛은 무엇이든지 활동하는 것은 또한 현존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므로, 그것(내가 있다는 것)을 다른 어떤 활동으로부터도 추론해도 괜찮고"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고는 추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데카르트에 있어 "나는 숨쉰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든가, "나는 땀을 흘린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든가 혹은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드가 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말들이다. 즉, 신체적 행위는 그 어느 것이나 나의 본질일 수 없다. 나의 본질, 나의 존재의 본질은 어디까지 <생각한다>는 사실, 즉 사고의 행위에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떤 행위에도 있지 않다.

<성찰>의 둘째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그러면 나란 무엇인가? 묻고서 "하나의 생각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인가?"고 묻고는 "물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만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생각하기를 아주 그친다면, 그 순간 나는 또한 존재하기를 즉 현존하기를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하고 다다. 이만큼 내 생각은 내 존재와 불가분으로 결부되어 있다.
즉, 인간은 순수한 사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요, 그 정신의 활동에 의하여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고 또 신과의 유사성을 얼마간 갖는 것이다.
<성찰>의 넷째 성찰에는 데카르트가 인간을 신과 무의 중간자로 파악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그의 <성찰>을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영혼만이, 혹은 정신만이 나다"라고 부르짖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신체는 연장을 가진 것이요, 물질적, 물체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신만이 우리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더 나악 데카르트는 신체와 정신을 준별하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정신의 불사를 논증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또 정신이 신체보다 더 인식되기 쉽다고 주장한다.

4. Cogito, ergo sum 의 독창성

신학박사 아르노오(Arnauld)는 <성찰>에 대한 논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그의 철학 전체의 기초 및 제1원리고 세우고 있는 것은....이미 그에 앞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철학적 토대 및 지주로 삼았던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면에서 아우쿠스티누스가 데카르트의 사상의 연구임을 주장하고 있다.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는 다같이 플라톤적인 데가 있어 비슷한 점이 적지 않음은 사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너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가지 말고, 너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진리는 인간 속에 있느니라"라고 말하였다. 나를 살펴서 나를 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지식의 기반이 되며 출발점이 된다고 믿고 사색을 전개해 나아간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진리의 아버지, 지식의 아버지, 지성의 빛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데카르트도 진리의 원천은 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어, 이 점에서도 생각이 같은 듯 싶다.

또 아르노오에 의하면, 우리가 속는다고 하면, 우리가 현존해야 한다고 하는 데카르트의 발상도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과 비슷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우리가 가장 명백한 것들로부터 시작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묻고자 한다. 즉, 그대가 있는가, 혹은 아마도 내 물음에 답함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가고. 하여간, 그대가 전혀 있지 않다면,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이리하여 데카르트의 제1원리는 새로운 것이 못 되며,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살 수 있음직도 하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러한 비판을 문제삼지 않는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것을 자기와 똑같은 용도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질송에 의하면 "데카르트의 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을 인간 속에서 삼위일체의 모상을 재발견하기 위해 전개하고 있고, 한편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별과 여기서 나오는 모든 귀결을 증명하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데카르트는 자신의 심각한 문제, 인간이 과연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한 가지라도 가질 수 있으며, 그것 위에 우리의 학문의 체계를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순전히 자기 혼자의 사색에 의해 Cogito, ergo sum의 진리에 도달하였다.

제5장 데카르트의 인식론

1. 자연의 빛

데카르트는 자기의 철학원리를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이하여 대화의 형식으로 된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라는 책을 내놓은 바 있다. 이 책의 서장에서 그는 "인간 정신의 능력을 넘지 않는 모든 지식은 사실, 아주 놀라운 유대에 의하여 얽혀 있고, 또 아주 필연적인 논리 전개에 의해 한 가지 지식을 다른 지식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으므로 가장 단순한 것들에서 시작하여 점차 높은 것으로 나아갈 줄을 알기만 하면 재능이 많지 않더라도 그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서의 이성에 절대적 신뢰를 두었다. 그리고 이 이성은 만인에게 고루 주어져 있다고 믿었다. <방법서설> 첫머리에서 그의 이런 생각과 신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양식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에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양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잘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분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그는 규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2. 명석, 판명

데카르트는 명석(Clara, claire), 판명(distincta, distincte)이라는 말을 <정신 지도의 규칙>, <방법서설>, <성찰>에서 거듭 사용하여 우리들의 생각이 명석, 판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학문이란 결국 확실하고 명증적인 지식인데, 이러한 지식은 명석하고 판명한 지각 혹은 개념을 가지고 구성되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명석하고 판명되지 않은 생각은 참되고 바른 생각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명석하고 판명한 것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린다고 하면 나는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넷째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의지를 내 인식의 한계 안에 붙들어 두고, 오성에 의하여 명석, 판명하게 의지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도록 하기만 하면, 내가 잘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릇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은 그 어느 것이나 틀림없이 실재적인 것이요, 따라서 무로부터 나올 수 없고, 필연적으로 그 작자는 자신이다. 곧 최고로 완전하고, 결코 기만자일 수 없는 신이다. 따라서 그러한 지식 혹은 판단은 참이라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된다."

3. 오성

데카르트에 의하면 감각기관은 우리를 속인다. 그는 감각기관이 우리를 속이는 것을 가끔 경험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감각에만 의지해서는 사물의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다. 감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태양의 크기는 유리찰의 한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작은 것이다. 태양의 진정한 크기를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것은 오직 우리의 오성이다. 오성 혹은 정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사물들의 참된 인식을 주는 것이다.

<정신지도의 규칙> 규칙12에서는 "인식에 있어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은 네가지 뿐이다. 곧 오성, 상상력, 감각기관 및 기억력인데, 확실히 오성만이 진리를 지각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규칙8에서는 "우리에게 있어 오성만이 학문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 가지 다른 능력, 즉 상상, 감각, 기억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결코 감각이나 상상이나 기억이나 또는 감각에서 출발하는 실험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물들의 참되고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오성이 충분히 기능을 발휘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오류의 원인

오류는 우리가 판단을 내릴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우리들 속에 있는 판단 능력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신은 우리를 속이기를 원하시지 않으므로 우리가 이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는 무수한 오류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다. 나는 신과 무의 중간자이다. 즉 지고의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내가 지고의 존재에 의하여 창조된 것인 한에서는 오류에 빠질 리가 없지만, 한편 내가 어떤 모양으로든 무 혹은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나 자신이 지고의 존재가 아니므로 무한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렇듯 오류는 신에 의존하는 어떤 실재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결함일 따름이다.

그러면 어떤 때에 오류가 생기는가? 그것은 두 가지 원인, 즉 내 속에 있는 인식의 능력과 선택의 능력, 즉 자유의지가 교류할 때 생긴다.
다시말하면, 오류는 내 오성과 내 의지에 동시에 의존한다.
오성만으로는 사물들의 관념을 가질 뿐이요, 아무것도 단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단정하거나 부정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이 관념들에 대해서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오성 속에는 본애의 의미에서의 오류란 전혀 없다.
또 의지의 힘도 그 자체에서는 내가 저지르는 여러 가지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이해하는 힘도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매우 광범하여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내 속에는 의지만큼 크고 완전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내 이해 능력은 극히 협소하고 아주 제한된 것이다. 내가 내 속에는 더 이상 큰 것의 관념을 가질 수 없을 만큼 큰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오직 의지이다.
즉 의지의 자유만이다. 내 속에 있는 의지야말로 광대함에 의하여 나로 하여금 신을 닮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지란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을 것을 마음먹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긍정하거나 부정하며,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할 때 우리는 오성에 의하여 우리에게 제공된 것을 긍정 혹은 부정한다. 즉 추구 혹은 기피한다. 그런데 의지는 어느 의미에서 무한하고 오성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미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를 오성과 같은 범위 안에 제한시키지 않고 내가 이해하지도 않는 것에 그것을 확대시켜 나아갈 때 오류가 생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명석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에 의지를 미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는 참과 선에서 일탈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한다.

<철학의 원리>에서 데카르트는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판단할 때에만 오류가 생긴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거기 대해서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음이 명백하다. 그리고 긍정 혹은 부정해야 한다고 명석, 판명하게 인힉하는 것만을 긍정 혹은 부정하는 경우에는, 잘못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일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서 거기 대해서 판단을 내릴 때에만 잘못이 생긴다."

또, 판단에는 오성뿐만 아니라 의지도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오성이 전혀 인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으므로, 판단을 하는 데도 오성이 필요하지만, 일단 오성이 인식한 것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의지 역시 필요하다. 그리고 판단을 내기는 데는 사물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인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혼란한 인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흔히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오류가 깃드는 것이다.

즉, 우리의 자유의지의 오용속에 오류의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의지를 그릇 활동시켜 잘못된 판단을 내릴때, 신이 나에게 협력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의지의 활동은 그것이 신에 의존하는 한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참되고 선한 것이요, 내가 의지의 활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가질 수 없는 경우보다 어느 의미에서 나에게 더 큰 완전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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