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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니코마코스 윤리학 by 아리스토텔레스

by hoyony 2016. 8. 30.

Ethika Nikomacheia





2013. 10. 15

Aristoteles

Ethika Nikomacheia



  


<제1권> 인간의 좋음

 

제6장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비판

 

우리가 좋음의 이데아를 일종의 본보기로 갖고 있으면 우리는 좋은 것들을 더 잘 알 수 있고, 그것들을 알고 있으면 그것들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 학문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모든 학문은 어떤 좋음을 추구하며 그 좋음의 결함을 보완하려고 하면서도 정작 좋음 자체에 대한 지식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좋음 자체가 그토록 큰 도움이 된다면 모든 전문가들이 그것을 모르거나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또한 직조공이나 목수가 좋음 자체를 앎으로써 자신의 기술에 얼마나 도움을 받으며, 좋음의 이데아 자체를 본 사람이 그로 인해 얼마나 훌륭한 의사나 장군이 되는지도 알기 어렵다. 의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분명 건강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건강 또는 특정인의 건강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치료하는 것은 개인이니까

 

이성적인 부분은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성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적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갖고 사고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적이다. 이성적인 부분의 삶에도 이렇듯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만큼, 우리는 활동적인 삶이 우리가 말하는 삶임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인간의 기능이 이성적인 원리를 따르거나 이성적인 원리를 내포하는 혼의 활동이라면, 그리고 키타라 연주자와 훌륭한 키타라 연주자 등등의 경우처럼 어떤 일을 하는 사람과 그 일을 잘 하는 사람의 기능을 우리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하여 후자의 탁월함은 기능의 이름에 덧붙여진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인간의 기능을 특정한 삶 곧 혼의 이서적인 활동 또는 일련의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훌륭한 인간의 기능은 이런 행위들을 잘 수행하는 것이고 모든 기능은 거기에 알맞은 미덕을 가지고 수행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면, 인간의 좋음은 결국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며, 미덕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완전한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다.

 

우리는 모든 연구에서 똑같은 정확성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매번 주제가 허용하고 연구 대상에 적합한 정도의 정확성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목수와 기하학자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직각을 구한다. 목수는 자기 작업에 필요한 만큼만 직각을 구하지만, 기하학자는 직각이 무엇인지, 직각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한다. 기하학자는 진리의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제8장 우리의 행복관은 대중의 통념과도 일치한다

 

우리의 행복관은 행복은 미덕 또는 특정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미덕에 걸맞는 활동에는 미덕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고선을 소유로 보느냐 사용으로 보느냐, 다시말해 마음가짐으로 보느냐, 활도으로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날 것이다.

잠든 사람이나 다른 이유로 빈둥대는 사람의 경우처럼 마음가짐은 좋은 결과를 낳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지만, 활동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의 영관을 쓰는 것은 가장 잘생기고 가장 힘센자들이 아니라 경기에 참가한 자들이듯(우승자는 이들 중에서 나오니까),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고상하고 좋은 것들을 획득할 것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로 즐겁다. 쾌락은 혼의 경험인데,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말이 즐겁고,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가 즐겁듯. 마찬가지로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올바른 것이 즐겁고, 유덕한 사람에게는 대개 미덕이 즐거운 법이다. 그런데 대중의 쾌락들은 본성상 즐거운 것이 아니기에 서로 상충한다. 그러나 고상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쾌락들은 본성상 즐겁다. 유덕한 행위들도 이와 같아서 유덕한 사람들에게도 즐겁고 그 자체로도 즐겁다.

우리의 행복에는 외적인 좋음도 필요하다. 재원이 없으면 고상한 행위를 하기가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행위에서 우리는 친구들과 돈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도구처럼 사용하기에 하는 말이다. 또한 지체가 높다든가 슬하에 훌륭한 자식을 둔다든가 외모가 준수한 것처럼 그것이 없어 행복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행복에는 이런 종류의 좋은 조건들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행운과 동일시하고,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미덕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제9장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행복은 학습이나 습관화나 다른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가, 아니면 신이 내려주거나 우연히 주어지는 것인가?

행복은 분명 신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미덕이 받는 상과 미덕이 추구하는 목적은 확실히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서, 신적인 것이며 축복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완전한 미덕과 필생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생은 변화무쌍하여 온갖 우연한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며, 트로이아 전쟁때의 프리아모스에 관해 전해지고 있듯이, 가장 행복한 사람도 노년에 큰 재앙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0장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할수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고, 솔론의 조언에 따라 그가 최후를 맞는 것을 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만약 운수만 뒤쫓으려 한다면, 우리는 분명 같은 사람을 떄로는 행복하다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부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은 일종의 카멜레온이 되어 그의 행복은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누군가의 운수만 뒤쫓는 것은 전혀 옳지 못한 것 같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는 운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유덕한 활동이나 그와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덕한 활동들은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속성은 행복한 사람의 몫이며,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평생 행복할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 또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덕한 활동을 하거나 관조하면서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란 외적인 좋음도 충분히 구비하고 있으며 일정기간이 아니라 평생토록 유덕한 활동에 전념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제2권> 도덕적인 미덕

 

제1장 도덕적인 미덕은 다른 기술들처럼 반복되는 행위에 의해 습득될 수 있다.

 

미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지적인 미덕과 도덕적인 미덕이 그것이다.

지적인 미덕은 주로 교육에 의해 생겨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는데, 그러자면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한편 도덕적인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런 미덕은 습관이라는 말을 조금 고쳐 도덕적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은 습관에 의해 달라질 수 없다. 본성적으로 아래로 떨어지는 돌은 수만번을 위로 던지며 아무리 노력해도 위로 솟구치도록 습관을 들일 수 없으며, 불도 아래로 타내려가도록 습관을 들일 수 없다. 그 밖에 다른 것도 타고난 본성에 어긋하게 행동하도록 습관을 들일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인 미덕들은 우리 안에서 본성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본성에 반해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그것들을 본성적으로 받아들여 습관화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제2장 이런 행위들은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침과 모자람은 피해야 한다.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손상되고 중용에 의해 보존된다.

미덕들만이 그것들이 손상되는 것과 같은 원인과 같은 수단에 의해 생성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덕한 활동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체력처럼 더 식별 가능한 다른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쾌달긍ㄹ 멀리함으로써 우리는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사람이 되어야 쾌락을 멀리할 수 있다. 용기도 마찬가지이다. 두려운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견뎌내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우리는 용감해지고, 용감해지면 두려운 것들을 가장 잘 견대낼 수 있을 테니까.

 

제4장 유덕한 행위에 의해 미덕을 습득한다는 견해에 대한 이의 제기와 그에 대한 답변

 

하지만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올바른 행동을 해야하고, 절제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절제있는 행동을 해야한다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올바르고 절제있는 행동을 하면, 이미 올바르고 절제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단어들을 문법 규칙에 맞게 정확하게 구사하고 악기를 정확하게 연주하면, 이미 문법가이고 음악가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기술과 미덕은 경우가 다르다.

기술의 산물은 그 안에 이미 그 가치를 내포하고 있어, 어떤 성질을 갖기만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유덕한 행위는 어떤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해서 올바르고 또는 절제 있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려면 행위자가 특정한 마음가짐에서 행동해야 한다. 행위자는 첫째,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하고, 뚤쨰, 행위를 선택하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해야 하며, 셋째, 확고부동한 마음가짐에서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조건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행위는, 올바르고 절제 있는 사람이 행할 법한 행위일 때 올바르고 절제있다고 불린다. 그러나 올바르고 절제있는 사람은 단순히 그런 행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르고 절제있는 사람이 행할 법하게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은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올바르게 되고, 절제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절제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이론으로 도피하여, 자기들은 철학자이니 철학을 통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의사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면서도 의사의 지시대로 하지 않는 환자들과도 같다. 그런식의 치료법으로는 후자들의 몸이 더 나아질 수 없듯이, 전자들의 혼도 그런 식의 철학들로는 나아질 수 없다.

 

제5장 미덕을 정의하려면 그것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정해야 한다. 미덕은 감정이나 능력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혼에서 발견되는 것은 감정, 능력, 마음가짐 이상 세 가지이다. 따라서 미덕은 그중 하나일 것이다. 감정이란 욕구, 분노, 두려움, 자신감, 질투, 환희, 사람, 증오, 동경, 경쟁심, 연민 등 쾌락이나 고통이 따르는 모든 상태를 말한다. 능력이란 우리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를테면 분노나 슬픔이나 연민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감수성을 말한다. 마음가짐이란 우리가 이런 감정들에 잘 대처하거나 잘못 대처하게 해주는 심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미덕도 악덕도 감정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덕과 악덕 때문에 그런 말을 듣는 것이며, 또한 우리는 우리의 감정 때문에 칭찬받거나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덕과 악덕 때문에 칭찬받고 비난받는다.

미덕이 감정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라면 마음가짐일 수 밖에 없다.

 

제6장 도덕적인 미덕의 특징은 중용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어져 있고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혹은 더 많은 양을, 혹은 더 적은 양을, 혹은 동등한 양을 사물 자체와 관련해서도,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도 취할 수 있다. 그리고 동등한 양이란 지나침과 모자람의 중간이라 할 수 있다. 사물 자체와 관련해서 중간이란 양쪽 끝에서 등거리에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며 동일하다.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 중간이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동일한 것도 아니다. 모든 학문의 전문가는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며 중간을 찾아내 선택해야 한다.

예컨대 두려움, 자신감, 욕구, 분노, 연민 쾌락과 고통 일반은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경험할 수 있는데, 어느 쪽도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당할 때, 적당한 사물과 관련하여, 적당한 사람들에게, 적당한 목적을 위해, 적당한 방법으로 그런 감정들을 느끼는 것은 중용이자 최선인데 이것이 미덕의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행위에도 지나침과 모자람과 중간이 있다.

그러나 미덕은 감정과 행위와 관련되며 감정과 행위에 있어 지나침과 모자람은 일종의 실패이고 중간은 칭찬받을 뿐더러 일종의 성공으로 인정받는데, 칭찬받고 성공하는 것은 모두 미덕의 특징이다.

 

제7장 중용의 원칙을 개별 미덕에 적용해본다.

 

두려움과 자신감의 중용은 용기. 지나친 사람들 중에서 두려움을 모른다는 점에서 지나친 사람에게 붙일 이름은 없지만, 자신감에서 지나친 사람은 무모하고, 두려움이 지나치고 자신감이 모자라는 사람은 겁쟁이이다.

쾌락과 고통의 중용은 절제, 지나침 방종이다.

쾌락과 관련하여 모자란 사람들은 흔치 않아 명칭도 없지만, 그들은 무감각하다고 부르기로 하자.

돈 거래에서 중용은 후함이고, 지나침과 모자람은 방탕과 인색이다.

돈과 관련해서는 다른 마음가짐들도 있다. 그 중용은 통 큼이고(통 큰 사람은 후한 사람과 다르다. 전자는 거액을, 후자는 소액을 다룬다) 지나침은 몰취미와 속물근성이며 모자람은 좀스러움이다. 이것들은 후함에 반대되는 마음가짐들과는 다르다.

명예와 불명예에서 중용은 자부심이고 지나침은 허영심,모자람은 소심함

자부심이 큰 명예와 관련되는 데 반해 이 미덕은 작은 명예와 관련된다. 우리는 작은 명예도 알맞게 원할 수 있고,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구가 지나침은 야심, 욕구가 모자람은 야심이 없음, 중간에는 명칭이 없다.

분노에서의 중용은 온유함이다.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 중에 지나친 사람은 성마른 사람, 그의 악덕은 성마름이라 부르고, 모자란 사람은 기개없는 사람, 그의 악덕은 기개없음이라고 하자

진리에서의 중용은 진실, 지나치게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허풍, 반대는 거짓 겸손.

놀이에서의 중용은 재치, 지나침은 익살, 모자람은 촌스러움

즐거움에서의 중용은 상냥, 지나침은 아첨, 모자람은 심술쟁이

수치심에서의 중용은 겸손, 지나침은 파렴치, 모자람은 부끄러움

 

제8장 중요은 때로는 양 극단 중 한 극단에 더 가깝거나 더 가까워보인다.

 

이들 세 가지 심적 상태 가운데 두 가지는 악덕이고(한 가지는 지나쳐서 그렇고, 다른 한 가지는 모자라서) 한 가지는 미덕, 곧 중용이다.

어느 한 극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중간에 있는 사람을 다른 극단으로 밀어낸다. 그래서 겁쟁이는 용감한 사람을 무모하다고 부르고, 무모한 사람은 용감한 사람을 겁쟁이라고 부른다.

양 극단중 한 극단이 중간에 더 가깝고 비슷해 보이면, 우리는 이 극단이 아니라 다른 극단을 중간과 대립시키기 때문에 비겁함보다는 무모함이 용기와 더 가깝게 생각되고 우리는 무모함보단은 비검함을 용기와 대립시킨다.

또한 우리가 본성적으로 더 치우치는 것들은 중간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우리는 본성적으로 쾌락쪽으로 더 치우치기에, 절제보다는 방종 쪽으로 더 치우치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치우치는 쪽의 극단들이 더 중용에 대립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나침인 방종이 절제에 더 대립되는 것이다.

 

<제3권> 도덕적인 책임

 

제1장 행위는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이다.

 

미덕과 감정은 행위와 관련되고, 자발적인 감정과 행위는 칭찬받거나 비난받는데 반해 비자발적인 감정과 행위는 용서받거나 때로는 동정받기까지 하는 만큼, 미덕을 연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발성과 비자발성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강요당하거나 무지에서 행하면 그런 행위는 비자발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 원인이 외부에 있어, 행하는 자나 당하는 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행해지면 그런 행위는 강요당한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거나, 그를 지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어디론가 연행되는 경우가 그렇다.

때로는 더 큰 불행을 두려워하거나 어떤 고상한 목적 때문에 행동할 때도 있다. 예컨대 어떤 참주가 누군가의 부모와 자식들을 붙잡아두고는 그에게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도록 명령하며, 시키는 대로 하면 부모와 자식을 살려주고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한다면, 이런 경우 행위가 비자발적인지 자발적인지 논란거리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복합적이지만 자발적인 행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질 때는 바람직한 것이고, 행위의 목적은 상황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발적이니 비자발적이니 하는 말은, 행위가 행해지는 때와 관련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행위의 도구인 사지를 움직이는 제1원리는 행위자 안에 있고, 제1원리가 행위자 안에 있으면 행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행위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자발적이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이 없다면 그런 행위는 비자발적일 것이다. 그런 행위를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어떤 영우에는 칭찬은 받지 못해도 용서는 받는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들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강요당해도 해서는 안 되며, 아무리 무섭다 해도 감수한 뒤 죽음을 선택해야 할 것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떤 이익을 선택할지 또는 어떤 이익을 위해 어떤 운명을 감수할지 결정하기란 어려우며, 결정을 고수하기란 더욱 어렵다. 예상되는 결과는 대개 고통스러운 것이며, 사람들이 강요당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자는 강요에 굴복했느냐 굴복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비난받거나 칭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강요당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그 원인이 외부에 있어 행위자의 의지와 무관한 행위는 무조건 강요당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반면 그 자체는 비자발적이지만 주어진 시간에 이런저런 목적을 위해서는 바람직하며, 그 제1원리가 행위자 안에 있는 행위는 비록 그 자체는 비자발적이라 해도, 주어진 시간에 이런저런 목적을 위해서는 자발적인 것이다. 결국 그런 행위는 자발적인 행위에 더 가깝다. 행위는 개별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데, 개별적인 행위는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지로 인한 모든 행위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자발적인 것이 되자면 고통과 뉘우침이 따라야한다. 무지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하고 나서 자신의 행동이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했다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라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자발적으로 행동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무지해서 행동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사람은 비자발적인 행위이지만,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자발적이지 못한 행위자로 볼 수 있다.

어떤 행위를 비자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선택에서의 무지도 아니고, 일반적인 무지도 아니며, 개별적인 무지 곧 행위의 상황과 대상에 대한 무지이다.

그리고 이런 개별 상황과 대상에 근거하여 동정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그런 개별 사정들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은 비자발적인 행위자이기 떄문이다.

 

제2장 합리적인 선택은 자발성과 다른 것이다. 어떤 대상을 선택할 때는 먼저 숙고해야 한다

 

합리적인 선택은 미덕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사람들의 성격을 판단하는 데는 행위보다 더 훌륭한 길라잡이인것 같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선택은 분명 자발적인 것이지만, 이 둘이 같은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것의 외연이 더 넓다. 아이들과 동물들도 자발적으로 행동하지만 합리적으로 선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선택은 소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이지만 소망도 아니다. 불가능한 것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고, 자기는 불가능한 것을 합리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취급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멸불사처럼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소망할 수는 있다. 또한 사람들은 특정 배우나 운동선수의 운동처럼 자신의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누구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또한 소망은 목적에 관련되고, 선택은 수단에 관련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건강하기를 소망하지만, 건강하게 하는 행위들은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합리적인 선택은 개별 의견과도 다르다.

의견은 참이냐 거짓이냐에 따라 구분되고 좋음이냐 나쁨이냐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데 반해, 합리적인 선택은 좋음이냐 나쁨이냐에 따라 구분된다.

우리의 성격은 좋은 것을 선택하느냐 나쁜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우리가 좋음과 나쁨에 대해 어떤 의견을 품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을 취할 것이냐 피할 것이냐 하는 것이고, 우리가 의견을 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유익하며, 어떻게 유익한지에 대해서이다. 그것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피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의견을 품지 않는다

또한 합리적인 선택이 칭찬받는 것은 방법이 옳으냐보다는 대상이 옳으냐에 달려 있고, 의견이 칭찬받는 것은 그것이 진실에 부합되느냐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좋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을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그것이 좋은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의견을 품는다.

의견이 합리적인 선택에 앞서는가, 아니면 뒤따르는가는 아무래도 좋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이 의견과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니까

합지럭인 선택은 분명 자발적인 것이지만, 자발적인 것이 모두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선택은 미리 숙고된 것일까? 합리적인 선택은 이성과 사고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택이라는 말도 다른 것보다 먼저 택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제3장 숙고의 성질과 대상. 숙고는 수단에 관련되고 목적에 관련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숙고한다. 또한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숙고한다.

우리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되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의술이나 돈벌이나 항해술에 대해 숙고한다. 우리는 체육보다 항해술에 대해 더 숙고하는데, 이는 항해술이 체육만큼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문보다는 기술에 대해 더 많이 숙고하는데, 이는 우리가 기술에 대해 더 많은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숙고란 대개 모종의 방법으로 일어나지만 결과를 예상할 수 없고, 정해지지 않은 요소를 내포하는 것들에 관련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결정을 믿지 못해 중대사는 남들과 의논하는 것이다.

우리의 숙고 대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것인지 숙고하지 않고, 연설가는 청중을 설득할 것인지 숙고하지 않으며, 정치가는 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지 숙고하지 않는다. 그 밖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적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다.

목적이 여러가지 수단에 의해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면, 어느 수단을 써야 목적이 가장 쉽고 가장 고상하게 달성될 수 있는지 생각한다.

숙고의 영역은 인간이 자력으로 행할 수 있는 것들이며, 누군가의 행위는 뭔가 다른 것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빵인가? 이 빵은 제대로 구워졌는가?와 같은 개별적인 사실들도 숙고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감각의 대상이다.

숙고의 대상과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점 말고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숙고끝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있지만 숙고 끝에 우리가 욕구하는 것이므로, 합리적인 선택은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숙고 끝의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숙고 끝에 결정했다면, 그것은 숙고에 따라 욕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5장 미덕과 악덕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자발적이지 않는 것을 행하도록 격려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윌에게 더위를 타지 말라거나, 고통을 느끼지 말라거나, 배고프지 말라거나, 그 밖에도 이런 것들을 달리 설득해봤자 그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그런 감정을 느낄 테니까

실제로 입법자들은 무지에 대한 책임이 범죄자에게 있다고 생각되면 무지 자체 때문에 범죄를 처벌한다.. 이를테면 술 취한 범죄자는 가중처벌을 한다. 술에 취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므로 제1원리는 그에게 있고, 술에 취한 것이 그의 무지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입법자들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간단한 법규를 모르는 사람들도 처벌한다. 이 점은 사람들이 부주의한 탓에 무지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조심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조심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슨한 생활태도 탓에 그렇게 되는 것은 본인 책임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함으로써 불의해지고, 음주나 다른 탈선 행위로 소일함으로써 방탕해진다.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은 자기 행동에 맞는 성격을 계발하기 때문이다.

혼의 악덕만이 자발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몸의 결함도 자발적인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한다. 본래부터 추한 사람들은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우리는 운동을 하지 않거나 몸을 돌보지 않아서 추한 사람들은 비난한다. 허약함과 신체장애도 마찬가지다. 본래부터 눈이 멀었거나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눈이 먼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미덕은 중용이며 마음가짐이다. 미덕은 또한 유덕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의해 미덕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게 하며,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있으며, 자발적이며, 올바른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행한다.

 

재6장 용기,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하야할 것

 

우리는 불명예, 가난, 질병, 고독, 죽음 같은 모든 나쁜 것들을 두려워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중 어떤 것들, 예를 들면 불명예는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고상한 일이며,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불명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점잖고 겸손하지만, 불명예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파렴치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가난이나 질병, 일반적으로 말해서 악덕과 우리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되지 않는 것들은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용감한 것은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종말이며, 죽은 사람에게는 좋음도 나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죽음이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는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바삿물에 빠져 죽거나 병에 걸려 죽는 것이 그렇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죽음이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인가?

분명 가장 고상한 죽음일 것이다. 그런 죽음은 전쟁터에서의 죽음이다.

 

제7장 용기의 동기는 고상함이다. 비겁함과 무모함의 특징

 

우리는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들은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다.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는 것들은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의 크기와 강도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들을 두려워하더라도, 고상한 것을 위해 그런 것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견뎌낼 것이다.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는 안되는 방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그래서는 안될 때 두려워하는 것 등이다.

따라서 용감한 사람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을, 당연한 이유에서, 당연한 방법으로, 당연할 때에 참고 견디며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힘든 일을 회피하는 것은 유약함이며, 그런 사람이 죽음을 견뎌내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고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 사물들에 대한 경험도 용기로 간주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일종의 지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용기를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런 상황에서 과시하지만, 싸움터에서는 대체로 직업군인들이 과시한다. 싸움터에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만연하곤 하는데, 그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런 두려움의 실상을 모르기에 직업군인들이 용감해 보인다. 그러나 직업군인들은 위험이 너무 크고 인원과 장비에서 열세일 때는 겁쟁이가 된다. 시민군 부대는 제자리를 지키며 결사항전을 하지만 직업군인들은 먼저 도주한다. 시민군 부대에게는 도주가 불명예스럽고, 그렇게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는 죽음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기개 역시 용기로 간주된다. 자기에게 부상을 입힌 자들을 공격하는 야수들처럼 기개로 인해 행동하는 사람들 역시 용감해 보인다. 용한감 하람들도 기개가 높기 때문이다.

용감한 사람은 고상한 것을 위해 행동하는데, 기개는 그의 보조원이다.

예견된 위급 상황에서보다 돌발적 위급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것이, 더 용감한 사람의 특징인 것 같다. 그런 행위는 준비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음가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무지해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용감해 보인다. 그들은 낙관적인 사람들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낙관적인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감이 없다는 점에서 낙관적인 사람들만 못하다.

따라서 낙관적인 사람들은 한동안 견뎌냈지만, 사태를 잘못 파악한 사람들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의심스러워지면 곧장 도주한다.

 

제9장 용기는 고통과 쾌락에 관련된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것을 참고 견디기에 용감하다고 불린다. 따라서 용기는 고통을 내포한다. 그리고 즐거움을 멀리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어려우므로 용기가 칭찬받는 것은 당연하다. 용기가 추구하는 목적은 물론 즐거움이지만, 이런 사실은 부수적인 상황에 의해 가려지는 것 같다. 죽음과 부상은 용감한 사람에게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유덕할수록 그리고 행복할수록 죽는다는 생각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삶이 더없이 소중하기에 가장 큰 축복을 알면서도 잃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용감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이런 축복들 대신 장렬한 최후를 선택하기에 더 용감해질 것이다. 따라서 목적을 달성한 경우 말고는,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제10장 절제, 절제애 관련된 쾌락들

 

우리는 혼의 쾌락과 몸의 쾌락을 구분해야 한다. 명예를 좋아하느 것,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 등이 혼의 쾌락에 속한다.

절제는 몸의 쾌락에 관련된다. 그렇다고 모든 몸의 쾌락에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색채, 형태, 그림 같은 시각의 대상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절제 있다고도, 방종하다고도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보고 좋아하는 데도 적당한 정도와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청각의 대상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또한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연상작용에 의해 좋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사과나 장미나 향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방종하다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향수나 맛있는 요리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음식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은 방종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런 것들은 그의 욕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그런 감각들을 통해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냥개가 좋아하는 것은 산토끼의 냄새가 결코 아니며, 산토끼를 잡아먹는 것이다. 산토끼 냄새는 산토끼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사자가 좋아하는 것도 황소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니라 황소를 잡아먹는 것이다. 사자가 황소의 울부짖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소리를 듣고 가까이에 황소가 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방종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먹을 거리든, 마실거리든 아니면 성교든 전적으로 촉각에 의해 유발되는 쾌감이다. 따라서 방종이 관여하는 감각은 가장 광범위하게 공유된다. 그리고 방종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동물로서 갖는 속성이기에 비난받아 마땅해보인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동물적이다. 그러나 촉감이 주는 가장 점잖은 쾌감들, 이를테면 체육관에서 마찰을 하여 몸이 더워질때 느끼는 쾌감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방종한 사람에게는 몸 전체가 아니라 몸의 특정 부위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제11장 절제와 방종의 특징. 무감각

쾌락과 관련해서는 지나침은 분명 방종이며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고통과 관련해서는 용기의 경우와 다르다.

방종한 사람이 방종한 것은 즐거운 것들을 얻는데 실패할 때(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쾌락인데도) 지나치게 괴로워하기 때문이며, 반면에 절제 있는 사람이 절제 있는 것은 즐거운 것들이 없거나 쾌락을 멀리해도 괴로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종한 사람은 즐거운 모든 것 또는 가장 즐거운 것을 욕구하며 이런 욕구에 이끌려, 다른 것들보다 먼저 그런 것들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을 얻는데 실패할 때도, 그런것들을 욕구할 때도 괴로워한다. 욕구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절제있는 사람은 쾌락과 관련하여 중용을 지킨다. 그는 방종한 사람이 흔히 즐기는 것들을 즐기기는 커녕 오히려 싫어하며, 일반적으로 말해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는 또한 어떤 쾌락도 지나치게 즐기지 않으며, 즐거운 것들이 없어도 괴로워하거나 욕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즐거우면서도 건강과 몸에 좋은 것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적당하게 욕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쾌락들도 건강과 몸에 해롭지 않거나 고상한 것에 배치되지 않을때 자신의 재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욕구할 것이다.

 

제12장 방종이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이다. 방종한 사람과 응석둥이의 비교

 

방종은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인 것 같다. 방종은 쾌락에 의해 유발되고 비겁함은 고통에 의해 유발되는데, 방종은 선택의 대상이고 비겁함은 회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본성을 흐트러뜨리고 파괴하는 데 반해, 쾌락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종이 더 자발적이다. 그래서 방종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비겁함 자체는 고통이 없지만, 개별 비겁 행위들은 사람들이 자기 무기를 내던지거나 그 밖의 창피스러운 짓을 할 만큼 고통으로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그래서 개별 비겁 행위들은 강요당한 것처럼 보인다.

 

 

<제3권> 다른 미덕

 

제1장 돈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 후함

 

후한 사람이 칭찬받는 것은 전쟁의 영역이나, 절제가 관련된 영역이나, 판결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돈거래 특히 돈을 주는 일과 관련된 영역이다.

방탕과 인색 또는 재물에 관련된 지나침과 모자람이다.

방탕한 사람은 자멸하는 사람인데, 재산은 생계수단인 만큼 재산을 낭비하는 것은 일종의 자멸행위가 아닐 수 없다. 재물의 사용은 주고받는 데 있는 것 같다. 반면, 재물을 받아서 간수하는 일은 소유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람들한테서 받고 받아서는 안될 사람들한테서 받지 않는 것보다는, 당연히 주어야할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후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유덕한 사람들 중에 후한 사람들이 가장 사랑받는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도움을 주기 때문인데, 그들의 도움은 주는데 있다.

후한 사람은 또한 재물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기꺼이 남의 덕을 보는 것은 남에게 배푸는 사람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받아야 할 곳에서는, 이를테면 자기 재산에서는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가지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자기 재산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인데, 자기 재산으로 남들을 돕기 때문이다. 후한 사람은 또한 아무에게나 주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가 마땅히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고상한 곳에서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기 위해서이다. 자기한테는 너무 조금 남을 정도로 지나치게 주는 것이 후한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인데, 후한 사람은 으레 자신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후함은 주는 사람의 재산에 따라 상대적이다. 후함은 주어진 것들의 양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마음가짐은 주는 사람의 재산에 따라 상대적이기 떄문이다. 따라서 가진 재산이 적은 사람은 남보다 적게 주어도 더 후할 수 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보다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더 후한 것 같다.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궁핍했던 경험이 없고, 부모들과 시인들이 그러하듯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룩한 것들에 더 애착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후한 사람과는 돈거래가 쉽다. 그는 재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므로 속아 넘어가기 쉽고, 쓰지 말아야 할 곳에 쓴 것을 괴로워하기보다는 써야 할 만큼 쓰지 못한 것을 더 아쉬워하기 때문이다.

 

방탕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서는 지나치되 받는 것에서는 모자라는 것이다. 반면에 인색은 주는 것에는 모자라고 받는 것에는 지나치되 사소한 일에서만 그렇다. 따라서 방탕의 두 가지 특징이 함꼐하는 경우는 드물다. 누구에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무에게나 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인들의 재물은 금세 탕진되고 말 테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방탕한 사람들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인색한 사람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그런 사람은 나이와 가난에 의해 쉽게 치유되어 중용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주기는 하되 받지는 않는 후한 사람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인색은 치유될 수 없을 뿐더러(노년과 온갖 무능 탓에 인색해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방탕보다도 더 깊이 인간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 대중은 재물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제2장 통 큼

 

통큼은 후함과는 달리 재물에 관계된 모든 행위가 아니라 지출을 포함하는 행위들에만 적용된다.

지출을 포함하는 행위들에서는 통큼이 규모 면에서는 후함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통큼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규모가 큰, 적절한 지출이기 때문이다.

적절함은 행위자, 환경, 지출 대상에 따라 상대적이다. '난 부랑자에게도 종종 베풀곤 했소'라는 시행에서 볼 수 있듯이 작은 일이나 중간 규모의 일에 적당히 지출한 사람은 통 크다고 불리지 않고, 큰 규모로 지출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불린다. 통 큰 사람은 후해도, 후한 사람이 반드시 통 근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가짐의 모자람은 좀스러움이고 지나침은 속물근성, 몰취미 등으로 불린다.

통 큰 사람은 일종의 전문가다. 그는 무엇이 적절한지 볼 줄 알고 거액을 적절히 지출할 줄 알기 때문이다.

통 큰 사람은 고상한 목적을 위해 그런 지출을 감당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들의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기꺼이, 아낌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비용을 꼼꼼히 따지는 것은 좀스럽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소기의 성과를 올리자면 비용이 얼마쯤 들고 어떻게 해야 가장 싼 값에 성과를 올릴 수 있느냐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해야 가장 고상하고 적절한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통 큰 사람은 반드시 후회하기도 한다. 후한 사람도 적당한 금액을 적당한 방법으로 지출하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비용으로도 더 통 큰 성과를 올릴 것이다. 성과의 미덕과 재산의 미덕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명예로운 재산은 황금처럼 가장 값나가는 재물이지만, 가장 명예로운 성과는 위대하고 고상한 것이다.

 

통큼은 우리가 명예롭다고 말하는 지출들에서 발견되는데, 이를테면 봉헌물, 신전건립, 희생제 처럼 신에 관련된 지출과 종교 일반에 관련되는 지출이 거기에 속한다. 또한  사람들이 보란듯이 합창가무단의 경비를 부담하거나 도시 전체에 잔치를 제공하기로 결심할 때처럼, 공공심의 경쟁대상이 되는 것들도 거기에 속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통이 클 수가 없다.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바른 지출은 미덕에 걸맞는 것인 데 반해, 그는 적당량 이상을 지출하기 때문이다.

큰 지출은 자수성가를 했거나 조상이나 친인척에게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명문가족 출신이거나 그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린다. 그런 것들은 모두 위대함과 신망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통 큰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지출하며, 그의 선물은 봉헌물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지나침으로 흘러 속물이 되는 사람은 적당량 이상을 지출함으로써 지나치다. 그는 사소한 일에 거액을 지출하며 어울리지 않게 자기과시를 한다. 좀스러운 사람은 모든 점에서 모자랄 것이다. 거액을 쓰고 나서 푼돈을 아끼려다 고상한 것을 훼손한다. 그는 무엇을 하건 주저하며 어떻게 하면 되도록 경비를 낮출 수 있을까 궁리하고, 그것도 못마땅해서 자기는 매사를 필요 이상 대구모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가짐들은 악덕이지만 비난받지는 않는다. 이웃에 해를 끼치지도 않고 그다지 꼴사납지도 않기 때문이다.

 

제3장 명예에 관련된 미덕들

 

자부심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 큰 것들에 관련되어 있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란, 자기는 큰 일을 할 만하다고 생각할 뿐더러 실제로 큰일을 할 만한 사람이다.

자기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유덕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어리석거나 지각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일을 할만 하고, 자기를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제있는 사람이지만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다. 자부심에는 크기가 필요한데, 아름다움에는 잘 발달된 몸집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시 말해 몸집이 작은 사람은 아담하고 균형은 잘 잡히겠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자기는 큰 일을 할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은 허영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다. 한편 자기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소심한 사람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요구의 크기에서는 극단에 있지만 요구의 정당성에서는 중용을 지킨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가치에 걸맞은 것을 요구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나치거나 모자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미덕에서의 위대함이 자부심이 강한 사람의 특징인 것 같다. 무기를 던져버리고 도주하거나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자부심이 강한 사람과는 전혀 걸맞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수치스러운 짓을 하겠는가?

자부심은 미덕들을 더 위대하게 만들어주며, 미덕들과 떨어져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부와 권력과 자기에게 닥치는 온갖 행운과 불운에 대해 온건하게 대처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행운을 너무 즐거워하지도 않고, 불운을 너무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명예조차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는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명예 때문에 바람직하다. 아무튼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들로 말미암아 존경받기를 원한다. 그러니 명예조차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것들도 하찮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거만해 보이는 것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높이 평가하는 일이 많지 않기에 하찮은 일에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큰일을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쓴다.

 

자부심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아첨꾼이다. 모든 아첨꾼들에게는 노예근성이 있고, 자부심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아첨꾼들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또한 감탄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위대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원한을 품지 않는다. 특히 나쁜 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은 자부심 강한 사람에게 걸맞지 않고, 오히려 못 본체하는 것이 그다운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남들에 관해 잡담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칭찬받거나 남들이 비난받는 것에 무관심한지라 자신에 관해서도 남들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좀처럼 남들을 칭찬하지도 않는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적이라도 남들을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모욕을 위해서라면 돌라도.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걸음걸이는 느리고 목소리는 깊고 말투는 찬찬할 것이다. 관심사가 적은 사람은 서두르지 않을 것이므로. 그리고 근느 어떤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긴장하는 일도 없는데, 새된 목소리와 성급한 동작은 서두름과 긴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모자란 사람은 소심한 사람이고, 지나친 사람은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다.

소심한 사람은 훌륭한 일을 할 만하지만 자기 가치를 과소평가하며, 그렇게 자기 가치를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무슨 결함이 있는 듯한, 아니 자기 가치를 전혀 모르는 듯한 인사을 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가치에 걸맞은 것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는 고상한 행위와 사업은 물론이요, 외적인 좋음도 삼가하기 때문이다.

한편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어리석고 제 분수를 모르는 사람인데, 드러내놓고 그러는 사람이다. 그들은 과분한 명예를 추구하다가 부적격자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치장을 하고 뽐내며,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어 그러면 존경받을 줄 알고 자신의 성공을 떠벌리고 다닌다.

그러나 소심함이 허영심보다 자부심과 더 배치되는데, 소심함이 더 흔하고 더 나쁘기 때문이다.

 

제5장 분노에 관련된 미덕들

 

온유함은 분노와 관련된 중용이다.

당영히 화낼 일로, 당연히 화내야 할 사람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만큼, 적당한 때에, 적당한 기간 동안 분노하는 사람은 칭찬받는다. 그런 사람은 온유한 사람일 것이다. 칭찬받는 것은 그의 온유함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은 대개 침착하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의 지시에 따라 당연히 화내야 할 일에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기간 동안만 분노하니 말이다. 또한 온유한 사람은 정도에서 벗어나 모자람 쪽으로 더 가 있는 것 같다. 온유한 사람은 복수하기 보다는 오히려 용서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모욕당해도 참고 견디며, 친구들이 모욕당해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노예다운 태도이다.

 

제6장 사교에 관련된 미덕들

 

사회생활을 할때 어떤 이는 남의 비위를 맞추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정반대로 남의 감정을 해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당연히 그 중간 상태가 칭찬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당연히 그래야 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고, 당연히 거부해야 할 것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방법으로 거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중간 상태는 따로 명칭이 없지만 우애와 가장 비슷하다.

비록 이 말에는 애정의 뜻도 내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제의 마음가짐은 사귀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과 애정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애와 다르다.

남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속셈 없이 사근사근한 사람은 남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고, 돈이나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득을 볼 속셈으로 사근사근한 사람은 아첨꾼이다.

 

제7장 진실성

 

허풍에 대립되는 중용도 거의 같은 영역에서 발견되는데, 역시 명칭이 없다.

허풍쟁이란 자신이 전혀 갖고 있지 않거나 자신이 주장하는 것보다 덜 갖고 있으면서 탁월한 자질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인 것 같다.

반면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자질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용을 지키는 사람은 솔직하고 말과 행동이 진실하며 자기가 가진 자질들을 인정하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진실한 사람은 실제보다 부풀려서 말하기보다는 줄여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과장은 역겨운 것이기에 그러는 것이 더 세련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보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체하는 사람은 다른 속셈이 없을 경우 나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어리석어 보인다. 그가 명성이나 명예 같은 것을 위해 그렇게 한다면 심하게 비난받을 것이 못되지만, 돈이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때무에 그렇게 한다면 더욱 추악해 보인다.(사람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의해 허풍쟁이가 된다. 누가 허풍쟁이라면 그것은 그의 마음가짐 탓이며 그가 그런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질들을 줄여서 말하기에 더욱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과시를 피하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그들은 특히 세상 사람들이 존중하는 자질들이 자기들에게는 없다고 부인한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자질들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은 협잡꾼들이라 불리고, 더 멸시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그런 태도는 때때로 허풍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나침 못지 않게 극단적인 모자람 또한 허풍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제8장 재치

 

인생에는 활동뿐 아니라 휴식이 필요하고 휴식에는 여가와 유흥이 포함되는 만큼, 거기에도 적절한 자세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농담을 하는 사람들은 웃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며, 농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려고 점잖게 말하기보다는 웃기고자 하는 데 관심이 더 많은 저속한 익살꾼으로 간주된다.

한편 자신은 농담을 하지 않을 뿐더러 남이 농담을 하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들은 촌스럽고 딱딱해 보인다.

 

중용에는 기지도 있다. 훌륭하고 점잖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이 기지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그런 사람이 재미삼아 말하고 듣기에 적절한 것이 따로 있는데, 점잖은 사람이 재미있어 하는 것은 노예적인 인간이 재미있어 하는 것과 다르며, 교육받은 사람이 재미있어 하는 것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재미있어 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제9장 수치심

 

수치심은 마음가짐보다는 감정과 더 비슷하다. 불명예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으로 정의되며, 그 효력은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유발되는 것과 흡사하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얼굴이 붉어지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얼굴이 창백해진다. 따라서 둘 다 어떤 의미에서 몸과 관련되는데, 이것은 마음가짐보다는 감정의 특징이다.

감정은 모든 연령층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청년층에게 어울린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수치심을 느낄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젊은이들은 감정으로 살기에 실수를 자주 하지만 수치심에 의해 제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낄 줄 아는 젊은이들을 칭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이 지긋한 사람이 수치심을 느낄 줄 안다고 칭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만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쁜짓을 했을 때 느끼는 것이 수치심이라면 그전에 나쁜짓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설사 수치스러운 짓을 하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뻔뻔스러움은 나쁜것이라 해도, 수치스러운 짓을 하고 나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제5권> 정의

 

제1장 정의는 무엇이며 불의는 무엇인가

 

정의는 합법과 공정을, 불의는 불법과 불공정을 의미한다.

불의한 사람은 탐욕스럽기에 여러 좋음에 관심을 두지만, 모든 좋음이 아니라 행운과 불운이 관여하는 그런 좋음들에 관심을 둘 것이다. 그런 좋음들은 그 자체로는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특정 개인에게는 언제나 그렇지마은 않다

불의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더 큰 몫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며, 그 자체로 나쁜 것들의 경우 오히려 더 작은 몫을 선택한다.

정의는 타인을 위한 좋음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미덕이다. 정의는 대인관계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관직에 있는 사람이든 동료 시민이든 남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

정의는 미덕의 일부가 아니라 미덕의 전부이며, 이에 상반된 불의는 악덕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다.

 

제2장 분배적인 정의와 조정적인 정의

 

다른 악덕들의 경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비행에서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 예켠대 비겁해서 방패를 내던지거나 성질이 고약해서 욕설을 하거나 인색해서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이 그렇다.

보편적인 불의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불의가 있는데, 여기서 불의란 것은 법에 위배된다는 의미에서 불의한 것 전체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또한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간음하고 돈은 버는 데 반해 누군가는 돈을 내고 손해를 보면서도 욕망 때문에 간음한다면, 후자는 탐욕스럽기보다는 방종하다고 여겨질 것이고 전자는 방종하다기보다는 불의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전자가 불의한 것은 분명 그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불의한 행위는 모두 언제나 특정 사악함 탓으로 돌려진다. 예컨대 간음은 방종 탓으로, 전쟁터에서 전우를 버리는 것은 비겁함 탓으로, 폭행은 분노 탓으로 돌려진다. 그러나 누가 이익을 취하면 그의 행위는 불의 말고 어떤 다른 사악함 탓으로도 돌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적인 불의 외에 다른 종류의 불의, 곧 특수한 불의가 있음이 명백하다.

특수한 정의와 같은 의미에서 올바른 것의 한 종류는 명예나 금전이나 기타 정치 공동체의(여기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몫이나 동등하지 않은 몫을 가질 수 있기에) 구성원들 사이에서 분배될 수 있는 것들의 배분이 발견된다.

다른 종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래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 종류는 둘로 나뉘는데, 어떤 거래는 자발적이고 어떤 거래는 비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거래란 판매, 구매, 대부, 저당, 무이자 대여, 공탁, 임대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자발적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이것들의 발단이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비자발적인 거래들은 도둑질, 간음, 독살, 뚜쟁이질, 노예 빼가기, 몸살, 위증처험 은밀하거나 습격, 감금, 살인, 강도, 불구자 만들기, 명예훼손, 공개적인 모욕처럼 폭력적이다.

 

제5장 교환에서의 정의. 응보

교환을 위한 공동체는 두 명의 의사가 아니라, 한명의 의사와 한명의 농부로, 또는 일반적으로 말해 상이하고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들은 균등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환되는 것은 무엇이거나 어떻게든 비교될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돈이 도입되어 일종의 중용역할을 하는 것이다. 돈은 지나침과 모자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재화는 한가지 기준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이 기준은 다름 아니라 모든 것을 연결시켜주는 수요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지금과 다른 정도로 필요하다면, 교환은 아예 없거나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닐 테니까.

돈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에 의해 존재한다. 그래서 돈의 가치를 바꾸거나 돈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제화공의 제작물의 농부의 제작물에 대한 관계가 제화공의 농부에 대한 관계와 같도록 균등화된 뒤에야 응보가 이루어 질 것이다.

돈이 우리에게 하는 일은 미래의 교환을 담보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지금은 필요 없지만 언젠가 필요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정의는 일종의 중용이다. 하지만 불의가 양 극단에 관련되는 데 반해 정의는 중간에 관련된다. 정의란 그것에 힘입어 올바른 사람이 합리적인 선택에 따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자신과 남 사이든 아니면 남과 남 사이든 좋은 것을 분배할 때 바람직한 것은 자신에게 더 많이 할당하고 이웃에게 더 적게 할당하며 해로운 것은 그 반대로 할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비례적으로 동등한 것을 할당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제8장 자발적인 행위와 비자발적인 행위. 의도의 중요성

 

옳은 행위와 불의한 행위가 우리가 말한 바와 같다면, 누군가 자발적으로 행동할 때에만 그의 행위는 옳거나 불의하다. 비자발적으로 행동할 때는 우연히 그렇다면 몰라도 그의 행위는 옳지 않거니와 불의하지도 않다. 그의 행위는 우연에 따라 옳거나 불의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이란 행위자에게 달려 있는 행위를 행위자가 알고서, 곧 누구에게 무슨 도구를 사용하여 무슨 목적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행위는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고 강요된 것이어서도 안된다. 따라서 비자발적인 행위란 모르고 행한, 또는 모르지 않을 경우 행위자에게 달려 있지 않거나 강요된 행위이다. 우리는 자연의 추세속에서 많은 것을 알면서 행하고 당하지만, 그중 어떤 것들은 늙음과 죽음처럼 자발적인 것도 아니고 비자발적인 것도 아니기 떄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래에서 해악을 끼치는 방법은 세가지다.

모르고 행한 것은, 당하는 사람과 행위의 성질과 사용한 도구와 결과가 행위자가 생각한 것과 다를 때는, 과오이다. 행위자는 자기가 아무도 때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리적인 예쌍에서 벗어나 해악이 발생하면 그것은 우발사고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예상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어도 악의가 수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과오이다. 일차적인 책임이 행위자 안에 있을 떄는 과오이고, 행위자 밖에 있을 떄는 우발사고이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알고서 행하되 미리 숙고하지 않고 행하면 그것은 불의한 행위이다. 기개나 그 밖에 인간이 타고난 피할 수 없는 감정에서 행해진 모든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종류의 해악을 끼치고 이런 종류의 과오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불의를 행하고 그들의 행위는 불의하지만, 그 해강이 악의 때문이 아닌 한 행위자들이 불의하거나 사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의도적으로 불의를 행할 때 불의하고 사악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비롯된 행위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불상사의 발단은 화가 나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경우 쟁점은 행위가 행해졌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정당한가의 여부다. 불의해 보이는 것이 분노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는 기억이 나지 않아 사실을 두고 다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쌍방이 상거래에서처럼 단순한 사실을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양쪽 다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 어느쪽이 옳은가를 두고 다투는 것이다. 그래서 한쪽은 자기가 불의를 당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비자발적인 행위 가운데 더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더러는 용서받을 수 없다. 모르고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무지로 인한 과오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모르고 저질렀지만 무지가 아니라 본성에 어긋나는 비인간적인 감정으로 인한 과오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제9장 자진해서 불의를 당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직 두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정당하 몫 이상으로 분배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것을 받는 사람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만약 첫 번째 가정이 가능하여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정당한 몫 이상을 갖는 사람이 아니라 분배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누가 더 큰 몫을 자기보다 남에게 알면서 자진하여 분배한다면,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아닌게 아니라 절제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 같다. 훌륭한 사람들은 제 몫보다 더 적게 가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분명 분배하는 사람이며, 제 몫 이상으로 받는 사람은 늘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란 불의한 것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불의를 행하는 사람 다시 말해 행위의 발단이 되는 사람인데, 그것은 받는 사람이 아니라 분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별다른 지혜가 없어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옳은지 아는 것은 무엇이 건강에 좋은지 아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의술의 경우에도 꿀, 포도주, 뜸, 수술에 관 아는 것은 쉽지만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어떻게 누구에게 언제 처방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의사가 되는 것만큼이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사람들은 올바른 사람도 불의한 사람 못지 않게 불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여자와 간음하고 옆 사람을 칠 수 있다. 용감한 사람도 방패를 던지고 우왕좌왕할 수 있다. 그러나 비겁하게 군다든가 불의를 행하는 것은 우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마음가짐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는 그 자체로 좋은 것들에 관여하되 그것들을 지나치게 또는 모자라게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어떤 존재들 이를테면 신들은 그것들을 지나치게 많이 갖지도 않지만,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치유할 수 없는 악인들에게는 그중 가장 작은 몫도 유익하지 않고 그것들은 모두 해로울 것이다.

 

제10장 법적인 정의를 시정한는 공정성

 

공정한 사람은 합리적으로 선택해서 공정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부당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법이 그의 편을 들더라도 자기 몫보다 덜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공정한 사람이고 이런 마음가짐이 공정성인데, 공정성은 일종의 정의이며 별개의 마음가짐이다.

 

<제6권> 지적인 미덕

 

제1장 왜 지적인 미덕을 고찰해야 하는가? 지성은 관조적인 것과 수리적인 것으로 나뉜다.

 

혼에는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다.

이성적인 부분도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한 부분으로는 제1원리가 불변적인 것들을 관조하고, 다른 부분은 제1원리가 가변적인 것들을 관조한다고 가정하자.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유사성과 친족성에 달려 있는 만큼, 대상의 종류가 다르면 각각의 대상에 관련되는 혼의 부분도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중 한부분은 인식하는 것이라 하고, 다른 부분은 헤아리는 것이라 하자. 숙고하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같은 것이며, 불변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누구도 숙고하지 않으니까. 따라서 헤아리는 부분은 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일부이다.

 

제2장 미덕과 사고

 

혼에는 활동과 진리를 지배하는 것이 셋 있는데, 감각과 지성과 욕구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감각은 어떤 행위의 제1원리도 아니다. 동물들도 감각은 있지만 어떤 행위도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구의 영역에서의 추구와 회피는, 사고의 여역에서의 긍정과 부정에 정확하게 대응한다. 따라서 도덕적인 미덕은 합리적인 선택을 포함하는 마음가짐이고, 합리적인 선택은 숙고 끝의 욕구인 만큼 합리적인 선택이 훌륭한 것이라면 이성도 욕구도 올바른 것이어야 하고, 욕구는 이성이 긍정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와 진리가 실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이고 생산적인 사고와는 다른 과조적인 사고의 경우, 좋은 상태와 나쁜 생태는 각각 진리와 거짓이다. 진리는 사고와 관련된 모든 것의 특징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천적인 사고의 기능은 올바른 욕구와 부합되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고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며, 목적지향적이고 실천적인 사고만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사고는 제작적인 사고도 지배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제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떤 목적을 위해 제작하며, 제작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또는 특수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훌륭한 행위는 하나의 목적이며 욕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선택은 욕구에 관련된 지성이거나 사고에 관련된 욕구이다. 그리고 인간이 바로 그런 종류의 제1원리이다.

 

제3장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다섯가지 마음가짐. 학문적인 인식

 

혼이 긍정과 부정에 의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기술, 학문적인 인식, 실천적인 지혜, 철학적인 지혜, 지관 이렇게 다섯가지가 있다고 가정하자.

 

제4장 기술

 

건축술은 기술의 하나이며 필시 이성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인 만큼, 그리고 이성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닌 기술도 없고 기술이 아닌 그런 마음가짐도 없는 만큼, 기술은 참된 이성이 수반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같은 것이다.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련되며, 기술의 관심사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제1원리가 제작자에게 있고 제작물에 있지 않은 무엇인가가 어떻게 하면 존재하게 될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기술이 관심을 갖는 것은 존재하거나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들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제작과 행위는 같은 것이 아닌 만큼, 기술의 관심사는 행위가 아니라 제작이어야 한다.

 

제5장 실천적인 지혜

 

이를테면 건강이나 체력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특정 관점에서 자기에게 좋고 유익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삶 일반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올바르게 숙고할 수 있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 실천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달라질 수 없거나 또는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학문적인 인식은 증명을 내포하는데 제1원리가 가변적인 것은 증명할 수 없다면, 그리고 필연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숙고할 수 없다면, 실천적인 지혜가 학문적인 인식이 아닌 까닭은 행위의 대상이 가변적이기 때문이며, 실천적인 지혜가 기술이 아닌 까닭은 행위와 제작은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실천적인 지혜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나 나쁜 것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참되고 이성적인 마음가짐이다.

 

제6장 직관

 

학문적인 인식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들에 대한 판단이다. 그리고 논증될 수 있는 진리와 모든 종류의 학문적인 인식은 제1원리들에서 비롯된다. 학문적인 인식은 합리적인 설명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적인 진리의 제1원리들은 학문적인 인식이나 기술이나 실천적인 지혜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학문적인 진리가 논증될 수 있는데 반해, 기술과 실천적인 지혜는 가변적인 것들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불변하는 것들은 물론이요 가변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고 결코 속지 않게 해주는 마음가짐이 학문적인 인식이고, 실천적인 지혜이고, 철학적인 지혜이고, 직관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 가운데 세 가지 곧 실천적인 지혜나 학문적인 인식이나 철학적인 지혜로는 제1원리들을 파악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직관뿐이다.

 

제7장 철학적인 지혜

 

건강에 도움이되는 것이나 좋은 것은 사람과 물고기에게 서로 다르지만 흰 것이나 곧은 것은 언제나 같은 것이라면, 누구나 철학적인 지혜는 같은 것이고 실천적인 지혜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에 관련된 개별적인 일들을 잘 살필 줄 아는 사람을 실천적인 지혜가 있다고 말하며, 그에게 그런 일들을 맡기기 때문이다. 그런 깨닭에 사람들은 어떤 동물들에게도, 말하자면 살아남기 위해 앞을 내다볼 줄 아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들에게도 실천적인 지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철학적인 지혜와 정치학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만약 우리 자신의 개별적인 이익에 관련된 지식을 철학적인 지혜라고 한다면, 철학적인 지혜는 다수일 테니까. 모든 동물의 좋음에 관련된 하나의 지혜는 없고, 각각의 종에게 다른 지혜가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한 단 하나의 의술도 있을 것이다.

철학적 지혜는 본성상 가장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학문적이며 직관적인 지식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아낙사고라스나 탈레스 같은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무지한 것을 보고는, 철학적인 지혜는 있지만 실천적인 지혜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이 비범하고 놀랍고 난해하고 신적이지만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적인 좋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천적인 지혜는 인간사, 즉 우리가 숙고할 수 있는 것들에 관련된다. 우리는 잘 숙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적인 활동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체로 말해서 잘 숙고하는 사람이란 해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인간 최고선을 자신이 예측한 대로 목표로 삼는 사람이다.

 

제8장 실천적인 지혜와 정치학

 

젊은이들은 기하학과 수학에서 능력을 계발하여 이런 분야에서는 지혜로워지더라도 실천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실천적인 지혜는 개별적인 것도 관련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경험을 통해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을 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젊은이는 경험이 없다.

실제로 우리는 어쨰서 소년이 수학자는 될 수 있어도 철학자나 자연철학자는 될 수 없느냐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분명 수학의 대상은 추상화에 의해 존재하는 데 반해, 철학과 과연과학의 제1원리들은 경험에서 오기 때문이다.

실천적인 지혜는 직관에 대립된다. 직관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정의들을 파악하지만, 실천적인 지혜는 학문적인 인식이 아니라 지각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마지막 개별적인 것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각이란 개별적인 감각 고유의 대상들에 관련된 지각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우리 앞에 있는 특수한 도형은 삼각형이라는 것을 아는 그런 종류의 지각이다.

 

제9장 탐구와 숙고

 

숙고는 탐구의 일종이다. 우리는 또한 심사숙고에 관해, 그것이 일종의 학문적인 인식인지, 의견인지, 추축할 수 있는 능력인지, 아니면 그 밖의 다른 것인지 알아야 한다.

심사숙고는 학문적인 인식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탐구하지 않는데, 심사숙고는 숙고의 일종이며 숙고하는 사람은 탐구하고 헤아리기 때문이다.

또한 심사숙고는 추측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추측할 수 있는 능력은 헤아리지 않고 빨리 진행되는 데 반해, 숙고는 오랫동안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숙고의 결과는 빨리 수행하되 숙고는 천천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지도 심사숙고와 다르다. 기지는 추측할 수 있는 능력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심사숙고는 어떤 종류의 의견도 아니다. 그러나 나쁘게 숙고하는 사람은 과오를 범하고 잘 숙고하는 사람은 올바르게 숙고하는 만큼, 심사숙고는 올바름의 일종이지만 지식의 올바름도 아니고 의견의 올바름도 아니다. 지식의 오류같은 것은 없는 만큼, 지식의 올바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사숙고는 헤아린다. 좋은 것을 성취하는 것은 심사숙고를 뜻하는 올바른 숙고이다.

 

제10장 판단력

 

판단력은 영원불변하는 것에도 생성되는 것에도 관련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의혹을 품게 하여 숙고하게 만드는 것에 관련된다.

그런 까닭에 판단력의 영역은 실천적인 지혜의 영역과 같다.

그럼에도 판단력과 실천적인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니다. 실천적인 지혜는 명령적인 데 반해, 판단력은 판단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단력은 실천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실천적인 지혜를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가 학문적인 인식의 능력을 활용하는 경우 이해하는 행위는 판단하는 것이라고 불리듯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실천적인 지혜에 관련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 그것도 잘 판단하기 위해 의견의 능력을 활용하는 경우 판단하는 행위는 이해하는 것이라고 불린다.

 

제11장 분별력과 고려

 

분별력은 공정한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다. 무엇이 공정한지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고, 올바른 판단은 무엇이 진실한지 판단하는 능력이다. 판단력이 있는 사람 또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 또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란, 실천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이 관심갖는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공정한 대인관계에서 모든 훌륭한 사람의 공통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본성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런 까닭에 누가 분별력과 직관을 타고 나더라도 철학적인 지혜를 타고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이런 자질들은 일정한 나이에 좌우되며, 일정한 나이가 되면 직관과 분별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이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증명 못지않게 경험 많은 연장자들 또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증명되지 않은 주장이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경험이 많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12장 실천적인 지혜와 철학적인 지혜의 관계

 

철학적인 지혜는 어떤 생성과정에도 관심이 없는 만큼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일절 탐구하지 않는다.

실천적인 지혜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탐구하기는 하지만, 이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인가? 실천적인 지혜는 올바르고 고상하고 인간에게 좋은 것들에 관련되지만, 그런 것들은 좋은 사람의 특징이다. 우리는 안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더 잘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건강 상태의 결과로서 건강과 몸매에 도움 되는 것들을 우리가 안다고 해서 더 잘 실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건강하기를 원하지만 의술을 배우지는 않는다.

게다가 실천적인 지혜가 더 열등하면서도 철학적인 지혜를 지배하려 한다면 불합리해 보인다. 생산된 것을 지배하며 명령하는 것은 생산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지혜는 행복을 산출한다. 철학적인 지혜는 미덕 전체의 한 부분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활용하면 사람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기능은 실천적인 지혜와 도덕적인 미덕이 결합될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미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천적인 지혜는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을 올바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목표가 고상하면 영리함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목표가 나쁘면 영리함은 악랄함이다. 그런 까닭에 실천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도 악랄한 사람도 영리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제13장 실천적인 지혜와 미덕의 관계

 

우리의 성격은 저마다 어떤 의미에서 타고난 것 같다. 우리는 정의나 절제나 용기나 그 밖의 다른 미덕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좋은 것은 뭔가 다른 것이고, 이런 자질들은 다른 방법으로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건장한 사람도 시력을 잃으면 볼 수가 없어 돌아다니다가 크게 넘어지는데, 그 점은 미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행위자가 지성을 갖게 되면 그의 행위는 아주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가짐은 미덕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미덕이 될 것이다.

의견을 갖는 혼의 부분에 영리함과 실천적인 지혜라는 두 가지 마음가짐이 있듯, 혼의 도덕적인 성격에도 본성적인 미덕과 진정한 미덕이라는 두 자질이 있으며, 이중 진정한 미덕은 실천적인 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제7권> 자제력과 자제력 없음. 쾌락

 

제1장 여섯가지 성격. 통념들

 

자제력있는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념때문에 행하는 반면, 자체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들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이성적인 원칙 때문에 욕구들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절제 있는 사람은 자제력 있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제2장 통념들에 대한 논의

 

특히 소피스트들이 사용하는 논리도 문제다. 자신들이 성공하면 영리해 보이려고 상대방의 의견에서 역설적인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까닭에, 그들의 추론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당하는 사람의 생각은 꽁꽁 묶여있다. 그의 생각은 결론이 불만스러워 그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아도 논의의 매듭을 풀 수 없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어떤 논리에 따르면 자제력 없음과 결합된 어리석음은 미덕이라는 결론이 나온는 것이다.

 

제3장 상충하는 의견들에 대한 예비적 고찰

 

우리가 먼저 고찰해야 할 것은, 자제력 없는 사람은 알고 행동하는가 모르고 행동하는가, 알고 행동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하는 것이다. 다음에 고찰해야 할 것은, 자제력 없는 사람과 자제력 있는 사람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쾌락과 고통인가 아니면 특정한 쾌락과 고통인가 하는 것이다.

방종한 사람은 언제나 눈앞의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합리적 선택에 끌려가는데, 자제력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눈앞의 쾌락을 추구한다.

자제력없는 사람들도 예페도클레스의 증명이나 시구를 읊어대고, 갓 배우기 시작한 사람ㄷ르도 낱말들을 그럴듯하게 엮어가지만 아직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지식은 동화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제력 없는 사람들은 배우처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행동을 지배하는 마지막 전제는 지각된 것에 관한 의견이기에 자제력 없는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우리가 보았듯이 파악해봤자 지식이 되지는 못하고 술 취한 사람들이 엠페도클레스를 인용하듯 단지 되뇌는 방법으로 파악할 뿐이다.

자제력없음이라는 감정 상태에서 생기는 지식은 엄밀한 의미의 지식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에 끌려 다니는 지식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감각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제4장 자체력없음의 정의

 

자제력 있는 사람들과 참을성 있는 사람들, 자제력 없는 사람들과 유약한 사람들 모두 쾌락과 고통에 관련된다.

필요한 쾌락들이란 영양섭취와 성욕 등에 관련된 육체적인 쾌락들, 앞서 우리가 방종과 절제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 육체적인 쾌락이다.

다른 쾌락들은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는 바람직한데, 예컨대 승리, 명예, 부, 그밖에 그처험 좋고 즐거운 다른 것들이 그렇다.

그런데 자신 안에 있는 올바른 이성에 반하여 이런 것들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자제력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은 돈이나 이익이나 명예나 분노와 관련하여 자제력없는 사람들이라고 조건부로 그렇게 부른다.

인간적인 사악함은 무조건적인 사락함이라고 불리지만, 다른 종류의 사악함은 '짐승같은'이나 '병적인'이라는 말을 덧붙여 조건부 사악함으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분명 어떤 자제력 없음은 짐승 같다고, 어떤 자제력 없음은 병적이라고 불리지만, 인간의 방종에 상응하는 자제력 없음만은 무조건적인 자제력 없음인 것 같다.

따라서 자제력 없음과 자제력은 방종과 절제와 동일한 대상들에 관련되며, 다른 대상들에 관련되는 자제력 없음은 비유적으로 불린다.

 

제6장 분노와 욕구의 자제력 없음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구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는 덜 수치스럽다.

분노는 어느 정도 이성에 귀를 기울이지만 잘못 알아듣는 것 같다. 이는 열성적인 하인들이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뛰쳐나가 주인이 시키는 일을 그르치거나, 개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 친한 사람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짖어대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분노도 타고난 열기와 성급함 때문에 듣기는 하되 명령을 제대로 듣지로 않고 서둘러 복수한다. 모욕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다고 이성이나 상상력이 일러주면, 분노는 말하자면 그런 일은 응징되어야 한다고 추론하고는 당장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는 어떤 대상이 즐겁다고 이성과 지각이 말해주기만 하면 그것을 즐기려고 달려든다. 따라서 분노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에 복종하지만, 욕구는 이성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욕구가 더 수치스럽다.

 

제7장 쾌락과 고통에 대한 여러가지 태도

 

방종과 절제는 촉각과 미각에 의해 유발되는 쾌락과 고통, 욕구와 회피에 관련된다.

자제력 없는 사람과 자제력 있는 사람은 쾌락에 관련되어 있고, 유약한 사람과 참을성 있는 사람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다.

참을성은 욕구에 저항하는 것이고 자제력은 욕구를 이기는 것인데, 저항하는 것과 이기는 것은 지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과 다른 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제8장 방종과 자제력 없음의 그 밖의 다른 차이점들

 

방종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충실하므로 뉘우칠줄 모른다. 그러나 자제력 없는 사람은 누구나 뉘우친다. 오히려 방종한 사람은 치유될 수 없지만 자제력 없는 사람은 치유될 수 있다.

악덕은 만성적인지라 부종이나 결핵 같은 병이고, 자제력 없음은 간헐적인지라 간질과 같기 때문이다.

행위자는 자신의 악덕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자제력없음은 의식한다. 자제력 없는 사람들 중에 성급한 사람들이 이성적인 원칙을 가졌으면서도 견지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낫다. 후자들은 더 약한 감정에도 휘둘릴뿐더러 전자들처험 사전에 숙고해보지도 않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9장 자제력과 절제의 관계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을 고집불통이라 부른다. 이들은 자제력 있는 사람과 비슷한 데가 있다. 마치 방탕한 사람이 후한 사람과 비슷하고, 무모한 사람이 용감한 사람과 비슷하듯이,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 쉽게 설득되고 감정이나 욕구에 휘둘릴 때만 생각을 바뀌기를 거부하지만, 고집불통은 욕구에 민감하고 때로는 쾌락에 휘둘리므로 이성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고집불통들은 독선적인 자들, 무지한 자들, 시골뜨나기들로 나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을 바꾸도록 강요당하지 않으면 승자나 된 듯 우쭐대지만, 자신들의 결정들이 민회에서 던진 표가 무효화되듯이 부결되면 괴로워하니 말이다.

 

제11장 쾌락에 대한 비판적인 세가지 견해

 

대다수의 주장에 따르면, 행복에는 쾌락이 수반된다. 그런 까닭에 행복하다를 뜻하는 낱말이 즐기다를 뜻하는 낱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모든 쾌락이 다 좋다는 것은 아니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는, 쾌락들 중에는 수치스럽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들도 있으며, 사람을 병들게 하므로 유해한 것들도 있다는 것이다.

쾌락이 최고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는, 쾌락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이다.

 

제12장 앞서 말한 비판들에 대한 이의 제기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니며 최고선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음을 고찰해보면 분명해진다.

쾌락은 과정이 아니며 모든 쾌락이 과정을 수반하는 것도 아니다. 쾌락은 활동이자 목적이다. 쾌락은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될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쾌락에는 그 자체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다만 타고난 본성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쾌락들에만 그 자체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

 

제13장 어떤 종류의 쾌락은 최고선일 수도 있다

 

마음가짐마다 방해받지 않는 활동이 있다면, 방해받지 않을 경우 모든 마음가짐의 활동이 행복이든 아니면 그

중 한가지 마음가짐의 활동이 행복이든 그것은 아마도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쾌락은 방해받지 않는 활동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쾌락이 무조건 나쁘다해도, 최고선은 일종의 쾌락일 것이다.

행복에는 행운도 필요하기에 어떤 사람들은 행운이 행복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행운도 지나치면 걸림돌이 될 것이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두가 쾌락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쾌락이 최고선이라는 증거이다.

 

제14장 쾌락의 여러 종류들

우리는 왜 육체적인 쾌락이 더 바람직해  보이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육체적인 쾌락은 고통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지나친 고통을 느끼기에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육체적인 쾌락 일반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다. 이들 치료제로서의 쾌락들은 강렬하며, 그래서 추구되는 것이다.

쾌락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은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어떤 쾌락은 야수의 경우처럼 본성적으로 나쁘든, 나쁜 사람들의 경우처럼 습관적으로 나쁘든, 타락한 본성들에 수반되는 활동이다. 다른 쾌락들은 결함 있는 상태를 치유하기 위한 것인데, 정상 상태에 있는 것이 정상 상태에 이르는 과정보다 더 낫다. 이런 쾌락들은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우연적으로만 좋은 것이다.

또한 육체적인 쾌락은 강렬하기에, 다른 종류의 쾌락을 즐길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추구된다. 그들에게는 달리 즐길 것이 없고, 쾌락도 고통도 아닌 중간 상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성이 그런지라 괴롭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동물은 과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언제나 긴장 상태에 있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것에 익숙해졌다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젊을 때는 성장하기 때문에 술 취한 것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데 그래서 젊음이 즐거운 것이다.

한편 본성으로 성급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치료제로서의 쾌락이 필요하다. 그들의 몸은 그들의 기질 탓에 언제나 고통에 시달리며, 그래서 언제나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고통은 그것에 반대되는 쾌락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강렬하기만 하면 아무 쾌락에 의해서도 쫓겨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방종해지고 사악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쾌락들에는 지나침이 없다. 그런 쾌락들은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들에 속하고, 우연적으로 즐거운 것들에 속하지 않는다. 우연적으로 즐거운 것들이란 치료제로서 즐거운 것들을 의미한다.

 

<제5권> 우애

 

제1장 우애는 필요불가결하다

 

선행은 대개 친구들에게 베풀때 가장 칭찬받을 만한데, 만약 선행을 베풀 기회가 없다면 그들에게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또한 그런 부귀영화가 친구들 없이 어떻게 보전되고 유지될 수 있겠는가? 가난하거나 그 밖의 다른 불운을 당할 때도 사람들은 친구들이 유일한 피난처라고 생각한다.

우애는 공동체를 결속시켜주는 유대인 것이며, 입법자들은 정의보다 우애를 더 중시하는 것 같다. 화합은 우애와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는 정의가 필요 없지만, 올바른 사람들끼리는 정의 외에 우애도 필요하다. 그리고 우애야말로 가장 진정한 의미의 정의인 것 같다.

우애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애를 일종의 유사성으로 규정하고는, 서로 유사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나 까마귀는 까마귀끼리하는 말들이 생겨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과학에 더 적절한 방법으로 탐구한다. 그래서 에루리피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메마른 대지는 비를 열망한다.

그리고 신성한 하늘은 비를 잔뜩 머금으면 대지로 떨어지기를 열망한다.

 

헤라클레이토스도 '대립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서로 다른 것들에서 최고의 화음이 생겨난다' '만물은 투쟁의 산물이다'라고 말한다.

 

제3 우애의 종류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뭔가덕을 볼까 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 점은 쾌락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재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성격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이며,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즐거운 것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남을 그의 사람 됨됨이 때문에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유익하거나 즐거운 존재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우애들은 우연적인 것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의 됨됨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이익이나 쾌락을 제공하는 자로서 사랑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우애들은 양쪽이 계속해서 같은 자질을 보여주지 못하면 쉬이 소멸된다. 한쪽이 더 이상 즐겁지 못하거나 유용하지 못하면 다른 쪽이 그를 사랑하기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유용한 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서로 친구가 되었던 이유가 사라지면 우애도 소멸한다.

 

한편 젊은이들 사이의 우애는 쾌락을 목표르 삼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살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에게 즐거운 것과 눈앞에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 들면 즐거운 것도 바뀌기 시작한다.그래서 젊은이들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가 곧 헤어진다.

 

완전한 우애는 서로 유사한 미덕을 가진 좋은 사람들 사이의 우애이다. 그들은 좋은 사람인 한 똑같이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며, 그들 자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5장 마음가짐으로서의 우애

 

사랑은 감정이고 우애는 마음가짐이다.

사랑은 무생물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지만, 상호간의 우애는 합리적인 선택을 수반하며, 합리적인 선택은 마음가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게 하는 것은 마음가짐이지 감정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은 친구를 사랑하면서 자신들에게 좋은 것을 사랑한다. 좋은 사람은 친구가 되면서 친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는 자신의 좋음을 사랑함과 동시에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고 즐거움을 줌으로써 자신이 받는 것을 되갚는 것이다.

 

제6장 조건부 우애와 피상적인 우애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완전한 우애라는 의미에서 동시에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사람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사랑은 일종의 지나침인데, 그런 감정은 한 사람에게 향하기 마련이니까.) 또한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아주 매력적이거나 좋은 사람이 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여러 사람을 겪어보고 친해져야 하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애가 유용성이나 쾌락을 위한 것일 때는 여러 사람에게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많이 있고, 그런 봉사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친구들은 필요 없지만 즐거운 친구들은 필요하다. 그들은 남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할뿐더러, 비록 그들이 잠시 동안은 고통스러운 것을 참을 수 있다 해도 고통스러운 것을 계속해서 견뎌내기란 힘들며 실제로 그런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은 즐거운 친구들을 찾는 것이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유형의 친구들이 있는 것 같다. 더러는 그들에게 유용하고 더러는 즐겁지만, 같은 사람이 두 가지 자질을 겸비하는 일은 드물다. 그들이 찾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미덕을 겸비한 사람들이거나 고상한 목적에 유용한 사람들이 아니라,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는 재담꾼을 찾고 그렇지 않으면 시킨 일을 영리하게 수행할 사람들을 찾는데, 같은 사람이 그런 자질들을 두루 갖추기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유용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직위가 더 우월한 사람의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지위가 더 우월한 사람이 미덕에서도 더 우월하지 않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위와 미덕 양쪽 모두가 우월한 사람은 드물다.

 

제8장 우애에서 사람ㅇ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대중은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더 원하는 것 같은데, 이는 명예욕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남의 아첨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첨꾼은 열등한 친구이거나 아니면 열등하기에 사랑받는 것 티상으로 사랑하는 척하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은 존경받는 것에 가깝다고 느껴지는데, 대중이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존경받는 것이다.

사랑은 동등성과 유사성, 특히 미덕에 있어서의 유사성에 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굳건하기에 서로에 대해서도 굳건하여, 수치스러운 봉사를 요구하거나 제공하기는커녕 사실상 배제하니 말이다. 스스로도 잘못을 저지르지 ㅇ낳고 친구들도 그러히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제12장 우애의 여러 형태

 

부모는 자식들이 부모를 아는 것 이상으로 자식들을 안다. 또한 부모는 자식들이 부모를 자기 것이라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자식들이 자기 것이라고 느낀다. 생단된 것은 생산자에게 속하지만(예컨대 치아나 모발 등은 그 사람에게 속한다), 생산자는 생산된 것에 속하지 않거나, 더 적게 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의 사랑은 시간적으로도  더 길다. 부모는 자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사랑하지만, 자식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판단력과 지각이 생겼을 때라야 부모를 사랑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이로 미루어 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식들을 더 사랑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제9권> 우애(계속)

 

제3장 우애가 해소되는 이유들

 

우애가 유용성이나 쾌락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 우리 친구들이 더 이상 그런 자질들을 갖고 있지 않을 때는 우애를 해소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친구가 된 것은 그런 자질들 때문이었던 만큼, 그런 자질들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기 떄문이다.

친구들 사이의 다툼은 대개 그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친구일 때 생긴다. 친구는 전혀 그런 암시를 준 적이 없는데 우리가 성격 때문에 사랑받는다고 완전히 오해했다면 잘못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친구의 가식에 속았따면 우리를 속인 자에게 당연히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악한 것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으며 사랑받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사악한 것을 사랑해서도 안 되고, 보잘것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우애는 당장 소멸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들이 교정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재산보다도 그들의 성격을 구제해야 한다. 성격은 더 고귀한 것이고 우애와 더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런 우애를 해소하는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그래서 그는 친구가 변해서 구제할 수 없게 되면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친구는 전과 다름없는데 다른 친구는 더 나아지고 미덕에서 훨씬 우월하다면 우월한 쪽은 그래도 전과 다름없는 쪽을 친구로 대해야 하는가?

그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이 점은 이를테면 어릴 때부터 시작된 우애에서처럼 양쪽 사이의 차이가 커질때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한쪽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데 다른 쪽은 탁월한 능력을 계발하였다면 관심사가 서로 다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서로 다른데, 그들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는다?

그렇다면 더 나은 쪽은 다른 쪽을 마치 친구였던 적이 없는 것처럼 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예전의 우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마치 낯선 사람들보다는 친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베풀어야 하듯이, 우리는 예전의 우애를 생각해서라도 예전 친구들을 조금은 배려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나치게 사악한 탓에 우애가 해소된 것이 아니라면.

 

제5장 우애와 호의의 차이

 

호의는 우애의 시작이다. 마치 누군가를 보는 즐거움이 연애의 시작이듯이, 먼저 누군가의 모습에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무도 연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모습이 즐겁다고 해서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없으면 그립고, 곁에 있었으면 싶을 때라야 연애하는 것이다.

호의는 오랜 친교를 통해 우애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적인 우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의는 유용성이나 쾌락에 근거한 우애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이런 것들 떄문에 호의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혜자는 자기가 받은 것을 호의로 보답하는 것이며, 이것은 정당한 행동이다.

그러나 남에게서 덕 볼 것을 기대하고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제8장 진정한 자기애의 본성

 

또다른 난제는 사람이 가장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자신이냐, 아니면 남이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하애서 부른다.

실제로 보잘것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하는데, 사악할수록 더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를테면 자기 이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가장 친한 친구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상대방을 위해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장 잘 충족된다.

이 점은 친구를 규정하는 모든 다른 속성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에 대한 우애의 감정은 자신에 대한 우애의 감정의 확장이다.

사람은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자기애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육체적인 쾌락을 더 많이 차지하는 사람들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대중은 이런 것들을 욕구하며, 마치 최고선인 양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경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그의 지성이 통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자제력이 있다거나 없다고 불리는데 지성이 그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이며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들은 이성의 원칙에 따라 행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 부분이 각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 또는 대체로 그렇다는 것은, 그리고 훌륭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부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양상은 비난받는 양상과는 달라, 이성에 따른 삶이 감정에 따른 삶보다 우월하고, 고상한 것에 대한 요구가 이익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욕구보다 더 우월하 듯 그가 그런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다.

그래서 고상한 행위를 하려고 남달리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칭찬한다. 그리고 각자가 고상한 것을 위해 노력하고, 가장 고상하게 행동하려고 하면, 공공의 복리도 증진되고 개인도 저마다 최고선을 향유할 것이다. 미덕이야말로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나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의 저급한 감정들을 추종함으로써 자신에게도 이웃들에게도 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대중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제9장 행복하려면 친구가 필요한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더없이 행복하며 자족하는 사람들에게는 친구들이 필요 없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좋은 것들을 갖고 있어 자족하기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친구는 제2의 자아인 만큼 누군가 자력으로 마련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한다. 그래서 '신께서 만사형통하게 해주신다면 친구가 왜 필요하겠어요?'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모두 나눠주면서도 외적인 좋음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간주되는 친구들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것 같다.

 

우리에게 친구가 더 필요한 때는 우리가 잘나갈 떄인가, 아니면 역경에 처할 때인가? 역경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잘해줄 사람들이 필요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본성적으로 남들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다. 행복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며 활동은 생성되는 것이지 재물처럼 누군가에게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행복은 사는 것과 활동하는 것에 있고 좋은 사람의 활동은 그 자체로 훌륭하고 즐겁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 자신의 것이 즐겁고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이웃들을, 우리 자신의 행위보다는 이웃들의 행위들을 더 잘 관조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좋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친구들인 훌륭한 사람들의 행위들이 즐겁다면 그렇다면 더없이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친구들이 필요할 것이다.

 

제10장 친구는 얼마나 많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그렇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데 충분한 것 이상의 친구들은 부담스러워서 고상하게 사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친구는 필요없다. 또한 쾌락을 위한 친구들의 경우에도, 마치 음식에 양념을 조금만 쳐도 충분하듯, 소수의 친구들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훌륭한 친구들이라면 우리는 되도록 많이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한 국가의 인구처럼 그 수에 제한을 두어야 하는가?

다수와는 함께 살 수 없으며, 다수에게는 자신을 나눠줄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과 자기 일인 양 기쁨과 슬픔을 나누기도 어렵다. 아마도 한 사람과는 기쁨을 나누고 다른 사람과는 슬픔을 나누는 일이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많은 친구가 아니라, 친한 동아리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만큼만 친구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친구를 소수라도 발견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제10권> 쾌락

 

제4장 쾌락의 정의

 

쾌락은 과정이 아니다. 모든 과정은 (예컨대 건축으) 시간이 필요하고 목적이 있으며, 추구하던 것을 성취했을 때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정은 소요 시간 전체에 있어서는, 또는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에는 완전하다. 소요 시간의 부분들에서 진행되는 과정들은 불완전하며, 과정 전체와도 다르고 저들끼리도 서로 종류가 다르다. 이 점은 걷기와 그 밖에  다른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장소 이동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운동이라면 거기에도 날기, 걷기, 뛰기 같은 형상의 차이가 있기 떄문이다. 걷기 자체에도 차이가 있다.

과정은 어느 순간에도 완전하지 못하며, 많은 운동이 불완전하고 종류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쾌락의 형상은 어느 순간에도 완전하다. 그러니 쾌락과 과정은 별개의 것이며, 쾌락은 분명 전체적이며 완전하다.

과정은 시간이 걸리지만 쾌감을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사고와 관조에도 그것에 걸맞은 캐락이 있듯 모든 감각에는 그것에 걸맞은 쾌락이 있는데, 가장 완전한 것이 가장 즐거우며 건강한 상태에 있는 기관이 가장 훌륭한 대상과 관련하여 벌이는 활동이 가장 완전하다.

쾌락은 활동을 완전한 것이 되게 하지만, 감각의 댓아과 감각이 둘 다 훌륭할 때 활동을 완전한 것이 되게 하는 것처럼 하지는 못한다. 

 

제6장 행복의 본성

 

행복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활동이다. 만약 행복이 마음가짐이라면, 평생 잠만 자는 식물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나 큰 불행을 당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행복은 활동으로 분류해야 한다.

행복은 그 자체 때문에 바람직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그 자체로 바람직한 활동이란 활동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는 활동이다. 그리고 미덕에 걸맞은 활동들이 그런 활동들이다.

재미있는 놀이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그런 것들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몸과 재산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게 함으로써 득보다 실이 많을 테니까.

그런 놀이들을 잘하는 사람들이 참주들의 궁전에서는 높이 평가받는다. 그들은 참주들이 원하는 오락을 제공함으로써 호감을 사고, 참주들은 그런 사람들을 원한다. 그래서 그런 놀이들은 행복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권력자들이 그런 놀이들로 여가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하는 짓은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훌륭한 활동의 원천인 미덕과 지성은 권력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과 어든들에게 명예롭게 여기는 것들이 다르듯이, 보잘것없는 사람과 훌륭한 사람들이 명예롭게 여기는 것들도 당연히 서로 다를 것이다.

행복은 놀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목적이 놀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놀이를 위해 평생토록 노력하고 수고한다면 그것은 이상할 것이다. 사실 행복 외에는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다.

오히려 아나카르시스의 말처럼 진지하게 일하기 위해 놀이를 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놀이는 일종의 휴식인데 우리는 계속해서 일할 수가 없어서 휴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휴식은 목적이 아니라 활동을 위한 것이다.

 

행복한 삶은 미덕에 걸맞은 삶이다. 그런 삶은 진지함을 수반하는 것이고 놀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지한 것들이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기만 한 것들보다 더 낫다고, 더 나은 사람 또는 어떤 사람의 더 나은 부분의 활동이 언제나 더 진지하다고, 그리고 더 나은 것의 활동이 더 우월하고 그래서 행복에 더 이바지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육체적인 쾌락은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노예도 가장 훌륭한 사람 못지않게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노예도 인간답게 산다면 몰라도, 노예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7장 관조적인 삶이 가장 행복하다

 

지성은 우리 안에 있는 최고 부분이고 지성의 대상은 지식의 최고 대상인 만큼 관조는 최고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관조하는 일을 더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니 관조는 또한 가장 지속적이다.

철학은 순수성과 견실함에서 놀랄 만한 쾌락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으며,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지식을 찾는 사람들보다 더 즐겁게 소일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자족도 무엇보다 관조적인 활동에 속할 것이다.

관조의 경우 그 행위 말고는 아무 소득이 생기지 않지만, 실천적인 미덕들의 경우에는 그 행위 말고도 우리가 다소간 뭔가를 얻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또한 여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여가를 갖기 위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실천적인 미덕들의 행위는 정치나 전쟁에서 행해지는데, 이런 것들에 관련된 행위들에는 여가가 없는 것 같다.

 

지성의 활동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자족적이고, 여가가 있고 노고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니 그런 활동이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인간이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은 경지이다. 누군가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신적인 요소가 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의 일들을 생각해야 하며, 필멸의 존재이니깐 필멸의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권고를 따라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되도록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 우리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최고의 것은 부피는 작아도 힘과 가치에서 모든 것을 크게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것이야말로 개개인을 지배하는 더 나은 부분익기에 개개인의 진정한 자아이다.

그러니 사람이 자기 삶 대신 남의 삶을 선택한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 본성적으로 각자에게 가장 좋은 것이자 가장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지성에 걸맞은 삶이 최선이자 가장 즐거운 삶이다. 지성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삶은 또한 가장 행복한 삶일 것이다.

 

제8장 더덕적인 활동은 제2의 행복이다.

 

외적인 좋음들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해서, 누가 행복해지려면 외적인 좋음이 많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족이나 행위는 지나침에 의존하지 않으며, 우리는 바다와 육지를 지배하지 않고도 고상한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약간의 재원으로도 미덕에 걸맞은 행위를 할 수 있다.  훌륭한 일은 사인들이 권력자들 못지 않게, 아니 더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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