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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국가 by 플라톤

by hoyony 2016. 9. 23.

Politeia 



2013. 02. 20

Platon

Platonis Rempublicam


  



<제1권>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더 돈에 집착하지요. 마치 시인이 자신의 시를 사랑하고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사랑하듯, 돈을 모은 사람들은 돈에 애착을 느끼는데, 첫째,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이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무이고, 둘째, 돈은 그들의 작품이기 때문이오.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는 함께하기가 힘들어요. 그들은 돈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칭찬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트라쉬마코스) 누가 시민들의 재산을 빼앗을 뿐더러 시민들을 납치하고 노예로 삼는데 성공하면, 그런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대신 행복하고 축복받았다고 불리지요. 같은 시민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가 대규모로 부정을 저질렀다고 전해 듣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말이오. 그도 그럴것이 불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불의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불의를 비난하는 것이니까요.

스크라테스선생, 이렇듯 불의는 대규모로 저질러지면 정의보다 더 강력하고 더 자유로우며 더 주인답다오. 그래서 내가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정의는 사실은 강자에게 유익한 것이고, 불의는 자신에게 이롭고 유익한 것이라오.

 

(소크라테스) 어떤 종류의 치자든 그가 치자인 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 대상인 피치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할 걸세. 또한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이 점을, 다시말해 피치자에게 유익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네.

 

(트라쉬마코스) 그대는 양치기나 소치기가 양 떼나 소 떼의 이익을 생각하며,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살찌우고

돌보는 것은 주인과 자신들의 이익 외에 뭔가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구려. 무엇보다 그대는 도시의 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치자들이라면 피치자들을 양 떼로 여긴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치자들은 밤낮없이 피치자들을 이용할 궁리만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구려. 소크라테스 선생, 그대는 올바른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불의한 사람보다 더 불리하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어요.

 

우선 올바른 사람이 불의한 자와 협력관계를 맺는 상호간의 계약 체결에 관해 말하자면, 협력관계가 해지될 때 그대는 올바른 사람이 불의한 자보다 더 유리해지기는 커녕 더 불리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다름, 국가의 관계에서도 세금을 내야 할 경우에는 수입이 같아도 올바른 사람은 더 내고 불의한 자는 덜 낼 것이며, 국가에서 받을 경우에는 올바른 사람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불의한 자는 이득을 보겠지요. 또한 이들이 저마다 관직을 맡는다면, 올바른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더라도 살림을 소홀히 한 탓에 형편이 더 어려워질 것이며, 올바른 까닭에 공금을 횡령하지 못할 것이오. 게다가 그는 친적들과 친지들을 부당하게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 이들에게 미움을 사게 될 것이오. 그러나 불의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그와 정반대이지요.

트라쉬마코스는 목욕탕 때밀이가 물을 끼얹듯 이런 말을 우리 귀에 소나기처럼 쏟아붇고는 떠나려 했다.

 

(소크라테스) 자네는 양치기가 양치기인 한 양 떼의 최선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양 떼를 살찌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자기가 잘 먹기 위해 또는 양치기가 아니라 사업가인 듯이 내다 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구먼. 그러나 양치기의 기술의 유일한 관심사는 양 떼의 최선의 상태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데 성공하면 그 기술에도 최선의 상태가 충분히 제공되기 마련일세. 그래서 나는 잠시 전에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모든 형태의 통치는 그것이 통치인 한 오직 그것이 돌보는 피치자의 최선의 상태를 염두에 둔다는 점에 우리가 합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네.

개개의 기술은 우리에게 특수한 혜택을 제공하며, 의술은 건강을 제공하고, 조타술은 안전한 항해를 제공하고, 다른 기술은 다른 것을 제공하네.

 

그렇다면 품삭 획득술은 품삯을 가져다 주겠지? 그것이 품삯 획득술의 기능이니까. 자네는 아마도 누가 돈을 벌면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해서 품삯 획득술을 의술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 모든 전문가가 어떤 혜택을 똑같이 누린다면, 그들은 그들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공통된 무엇인가를 추가로 이용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분명하네. 따라서 품삯을 획득하는 이런 혜택이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의 기술 덕분이 아닐세. 엄밀히 말해 의술은 건강을 제공하고, 품삯 획득술은 품삯을 제공하네. 전문가가 품삯을 받지 않고 거저 일해주면 아무런 혜택도 베풀지 못할까? 혜택을 베풀수 있지.

 

기술이나 통치는 피치자에게 유익한 것을 제공하고 명령하며, 약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강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지 않네. 그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자기 기수을 제대로 사용하려는 사람은 자기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자기가 아니라 피치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하거나 명령하기 때문일쎄. 그래서 통치하기를 승난하는 사람은 돈이든 명예든 보수가 지급되고, 통치하기를 거절하면 벌금이 부과되어야 하는 것 같네.

 

<제2권>

 

(글라우콘) 사람들은 말하기를, 불의를 행하는 것은 그 본성상 좋은 일이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불의를 당하는 쪽의 불이익이 불의를 행하는 쪽의 이익을 능가한대요.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를 행하기도 하고 불의를 당하기도 해보고는 불이익은 피할 수 없고 이익은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당하지도 않기도 서로 협정을 맺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대요.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제정하고 협정을 체결하기 시작하며 법으로 정해진 것을 '합법적이다' '올바르다'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자 본질이래요. 그래서 정의는 좋은 것으로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행할 능력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존중받는 것이지요. 불의를 행할 수 있는 진정한 남자라며 어느 누구와도 불의를 행하거나 불의를 당하지 않기로 협정을 체결하지는 않을 테니 말에요.

 

(소크라테스) 국가가 개인보다 크기 때문에 먼저 국가 안에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 고찰하고 그런 다음 개인에게로 나아가 더 작은 것 안에서도 큰 것 안에서 발견한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지

 

우리는 여러가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네. 그리고 우리는 필요한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줄 많은 협력자들과 한곳에 모여살게 되는데, 이렇게 모여사는 곳에 우리는 국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네.

 

훌륭한 수호자가 될 사람은 천성적으로 지혜를 사랑하고, 기개가 높고, 민첩하고, 강할 것이네.

한데 우리 수호자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교육할 것인가?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과연 국가에서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발생하느냐 하는 우리의 주요 쟁점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걸세.

 

우리 수호자들은 모든 다른 직업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우리나라를 위한 자유의 진정한 실현자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는 이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원래 계획을 고수한다면, 그들은 그 밖의 다른 것을 행하거나 모방해서는 안되네. 만약 그들이 모방한다면, 그들이 모방하기에 적절한 것들을, 말하자면 용감하고 절도 있고 경건하고 자유민답고 그 밖에 그와 자질이 비슷한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곧장 모방해야 하네. 그들은 자유민답지 못한 짓이나 그 밖에 다른 수치스러운 태도는 행해서도 안 되고, 그런 짓이나 태도를 모방하는 데 능해서도 안 되네. 우리는 그들이 병들었거나 사랑에 빠졌거나 분만 중인 여자를 모방하도록 허용해서는 더더욱 안되네.

 

그렇다면 무엇이든 모방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사람이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자신의 작품을 몸소 연출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 보게. 우리는 그를 신성하고 놀랍고 즐거운 사람으로 경배하되 우리나라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없는 만큼 그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불법이라고 설명해주어야 할 걸세. 우리는 그의 머리에 몰약을 붓고 화관을 씌워주며 다른 나라로 보내야해.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는 더 엄격하고 덜 재미있는 시인과 이야기 작가로 만족할 것이네. 훌륭한 사람의 말트를 모방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 전사들의 교육에 착수할 때 정했던 원칙들에 따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시인과 이야기 작가 말일세.

 

<제3권>

 

가장 유능한 의사가 되려면 어릴 때부터 의술을 습득해야 할뿐더러 중병에 걸린 사람들을 되도록 많이 접촉해봐야하며, 자신들도 건강한 체질을 타고나지 못해 온갖 병에 걸려봐야 하네. 왜냐하면 의사들은 남의 몸을 자신들의 몸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건강이 나쁘거나 나빠지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겠지 - 자신들의 혼으로 치료하기 때문일세. 그래서 병들었거나 병들어 있는 혼이 무엇을 보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네. 반면, 재판관은 자신의 혼으로 남의 혼을 다스리네. 그래서 혼에게는 어릴 때부터 사악한 혼과 한데 어울러져 자라거나, 마치 의사들이 자기 경험을 토대로 남의 몸을 치료하듯, 자신의 경험으로 남의 범죄행위를 판단할 수 있도록 스스로 온갖 범죄를 섭력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네. 오히려 혼이 아름답고 훌륭하여 옳고 그름을 건전하게 판단하려면 어린 시절에 사악한 성격들을 경험하거나 접촉하지 말하야하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은 젊어서 순진해 보이며, 불의한 자들에게 쉽게 농락당한다네. 그들의 마음속에는 사악한 자들의 행동을 감지할 수 있는 본보기가 없기 때문일세.

그래서 훌륭한 재판관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늦게야 불의의 본성을 알게 된 나이 지긋한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라네. 그는 불의를 자신의 혼에 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남의 혼에 깃들어 있는 외적인 것으로 봤을 것이기에, 다년간의 수련끝에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론적인 지식에 의해 불의가 어떤 종류의 악인지 분간할 수 있을 것이네.

 

나는 먼저 치자들과 전사들을, 다음에는 나머지 시민들을 설득해볼 것이네. 우리가 그들을 양육하고 교육한 것은 꿈속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사실은 그사이 땅속 깊은 곳에서 형성되고 부양되고, 그들의 무구들과 나머지 장구들이 제작되었으며, 이 과정이 완결되자 그들의 어머니인 대지가 세상으로 올려보냈다고. 그러니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어머니로 여기고는 어머니가 공격당하면 지켜주고, 동료 시민들을 같은 어머니 대지에서 태어난 형제로 여겨야 한다고 말일세.

우리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네. '이 나라에 사는 여러분들은 형제들이오. 그러나 신께서 여러분을 만들 때 여러분 가운데 치자로서 적합한 자들에게는 황금을 섞었는데, 이들이야말로 가장 존경스러운 자들이기 때문이오. 신께서는 보조자들이 될 자들에게는 은을, 농부들과 그 밖의 일꾼들에게는 무쇠와 청동을 섞었소.

여러분들은 대개 여러분을 닮은 자식을 낳곘지만, 여러분은 모두가 동족이기에 떄로는 황금 부모에게서는 은 자식이 태어나고 은 부모에게서 황금 자식이 태어나는 등 다른 종류의 자식이 태어날 수 있을 것이오. 신꼐서 치자들에게 부과한 일차적인 중대한 임무는 치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손들의 혼 안에서 이러한 금속들이 어떻게 섞여 있는지 예의 주시하며 유심히 지켜보라는 것이오. 만약 그들의 자손중 한명이 청동이나 무쇠가 섞여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그에게 본성에 적합한 사회적 지위를 주어 일꾼이나 농부 계급으로 강등시켜야 하오. 반면 일꾼이나 농부의 자식이 황금이나 은이 섞여 태어나면, 그들은 그를 존중하여 수호자나 보조자의 지위로 승진시켜야 하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무쇠나 청동이 섞인 자가 나라의 수호자가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기 때문이오.'

 

개들을 양 떼의 보호자로 사육하는 양치기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섭고 수치스러운 일은, 양육하고 있는 개들이 무절제나 굶주림이나 그 밖의 나쁜 버릇으로 말미암아 양 떼를 공격하며 개 대신 늑대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네. 그러니 우리는 보조자들이 힘이 더 강하다고 해서 시민들에게 그런 짓을 하며, 호의적인 협력자 대신 사나운 주인처럼 행동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으로 감시해야 하네.

그렇다면 수호자들은 그런 교육을 받는 것에 더하여, 그들이 최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뿐더러 다른 시민들에게 불의를 행하도록 그들을 부추기지 않을 정도의 거처와 생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걸세.

 

첫째, 그들은 어느 누구도 꼭 필요한 것 이상의 개인재산을 소유해서는 안되네.

둘쨰, 그들은 어느 구구도 아무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집이나 곳간을 소유해서는 안되네. 그들은 수호자 노릇을 하는 대가로 정해진 만큼의 양식을 다른 시민들한테서 받되, 그것은 자제력있고 용감한 전사들에게 알맞은 양이어야 하며, 연말에 남아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되네. 우리는, 그들의 혼에는 이미 신이 주신 신성환 금과 은이 영원히 내재하는 만큼 그들에게는 따로 인간의 금이 필요 없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천상의 금을 지상의 금과 섞어 오염시키는 것은 신성모독인데. 그 까닭은 그들의 금은 순수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유통되는 금은 수많은 악의 원천이기 때문이라고 일러주어야 하네. 전 시민 가운데 그들만이 금과 은을 다루거나 만져서는 안되며, 그들만이 금과 은과 한지붕 아래 들거가거나, 금과 은을 장신구로 몸에 두르거나, 은잔 또는 금잔으로 마셔서는 안되네. 그래야만 자신도 안전하고, 국가도 안전할 것이네. 그들이 일단 토지와 집과 돈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수호자가 되는 대신 재산 관리인과 농부가 될 것이며, 다른 시민들의 협력자에서 적대적인 주인으로 바뀔 것이네. 그들은 미워하고 미움받으며, 음모를 꾸미고 음모의 대상이 되며, 외부의 적들보다 내부의 적들을 훨씬 더 두려워하며 한평생 보낼 것이네. 그리하여 그들 자신도, 국가 전체도 임박한 파멸을 향해 재빨리 내달을 것이네.

 

<제4권>

 

(아데이만토스)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선느 이들을 아주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고 있지 않으며, 누가 그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어떻게 변론하시겠어요? 국가는 사실상 그들의 것인데도 그들은 전혀 국가의 덕을 보지 못하니 말에요. 다른 사람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크고 멋진 저택을 짓고, 그런 저택에 어울리는 가구를 수집하고, 신들에게 개인적으로 제물을 바치고, 방문객을 맞고, 선생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금과 은과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수호자들은 마치 용병 수비대처럼 시내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 같고, 그들이 하는 일이라야 도시를 지키는 것이 전부에요.

 

(소크라테스) 우리가 국가를 건설하는 목적은 한 집단을 특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네.

선택된 소수의 의견이 아니라 주민 전체의 행복을 확보함으로써 행복한 국가라고 생각되는 것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네. 따라서 우리는 수호자들을 임명하는 것이 그들 자신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가 전체의 행복을 염두에 두어야하는지 결정해야 하네.

후자로 결정할 경우 우리는 이들 보조자들과 수호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는 일에 가장 유능한 전문가가 되도록 강요하고 설득해야 하네. 그리하여 국가 전체가 번창하고 기반이 다져지면, 그 때는 각각의 계급에게 본성에 맞는 행복을 추구하도록 허용해도 될 걸세.

 

우리는 부와 가난이 국가 안으로 몰래 스켜드는 것을 수호자들이 어떻게든 막아야 하네

부는 사치와 나태와 변혁을 낳고, 가난은 변혁에 대한 욕구에 더하여 비열함과 기술의 퇴보를 낳으니 말일세.

 

나라의 용기 역시 지혜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한 부분에 달려 있네

용기란 일종의 보전이라네.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법에 의해, 교육을 통해 주입된 소신의 보전이란 말일세. 어떤 경우에도 견지한다는 내 말은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욕망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그런 소신을 버리지 않고 온전히 보전한다는 뜻이라네.

우리가 추구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수호자들이 올바른 본성과 양육에 힘입어 우리의 법률들을 염료처럼 되도록 힘껏 빨아들여서 두려움과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한 그들의 소신이 변색되지 않고, 소다나 잿물보다 더 세척력이 강한 쾌락, 고통, 공포, 욕망 같은 강력 세제로 세탁해도 물이 빠지지 않는 것이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법이 승인한 올바른 소신을 어떤 경우에도 보전할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을 나는 용기라 부르네.

 

절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질서이며, 특정 쾌락과 욕구의 억제일세.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주인같은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절제의 본성을 암시하는 것이라네.

그러나 '자신의 주인'이라는 표현은 우습지 않은가? 자신의 주인인 사람은 자신의 노예이기도 하고, 자신의 노예인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기도 하니까.

내가 보기에, 이 표현이 뜻하는 것은 각 개인의 혼 안에는 더 나은 부분과 더 못한 부분이 있는데, 본성적으로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면 그사람은 '자신의 주인'으로 불린다는 것이네. 그러나 나쁜 양육과 나쁜 교제 탓에 소수인 더 나은 부분보다 다수인 더 못한 부분에 의해 제압당한다면 이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사람들은 그런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노예'라고 부른다네.

 

용기와 지혜는 특정 부분에 자리 잡고 있어도, 그중 하나는 나라 전체를 지혜롭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나라 전체를 용감하게 만든다네.

절제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네. 절제는 나라 전반에 걸쳐 있으면서, 지식에서건 힘에서건 수에서건 재산에서건 그 밖의 다른 것에서건 가장 약한 자들이 가장 강한 자들과 중간에 있는 자들과 더불어 노래를 제창하게 만드네. 따라서 절제란 국가에서나 개인에게서나 더 나은 부분과 더 못한 부분 가운데 어느쪽이 통치할 것이냐에 대한 이러한 합의라고, 이 양자 간의 자연스러운 협화음이라고 말하는게 가장 타당할 걸세.

 

마지막으로 정의에 대해 고찰

사람들이 가끔 손에 쥔 물건을 찾듯이, 우리도 그와 같이 원하는 물건은 보지 못하고 엉뚱하게 먼 곳만 바라보았단 말일세.

내 말은, 우리가 토론하는 내내 어떤 의미에서 정의를 논했으면서도 그런줄 몰랐던 것 같다는 뜻일세.

처음에 나라을 세우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준수해야 할 원칙을 정했는데, 그것이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 정의라고 나는 생각하네. 우리가 원칙으로 정하고 몇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각자 자기 적성에 가장 잘 맞는 한 가지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네. 그러니 여보게, 이처럼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의인 것 같네.

우리가 절제와 용기와 지혜를 찾아낸 지금 아직도 남아 있는 자질은, 우리나라에 그런 것들이 생기게 할 힘을 갖고있고 그런 것들이 생겨난 뒤에는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그런 것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그런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일세. 우리는 또한 다른 세 가지를 발견한다면 남은 것은 정의일 것이라고 말했네.

그러나 이런 자질 중에서 어느 것이 나라 안에 생김으로써 우리나라를 훌륭한 나라로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하는지 결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결정하기 어려운 일일세. 그것은 치자들과 피치자들 간의 합의일까? 아니면 법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승인한 소신을 우리 전사들이 견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수호자들의 지혜와 경각심일까? 그도 아니면 아이들과 여자들, 노예들과 자유민들, 일꾼들, 치자와 피치자 안에 그것이 생김으로써 나라를 훌륭하게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하는 것은, 각자가 제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일까?

 

타고난 장인이나 사업가가 부나 대중의 지지나 체력 따위에 우쭐해져서 전사 계급에 진입하려 든다거나, 아니면 전사중 한 명이 적성에 맞지 않는데도 결정권을 가진 수호자 계급에 진입하려 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걸세. 만약 이런 사람들이 도구와 사회적인 지위를 바꾸거나 또는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 든다면, 그때는 이러한 교환과 참견이 나라에 파멸을 안겨줄 것이네.

그렇다면 이들 세 계급간의 상호 참견이나 교환은 나라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만큼 나라에 대한 최대 범죄라고 불리어 마땅할 것이네.

그러니까 상호 참견과 교환이 불의일세. 반면 상인 계급과 보조자 계급과 수호자 계급이 제 할 일을 함으로써 나라 안에서 제구실을 하게 하는 능력, 이것이 정의일 것이며, 이것이 나라를 올바르게 만들어줄 수 있지.

 

우리가 국가에서 찾아낸 것들을 이제 개개인에게 적용해보도록 하세.

 

나라가 돈벌이하는 계급, 보조자 계급, 결정권을 쥐고 있는 계급, 이렇게 세 계급으로 이루어지듯, 혼도 나라와 같아서 나쁜 양육 때문에 타락하지 않는 한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부분을 보조하게 되어 있는 제3의 부분으로 기개를 가진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기개가 높지만, 대부분은 나중에야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일부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 말이다.

이성적인 부분은 지혜로워서 혼 전체를 미리 보살피는 만큼 지배하는 것이 적합하겠지만, 기개 높은 부분은 이성적인 부분에 복종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합하겠지.

이 두 부분은 시가 교육과 체력단련 교육의 결합에 의해 조화를 이룰 걸세. 그러한 결합은 합리적인 논의와 학문으로 이성적인 부분을 더 높이 끌어주고 키워주면서도, 화음과 리듬으로 진정시킴으로써 기개 높은 부분을 부드럽게 해줄 테니 말일세.

우리가 개인을 용감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의 이 부분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그의 기개가 쾌락과 고통에 에워싸여도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이성의 지시를 끝까지 지킬 때라는 말일세.

절제 있다는 것은 이들 세 부분의 우호와 화합의 결과가 아닐까? 이성적인 부분이 지배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이에 반항하지 않겠다고, 지배하는 부분과 지배받는 두 부분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질 때라는 말일세.

 

정의의 진정한 관심사는 누군가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내적인 행위, 그의 진정한 자아, 그의 진정한 기능일세. 올바른 사람은 자신 안의 세 부분이 각각 남들이 할 일을 제가 하거나 서로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 음계에서의 세 음정, 즉 최고음, 최저음, 중간음처럼 세 부분을 조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살림을 잘 꾸려나가고 자주독립과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과 사이좋게 살게 될 걸세. 그리고 그가 이런 부분들과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부분들을 잘 훈련되고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여 여럿 대신 완전한 하나가 되면, 그때는 돈 버는 일이 됐든 몸을 돌보는 일이 됐든 정치가 됐든 개인 간의 계약 체결이 됐든 행동에 나서게 될 걸세. 그리고 이런 행위들 가운데 이런 심적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런 심적 상태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행위는 올바르고 훌륭한 행위라고 부르고, 이런 행위를 통제하는 지식을 지혜라고 믿고는 지혜라고 부를 것이네. 반면 이런 심적 상태를 언제나 깨뜨리는 행위를 불의한 행위라고, 그런 행위를 통제하는 의견을 무지라고 부를 것이네.

 

<제5권>

 

(소크라테스) 우리 남자 수호자들과 여자 수호자들은 딴살림을 차려서는 안되고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의 공유물이며, 아이들도 공유물이어서 부모는 제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식은 제 부모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법이 수반되어야 하네

 

몽상가들은 자신의 소원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수고를 피하기 이해 소원을 이룰 수단과 방법을 찾을 생각이랑 아예 하지 않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상상하지. 그리고 거기에 따라 모든 다른 일들을 정리하면서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하려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즐거워한다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잖아도 게으른 마음을 더더욱 게으르게 만들면서 말일세. 나도 지금 당장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내 제안들이 가능한지 여부를 논의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싶네. 그리고 자네만 허락한다면, 나는 내 제안들이 가능하다고는 가정하고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경우 처자들이 어떻게 정리할지 고찰하고 싶으며, 내 제안들이 실행에 옮겨질 경우 국가와 그 수호자들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네.

그럴 경우 이미 남자 수호자들을 뽑은 후 가능한한 본성이 같은 여자를 뽑아 남자 수호자들에게 배정할 것 같네. 그들은 한집에서 공동식사를 하되 그런 종류의 사유재산을 소유하지는 않을 걸세. 그들은 함께하며 어우러져 체력단련을 하고 그 밖의 다른 수련을 받을 테니, 타고난 충동에 이끌려 필연적으로 성관계를 맺게 될 걸세.

행복해야 할 나라에서는 성관계든 그 밖의 다른 것이든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은 불경죄를 범하는 것인 만큼 치자들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네.

따라서 우리의 급선무는 분명 결혼을 최대한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네.

 

가장 훌륭한 남자들은 가장 훌륭한 여자들과 되도록 자주 성관계를 맺어야하지만 열등한 남자들은 열등한 여자들과 되도록 드물게 성관계를 맺어야 하네. 또한 우리 집단이 최상급이 되려면 우리는 전자의 자식들은 양육하되 후자의 자식들은 양육해서는 안되네. 그리고 우리 수호자 집단이 되도록 파쟁에서 벗어나려면 이 모든 일은 치자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어야 하네.

그렇다면 우리는 몇 차례 법정 축제를 정해 제물을 바치고 신랑 신부들이 그곳에 모이게 해야 하네. 우리 시인들은 그곳에서 치러질 혼례식에 걸맞은 찬가를 지어야 하네. 우리는 혼례식의 수를 치자들의 재량에 일임할 것이네. 치자들이 전쟁과 질병을 고려해서 남자들의 수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또 가능하다면 우리나라가 너무 커지는 것도 너무 작아지는 것도 막을 수 있도록 말일세.

또한 우리는 교묘한 제비뽑기도 고안해내야 하네. 혼례식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앞서 말한 열등한 자들이 운을 탓하고 치자들은 탓하지 못하도록 말일세.

그리고 전쟁이나 그 밖의 다른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과 상이 주어져야겠지만, 무엇보다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야 하네. 그런 젊은이들한테서 되도록 많은 아이가 태어날 수 있도록 말일세.

그때그때 태어난 아이들은 그런 목적으로 임명된 공직자들이 넘겨받는데, 이들은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고 양쪽 다일 수도 있네. 그런 공직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똑같이 개방되어 있으니까.

생각건대 이들 공직자들은 훌륭한 부모의 아이들은 탁아소로 데려가서 도시의 한 구역에 따로 떨어져 사는 간호사들에게 맡기겠지만, 열등한 부모의 아이들이나 다른 집단에서 불구로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장소에 감춰버릴 것이네.

이들 공직자들은 아이들의 양육도 맡게 되어, 젖이 나오는 어머니들을 탁아소로 데려가되 어떤 어머니도 제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각별히 조심할 것이며, 어머니들의 젖이 부족하면 유모들을 대주게 될 걸세. 또한 이들 공직자들은 어머니들이 적정 시간만 젓을 빨리게 하고, 밤새 지키는 일이나 그 밖의 다른 노고는 유모와 보육사들이 맡겠지.

여자는 스무살부터 마흔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네. 남자는 달리기 선수로서의 절정기를 지난 뒤부터 쉰 다섯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네.

만약 누가 이보다 더 늙거나 더 젊어서 나라를 위한 출산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이를 죄악과 범죄로 간주할 거네.

그러나 여자들과 남자들이 아이 낳을 나이를 넘기면 우리는 그들이 누구든 원하는 상대와 성관계를 맺도록 내버려둘 걸세. 우리는 그 전에 먼저 그들에게 아이를 잉태할 경우 태아가 태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 태아가 태어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경우 그런 아이는 양육받지 못하고 버려져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처리하라고 일러둘 것이네.

 

국가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가능한 한 모든 시민이 같은 성공과 실패를 기뻐하고 괴로워할 때의 그 기쁨과 고통의 공유다. 그러나 국가와 그 주민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들은 크게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한다면, 개인 간의 이러한 감정 차이는 결속을 저해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또는 '남의 것'과 '남의 것이 아닌 것' 같은 표현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이다.

그렇다면 가장 훌륭하게 경영되는 국가는 최대 다수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것' 같은 표현을 같은 사물들에 대해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국가이다. 또한 개인을 가장 닮은 국가이다. 우리 가운데 누가 손가락을 다치면, 지배적인 부분의 휘하에서 몸과 혼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시키는 유기체 전체가 그것을 감지하고는 몸의 한 부분이 당하는 고통을 전체로서 함께 느낀다.

그러니 개별 시민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 궂은 일이 일어나면, 그런 국가는 그 개별 시민이 자신의 일부라고 강조하며 전체로서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할 것이다.

 

<제6권>

 

진실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본성적으로 실재를 추구하도록 되어 있기에, 실재처럼 보이는 수많은 개개의 사물에 머무르지 않고 실재를 포착하기에 적합한 혼의 부분, 즉 실재와 동족관계에 있는 혼의 부분으로 각 사물의 실재의 본성을 포착할 떄가지는 힘이 빠지거나 애정이 식는 일 없이 꾸준히 나간다는 말일세. 그리하여 그의 혼이 이 부분으로 진정한 실재에 다가가서 교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는데, 그렇게 지식과 참된 삶에 이으로 양육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산통은 멎으며, 그러기 전에는 멎지 않는다고 말일세.

 

막상 논의를 떠나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철학자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면 그중 일부는 무용지물이고 다른 일부는 완전한 악당임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할 것이라며 자네가 이의를 제기했을 때, 우리는 이러한 비방의 원인을 규명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왜 철학자들이 대부분 악당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었네. 또 그 문제를 규명하다 보니 진정한 철학자들의 품성을 다시 다루며 그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네.

 

우리는 이 철학적 품성의 타락에 관하여, 왜 이 철학적 품성이 대부분 타락하게 되는지 그리고 악당이라고는 불리지 않더라도 무용지물이라고 불리게 되는지, 말하자면 소수만이 타락을 면하게 되는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그 다음에는 철학적 품성을 흉내내며 이 품성이 하는 일에 끼어드는 자들이 대체 어떤 성질의 혼을 가졌기에 자기들에게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자기들 힘으로는 감당해낼 수 없는 일에 끼어들어 온갖 과오를 저지름으로써, 철학으로 하여금 온 세상 사람들에게서 자네가 말한 것과 같은 평판을 듣게 하는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우리가 칭찬했던 자질 하나하나가 그것을 갖춘 사람은 혼을 타락시키고 철학에서 이탈하게 된다네.

용기, 절제, 미모, 부, 체력, 세도가와의 인척관계 등등이 속하지.

우리는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든 종자와 거기에서 자라난 것들 가운데 알맞은 영양분과 기후와 토양을 얻지 못하면 강한 것일수록 응당 자라야 할 것보다 덜 자라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그렇다면 생각건대, 가장 훌륭한 품성은 부적절하게 양육될 경우 열등한 품성보다 당연히 나빠질 것이네.

그래서 가장 훌륭한 품성을 갖고 태어난 혼은 나쁜 교육을 받을 경우 다른 혼들보다 훨씬 더 나빠진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대중은 돈을 받고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소피스트라 부르며 자신들의 경쟁자로 여기지만, 이들 각자가 가르치는 것은 대중의 의견, 즉 대중이 집회 때 갖게 되는 의견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이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 역시 대중의 의견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세.

그것은 마치 거대하고 거센 짐승을 사육하는 사람의 경우와도 같네. 이런 사람은 그 짐승의 기질과 욕구를 잘 연구해서 그 짐승을 가까이할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다룰 수 있는 방법, 어떤 경우에 가장 난폭하고 어떤 경우에 가장 유순한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네. 또한 무엇 때문에 여러가지 소리를 지르는지, 반대로 어던 소리를 내면 유순해지고 어떤 소리를 내면 사나워지는지 알게 될 것이네. 그는 오랜 접축을 거쳐 이런 것들을 모두 배운 뒤 그것을 지혜라 부르며 하나의 기술로 체계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네. 하지만 그는 그 짐승의 이러한 취향과 욕구들 가운데 어느 것이 아름답거나 추한지, 또는 좋거나 나쁜지, 또는 올바르거나 불의한지 실제로는 알지도 못하면서 오직 거대한 짐승의 반응과 결부시켜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네. 말하자면 그는 그 짐승이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 부르고, 그 짐승이 싫어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 부르네. 그는 이에 대해 달리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필요불가결한 것을 올바르고 아름답다고 일컫지만, 필요불가결한 것과 좋은 것의 본성이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는 관찰한 적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일 수도 없네. 교육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참으로 이상한 교육자라도 생각되지 않는가?

 

그런데 자네는 그림에서건 음악에서건 정치에서건 사방에서 모여든 잡다한 대중의 기질과 취향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가 이런 인간과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이 대중과 가까이 지내면서 시나 다른 예술품이나 국가를 위한 봉사를 과시함으로써 필요 이상으로 대중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그는 이른바 디오메데스적인 필연성에 따라 대중이 칭찬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일세. 한데 자네는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대중이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좋고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말을 듣고 가소롭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자네는 철학적 품성이 어떻게 구제받아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자기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빠른 이해, 기억력, 용기, 넓은 도량이 철학적 품성에 속한다는 데 우리가 동의한 바 있지.

그런 자질을 구비한 사람이라면 어릴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매사에 으뜸가지 않을까? 특히 그의 몸까지 그런 혼에 어울리게 태어났다면 말일세.

그리고 그의 친족들과 동료 시민들은 그가 성장하면 아마도 자신들의 일에 그를 이용하고 싶어할 것이네

따라서 그들은 그의 미래의 힘을 아첨을 통해 미리 자기들 것으로 만들려고 간청도 하고 경의도 표하면서 그의 비위를 맞출 것이네.

 

이들 소수의 일원이 된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감미롭고 축복받은 것인지도 맛보았겠지만, 대중의 광기도 충분히 맛보았을 것이네. 그는 또한 건전한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 정치가나, 자기와 함께 싸우며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투사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오히려 그는 야수의 무리 사이에 떨어져 함께 불의를 행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모두가 광포한 가운데 혼자서 이에 항거할 수도 없는 사람처럼, 친구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기도 전에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쓸모없는 인간으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네. 이 모든 점을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조용히 자기 일에만 전념하게 될 것이네.

그리고 푹풍이 몰아치는 겨울날 먼지나 폭우를 피해 담벼락 밑에 서 있는 사람처럼 남들이 도리에 어긋나는 생활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기만 부정과 불경행위에 오염되지 않고 이 세상을 살다가 아름다운 희망을 품고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ㅁ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할 것이네.

 

오늘날 철학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에 불과하네. 이들은 소년시절과 가사를 돌보는 돈벌이를 시작하는 시기 사이에 철학의 가장 어려운 부분에 다가가다가 철학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바로 이들이 철학의 대가로 간주되고 있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철학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란 논리적 논의를 뜻하네. 이들은 훗날 철학에 관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토론을 들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에 응하면 그것을 무슨 대단한 일로 여긴다네. 이들이 생각하기에 철학이란 여가가 날 때 틈틈이 하는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세. 그리고 이들은 노년에 이르면 소수를 제외하고는 불꽃이 꺼져버리는데, 다시 점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태양보다 더 심하게 꺼져버린다네.

 

따라서 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에는 그 나이에 걸맞은 교양이나 지혜에 관여해야하지. 아직도 성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이 시기에는 철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몸을 세심하게 돌보지 않으면 안되네. 그러다가 나이 들어 혼이 성숙해지기 시작하면 혼의 단련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네. 그러나 기력이 쇠하여 정치적 봉사와병역 의무를 면제받게 되면 그때는 철학의 풀밭에서 마음껏 풀을 뜯으며, 여가 시간을 제외하고는 철학 이외의 다른 일에 몰두애서는 안되네.

그래야만 행복한 삶을 살고, 죽은 뒤에는 저승에 가서 자기가 살아온 삶에 합당한 운명을 부여받게 될 걸세

 

다음 문제는 어떤 학문과 활동을 통해 정체의 보존자들이 양성되어야 하며, 국가 내에서 그들의 위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며, 그들 각자가 무슨 교과목을 몇 살에 배워야 하느냐는 것이네.

 

치자들은 철인이어야 하는데 그들이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 품성의 여러 부분들은 하나로 결합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분산되기 때문일세.

빠른이해, 좋은 기억력, 재치, 기민성과 그 밖에 활력과 넓은 도량까지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질서있고 조용하고 건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드문 법이라네. 그런 사람들은 아무 데고 기민성이 이끄는대로 끌려다니게 마련인지라 건실성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네.

한편 건실하고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성격들은 더 신뢰할 수 있고, 싸움터에 나가서도 공포에 둔감하지만, 배울 때도 마찬가지로 둔감하다네. 그들은 마취된 양 둔감하고 이해가 느리며, 뭔가를 애써 배워야 할 때마다 졸거나 하품만 하기가 일쑤라네.

 

그러나 우리 수호자들은 이 두가지 자질을 모두 훌륭하고 아름답게 구비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최고의 교육이나 공직이나 권력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네.

 

정의와 아름다움과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이 실재가 아닌 겉모양을 취하여 행하고 소유하며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지만, 선과 관련해서는 겉모양만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누구나 다 실재를 추구하되 그렇게 보이는 것을 경멸한다.

나는 정의와 아름다룸이 어째서 선인지 모르는 사람은 정의와 아름다움의 적합한 수호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나는 어느 구구도 선을 알기 전에는 정의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 수 없을것 같은 예감이 드네.

 

눈은 낮의 빛이 그 색깔을 비추는 사물들이 아니라 밤의 어둠에 덮여 있는 사물들로 향하면, 마치 그 안에 밝은 시각이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침침해져서 멀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네. 그러나 눈이 태양이 비추는 사물들로 향하면 또렷하게 보이므로, 같은 눈이지만 그 안에 시각이 들어 있음을 알수 있네.

 

그렇다면 혼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게. 혼도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것에 머무를 때는 그것을 알고 인식하기에 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둠이 섞인 것, 즉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것에 머무를 때는 의견을 가지는 데 그치며, 잘 보지 못해 금세 이런 의견을 가지는가 하면 금세 저런  의견을 가지므로 또다시 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일세.

그렇다면 인식될 수 있는 것에는 진리를 부여하고 인식하는 자에게는 인식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선의 이데아라고 일컬어도 좋네.

그리고 선의 이데아는 지식과 진리의 원인이긴 하지만 지식에 의해 파악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걸세. 그러나 지식과 진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선의 이데아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야하네. 앞서 빛과 시각을 태양을 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만 태양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듯이, 지식과 진리도 둘 다 선을 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만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선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네. 선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네

 

자네는 아마도 태양이 보이는 사물들에 보이는 기능만을 보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자신을 생성이 아니지만 그것들에 생성과 성장과 영양분도 제공한다는 것에 동의할 걸세.

마찬가지로 자네는 인식되는 사물들이 선으로부터 인식되는 기능만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실재도 부여받지만, 선은 실재가 아니며 위엄과 능력에서 실재를 훨씬 초월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네.

 

자네가 말한 사물들은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영역으로 군림하고, 다른 한 가지는 가시적인 부류와 영역에 군림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그러면 이것들을 서로 같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뉜 하나의 선분으로 생각하되, 그 두 부분을 각각 가시적인 분류와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부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치고 다시 같은 비율로 나누어 보게. 그리고 다시 나누어진 부분들을 명확성과 불명확성의 관점에서 서로 비교해보게. 그러면 가시적인 부류를 나타내는 부분에서 양분된 것 가운데 한 쪽은 자네에게 모상을 나타내 보일 걸세. 한데 내가 모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첫째, 그림자를 뜻하며, 다음에는 물이나 단단하고 매끄럽고 번쩍이는 물체에 비친 영상과 그와 같은 모든 것을 뜻하네.

그렇다면 그중 다른 한쪽은 이 모상들의 실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즉 우리 주위의 동물들과 식물들과 손으로 만든 것 전부를 포괄하는 것으로 가정해 주게. 그러면 자네는 가시적인 세계가 진리냐 아니냐는 점에서 양분되어, 모상이 실물이 맺어서 맺는 관계는 의견이 지식에 대해서 맺는 관계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겠지.

이번에는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세계를 나타내는 부분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알아보세.

한쪽은 혼이 앞서 실물이었던 모상으로 사용하며 가설에서 출발해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종결를 향해 나가며 탐구하지 않으면 안되네. 다른 한쪽은 가설에서 출발해 절대적 근원을 향해 나가며 앞의 경우처럼 모상을 사용하지 않고 이데아 자체만을 통해 탐구하지 않으면 안되네.

 

예를 들면, 기하학이나 산술이나 그와 유사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홀수, 짝수, 도형들, 세가지 각 같은 것들을 모든 연구영역에서 기본사항으로 전제하지. 그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듯이 기본사항으로 정한 다음,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니까 자신들이나 남들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오히려 그들은 거기에서 출발하여 다른 것들을 설명해나가는데, 결국은 아무런 모순도 없이 자기들이 고찰하려고 했던 것에 도달하게 되지.

그렇다면 그들이 눈에 보이는 형태들을 사용해 이것들을 증명하지만 그들이 사고하는 것은 이것들이 아니라 이것들의 실체라는 것이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 때문에 증명하는 것이지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것 때문에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

그들이 만들고 그리는 것들 자체는 물론 나름대로 물속에 비친 영상을 갖고 있겠지만, 그들이 이것들을 모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직 사고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그 자체로서 보려 하기 때문이네.

 

또한 내가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영역의 다른 한쪽이라고 부르는 것은 토론이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문답법의 힘에 의해 포착하는 대상을 뜻하네. 토론이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문답법의 힘에 의해 포착한다는 것은 토론이 가설을 근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설로, 즉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기 위한 계단이나 출발점으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 도달해서 그것을 포착한 다음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들을 붙들고 다시 종결을 향해 내려오는 것을 뜻하네. 감각적 대상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이데아 자체에 의해 이데아로 내려와 이데아로 끝맺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일세.

 

(글라우콘) 선생님께서는 문답법의 지식이 실재나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가설을 근원으로 삼는 이른바 학술들이 관찰한 것보다 더 명확하다고 규명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학술에서도 관찰자는 대상을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고(수리적 지성)에 의해 관찰하기 마련인데,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설에서 출발하여 관찰하기에 그 대상에 대해 지성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그 대상도 근원을 통해 관찰한다면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인것 같아요.

또한 선생님은 기하학자 같은 사람들의 지적인 상태를 사고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사고를 의견과 지성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까요.

 

(소크라테스) 아주 잘 이해했네. 그렇다면 선분의 이 네 부분은 네 가지 심적 상태를 대응시키되, 가장 높은 부분에는 지성을, 두 번째 부분에는 사고를, 세 번째 부분에는 신념을, 네 번째는 상상을 대응시켜 보게. 그리고 각각의 마음상태는 그에 대응하는 부분이 진리에 관여하는 만큼 명확성에 관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에 비례해서 배열해보게.

 

<제7권>

 

그럼 이번에는 우리의 본성이 교육 받았을 때와 받지 못했을 때의 차이를 비교해 보기 위해 다음과 같이 상상해보게.

여기 지하 동굴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게.

동굴의 입구는 길고 동굴 자체만큼 넓으며 빛을 향해 열려 있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며, 쇠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쪽밖에 볼 수 없네.

그들의 뒤편 저 멀리 위쪽으로부터는 불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며, 불과 수감자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서는 나지막한 담이 쌓여 있네. 그 담은 인형극 연출자들이 인형극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들 앞에다 세우는 무대와도 비슷하네.

사람들은 그 담을 따라 담 위로 가종 도구들과 입상들과 돌이나 나무로 만든 동물들의 형상들과 인공물들을 운반하는데, 그들 중에서 더러는 말을 하고 더러는 침묵을 지키고 있네.

자네는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들에 관해서건 남들에 관해서건 불빛에 의해 맞은편 동굴 벽면에 투영된 그림자들 외에 무엇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운반되고 있는 다른 물체들은 어떤가? 역시 그림자밖에 보지 못하겠지?

만약 그들이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본 그림자들이 실재라고 믿지 않을까?

또한 감옥 맞은편에서 메아리가 울려오게 되어 있다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들은 소리가 다름 아니라 자기들 앞을 지나가는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것이네.

어쨌거나 그들은 인공물의 그림자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이 쇠사슬에서 해방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될 수 있을지 고찰해 보세.

 

그들 가운데 누가 쇠사슬에서 풀려나 갑자기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며 불빛을 쳐다보도록 강요받는다면, 그는 고통받을 것이며 광채에 눈이 부셔서 여태까지 보아온 그림자들의 실물들을 바라볼 수 없을 걸세. 만약 어떤 사람이 그에게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실재에 더 가깝고 실재성이 더 많은 사물들을 향하고 있으므로 더 올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나가는 것을 일일이 가리키며 저게 뭐냐고 묻고 일일이 대답하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뭐라 말할까? 당황해하지 않을까?

그리고 전에 보았던 것이 지금 자기에게 지시된 것들보다 더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직접 불을 보도록 강요당한하면 그는 눈이 아파서 자기가 볼 수 있는 사물들을 향해 달아나지 않을까?

또한 누가 거칠고 험한 오르막길을 통해 그를 억지로 그곳에서 끌어내며 햇빛 비치는 곳으로 나올 때가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괴로워하며 반항하지 않을까? 또한 햇빛 비치는 곳으로 나오면 눈이 광채로 가득 차서 지금 진실한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하나도 볼 수 없지 않을까?

 

당장은 볼수 없지만 위쪽에 있는 사물을 보려면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될 테지. 그는 역시 처음에는 그림자를 가장 쉽게 볼 수 있을 것이고, 다음에는 물에 비친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의 영상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마지막에는 실물 자체를 보게 될 텐데, 그에게는 밤에 별빛이나 달빛을 보는 것이 낮에 해나 햇빛을 보는 것보다 더 수월할 것이네.

마지막으로 태양을 보게 될 텐데, 물이나 그 밖에 태양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비친 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태양 자체를 직접 보며 관찰하게 될 것이네.

그다음 그는 벌써 계절과 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태양이며, 또한 태양이 가시적인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관장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의 동료 수감자들이 동굴 안에서 보아온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네.

 

어떤가? 그는 전에 자기가 살던 곳이나 그곳에서의 지혜나 당시의 동료 수감자들을 회상하게 되면, 자기 신상에 일어난 변화를 다행으로 여기는 반면 동료 수감자들은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그런데 당시 그들 사이에는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가장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중 어느 것이 앞서가고 어느 것이 뒤따라가고 어느 것이 같이 가는지 잘 기억해두었다가 가장 잘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와 찬사와 상을 주는 습관이 있었다면, 그는 아직도 그런 것들을 갖고 싶어 하거나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유력자들을 부러워할까? 아니면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살 바이에 차라리 호메로스의 말처럼 재산도 없는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거나 그 밖의 어떤 고통이라도 달게 받고 싶어 할까?

 

만약 그런 사람이 도로 동굴로 내려가서 옛날 그 자리에 앉게 되면, 햇빛 비치는 곳에서 갑자기 온 까닭에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

또한 그의 시력이 약해져 있는 동안, 그곳을 떠난 적이 없는 수감자들과 다시 그림자를 식별하는 경쟁을 한다면, 시력이 회복되기 전에는 -어둠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네 - 그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는 위쪽으로 올라가더니 눈이 상해서 돌아왔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쇠사슬을 풀어주며 위쪽으로 데려가려는 자는 잡아 죽일 수만 있다면 모조리 죽여야 해.' 라고 말일세.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세계에서도 선의 이데아는 마지막으로, 또는 노력을 해야만 겨우 볼 수 있는 것이네. 그러나 일단 본 이상에는, 그것이 모든 사람을 위해 온갖 올바른 것과 아름다운 것의 원인이 되며, 가시적인 세계에서는 빛과 빛의 주인을 낳고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세계에서는 스스로 주인이 되어 진리와 지성을 창조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네.

 

만약 누가 신적인 관조의 경지에서 비참한 인생살이로 내려와서 아직 잘 보지도 못하고 그곳의 어둠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법정이나 그 밖의 다른 장소에서 정의의 그림자나 그 그림자의 실물인 정의의 모상에 관해 논쟁을 벌이도록 강요받거나 또는 정의 자체를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의견과 투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실수하여 웃음거리가 된다면, 자네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데에서 빛에서 어둠으로 옮겨진 경우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진 경우의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이네. 그런 사람은 혼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어떤 혼이 혼란에 빠져 무엇을 잘 보지 못할 경우 생각도 해보지 않고 웃지는 않을 것이네. 오히려 그는 그 혼이 더 밝은 곳에서 살다가 왔기에 익숙하지 못해 어둠에 싸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무지에서 더 밝은 곳으로 왔기에 찬란한 광채에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하는 것인지 잘 생각해볼 것이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교육이란 일부 사람들이 선전하고 주장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그들의 주장인즉, 자기들은 시력을 넣어주듯 지식이 없는 혼에 지식을 넣어줄 수 있다는 것이네.

한데 우리 토론이 암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눈을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몸 전체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되듯, 혼에 내재하는 능력과 지적인 기관 또한 실재와 실재 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을 - 우리는 이것이 선이라고 주장하네 - 관조하며 이를 견뎌낼 수 있을 때까지 혼 전체와 함께 생성의 세계에서 실재의 세계로 전향시켜야 한다는 것 말일세.

 

교육이란 혼의 지적 기관을 어떤 방법을 써야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닐세. 그보다는 오히려 그 기관은 시력을 갖고 있는데도 방향이 옳지 못한 나머지 보아야 할 곳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연구해서 시정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교육받은 적이 없어서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교양 쌓는 일에만 일생을 바치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자들 역시 국가를 능히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네.

전자들의 경우는 공과 사를 불문하고 모든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생활의 유일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고, 후자들의 경우는 자신들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에 가서 살고 있다고 믿으므로 자진해서 일을 떠맡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네.

 

따라서 국가의 건설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장 우수한 품성들에게 앞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한 것에 도달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네. 우리가 앞서 말한 저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 선을 보도록 강제하는 것 말일세. 그러나 일단 올라가서 충분히 본 다음에는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네. 그들은 다시 저 수감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보잘것없는 일이건 중대한 일이건 간에 수감자들의 고통이나 명예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되네.

다른 국가의 경우라면 철학자가 된 사람들이 그 국가의 노고에 참여하지 않는다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철학자들과 시민을 위해 벌통의 여왕벌이나 왕으로 낳아주었으며 다른 나라 철학자들보다도 더 훌륭하고 완벽한 교육을 받게 해 주었기 때문이네.

 

<제9권>

 

(소크라테스) 내가 욕구들에 관해 알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일세. 불필요한 쾌락이나 욕구 중에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네. 그런 욕구들은 누구나 타고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법률이나 더 훌륭한 욕구나 이성에 의해 억제되기에 완전히 소멸되거나 아니면 줄어들고 약해지는 데 반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강해지고 더 많아지는 듯 하네.

혼의 다른 부분, 즉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통제력을 행사하는 부분이 잠들어 있는 동안, 잔뜩 먹고 마신 동물적이고 광포한 부분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아갈 때 잠 속에서 깨어나는 욕구들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이 동물적인 부분은 이때 온갖 수치심과 이성에서 해방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해치운다네. 말하자면 상상을 통해 인간이나 신이나 동물과는 물론이고 어머니와도 거리낌 없이 불륜을 저지르며, 서슴지 않고 살인을 하며, 아무 음식에나 가리지 않고 손을 내민다네. 한마디로, 그것이 저지르지 않는 바보집이나 파렴치한 행위는 아무것도 없네.

그러나 자신과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절제 있는 삿람은 잠들기 전에 스스로 명상에 잠기면서 자신의 이성적인 부분을 깨워 고상한 사상과 고찰로 잘 접대하는 한편 욕구적인 부분은 과부족 없이 충족시켜준 뒤 잠들게 함으로써, 혼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 혼자서 순수하게 무엇을 관찰하거나 동경하거나 또는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아직 모르는 것을 깨닫고자 하는 경우 환락이나 고통으로 이를 방해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네.

마찬가지로 그 기개 높은 부분도 좋게 타일러 누군가를 향한 분노 때문에 격앙된 상태로 잠드는 일이 없게 할 것이네. 만약 그가 이 두 부분을 진정시키고 이성이 깃든 제3의 부분을 깨운 뒤 휴식을 취한다면, 그런 상태에서는 진리를 가장 잘 파악하게 될 것이며 극악무도한 환영이 꿈에 보이는 일도 최소한으로 줄어들 것이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 안에는, 심지어 우리 가운데 매우 절제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안에도 무시무시하고 광포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욕구들이 도사리고 있다는점이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드러난다는 점이네.

 

이번에는 우리가 민주제적인 인간을 어떤 인간으로 규정했는지 상기해보게

민주제적인 인간이 생성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네. 우선 그는 돈벌이에 관계되는 욕구들만을 존중하고, 유희나 사치에 관계되는 불필요한 쾌락이나 욕구들을 멸시하는 인색한 아버지에 의해 어려서부터 양육되었네. 그러다가 방금 우리가 말한 여러가지 욕구로 가득 찬 더 세련된 자들과 교제하면서부터 그는 아버지의 인색함이 싫어져 그들의 온갖 방종한 생활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네. 그러나 그는 이들 유혹자보다 더 훌륭한 품성을 타고났기에 양쪽으로 끌리다가 결국 양쪽의 중간에 머물러 모든 것을 알맞게 즐긴닶시고, 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네. 그리하여 그는 과두제적인 인간에서 민주제적인 인간이 되었네.

그렇다면 세월이 흘러 그런 인간이 늙었을 때 이번에도 그와 똑같은 생활태도 속에서 양육된 젊은 아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게. 이 아들에게도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보게. 말하자면 그는 완전히 불법적인 생활로 끌려들어가고 있네. 물론 유혹자들은 그것을 완전한 자유라고 부르겠지만 말일세.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친족들은 그의 중용을 지키는 욕구들을 편들지만 반대쪽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욕구들을 편들고 있네. 그러나 이들 교활한 마술사들과 참주 제조자들은 달리 젊은이를 붙잡아둘 수 없다 싶으면 게으르고 방탕한 욕구들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애욕을 젊은이 안에 심어주려고 하는데, 애욕을 우리는 날개 달린 거대한 수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네.

그리고 다른 욕구들이 향연과 향료와 화관과 포도주와 그밖에 그런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방종한 쾌락과 함께 수벌 주위를 맴돌며 수벌을 양육하여 최대한 자라게 하면서 연모의 침을 심어준다면, 그때는 이 혼의 지도자는 광기의 호위를 받으며 미치광이가 되고 말 걸세. 그러면 그는 혼 안에서 쓸모 있거나 아직도 수치를 안다고 생각되는 의견이나 욕구를 발견하는 족족 죽여 없애거나 혼 밖으로 내쫓을 것이네. 그리하여 혼은 마침내 완전히 절제를 잃고 밖에서 들어온 광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네.

 

엄밀한 의미의 참주제적인 인간은 어떤 사람이 본성적으로 그러하든, 습관에 의해 그렇게 되었든, 아니면 이 두 가지가 다 원인이 되었든 간에 술에 취하거나 애욕에 빠지거나 미치광이가 될 때 생겨나는 것이네.

그 다음에는 아마도 연회와 더불어 술자리와 잔치와 창녀들과 그와 비슷한 모든 것이 그와 함께 할 것이네. 에로스가 참주로서 그의 안에 거하면서 그의 혼을 완전히 지배할테니 말일세

그러면 에로스 곁에 밤낮으로 가공할 욕구들이 수없이 자라나서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지 않을까

그다음에는 그는 빚을 지고 재산을 축내기 시작할 것이네. 그러나 모든 빚이 탕진되고 나면, 새로 부화한 수많은 욕구들이 틀림업이 아우성치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다른 욕구들에, 특히 다른 욕구들을 모두 호위병으로 거느리고 있는 에로스의 침에 쫓겨서 미치광이가 된 채 사기나 폭력으로 누구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을까 하고 살피지 시작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아무 데서나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이든지, 아니면 크나큰 고통과 고뇌 속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그리고 마치 그의 내부에서 나중에 생겨난 쾌락들이 먼저 자리잡고 있던 쾌락들을 누르고 그것들의 재산을 빼앗아버리듯, 그는 나이가 더 젊으면서도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할 것이며, 지기 몫이 탕진된 뒤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려고 빼앗으려 들겠지.

에로스의 참주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꿈속에서만 가끔 될 수 있던 그런 인간이 언제나 그리고 실제로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무시무시한 살인이나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이나 가오할 행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을걸세.

오히려 법과 질서를 무시하며 참주처럼 그 안에 군림하고 있는 에로스는 스스로 독재자가 되어 자기가 군림하는 도시나 다름없는 그 사람에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요란한 무리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짓이라도 대담하게 해치우라고 할 것이네. 그런데 에로스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 가운데 더러는 나쁜 교제를 통해 밖에서 들어온 것들이고, 더러는 그도 이 무리들과 기질이 같기에 그의 내부에서 풀려나고 해방된 것들이네. 이것이 그런 인간의 삶이 아닐까?

 

혼의 세 부분에 대응하여 각 부분에 하나씩 세 가지 즐거움, 세 가지 욕구, 세 가지 통치원리가 있는 것 같네 .

 

그래서 우리는 인간도 지혜를 사랑하는 자, 승리를 사랑하는 자, 이익을 탐하는 가라는 세가지 기본 유형이 있다고 말하네.

 

환자들이 아플 때 건강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며, 그렇지만 아프기 전에는 건강이 가장 즐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할 것이네.

자네는 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고통이 멈추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겠지. 또한사람들이 괴로울 때는 진정한 의미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나 휴식을 가장 즐거운 것으로 찬양하는 경우는 그 밖에도 허다하다는 것을 아마 알고 있을 걸세

그리고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그친다면, 즐거움으로부터의 이러한 휴식은 고통스러울 것이네.

그렇다면 우리가 잠시 전에 양쪽의 중간상태라고 말한 휴식은 고통일 수도 있고 즐거움일 수도 있는 셈이네.

 

그렇다면 우리가 잠시 전에 양쪽의 중간상태라고 말한 휴식은 고통일 수도 있고 즐거움일 수도 있는 셈이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이 둘다 될 수는 없겠지

게다가 혼 안에 즐거움이나 고통이 생겨난다면, 이것들은 둘 다 일종의 운동(이동 또는 변화)이겠지.

그런데 즐거움도 아니고 고통도 아닌 것은 방금 양쪽의 중간에 있는 일종의 휴식상태로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을 즐거움이라 여기고, 즐겁지 않은 것을 고통이라 여기는 것을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휴식은 사실은 즐거움도 아니고 고통도 아닐세. 고통과 견주면 즐거움으로 보이고, 즐거움과 견주면 고통으로 보일 뿐이네. 그러니 이런 환상은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건전하지 못한 일종의 요술에 지나지 않네.

 

그렇다면 고통에서 생겨나지 않는 즐거움을 보게나. 그러면 자네는 더 이상 사실은 고통의 멈춤이 즐거움이고, 즐거움의 멈춤이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네.

그런 즐거움은 얼마든지 있다네. 예컨대 향기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게나.

우리는 고통의 멈춤이 순수한 즐거움이고, 즐거움의 멈춤이 고통이라고 믿지 않기로 하세.

 

자네는 이런 즐거움과 고통들이 어떤 성질을 지녔으며, 무엇을 닮았는지 알겠는가?

 

자네는 자연계에는 위도 있고, 아래도 있고, 중간도 있다는 데 동의하는가?

그런데 누가 아래에서 중간을 향해 움직인다면 그는 위를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가 진짜 위를 보지 못했다면, 중간에 와 있으면서도 출발점을 뒤돌아보며 벌써 위에 와 있다고 생각하겠지.

반대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아래로 내려간다고 생각하겠지?

 

이 모든 일이 발생하는 것은 그가 위와 중간과 아래가 실제로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했기때문이네.

따라서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다른 많은 사물은 물론이고 즐거움과 고통과 이 양자의 중간상태에 대해서도 그릇된 의견을 취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못 되네. 그러기에 그들은 고통스러운 것을 향해 움직이기만 해도 그것이 진짜 고통인 줄 알고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가 하면, 고통에서 중간상태로 움직이기만 해도 벌써 충족과 즐거움에 도달했다고 확신한다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움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착각을 일으켜 고통 없는 상태를 고통에 대립시키는데, 이는 백색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회색을 흑색에 대립시키는 것과도 같네.

 

따라서 지혜와 미덕에는 경험이 없고 언제나 연회 같은 것에만 열중하는 자들은 아래로 움직이다가 다시 중간까지 올라가겠지. 그들은 평생토록 이 범위 안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겠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진짜 위를 쳐다본 적도 없고, 위를 향해 움직인 적도 없네. 또한 실재에 의해 진실하게 충족된 적도 없고, 확실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맛본 적도 없네. 그들은 가축처럼 언제나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대지, 즉 식탁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배불리 먹고 교미한다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고 쇠로 된 뿔과 발굽으로 서로 차고 서로 떠받고 서로 죽인다네. 그들의 욕구는 충족될 수 없으니까. 그도 그럴것이, 그들은 실재하는 것들로 충족시키는 것도 아닌 데다, 그들이 충족시키는 그들 자신의 부분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밑 빠진 독과 같기 때문일세.

 

따라서 그들이 열중하는 즐거움은 필연적으로 고통과 뒤섞인 즐거움으로, 진정한 즐거움의 영상이나 환상에 지나지 않겠지? 하지만 그것은 즐거움과 고통이 서로 대비됨으로써 강하게 채색되어 있기에 분별없는 자들의 마음속에 광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네. 그리하여 트로이아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헬레네의 환영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웠다는 스케시코스의 말처럼, 그들은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운다네.

 

어떤가? 혼의 기개 높은 부분에도 필연적으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만약 누가 명예를 사랑하기에 시기하거나 승리를 사랑하기에 폭력을 휘두르거나 불만이 쌓여 분노하게 되어 이성과 분별을 잃고는 명예와 승리와 분노의 감정만을 충족시키려 한다면 말일세.

 

따라서 이익을 탐하는 부분과 승리를 사랑하는 부분에 관계되는 욕구라도 지식과 이성에 따라 이것들과 함께 즐거움을 추구하며 지혜가 가리키는 즐거움만 추구한다면, 진리를 따르고 있으니 자기에게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장 진정한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고. 그리고 만약 각자에게 가장 훌륭한 것이 각자에게 가장 고유한 것이기도 하다면, 또한 고유한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고 말일세.

결국 혼 전체가 지해를 사랑하는 부분을 따르며 서로 반목하지 않는다면, 각 부분은 제 할일을 하며 올바르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고유한 즐거움을, 가장 훌륭한 즐거움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네.

그렇다면 진정하고 고유한 즐거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는 참주이고, 가장 조금 떨어져 있는 자는 왕인 것 같네 그려.

 

<제10권>

 

우리는 시인도 모방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개개의 기술을 단어와 어구로 채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따라서 역시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인의 말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사람들은 시인이 제화술에 관해서든 전술에 관해서든 그 밖의 다른 사물에 관새서든 운율과 리듬과 선법에 맞춰 말하기만 하면 아주 훌륭하게 말한 것으로 생각하네. 이런 것들은 본래 아주 매력적인 것들이니까.

영상의 제작자인 모방자는 실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상에 대해서만 알고 있네.

화가는 고삐와 재갈을 그린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만드는 것은 제혁공과 대장장이지

그런데 고삐와 재갈을 어떠해야 하는지 화가는 알고 있을까? 아니면 제작자인 제혁공과 대장장이도 모르고, 그것들을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인 기수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

모든 것에는 사용하는 기술, 제작하는 깃ㄹ, 모방하는 기술, 이렇게 세 가지 기술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기구든 동물이든 행위든 그것들의 개별적인 미덕과 아름다움과 정당성은 사용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들은 각각 사용되기 위해 인간 또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말일세.

 

그렇다면 어떤 물건이든 당연히 그 사용자가 가장 경험이 많을 테니, 사용자는 제작자에게 자기가 사용하는 물건이 어떤 점에서 사용하기 좋게, 어떤 점에서 사용하기 나쁘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게 될 것이네. 예컨대 피리 연주자는 피리 제작자에게 피리들 중에 어떤 것들이 연주하기 좋은지 알려주며 피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지시할 것이고, 제작자는 그의 지시에 따를 걸세.

 

그러니까 한 사람은 알고서 좋은 피리와 나쁜 피리에 관해 알려주고, 다른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서 피리를 만들겠지?

그러니까 어떤 도구건 그 제작자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접촉하며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기에 도구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해 올바른 소신을 갖겠지만, 지식을 가진 사람은 사용자일세.

그런데 모방자는 자기가 그리는 것이 아름답고 올바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사용해봄으로써 지식을 얻게 될까? 아니면 지식을 가진 사람과 접촉하도록 강요받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그에게 지시받음으로써 올바른 의견을 갖게 될까?

어느 쪽도 아니고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는 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해 지식도 올바른 의견도 갖지 못할 것이네.

그렇다면 시를 통한 모방자는 자기가 작시하는 것이 나쁜지 좋은지 알지도 못하면서 모방을 계속할 것이네. 또한 그는 아마도 무지한 대중에게 아름다워 보일 만한 것을 모방하게 될 걸세.

그렇다면 우리는 모방은 진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희이며, 비극시인들은 단장격 운율로 작시하건 서사시 운율로 작시하건 철저한 모방자라는 점에서 의견이 꽤 일치할 걸세.

 

우리가 연민의 정을 느끼는 부분을 남의 불행 속에서 가꾸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준다면, 정작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 이 부분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을 걸세.

만약 자네가 몸소 행한다면 부끄러워할 익살을 희극 공연장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듣고 아주 큰 즐거움을 느끼고는 나쁜 것이라고 싫어하지 않는다면, 자네의 행동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 보이던 행동과 똑같은 것이네. 자네는 이번에도 광대라는 평을 들을까 두려워 자네안에 억제하고 있는 부분, 즉 익살을 부려보고 싶은 부분을 늦춰준 것이라는 말일세. 그리고 만약 자네가 극장에서 이 부분의 기를 살려준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생활에서도 자꾸만 희극배우가 되어갈 것이네.

 

또한 애욕과 분노와, 우리가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된다고 주장하는 혼 안의 욕구와 고통과 즐거움과 관련해서도 시적인 모방은 우리에게 똑같이 작용하네. 그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물을 주어 가꾸고 있으며, 우리가 사악하고 비참해지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해지려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시는 오히려 그런것들을 우리의 지배자로 만들고 있으니 말일세.

 

자네는 시 가운데 신에 대한 찬가와 출륭한 인간들에 대한 송가만이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하네. 만약 자네가 서정시나 서사시를 통해 감미로운 무사 여신을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관습과 만인에 의해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간주되던 원칙 대신 쾌락과 고통이 군림하게 될 것이네.

 

 

이제 우리는 미덕이 받게 될 최대의 보답과 상에 관해 논의해 보도록 하지

 

불의하고 비이성적인 인간이 불의한 짓을 하다가 붙잡혀 죽는 경우, 우리는 그가 죽게 된 원인이 혹의 악인 불의 때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네. 몸을 쇠약하게 하고 파괴하여 전혀 몸이 아닌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은 병이라는 몸의 악이라고. 마찬가지로 앞서 우리가 언급한 모든 것도 그것에 고유한 악이 들러붙어 내부에 기생하며 파괴하기 때문에 존재하기를 멈추게 된다고 말일세.

그렇다면 혼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고찰해 보게

 

우리는 오래됐건 상했건 그 밖의 다른 이유 때문이건 음식물에 고유한 악에 의해 몸이 소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네. 오히려 우리는 음식물에 고유한 악이 몸속에서 몸에 고유한 악을 유발할 경우, 몸이 음식물로 말미암아 몸 자체의 고유한 악인 병에 걸려 소멸했다고 말할 것이네. 그러나 몸과 음식물은 별개의 것인 만큼 몸이 음식물의 악에 의해 소멸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로 인해 몸에 고유한 악이 유발되지 않는 한, 몸은 외부의 악에 의해 소멸할 수 없기 때문일세.

그렇다면 같은 이치에 따라 우리는 몸의 악이 혼의 내부에 혼의 악을 유발하지 않는 한, 혼이 자신에게 고유한 악도 없는데 다른 악에 의해, 즉 자신과는 별개의 것에 속하는 악에 의해 소멸했다고 주장해서는 안되네.

그렇다면 몸에 열이 나거나 병에 걸리거나 살해되어도, 심지어는 몸 전체가 아주 잘게 토막 나더라도 이 때문에 혼이 소멸한다고 주장하지 않기로 하세. 몸의 이런 고통으로 인해 혼 자체가 더 불의해지고 더 불경해진다는 점이 증명되기 전에는 말일세.

또한 다른 것에 속하는 악이 자신 안에 생겨나더라도 그로 인해 자신에게 고유한 악이 생겨나지 않는 한, 혼이나 다른 어떤 것이 그로 인해 소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세. 그러나 누가 혼의 불멸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지 않으려고 감히 우리 논의에 맞서서 죽어가는 자는 더 사악해지고 더 불의해진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네. '만약 그의 주장이 맞다면, 불의는 그것을 지닌 자에게 병처럼 치명적이다. 그리고 이 병은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 죽게 만드므로 이 병에 걸리 자들은 바로 이 병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의한 자들이 죽는 것은 지금처럼 ㅡ 불의에 대해 남들이 과하는 형벌 때문이 아니라'라고 말일세

 

만약 혼에 고유한 약점과 악이 혼을 죽이거나 파괴할 수 없다면, 다른 것을 파괴할 임무를 맡은 악이 자기가 맡은 것 외에 혼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을 파괴하기는 어려울 걸세.

그렇다면 자신에게 고유한 악에 의해서든 다른 것에 속하는 악에 의해서든, 그 어떤 악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 것은 당연히 항상 존재하는 것임이 분명하네. 그리고 항상 존재하는 것은 불멸의 것이네.

따라서 존재하는 혼들은 항상 같은 혼들이네. 어떤 혼도 소멸하지 않는다면, 혼의 수는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을 테니까. 불멸의 것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필멸의 것에서 풍당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불멸의 것이 되고 말 테니까.

 

혼이 불멸하다는 것은 증명되었네. 그러나 혼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 알려면, 혼이 몸과의 결합이나 그 밖의 다른 악에 의해 일그러진 모습을 봐서는 안 되네.

혼의 지혜 사랑 쪽으로 눈길을 돌려야 하네. 그래서 우리는 혼이 신적인 것과 불멸의 것과 영원한 것의 동족으로서 무엇을 포착하고 어떤 교제를 원하는지 주시해야 하네.

 

 

여보게 글라우콘, 인간에게는 모든 운명이 바로 이 순간에 달려 있는 것 같네. 그러므로 선한 삶과 악한 삶을 구별하여 가능한 모든 삶 중에서 언제 어디서나 더 선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찾아내게 해주는 공부가 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다른 공부는 다 뒤로 미루고 그런 공부에 전념해야 할 것이네.

우리는 또한 아름다움이 가난이나 부나 여러 성향의 혼과 결합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좋은 일이 생기는지 나쁜 일이 생기는지 알아야 하네. 또한 좋은 가문과 나쁜 가문, 사인으로 남는 것과 관직에 진출하는 것, 체력이 강한 것과 약한 것, 이해가 빠른 것과 느린 것 등등 혼의 선천적인 또는 후천적인 모든 특성이 혼합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알아야 하네. 그래야만 우리는 이 모든 점을 고려하여 혼을 더 불의하게 만드는 쪽으로 인도하는 삶은 더 악한 삶이라고 부르면서, 혼의 본성과 관련하여 더 악한 삶과 더 선한 삶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네.

 

내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혼이 불멸하며 어떤 악도 어떤 선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끊임없이 샹상의 길을 나아가며 가능한 방법을 다해 지혜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네. 그래야만 우리는 이승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경기의 우승자들이 상을 타가듯 우리가 나중에 정의의 상을 탈 때도, 우리 자신이나 신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네. 또한 이승에서도, 앞서 우리가 이야기한 천 년의 여로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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