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하고 콤팩트한 판단이나 논리적인 결론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발목을 잡아서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저해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뇌 내 캐비넷에 보관해둔 온갖 정리 안 된 디테일을 필요에 따라 소설 속에 그대로 조립해 넣으면, 거기에 나타난 스토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내추럴하고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진지하게 화를 내면 왠지 자꾸 재채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일단 나기 시작하면 좀체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이는 없지만, 예를 들어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있다고 칩시다. 그런 사람을 목격했을 때 ‘왜 저러지? 왜 진지하게 화를 내면 재재기가 나는 거야?’라고 생리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분석 추측하고 가설을 세우는 것도 물론 하나의 접근 방법이겠지만, 나는 별로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머릿속의 활동은 대체적으로 ‘어,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는 선에서 끝납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라고. 그리고 그대로 ‘덩어리째’ 쓱 기억해버립니다. 그런 이른바 ‘맥락 없는’ 기억이 내 머릿속 서랍에는 상당히 많이 수집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을 말합니다.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좀 모순된 표현으로 들릴지도 모르기만, ‘유효하게 조합된 맥락없는 기억’은 그 자체의 직관을 갖고 예견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토리의 올바른 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문장이든 반드시 개량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아무리 ‘잘 썼다’ ‘완벽하다’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퇴고 단계에서는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내던져버리고 달아오른 머리를 적정하게 식히려고 노력합니다.
중요한 것은 뜯어고친다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작가가 ‘이곳을 좀 더 잘 고쳐보자’라고 결심하고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손질한다, 라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어떻게 수정하느냐’라는 방향성 따위는 오히려 이차적인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경우, 작가의 본능이나 직감은 논리성이 아니라 결심에 의해 좀 더 유효하게 이끌려 나옵니다. 숲을 몽둥이로 두드려 안에 숨은 새를 날아오르게 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떤 몽둥이로 두드리든, 어떤 식으로 두드리든, 그 결과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아무튼 새가 날아오르게 하면 그걸로 좋은 것입니다. 새들의 움직임의 역동성이 고정되어가던 시야를 뒤흔듭니다.
미국의 금주 단체 표어에 ‘One day at a time’(하루씩 꾸준하게)이라는 게 있는데, 그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자꾸 뒤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재능이 땅속의 비교적 얕은 곳에 묻힌 것이라면 그대로 놔둬도 자연스럽게 분출할 가능성이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것이 상당히 깊은 곳에 묻힌 것이라면 그리 쉽게는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풍성하고 뛰어난 재능이라고 해도, 만일 마음먹고 ‘좋아, 이곳을 파보자’라고 실제로 삽을 들고 파내지 않는다면 땅속에 묻힌 채 영원히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일에는 ‘물 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당신이 (안타깝지만) 희유의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만든 적든 한정된) 재능을 시간을 들여 조금이라도 높이고 힘찬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내 이론은 나름대로 유효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강건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큰 주전자와 작은 주전자는 주방에서 능숙하게 병용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용도에 맞게, 목적에 맞게, 그것들을 잘 구분해서 쓰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혹은 건전한 양식입니다. 다양한 유형의, 다양한 시간성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이 잘 조합되었을 때 비로소 사회가 원활하게, 좋은 의미에서 효율적으로, 돌아갑니다. 간단히 말하면 ‘시스템의 세련화’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 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있다, 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져있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
현실의 독자와 직접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한 가지, 퍼뜩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은 총체로서 내 작품을 정확히 이해해준다’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인 독자를 보면 거기에는 때로 오해도 있고 지나치게 비약하는 일도 있고, 혹은 ‘그건 좀 틀린 생각인데?’라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열렬한 애독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역시 개개의 작품에 대해 상찬할 경우도 있고 비판할 때도 있습니다. 공감이 있는가 하면 반발도 있습니다. 보내준 의견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아무튼 각양각색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몇 걸음 물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체상을 바라보면 ‘이 사람들은 총체로서 정말 올바르게, 깊게, 나를 혹은 내 소설을 이해해주는구나’라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자잘한 개별적인 들쭉날쭉은 있지만 그걸 모두 더하고 빼서 평평하게 고르면 최종적으로는 자리 잡아야 할 곳에 정확히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프론티어에 도전하는 의욕을 항상 간직한다는 것은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의 포지션, 하나의 장소에 안주해서는 창작 의욕의 신선도는 감퇴하고 이윽고 상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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