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譯) 상향적 경향에 수반된 것은 환경과 유기체 사이의 역의 관계의 성장. 동물들은 환경을 자기 자신에게 적응시키는 과업을 점진적으로 수행
(案) 화이트헤드의 논의는 진화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진화론이 설명할 수 없었던 다른 자연의 사실을 다른 시각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즉 그는 설명방식을 바꾼 것이다. 환경에의 수동적 적응이 아닌 환경의 자기에게로의 능동적 개변을 말하고 있는 것. 고등동물의 진화는 바로 이러한 능동적 개변 때문에 이루어진 것
(譯) 가장 단순한 생명체들도 그들의 먹이가 그들에게로 헤엄쳐 들어오게 만든다. 고등한 동물들은 그들의 먹이를 추적하며, 포획하고, 또 저작한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환경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변형시키고 있는 것
생명의 고등한 형태들은 그들의 환경을 개변하는데 능동적으로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 인류라는 종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환경에로의 능동적 공격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생존의 가장 돌출한 사실
(譯) 이성의 기능이란 바로 삶의 기술의 증진. 이성의 원초적 기능은 바로 그 공격을 환경에로 방향지우는 것
(案) 환경에 대한 공격의 방향이란 환경을 공략하는 전략, 즉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어떠한 시기에 공격하는가라는 지시, 명령, 플랜 등을 포괄. 그것이 바로 이성의 원초적 기능
(譯) 우리는 이성을 동물적 몸의 생존에 관여하는 여러 기능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한 동물적 기능으로부터 추상되어있는 그 무엇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 이 후자적 관찰의 양태에 있어서 이성이란 이론적 실현의 작동이다
(案) 이성에 대한 고찰의 두 가지 측면이 존재, 하나는 동물적 생존전략 또 하나는 추상적 사유능력. 전자가 실천이성이라면 후자는 이론이성이며 순수이성. 하지만 칸트의 용법과는 전혀 다름. 칸트에게 있어 실천이성이란 이론이성의 안티노미를 극복하는 윤리적인 맥락과 관련, 화이트헤드의 실천이성은 동물의 생리학적 레벨로 하락해버리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것. 추상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생존의 실천
(譯) 이성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철학사의 전통적 논의들은 주로 후자의 사변적 양식에만 집중. 그들에게 있어서 이성이란 이해, 판단, 개관하는 신적인 능력
(案) 모든 사상은 그것이 사상이고자 하는 한에 있어서 반드시 새로움을 보유. 헌데 새로움은 반드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공헌하고 있는 모든 사상과 마찰을 야기. 그 마찰에서 낡은 힘을 꺾을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축적해내는 사상만이 생존
(譯) 인간사의 행위는 우리의 목적을 결정하는 예견의 승인과 행위로 귀결되는 목적에 의해 완전히 지배
(案)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행위를 지배하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며 그 목적을 결정하는 예지의 통찰이 있게 마련. 그러한 목적을 전제로 하지 않는 단순한 행동의 생리적 고찰은 현실적으로 무의미
(譯) 모든 방법론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생활사를 가지고 있다. 방법론이란 생명의 갓 피어오르는 충동의 성취를 촉진하기 위한 보호적인 수단으로서 출발. 그것의 전성시대에는, 방법론은 사고와 행동의 광범위한 협동을 대변하며, 이러한 것에 의해 생명의 충동은 존재의 주요한 만족으로서 자신을 표현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제2의 유년기라고도 할 수 있는 노년기의 무기력과 권태감으로 진입. 그 방법의 범위 내에서 성취할 수 있는 더 큰 대비들이 다 탐구되었고 또 친근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반복으로부터 생기는 만족감도 시들시들. 그러면 생명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국면하게 되는 것
(案) 방법론이란 우리 세포의 레벨에서부터 우리의 사고와 사회, 역사의 영역까지 일관되게 적용되는 하나의 개념. 산다는 것 자체가 방법이 없이는 못 사는 것
(譯) 한 방법론의 탄생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살려고 하는 안전한 방법의 발견. 그것은 전성시대에는 좋은 삶을 위한 긴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좋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불안정. 피곤의 법칙이 엄습. 삶의 어떠한 방법론이라도 그 범위내의 신선함을 다 고갈시키고, 또 피로가 물밀쳐 올때까지 그 신선한 것들을 다 써먹어버리게 되면, 하나의 마지막 결단이 그 종의 운명을 결정. 하나는 그 자신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그냥 생존하는 수준으로 퇴행해버리는 것. 또 하나는 과거의 관습들을 자유롭게 떨쳐버리고, 더 잘사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
(案) 여기서 좋은 삶이란 더 나은 삶의 대비가 매우 중요. 좋은 이란 말은 한 방법론의 유기체적 싸이클의 범위에 고착.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쇠락. 쇠락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에로 비약하느냐? 그냥 생존의 화석으로 고착되느냐? 하는 선택. 더 나은 삶으로의 비약은 실천이성의 힘으로만은 불가능. 반드시 사변이성의 작동을 요구.
(譯) 한 종이 새로운 모험을 거부한 상황에서는, 단순한 생존의 잘 입증된 습관에로의 퇴행. 그렇게 되면 최초의 방법은 이제 연장된 노년기의 삶으로 들어가고, 그 노년기속에서 훌륭한 존재는 구차한 존재로 퇴보. 다양한 신선함이 없어지고, 그 종은 낡은 관례의 맹목적 요구에 의존. 이성의 본질은 가장 하급한 형태에 있어서는 새로움이 번뜩이는 순간의 포착이며 판단. 그 새로움은 긴박한 실현 속에 있으며, 아직 행동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욕구에는 적절한 것. 즉 안정된 삶속에는 이성의 여지가 없는 것. 방법론은 새로움의 방법에서 반복의 방법으로 퇴행. 이성이란 새로움을 강조하는 기관. 그것은 목적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판단을 제공.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실을 실현.
(案) 화이트헤드에 있어 모든 안정이란 보이지 않는 쇠락. 안정이란 곧 하향을 의미. 하향은 이성과 불일치. 이성은 인간과 우주를 포함한 상향의 힘. 상향이란 반드시 새로움을 동반. 이성이란 새로움을 강조하는 조직이요 기관이요 힘.
(譯) 삶의 권태란 새로운 대비를 향한 충동의 좌절로부터 연유되는 피로.
(案) 리듬이란 궁극적으로 단순 반복. 반복을 지속시키기 위한 반복적 방법이 리듬을 형성. 반복의 지속, 반복에서 파생되는 피로를 제거시키는 양면적 효과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발생. 사실 우리가 음악을 듣는다는 것도 반복의 시간을 반복의 권태가 느껴지지 않도록 보내기 위해 듣는 것. 엔터테인먼트란 반복적 시간의 효율적 소비 방법일 뿐. 반복의 리듬의 주기가 자기치유적일 때, 반복으로부터 파생되는 피로는 기나긴 시간의 축적을 요구. 그리고 저급한 단계로 내려갈수록 피로의 느낌은 보다 기나긴 시간의 축적을 요구.
(譯) 아주 저급한 형태에 있어서는 이성은 기분을 전환시키는 새로움에 달라붙는 개념적 장치의 강조를 제공. 이러한 이성은 추상적 사유의 구성적 범주를 결여한 이성. 어떤 개념적 번뜩임을 하나의 효과적인 욕망으로 제고시키고, 또 그 효과적인 욕망을 실현된 사실로 제고시키는 아주 단순한 직접적 판단으로서만 작용할 뿐.
(譯) 단순 반복이라는 것은 기회의 저지를 의미. 이성을 짓누르는 관성의 체계는 새로움에 의해 구원되지 않는 단순한 변화의 재현되는 틀의 생산일 뿐. 그러한 관성으로 질식된 이성의 충동이 곧 피로. 이제 단순한 반복적 삶에로의 퇴행만 있을 뿐. 단지 산다고 하는 데만 급급하고 잘 살려고 하는 노력을 포함한 어떤 노력도 결여. 이러한 정적인 듯이 보이는 삶의 단계는 실제적으로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의 복잡한 형태가 단순한 형태로 서서히 몰락해가는 아주 완만하고 오랜 시간에 걸치는 부패를 표상
(案) 인간의 진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활동이 이성적인 어떤 것을 지향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역사의 진행
(案) 이 책에서 주장하는 이성의 기능이란 “이성은 욕망들의 욕망”
여태까지 인간의 몸밖에 두었던 이성을 몸속으로 끌여들였다는 혁명적 발상. 즉 데카르트 이래 초월주의적 신비론에 묶여있던 이성을 상식적 경험의 차원으로 즉 생물학적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발상.
이 욕망과 관련된 정신적 경험이라는 것은 새로움의 기관. 자신을 넘어서려는 충동. 정신이 있는 한 현재의 답보상태에 반복적으로 안주할 수 없다. 모든 새로움이란 혼돈. 새로움은 무정부적 상태를 수반. 모든 새로움은 不定性. 우리는 바로 이러한 무정부상태를 대비적으로 경험하는 사태를 통해서만 질서를 이해. 카오스의 경험으로 통해서만 대비적으로 코스모스를 인식
(案) 사변이성이란 내 삶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것. 단순히 매일매일 먹고 산다고 하는 생존의 방법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호기심의 충동. 사변이성은 사변이성 자신만을 위해 봉사.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으로 인하여 유발될 수 있는 다름 관심의 동기에 의하여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추구하는 일반원리와 같은 지배적 관심을 일관되게 밀고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譯) 중세기의 운동은 너무 지적이었음. 너무도 습득된 지식만의 전개였음. 그것은 타인의 사상에 대한 사고의 폐쇄된 체계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세철학은 그리고 실상 근세철학까지도, 자연의 풍요로움과 그에 상응하는 사유의 풍요로움에 대한 부적절한 파악으로 인하여 사변이성의 디시플린으로서의 효용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들의 철학 속에서 생각한 것들보다 저 푸른 하늘과 이 누런 땅위에 더 많은 생생한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譯) 스콜라철학은 이제 그 가능성을 소진하였다. 근원적 관념의 자본을 제공하였고, 또 그것은 이러한 관념들을 과조하는 방법에 의해서 하나의 궁극적인 독단적 체계를 제공하려는 노력으로 우리 인간들을 심히 지치게 만들었다. 르네상스 사람들은 스콜라철학자들처럼 그렇게 학식을 무겁게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학식을 직접적 경험의 희열로 단련시켰다. 그래서 또 하나의 고대의 비밀이 발견된 것이다. 그 비밀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지만, 슬프게도 중세기의 지성계의 뒷켠에 몰래 숨어 있었다. 그 비밀이란 바로 자기자신 스스로 바라보는 습관이다. 그것은 바로 관찰이라는 습관인 것이다.
'about Humanit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by 무라카미 하루키 (0) | 2023.04.05 |
---|---|
세이노의 가르침 by 세이노 (0) | 2023.03.27 |
왜 리더인가 by 이나모리 가즈오 (0) | 2023.02.27 |
불안 by 알랭 드 보통 (0) | 2023.02.26 |
우리는 왜 사랑을 반복하는가 by 우에노 지즈코 등 10명 (0) | 2022.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