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bout Humanities

NewPhilosopher (vol19) : 사랑이 두려운 시대의 사랑법

by hoyony 2022. 10. 26.

일부 철학자들의 이름은 일상적인 형용사가 될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런 형용사가 실제 그들이 믿었던 바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를 뜻하는 ‘에피큐리언’이 아니었다. 그가 설파했던 것은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지, 음식과 술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플라토닉 러브는 어떨까? 플라톤이 사랑에 관해 쓴 주요 저작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다른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던 연회 이야기를 담은 <향연>이다. 그 자리에서 손님들은 저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에 연설한 소크라테스는 늘 그렇듯 이전 연사들의 주장을 차례로 무너뜨린다. 그런 다음 현명한 여인 만티네아의 디오티마가 그에게 알려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몸을 가진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지혜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아름다운 몸을 가진 사람이 하나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을 사랑하는 쪽으로 옮겨가지만, 이때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마음이 있고, 그것 또한 사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대신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러시아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에 따르면, 애국심이란 권력자들이 힘없는 국민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환상에 불과하다. 애국심이 없다면 통치자들은 불공평한 경제구조, 외부인의 배제와 학대,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처럼 힘없는 자들의 희생으로 힘 있는 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온갖 일들을 국민들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톨스토이는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대량 살상자들의 훈련”을 정당화한다고 보았다. 애국심을 혐오했던 톨스토이는 애국심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면 설교와 설득, 경멸과 조롱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톨스토이처럼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 철학자들 역시 애국심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가 고수할 만한 가치는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 원칙이다. 다시 말해 아이디어와 가치가 어디에서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편적 가치는 누구에게나 진실되고 선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도덕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다이어는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유주의가 특수한 전통과 공동체들로부터 사고와 도덕적 가르침을 추출하여 보편화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실 도덕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각 공동체의 도덕만이 존재할 뿐이다. 만약 도덕적 규칙이 단지 어떤 선을 나타내거나 불러온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된다면, 그런 규칙은 특정 공동체의 역사나 살아온 경험과 직결된다. ‘선’이란 특정 공동체의 역사와 삶의 방식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어느 공동체에 속해 있을 때에만 도덕적 주체다. “나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나는 진정한 판단 기준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잃기 쉽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애국심이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사악한 악덕은 아니다. 오히려 매킨타이어가 보기에 애국심은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내게 빚진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연인에게서 남들이 놓치기 쉬운 온갖 특징을 발견한다. 상대방의 약점과 고결함, 선한 의도와 고통스러운 내면의 갈등, 스치듯 사라지는 입가의 미소까지 놓치지 않는다. 상대방이 우물쭈물 망설이는지, 신이 나서 들떴는지, 못이기는 척 양보하는지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사소하고 미묘할지라도 연인의 성격이 드러나는 의미심장한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내면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이 우리 내면의 강렬한 욕구와 열망을 자극할 때, 우리는 냉정을 유지하기 어렵다. 상대방을 의식하면 우리가 감춘 연약함, 고독, 비밀이 드러나고, 상대방이 멋지고 아름다울수록 더욱 혼란스럽고 나약해지는 우리의 본성은 유대감과 구원에 목말라한다.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
<수전 울프,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철학과 교수>
리처드 테일러의 사고실험인 ‘성취감을 느끼는 시시포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 이야기에서 시시포스를 불쌍히 여긴 신들은 그가 끊임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 말고는 세상에서 다른 일을 원하지 않도록 그의 정맥에 어떤 물질을 주입한다. 그러자 갑자기 시시포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 테일러는 그런 변화 덕분에 시시포스의 삶이 끔찍하게 불운한 것에서 더없이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싶을 때, 예컨대 공허감 같은 것이 찾아올 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내적 만족감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볼 때도 가치가 있는 무언가와 교류하며 살고 싶어 한다. 단순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기거나 사랑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삶이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이 되게 해주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게만 하면 충분히 의미 있어지는가, 아니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기도 해야 할까? 둘 다 필요한가?
--------------------------------------------------------------
사실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큰”이라는 말을 가치가 생기는 일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그런데 어떤 활동이 의미 있어지거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의미를 생각할 때 나는 먼저 테일러의 생각과 내 생각을 비교해 보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그 일을 사랑하고 그 일이 자신에게 의미를 느끼게 하는 한 삶에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당신에게 무의미한 일은 당연히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하지 못하므로 이는 일종의 필요조건이다. 즉 어떤 식으로든 주관적 성취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객관적 성취감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일은 당신이 올바르게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주관적 끌림과 객관적 끌림이 서로 만나야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당신이 뭔가를 사랑할 때, 즉 그것에 열정을 느낄 때, 당신은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며 그 대상은 사물이나 활동 혹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뺏고 사랑받을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주관적 가치와 객관적 가치를 조화시키고 싶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뭔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일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사실상 의미 있게 살고 있지 않는 것이므로,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주관적이란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의미 있는 일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일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고, 그것은 사실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고 싶어 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 한다.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그렇게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가치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