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보호하기.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두 가지 정체성을 구분. 하나는 동일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동일 정체성이고, 또 하나는 변화하는 와중에도 동일하게 유지되는 자기 정체성.
동일 정체성은 우리가 누구이고 신원 서류에 어떻게 기록될지를 규정하는 범주를 의미하므로 종종 범주적 정체성이라 불린다.
자기 정체성은 서사적 정체성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우리의 이야기로, 어째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여러모로 다른데도 여전히 동일인인지를 설명. 따라서 서사적 정체성을 보호하려면 신원 서류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사생활 보호와 자기표현의 권리,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이야기할 권리를 갖는다.
나 자신을 바꾼다는 것.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변화를 조직하는 사람은 내가 바꾸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니 ‘새로운 나’는 언제나, 어쩔 수 없이, ‘예전 나’의 창조물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올바른 변화를 계획할 때 ‘예전의 나’에게 의지해도 되는 것일까? ‘예전의 나’가 그렇게 똑똑하고 현명하다면 애초에 다른 사람이 되어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바꾸어놓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변화에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엄청나게 계획적인 사람이 되겠다고, 아니면 인종차별이나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데 온 시간을 다 쏟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이런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을 하게 되면 책상 한쪽을 정리하는 것이나, 한 달에 한두 시간쯤 환경 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한심할 정도로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변화를 위한 계획이 한없이 미루어진다. 구체적 변화로 이어졌을 소소한 행동은 ‘새출발주의’ 포부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철저한 변화는 불가능한 걸까? 물론 아니다. 다만 깊은 변화는 언제나 어느 정도 신념에 찬 행동이어야 한다.
우리는 마침내 인생을 통제하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열망한다. 사실 우리는 기꺼이 통제를 포기하려는 만큼만 변화한다. 우리는 어떠한 행동들을 추구하고 난 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철학자 로리 폴이 지적하듯이 어떤 경험, 예를 들어 부모가 되는 경험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내개 좋을지 아닐지 미리 판단할 수 없다. 변화 때문에 존재하게 될 ‘나’는 현재의 나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자녀를 낳으면 우리는 변화한다. 그런데 자녀를 낳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라는 쪽으로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길이 없다.
이 모든 불확실성에도 숨은 위안이 존재한다. 장래에 최선인 길을 알 수도 없고 과거와 완전히 결별할 수도 없으니, 과거와 헤어져서 최선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유용해 보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회학자 오토 노이라트의 항해 비유를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기나긴 항해를 떠난 선원과 같다. 배를 완벽하게 수리하고 싶어서 항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수리해야 한다. 배는 이미 바다로 나왔다. 유일한 선택지는 항해하는 동안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써서 갈라진 틈과 물 새는 구멍을 임시로 땜질하는 것뿐이다.
육체의 연속성이 개인 정체성을 형성한다.
로크는 개인의 정체성이 의식과 기억을 바탕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자아는 현재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의식으로 결정되고, 그 자아는 동일한 의식이 과거와 미래의 행동에까지 가닿는 한 동일한 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된 기억까지 모두 포함한 기억의 총체가 지금의 우리를 이룬 걸까?
그런데 이 주장은 이미 18세기에 반대에 부딪혔다. 지금의 당신이 열 살 시절은 잊었지만 스무 살 시절을 기억하고 있고, 스무 살에는 열 살 시절도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해보자. 로크의 주장대로라면, 지금의 당신과 스무 살의 당신이 같고, 스무 살의 당신과 열 살의 당신은 같지만, 지금의 당신과 열 살의 당신은 같지 않다. 이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당신과 스무 살의 당신이 같고, 스무 살의 당신과 열 살의 당신이 같으면, 지금의 당신과 열 살의 당신도 같은 존재여야 한다. 나와 동일한 무엇이 나와 다른 무엇과 동일할 수는 없다. 이는 철학적으로 치명적인 오류다.
데이터가 곧 당신은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데이터 분석 기술 중 하나는 머신러닝으로, 디지털 스토리지와 연산 능력을 바탕으로 점점 증가하는 데이트 세트를 뒤져 가며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는 기술이다. 결국 방대한 데이터에서 추출해낸 이런 패턴은 암 진단 패턴이든 미래의 인간 행동 패턴이든 간에 향후의 패턴을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데이터 산업은 상관관계를 기반으로 돌아간다.
알고리즘은 사실 당신이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신 당신의 일부 데이터와 옷을 구매하려는 다른 사람들의 데이터 간의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확률론적인 계산을 수행한다.
알고리즘은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패턴을 인식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 관찰자들이 ‘무관하다’라고 여기는 데이터를 제거하는 일은 머신러닝의 목적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데이터량을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데이터 세트에서 인종이나 성별 식별자를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충분히 대변되지 않는 사회 집단에 관한 데이터를 알고리즘에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데이터가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많고,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도 더 많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실상은 거의 반대다. 데이터가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은 데이터 세트에 기록될 수 있는 수치화 가능한 정보뿐이다. 우리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데이터와 머신러닝에 점점 더 의존할수록, 수치화나 데이터화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알아갈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진다.
데이터 세트가 우리의 진정한 모습과 감정을 드러낸다는 데이터 과학의 기본 신념을 수용해서는 안된다. 데이터 세트는 단지 외부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들의 기록일 뿐이다. 당신의 핸드폰은 당신의 말을 엿듣는 대신 당신의 클릭, 조회, 심지어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 패턴까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데이터가 곧 당신은 아니다.
데이터 중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데이터를 관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데이터 수집이 가치 있거나 해로운 것은 개인 수준이 아니라 집단 수준의 통찰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상관관계는 개개인에 대한 본질적인 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데이터 분석가에게 어떤 면에서 비슷한 사람들 집단에 대한 통찰과 그에 따른 통제력을 부여한다.
옷 속에 있는 영혼
대통령 시절 버락 오바마는 똑같은 디자인의 남색 수트만 여러 벌 돌려 입었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그랬다고 한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나다 보니, 어느새 그의 옷은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그 덕에 그의 말과 행동에 초점이 맞춰졌다. 사람들은 오바마라는 사람이 옷보다 더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쓴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 옷은 정체를 속이고 위장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이때 옷의 주된 역할은 한 사람의 진짜 정체성을 은폐하는 것이다. 옷은 은신처가 되어주고 “편히 쉴 수 있는 장막 구실”을 해주기도 한다. 몸에 옷을 걸치면 우리 존재는 한층 옅어진다.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무의 상태로 빠진다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과 정체성
17세기 존 로크는 우리가 시간이 지나도 동일인일 수 있는 이유가 특정 종류의 기억의 연속성 때문이라고 주장. 그는 ‘인간’과 ‘인격’을 학술용어로 사용하여, 한 사람이 시간이 지나도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같은 ‘인격’은 아닐 수 있다고 주장. 로크가 보기에 인간이란 “이성과 성찰이 있고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여전히 자신을 동일한 지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사고력을 가진 존재”였다. 따라서 인격 동일성을 지니려면 단순히 신체 동일성 외에도 자신을 과거와 연속성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종의 지각 증력이 필요. 자신의 과거 행동을 내가 책임져야 할 일, 내가 한 일, 즉 나를 구성하는 일련의 기억으로 인식하는 것.
영화감독 부이스 부뉴엘이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
“우리는 단편적으로나마 기억을 잃기 시작할 때 비로소 기억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이 없는 삶은 결코 삶이 아니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의 일관성, 이성, 느낌, 심지어 행동이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기억의 작동 방식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가장 타당성 높은 가설에서는 우리의 기억이 회상하는 행위에 의해 얼마나 크게 바뀌는지, 그러므로 증언이 얼마나 근복적이고 신뢰성이 없는지를 강조.
기억이 전형적으로 작동하는 방식 때문에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과거와 단절. 기억은 불안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에게 정체성과 명백한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기억과 의식일 것.
우리는 마땅히 어느 시점에 상당한 기억을 상실하게 되면 정체성을 상실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이 대단히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라면, 우리는 흔히 생각하거나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창조적으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일 것.
망각이 사라진 사회.
부정적인 경험을 잊는 것이 사회 정체성 발달에 중요.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순간들을 모조리 기억한다면 아예 꼼짝할 수도 없기 때문. 잊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념적인 차원에서 미래의 자기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하며 변화와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기 때문. 이처럼 방각은 사회 정체성 발달을 물론이고 정치적 의미와도 연관.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모라토리엄’(사회적 자아를 확립하지 못하고 성인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유예하는 상태)을 겪는다. 모라토리엄은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의 사회심리적 단계로, 이때 우리는 진취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고 때로는 선을 넘으면서 “사회가 청소년들을 때에 따라 방임하고, 청소년들이 사회를 향해 치기 어린 도발을 하는 시기”. 이처럼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젊은이들은 마음껏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자아를 탐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의 결과에 대해 두고두고 책임지지 않아도 됨.
부모들은 보통 자기 자녀가 디지털 기기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스마트폰으로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 사실 아이들은 평판 관리에 중독된 것. 1980~1990년대에는 평판 관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유명 인사나 정치인뿐. 요즘은 열두세 살, 심지어 열 살짜리 아이들까지 평판 관리에 집착. 아이들이 항상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이유는 SNS에 사진을 올리고 나서 ‘좋아요’를 10개 밖에 못 받으면 재빨리 내려야하기 때문. 디지털 세대의 아이들은 자신의 언행에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불과 20년 전까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기 검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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