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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탁월한 사유의 시선 by 최진석

by hoyony 2022. 5. 8.

철학적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비유하면, 전략적 차원에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의 움직임에 종속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말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수입한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야기한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을 수용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어려워져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은 잘 숙지하면서, 스스로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지배할 더 높은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철학적 시선이다.

 

철학을 쉽게 얘기해본다면, 아마 전략적 높이에서 하는 사고정도가 될 것이다. 전략적 단계는 전술적 단계를 지배한다. 전술적인 단계보다는 전략적 단계가 더 높다. 높을 뿐만 아니라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짜진 판 안에서 하는 전술적인 사고와 달리,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이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종속적인 변수들을 다루면서 하는 행동들을 전술적이라고 한다.

전쟁을 일으킬 것이냐 말 것이냐, 전쟁을 일으켜서 국제 질서나 주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로운 구도로 끌고 갈 것이냐를 생각한다면 전략적인 사고일 테고, 전쟁이 벌어진 상황 안에서 상대방에 어떻게 대응하며 어떻게 공격할 것이냐, 어떻게 방어할 것이냐 혹은 병력을 어떻게 전개시켜갈 것이냐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전술이다. 그래서 항상 전술은 전략의 제약 속에 있다.

전술이 전략보다 높거나 넓을 수는 없다. 전술가가 전략가를 이길 수는 없다. 대개의 전술가들은 전략가들이 펼쳐놓은 판 위에서 놀 뿐이다. 전술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신이 전략가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아채기 힘들다.

 

인문人文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이다. 인간의 활동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개괄해 이해한다.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란 모두 이 인간의 동선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면 전략적이다. 그 차원에서라야 비로소 상상이나 창의니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상상이니 창의니 하는 일들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일뿐, 그 아래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철학적인 시선이라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지성적인 차원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시선이다.

하나의 지식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해서 재사용하거나 거기에 몰두하고 빠져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하거나 효용성을 따지는 대신 그 지식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따지고, 그것이 세계 안에서 벌이는 작동과 활동성을 보려고 한다.

컴퓨터가 발명되자 어떤 사람은 그 컴퓨터를 사용하고 소유하는 일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컴퓨터의 사용보다도 그 컴퓨터로 인해 전개될 새로운 변화의 맥락이나 달라질 사회의 흐름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역시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무엇인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이루는 일정한 범위를 장르라고 한다. 선진국은 바로 이 장르를 만든다. 어떤 나라가 문화적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바로 장르를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한다. 장르를 만드는 나라는 문화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수입하는 나라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다.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그 힘으로 앞서나간다. 장르ㅡ선도력ㅡ선진은 이렇게 연결된다.

장르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다.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선진성 여부를 보여주듯이 각자 개인들은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독립적이냐 아니냐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의 기능적인 관심에 빠져 있을 때, 거기에서 슬그머니 이탈해 흐름 자체에 궁금증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관념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이 호기심은 사실 이 세계의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은 자신만의 것으로 매우 고유하고, 비밀스럽고, 사적인 내면의 활동이다. 호기심이 발동했을 때, 즉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이 발동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이런 사람이 비로소 독립적 주체다. 이런 독립적 주체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면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힘이 강해지고, 결국 사회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부단히 혁신하며 나아간다.

 

질문과 대답은 대립적인 한 쌍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두 행위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인간의 동선, 즉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파악한 다름에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해 감동을 생산해내고, 그 감동을 매개로 그것을 알게 해주려는 시도가 바로 문학이다. 사건들의 유기적 연관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해주려 하면 사학이 된다. 세계를 관념으로 포착하여 그 관념들의 유기적 연관을 통해서 알게 해주려는 노력, 바로 철학이다. 그것을 색으로 표현하면 미술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음악이 된다. 형상적인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알려주려는 시도가 바로 예술이다.

 

고난의 극복과 찬란한 번영 및 부흥이 한계에 도달한 이 단계에서, 우리가 돌파하여 나아갈 길은 오로지 선진화다. 그리고 선진화라는 목표는 결국 철학적 단계로의 상승과 관련된다. 지식인은 감각과 기능에 갇히지 않는다. 시대의식을 포착하고 거기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지식인이다.

 

어느 조직이나 붕괴하기 시작할 때는 공통의 조짐이 나타난다. 그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등의 분석하는 일을 점점 더 많이 한다. 구성원들의 이탈 현상이다. 구성원들이 참여자나 행위자로 혹은 책임자로 존재하지 않고 제3자처럼 구경꾼으로 존재한다. 구성원들 가운데 점점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진다면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조짐이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된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독립할 때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고독孤獨이다. 보통은 고독을 부정적인 의미로 보는데 부정적 의미에서라면 그것은 아마 외로움일 것이다. 외로움은 뭔가 결핍감을 느끼는 부정적인 상태다, 고독은 그렇지 않다. 고독은 아주 고아하게 혼자 서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힘만으로 서 있는 자립적 상태다.

 

우리는 대개 생각의 결과들을 믿음의 체계로 바꿔서 그것을 신봉하면서 산다. 이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 만 세상과 접촉한다. 이때 인간이 상실하는 가장 큰 자질이 바로 예민함이다여기서 말하는 예민함은 가볍고 급하게 반응하는 신경질적인 민감함이 아니다. 인간을 통찰로 이끄는 매우 종합적인 직관의 터전이다. 자신의 시대적 사명과 역사적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직관이다. 깊고 넓은 지성이 없이 발동하는 경솔한 반응이나, 강한 신념과 믿음에서 나오는 성급한 과감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익숙함에 갇혀 있으면 절대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다. 익숙함에 갇혀 있으면, 궁금증이나 호기심도 발동되지 않아 질문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창조란 새로운 흐름을 포착한 상태에서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하여 극한으로 몰입할 때 일어난다.

 

불안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은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이것을 해소하여 편안함으로 바꾸려 한다. 독립적 주체는 편안함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불안 그대로를 감당한다. 그대로 품어버린다. 우리가 쉽게 믿음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믿고, 모든 문제를 그 믿음의 기준으로 해석하면 항상 명료하다. 믿음을 가지면 편안하다. 하지만 믿고 편안하면, 인간은 딱 거기까지다.

 

합리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꿈을 꾸자. 꿈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있는 관점들로 명료하게 해석되어 합리적으로 보이거나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다. 착실한 계획일 뿐이다. 꿈은 원래 거칠고 비합리적이며 돌출적이다.

 

우리에게는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선례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이 큰 습관이다. 선례가 없거나 지시 내용이 없으면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하지 못한다. 나 또한 직장에서 무슨 일을 시도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선례형평성이다. 심지어는 이놈의 선례와 형평성만 찾다가 모두 함께 말라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선례를 찾기만 하지 선례를 세우려는 도전을 하지 않는다. 이러다 보면 자기는 기존 논리를 넘어서서 압도하는 사람으로 서지 못하고, 계속 분석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는 사람으로만 남는다.

 

문_좋은 질문 자세란 무엇인가?

_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질문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이렇게 될 것 같은가요, 저렇게 될 것 같은가요?”

이런 식의 질문에는 자기 주도권이 양보 되어 있다. 나는 그런 식의 질문보다는 이렇게 해도 될까요?”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라는 식의 질문이 더 질문다워 보인다. 질문에는 반드시 자기 관찰자기 의도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구체적인 시대와 유기적인 연관성 없이 돌출적으로 등장하는 고전이나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고전이나 경전들을 접하면서 진리에 대한 갈망을 갖는데, 그것은 고전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일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렵다. 고전에 있는 진리적인 것들이 당시의 구체적인 세계와 어떤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한 후,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시대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포착된 자기만의 문제가 자기에게서 먼저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관건이지, 경전에 있는 진리를 묵수墨守하는 것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생각의 결과들이 어떤 구체적인 세계를 토대로 형성된 것인지를 이해한 후, 지금의 세계에서 나에게 포착된 시대의 문제를 지성적인 높이에서 계속 생각해보는 것이 철학이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인 활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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