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7. 30
㈜문학동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이미지와 언어의 힘을 높이 평가하도록 교육받는다. 박물관으로 이끌려가 오래전에 죽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엄숙하게 교육받고, 시와 소설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주입받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뉴스가 매시간 제공하는 언어와 이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뉴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만드는 으뜸가는 창조자다. 혁명가들이 그러하듯,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미술관, 교육부, 또는 유명 소설가들의 집으로 향하지 마라. 정치제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곧장 탱크를 몰고 가라.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 이는 인간의 기능과 활동에 관한 일관되면서도 근본적인 논지에 의해 인도.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 편향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
언론이 찬양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기술.
<정치뉴스>
현대 정치 핵심에는 모든 시민이 (작지만 지극히 중요한) 국가의 통치자라는 장엄하고도 아듬다운 사상이 있다. 뉴스는 이 약속을 충족시키는 핵심 역할. 뉴스는 우리가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이 국가를 이끄는 데 적합한지, 작금의 가장 시급한 경제적 사회적 난관을 뚫고 우리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데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 언론은 결코 민주주의의 부수적 존재가 아니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보증인.
종교는 자기가 준비한 상차림을 날마다 조금씩 떠먹여주는 데 신경을 쓰면서 끈기 있게 몇몇 주제를 습득하도록 한 뒤 계속해서 그 주제로 돌아감. 반복과 연습은 주요 신앙의 교육법에서 핵심.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의 가짓수는 엄청나되 사건의 배경이 되는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하지 않고, 뉴스 속 의제를 지속적으로 바꾸며, 살인자들과 영화배우들의 화려한 행각에 대한 기사를 끊임없이 갱신하여 사방에 뿌림으로써, 바로 조금 전 긴급해 보였던 사안들이 현실과 계속 관계를 맺은 채 진행중이라는 인식을 대중이 갖지 않도록 조처하기만 하면 된다.
어느 나라의 어느 시점이든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엄청난 양의 모순된 정보가 존재. 소아성애 살인마가 여럿 활동하고 있겠지만, 반면 학대와 구타로 어린이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에 반대하는 수천만의 사람들도 존재. 어떤 이들은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를 고기 자르는 칼로 살해하려는 충동에 이끌릴 수 있겠지만, 사람들 대다수는 울고불고하며 분노에 차 되는 대로 살아가는 길을 택할 것. 경제적 어려움으로 지쳐버린 울적한 주민들도 있겠지만,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역경에 직면해서도 이내 기운을 회복하는 많은 이들이 존재. 참 이상한 일이긴 한데, 동전의 훨씬 유쾌한 쪽은 결코 뉴스가 되지 않음.
수많은 버전의 현실이 존재하기에, 실재하는 국가와 언론기관들이 날마다 확고한 태도로 보도하는 국가가 같은 것이라고 보기조차 어렵다. 뉴스는 스스로를 현실을 그려내는 권위 있는 초상화가라고 제시할지도 모른다. 뉴스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는 대단히 난감한 질문에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빼어난 능력은 없다.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
늘 그렇듯 대참사와 사악한 사건에 보도의 초점을 맞추면서도, 뉴스는 국가가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며 진로를 정하는 데 필요한 작은 희망을 증류하고 응축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이따금 수행해야 한다. 뉴스는 사회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사회를 돕는 한편, 선함과 용서와 분별력을 충분히 갖춘, 구성원들이 기여하기를 원하는 가상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중요한 임무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저널리즘이 어떻게 밝혀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워터게이트 유형의 악당들만 계속 찾아다닌다면, 우리는 산적해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놓칠 공산이 크다. 보다 구조적이고 비인격적이면서 악당들의 위법행위 못지않게 유해한 수많은 잘못들을 철저히 조사하는 데도 실패할 것이다. 이를테면 가정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수동적 공격성 같은 인생을 파괴하고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법망을 빠져나가는 행위와 가치관에 기인한 잘못들 말이다.
현 체계에서 뉴스는 어떠한 위법행위도 금품 갈취도 없이 수천 명의 사람들을 굴욕적인 환경에서 살게 만드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보지 못한다. 사기 행위를 악착같이 취재하는 열성적인 기자도 공공생활의 존엄과 지성을 서서히 갉아먹는 광고 방송으로 형사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것. 남녀 간의 예의범절과 존중을 훼손한 죄로 체포되어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지도 못할 것.
개개의 뉴스들 역시 뉴스 브랜드의 비호 아래 전달됨으로써 힘을 얻는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제기했다면 우리가 보다 친절하게 검토하려 들었을 의견들이 특정한 언론사 이름 아래 있기만 하면 과거의 신화적인 힘을 획득. 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기사가 신고딕풍 첼트넘 서체의 <뉴욕타임스> 제호 아래 등장할 때, 혹은 대통령의 예산안을 옹호하는 논지가 <르몽드>의 펜웨이 서체로 쓰인 차분하지만 감각적인 칼럼 속에 펼처질 때, 우리는 기사의 건전성이나 논지의 일관성에 대해 의문을 덜 품는 듯. 뉴스 브랜드만으로, 우리는 그 제호 아래 실린 기사를 회의적으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문제를 토론할 때, 우리는 적절한 수준의 과세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무엇인지 숙고하는 쪽에 에너지를 쏟는다. 하지만 주류 언론은 우리가 노동의 목적, 정의의 본질, 시장의 적절한 역할 같은 보다 고유하면서도 폭넓은 질문들은 제기하지 못하게 막는다.
뉴스 기사는 다른 식으로 깊이 상상하려는 우리의 의지뿐 아니라 그 능력까지 축소하는 방식으로 사안들을 특정한 틀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 이 방식이 지닌 겁박하는 힘을 통해 뉴스는 우리를 마비시킨다.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이가 없다면, 불확실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개인들의 사색은 위축되고 말 것이다.
<해외뉴스>
뉴스 보도에 대한 이상적인 멘트는 이런 것이다 : 사악함, 굴종, 인종차별은 본질적으로 무지의 소치다.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도록 한다면 편견, 두려움, 속임수, 군사적 침략 같은 건 줄어들 것이다. 뉴스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 논리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다.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7월 출산 예정 (582만건)
영국 전역에 폭설 예상 (434만건)
베이비드 보위 컴백, 싱글차트 톱10에 오르다 (252만건)
나이지리아 코기 주의 교회, 습격으로 19명 사망 (9220건)
콩고민주공화국 동부가 엄청난 인도주의적 위기에 직면 (4450건)
남부아프리카 : 콰줄루나탈에서 종족 간 총격으로 5명 사망 (2540건)
콩고 분쟁 : 카가메와 카빌라, 합의에 실패 (1890건)
뉴스가 충분히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여주기 않기 때문이라면.
해외 뉴스를 좌우하는 전제
1) 모든 저널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전문 기술은 정보를 정확하게 모으는 능력이라는 것.
2) 어떤 사건이 더 엽기적이고, 비극적이거나 끔찍할수록 그 사건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고, 그러므로 기사의 위계에서 더 높은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
3) 국가와 산업에 관련한 문제에 암묵적으로 우선순위를 양보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군사적 상업적 혹은 인도주의적 문제에 연관된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해외 뉴스는 우리가 어디서 누구와 싸우거나 교역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동정심을 표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어 한다.
적절하게 전해질 경우, 뉴스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
뉴스는 표면적으로 특정 시간과 장소, 지역 문화와 사회적 집단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그 특수한 것의 한 층 아래에는 보편적인 것이 숨어 있다. 기사의 시간적 지리적 배경을 초월한 인간 본성의 변함없는 근본에 바탕을 둔 심리학적 사회적 정치적 주제들.
우리들에게 필요한 해외 뉴스는 구체적인 것들에 더 끈질기게 매달리는 뉴스, 예술이 주는 교훈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임으로써 사건에 대한 우리의 흥미를 불타오르게 만드는 뉴스, 시인과 여행 작가와 소설가의 기예를 저널리스트가 전수받아 작성하는 뉴스. 우리가 이 행성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비극을 그렇게나마 일상적으로 태평하게 지나칠 수 없도록.
<경제뉴스>
숫자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경제지표로 한 국가를 평가하는 것은 혈액검사 결과를 통해 어떤 사람을 다시 그려보는 것. 인격과 개성의 전통적인 표지들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채. 크레아티닌 수치가 3.2이고 젖산탈수소효소 수치는 927이며 백혈구 수치는 (시야당) 2, C반응성 단밲은 2.42라는 시실을 한 사람을 기본적으로 설명하는 분명한 지표로 삼을 때 그렇다.
현재 주류 언론은 확립된 경제 제도 안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활동을 주로 취재. 또한 한번 벌어지는 일은 말해주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뉴스가 의제를 만들어내는 한, 노동시장 개선을 위해 개입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화폐동맹을 탈퇴해야 하는지 가입해야 하는지, 인플레이션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하는지 조금 풀어줘도 좋은지 같은 제한적인 문제 제기만 가능할 뿐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로지 경제 용어로만 작성하거나, 회사 전체를 +1.20이라고 요약하거나, 직원 8000명의 직장생활을 총매출 375.776으로 압축하는 행위들은 마치 <오만과 편견>처럼 복잡한 소설을 등장인물들의 은행계좌 원장으로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것과 같이 한계가 명확한 일이다. 사업체들은 범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체로서 영예를 누려야만 한다. 이곳에서 체험되는 모험, 기만, 책략, 열정, 고통은 연애 사건을 묘사할 때처럼 격렬함과 미학적 솜씨로 주의깊고 생생하게 재현되어야 마땅하다.
<셀러브리티 뉴스>
셀러브리티를 대하는 기독교도와 아테네 사람들의 태도의 기저에는 자기계발에 대한 의지와 더불어, 위대한 전범들의 삶에 몰입함으로써 더 나은 자기로 거듭나는 법을 배울 가장 풍부한 가능성과 마주하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미래의 인터뷰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이 유명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어야 함. “저는 테니스선수는 아닌데, 윔블던 테니스 대회 우승자가 2세트에서 오심이 나왔을 때 보인 태도에서 뭘 배울 수 있을까요?” 혹은 “제게는 예술적 야망 같은 건 없습니다만, 도예에서 건축까지 모든 분야에 능숙한 다재다능한 예술가의 면모는 제가 커리어를 쌓는 데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성취를 거둘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모를 때 오히려 타인을 가장 시기하게 된다. 타인이 거둔 승리를 그저 신비롭고도 당연한 사실로 묘사하기 보다는, 그들이 승리하기 위해 어떤 걸 쏟아 부었는지 정확히 분석할 필요. 언론은 성공담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실제로 모방할 수 있는 사례연구로서 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형적인 유명인사의 유년기에는 거절의 경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경험 없이는 명성에 대한 한결같은 희구란 있을 수 없다. 부모 중 한쪽이 그에게 무관심했거나, 그와 정서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거나, 다른 형제자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찍 죽었거나 해야 한다. 가장 심각한 예는 부모가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거나 이미 유명해진 누군가와 어울리느라 자기 아이에게 관심을 꺼버린 경우고, 이때 명성에 대한 욕구는 여지없이 강박이 되어버린다.
10여 년 정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사는 50여 년에 대처할 힘을 얻을 수 있다. 특별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말은 아이의 정서적 욕구가 웬만큼 충족되었을 때만 그 합당한 의미를 갖는다.
<재난 뉴스>
비극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품위 있고 호감 가는 인물도 결국엔 쉽사리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완전히 정상이었다면, 광기가 우리의 일면을 심각하게 지배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타인의 비극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문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모든 경우에 확고히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해야 한다. 뉴스의 진지한 임무가 여기에 있다. 끔찍한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인간의 혼란스러운 일면으로 인해 (극단적인 상황에서라면) 저질러버릴 수 있는 일들을 우리가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격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비극은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스스로를 강하게 제어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비극적인 사건을 보도할 때, 뉴스는 끔찍한 행동을 특정한 인물의 고유한 행동으로 보이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유용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는 주저한다. 그 결론이란 우리가 끔찍한 행동으로부터 머리카락 한 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적절한 방식으로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성찰하는 태도로 성숙한 슬픔에 잠길 수 있다.
심각한 범죄 기록이 없는 건 대체로 운이 좋거나 환경이 좋아서일 뿐, 본성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깨끗한 양심이란 상상력이 충분하지 못한 이들의 전유물이다.
살인이나 폭발 사건은 열심히 취재하면서도, 뉴스는 평범한 죽음과 관련해서는 쓸데없이 비위가 약한 척 행동. 죽음을 절정의 구경거리로 바꿔놓는 뉴스의 성향은 우리가 죽음을 일상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걸 단념시킨다. 뉴스는 폭격을 당한 지역부터 연기가 풀풀 나는 비행기 추락 현장까지 우리를 재빠르게 데리고 다닌다. 우리는 팔순 노인의 심장이 멈췄다든지 하는 일상적인 사건은 좀처럼 접할 수 없다.
<소비자정보 뉴스>
우리는 조용하고 평온한 호텔에 그저 며칠 묵고 싶어 찾아가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조용하고 평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더 큰 포부를 거들어줄 물리적 환경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는 것도 그저 색다른 경치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풍경이 내면의 풍경을 재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나가는 것이다.
예술은 치유의 힘을 가진 매체로, 관객들을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자기로 진화하도록 거든다는 것이다. 예술은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처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을 수많은 심리적 취약점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실수를 지혜롭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직접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한 고통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희망을 품은 채 꾹 참고 견뎌낼 뚝심도 없으며, 일상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죽음을 적절히 예비할 수도 없는 우리의 무력함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이 제공하는 정보는 혼란스러우리만치 뒤죽박죽. 저널리스트가 잘 숙고된 심리적 의제에 따라서가 아니라 출판, 영화, 미술관 산업의 홍보 계획에 따라 보도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성향을 갖고 있어서다. 결국 비평 지면은 베스트셀러 순위나 영화 관객수 차트에 지배당하고, 다음에 무엇을 읽고 볼지 결정하는 데 오로지 대중성만이 가장 생산적인 기준이 된다.
<결론>
맞품 뉴스는 풍부하고 복잡한 개성을 도야하는 걸 돕기는커녕 병적인 측면만 강화하거나 평범함이라는 형벌에 처하도록 하는 결과.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괴로운 정치 뉴스 같은 것에는 비위가 약하고 패션과 연예 뉴스에만 채널을 고정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맞춤 뉴스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겠는가. 왕비의 신민 5000명이 렌에서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은, 폴리냐크 공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이 자랑스레 차려입은 드레스에 대한 완벽한 보고에 밀려나 희생되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선 순윌르 정하는 게 문제였다는 점이 비로소 드러난 건 1793년 10월, 왕비가 단두대 계단을 밟을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던 때가 아니었을까.
맞춤 뉴스 만들기는 자신에게 필요한 뉴스에 대해 고도로 성숙하고 복합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을 때, 실은 오로지 그럴 경우에만 현재의 뉴스 편집 시스템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는 가까운 곳에 놓인 조정 장치를 사용해 뉴스 편성을 조정하기 이전에 자신의 영혼을 세세하게 꿰뚫고 있어야 한다고 이용자들에게 요구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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