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3. 13, 생각의 길
프롤로그. 나답게 살기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가? 의미 있는 삶,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인가? 품격 있는 인생, 행복한 삶에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이것은 독립한 인격체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이미 예감한 중년들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기쁨, 존재의 의미, 인생의 품격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빈다. 그 무엇도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그대들을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쳐 제각기 색깔이 다른 삶을 산다.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이 나머지 절반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절반 성공했다는 것이다. 나는 크라잉넛의 책을 읽으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크게 빚졌다고 생각한다. 그 빚을 갚고 싶다. 그래서 그들도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인생의 나머지 절반도 소신대로 하기를 기대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J.S. Mill).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사형 집행일과 집행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살아 있는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잘 죽는 문제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삶은 곧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죽는다. 실존주의자를 흉내내서 말하면, 이서이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다. 인간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다 살면 그때 죽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죽어 간다. 죽음은 단지 삶의 이면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완성된다.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휘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은 훌륭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과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의미를 모르는 삶은 비천하고 허무할 뿐이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각자 남들을 조금 더 배려하고 제도를 더 합리적으로 바꾸기만 하면 모두가 존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지 않나 걱정이 된다. 제도 개선은 단지 삶의 환경을 조금 덜 냉혹하게 만들 뿐, 그 자체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동기가 무엇이든 그런 것들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없는 양상으로 파괴할 때,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자살은 탈출구가 된다.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내 스스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내 죽음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유전자의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철학적 가치는 없다. 유전자는 기억하지 않으며 사유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영생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나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주체, 지성을 가진 자아는 언제나 단 한 번만 존재한다. 유전자는 유전자일 뿐 나가 아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스페인 남자인 라몬 삼페드로는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라는 책을 남겼다. 스물다섯 살에 물이 빠진 해변에 떨어져 일곱 번째 경추가 부러졌다. 이때부터 30년 동안 똑같은 하루를 살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자고, 침대에서 책과 신문을 읽고, 침대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침대에 누운 채 찾아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하늘과 바다를 내다보았다. 전신이 마비된 삶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는 죽기를 원했지만 물과 음식을 끊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라몬은 감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우주의 기원과 운행 법칙에 대한 연구에서 삶의 기쁨을 얻은 호킹과는 달리 라몬은 사랑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감각이 너무나 중요했다. 감각이 없이는 사랑을 느끼고 표현할 수 없다. 사지가 마비되면 자살한다는 준칙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라몬 삼페드로의 준칙은 그것이 아니었다. 라몬이 제안한 준칙은 ‘기쁨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 남은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데 스스로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인정해주자’는 것이었다.
제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내가 보수정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보수주의가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 이기심, 독점욕, 증오, 복수심, 두려움, 강자의 오만, 약자의 굴종 같은 것이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나 강력한 보수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진보정당은 인간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는 정당이다. 자유, 정의, 나눔, 봉사, 평등, 평화, 생태 보호를 추구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도 삶은 똑같이 귀한 것이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이다. 자기 힘으로 삶을 꾸려가야 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다. 자식이든 친구이든 타인에게 의존하면 삶은 존엄과 품격을 상실할 수 있다.
나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좋아한다.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혈연 집단에 의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행동 일반과 비교하면 새롭고 덜 자연스러운 것임에 분명하다.
제4장.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무시무시한 폭력을 동원해 공포정치를 조직화한 지성적 금욕주의자 칼뱅의 동기는 고상했다. 그가 모든 죄인에 대해 냉혹했던 것은 악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는 도덕적 품성을 길러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계속되는 형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포정치를 밀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여한 의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신학적 정치적 견해에는 오류가 없다고 확신했다.
인간은 이성과 더불어 욕망을 가진 충동적 존재이다. 욕망에 휩쓸리고 충동에 빠지면 대로 이성이 무력해진다. 여기에 무지가 겹치면 터무니없는 망상에 빠져 자기 손으로 삶을 파괴할 수 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유한한 존재이다. 이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 기쁨, 행복, 열정, 환희 등 삶에서 귀중한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가까이 온 만큼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는, 그렇게 웃으며 지구 행성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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