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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Humanities

어차피 살 거라면,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by 이근후

by hoyony 2019. 6. 8.

2019. 05. 10, 메이븐

젊었을 때는 의지를 세워 열심히 노력하면 웬만한 일은 전부 이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 보니 알겠다.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의해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원래부터 많지 않았고, 흐르는 시간을 당해 내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고(故) 신영복 선생은 말했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생명의 길이가 아니다.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가장 적절한 잣대는 그 사람이 일평생 살아온 방식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일에서 얻는 보람이 큰 사람인가?’ ‘관계에서 얻는 행복감이 큰 사람인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나답게 느껴지는가?’ 이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쉽게 경쟁 체제에 휘말리지 않는다. 남을 이겨 1등이 되는 데 집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자기답게 하면 그뿐이다.

나이 들어서까지 주연 자리를 꿰차려는 것은 노욕에 불과하다. 노인의 미덕은 단연 절제에 있다. 어쩌면 후배들이 내가 하지 못할 절제를 앞서 도와주는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가. 절제는 연령을 떠나 누구에게나 고귀한 능력이지만, 특히 나이 들수록 배워야 하는 삶의 기술이다. 절제는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러려면 자각이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멈춰야 하는 때를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아름답다.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우리들은 이제 조연으로 물러나야 할 때다. ‘후배들이, 자식들이 잘해 낼 수 있을까?’하는 조바심이 들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과감히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과 에너지로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는 게 옳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같은 사건을 아이가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있어서 놀랄 때가 많다. 내가 아이를 위해 큰맘 먹고 한 일을 아이는 전혀 기억 못 하기도 하고, 반대로 나에겐 흔적조차 남지 않은 기억인데 아이에겐 뼈아픈 사건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 어렵다. 내가 준다고 해서 아이가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주지 않은 걸 아이가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가족아카데미아 회원인 동양화가 한 분이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제주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축하해 주려고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보고 있는데, 그림 속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차근차근 살펴보니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화가는 웃으며 말했다. “60년을 살면서 기억에 남는 60분의 얼굴을 그려 봤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이 그림은 선생님과 보육원 봉사를 할 때 찍은 스냅 사진을 참고해서 그렸어요.”축하하러 간 내가 되레 그림 선물을 받으며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졌는지 모른다. 자신의 환갑을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는 계기로 삼다니, 늘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을 밝혀 주던 그다운 잔치였다. 특별한 일, 재미있는 일 하나 없다고 지루하게 살지 말라. 찾아서 누리려고 하면 즐거운 일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대접받으려는 수동성이야말로 세상과 불화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인생의 재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런 태도가 결국은 인생을 정말로 재미있게 만든다.

2009년 유엔은 호모 헌드레드, 즉 100세 시대의 도래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2015년 ‘100세 시대 생애주기별 연령‘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7세까지 미성년, 17~65세까지 청년, 65세~79세까지 중년, 79~99세까지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 노인이다.

세상에 절대 선과 절대 악이란 없으며 선함 속에 악함이, 악함 뒤에 일말의 선함이 공존한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나쁜 결과로 끝나기도 하고, 나쁜 일이 전화위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모은 일엔 양면성이 존재하고, 사건의 결말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일까? 바로 목표를 중심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나이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한들 뭐하겠는가. 이제 와 박사학위를 딸 것도 아니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제 와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될 수도 없다.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자랑할 순 있겠지만, 노인의 자랑을 다소곳이 들어줄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어야 할까? 바로 순수하게 그 자체가 재밌어서다. 즉 목표의 결과가 아닌 과정의 즐거움 때문이다. 목표에서 과정으로, 타성에서 자발성으로의 전환. 그것이야말로 나이가 들면 한 번 쯤 거쳐야 하는 생의 과업이다.

나는 진정한 묘비명은 비석에 새겨지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죽음을 앞둔 어떤 사람들은 훗날 자신의 존재가 잊힐까 봐 두려워 묘비명에 생전의 직함이나 시구, 명문장을 새기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싶다고 하여 남겨지겠는가? 돌에 굳건히 새긴들 영원히 기억되겠는가. 우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진정한 흔적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가슴에 남기는 좋은 기억뿐이다.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나로 인해 사는 게 조금은 행복했었다고 말해 준다면, 그보다 값진 인생이 또 있겠는가.

나이 들어 화가 늘었다면 그 이유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나를 화나게 한 그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내 해석’이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사건에서 느끼는 감정을 분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한마디로 사건에 대한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하고, 상대의 말을 가감 없이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관계 속에서 편안해진다. 그리고 소중한 인간관계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제1의 요소다. 그러니 습관적인 화로 사람을 잃기 전에 돌이켜볼 일이다. 어떤 색안경이 당신의 삶과 관계를 갉아먹고 있는지를.

노년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외로움이다. 외롭지 않으려면 내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사람을 찾아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이든 함께하는 것이다. 여행을 하고 싶은가? 우선 동행을 구하자. 동행이 잘 안 구해지면 좋은 여행지를 찾아보자. 좋은 데 가자는데 거절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 머리를 굴리면 전국에 아는 사람이 몇 명은 있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만나면 누구에게 나줘 줄까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작은 거라도 나누는 데 의미가 있다. 어쨌거나 자기를 생각해 주는 사람을 마다할 이는 없는 법이다.

거창한 것을 나누려고 마음먹으면 별로 나눌 만한 게 없다. 거창하게 함께하려고 하면 늘 망설여진다. 차라리 내가 당장 하려는 일, 내가 당장 가지고 있는 것을 함께하고 나누는 게 나에게도 이로울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부담이 적다. 서로 부담이 적어야 다음에도 쉽게 함께할 수 있다. 이 작은 습관이야말로 내가 나이가 들어서도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나누기에 좋은 것, 좋은 시기는 따로 없다. 바로 지금, 내가 하려는 그 일을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나눔이다. 그리고 나눔이야말로 사람을 곁에 두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심리학자 앤서니 스토는 우리네 인생은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이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을 통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이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면서 성장하기도 하고 나를 희생하고 타인을 키우는 데에서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직 나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도 존재한다. 이런 상반되는 충동 사이에서 균형을 잃으면 인생이 전반적으로 우울해진다. 우리에겐 책임과 의무를 지혜롭게 이끌어 가면서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절실하다.

젊은 시절에는 인생을 뜻대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지가 충만했다. 노력한 결과가 나올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사는 과정이 즐거웠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내 인생은 거대한 우연과 수많은 인연의 힘으로 여기까지 이끌려 왔음을 알겠다. 그러므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한 번쯤 숙고해 볼 일이다. 이 정도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며, 내가 잘해서만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 서로가 촘촘히 얽혀 있는 세상에서 단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의식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간다. 거대한 생명의 흐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볼 때 인간은 겸손해지고, 비로소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다른 생명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불가에서는 물질이 아니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 한다.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씨, 친절한 행동, 착하고 어진 마음, 편한 자리를 양보하는 자세, 잠잘 곳을 제공해 주는 배려가 그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가슴을 따듯하게 만들어 준 베풂은 대부분 사소하고 섬세한 것들이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을 타인에게 베풀면 그 자체로 훌륭한 나눔이다.

더 많이 안다고 해서 더 나은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무모해질 수 있었고, 내가 선 자리가 어딘지 몰랐기에 끝까지 가 볼 수 있었다. 상처받을 줄 몰랐기에 돌진했고, 실패할 줄 몰랐기 때문에 도전했다. 만약 살아갈 날들을 미리 알고 있었대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웬만한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무기력에 빠져 우울한 날들을 보내지 않았을까.인간이 가진 최대의 무기는 무엇일까? 나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거라는 희망. 그것이 인간을 살게 한다. 그리고 희망이라는 감정은 ‘모른다’는 데서 출발한다. 오늘은 알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의지를 세우고 노력하면 미지의 내일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이런 희망의 감정이 인간을 분노와 좌절에 굴복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모른다는 것은 결코 나쁜게 아니다. 미래를 몰랐기 때문에 노력했고, 그 결과 지금에 이를 수 있었으므로.

사소하고도 소중한 추억들이 모여 인생을 빛나게 한다.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 당신이 포착한 오늘치 추억이 먼 훗날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좋은 추억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며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일상의 곳곳에서 즐거울 수 있다. 결국 남는 것은 행복했던 추억들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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