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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Science

과학혁명의 구조 by 토머스 새뮤얼 쿤

by hoyony 2019. 2. 16.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002. 11. 30
까치글방


http://zolaist.org/wiki 참조하였음

1. 서론 : 역사의 역할

과학의 역사를 세밀히 들여다본 최근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이 단순한 “축적에 의한 발전”으로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로, 새로운 발견의 시점을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소는 언제 발견되었는지, 에너지 보존을 처음 알아낸 사람은 누구인지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쿤은 “아마도 과학은 개별적인 발견과 발명의 축적에 의해서 발달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제기한다. 둘째로, 과거의 관찰과 믿음에서 “과학적인” 요소를 선대 과학자들이 “오류”와 “미신”이라 단언했던 것들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플로지스톤 화학, 칼로릭 열역학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러한 견해가 오늘날 수용된 견해보다 덜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오늘날보다 더 유별난 것도 아니다. 그러한 과거의 견해를 신화나 미신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도 우리의 과학자들은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과학에는 현재 우리가 과학으로 믿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까지 포함될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쿤을 포함한 과학사학자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시대에 뒤진 이론들이 폐기되어버렸다는 이유로 해서 원칙적으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과학의 발전을 증대의 축적적 과정이라고 보기가 어렵게 만든다.”

전문 분야의 공약에 변동이 생기는 비정상적인 에피소드들이 바로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들이다. 과학혁명은 전통준수적인 정상과학 활동을 보완하는 전통파괴적인 활동이다.

응용 범위가 얼마나 전문적이든 간에, 새로운 이론이 이미 알려진 것을 단순히 누적적으로 보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혹은 전혀 없다. 새로운 이론이 동화되기 위해서는 기존 이론의 재구축과 기존 사실의 재평가가 필요한데, 이는 본연적으로 혁명적인 과정이며, 한 사람에 의해서나 하룻밤 사이에 완결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과학사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이들에게 이 과정을 한순간의 독립된 사건으로 다루도록 종용하지만, 실제로 과학사학자들이 이 광범위한 과정의 정확한 시점을 확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2. 정상과학에로의 길

이 책에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은 과거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 ─어떤 한 과학자 사회가 일정 기간 자신의 진전된 활동(further practice)에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인정한 과학적 성취 ─ 에 단단하게 기반을 둔 연구 활동을 뜻한다. 오늘날 그러한 성취는 대부분 교과서 형태로 학습되지만, 이러한 교과서가 널리 퍼지기 전에는 과학 분야의 유명한 고전들이 교재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이러한 “저작들은 일정 기간 한 연구 분야의 적법한 문제와 방법을 다음 세대 학자들에게 암묵적으로 정의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두 가지 본질적인 특징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특징은 무엇일까?] 그들의 성취는 경쟁적인 과학 활동 방식으로부터 그룹을 떼어내 영속적인 옹호자 그룹으로 끌어당길 정도로 전례 없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성취는 재정의된 연구자 그룹이 풀어야 할 온갖 문제들을 남겨둘 만큼 개방적이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지닌 성취를 이제부터 ‘패러다임(paradigm)’이라 부를 텐데, 이 용어는 ‘정상과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3. 정상과학의 성격

패러다임은 문제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적법한 문제와 문제 풀이를 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패러다임은 우선 “전문가들 그룹이 시급하다고 느끼게 된 몇 가지의 문제를 푸는 데에 그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성공적이라는 이유로 그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훨씬 성공적이라는 말은 단일한 문제에 대해서 완벽하게 성공적이라든가 또는 많은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성공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패러다임의 성공은 당초에는 주로 선별적이고 아직은 불완전한 예제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성공의 약속일뿐이었다. 정상과학은 그런 약속의 실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실현은 패러다임이 특히 흥미롭다고 제시하는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 그런 사실들과 패러다임의 예측 사이에 일치 정도를 증진시키며, 패러다임 자체를 더욱 명료화시킴으로써 달성된다.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짜여지고 상당히 고정된 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넣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현상의 새로운 종류를 들춰내는 것은 결코 정상과학의 목적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 상자에 들어맞지 않는 현상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창안된 것들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정상과학 연구는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그러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요약> 패러다임은 분명 유례없는 성공 덕분에 패러다임이 되었지만, 그 성공은 적용 범위와 정확성 모두에서 한계를 지닌다. 사실 패러다임의 성공은 완전한 성공이라기보다 앞으로의 성공에 대한 약속에 가까우며, 정상과학이란 그런 약속을 현실화하는 ‘마무리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짜여진 상당히 고정된 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넣는 시도”로서, 새로운 것을 들춰내고자 하지 않으며,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결함은 과학의 발전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상당히 난해한 문제의 작은 영역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패러다임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렇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못했을 자연의 어느 부분을 상세히 깊이 있게 탐구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정상과학은 (i) 패러다임이 중요하게 다룬 사실들에 대한 정보를 확장하고, (ii) 그런 사실들과 패러다임의 예측 사이의 일치의 정확성을 증진시키며, (iii) 패러다임 자체를 더욱 명료화함으로써 달성된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정상과학의 사실적 탐구와 이론적 탐구에서 다루는 세 가지 문제 유형이 된다.

4.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쿨롱이 자신이 설계한 장치를 통해 전기력에 대한 역제곱 법칙을 발견했을 때, 그는 어떻게 그런 장치를 고안할 수 있었으며, 어째서 그 결과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는가? 또 쿨롱을 비롯한 동시대의 몇몇 사람들은 어떻게 그 법칙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패러다임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즉 패러다임 하에서의 연구는 “예기치 못한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규의 연구 문제를 결론으로 몰고 가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예측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은 갖가지 복합적인, 기기적, 개념적, 수학적 퍼즐 풀이를 요구한다. 이것을 해내는 사람은 퍼즐 풀이 선수로 밝혀지며, 퍼즐의 도전은 과학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하게 하는 무엇인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퍼즐이란 “풀이에서의 탁월성이나 풀이 기술을 시험하는 구실을 할 수 있는 문제들의 특이한 범주를 말한다.

만일 정상과학의 목표가 실질적인 주요 혁신이 아니라면(예측된 결과의 근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과학자로서의 실패라고 한다면), 도대체 왜 이런 문제들이 애초에 다뤄지는 것일까? 과학자에게는 적어도 정상연구에서 얻은 결과는 의미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패러다임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와 정확성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첫째, 퍼즐에는 해답이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이 존재한다.

둘째, 퍼즐은 게임의 규칙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18세기 내내 학자들은 뉴턴의 법칙으로부터 달의 관측된 궤도를 유도해내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어떤 학자는 뉴턴의 역제곱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이는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되고, 즉 그는 다른 퍼즐을 푼 것이 되어 버린다. 다른 과학자들은 1750년에 누군가 그것들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기 전까지 기존 규칙을 고수했다. 게임의 규칙 중 단 하나의 변화를 통해 대안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약> 정상과학을 퍼즐 풀이로 보게 되면 어떤 장점이 있는가? 첫째는 과학자들이 정상과학적 문제에 전념하는 이유를 (사회학적으로/심리학적으로) 설명해준다. 즉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풀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 그 풀이 방법이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에 (풀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여, 그 풀이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정상과학의 빠른 발전을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해답이 있는 문제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규칙 의존적인 정상과학의 특징을 잘 드러내준다. 이에 따르면, “[약속들의 공고한 네트워크]는 성숙된 경지의 전문 분야 연구자들에게 세계와 그의 과학이 둘 다 과연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규칙을 제공하는 까닭에, 연구자는 이들 규칙과 더불어 기존의 지식이 정의해주는 난해한 문제들에 확신을 가지고 집중할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퍼즐’과 ‘규칙’에 관한 논의는 정상과학의 중요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는 우리에게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과학의 전문 분야의 수행자들은 모두 어느 주어진 시대에서 거기에 집착할 수 있는 규칙들을 지닌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규칙들이 그 자체만으로 그 분야 전문가들의 활동에서 공유되는 모든 것을 규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상과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활동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 이것이 바로 이 에세이의 첫머리에서, 공유된 패러다임을 가리켜서 공유된 규칙, 가정, 견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상과학 전통이 지닌 일관성의 원천이라고 소개했던 까닭이 된다. 나는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그러나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5. 패러다임의 우선성

패러다임이 규칙 없이도 정상과학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칙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과학 교육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과학자들은 개념을 문제 풀이에 응용하는 것을 관찰하고 참여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지, 교재에 실린 불완전하지만 때로는 도움이 되는 정의들로부터 터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과정은 훈련 과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학생들이 푸는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전례에 의해 완전히 뒷받침되지 않는 것들이 생긴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들이 성공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전에 연습문제를 풀 때와 마찬가지로, 앞선 문제 풀이를 모델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아무리 문제를 잘 풀고 있는 과학자라도 자신이 어떤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지 잘 말하기 어려워한다. 그의 문제 풀이 능력을 설명하는 데 어떠한 규칙의 집합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패러다임을 통해 직접 좋은 문제를 골라내고 문제를 푸는 방법을 익혔을 뿐이다.

패러다임이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또 다른 근거는, 실제로 정상과학 시기의 과학자들이 규칙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규칙은 평상시에는 중요치 않다. 다만 그들을 묶어주었던 패러다임이 위협에 빠졌을 때에만 규칙이 패러다임을 대신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패러다임이 안전하게 지탱되는 동안에는 규칙이나 합리적 근거와 같은 것은 생각지 않아도 패러다임은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6. 변칙현상 그리고 과학적 발견의 출현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동화시키는 것은 이론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조정 이상을 요구하며, 그 조정이 완료되기까지, 즉 과학자가 자연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깨우치기까지 새로운 사실은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

발견의 시기를 확정하려는 시도는 어쩔 수 없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데,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발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복합적인 사건으로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지를 둘 다 확인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관찰과 개념화, 사실과 이론적 동화는 발견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때문에 발견은 하나의 진행 과정이며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관련된 개념적 범주들이 모두 미리 갖추어진 경우, 즉 현상이 새로운 유형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그에 대한 발견과 그것이 무언인지에 대한 발견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검토를 통해, 정상과학은 새로움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을 억제하는 경향을 띤 탐구임에도 불구하고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패러다임의 수용에 따른 전문화는 한편으로는 과학자의 시야를 크게 제한시키고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서 상당한 저항으로 작용한다. 다른 한편으로 패러다임이 주의를 집중시키는 그런 분야에서 정상과학은 다른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관찰-이론 사이의 엄청나게 정확한 일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한 (이론적 예측의 정확성을 높이고 실험장치의 정확성을 높이는) 노력이 없었더라면, 궁극적인 새로움을 이끈 결과들은 발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움은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변칙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배경 위에서만 나타난다.

7.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의 상황은 코페르니쿠스의 선언 이전에 하나의 스캔들이었다. 운동에 대한 연구에서 갈릴레오의 공헌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비판에서 등장했던 난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뉴턴의 빛과 색깔에 대한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전 패러다임 이론들 중 그 어느 것도 스펙트럼의 길이를 설명하지 못했음을 발겨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뉴턴 이론을 대치한 파동 이론은 회절과 편광 효과를 뉴턴 이론에 관련지으면서 변칙현상에 대한 과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발표되었다. 열역학은 19세기 두 기존 물리과학 이론의 충돌로부터 탄생하게 되었고, 양자역학은 흑체 복사, 비열 그리고 광전 효과를 둘러싼 갖가지 난제들로부터 탄생했다. 더욱이 뉴턴 이론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 변칙현상에 대한 인식이 매우 오래 지속되었고 아주 깊숙이 침투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분야들은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태라고 묘하사흔 것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대규모의 패러다임 파괴와 정상과학의 문제 및 테크닉상의 주요 변동을 요구하는 까닭에, 새로운 이론들의 출현은 대체로 전문 분야의 불안정함이 현저해지는 선행 시기를 거치게 된다.

첫째, 새로운 이론은 정상적 문제 풀이 활동에서의 현저한 실패를 본 후에야 비로소 출현했다.

둘째, 붕괴가 일어났던 문제들은 모두 오랜 세월에 걸쳐 인식되어 왔던 문제였다. 즉 위기로 이끈 문제는 애초에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나중에야 심각한 실패로 인식되었다.

셋째, 위기의 해법으로 등장하게 될 아이디어의 일부는 이미 존재했었다. 다만 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상황에서 무시되었을 뿐이다.

8. 위기에 대한 반응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며, 그 결정에 이르는 판단은 패러다임과 자연의 비교뿐 아니라 패러다임끼리의 비교라는 두 가지를 포함한다.

대안 없는 패러다임의 포기는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 과학자는 “자기 연장을 탓하는 목수”로 비춰질 것이다.

과학교육 방식은 반증 이론과는 다른 지적 근원을 가진 확증 이론을 강화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과학 교과서를 읽는 사람은 이론의 응용을 그 이론에 대한 증거, 즉 왜 그 이론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학도들은 증거 때문이 아니라 교사와 교재의 권위 때문에 이론들을 수용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응용 사례들은 증거로서 실린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현재 활동의 기초로서 패러다임을 익히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실린 것이다.

모든 위기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모호해짐과 더불어 그에 따라 정상과학의 규칙이 헤이해짐에 따라서 시작된다. 이 경우 정상과학적 해결, 미해결,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해결로 종결되는데, 세 번째 경우가 과학혁명으로 일컬어진다.

변칙이나 위기에 직면하는 경우, 과학자들은 현존 패러다임에 대해서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며, 그들 연구의 성격도 그에 따라서 바뀌게 된다. 경쟁적인 명료화의 남발, 무엇이든 해보려는 의지, 명백한 불만의 표현, 철학에의 의존과 기본 요소에 관한 논쟁, 이 모든 것들은 정상 연구로부터 비상 연구로 옮아가는 증세들이다.

9.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정치혁명은 기존 제도가 주변 환경에 의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시작되는데,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과학의 탐구를 주도했던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제 더 이상 적절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과학혁명은 그들이 받아들인 패러다임이 혁명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만 혁명 같아 보이면 된다. 그 밖의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발달 과정에서 정상적인 국면으로 보일 것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서 수용된 문제 풀이의 표본이다.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인은 필연적으로 상응하는 과학을 재정의 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 방법, 기준을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모두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와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서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어느 패러다임도 그것이 정의하는 모든 문제를 풀어낸 적이 없었고, 두 패러다임이 풀지 못한 문제들이 모두 같은 것도 아닌 까닭에, 패러다임 사이의 논쟁에는 항상 다음의 질문이 개입된다. 어느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가? 가치관에 대한 이런 질문은 총괄적으로 정상과학의 외부에 존재하는 기준에 의해서만 답을 할 수 있으며, 외부의 기준에 의존하는 것은 패러다임 사이의 논쟁을 가장 확실하게 혁명적으로 만들어준다.

10.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적-개념적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과학에서의 지각 변환의 사례들 : 천문학에서 천왕성 발견, 전기학에서 정전기적 반발의 인식, 화학사에서 산소의 발견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한 과학자는 해석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하다. 이전과 똑같은 무수한 대상들을 마주 대하고 그렇게 변함없는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대상들의 세부적인 것의 속속들이 변형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세계관 변화의 의미>

(1) 과학혁명 이후에는 많은 과거의 측정과 기기 조작이 무의미해지고 다른 것들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나 실험적 조작의 많은 부분은 이전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화되는 것일까?

하나의 동일한 조작이 다른 패러다임을 통해서 자연에 연결될 때에는 그것이 자연의 규칙성의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우리는 때로는 낡은 조작 방법이 그 새로운 역할에 의해서 상이한 구체적인 결과를 낳음을 알게 될 것이다.

(2)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존 실험 조작으로부터 새로운 규칙을 보게 만들었다.

돌턴의 화학적 원자론의 관점에서 일정 성분비의 법칙은 동어반복적인 것이 되었고, 구성 성분들이 일정한 비율로 결합되지 않는 반응들은 순수히 화학적 과정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단 돌턴의 연구가 받아들여지자, 그의 연구 이전에 실험으로는 확립될 수 없었던 법칙이 어떠한 한 벌의 화학적 측정으로도 뒤엎을 수 없는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동일한 화학적 조작이 화학적 일반화에 대해서 종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관련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3) 패러다임 변화는 숫자상 데이터 그 자체를 변화시켰다. 원자론에 맞지 않는 실험 결과 당연히 존재. 예컨대 구리의 두 가지 산화물에 대한 측정은 2:1이 아니라, 1.47:1이라는 산소 무게 비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잘 알려진 화합물의 조성비는 이후 원자론에 맞게 변화되었다. 즉 데이터 자체가 변화한 것이다. 이것이 혁명 이후 과학자들이 상이한 세계에서 일하게 된다고 말하는 마지막 의미이다.

11. 혁명의 비가시성

과학의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교과서와 같은 권위적 출처들이 혁명의 존재와 중요성을 위장

교과서의 특징 : (i) 이미 명료화된 문제, 데이터, 이론, 그리고 현재의 패러다임에 관해서만 논의 (ii) 과거의 과학혁명의 안정화된 결과를 기록하고, 현재의 정상과학 전통의 기반을 제공. (iii) 정상과학의 기반이 전문분야에 의해서 어떻게 인식되고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없음 (iv) 정상과학의 교육적 수단으로, 혁명을 거칠 때마다 새로 쓰여짐으로써 혁명의 역할 뿐만 아니라 존재까지 가려버림 (v) 과거의 성취는 현재의 패러다임에 기여하는 것만이 선택되거나 현재의 패러다임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변형된 방식으로 제시됨(교육의 목적상 이러한 방식은 잘못이 없지만, 과학이 일련의 발견과 발명에 의해 선형적으로 현재까지 발전한 것 같은 이미지 형성)

교과서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과학 활동의 시초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패러다임들 속에 구현된 특정 목표들을 향해서 진력해온 것이 된다. 흔히 건축에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에 비유되듯이, 과학자들은 당대의 과학 교과서 속에 제공된 정보 더미에 또다른 사실, 개념, 법칙, 또는 이론들을 하나씩 하나씩 추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전되어온 방식이 아니다.

보일의 사례 : 화학 원소의 현대적 정의를 최초로 제시한 사람이 아니다. 보일의 원소에 대한 ‘정의’는 전통적 화학 개념에 대한 재기술(paraphrase)에 불과하다. 시간, 에너지, 힘, 또는 입자와 마찬가지로 원소의 개념은 전혀 창안되거나 발견되지도 않는 그런 종류의 교과서의 구성요소이다. 특히 보일의 정의는 적어도 그 이전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그 이후로는 라부아지에를 거쳐서 현대의 교서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태곳적부터 현대적 원소 개념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12. 혁명의 완결

경쟁적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그들의 연구를 수행한다. 하나는 서서히 낙하하는 속박된 물체들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계속해서 운동을 반복하는 진자를 다룬다. 한쪽에서는 용액이 화합물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혼합물이다. 한쪽은 평평한 형태에, 다른 한쪽은 곡면 형태의 공간에 포함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두 그룹의 과학자들은 같은 방향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한 그룹의 과학자들에게는 증명될 수 없는 법칙이 다른 그룹에는 직관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경우가 생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서 충분히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려면, 한 그룹 또는 다른 그룹이 우리가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불러온 개정을 거쳐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패러다임 사이를 이행할 수 있는가?

과학자들은 개종을 많이 하지 않는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플랑크, 과학적 자서전)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 경험이다.” “정상과학의 옛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이 일생에 걸쳐서 벌이는 저항은 과학적 기준의 위반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의 성격 자체에 대한 지표가 된다.”

패러다임 논쟁에서 사용되는 효과적인 논증 : (i) 옛 패러다임을 위기로 이끌고 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논증 (ii) 옛 패러다임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의 예측할 수 있다는 논증 (iii) 적절함이나 심미적인 것에 대한 느낌에 호소하는 논증(옛 이론에 비해서 ‘보다 간결하고’, ‘보다 적합하고’, ‘보다 단순하다’)

13. 혁명을 통한 진보

경쟁 학파의 부재로 인해 정상과학의 진보를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 만약 어떤 분야에서의 발전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각 학파가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경쟁 학파의 존재로, 각각 서로 다른 학파의 기반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발전이 분명하고 확실해 보이는 것은 정상과학 기간에 한정된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는 과학자 사회는 그 연구의 결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볼 수가 없다.

경쟁 학파의 부재로 원리에 대한 끊임없는 재검토 요구로부터 해방되어, 현상의 가장 미묘하고 난해한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효율성과 능률이 증대된다.

일반 사회와의 단절로, 과학자 사회만의 공유된 기준에 맞추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정상과학기의 과학자 사회는 그 패러다임이 규정하는 문제나 퍼즐들을 푸는 데에 굉장히 효율적인 도구가 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발전일 수밖에 없다

혁명은 대립되는 두 진영의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식된다. 승리자의 관점에서, 승리의 결과는 발전일 수밖에 없다. 왜? 진보가 아니라면, 상대편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 또한 승리자들은 자기들 사회의 미래의 구성원들이 과거 역사를 자신들의 관점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도록 만들며, 때로 이는 역사의 왜곡을 초래하기도 함

모든 문명 가운데 그리스로부터 전승된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학적 생산 활동이 나타나는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했기 때문.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의 수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 사회는 혁명 과정에서의 일부 손실을 감수하지만, 그 손실에도 불구하고 과학자 사회의 성격은 과학에 의해서 해결되는 문제들의 목록과 각각의 문제 해결의 정확도가 둘 다 계속해서 증가하리라는 실질적인 보장을 제공한다.

과학자 사회의 어떤 특성이 이를 보장하는가? (i) 자연에 대한 세부적인 문제들에 관심. (ii) 문제의 풀이는 게임의 규칙이 공유된 과학자 사회에서 수용되어야 인정

과학적 성취의 단위는 해결된 문제로 이루어지며, 과학자 그룹은 어느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잘 알고 있음. 전문적 과학자 사회의 집단적인 패러다임 선택은 (a) 새로운 대안 패러다임이 다른 방식으로는 풀지 못한 두드러진 문제를 해결하는 듯이 보여야 하며, (b) 선행 패러다임의 문제 해결 능력의 상당 부분을 보전한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그 혁명의 결과는 문제 해결 능력의 증진이라는 의미에서 진보로 간주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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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토머스 쿤과 ‘과학혁명’

홍성욱/서울대학교 교수·과학기술사 comenius@snu.ac.kr

1922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태어난 쿤은 1940년에 하버드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는 3년 만인 1943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레이더 연구에 투입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그의 관심은 이미 고대 철학과 칸트 철학으로 기운 상태였다.

쿤은 당시 하버드대학교 총장 코넌트의 추천에 의해서 1948년 봄에 하버드대학교의 주니어 펠로로 임명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국방연구위원회의 의장을 지낸 코넌트는 전후 하버드의 교육개혁을 주도했는데, 그의 개혁의 핵심은 비자연과학 전공 대학생에게 자연과학의 핵심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수업을 위해 코넌트는 쿤을 조교로 고용했고, 쿤은 교재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과거 자연철학자들의 원전을 접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에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윤리학이나 인식론과 같은 철학에서는 지금 보아도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는 그렇게 ‘멍청해 보이는’ 설명을 고수했는가라는 것이었다. 갈릴레오와 뉴턴에 의해서 완성된 고전물리학을 배운 사람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은 정말 한심할 정도였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쿤은 1948년의 여름에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이 물체의 거리 이동만이 아닌 변화 일반을 포괄하는, 근대적 운동 개념과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운동을 이렇게 파악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이 무척 합리적으로 이해되었고, 더 나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17세기 갈릴레오의 물리학 사이에는 단순한 계단식 발전이나 오류의 교정이 아닌 혁명과 같은 단절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1962년에 출판된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발전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다. 쿤에 의하면 과학발전의 구조는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곧 과학자 사회가 자신들의 이론·연구를 가능케 하는 도구와 문제의 총체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면 이 과학 분야는 1)정상과학(노멀 사이언스) 단계에 들어간다. ‘퍼즐 풀이’로 특징지워지는 정상과학이 발전하다가 그 패러다임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인 변칙이 등장하면, 이러한 변칙은 2)위기의 단계를 낳는다. 위기가 지속되면 기존의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갑자기 등장하고, 두개 혹은 그 이상의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3)과학혁명의 단계에 접어든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제치고 과학자 사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면 4)새로운 정상과학의 단계가 시작된다. 곧 과학의 발전은 정상과학 → 위기 → 혁명 → 새로운 정상과학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보는 과학혁명은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세워지는 것 같은 사회적 혁명과 유사하다.

패러다임이 수립되면 과학자들에게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에게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는 방법을 주며, 어떤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지 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또 패러다임은 표준적 방법에 의해 중요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한다. 게다가 패러다임은 실험과 측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렇게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하고 측정값을 정교하게 하는 행위가 곧 쿤이 정상과학이라 지칭한 활동이다.

칼 포퍼 “쿤의 정상과학은 과학 모독”

그러므로 정상과학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정상과학에는 기존의 이론 체계를 부수고자 하는 도전의 정신이 없다. 이 점 때문에 과학의 발전을 과감한 추측과 논박의 연속으로 파악했던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쿤의 정상과학이 과학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정상과학이 혁명적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맛이 없는 보수적 작업이라면 왜 과학자들은 과학연구에 몰두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쿤은 정상과학을 퍼즐 맞추기에 비교했다. 퍼즐을 즐기는 사람은 그 문제에 답이 있고 따라서 언젠가는 이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재미를 느끼고 문제 풀이에 몰두하곤 한다. 이것이 정상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들의 경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었다.

정상과학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변칙적 문제를 만나면 위기의 국면과 과학혁명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변칙의 출현은 혁명의 전조인 것이다. 물론 한 두 개의 변칙이 출현한다고 항상 패러다임이 폐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패러다임은 이론 및 가정 일부를 변경하여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변칙들이 과학의 기본 틀까지 변경하는 것을 요구하면, 그 때 과학은 위기의 국면에 들어간다. 위기가 고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신구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혁명단계에 진입한다.

과거의 패러다임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이 더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새 패러다임의 미적 단순함 또는 아름다움과 같은 과학외적 요인에 끌렸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 전환은 점진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이 아니며 오히려 종교적 ‘개종’과 유사하다. 따라서 과학혁명 시기에는 철학적, 제도적, 사상적 요소들이 이론의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해석 때문에 쿤은 과학의 합리성을 무시한 상대주의자로 비난받았으며, 과학철학자와 임레 라카토스는 쿤의 패러다임 전환이 과학이론의 선택을 ‘군중심리’(몹 사이콜로지)로 환원했다고 하면서 쿤을 맹렬히 비판했다.

쿤의 저서에서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점은 두 패러다임의 비교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과 뉴턴 패러다임 사이에, 혹은 뉴턴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사이에 ‘공약 불가능성’(인커멘슈러빌리티)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공약 불가능성이란 두 패러다임이 같은 척도로 비교될 수 없다는 뜻인데, 실질적으로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쿤은 과학의 발전이 완벽한 진리를 향해서 한발자국씩 접근한다는 전통적인 과학의 진보 개념을 부정했다. 또 쿤의 철학에는, 과학이 자연에 존재하는 진리를 발견한다는 소박한 실증주의적 생각을 부정하는 요소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과학자들의 연구를 결정하는 패러다임은 과학자 공동체에서 만들어낸 것이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쿤 이전과 이후는 혁명적 변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이 절대 진리를 향해서 한발씩 접근하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믿음에 쐐기를 박고, 정상과학이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한 패러다임에 의해서 그 의미가 결정되며,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과학적 소통이 잘 되지 않고, 과학활동도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인간의 다른 활동과 다르지 않은 점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철학과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과 사회학 정치학 여성학과 같은 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과학을 보는 관점과 관련해서, 쿤 이전과 쿤 이후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의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환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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