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bout Science

양자혁명 by 만지트쿠마르

by hoyony 2018. 12. 15.

Quantum : Einstein, Bohr, and the Great Debate About the Nature of Reality


2014. 04. 03
까치
Manjit Kumar


양자원자가 인정을 받게 된 전환점은 1914년 4월에 독일의 젊은 물리학자 제임스 프랑크와 구스타프 헤르츠가 수행했던 실험이었다. 프랑크와 헤르츠는 수은 원자에 전자를 총돌시키는 과정에서 전자가 4.9eV의 에너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수은 원자에서 전자를 떼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의 측정에 성공했다고 믿었다. 독일의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보어의 논문을 일어본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에 그들의 실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보어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수은 원자를 향해서 발사된 전자가 4.9eV보다 낮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충돌하는 전자가 4.9eV 이상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전자가 그만큼의 에너지를 잃어버렸고, 수은 원자는 자외선을 방출했다. 보어는 4.9eV가 수은 원자의 바닥 상태와 첫 번째 들뜬 상태의 에너지 차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수은 원자의 첫 두 에너지 레벨 사이에서의 전자 도약에 해당했고, 두 레벨 사이의 에너지 차이는 정확하게 그의 원자 모형으로 예측되는 것이었다. 전자가 첫 에너지 레벨로 떨어져서 수은이 바닥 상태로 돌아오면 수은의 선 스펙트럼에서 발견되는 253.7나노미터 파장의 자외선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가진 양자가 방출된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서 서른 다섯 살 생일을 맞이하고 난 1914년 3월말에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이곳에는 지적 자극이 풍부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다”고 열을 올렸다. 플랑크, 네른스트, 루벤스와 같은 사람들이 가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혐오스러운” 베를린에 흥분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사촌 엘자 뢰벤탈이 바로 그 이유였다. 아인슈타인은 2년 전이었던 1912년 3월부터 열세 살의 일제와 열한 살의 마고트라는 두 딸을 가진 서른여섯 살의 이혼녀와 불륜을 시작했다. 그는 엘자에게 “나는 아내를 해고할 수 없는 고용원처럼 취급한다”고 말했다. 베를린으로 옮긴 아인슈타인은 아무 설명도 없이 며칠씩 사라져버렸다. 얼마 후에 그는 가족과 함께 살던 집에서 완전히 나와버렸고, 자신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 필요하다는 기막힌 조건들을 제시했다. 밀레바가 그 조건을 받아들이면, 그녀는 정말 고용원으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그런 고용원을 해고시키려고 작정을 했었다. 아인슈타인의 요구는 이랬다. “1. 내 옷과 세탁물은 잘 수선해서 정리해줄 것. 2. 내 방에서 규칙적으로 세 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해줄 것. 3. 내 침실과 서재는 언제나 깨끗하게 해주고, 특히 책상은 나 혼자 사용할 것.” 더욱이 그녀는 “모든 개인적 관계를 포기하고, 아이들 앞에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를 비판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밀레바에게 “1. 나에게 친밀감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지 나를 나무라지 말 것. 2. 내가 요구하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즉시 중단할 것. 3. 내가 요구하면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항의 없이 즉시 나갈 것”을 요구했다. 밀레바는 그의 요구에 동의했고, 아인슈타인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었다. 베를린으로 이사하고 3개월이 지난 7월 말에 밀레바와 아이들은 취리히로 돌아갔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경우처럼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크기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량 중심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뉴턴 물리학에서 서로 접촉하지 않은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신비스러운 원격작용의 힘이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은 큰 질량의 존재 때문에 생기는 공간이 아니라 태양의 거대한 질량에 의해서 공간이 휘어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물질은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 휘어진 공간은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알려준다.

아인슈타인은 오직 2개의 에너지 레벨만 가진 단순화된 보어 원자에서 전자가 한 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도약할 수 있는 3가지 방법을 알아냈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가 높은 에너지 레벨에서 낮은 에너지 레벨로 도약하면서 광양자를 방출하는 것을 “자발적 방출”이라고 불렀다. 그런 일은 원자가 들뜬 상태에 있는 경우에만 일어난다. 양자 도약의 두 번째 형식은 전자가 광양자를 흡수해서 낮은 에너지 레벨에서 높은 에너지 레벨로 도약하여 원자가 들뜨게 될 때 일어난다. 보어는 원자의 방출과 흡수 스펙트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형식의 양자 도약을 모두 사용했다. 그런데 이제 아인슈타인은 세 번째 형식인 “자극 방출”을 밝혀냈다. 자극 방출은 광양자가 원자에서 이미 들뜬 상태에 있는 전자에 충돌할 때 일어난다. 광양자를 흡수하여 “자극을 받은” 전자가 억지로 떠밀려서 광양자를 방출하면서 낮은 에너지로 도약한다. 40년이 지난 후에 자극 방출은 “복사의 자극 방출에 의한 빛의 증폭(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의 두문자로 만든 단어인 레이저(laser)의 기초로 활용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양자가 운동량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운동량은 에너지와 달리 크기는 물론 방향도 가지고 있는 벡터이다. 그러나 그의 공식에 따르면, 한 에너지 레벨에서 다른 에너지 레벨로 자발적 전이가 일어나는 정확한 시각과 원자가 광양자를 방출하는 방향은 완벽하게 무작위적이다. 자발적 방출은 방사성 시료의 반감기와 같다. 원자는 반감기라고 정해진 시간 안에 절반이 붕괴하게 되지만, 어느 원자가 언제 붕괴하게 될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자발적 전이가 일어날 확률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연에 맡겨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광양자가 방출되는 시각과 방향이 순전히 우연에 맡겨져 있다는 전이 확률의 개념은 자신이 개발한 이론의 약점이었다.

파울리는 원자물리학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론과 맞지 않는 실험 데이터가 나올 때마다 임기응변에 해당하는 가정을 도입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답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파울리는 몇 가지 원칙과 가정을 이용해서 이론을 구성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아인슈타인의 열렬한 팬이었다. 원자물리학에서도 그런 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던 파울리는 아인슈타인처럼 바탕이 되는 철학적이고 물리적인 원리를 구축한 후에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형식적인 수학적 세부 사항을 채우려고 노력했다.

뮌헨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던 하이젠베르크는 가장 작은 물질의 입자는 어떤 수학적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즈음에 그는 어느 교과서에서 끔찍한 그림을 보았다.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두 개가 이산화탄소 분자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그림이었다. 원자가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주는 고리와 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제 그는 원자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시각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버렸다. 그는 관찰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자가 한 에너지 레벨에서 다른 에너지 레벨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방출하거나 흡수되는 빛과 관련된 스펙트럼 선의 진동수와 세기처럼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 있는 양에만 집중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런 새로운 전략을 받아들이기 1년 전부터 파울리도 이미 전자 궤도의 유용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24년 2월 보어에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의문은 정상상태에 있는 전자의 궤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입니다”라고 했다. 이미 베타원리를 찾아내는 길에 들어서서 전자 껍질이 채워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파울리는 12월 보어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혔다. “우리는 원자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편견의 사슬에 묶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전자 궤도가 일상적인 역학적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가정도 그런 편견에 속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개념을 경험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타협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익숙한 고전물리학의 틀 안에서 양자 개념을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그만두어야 했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자유로워져야 했다. 과학은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만 하고, 오직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근거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의 신조를 진보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였다.

1926년 12월에 아인슈타인은 보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과성과 결정론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 자신이 점점 더 불안하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양자역학이 인상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 그것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들려요. 이론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지만, 정말 우리를 기존 이론의 신비에 더 가까이 데려다 준 것은 아니지요. 어쨌든 ‘나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He is not playing at dice)고 확신합니다.” 전선이 만들어지면서, 아인슈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운 돌파구를 위한 영감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양자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심오한 업적들 중의 하나인 불확정성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하이델베르크에게 관찰은 이론에서 사용되는 현상에 대한 가설이 포함된 복잡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했다. “관찰하는 현상이 우리가 사용하는 측정 장치에 어떤 사건을 발생시킨다고 했다. 그 결과로 측정 장치에서는 더 많은 과정들이 일어나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복잡한 경로를 통해서 우리의 인식에 감각적 인식을 발생시키고, 그 효과가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도록 한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효과는 우리의 이론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그리고 당신의 이론에서는 진동하는 원자에서부터 분광기나 눈까지 빛이 전달되는 전체 메커니즘이 우리가 언제나 믿어왔던 맥스웰 법칙에 따라서 일어난다고 가정한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것이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면 관찰 가능하다고 부르는 양들을 더 이상 관찰할 수 없게 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계속해서 ”따라서 관찰 가능한 양 이외에는 아무것도 도입하지 않았다는 당신의 주장은 당신이 만들고 싶어 하는 이론의 성질에 대한 가설일 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훗날 하이젠베르크는 ”나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인정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 때문이라고 믿었다. 전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전자 보기”에서 사용된 광자에 충돌한 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산란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인으로 파악한 것은 측정행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교란이었다. 그것은 양자역학의 기본 공식인 pq-qp=ih/2ℼ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설명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p×q가 q×p와 같지 않다는 비교환성에 감춰진 자연의 고유한 불확정성이었다. 전자의 위치를 알아내는 실험에 이어서 전자의 속도(운동량)를 측정하는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정밀한 값이 주어진다. 두 값을 함께 곱하면 그 결과는 A가 된다. 그러나 실험을 반대 순서로 수행해서 속도를 먼저 측정한 후에 이어서 위치를 측정하면 전혀 서로 다른 결과 B가 된다. 어떤 경우든 첫 번째 측정이 두 번째 결과에 영향을 주는 교란을 만들어낸다. 실험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교란이 없었다면 p×q와 q×p는 같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pq-qp가 0이 되면서 불확정성도 없고, 양자 세계도 없다.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pq-qp=ih/2ℼ로 주어지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pq-qp≥ih/2ℼ로 표현되는 불확정성뿐이었다. 그는 p와 q라는 물리적 의미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공식이 성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불확정성이라고 주장했다.

양자 영역에서 위치는 무엇인가? 하이젠베르크는 예를 들어 주어진 순간에 공간에서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서 설계된 구체적인 실험의 결과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단어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의 입장에서는 위치나 운동량을 측정하는 실험이 없으면 분명한 위치나 분명한 운동량을 가진 전자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위치를 가진 전자를 만들고, 운동량의 측정이 운동량을 가진 전자를 만든다.

“양자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양자역학적 설명이 있을 뿐이다.”

ㅡ 닐스 보어

“나는 여전히 실재에 대한 모형의 가능성을 믿는다ㅡ다시 말해서,

일어날 확률만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나타내는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ㅡ 알베르 아인슈타인

보어는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라고 주장했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는 과학에는 “우리 경험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그것을 정리하는 것”의 두 가지 목표가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물리학은 관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물리적 실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라고 말했다. 코펜하겐 해석으로 무장한 보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훗날 하이젠베르크가 말했듯이, 일상 세계의 대상과 달리 “원자나 기본입자 자체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이 아니라 잠재력이나 가능성의 세상을 형성할 뿐이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입장에서는 “가능성”에서 “실재”로의 전환은 관찰의 행위 과정에서 일어난다.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인 양자적 실재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 추구의 핵심이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논쟁은 물리학의 영혼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보어는 측정의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물리적 교란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입장에서 공개적으로 후퇴하고, 실재의 기준을 “양자 현상에 적용할 때의 필수적인 모호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는 교란을 근거로 아인슈타인이 과거에 주장했던 사고실험을 반박해왔다. 어떤 물리량을 측정하는 행위가 통제할 수 없는 교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다른 물리량의 정확한 측정을 배제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보어는 EPR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도전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의 사고실험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동시 측정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펜하겐 해석을 지속적으로 살펴보던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오는 압력을 느낀 보어는 과거처럼 교란에 의존하는 태도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교란이라는 말이 예를 들면 전자가 교란시킬 수 있는 상태에서 존재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보어는 측정되는 모든 미세 물리적 대상과 측정하는 장치가 구분할 수 없는 전체에 해당하는 현상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측정의 행위에 의한 물리적 교란이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보어가 EPR이 제시한 실재의 기존이 모호하다고 믿었던 이유였다.

EPR의 입장에서는, B의 운동량이 실재의 요소라면, 입자 A의 운동량 측정이 B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입자 B가 어떤 측정과도 상관없이 가지고 있는 운동량의 계산은 가능할 수밖에 없다. 입자 A와 B가 서로에게 물리적 힘을 작용하지 않는다면, 어느 하나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른 것을 교란시킬 수 없다는 것이 EPR의 실재 기준의 가정이다. 그러나 보어에 따르면 A와 B가 서로 떨어지기 전에 상호작용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단일 시스템의 부분으로 서로 얽혀 있게 되고, 두 개의 분리된 개별적인 입자로 취급할 수 없다. 따라서 A에 대해서 운동량 측정을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B에 대해서 직접적인 측정을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B도 확실한 운동량을 가지게 된다. 보어는 입자 A에 대한 관찰이 행해지더라도 입자 B는 역학적 교란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EPR과 마찬가지로 그도 원격에서 작용하는 밀거나 당기는 물리적 힘의 가능성은 배제시켰다. 그러나 입자 B의 위치나 운동량의 존재가 입자 A에 대한 측정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원격에서 순간적으로 작용하는 교란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A에서 일어나는 일이 순간적으로 B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국소성(locality)과 A와 B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다는 분리성(sparability) 모두에 어긋나는 것이다. 두 개념이 모두 EPR 논거와 관찰자의 독립적 실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견해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보어는 입자 A의 측정이 어ᄄᅠᆫ 식으로든지 순간적으로 입자 B에 영향을 준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그는 시스템의 미래 행동에 관련된 가능한 예측의 형식을 정의해주는 바로 그 조건에 미치는 이 신비스러운 영향의 본질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조건들이, 물리적 실재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이 적절한 현상에 내제된 고유한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저자들의 논거는 양자역학적 설명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결론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 보어의 결론이었다.

슈뢰딩거는 편지에서 EPR의 사고실험처럼 서로 상호작용을 하다가 분리되는 두 입자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려고 훗날 영어로 entanglement(얽힘)로 번역된 verschranku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슈뢰딩거도 보어와 마찬가지로 상호 작용을 햇기 때문에 두 개의 1-입자 시스템 대신에 하나의 2-입자 시스템이 존재하고, 따라서 한 입자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두 입자 사이의 떨어진 거리엗 불구하고, 다른 입자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그는 그해 말에 발표한 유명한 논문에서 나타나는 예측의 얽힘은 어느 정도 앞선 시각에 두 물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두 물체가 서로 상호작용을 했고, 서로에게 흔적을 남겼다고 했다. 서로 자신에 대해서 최대로 알고 있는 두 개의 분리된 물체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상황에 있다가 다시 분리되면, 내가 두 물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얽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규칙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에게 “실제 어려움은 물리학이 일종의 형이상학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물리학은 실재를 서술합니다. 우리는 실재에 대한 물리적 서술을 통해서만 실재를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물리학은 다름 아닌 “실재의 서술”이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런 서술이 “완전하거나 불완전할 수 있다”고 썼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슈뢰딩거에게 두 개의 닫힌 상자들 중 하나에만 한 개의 공이 들어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도록 요구했다. 상자의 뚜껑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관찰하기가 된다. 첫 번째 공이 들어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도록 요구했다. 상자의 뚜껑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관찰하기가 된다. 첫 번째 상자 속을 보기 전에는 상자에 공이 들어 있을 확률은 1/2이다. 그런데 상자를 열고나면, 확률은 1이거나 0 중 하나가 된다. 서술은 실재에 대한 완전한 설명일까? 그가 물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완전한 서술은 “공은 첫 번째 상자 속에 있다(또는 없다)”가 될 것이다. 상자를 열기 이전에 완전한 서술이 된다면, 그런 수술은 “공이 두 상자 중 하나에 있지 않다”가 될 것이다. 명백하게 어느 상자에 들어 있는 공의 존재는 두 상자 중 하나를 열 경우에만 확인된다. 아인슈타인의 결론은 “경험의 세계나 그것의 경험적 법칙 체계의 통계적 특성은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상자를 열기 이전의 상태는 확률 1/2에 의해서 완전히 서술되는가?

그런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두 번째 상자와 그 내용물이 첫 번째 상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분리성 법칙‘을 도입했다. 첫 번째 상자에 공이 들어 있는 것에 1/2의 확률을 부여하는 것은 실재에 대한 불완전한 설명이 된다.

보어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깨뜨릴 수 없는 연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눈먼 사람의 예를 들었다. 그는 질문을 던졌다. 눈 먼 사람과 그가 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경계선은 어딘가? 보어는 눈 먼 사람은 지팡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사용하는 지팡이가 그 자신의 확장이라고 주장했다. 세상은 눈 먼 사람의 지팡이 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 보어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눈 먼 사람의 촉감이 그의 지팡이 끝을 통해서 세상에 닿게 되고, 그래서 둘은 분리될 수 없도록 서로 결합되어 있다. 보어는 실험자가 미세 물리적 입자의 어떤 성질을 측정하려고 할 때에도 같은 일이 생기게 된다고 주장했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측정 행위를 통해서 단단하게 포옹한 상태로 뒤엉키게 되어 어디에서 하나가 시작되고, 어디에서 다른 하나가 끝나는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펜하겐 해석은 실재의 구성에서 인간이나 기계 장치이거나 상관없이 관찰자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모든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어서 양자역학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면, 어떻게 관찰자나 측정 기구가 우월한 지위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측정의 문제이다. 처음부터 거시적 측정 장치의 거시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코펜하겐 해석의 가정은 순환적이고 역설적인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오직 두 개의 가능한 스핀 상태, “스핀-업”과 “스핀-다운”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 봄이 수정한 EPR 실험에서는 스핀 0인 입자가 자발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전자 A와 B가 만들어진다. A와 B가 결합한 스핀은 최초의 입자가 가졌던 스핀 0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 전자가 스핀-업이면 다른 전자는 반드시 스핀-다운이 되어야만 한다. 두 입자 사이에 물리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멀리 떨어질 때까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후에 스핀 검지기로 개별 전자의 양자 스핀을 정확하게 같은 시각에 측정한다. 벨은 그런 전자쌍에 대해서 수행된 동시 측정의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관심이 있었다.

전자의 스핀은 X, Y, Z라고 부르는 서로 수직인 세 방향 중 어느 한 방향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이 방향은 모든 것이 움직이는 일상 세상에서 서로 직교하는 세 가지 방향, 좌우(X방향), 상하(Y방향), 전후(Z방향)와 같은 것이다. 전자 A의 스핀을 그 결로에 위치한 스핀 검지기로 x방향을 따라서 측정하면, 그 결과는 스핀-업이거나 스핀-다운이 된다. 두 경우에 결과가 이것일지 다른 것일지는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동전을 반복적으로 던지는 경우처럼 실험이 반복된다면 전자 A는 절반의 측정에서는 스핀-업이 되고, 나머지 절반에서는 스핀-다운이 될 것이다.

보어에 따르면, 측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자 A와 전자 B는 모두 어떤 방향으로 미리 정해진 스핀값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 대신 관찰되기 전에는 전자들이 동시에 스핀-업과 스핀-다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유령 같은 겹침 상태에 있다. 두 전자는 얽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스핀 상태에 관련된 정보는 ψ=(A 스핀-업, B 스핀-다운) + (A 스핀-다운, B 스핀-업)과 같은 파동함수로 주어진다. 전자 A는 그것을 결정하기 위한 측정이 A와 B로 구성된 시스템의 파동함수가 붕괴될 때까지 스핀의 x-성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붕괴가 일어나고 나면 비로소 스핀-업이나 스핀-다운이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얽힌 짝 B는 우주의 반대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반대의 스핀을 가지게 된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은 비국소적인 것이었다.

전자 A와 B를 측정하는 스핀 검지기를 평행으로 배열하면, 두 세트의 측정 사이에는 100%의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한 검지기에서 스핀-업이 측정될 때마다, 다른 검지기에서는 스핀-다운이 기록되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만약 두 검지기 중 하나를 약간 회전시키면, 두 검지기는 더 이상 평행이 유지되지 않는다. 이제 얽힌 전자쌍들의 스핀 상태를 측정하면, A가 스핀-업으로 발견되고, 그 짝인 B의 대응하는 측정에서도 스핀-업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두 검지기 사이의 방향 각도를 증가시키면, 상관관계도 줄어들게 된다. 검지기들이 서로 90도가 되고, 다른 실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과정에서 A가 x-방향으로 시핀-업이 되면, 이 경우의 절반에서만 B가 스핀-다운으로 나타나게 된다. 만약 검지기들이 서로 180도가 되면, 전자쌍의 스핀은 완전히 반상관적이 된다. A의 스핀 상태가 스핀-업으로 측정되면, B도 스핀-업이 된다.

벨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주어진 스핀 검지기 배열에서 전자쌍의 상관관계를 측정한 후에 배열을 바꾸어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면, 양자역학과 임의의 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의 예측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벨은 봄-수정 EPR 실험에서 얽힌 전자쌍 사이의 스핀 상관도의 한계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는 양자의 천상 세상에서는 양자역학이 대권을 장악하고 있을 경우에는 숨은 변수와 국소성에 의존하는 임의의 세계에서보다 상관 수준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벨 정리는 임의의 국소적 숨은 변수이론도 양자역학과 같은 정도의 상관관계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에서는 상관계수가 부르는 수가 –2에서 +2 사이의 값이 되는 스핀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그러나 스핀 검지기가 임의의 배열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양자역학은 상관계수가 벨 부등식으로 알려진 –2에서 +2의 범위를 벗어난 값을 예측한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아인슈타인이 강조하던 양자 세계가 관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물리적 효과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다는 국소적 실재를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벨은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실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끌어들였다. 반약 벨의 부등식이 성립한다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것이다.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보어가 승자가 될 것이다.

클로저와 프리드먼이 벨의 부등식을 시험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것은 1972년이었다. 그들은 전자가 바닥 상태에서 더 높은 에너지 레벨로 도약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칼슘 원자를 가열했다. 전자가 바닥 상태로 다시 떨어질 때는 두 단계를 거치면서 녹색과 청색의 서로 엉킨 한 쌍의 광자를 방출한다. 광자는 반대 방향으로 보내져서 검지기가 동시에 편광을 측정하게 된다. 첫 번째 측정에서 두 검지기는 서로 22.5도의 각도가 되도록 배열되었으나, 두 번째 측정에서는 67.5도가 되도록 다시 배열되었다. 클로저와 프리드먼은 200시간에 걸친 측정에서 광자의 상관 수준이 벨의 정리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과는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 있는 코펜하겐 해석에 유리했고, 아인슈타인이 지지하던 국소적 실재에는 불리한 것이었다.

벨은 오직 두 가지 가정을 사용해서 부등식을 유도했다. 첫째는 관계가 없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자가 측정되기 전에도 스핀과 같은 확실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국소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빛보다 빠른 영향은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저 멀리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아스페의 결과는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벨은 국소성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은 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관측하지 않더라도 세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벨의 정리는 아인슈타인과 국소적 실재를 위해서 조종(弔鐘)을 울렸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와의 만남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도전은 지속적이었고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보어의 주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아무도 이론과 해석을 구분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그의 주장은 봄, 벨, 에버렛과 같은 사람들에게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을 들여다보도록 평가하도록 했다. 물리적 실재의 본질에 대한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이 벨 정리에 숨겨진 영감이었다. 벨의 부등식에 대한 실험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양자 암호학, 양자 정보이론, 양자 컴퓨팅을 비롯한 새로운 연구 분야의 탄생을 도왔다. 이들 새 분야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얽힘 현상을 이용하는 양자 공간 이동이다.

1900년 12월에는 고전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고, 거의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스 플랑크가 우연히 양자를 만나게 되었고,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의식적인 고민으로도 자신이 양자를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희곡작가이며 철학자였던 고트홀트 레싱의 말을 위한 삼아서 마지막까지 노력을 계속했다. “진실에 대한 열망은 진실에 대한 확실한 소유보다 더 소중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고로 찾은 자료


■ 흑체복사 (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플랑크는 1894년 흑체복사 문제를 주목하고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가족들의 불평을 사면서까지 물리학자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플랑크는 빈(Wilhelm Wien)의 ‘흑체복사 강도의 분포’ 공식에 주목했습니다. 실험물리학자인 빈은 기존의 이론을 적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실험에 근거한 공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빈의 공식은 진동수가 큰 부분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했으나 진동수가 작은 부분에서는 실험값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John William Rayleigh)와 진즈(James Jeans)가 이론적으로 도출한 공식은 파장이 긴(진동수가 작은) 부분에서는 정확히 일치했으나 파장이 짧은(진동수가 큰) 쪽에서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으로 불리는 현상입니다.

플랑크는 어느날 ‘이 두 공식을 결합하면 정확한 공식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시도와 오류를 거쳐 1900년 10월 중순 플랑크는 드디어 흑체복사의 강도 분포식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빈의 공식의 분모에 단지 ‘-1’을 추가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두고 일설(양자전기역학 연구로 리처드 파인먼, 줄리언 슈윙거와 함께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도모나가 신이치로 박사가 간담회에서 언급했다는 설)에는 플랑크의 제자가 “교수님, 빈의 공식 분모에서 1을 뺐더니 실험과 꼭 일치하는 식이 되는데요.”라고 말해 그대로 해보았더니 정말로 맞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플랑크의 공식은 그의 성실성과 끈기로 볼 때 집념 어린 노력의 산물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루벤스는 즉시 이 공식을 자신의 실험 자료와 검토해본 결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용기를 얻은 플랑크는 그때까지 단지 수학적인 제안에 불과했던 자신의 공식에 대한 이론화 작업에 들어가 역시 성공했습니다. 플랑크는 그해 12월 14일에 열린 베를린 물리학회의 역사적인 모임에서 흑체복사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과학계는 이날을 양자물리학의 탄생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플랑크가 흑체복사 문제를 해결한 이론의 핵심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그는 흑체로부터 방출되는 전자기파의 에너지가 극히 작은 알갱이들, 이른바 ‘에너지 양자’의 형태로 방출된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특정 진동수의 빛이 지니는 에너지의 값은 그 '진동수(ν)에 작용양자(플랑크 상수 ℎ)를 곱한 값'(ℎν = 에너지 알갱이, 양자)의 정수(n)배만 가질 수 있다.’(E= nℎν)고 가정한 것입니다. 그는 이를 ‘양자 가설 quantum hypothesis’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소 덩어리라는 의미의 양자(quantum)란 용어가 물리학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양자 가설에 따르면 에너지는 이 최소 덩어리의 정수배에 해당하는 값만 가질 수 있으며, 기본 덩어리의 0.3배, 1.7배와 같은 값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플랑크는 이처럼 과감한 가설을 바탕으로 흑체에서 방출되는 ‘무한대의 에너지’라는 터무니없는 값을 유한한 값으로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다면 물리학계의 숙원을 해결하며 양자론을 촉발시킨 플랑크의 논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에너지의 최소 단위는 에너지를 가진 전자기파의 진동수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에너지의 최소 단위인 양자의 크기는 전자기파의 진동수에 비례합니다. 진동수가 크면 에너지 양자가 크고, 진동수가 작으면 양자가 작다는 뜻입니다.

플랑크의 가설에 따르면 용광로(흑체)에서 나오는 전자기파들이 운반하는 에너지를 계산하는 방식은 19세기의 물리학이론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19세기 물리학의 성공적인 이론 중 하나인 열역학이론의 ‘에너지 등분배 법칙’에 의하면 특정 온도로 달구어진 용광로나 도자기(흑체) 속에서는 모든 진동수의 전자기파들(엄밀히 말하면 각 전자기파의 자유도)이 각기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운반합니다. 즉, 특정 온도에서 방출되는 모든 진동수의 전자기파들에게 일종의 ‘책임량’이 일괄적으로 할당되어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플랑크의 양자 가설에 의하면 전자기파가 운반할 수 있는 에너지 양자는 진동수에 비례합니다. 진동수가 작은 전자기파가 1원짜리 동전(양자) 꾸러미라면 진동수가 큰 전자기파는 100원짜리, 500원짜리 동전(양자) 꾸러미에 비유할 만합니다.

자, 그렇다면 최소 단위 에너지, 즉 에너지 양자가 자신에게 부과된 할당량을 초과할 만큼 큰 진동수를 가진 전자기파(짧은 파장)들은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진동수가 작은 전자기파들은 에너지 양자가 작기 때문에 여러 개의 양자를 운반함으로써 할당량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동수가 매우 커 에너지 양자 한 개가 이미 할당량을 넘어서는 전자기파들은 에너지 운반에 전혀 기여하지 못합니다. 곧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정 온도의 용광로(흑체)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의 에너지 할당량이 400원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물론 온도가 높아지면 할당량은 많아지게 됩니다. 에너지 양자가 1원짜리인 전자기파는 양자 400개를 매달고 운반하면 됩니다. 에너지 양자가 100원짜리인 전자기파는 4개의 양자 꾸러미를 실어 나르면 임무를 완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너지 양자 하나가 500원짜리에 해당할 정도로 진동수가 매우 큰 전자기파는 양자 한 개만 해도 할당량을 넘게 됩니다. 플랑크 가설에 의하면 이런 전자기파는 아예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기파는 진동수에 비례하는 최소단위 에너지 양자로만 에너지를 운반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이치로 도자기(흑체) 내부의 에너지에 기여할 수 있는 전자기파의 개수가 유한하게 줄어들고, 따라서 방출되는 전체 에너지양도 유한한 값이 되는 것입니다. 전자기파의 진동수가 클수록 그 전자기파가 갖는 최소 단위 에너지(양자)가 커지기 때문에 에너지 할당량 운반에 기여하는 전자기파의 갯수가 제한되고 이에 따라 방출되는 에너지 총합은 항상 유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고전 열역학에서는 모든 진동수의 전자기파는 특정 온도에서 동일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가정했고, 흑체 내부에서 발생되는 전자기파의 숫자가 무한대이기 때문에 방출되는 에너지 총합이 무한대라는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은 결과적으로 연속적인 맥스웰의 전자기학과 불연속적인 기체분자(원자)를 가정한 볼츠만의 열역학이론을 조화시킨 것입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뉴턴역학과 맥스웰 전자기학의 충돌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특수상대성이론을 창안한 것에 비견됩니다.

플랑크는 그해 늦가을 정열적인 검토를 마친 뒤 결국 이외에 어떤 다른 가능성도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는 아들과 숲길을 산책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 같은 생각이 뉴턴의 발견에 버금가는 위대한 발견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완벽한 허구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일 것이라는 생각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플랑크는 이때 이미 자신의 가설이 고전물리학의 기초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는 점을 예감한 듯합니다. 그러나 매우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플랑크는 이 결과를 스스로 믿지도, 만족해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은 흑체복사의 ‘무한대 에너지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의 계산 결과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실험값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플랑크는 자신이 도입한 상수 값을 조절하여 임의의 온도에서 생성되는 도자기 속의 에너지양을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상수는 레일리-진즈 공식과 빈의 공식에 나타나는 볼츠만 상수 k와 빈이 자신의 공식에 도입한 상수 베타(β)의 곱입니다. 이 상수의 단위는 일정 시간 동안 가해지는 에너지 즉, ‘에너지 × 시간’(Joule sec)로서 일정한 작용(action)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플랑크는 이를 작용의 가장 최소 단위라는 뜻으로 ‘작용양자(elementary quantum of action)’라 명명했습니다.

플랑크가 새로운 불연속적인 양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한 ‘양자 quantum(복수형 quanta)’란 단어는 ‘얼마나 많은(how much)’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따왔습니다. 작용양자는 후에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플랑크 상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기호로는 ℎ(영어로 에이취, 라틴어·독일어로 '하'로 읽음) 혹은 이를 2π로 나눈 ħ(하바로 읽기도 하지만, 영어로 '에이취 바', 독일어로 '하 크베어'로 읽음)로 표시합니다.

플랑크 상수 ℎ는 에너지 최소 단위와 전자기파의 진동수 사이의 비례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자연상수입니다. 이 상수는 우리 주변이나 먼 은하계에서 동일하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습니다. 빛의 속도 c나 중력상수 G도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플랑크 상수는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상수의 10억×10억×10억 분의 1 정도(6.626×10⁻³⁴joule sec)인, 너무나도 작은 값입니다. 플랑크 상수가 이렇게 작다는 것은 곧 에너지 최소 단위 즉, 양자가 엄청나게 작은 양임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실생활에서 에너지가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플랑크 상수와 양자의 발견은 흑체복사 문제 해결에 그치지 않고 물리학과 자연관의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물리학계는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수용하기를 주저했습니다. 그 이유는 플랑크가 비록 물리학계의 난제였던 흑체복사 문제를 해결했지만 양자 가설이 자연관의 전환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플랑크 자신도 작용양자를 선뜻 인정하기 어려워 양자 가설을 동원하지 않고 기존 복사설과 조화시키려고 무던히 애썼으나 실패했을 정도입니다.

‘양자 가설’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사실과 잘 들어맞긴 했지만, 플랑크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에너지가 불연속적인 값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에너지는 ‘불연속적인 에너지 양자’의 형태로 방출, 흡수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의 물리학의 영역에 접목될 수 없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작용양자, 다시 말해 플랑크 상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연이 연속적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작용양자는 더는 분할될 수 없는 한계를 설정했고, 따라서 우리는 0과 플랑크 상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말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가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져 있다고 2000년 넘게 믿어왔던 인과율도 이제는 신성시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요? 결국 작용양자는 세계를 인과적으로 서술하는 데 대해 한계를 분명히 제시한 셈입니다. 이에 따라 직관과 경험으로 형성되어온 인과론적이고 기계론적 우주관과 세계관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 제이만 효과 (스핀의 과학, 이강영 교수)

1890년에 로런츠의 조수로 있던 제이만은 빛과 자기가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하는 자기광학이라는 분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이만의 우상 중 하나는 영국의 위대한 실험가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여서 늘 패러데이의 책을 읽으며 영감을 얻곤 했다. 자성과 빛의 관계 역시 패러데이가 연구했던 분야였다. 그가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빛이 물질과 상호작용을 할 때, 자성이 있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하는 점이었다. 특히 편광된 빛이 자성을 띤 물체에 반사되면 편광의 방향이 회전하는데 이를 커 효과(Kerr effect)라고 부른다. 제이만은 커 효과를 연구해서 오너스를 지도교수로 1893년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트륨의 스펙트럼과 자성과의 관계를 연구해 보았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제이만은 이 실험을 중단하고 한동안은 잊고 있었다.

얼마 후 제이만은 [패러데이의 삶에 대한 맥스웰의 소묘]라는 책을 읽고 패러데이도 자기장으로 나트륨의 스펙트럼에 대해 연구했음을 알았다. 패러데이 역시 1860년에 이 실험을 했으나 새로운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했던 것이다. 제이만은 패러데이가 사용했던 프리즘보다 더 발전된 프라운호퍼의 격자분광계를 이용해서 실험을 다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1896년 8월에 제이만이 하고 있던 일이 바로 그런 실험이었다. 제이만은 전자석 사이에 놓은 분젠 버너의 불꽃에 소금을 묻힌 석면 조각을 넣어서 나오는 복사선을 관찰했다. 이것은 소금 속 나트륨의 스펙트럼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제이만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전자석의 스위치를 켜자 선명했던 스펙트럼 선이 살짝 퍼져서 두꺼워지는 것이었다. 전자석의 스위치를 끄자 스펙트럼 선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제이만은 방금 관찰한 현상이 정말 맞는 건지 확인하려고 주의 깊게 실험을 반복했다. 분젠 버너 대신 가스등의 불꽃으로 실험을 하고, 다음에는 나트륨 대신 리튬을 이용해서 같은 실험을 했다. 어느 경우에나 전자석의 스위치를 켜면 스펙트럼 선은 뚜렷하게 두꺼워졌다.

빛이 자기장 속을 지나가면 퍼지는 것일까? 아니면 물질이 자기장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일까? 제이만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조사해 보았더니 1892년에 프링셤(Ernst Pringsheim Sr., 1859-1917)이 같은 현상을 보고했음을 알았다. 자기장이 있으면 불꽃의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따라 온도나 물질의 밀도 같은 것이 미세하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제이만은 이런 효과를 배제하기 위해 더 복잡한 실험을 계획했다. 전자석의 두 극 사이에 자기장의 방향과 수직으로 도자기로 만든 관을 설치하고, 관 안에 나트륨 조각을 넣은 다음 투명한 뚜껑을 관 양쪽 끝에 씌웠다. 분젠 버너를 켜면 관의 온도가 올라가게 하고, 전등 빛은 거울을 이용해서 관 전체를 가로지르도록 했다. 분젠 버너의 불꽃으로 나트륨이 기화하기 시작했다. 이 실험을 통해 제이만은 두 줄의 선명한 나트륨의 D선을 얻었다. 이 장치에서는 나트륨의 증기 밀도가 관의 위치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스펙트럼 선의 두께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제이만이 전자석의 스위치를 켜자 스펙트럼 선은 역시 두꺼워지고 흐려졌다. 전자석의 스위치를 끄자 스펙트럼 선은 다시 처음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하고도 제이만은 여전히 스펙트럼 선의 변화가 순전히 자기장의 직접 효과인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자기장이 관 속의 증기 밀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 이를 검증하기 위해 제이만은 더 가는 관을 쓰고, 관을 가열하는 동안 회전시킴으로써 관의 위치에 따른 온도차를 없애 보았다. 그러나 자기장이 스펙트럼 선을 흐리고 두껍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제이만은 자신의 결과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기장은 원자의 스펙트럼 선을 두껍게 만든다, 즉 자기장이 원자에서 나오는, 혹은 원자가 흡수하는 복사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해 10월의 어느 토요일에 제이만은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오너스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옆에서는 로런츠가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로런츠는 돌아가서 몇 가지 계산을 해보고, 다음 주 월요일이 되자마자 제이만을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전자기 복사 이론을 적용하면 제이만이 관찰한 것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런츠의 복사 이론은 모든 물질 속에는 전기를 띤 작은 입자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 입자의 운동에 의해서 물질의 전기적인 성질과 광학적인 성질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원자의 선 스펙트럼을 이루는 전자기 복사선이란 이 입자가 진동해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자의 선 스펙트럼으로부터 입자의 진동을 정할 수 있고, 원자의 내부 상태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제이만의 실험처럼 원자가 자기장에 들어가면 입자의 진동이 자기장의 영향을 받아서 달라지므로 스펙트럼 선의 파장이 변하게 된다. 로런츠의 예측에 의하면 진동하는 입자의 전하는 (-)이며 수소 원자보다 천 배나 가벼워야 했다. 이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로런츠는 이때 이미 사실상 전자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톰슨이 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기 전의 일이다.

로런츠의 전자 이론의 원형은 1875년 발표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부터 나타난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서 로런츠는 전자 이론을 발전시켰다. 로런츠는 이 입자를 ‘전기분해의 이온(ions of electrolysis)’이라고 불렀는데, 제이만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면서 이 개념은 차츰 우리가 알고 있는 전자의 개념에 가까워져 갔다. 실제로 제이만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로런츠의 이론으로 설명하면서 로런츠의 ‘이온’의 전하 대 질량비를 계산했는데, 이는 몇 달 뒤 톰슨이 측정한 결과와 비슷한 크기였다.

제이만은 더 자세한 실험을 했다. 1897년에, 이번에는 나트륨이 아니라 카드뮴으로 실험을 하며 카드뮴의 푸른 스펙트럼 선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스펙트럼 선은 두꺼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이었던 것이 여러 개의 선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자기장이 세면 셀수록 스펙트럼 선이 더 크게 갈라졌다. 이 모든 것은 로런츠의 이론에 잘 부합하는 결과였다. 이렇게, 제이만이 발견한, 자기장 속에서 원자의 선 스펙트럼이 갈라지는 현상을 제이만 효과(Zeeman effect)라고 부른다. 제이만 효과는, 선 스펙트럼에 더해 원자의 내부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제이만과 로런츠는 이 업적으로 1902년에 제2회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사실 모든 제이만 효과가 로런츠의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었다. 원자에 따라서 스펙트럼 선이 갈라지는 양상은 여러 가지였는데, 어떤 스펙트럼 선은 두 개로, 어떤 선은 세 개로 갈라졌고, 나중에 보듯 그 이상으로 갈라지는 것도 있었다. 홀수 개로 갈라지는 현상은 로런츠의 이론으로 거의 설명되었지만, 짝수 개로 갈라지는 현상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런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경우를 정상 제이만 효과(normal Zeeman effect), 설명할 수 없는 경우를 비정상 제이만 효과(anomalous Zeeman effect)라고 불렀다.

■ 양자도약(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러더포드가 1911년 알파입자 산란을 통해 원자핵을 발견한 것은 원자 연구의 큰 걸음이었습니다. 원자는 작지만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자핵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도는 모양,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태양계 모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러더포드 원자모형은 태양계로 비유되고 ‘태양계 원자모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곧 원자에 대한 새로운 의문들을 던져주었습니다.

전자는 원자핵 주위를 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기적인 인력에 의해 전자가 원자핵에 끌려들어가 붙어버릴 테니까요. 전자가 원자핵에 붙어버린다는 것은 원자의 찌그러짐, 곧 물질의 찌그러짐 뜻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자는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에 의해 회전운동하는 전자는 빛을 방출해야 합니다. 따라서 빛의 방출하고 나면 전자의 에너지는 그만큼 줄어들고 결국 원자핵에 끌려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원자는 찌그러져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열을 받은 원자는 빛을 내긴 합니다. 따라서 전자가 원자 속에서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러더포드 모형에 의하면 원자가 회전하면서 점점 운동에너지를 잃기 때문에 방출하는 빛은 연속스펙트럼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 단색광으로 이루어진 불연속적인 선스펙트럼인 것입니다.

도대체 전자가 어떤 상태로 돌고 있기에 원자가 안정상태를 유지하며, 또 선스펙트럼의 빛을 방출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1911년 이후 원자 연구를 둘러싼 물리학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닐스 보어가 1013년 기상천외한 처방을 제시했습니다. 이 처방의 핵심은 전이(transition) 혹은 양자도약(quantum jump)입니다. 이론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원자의 안정성과 방출되는 빛(선스펙트럼)의 현상에 끼워 맞춘 응급처방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전자가 핵 주변을 돌더라도 특정 궤도를 돌 때는 빛을 방출하지 않고, 전자가 궤도와 궤도를 뛰어 이동할(quantum jump) 때 특정 파장의 빛을 방출한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보어의 응급처방은 당시 고전물리학으로부터 유도될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의 탁월한 물리적 직관이 발휘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보어가 러더포드 원자모형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보어 원자모형을 제시하는 사고의 과정을 짚어보겠습니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출발점은 지금까지의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경이(驚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물질의 안정성이었네.”1)

뉴턴역학에 의하면 태양계는 다른 항성계와 충돌할 경우 절대로 원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태양계와 비슷한 형태를 가졌다고 생각된’ 원자(러더포드 원자모형)는 인접한 원자들과 상호작용을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어는 말하는 것입니다.

보어는 러더포드 원자모형이 설명하지 못한 원자의 안정성과 선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감한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①원자 안에서 전자는 정해진 궤도만을 회전한다. 이 같은 정해진 궤도를 회전할 경우 전자는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하지 않는다. 원자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경우를 정상상태(stationary state)라고 한다. 즉, 원자는 일정한 불연속적인 에너지 상태(정상상태)를 갖는다.

②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전이할(transition or quantum jump) 때 원자는 단색광 형태로 에너지를 불연속적으로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빛의 진동수는 두 궤도의 에너지 차이에 비례한다. υ=E/h=(E1-E2)/h. (υ = 방출되는 빛의 진동수, E1= 첫 번째 궤도에 있는 전자의 에너지, E2=두 번째 궤도에 있는 전자의 에너지, h=플랑크 상수).

③전자가 원 궤도 운동을 할 경우 전자의 운동량은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로 한정된다. 즉 전자의 각운동량(궤도반경 r × 운동량)은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를 2π로 나눈 값이다. (각운동량 L=nh/2π, 보어의 양자조건, quantization postulate).

④전자가 안정된 궤도를 돌고 있을 때(정상상태), 전자의 행동은 고전역학의 법칙을 따른다(대응원리).

보어의 이들 가정은 어느 것도 고전물리학에서 유도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어가 아무렇게나 가설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보어는 원자의 안정성과 원자가 방출하는 선스펙트럼 등 원자의 현상에 주목하고 이 현상에 플랑크의 양자 가설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적용했습니다.

보어는 수소원자 선스펙트럼의 규칙성을 발견한 스위스 수학자인자 물리학자인 발머(Johann Jakob Balmer)의 발머계수에 주목했습니다. 수소원자의 선스펙트럼은 빨강 파랑 감색 자주 등 4가지인데, 그 파장을 조사해 어떤 규칙성을 찾았습니다다. 즉, 이들 파장의 비율은 ‘정수’와 깊은 관계를 보였습니다.

발머계수는 러더포드 모형으로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러더포드 모형이 맞다면 수소원자 스펙트럼은 연속스펙트럼이 돼야 했습니다. 결국 보어는 발머계수에 대한 분석과 플랑크의 양자 가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바탕으로 이 같은 대담무쌍한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보어 모형에 따르면 전자가 정해진 궤도를 돌고 있을 때는 빛을 방출하지 않습니다. 이를 보어는 ‘정상상태(stationary state)’라 이름 붙였습니다. 전자의 에너지는 바깥쪽의 궤도를 돌 때 높고, 안쪽 궤도에서는 낮습니다. 전자가 궤도를 바꾸는 것을 전이(transition)라고 하는데, 높은 궤도에서 낮은 궤도로 전이할 때 그 에너지 차이만큼 전자기파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보어의 가설 ③을 구체화한 것이 보어의 양자 조건입니다. 이것은 ‘전자의 운동량에 궤도 한 바퀴의 길이를 곱한 것이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에 한정된다.’(L=nh/2π)는 것입니다. 즉 전자의 궤도반경은 플랑크 상수를 포함한 최소 단위(양자)의 정수배와 비교한 수치 즉, 일정한 간격을 가진 불연속적인 값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전자가 최저 궤도(보어 반경)를 돌 때 그 에너지가 최저이며 결코 그 이하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어는 이 양자 조건에 의해 전자가 원자핵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원자모형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보어는 또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광양자의 에너지는 플랑크상수와 진동수의 곱)에다 가설 ②를 조합하여 원자가 방출한 빛의 진동수에 대한 관계식을 정립했습니다. 즉, 전자가 표면의 궤도로부터 내부의 궤도로 옮길 때 전자가 방출한 빛의 진동수는 전자가 각각의 궤도에 있었을 때의 에너지의 차이를 플랑크상수로 나눈 값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어의 진동수 조건’이라고 불립니다. 보어는 이를 통해 발머계수의 각 파장과 진동수를 정확히 유도해낼 수 있었습니다.

원자에 대한 의문, 즉 ‘원자가 열을 받으면 빛을 내며, 그 빛은 하필이면 왜 발머계열처럼 특 정한 파장(진동수)의 선스펙트럼을 보이는가?’ 하는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어의 원자모형을 요약하면 전자는 일정 궤도만을 가질 수 있고, 그 궤도를 돌 때는 안정상태를 유지하나, 다른 궤도로 전이할 때만 빛을 흡수 또는 방출한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안정궤도를 돌고 있을 때(정상상태), 전자는 고전물리학 이론에 따라 행동한다’는 보어의 가설 ④는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고 불립니다. 보어는 전이 현상을 고전역학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 가설을 통해 양자이론을 고적역학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보어가 대응원리를 착상한 것은 전자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전역학(맥스웰의 전자기이론)에 의하면 전자가 회전하면서 내는 빛은 전자의 궤도와 궤도를 회전하는 진동수와 진폭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보어가 가정한 궤도 간의 전이에 의해 방출되는 빛은 이상하게도 전자의 궤도와 진동수를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소원자 에너지 준위의 크기는 궤도 수 n(정수)의 제곱에 반비례하므로 궤도 상태 수 n이 매우 클 때는 궤도 간의 에너지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전자가 높은 궤도에서 바로 그 아래 궤도로 전이할 때는 빛을 내지만 고전역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전할 때 빛을 방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보어는 여기서 대응원리라는 개념을 착안한 것입니다.

고전역학적인 복사(빛의 방출)와 보어 원자모형에서 궤도 전이에 의한 복사는 과정이 전혀 다르지만 궤도 수가 클 때는 결과적으로 복사의 진동수 값이 거의 같습니다. 그는 이 방법을 이용해 양자화된 수소 에너지 준위 공식을 유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실험값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보어는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를 빌려서 원자의 현상을 표현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양자의 세계는 고전물리학적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고전물리학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후에 양자역학의 표준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이 됩니다.

보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정상상태의 전자도 고전역학적인 법칙에 따른다고 가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가장 안정된 상태(n=1)의 원자 크기(보어 반지름)를 이론적으로 도출했는데, 이는 그동안 실험으로 구한 10nm(10⁻⁸㎝)와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는 또 대응원리를 에너지 준위 공식에 적용해 양자조건을 유도했습니다.

이로써 보어는 광양자 가설을 토대로 한 4가지 가설을 동원해 그동안 설명이 불가능했던 원자가 내는 빛의 스펙트럼, 원자의 안정성,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설명하는 이론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소원자가 내는 가시영역 빛의 스펙트럼, 즉 발머계열의 정체는 수소원자 안의 궤도 n=3, n=4, n=5, n=6에 있던 전자가 궤도 n=2로 각각 전이(transition)할 때 내는 빛이라는 것이 보어의 이론에 의해 깨끗하게 설명되었습니다.

보어의 이론은 원자의 화학적 반응과 원자의 선스펙트럼을 정성적(qualitative)으로 설명했습니다. 보어의 가설은 고전역학이나 전자기이론에서 유도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지만 원자의 현상은 기가막히게 잘 설명했습니다. 전자의 에너지 준위가 불연속적이라는 보어의 가설은 불과 1년 후 프랑크(James Frank)와 헤르츠가 행한 실험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보어의 초기 모형은 뮌헨대학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에 의해 한층 일반화되어 ‘보어-좀머펠트 모형’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이 같은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양자역학이 완성되기 이전의 이론이란 뜻으로 ‘전기 양자론’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1923년에 들어서면서 보어-좀머펠트 모형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이 모형이 전자 1개인 수소 다음으로 간단한 헬륨 원자(전자 2개)를 설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보어의 가설들이 당시 물리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고전역학에 따르면 물체의 운동은 인과론적 결정론을 따릅니다. 즉 현재 상태를 알면 전후 상태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보어 모형에서 원자 궤도 내의 전자가 언제, 어디로 전이(양자 도약)하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물리학계에는 양자도약(quantum jump)이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보어의 코펜하겐학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파울리 등은 ‘양자도약’을 신비하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완전한 양자역학체계인 행렬역학(하이젠베르크)과 파동역학(슈뢰딩거)은 양자도약에 대한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하이젠베르크와 헬골란트 섬 (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1900년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로부터 시작된 양자론(양자역학)의 싹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이어 보어가 이를 원자모형에 적용시키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원자가 방출하는 스펙트럼의 정체와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연구는 ‘보어-좀머펠트 원자 모형’을 탄생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중요한 문제는 스펙트럼의 강도였습니다. 물론 전자가 특정 궤도에서 언제, 어디로 전이(점프)하느냐는 문제도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BKS(Bohr-Kramers-Slater) 이론은 원자를 가상 진동자(virtual harmonic oscillator)로 간주하고 고전역학과 조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BKS 이론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원자가 방출하는 스펙트럼을 광양자로 보지 않고 파동으로 취급한 데 있습니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안의 전자가 방출하는 복사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BKS 이론의 ‘원자=가상 진동자’ 가설을 차용했습니다. 또 그는 전자의 위치(전자궤도)를 무시하고 고전역학 방식대로 관측 가능한 물리량, 이를테면 복사의 진동수와 강도를 기초로 이론을 수립했습니다.

문제의식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는 뮌헨대학 시절 좀머펠트 교수에게 배운 보어의 원자이론에 혼란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보어의 양자조건은 마치 피타고라스의 ‘수의 신비’를 상기시키면서 지적 흥미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빛을 방출하지 않는 정해진 전자 궤도와 전자의 ‘뜀뛰기(양자도약)’란 개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한 살 위인 볼프강 파울리와 이 문제에 관해 많은 토론을 가졌습니다. 파울리는 어느 날 하이젠베르크에게 “원자 안에 전자 궤도라는 것이 있다고 믿느냐?”며 시니컬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이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던 터라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보어 이론은 의문투성이다. 고전역학의 범주를 벗어난 양자조건을 내세워 정상상태의 전자 궤도를 부여하면서 한편으로는 고전역학에 따라 궤도 반경을 계산하니까 말이다.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전이할 때 빛을 방출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처럼 기묘한 전자의 도약(전이) 과정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보어가 말하는 전자 궤도의 표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파울리도 그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전자의 궤도가 원자 안에 있다면 그 전자는 명백히 일정한 진동수를 가지고 주기적으로 회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에 따라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전하로부터 전기적인 진동이 발생하고, 그 진동수를 갖는 단색광이 방사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보어모형에서 방사된 광선의 진동수는 그 신비한 ‘뛰기’(전이) 전후의 진동수 중간쯤에 있다고 한다. 미치광이 같은 소리이다.”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호기심과 의구심을 동시에 자극하는 원자이론의 주창자인 보어를 직접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22년 좀머펠트 교수의 권유로 괴팅겐대학에서 열리는 ‘보어 축제(보어의 특강)’에 참가한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강의 후 보어에게 반론을 제기했고, 보어는 답변을 시원하게 주지 못했습니다.

토론이 끝난 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에게 하인베르크산 산책을 제안했습니다. 이날 산책은 하이젠베르크의 학문 여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보어가 오전의 강연과 토론 내용을 언급하며 “내 이론의 출발점은 고전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야말로 경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물질의 안정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어는 이어 “고전물리학의 원칙, 즉 인과론적 결정론에 따르면 현재의 상태는 바로 직전의 상태에 의해 명확히 결정되어야 하는데, 원자 안의 현상은 여기에 부합하지 않네. 일찍부터 이 같은 모순이 나를 괴롭혔네.”

보어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 때 기존 개념과 법칙을 사용할 수 있었지. 그러나 원자물리학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과 법칙이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네. 고전물리학은 원자 내부에 적용이 될 수 없다네. 그러므로 원자구조에 대한 직관적 서술도 불가능하지.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전물리학의 개념이기 때문이네.”

보어의 이 말은 하이젠베르크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지난 며칠 동안 강의에서 설명하신 원자 상(像)은 도대체 무엇을 뜻합니까?”

보어가 대답합니다. “그 원자 상(像)은 확실히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학생이 원한다면 추측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여하튼 이론적 추론에 의해 얻어진 것은 아니네. 나의 원자 상(원자 모형)이 원자의 구조를 잘 서술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고전물리학의 직관적 언어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잘 서술되기를 바랄 뿐이네.”

하이젠베르크가 다시 묻습니다. “이론적 추론이 아니라 추측에 의지한다면 어떻게 과학적 진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까? 결국 물리학이란 정밀과학이어야 할 터인데 말입니다.”

그러자 보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경험이 쌓이면 원자 안의 비직관적인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리라고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그와 같은 상황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네.”

하이젠베르크가 다시 따지듯이 묻습니다. “만약 원자의 내부 구조가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직관적 서술로써는 접근하기 어렵고, 또 우리가 이 구조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 원자를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보어는 잠시 머뭇거린 다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그렇게 비관하지 말게. 우리는 현재 원자의 신비를 풀어가는 중이고, 그 과정에서 ‘이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도 배우게 될 것이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의 대화 이후 그의 이론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원자의 안정성을 설명했고, 방사 스펙트럼의 진동수를 정확하게 예측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궤도 운동’의 진동수가 왜 방출된 복사의 진동수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궤도 운동이란 없다는 의미인가? 만약 궤도운동 가설이 옳지 않다면, 원자 안에서 전자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윌슨이 발명한 안개상자를 통해 운동하고 있는 전자를 우리는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내 전자 궤도의 전자 진동수와 방출된 빛의 진동수 사이에 차이가 엄연히 발생한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이는 ‘전자 궤도’라는 개념이 적절치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보어의 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전자 궤도에 대해 의문이 많았던 것입니다.

1924년 7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함께 연구를 시작한 하이젠베르크는 이듬해 여름부터 수소원자 스펙트럼선의 강도에 대한 공식을 세우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복잡한 수학적 미로에 빠져들어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로부터 그는 원자 안에서는 전자의 궤도를 상정할 필요가 없으며, 진동수와 스펙트럼선의 강도를 결정하는 양(진폭)을 궤도의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자 궤도는 추정된 개념인데 반해 이들 물리량은 직접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유럽 과학계를 지배했던 실증주의적인 과학 방법론에 따라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원자의 결정요소로 간주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는 원자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따라 입자인 광양자로 취급했습니다. 광양자 개념을 수용하기를 거부한 보어와는 다른 접근 방식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같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수학적으로 좀 더 간단한 역학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계로서 진동하는 진자, 원자물리학에서 원자나 분자 안의 진동 모형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조화 진동자(harmonic oscillator)를 생각해냈습니다. 원자를 가상 조화 진동자(virtual harmonic oscillator)로 다룬 BKS(Bohr-Kramers-Slater) 이론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 궤도’라는 개념을 일단 포기하는 접근방법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스펙트럼의 진동수와 강도로 전자 궤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물리적 직관에서 출발한 방식입니다. 복사는 수학자들이 전자 궤도에 관한 ‘푸리에 급수’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역학 법칙을 전자의 위치나 속도에 대한 방정식이 아니라 ‘푸리에 급수’의 진동수나 진폭에 대한 방정식으로 서술되어야 한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헬골란트 섬에서의 축복

1925년 7월 하이젠베르크는 꽃가루 알레르기 일종인 건초열병(hay fever)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2주간의 휴가를 얻어 북해의 헬골란트(Helgoland, 영어 헬리고랜드 Heligoland) 섬으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쾌적한 환경에서 심신을 추스른 하이젠베르크는 불과 며칠 만에 원자 스펙트럼선의 강도에 관한 수학적 정식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일련의 에너지 준위들의 표현도 정식화했는데, 이는 고전물리학과 달리 양자화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드디어 하이젠베르크는 수학적으로 모순이 없는 완전한 양자역학의 한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때 사용한 수학은 당시 물리학자들이 잘 사용하지 않던 행렬이었습니다. 행렬은 함수를 변환시키는 연산자 역할을 하는데, 물리적으로는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의 오퍼레이터(operator)처럼 관측 값을 도출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초 자신의 수학적 기술이 ‘행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괴팅겐 대학의 막스 보른(Marx Born)이 하이젠베르크의 수학적 기술이 행렬임을 간파하고 이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에 관한 수학적 기술을 행렬역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은 전자의 궤도(위치)를 무시하고 복사의 진동수와 진폭(세기)을 기초로 수립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렬역학의 운동방정식은 에너지 보존법칙과 보어의 진동수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고전역학에서 운동방정식과 운동에너지는 모두 해당 물체의 위치에 대한 미분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위치가 아닌 양을 대입해서 계산한 에너지는 결코 지금까지 알려진 에너지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행렬역학의 운동방정식에서 도출된 에너지는 에너지 보존법칙이 성립되고 보어의 진동수 관계와도 서로 모순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에너지라고 부르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하이젠베르크는 생각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전역학의 언어가 그대로 양자역학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렬역학은 뉴턴역학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수소원자 문제 등 새로운 사실들을 재발견함으로써 뉴턴역학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행렬역학을 발전시킨 보른과 요르단(Pascual Jordan), 디랙(Paul Dirac)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기술하고 있는 ‘행렬’은 서로 교환할 수 없다는 사실(PQ≠QP)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수학적 언어에서 양자역학과 고전역학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 스피노자의 신 (이광식 칼럼니스트)

상대성이론을 만들어 세계를 보는 인류의 시각을 극적으로 바꿔놓은 20세기 최고의 과학 천재 앨버트 아인슈타인.

이 최고의 과학자가 과연 신이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커다란 관심사였다. 과연 아인슈타인은 신을 믿을까? 만약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은 어떤 신일까?

이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아인슈타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돌직구를 날린 사람이 나타났다. 질문은 전보문으로 날아들었다. 1929년 미국 뉴욕의 유대교 랍비인 골드슈타인이 아인슈타인에게 전신으로 보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50단어로 답해 주십시오. 회신료는 선불되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독일어 25단어로 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은 믿지만,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신은 믿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위의 전보문 내용을 어느 편지에서 더욱 자세하게 부연 설명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신관이다.

"두 종류의 신이 있다. 우리는 굉장히 과학적이어야 하고,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만약 신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인격적 신이라면, 그리고 바닷물을 가르고 기적을 보이는 신이라면, 나는 그러한 신은 믿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자전거를 사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신, 이런저런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이라면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질서와 조화, 아름다음과 단순함 그리고 고상함의 신을 믿는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스피노자는 우주는 신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란 어떤 사람인가?

아인슈타인과 같이 유대인인 바뤼흐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로 범신론자이다. 범신론이란 '자연의 밖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초월자를 인정하지 않고, 우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며, 신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고 있는 그 자체다'라는 관점이다.

세계 내의 '모든 것이 하나'라고 믿는 스피노자는 "우주는 신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대상으로서의 초월적 신이 아니라, 바로 '신'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스피노자의 철학은 유대교에서 이단으로 찍혀 추방되었고, 인격적인 초월신을 부정하는 그의 '우주교'는 기독교로부터 일종의 무신론이라고 비난받았으며, 이 같은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는 아인슈타인에게는 무신론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견해를 들으면 그러한 비판에도 나름 근거가 있는 듯이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또 어느 편지글에서 인간이 믿는 신에 대해 "내게 신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과 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성서'에 대해서는 "훌륭하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나아가, "유대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가장 유치한 미신들이 현실화된 것에 불과하며, 유대인은 결코 선택된 민족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확고한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신의 개념을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어쨌든 아인슈타인에게도 종교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가 믿는다고 말한 신은 스피노자의 신이며, 스피노자의 신은 '우주'이다. 따라서 삼단논법로 보자면 아인슈타인의 신은 '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주와 신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우주가 이해 가능하고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은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화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은 '유한하나 경계가 없는 우주'였다. 그는 무한한 우주가 불가능한 이유로, 중력이 무한대가 되고,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양도 무한대가 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공간의 한 위치에 떠 있는 유한한 우주는 별과 에너지가 우주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줄 아무런 것도 없기 때문에 역시 불가능하며, 오로지 유한하면서 경계가 없는 우주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질량이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우주 전체로 볼 때 우주는 그 자체로 완전히 휘어져 들어오는 닫힌 시스템이다. 따라서 유한하지만, 경계나 끝도 없고, 가장자리나 중심도 따로 없는 우주다.

이것이 바로 깊은 사유 끝에 아인슈타인이 도달한 우주의 모습이었다.

독일 물리학자 막스 보른은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는 우주의 개념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세계의 본질에 대한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의 하나"라고 평했다.

이 같은 우주가 아인슈타인에게는 그의 말마따나 '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어떤 종교인이 자신의 신앙 대상에 대해 갖는 경외감보다 더 깊은 경외감을 우주에 대해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신을 알기 위해 도정에 자신의 평생을 오롯이 바쳤다. 죽기 직전까지 그는 종이 위에서 우주의 본질을 꿰뚫는 대통일장 이론 방정식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그의 열망은 다음 말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나는 신의 생각을 알고 싶다. 나머지는 세부적인 것에 불과하다.“
(I want to know God's thoughts; the rest are details.)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