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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Ecomomics

작은 것이 아름답다 by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

by hoyony 2019. 2. 5.

Small Is Beautiful :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


2002. 03. 10
문예출판사


Small Is Beautiful: Impressions of Fritz Schumacher, Donald Brittain, Barrie Howells & Douglas Kiefer, provided by the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1부. 근대세계

제1장. 생산문제

많은 점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지만, 생산문제가 해결되어 인류가 마침내 성숙기에 들어섰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사람들은 이제 부자 나라에서는 ‘여가 교육’이, 가난한 나라에서는 ‘기술 이전’이 각기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성과에 힘입어 무한한 힘에 대한 환상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동시에 생산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환상을 낳았다. 후자의 환상은 가장 중요한 곳에서 소득과 자본의 구분이 실패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경제학자와 사업가들은 이 구분에 익숙하며, 이것을 모든 경제 상황에 아주 신중하고 꼼꼼하게 적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로 문제가 되는 곳, 즉 인간이 만들 수 없고 단지 발견할 뿐이며 그것 없이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매년 수십억 톤의 화석연료를 원자력으로 대체하라는 주장은 가공할 만한 환경 및 생태계 문제를 야기한 대가로 연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오로지 그것이 지금 행동을 유도할 경우에만 유용하다. 근런데 아직도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판단한다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는 이미 아주 많아진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고 새로운 생산 방법과 새로운 소비 활동을 동반하는 새로운 생활양식, 즉 영속성을 위해 고안된 생활양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제2장. 평화와 영속성

살아가기에 충분한 상태가 존재하는가? 여기서 곧바로 우리는 심각한 난제에 직면한다. ‘충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너무 적게 가진 가난한 사회는 있다. 그러나 ‘그만하자!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외칠 만큼 풍요로운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사회는 없다.

케인즈에 따르면 경제적 진보는 종교와 전통적인 지혜가 언제나 거부하도록 가르치는 인간의 강한 이기심을 이용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근대 경제는 격렬한 탐욕에 따라 작동되며 시기심 잔치에 빠져 있는데, 이는 우연한 모습이 아니라 경제의 확장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 자체이다.

우리가 진실로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산 방법과 장비를 요구한다고 답변하고자 한다.

1)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만큼 값이 싸며,

2) 소규모 이용에 적합하고,

3) 인간의 창조적 욕구에 부합될 수 있는 것.

이러한 세 가지 특성으로부터 비폭력이 생겨나고, 영속성이 보장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출현한다. 생산방법이나 기계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값이 싸다는 것은 그것의 비용이 그것을 이용하는 사회의 소득 수준에 걸맞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소규모 사업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항상 대규모의 사업에 비해 자연 환경에 적은 해악을 끼치는데, 소규모 사업의 개별적인 힘이 자연의 회복력에 비해 작기 때문이다. 오늘날 핵에너지, 새로운 농화학, 운송 기술 및 기타 수많은 기술들이 적용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커다란 위험은 언제나 부분적인 지식을 대규모로 무자비하게 이용하는 데서 나온다. 세 번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선을 위한 신의 섭리에 따라 행해진 것으로 이해하는 적절한 노동철학이 요구된다.

경제적 토대는 인간을 서로 다투도록 만드는 원인인 탐욕과 시기심을 체계적으로 배양하는 것에 의존하는 바, 이런 토대에 기대어 평화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이중의 환상이다.

제3장. 경제학의 역할

점점 더 풍요로워지면서 경제학이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며, 경제적 성과, 경제 성장, 경제적 팽창 따위가 모근 근대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비난할 때 사용하는 어휘 가운데, ‘비경제적’이라는 말만큼 결정적인 것은 거의 없다. 어떠한 행위에 비경제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것은 존재할 권리를 의심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강하게 부정된다. 경제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부끄러운 것이며,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방해꾼이나 바보 취급을 받는다.

경제학의 판단은 대단히 부분적인 판단이며, 실제 생활에서는 좀더 다양한 측면을 함께 고려해 판단한 후에 결정하지만, 경제학은 어떤 것이 그것을 담당한 사람에게 화폐 이익을 제공하는가라는 오직 하나의 측면만을 제공할 뿐이다.

경제학은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자와 판매자가 만나는 시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구매자는 본질적으로 유리한 재화를 찾아다니는 사냥꾼일 뿐, 재화의 산지나 생산 조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시장은 사회의 껍데기일 뿐이며, 그것의 의미는 장소에 따라 존재하는 순간적인 상황과 연결된다. 거기에는 사물 내부로 들어가서 그 배후에 놓인 자연적, 사회적 사실을 탐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시장은 개인주의와 무책임성의 제도화이다. 구매자나 판매자 모두 자신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결코 책임지지 않는다.

경제학자는 비경제적 가치를 경제적 계산 영역에 끼워 넣기 위해 비용/편익 분석법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그렇지 않았으면 완전히 무시되었을 수도 있는 비용과 편익을 고려하려는 시도이므로, 흔히 선진 기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고차적인 것을 저차적인 것으로 끌어내리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에 가격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상황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이성적인 결정을 도출하도록 도와주는 게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며, 선입견으로부터 뻔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정교한 방법만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4장. 불교 경제학

부의 근본 원천이 인간의 노동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근대 경제학자들은 노동을 필요악 정도로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고용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기계화 같은 방식으로 줄일 수 있는 최소로 줄여야 하는 비용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비효용이다. 노동은 여가와 편안함을 희생하는 것이며, 임금은 이 희생에 대한 보상이다. 따라서 고용주에게는 고용하지 않고 생산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피고용인에게는 노동하지 않고 소득을 올리는 것이 이상적이다.

분업은 인류가 아주 먼 옛날부터 이용해온 통상적인 전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생산 공정을 분할하여 완성품을 아주 빠르게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개인은 누구나 무의미할 정도로 적게 기여할 뿐 아니라 대부분 단순한 근육운동을 해야 한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노동의 역할은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통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노동을 노동자에게 의미 없거나 지루한, 또는 창피하거나 신경 쓰이는 것이 되도록 조직한다면 이는 범죄 행위나 진배없다. 그것은 사람보다 재화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고, 연민 없는 악행이며, 이 속세의 존재의 가장 원시적인 속성인 영혼 파괴에 해당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동 대신 여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진리 가운에 한 가지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인 바, 그것은 바로 노동과 여가가 삶이라는 하나의 과정의 보완적인 부분이며, 노동의 기쁨과 여가의 축복을 파괴하지 않고는 양자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교에서 인간성은 주로 인간의 노동을 통해 형성된다. 아울러 노동은, 인간에게 존엄과 자유가 보장된 조건에서 적절히 수행될 경우, 그것을 행하는 사람과 그가 만든 생산물 모두에게 축복이다.

인간은 노동할 기회가 없으면 절망에 빠지는데, 이는 단순히 수입이 없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훈육된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활력을 얻는 측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탈을 방해하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다.

제5장. 규모 문제

우리에게는 항시 자유와 질서가 필요하다. 소규모 자율적인 단위의 자유가 필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규모 조직의 통일성과 조화라는 질서도 필요하다. 행동이 문제될 경우에는 소규모 조직이 필요한데, 행동은 매우 개인적인 일이어서 누구나 한꺼번에 제한된 숫자 이상의 사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 원리, 윤리, 평화와 생태계의 불가분성 따위가 문제될 경우에는 인류의 통일성을 인정하고 여기에 기대어 행동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거대주의라는 우상숭배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작은 것의 미덕을 고집하는 게 필요하다.

경제정책은 정부의 관심을 거의 독점하고 있으며, 동시에 점점 더 무력해지고 있다. 50년 전만 해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던 일조차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가치 있지만 당장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진다. 그 원인은 물론 많겠지만, 그 중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운송과 통신 분야에서 나타난 근대 과학 기술의 엄청난 성과이다. 사람들은 빠른 운송과 동시적인 통신이 자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쉽게 믿는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기술적 성과의 파괴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정책을 고안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위태롭고 불안정해짐으로써 자유 또한 파괴될 것이라는 점은 보지 못한다.

가난한 지방은 부유한 지방과 분리되길 원하지만, 부자들은 국내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 외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기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현상 유지를 원한다.

민주주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 생활수준, 자아실현, 자기완성이라는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재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소집단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an articulated structure)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부. 자원

제6장. 최대의 자원ㅡ교육

우리의 정신은 백지상태가 아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이미 생각에 이용되는 온갖 종류의 관념들이 정신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적이면서 비판적인 정신이 일종의 검열관이나 보호자로서 (정신의) 입구에서 행동할 수 있기 전인 청소년기 내내 관념이 정신에 스며들면서 쌓이게 된다. 아마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속받은 것을 분류하는 법을 점차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체험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어떤 관념이 우리의 정신을 채우고 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 관념이 주로 작고 약하며, 피상적이고 비일관적인 것이라면, 생활도 무기력하고 재미없으며, 하찮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자연계나 공학적인 환경에서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인간의 소외나 마음속 깊은 곳의 절망감을 결코 치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하는가? 과학혁명에 대해, 그리고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수없이 들었겠지만, 이른바 인문학에게로 눈을 돌려야 할 듯 보인다. 운이 따른다면, 바로 여기서 정신을 충만하게 할 위대하고 중요한 관념ㅡ사고의 도구가 되고 세계, 사회, 인생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줄ㅡ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발견할 수 있는 관념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자.

1. 낮은 형태로부터 높은 형태로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했다는 진화관이 있다. 이 관념은 지난 백여 년 동안 현실의 모든 측면에 예외 없이 체계적으로 적용되었다.

2. 경쟁, 자연선별, 적자생존에 관한 관념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진화와 발전과정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3. 인류의 전체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취급하면서, 종교나 철학, 예술 따위와 같은 인간 생활의 모든 고도의 표현 형태ㅡ마르크스가 인간 두뇌 속의 현상이라고 불렀던ㅡ는 물질적인 생명 과정에 필요한 부속물일 뿐이며, 경제적 이해관계를 은폐하거나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부구조라고 주장하는 관념이 있다.

4. 인간 생활의 모든 고도의 표현 형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결질 수도 있는 것으로, 이 표현 형태를 무의식의 어두운 충동으로 해석하고, 이 충동을 주로 유아기와 사춘기에 충족되지 못한 근친상간 욕망의 산물로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해석이 있다.

5. 일반적인 상대주의 관념으로, 이것은 모든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모든 규범과 기준을 해체하며, 마침내 실용주의로 이어지면서 진리의 관념마저 완전히 버리게 되며, 오늘날 수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러셀은 이에 대해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자신이 말하는 것이 진리인지에 대해 스스로 알지 못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6. 마지막으로 오늘날 승리를 누리는 실증주의 관념이 있다. 이것에 따르면, 타당한 지식은 오로지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으며, 어떤 지식이든 일반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는 한 진리가 아니다. 달리 말해서, 실증주의는 노하우에만 관심을 보일 뿐, 어떠한 종류의 의미나 목적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것들은 모두 높은 차원과 낮은 차원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는 경우에도 이전에 높은 차원의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이 실질적으로는 낮은 차원의 것을 좀더 미묘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의 다른 존재들처럼 실질적으로 원자의 우연한 배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인간과 돌의 차이는 기만적인 외모 정도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급 문화도 위장된 경제적 탐욕이나 성적 억압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이 낮은 차원보다 높은 차원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높은 차원이나 낮은 차원같이 순전히 주관적인 용어는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며 해야 한다는 말은 단지 권위주의적 과대망상을 보여주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교육으로부터 무엇을 얻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의 세계관, 즉 세계가 어떠한 의미나 목적도 없는 황무지이고, 그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불행한 우주의 우연이며 궁극적인 결과는 오로지 불안과 절망뿐이라는 관점이다.

티렐(G. N. M. tyrell)은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그럴 수 없는 문제를 구분하기 위해 ‘수렴’과 ‘발산’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인생은 계속해서 발산하는 문제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죽음만이 해결할 수 있으므로 (이 문제들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수렴의 문제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 과정을 거쳐 창조된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해결방법이 기록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며, 전달 받은 사람은 그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애쓰지 않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만일 가정생활, 경제학, 정치학, 교육 따위의 영역에서 인간관계가 모두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인간관계는 없고, 오로지 기계적인 관계만이 있을 것이다. 발산하는 문제는 좀더 높은 수준의 힘을 요구하고 이끌어내며, 이를 통해 사랑, 미, 선, 진실을 인생에 끌어들인다. 물리학이나 수학은 오로지 수렴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것들은 누적적으로 진보할 있으며, 앞 세대가 남긴 곳에서 새로운 세대가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심각하다. 수렴하는 문제만을 취급하는 것은 인생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서른 살이나 그 이후까지 많은 시들에서 커다란 기쁨을 얻었으며, 학창 시절에도 셰익스피어, 특히 그의 사극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얻었다. 또한 이전에는 그림에서 상당한 기쁨을 얻었으며, 음악에서도 굉장히 큰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꽤 오래전부터 단 한 줄의 시도 읽을 수 없었다. 최근에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취미도 거의 잃어버렸다. (...) 내 정신은 엄청나게 끌어모은 사실들을 갈아서 일반 법칙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기계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째서 전체 뇌 중에서 고상한 취미가 의존하는 부분만을 퇴화시킬 수 밖에 없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 이러한 취미의 상실은 행복의 상실이며, 아마도 지성에도 해를 끼쳤을 것이다. 아울러 본성 중에서 정서적인 부분을 약화시킴으로써 도덕적인 특성에게는 좀더 많은 해를 끼쳤을 것이다.

발산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번거로우며 짜증나는 것이기 수비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서 벗어나 멀리 있고자 한다. 바쁜 관리가 하루 종일 이 문제로 씨름하게 되면, 귀가길에 추리소설을 읽거나 낱말맞추기 퀴즈를 풀게 될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머리를 사용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머리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추리소설이나 낱말맞추기 퀴즈가 수렴하는 문제이며, 그래서 긴장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약간의 두뇌노동을, 때로운 어려운 두뇌노동까지 요구하지만,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런 긴장은 발산하는 문제, 즉 화해될 수 없는 대립물을 화해시켜야 하는 문제에만 고유하게 따라붙는 것이다. 인생의 실질적인 내용은 오로지 발산하는 문제일 뿐이다.

교육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 문제는 조직이나 관리, 또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다.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으므로, 치료법도 형이상학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반형이상학적인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이 혼란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인류의 최대 자원이기는커녕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이라는 원리에 따라 파괴의 도구가 될 것이다.

제7장. 적절한 토지의 이용

우리가 하는 일 중에는 언제나 그것 자체가 목적인 것과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목적과 수단을 구별하고 이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갖고 합의를 도출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토지는 단순히 생산수단인가 아니면 그 이상, 즉 목적 자체인가?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는 공리주의적 계산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상당히 깨끗하게 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위생상의 이유? 아니다. 위생 측면은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는 청결을 가치 자체로 인식한다. 이것의 가치를 계산하지 않으므로, 여기에 경제적 계산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이렇게 완전히 비경제적인 행동은 많지만, 그것들은 모두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간단히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바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생산’과 ‘소비’로 나누는 것이다. ‘생산’에 포함된 것은 경제계산에 종속되지만, ‘소비’항목에 포함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실제 삶은 이렇게 분류되기 어렵다.

인간이 생산자로서 요구하느냐, 소비자로서 요구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만일 생산자로서의 인간이 열차의 일등 객실을 이용하거나 고급승용차를 사용하면 낭비한다는 말을 듣지만, 동일한 인물이 소비자가 되어 똑같은 일을 하게 되면 높은 생활수준을 보여준다는 말을 듣는다.

이 이중성은 토지를 이용하는 데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농부는 단순히 가능한 방법을 이용해서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여야 하는 생산자로 여겨질 뿐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소비자로서 토양의 건강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파괴하며, 그 결과로 인구를 토지에서 몰아내고 도시의 과밀화를 초래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조잡한 물질주의는 농업을 본질적으로 식량생산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좀 더 폭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농업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제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 인간이 아주 허약한 부분으로 속해 있는 살아 있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2) 넓은 의미의 인간의 서식지를 인간화하고 고귀한 것으로 만들며,

3) 적당한 생활에 필요한 식량 및 기타 원료를 생산하는 것.

농업이 수익성이 없다면 그것은 사양 업종이다. 사실상 어떤 사회든 토지를 돌보면서 그것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오래도록 보존할 만한 여유는 충분히 있다.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도, 적절한 지식이 부재한 것도 아니다. 우선순위가 문제될 경우, 경제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토지 관리, 가축 관리, 식량의 저장과 가공, 분별없는 도시화 따위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각종 남용에 대해 변명하기에는, 우리는 이미 생태계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우리가 이런 남용을 허용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에 메타경제학적 가치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기 위한 확고한 기반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계산이 없을 때 경제계산이 지배하게 된다. 이는 필연적이다.

제9장. 원자력ㅡ구원인가, 저주인가?

환경은 수백만 년 이상 변화해온 것으로서 그 어떠한 장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지구는 150만 종 이상의 동식물들이 서식하면서 토양과 공기의 똑같은 분자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그러면서도 대체로 균형이 잡힌 상태로 공존할 정도로 너무도 복잡한 행성이므로, 목적도 없는 섣부른 지식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메커니즘에 변화가 나타나면 언제나 어느정도 위험을 동반하게 되므로,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신중히 검토한 후에야 비로소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큰 변화에 앞서, 먼저 작은 것부터 시험삼아 시도해야 한다. 정보가 불완전하다면, 변화는 아주 오랫동안 생명을 뒷받침해왔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연 과정에 가까운 상태로 그쳐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심지어 지질시대를 바꿀 만한 시간 동안 모든 생명체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는 맹독성 물질을 대량으로 저장하는 것은 그 어떠한 번영 수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그것도 인간에게 가해졌던 그 어떠한 범죄보다도 훨씬 심각한 도전이다. 문명이 이러한 도전에 기대어 성립될 수 있다는 생각은 윤리와 정신, 그리고 형이상학 측면에서 끔찍한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경제 영역을 작동시키는 꼴이다.

제10장.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근대 세계는 근대 형이상학의 산물이며, 이 형이상학은 근대 교육을 틀지웠으며 이 교육은 다시 과학과 기술을 산출했다.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지속될 세계가 병에 걸린 듯 보인다면, 기술 자체를 검토해보는 것이 현명하다.

자연 세계의 모든 것에는 규모, 속도, 힘의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그 결과 인간을 포함한 자연체계는 자기균형 능력을 보이면서 스스로를 조절하고 정화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은 그렇지 않다.

필자는 경제학의 첫 번째 법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한 사회가 향유하는 실질적인 여가의 양은 그 사회가 이용하는 노동절약적 기계의 양에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간디가 말했듯이, 대량 생산이 아니라 오로지 대중에 의한 생산만이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기술을 좀 더 정교하면서도 복잡하게 발전시키는 것보다 그것의 집단성과 단순성을 회복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

3부. 제3세계

지난 20년 동안 개발을 지배했던 철학은 ‘부국에 가장 좋은 것이면 빈국에도 가장 좋다’는 신념이었다. 이 신념은 놀랄 정도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미국과 그 동맹국, 그리고 몇몇 경우에는 소련이 평화로운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개발도상국 명부-대만, 한국, 필리핀,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이란, 터키, 포르투칼, 베네수엘라 등-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국가들은 모두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이 대부분 농촌에 살고 있어서 농업과 농촌 생활의 활성화가 가장 큰 문제인 국가들이다.

모든 고찰의 출발점은 빈곤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빈곤 수준이 부과하는 경계선이나 제약조건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조잡한 물질주의 철학은 우리에게 ‘물질적 기회’만을 보게 할 뿐, 빗물질적 요인에 대해서는 무시하도록 유도한다. 빈곤의 요인 중에서 자연자원 부족, 자본 부족, 하부구조의 불충분성 같은 물질적 요인은 완전히 2차적인 것이다. 극단적인 빈곤의 주요 원인은 비물질적인 것인바 교육, 조직, 규율 등의 결함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교육은 비약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미묘하면서도 점진적인 과정을 요구한다. 조직은 비약하지 않는다. 이것은 변화되는 환경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진화한다. 규율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조금씩 진화해야 하며, 이 진화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것이 개발정책의 주요 임무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극소수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한다.

제12장. 중간 기술 개발을 요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

기술 수준을 평균 작업장 설비비용으로 정의한다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토착 기술은 1파운드짜리 기술로, 선진국의 기술은 천 파운드짜리 기술로 각각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기술 사이의 간극은 상호 전환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나 넓다. 가장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도와주려면, 1파운드짜리 기술과 천 파운드짜리 기술의 중간에 위치한 기술이 필요하다. 이러한 중간 기술은 토착 기술보다 엄청나게 생산성이 높지만 근대 산업의 복잡하면서도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기술에 비하면 엄청 저렴할 것이다.

적절하게 선택된 중간 기술은 근처 대도시에 근대적인 공장의 기술보다 실제로 저렴할 수 있음이 보편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 기술로 만든 제품이 수출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답하기 힘들다. 그러나 오늘날 실업자들 역시 수출에 기여하고 있지 않다.

제13장. 2백만 촌락

최근 문헌을 살펴보면 원조방식이 다자간 관계냐, 쌍무관계냐가 결정적 문제라거나 1차 상품의 교역조건 개선, 무역장벽 철폐, 민간 투자자에 대한 보증, 효과적인 산아제한정책의 도입 따위와 같은 요인들만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세계의 빈곤이 주로 2백만 촌락, 즉 20억 농민의 문제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빈국의 도시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농촌 생활이 좋아지지 않는 한, 세계의 빈곤은 해결될 수 없다.

개발에 대해 양적인 기준에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래서 선진국을 연구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개발 문제 자체에는 거의 쓸모없는 다양한 추상 개념들 ㅡGNP, 투자, 저축 따위와 같은 ㅡ에 비추어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중요한 통찰력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원조가 성공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이란 오직 그것이 원조 받는 국가에서 대중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데 도움을 주어 노동을 절약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경우뿐이다.

앞으로 원조 프로그램에서 점점 더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것은 바로 적절한 지적 증여, 즉 자립 방법에 대한 적절한 지식의 증여를 충분히 제공함으로써 수령인을 자립적이면서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4부. 조직과 소유권

제15장. 미래를 예언하는 기계?

1) 의미구분 필요성

우리는 추정, 계획, 예측 따위에 대해 전망, 프로그램, 목표 따위에 대해 거리낌없이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이 마치 자유롭게 호환 가능하며 누구나 그 의미를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는 듯이 그것들을 사용하곤 한다. 그 결과는 엄청난 혼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과거를 지칭하거나 미래를 지칭할 수 있으며, 행위를 지칭하거나 사건을 지칭할 수 있고, 확실한 것을 지칭하거나 불확실한 것을 지칭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세 쌍이 구성하는 결합의 가능한 경우의 수는 여덟 가지이므로, 현재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을 좀더 분명히 나타내려면 실질적으로 이 여덟 가지를 서로 다른 용어로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① 행위/과거/확실

② 행위/미래/확실

③ 행위/과거/불확실

④ 행위/미래/불확실

⑤ 사건/과거/확실

⑥ 사건/미래/확실

⑦ 사건/과거/불확실

⑧ 사건/미래/불확실

행위와 사건 구분은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나 통제가능과 통제불능의 구분만큼이나 기본적인 것이다. 계획 입안자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계획화’라는 말을 적용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사건은 단순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이는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여덟 번째 경우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상인데, 이것은 ‘계획화’와 무관하다.

2) 예측가능성

경제학이 형이상학 측면에서 물리학과 구별되며 인간사가 대체로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계획에 따라 행동한다면 예측 가능성이 확보된다. 사람들이 그 계획을 고집한다면, 이는 바로 그것과 어긋나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겠다고 선택한 것이므로, 이들의 행동은 예측 가능하다. 원리상 별의 움직임처럼 인간의 자유가 개입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예측 가능하며, 이 자유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측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행위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고 완전히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오직 소수만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지만, 이것은 흔히 전체 결과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한 혁신이나 변화는 모두 자신의 창조적인 자유를 한껏 발휘했던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사실상 사회 현상이 어느 정도 불변성과 예측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자유가 행사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대다수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기존의 방식과 비슷하게 주어진 상황에 대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단기 예측

미래에 대한 건전한 판단을 내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예측 기술이 아니라 현 상황에 대한 좀더 정확한 파악이다. 현 상황을 이해한 다음 특별하면서도 반복적이지 않은 요인을 발견하고, 필요하다면 이것을 제거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노력한다면, 예측 방법이 그다지 조잡하지 않을 것이다.

4) 계획화

자유로운 사회에서 국가계획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이 모든 권력을 한군데로 집중하는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유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계획은 권력과 공존하는 것이다.

오늘날 해위 주체들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믿을 만한 지식을 시급히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 이들의 주변은 점점 더 늘어나는 예측자들과 선더미처럼 불어나는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놀라운 기계장치로 북적댄다. 하지만 아직도 최선의 결정은 상황을 침착하면서도 냉정하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관찰하는 인간의 성숙된 두뇌가 내리는 판단에 의존하고 있을 것이다.

제16장. 대규모 조직을 향하여

대규모 조직이 출현하면, 그것은 진자처럼 집중화 국면과 분산화 국면을 번갈아 겪게 된다.

규모가 크든 작든, 모든 조직에게는 어느 정도의 명확성과 질서정연함이 요구된다. 질서가 없는 상태가 되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질서정연함 자체는 정태적이며 활력도 없다. 그러므로 전례 없는 일을 하려면, 즉 질서의 파수꾼이 결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우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창조적인 생각을 실현하려면, 이미 확립된 질서를 타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남겨두어야 한다.

제17장. 사회주의

민간기업이 공기업을 비판한다면, 그 이유는 몇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려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가 민간기업을 비판한다면 이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비판을 아닐 것이다. 민간기업은 바로 그 단순성 때문에, 즉 모든 경제 활동의 동기를 개인의 탐욕에서만 찾음으로써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구형 민간기업으로 대변되는 대립항의 한쪽은 단순성과 측정가능성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오로지 수익성이라는 좁은 기준에서만 제대로 충족될 수 있다. 본래 이상적인 공기업관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쪽은 경제 행위에 대해 포괄적이면서 폭넓은 인간성을 요구한다. 오로지 전자만을 추구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될 것이며, 후자만을 추구한다면 혼돈에 가까운 비효율성이 나타날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면, 자본가들을 탈자본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좀더 민주적이면서 품격 높은 기업 운영, 더욱더 인간적인 기계사용, 인간의 창의략과 노력의 성과에 대한 좀더 현명한 이용으로 나이가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국영기업의 활용을 고집해야 한다.

제18장. 소유권

물질적인 진보는 전반적으로 근대 민간기업 체계가 개인 재산을 불리는 데 가장 완전한 수단임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근대 민간기업 체계는 탐욕이나 질투심이라는 인간의 충동을 추동력으로 교묘하게 활용하며, 자유방임의 가장 큰 결함에 대해서는 케인즈주의 경제정책, 몇몇 누진세제도, 노동조합의 대항력 따위를 이용해서 가까스로 극복하고 있다.

특허, 지대, 독점이윤, 온갖 종류의 잉여와 같은 것들에 대한 권리는 모두 재산권이다. 재산권 제도는 노동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돌아가도록 보장함으로써 근면성을 유지하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의 노동 성과에서 재산을 얻는 것을 지켜주는 일만큼이나 타인의 노동 성과에서 재산을 획득하는 것을 막는 일도 중요하다.

사회를 권리가 아니라 기능에 기대어 조직하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소유주의 권리는 서비스 제공이 동반될 때 유지될 것이며, 후자가 충족되지 않으면 전자도 부정된다. 둘째, 생산자는 생산물을 이용하는 지역공동체와 직접 접촉해서 그 지역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처럼 서비스가 아니라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주주들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이 책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셋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는 그것을 수행하는 전문 조직에 의지할 것이며, 이 조직은 소비자의 감시와 비판을 수용하면서, 의무 이행에 필요하다면 기업의 운영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해야 한다.

제19장. 새로운 소유 형태

어떠한 국가ㅡ부국이든, 빈국이든ㅡ에서나 교육기관, 의료기관, 연구기관은 모두 민간기업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편익을 제공한다. 민간기업은 이 편익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세금이라는 형태로 간접적으로만 지불한다. 민간기업은 이욘이 자신들이 노력한 대가이지만, 당국이 그것의 상당 부분을 세금으로 빼앗아간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는 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진실은 공공기관이 민간기업의 비용의 많은 부분을 부담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회간접자본의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간기업의 이윤은 상당히 과대평가되는 셈이다.

공적 지출이 민간기업의 이윤에 기여한다는 사실이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구조 내부에서 인정되지 않는 한, 진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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