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3. 26
오마이북
1부. 한국경제 종단_거대담론부터 미시정책까지
1장. 신자유주의 극복의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서구 자본주의의 400년 역사에 비추어 보면, 한국경제는 중상주의(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에서 신자유주의로 바로 건너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서구의 고전적 자유주의가 이룩한 성과, 즉 법치주의 내지 법 앞에 평등한 정의로 요약되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메커니즘이 확립되지 못했다. 그리고 서구의 포드주의 체제가 이룩한 성과, 즉 노동자계급 내의 연대 및 노동자-자본가의 계급 간 타협을 통해 소유권에 기초하지 않은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는 메커니즘이 확보되지 못했다. 그리고 서구의 포드주의 체제가 이룩한 성과, 즉 노동자계급 내의 연대 및 노동자-자본가의 계급 간 타협을 통해 소유권에 기초하지 않은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는 메커니즘이 확립되지 못했다. 경제가 압축‧비약의 성장을 이룬 것 이상으로, 사회변화 역시 압축‧비약의 과정을 거쳤다.
한국사회에 구자유주의와 포드주의의 경험이 결여된 것이 다이내믹 코리아를 계속 비틀거리게 하고 때때로 위기에 봉착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더 불안하고 더 위험했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세계사적 과도기 동안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비틀거림은 더욱 심해질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한다. 이것이 한국경제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과잉 및 구자유주의의 결핍’으로 도식화한 이유다.
한편에는, 법치주의 내지 공정경쟁질서의 확립 등과 같은 구자유주의 과제가 자신의 역사적 책무임도 깨닫지 못하는 한국의 보수진영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구자유주의적 과제는 나의 것이 아니라고 방기하는 한국의 진보진영이 있다. 그 사이의 공백을 정치적, 경제적, 관료적 기득권 세력이 차지하면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구자유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이 시대 한국의 개혁‧진보진영의 과제다.
2장. 국민경제가 성장할수록 모두 행복해지는가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하는데 크게 3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1세대 모형은 과도한 재정적자, 높은 물가상승률, 경상수지 적자 누적, 환율의 인위적 고정 등 기초경제여건(이른바 펀더멘털)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지속 불가능한 거시경제정책으로 인해 위기가 발생한다고 보는 이론으로, 주로 중남미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2세대 모형은 1990년대 초 유럽통화제도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이론으로, 펀더멘털이 양호하더라도 자기실현적 예상에 의해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모든 경제주체가 한 방향으로만 예상하는 쏠림현상이 나타나면 예상한 대로 현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경제는 심리다”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3세대 모형은 1980년대 금융자유화‧세계화 이후에 발생한 개도국의 외환위기가 대부분 은행위기를 동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쌍둥이 위기’ 이론이라고 불리는데, 특히 환율변동이 금융부문의 대차대조표에 미치는 효과를 강조한다. 개도국 은행 및 기업들의 해외차입은 주로 달러로 이루어지는 반면, 수익은 자국통화로 발생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통화불일치의 문제를 안고 있고, 따라서 환율이 급등하면 부채의 가치는 늘어나지만 수익은 그대로이므로 파산 압력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또한 단기로 차입하여 장기로 대출하는 은행 특유의 만기불일치 문제로 인해 환율이 급등하는 상황에서는 외화차입의 만기연장이 되지 않는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통화의 국제교환성을 갖추지 못한 개도국의 경우, 금융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지금 세계는 한 세기 전의 상황에 비견되는 또 다른 세계적 불균형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삐걱거리기는 하지만 그나마 국제공조의 틀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한 세기 전처럼 세계경제가 붕괴되는 양상으로 재편과정에 들어가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또 다른 30년 동안의 기나긴 침체국면을 경과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일국적 차원의 안정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고, 세계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노력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가 지적했듯이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는다”, 30년 후에 세계경제가 도달할 모습을 경정하는 것도 결국은 하루하루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퇴적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세계경제 결정론이 자칫 우리 내부의 문제를 은폐하고 모든 것을 외부 탓으로 돌리는, 그럼으로써 작금의 기득권 구조를 계속 연장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거시정책은 의외로 이데올로기의 대결장이다.
4장. 기형적인 양극화는 계속되는가
1960년대 경공업의 수출산업화 시기,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 시기, 그리고 1980년대 중화학공업의 수출대체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산업구조도 상당히 성숙되어 이제는 빈틈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는 전통산업에서 새로운 산업으로 자원이 재배분되는 산업 간 구조개편의 시기였고, 그 결과 특정 부문의 성장의 과실이 국민경제 전체로 비교적 빠르게 확산되었다. 반면 1990년대부터는 산업 간 구조개편보다는 하나의 산업 내에서 기업규모별 구조개편이 일어나는 환경으로 바뀌었고, 드디어 낙수효과는 소멸되기에 이른 것이다. 1987년의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를 지나면서 정부의 규제와 노동계의 저항에 직면한 재벌계 대기업들이 고용과 생산을 직접 확대하기보다는, 중소기업들을 하도급거래 관계에 배치하고 이를 통해 소재, 부품 조달 및 노무관리의 간접지배 체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대신 재벌계 대기업들은 핵심공정 및 연구개발 분야에 지원을 집중 투입함으로써 생산성 우위를 계속 확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재벌은 독점자본으로 성장했다. 동시에, 재벌은 여전히 천민자본의 성격을 완전히 탈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하도급거래 관계에서의 불공정성 문제와 노무관리에서의 전근대성 문제가 덧씌워졌다. 이것이 1990년대 이래 기업규모의 영세화와 기업규모별 양극화 현상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난 국내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개혁 정책과 하도급거래 공정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2부. 한국경제 횡단_구조분석과 개혁 방향
체제는 상호작용하는 여러 부문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한 부문에 대한 개혁방안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부문의 작동원리와 양립하기 어렵다면 그 결과는 불문가지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예를 들어, 보수진영의 정책 제안들을 살펴볼 때마다 느끼는 황당함이 있다. 그들은 감세와 작은 정부의 당위성, 개방에 따른 국민경제 전체의 이익, 노동시장 유연화를 주장한다. 여기까지는 이른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이다. 그런데 곧이어 금산결합의 우월성, 자본시장보다 효과적인 은행의 역할, 외국자본의 위협에 대한 경영권 방어 장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경우에는 이른바 유럽대륙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에 가깝다. 하나하나의 정책 제안들이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나의 의문은 이런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는 원리가 무엇이고, 그것이 실행 가능하냐는 것이다.
제도적 상호보완성에 대한 고민의 보족은 진보진영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물론 진보진영은 그 특성상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모두 갖춘 일관된 정책 패키지를 구성하는 데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각 부문별 정책들을 연결하는 가정들 중 어느 하나라도 삐끗하면 전체 패키지가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현실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가정은 돈이다. 재원 조달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정책 패키지 중 일부는 축소되거나 이연된다. 그러면 설계도상으로는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해야 할 각 부문의 변화속도에 상당한 시간 지체가 발생하고, 결국 전체 패키지의 유효성이 크게 떨어진다. 특히 변화속도가 빠른 부문과 상대적으로 느린 부문에서 모두 주요 이해관계자들의 저항이 발생하고, 그래서 개혁은 좌초된다. 진보정권이 실패에 이르는 주요 경로가 이런 식이다.
5장. 성장의 엔진인가, 탐욕의 화신인가
재벌이 생산성 향상을 기반으로 국내외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는 것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시장지배력 남용의 결과이거나 이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고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길을 막고 있다면,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선순화 구조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첫째, 기업의 민주화는 정치 민주화와는 다르다. 투자와 같은 전략적 경영판단을 내릴 때마다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투표로 결정할 수는 없다.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있는 독일 기업도 그렇게 하지 못하며, 심지어 구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지주관리기업도 실제로 그렇게 운용되지 않았다. 전략적 경영판단은 고도의 전문적 능력을 필요로 하며,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신축적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경영 판단은 좋든 싫든 소수 의사결정자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기업경영의 현실이다. 따라서 건전한 기업지배구조는 소수 의사결정자에게 충분한 재량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재량권은 언제나 오‧남용될 소지를 안고 있다. 소수 의사결정자의 부주의 또는 사익을 추구하는 부당행위로 인해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소중한 권리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면, 그 기업은 결국 망하게 된다.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권익이 충실히 보호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소액주주들이 주식에 장기투자함으로써 안정주주의 역할을 하고, 노동자들이 숙련을 쌓기 위해 교육훈련을 충실히 받고 채권금융기관들이 장기저리의 자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협력기업들이 고품질의 소재부품을 공급하기 위해 연구개발투자를 하고, 소비자들이 브랜드 로열티를 갖는 충성고객이 되고, 지역주민이 그 기업의 입주를 희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기업지배구조는 다수 이해관계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장치를 요구한다.
결국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소수 의사결정자의 재량권 인정’과 ‘다수 이해관계자의 권익보호’라는 모순된 두 가지 요건을 조화시켜나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재벌기업은 기업집단이다. 다수의 계열사가 공통의 지배권 아래 선단식으로 경영되고 있다. 기업진단 체제는 다수의 계열사 간의 시너지 효과를 내부화하면서 대규모 투자에 따른 위험을 분산하는 등 많은 장점을 가진 기업조직 형태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법은 기업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별기업만을 규율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법인이 다른 법인의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기업집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부터다. 따라서 기업집단이 경제활동의 핵심 주체로 등장한 것은 이제 10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며, 이에 대한 규율 체계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나라마다 다르다.
6장. 동반성장은 허구인가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시장거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를 대체하는 위계질서하의 기업조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전문 기능이 요구되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필요할 때마다 그 기능을 구매(시장거래)할 수도 있지만, 아예 프로그래머를 고용해서 작업을 지시(기업조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시장거래를 선택하고, 어떤 경우에 기업조직을 선택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바로 거래비용학파(또는 신제도학파)가 제공한다. 요약하자면,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거래상대방을 탐색하여 거래조건을 협상하는 시장거래보다는 거래상대방들이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여 필요한 경제활동을 내부화함으로써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기업이 바로 이러한 의미의 조직이라는 것이다. 거래비용학파의 논리를 통해 기업집단의 발생 배경과 그 조직형태의 변화도 새롭게 해석할 수가 있다. 어느 한 기업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기업과 구매, 판매의 시장거래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지만, M&A를 통해 계열사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거래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기업집단의 시너지 효과이고, 기업집단 역시 시장거래를 대체하는 위계질서하의 조직이다.
하도급구조의 피라미드형 중층화는 위탁 모기업의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된다. 모기업이 다수의 1차 수급기업과 직접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많은 관리비용을 유발하므로, 1차 수급기업을 소수정예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소수정예화된 1차 수급기업이 2차 이하의 수급기업을 직접 관리하면서, 단순 기능의 단품이 아닌 반제품, 더 나아가 일정 기능을 완결적으로 수행하는 모듈 형태로 부품을 공급함으로써 최종 조립단계에 있는 모기업의 생산공정을 대폭 단축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장점은 특히 자동차산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자동차회사들의 경쟁력 우위를 설명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그러나 중층적 하도급구조를 확립하는 데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따른다. 바로 1차 수급기업이 기술적으로나 재무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능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품소재 분야에서 튼튼한 체력을 갖춘 전문 중견기업들이 형성되어, 이들이 최종 조립단계의 모기업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하도급구조는 위탁 모기업이 조그마한 부품회사와도 직접 거래하는 역피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대중소기업 간의 상호협력에 기초한 생산성 향상 측면보다는, 중소 수급기업의 저렴한 인건비에 기초한 대기업의 가격경쟁력 확보 측면에서 더 큰 강조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소기업이 제공하는 고용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사회 양극화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중소 수급기업이 거래하는 모기업을 유형별로 나누어보면, 거래 모기업이 중소기업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전체의 60% 안팎에 이르고, 거래 모기업에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섞여 있는 경우도 그 비율이 점차 상승하여 최근에는 30% 수준에 달한다. 반면, 거래 모기업이 대기업만으로 구성된 경우는 20% 수준에서 최근에는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즉 하도급거래 관계가 대중소기업 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비중으로 본다면, 중소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하도급거래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도급 거래관계는 시장거래도 아니고 조직 내부 관계도 아닌, 그 중간의 준내부조직적 관계다. 따라서 하도급거래를 순수한 사적 계약의 영역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조립가공업종은 대단히 독점화된 시장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하도급거래에서 대중소기업 간에 현격한 협상력의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컨대 일본의 자동차산업에는 완성차업체가 10개가 넘고, 이들이 해외 수출시장에서는 물론 방대한 내수시장을 대상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완성차업체가 사실상 3개사만 남았고, 그중에서 현대기아차가 70%를 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할 정도로 독과점화되어 있다. 이런 조건에서 대중소기업이 매일 얼굴을 맞대고 주문생산 방식의 수위탁 거래를 한다면, 사실상 그것이 전속 노예계약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겠는가?
7장. 시장중심인가, 은행중심인가
금융제도는 미국‧영국식의 시장중심 체제와 독일‧일본식의 은행중심 체제로 단순하게 유형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장중심 체제는 사후적 제재ex post sanction에 강조점을 둔다. 즉 금융회사와 차입기업이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차입기업의 성과가 나쁘면 금융회사는 가차 없이 자금을 회수하는 제재를 가한다. 이런 사후적 제재를 받지 않으려면 차입기업은 경영성과를 올리기 위해 사전적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시장 중심 금융제도는 부실기업을 신속하게 구조조정하는 압력으로 작용하며, 주주 자본주의 모델의 핵심 구성요소가 된다. 물론 금융회사의 단기적 시각으로 인해 기업경영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나아가 자금의 최종 수요자와 공급자의 이익보다는 금융회사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경향을 초래한다. 이것이 이른바 월가의 탐욕 문제다.
반면, 은행중심 체제는 사전적 조정ex ante coordination에 강조점을 둔다. 은행과 차입기업이 장기지속적인 거래관계를 유지하면서 자금의 양과 용도에 대해 꾸준히 협의한다. 또한 이런 사전적 조정을 통해 부실기업의 발생 가능성을 낮춤으로써 사후적 제재의 필요성을 줄이고자 한다. 아무리 그래도 부실기업은 발생하기 마련인데, 단기적 유동성 문제라고 판단되면 은행은 인내심을 갖고 계속 자금을 공급하지만, 근본적 지급불능의 문제라고 판단되면 주거래은행 주도로 구조조정이 추진된다. 그래서 은행 금융제도는 자금공급의 안정성 측면에서 강점을 갖고 있으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에 더 친화적이다. 그러나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자칫 경제 전체의 활력이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다.
차입기업과 주거래은행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한 자생적 제도로 발전했던 독일,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주채권은행 제도는 정부의 관치금융을 위한 행정편의적 장치였을 뿐, 차입기업의 경영에 대한 사전적 조정기능을 수행한 바가 없다. 한국식 자본시장은 계열 증권사, 투신사, 보험사를 통한 재벌의 자금조달 창구였을 뿐, 미국, 영국에서처럼 경영성과가 부진한 기업에 대한 사후적 제재 기능, 특히 M&A를 통한 경영권 이전의 역할을 수행한 바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부실기업을 구조조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용되는 워크아웃 절차는 영국의 런던 어프로치London approach를 참고한 것이다. 이는 채권금융기관과 차입기업 간의 사적 협의를 통해 효율적인 채무조정 계획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신뢰할 수 있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되었다. 그런데 런던 어프로치는 주요 금융회사, 기업, 중앙은행의 임원들이 모두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합성어) 동문이라는 영국 특유의 클럽 문화를 전제로 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이 한국적 상황에서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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