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iscourse Upon The Origin And The Foundation Of The Inequality Among Mankind
2018. 4. 30
책세상
제1장
머리말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이의 기원을 인간 구조의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서로 평등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종류의 동물이든 여러 가지 물리적 원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몇몇 변종들을 발생시키기 전에는 모두 평등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을 이미 완성된 모습으로 보는 방법만을 가르쳐주는 학술 서적을 제처두고 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사회성의 원리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모든 규칙들은 우리의 정신이 이 두 가지 원리 사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치와 조합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인간 사회를 침착하고 냉정한 눈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억압 상태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전자의 냉혹함에 분개하거나 후자의 맹목을 한탄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지혜보다는 종종 우연에 의해 조성되고 강약이나 빈부로 칭해지는 저 외면적인 관계처럼 불안정한 것은 없으므로, 인간이 만든 제도는 언뜻 보기에 모랫더미 위에 지어놓은 건물처럼 보인다.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 건강, 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다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이 논문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이 진보하는 가운데 폭력에 이어 권리가 생기고 자연이 법에 굴복한 시기를 지적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떠한 기적의 연쇄로 인해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 인민이 현실의 행복을 대가로 하여 관념 속에서 안식을 찾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제1부
우선 나는 동물을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밖에 보지 않는다. 자연은 그 기계가 스스로 작동할 수 있도록, 또한 그것을 고장내거나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감각이라는 것을 부여했다. 나는 인간이라는 기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동물의 활동에서는 자연만이 오로지 모든 것을 행하는 데 반해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연의 활동에 협력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즉 동물은 본능에 따라,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에 따라 취사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동물은 자기에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에게 아무리 유리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신에게 해로워도 종종 그 규칙을 벗어나 행동한다. 그리하여 비둘기는 제일 좋은 고기만 가득 담긴 그릇 옆에서도 굶어 죽기 일쑤고, 고양이는 수북이 쌓인 과일이나 곡식 위에서도 굶어 죽기 일쑤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욕망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자가 무엇 때문에 애써 이치를 따지려고 하겠는가? 정념도 우리의 욕구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지식을 통해 진보해간다. 인간은 단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관념에 의거해서, 혹은 자연의 단순한 충동에 의해서만 사물을 욕망하거나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개인은 모든 종류의 지식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이 마지막 종류의 정념들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의 욕망은 육체적인 욕구를 초월하지 못한다. 그들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행복은 음식과 이성과 휴식뿐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불행은 고통과 굶주림뿐이다.
적어도 자연이 사람들을 서로의 욕구에 접근시키고 그들에게 언어의 사용을 쉽게 하기 위한 배려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자연이 그들의 사회성을 마련하는 일에 얼마나 인색했으며,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인간관계를 위해 시도한 모든 일에 대해 자연이 기여한 바가 얼마나 적었던가를 알게 한다.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를 묻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삶을 한탄하는 사람들밖에 찾아볼 수 없으며,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자기 삶을 포기하려고까지 한다. 나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미개인이 일찍이 삶을 한탄하여 자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런 후에 좀더 겸허한 마음으로 어느 쪽이 정말로 비참한가를 판단해보기 바란다.
결론을 내려보자. 실제로 사람들을 구별시키는 차이 가운데 몇 가지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습관의 산물이거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채택하는 여러 가지 생활양식의 산물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튼튼한 체질이냐 허약한 체질이냐, 이로 말미암아 힘이 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은 최초의 체질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오히려 그 양육 방법이 엄격한가 아니면 유약한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자연 상태에서는 불평등을 거의 느낄 수 없으며 그 영향도 거의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 나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자기 완성 가능성이나 사회적인 덕성, 그 밖에 자연인이 잠재적으로 받은 여러 가지 능력은 그 자체만으로 결코 발전할 수 없으며, 그 발전을 위해서는 외부적인 원인 ㅡ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원시적인 처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ㅡ의 우연한 협력이 필요했음을 밝혔으므로, 이제 나는 인간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써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에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검토하고 비교해보려 한다.
제2부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사람들은 투박한 오두막에 만족하는 한, 짐승 가죽으로 된 옷을 동물의 뼈나 가시로 꿰매고, 깃털과 조개껍질로 몸을 장식하고, 갖가지 색깔로 몸을 칠하고, 활과 화살을 개량하거나 치장하고, 날카로운 돌을 가지고 고기 잡는 조각배나 조잡한 악기를 다듬는 데 만족하는 한, 요컨대 그들이 혼자 할 수 있는 작업과 다른 사람의 협력이 필요 없는 기술에 전념하는 동안, 그들의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계속해서 상호간에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괴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대한 숲은 인간의 땀으로 적셔야 할 들판으로 변했으며, 머지않아 그 들판에서는 수확과 더불어 예속과 비참이 싹트고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야금술과 농업이라는 두 가지 발명은 이러한 거대한 변화를 낳은 두 가지 기술이었다.
토지의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낳았으며 일단 소유가 인정되자 정의에 관한 최초의 규칙이 생겼다. 각자의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각자가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미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장차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재산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기가 남에게 끼칠지도 모르는 피해가 바로 자기에게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원은 이제 막 생겨난 소유의 관념이 육체노동 이외의 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만큼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직 노동만이 경작자에게 자신이 경작한 토지의 산물에 대한 권리를 적어도 수확기까지 부여하며, 따라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해마다 보유할 수 있게 해준다.
부를 나타내는 표시(화폐)가 발명되기 전에는 부는 주로 토지와 가축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실질적 재산이었다. 그런데 상속 재산의 수나 범위가 늘어나 땅 전체를 덮고 서로 경계를 접하게 되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자기 재산을 늘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무력하거나 무관심했기에 제대로 상속을 받지 못한 자들은 주위의 변화를 따라가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지만 가난뱅이가 되었고 부득이 먹고 살 것을 부자에게서 얻거나 빼앗아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 각자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 지배와 굴종 또는 폭력과 약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편 부유한 자들은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다른 모든 쾌락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새로운 노예를 얻기 위해 기존의 노예를 부려 이웃 사람들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부자는 그의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가 서로에 대해 무장하고 그들의 소유를 그들의 욕구와 마찬가지로 부담스럽게 하며 가난하든 부유하든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의 두려움을 설명했다. 그 후 부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쉽사리 생각해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해 단결합시다.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규칙을 정합시다. 현명한 법률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성원을 보호하고 방위하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우리를 단합시키는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러하거나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와 영원을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단 하나의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사회의 성립이 어떻게 필요하며, 상대의 단결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쪽에서 어떻게 단결해야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사회는 급속도로 수가 증가하고 면적이 늘어나 마침내 지구 표면 전체를 덮어버렸다. 이리하여 시민법이 공동체 성원들의 공통된 규칙이 되었으므로, 자연법은 서로 다른 사회 사이에서만 유지되었다. 이로써 자연법은 국제법이라는 명칭으로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자연적 동정심을 대신하는 것으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동정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행사하고 있던 모든 힘이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는 거의 상실되고 말았다.
마침내 이유도 모르면서 서로 수천 명씩 학살했고,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지구의 전 지역에서 몇 세기에 걸쳐 저지른 것보다 더 많은 살육이 단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자행되었으며, 한 도시가 점령될 경우에는 더욱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정부는 단지 전제적인 권력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다. 전제적인 권력은 정부의 부패가 극에 달한 형태에 불과하며, 결국은 정부ㅡ애초에는 그러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정부가 만들어졌다ㅡ를 유일한 강자의 법으로 이끌게 된다. 또한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전제적인 권력은 본래 비합법적인 것으로 사회의 제반 법률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제도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토대를 제공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 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주인과 노예 상태는 불평등의 마지막 단계로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 정부 권력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정당한 제도에 가깝게 만들 때 까지는 다른 모든 단계가 거기로 귀착된다.
정치상의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들 간의 차별을 가져온다. 인민과 통치자들 사이에 증가되어가는 불평등은 이윽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느껴지게 되며, 정념이나 재능에 따라, 그리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뀐다. 위정자는 권력을 탈취할 경우에 그 일부를 나눠주어야 할 부하를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을 부리려는 야심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자를 복종시키기란 매우 힘들다. 아무리 교묘한 정치가라도 자유롭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을 예속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운명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거의 무차별적으로 지배하기도 하고 봉사하기도 하는 야심 많고 비겁한 자들 사이에서는 불평등이 쉽사리 퍼져나간다.
차별은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 신분이나 지위, 권력, 개인적인 장점이 주요한 구분 기준이 되며 여기에 따라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위치를 차지하므로, 나는 이들 서로 다른 세력의 조화나 충돌이 국가의 구성이 좋은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임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이 네 가지 불평등 중에서는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 다른 모든 것의 기원이므로, 부가 다른 불평등들이 귀착되는 근원적인 불평등임을 보여줄 수 있다. 부는 가장 직접적으로 악락을 위해 도움이 되며 가장 쉽사리 전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그 밖의 모든 것을 사들이기 위해 이 부를 자유롭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 정치적인 사회의 성립과 폐해를,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할 수 있는 범위에서 오로지 이성의 빛에 따라, 그리고 최고 권한을 가진 권력에 대해 신의 권리를 결재하여 허가하는 신성한 교의와는 무관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통해,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모든 문명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는 불평등의 형태를 이 점과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충분한 답을 준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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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예술론>에서 루소는 학문과 예술의 발달이 도덕의 타락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또 학문과 예술은 인간이 바라고 즐기는 나태, 허영, 사치 등에 의해 촉진된다고 말한다. 루소는 특히 사치의 문제점을 강조한다. 학문과 예술이 없는 곳에서는 사치가 번성할 수 없다. 도덕의 붕괴는 사치의 당연한 결과다. 게으름에서 사치가 생기고 그리하여 인간은 타락하고 노예가 된다. 이것이 모든 문명이 발달해온 역사다. 그러므로 자연 그대로 머무는 것이 인간에게는 큰 축복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인간이 타락하는 상황과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다룬다. 그는 고대 세계의 때묻지 않은 문명에 눈을 돌려, 아무도 그 진정한 특질을 발굴해내지 못한 원시 사회의 조건과 원시인의 본성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이 책에서 루소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사치 때문이 아니라 불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본래 평등했던 인간이 어떻게 불평등의 길로 들어섰는가를 조직적으로 탐구한다.
루소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문명 이전에 인간 자체가 지녔던 근원적인 모습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소가 상상한 원초적 자연 상태의 인간은 ‘고독하고 무사태평하고 평화로우며, 건강하고 튼튼하며, 자연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생각도 정열도 없고, 예측도 기억도 없는 동물’이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해서 사회적 질서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상호간에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홉스의 성악설에 루소는 정면으로 반대한다. 루소가 생각하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악 개념, 미덕과 악덕의 개념 이전에 있기 때문에 악하지 않으며, 악해야 할 이유도 없다.
만인이 평등을 향유할 수 있었던 원초적 자연 상태는 행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자연적 장애, 다른 동물들과의 다툼, 인간의 점차적인 수적 증가에 따른 먹이의 상대적 결핍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숲속을 홀로 떠돌며 지내던 인간은 점차 한데 모여 함께 살아가게 된다.
공동생활의 경험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과 감정을 낳았다. 인간은 이제 타인들에게 인식되고 가장 강한 사람이나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비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의 존재가 상대화되고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
사적 소유가 정립된 다음에 야금술과 농업 기술이 발달했을 것이다. 이것은 땅의 생산성을 높이고 동시에 땅 소유자와 비소유자 사이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했을 것이다. 생산 수단의 사유화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종속적으로 만든다. 개인의 가치는 존재에서 소유로 바뀌게 된다. 마침내 상속의 작용에 의하여 토지 전체가 특정한 인간들의 사유물로 되면 약하고 능란하지 못하고 앞날을 예측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전에는 공동의 재산이었던 것을 완전히 박탈당하게 된다.
평등이 깨지고 난 후의 상황은 끔찍스러운 무질서의 세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이는 이런 무정부 상태에서 부자들은 빈자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한다. 그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재산도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법률과 경찰력에 의해 처방되는 치안 질서 유지를 강력하게 희망하게 되었다. 반면 빈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부자들의 재산을 공유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가난한 자들은 영원한 노동과 비참과 예속으로 몰리게 되었고, 소유와 권력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사회적 질서의 확립이라는 이 결정적 단계를 넘어선 후 인간들은 각종 정부 형태를 채택한다. 그러나 각 정부 형태는 도덕적 구분을 합법화하고 그런 구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므로, 어떤 것이든 부자의 지배를 강화하고 빈자의 의무를 증강시키는 양상을 밟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사회 내의 인간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변모되어 버린다.
이렇게 하여 가장 힘센 사람이 지배하는 새로운 자연 상태가 정립된다. 이것은 최초의 순수성을 유지한 자연 상태가 아니라 과도한 타락에 바탕을 둔 자연 상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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