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24, ㈜웨일북
관계의 아득함. 소통의 노력이 온갖 오해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이해. 이것이 외로움의 본질이다. 당신에게 불현 듯 휘몰아치는 깊은 고독과 쓸쓸함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외로워지거나, 타인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매번 좌절하거나.
세계는 언제나 자아의 세계다. 객관적이고 독립된 세계는 나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해석한 세계에 갇혀 산다. 이러한 자아의 주관적 세계, 이 세계의 이름이 지평(地坪, horizon)이다. 지평은 보통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말하지만,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자아의 세계가 갖는 범위로 사용한다. 즉, 지평은 나의 범위인 동시에 세계의 범위다. 우리는 각자의 지평에서 산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인의 손을 잡을 때, 세계의 구조는 재편되고 나와 그 사람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다. 연애는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표면적인 사실을 넘어선다. 연애는 세계의 문제다.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이것이 사랑하는 이를 만난다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다. 이제 그의 지평은 나의 지평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결국 나의 세계와 겹쳐진다. 나는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기존의 세계에는 없던 신비하고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그의 향기, 그의 옷가지, 그의 가구들, 그의 취향, 그의 언어, 그의 습관들, 그의 세계관. 나는 그가 먹는 것을 먹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 하며, 그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과거를 사는 사람들은 두 종류다. 어떤 사람들은 후회 속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그리움 속을 살아간다. 그의 과거는 강력하게 현재와 미래를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하나의 과거가 된다.
미래를 사는 사람들 역시 두 종류다. 어떤 사람들은 희망 속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불안 속을 살아간다. 그의 미래는 강력하게 그의 현재와 과거를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하나의 미래가 된다. 부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멸을 인지하기 때문에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이들은 철학적인 사람이 되거나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타당한 근거로 이들을 부정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부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멸에 집중하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종교나 사후세계, 형이상학적인 무언가에 집착한다. 이들은 허황된 것들을 좇다가 정작 중요한 현실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타당한 이유를 대고 반대편의 입장을 비판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러한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삶이고, 타인의 내면에서 평가될 일이다.
나는 미래의 죽음을 끌어와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의 삶에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잠식하고 있는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과학의 주장은 합리적인가? 죽음 이후의 문제는 알 수 없다며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괜찮은 태도인가? 혹은 죽음 이후에 신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 태도는 문제가 없는가?
나이가 든다는 건 다행이다. 어린 날의 들뜸과 격정은 가라앉고, 섬세함은 무뎌지고, 무거움은 가벼워진다. 죄책감은 줄어가고, 헛된 희망은 사라지고, 안타까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기진맥진하며 통증과 상념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 순간 통증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말’이다. 신체가 나에게 건네는 말. 입이 없는 신체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에게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 통증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증은 자아와 신체가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이고, 동시에 자아와 신체는 통증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나는 통증을 통해 비로소 내 신체의 내면을 보고, 신체는 통증을 통해 내면을 보는 나를 본다.
만약 그러하다면, 통증이 하나의 관계 방식이라면, 통증은 나의 아픔이라는 주관적 상태에 한정되지 않고 보편적 지위를 획득한다. 즉, 내가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도 넓은 의미에서의 통증인 것이다. 나와 나의 신체가 그러하듯, 나와 타인도 통증을 통해 관계를 맺고 통증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의 통증을 통해 비로소 신체의 껍질 안쪽으로 펼쳐진 타인의 내면을 보고, 타인은 통증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보는 나를 본다.
첫 만남, 애착과 마음 씀, 설레며 기다리던 시간, 그를 안던 밤, 익숙함과 오해, 권태와 멀어짐, 이별과 그리움, 나를 휘몰아치는 강렬한 자극의 한가운데 앉아서 나를 불러낸 그의 맨얼굴을 들여다본다. 그의 예쁜 눈과 코와 입을 기억한다. 우리의 사소한 말과 행위는 언제나 거대한 이유와 목적으로 해석되어 서로의 가슴을 물어뜯었고, 풀리지 않은 오해는 해명의 기회도 허락받지 못한 채 영혼의 깊은 상흔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세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나의 세계 안에는 무엇이 있고,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혹시 나는 고집스레 단일한 진리관을 움켜쥐고 빈곤하게도 이것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닌지를. 또한 외부의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단순히 비진리라 규정해버림으로써 그것을 안 봐도 괜찮은 것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던 것은 아닌지를.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이라면 점검해봐야 한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흑과 백으로 칠해진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미디어에 교수님이 나와서 말씀하신다. ‘인문학의 본질은 질문하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인문학은 모두의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논쟁하며 자신의 철학을 개진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전공한 전문가들의 분석과 해석을 들으며 그들의 말을 받아 적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할은 명확하다. 사유와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 있고, 그것을 다만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여야만 하는 소비자로서의 대중이 있다. 이것은 이상하다. 인문학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또한 질문하고 사유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어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생산자의 역할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만을 갖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잘 모르고 틀릴 수도 있으니까 정제되지 않은 내 생각을 말하는 것보다 프로페셔널한 교수님과 학자들이 말해주는 정답을 받아 적겠다. 그렇게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나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남는다.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장황하게 부연설명을 반복해서 나의 영혼까지 탈진시키는 습관을 가진 사람과, 반대로 충분히 설명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고는 나중에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고 나에게 화를 내는 습관을 가진 사람.
나는 너무 어릴 때부터 책을 읽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습관은 어릴 때부터 잡아주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한국의 부모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으나, 어릴 때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부모들의 욕망과 강요 때문에 아이들이 책을 집고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다 읽어낸 듯 행동하지만, 그것은 부모로부터 칭찬받고자 하는 심리에서 기인했을 뿐이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일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어를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펴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글을 깨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체험이 필요하다. 독서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한글이 아니라 선체험이다. 우리는 책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우리가 앞서 체험한 경험이 있는 책을 통해 정리되고 이해될 뿐이다.
질문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보통 답변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수많은 질문과 답변 중에는 답변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무(無)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둥근 삼각형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언어로는 표현 가능하고 한 번쯤은 생각해볼 만하지만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도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질문에 제시된 개념이 이미 질문 안에서 한계 지어지거나 모순되기 때문이다. 적절한 질문이 필요한 이유다. 질문은 숙제가 아니라 열쇠다. 적합하고 정확한 질문은 진리의 빗장을 풀고 우리를 세계의 비밀 안으로 들어서게 한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비용과 오랜 시간을 들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도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그 노력은 끝내 결실 맺지 못한다.
나와 독립해서 홀로 존재하는 세계는 나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세계는 자아와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세계는 언제나 자아라는 그릇에 담긴다. 그래서다. ‘세계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이유는. 현대과학의 발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이 질문이 진짜 어려운 이유는 ‘세계’의 문제가 보는 존재로서의 ‘자아’의 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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