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다>
나는 평생 누굴 보고 겁을 먹은 적이 거의 없어. 헤겔, 칸트도 나는 무섭지 않았어. 나는 내 머리로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하나 내 머리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은 흔치 않거든.
언젠가 바이오 학술대회가 열려서 복제 양 돌리를 만든 이언 월머트 박사가 왔었지. 내노라하는 국내 과학기술 관료들이 다 모였는데, 정작 메인 스피치는 과학자가 아닌 날더러 하라더군. 자율 자동차나 AI 관련 국제 행사를 해도 글로벌 지식인들 앞에서는 날더러 기조 강연을 하라고들 해. 왜 그럴까? 무슨 말을 해도 내가 하면 인문학적 접근이 되기 때문이지. 과학자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는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야.
머리는 자기 것이지만 생각은 남의 것이니 문제지. 중국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 줄 아나? ‘선왕께서 말하기를...’이야. 먼저 말한 모델이 있어야 인정을 해줘. 모델 애착이지. 어쩌면 그래서 두 글자 언어, 사자숙어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윗세대의 말만 달달 외우다 끝이 나거든. 내 머리로 생각하면 전혀 다른 앵들이 나와.
무엇이든 만장일치라면 그건 한 명과 다름없네. 그러면 왜 민주주의를 하나? 왕이 다스리고 신이 통치하면 되는거지.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풀을 뜯어먹는 소처럼 독서하라>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네.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 꽃 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 난 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 외울 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져 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그 기나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나는 세 번을 읽었어. 의무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말이네. 사람들도 친구 사귈 때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사귀잖아.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 거지. 책을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아? 아니야.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진실이 있다>
큰 얘기들은 다 똑같아. 큰 얘기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었다’가 전부야 큰 이야기를 하면 틀린 말이 없어. 지루하지. 차이는 작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거든. 디테일 속에 진실이 있다고. 외국 논문을 보면 모든 게 아주 작고 시시콜콜한 데서 시작해. 구체적이지. 반면 우리나라 논문은 「8.15 해방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이런 식이야. 안타까운 일이네. 한국 유학생들이 유학 가서 지적받는 게 뭔 둘 아나? 문제를 구체화하지 않고 일반화한다는 거야. 한국인들은 공통적으로 거대담론을 좋아해. 나도 그런 특성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아주 작고 사소하고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추상적인 이야기는 질색이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선생이 씹어주는 지식으로 정신의 허기를 채우고, 나눠 준 음식으로 육체의 허기를 채운 날이면, 한동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 음식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끼니때가 되어도 주리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익을 내려면 관심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탤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우리는 겉으로 반짝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반짝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게. 위대한 철학이 왜 대화에서 나왔겠나. 대화는 변증법으로 함께 생각을 낳는거야. 부부가 함께 어린아이를 낳듯이. 지식을 함께 낳는 것. 그게 대화라네. 이제 이 글은 내 거야! 단언하지 않아. 모든 텍스트는 다 빌린 텍스트야. 기존의 텍스트에 반대하거나 동조해서 덧붙여진 것이거든. 텍스트는 상호성 안에서만 존재해.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닌 한 커트의 프레임>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머니 곁으로....
인간이 태어나서 사는 과정이 그래. 아기 때는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떨어지면 죽는 줄 알지. 그러다 대문 밖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하고 정신 빼놓고 놀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지. 그러다 부르면 화들짝 놀라서 원위치로 가는 거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거라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자리로 가는 거라네.
<성실한 노예의 딜레마>
매스게임 하지 않고 굴렁쇠를 굴리며 산 삶. 그것을 좌와 우의 개념으로 보면 안 되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으로 보면 안 돼. 자본주의라도 노동은 재미없는 거야. 인생 그렇게 살면 노예 되는 거야. 노예는 사회주의에도 있고 자본주의에도 있어. 반대로 예술은 사회주의에서도 할 수 있고 자본주의에서도 할 수 있어. 단. 그러려면 자유의지가 있어야 하네.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해. 그게 선이든 악이든 일단 나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 거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신에 가까운 자유의지를 갖게 되는 거야. 신이 그것을 허락한 거야. 신은 자유의지를 가져도 실수를 안 하는데, 인간은 실수할 수 있어. 악도 선도 행한다네. 그래서 선악과야. 그게 인간의 원죄인 거야.
<상처를 가진 자가 활도 가진다>
인간은 다 다른 삶을 살고 있어. 그러나 추위처럼 모두가 느끼는 감각이 있네. 인류 공통의 아픔이 있으면 내 추위와 남의 추위의 공감이 일어나는 거야. 외로운 섬, 무인도의 삶에서 광장의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가 그래서 나온 거야. 타자의 자리, 그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타자의 고통을 내 시야에서 단정 내리면, 모든 그림이 단순해지고 왜곡이 생겨. 인간은 타자의 고통을 해결해보려고 분배의 문제로 풀어서 사회주의와 자본조의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그 복잡성에 부딪히고 말았네. 사회주의가 그렇게 쉬운 선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그렇게 쉬운 악이 아니었던 거지.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
‘나는 혼자다’라는 걸 모르는 사람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아. 군중은 남이 이 말 하면 이리로 가고, 남이 저 말 하면 저리로 가지. 휩쓸려 다녀. 자기가 없으니까 자꾸 변하는 거라네. 자기는 남에게 배울 것도 없고 남을 가르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라고 할 수 있지.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외로워보지 못한 사람, 내가 혼자라는 걸 느껴보지 못한 사람과는 대화해도 소용없다네. 외로움 속에서 자족을 배운 군자가 있기에, 세상의 가르침과 배움이 있는 거지. 한편으론 군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거라네. 자족을 이룬 사람이 군자, 못 이룬 사람이 예술가라고나 할까. 시나 소설은 그렇게 고립된 예술가들이 에고이스트적인 힘으로, 인격적으로 결함을 가진 채 세상에 내놓는 말들이야.
<지혜자 혹은 광인>
지혜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슬픈가 말이야.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몰라. 신은 안 죽지. 그런데 인간은 죽는 것의 의미를 아는 동물이야. 신과 동물이 함께 있으니, 비극이지. 신과 생물의 중간자로 인간이 있기에, 인간은 슬픈 존재고 교만한 존재지. 양극을 갖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
<돈의 길, 피의 길, 언어의 길>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을 하며 살아가지. 우리가 숨 쉬는 것도 식물과의 교환이야. 우리는 탄소를 내뱉고 식물은 산소를 내뱉지. 모든 생명가치는 교환인데, 교환의 핵심은 세 가지야.
첫 번째는 피의 교환. 그게 사랑이고 섹스지. 사랑은 생식이라는 목적을 벗어나지 않아. 교환가치가 없다면 인종은 멸종되겠지. 다음은 언어 교환. 그리고 돈의 교환이라네. 돈의 교환을 통해 생산과 소비와 시장이 만들어지는 거지. 내 말이 아니라네. 레비스트로스가 문화인류학에서 설명한 인류사의 3대 교환 구조지.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인가? 내가 돈의 주인이 되면 돈은 나의 최고의 협력자고, 하인이 되면 나는 최악의 인간이 되는 걸세.
<리더는 사잇꾼, 너와 나의 목을 잇는 사람들>
에너미enemy는 안 돼. 라이벌rival이어야지. 라이벌의 어원이 리버river야. 강물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가 서로 사이가 나빠. 그런데도 같은 물을 먹잖아. 그 물이 마르고 독이 있으면 동네 사람이 다 죽으니, 미워도 협력을 해. 에너미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지만, 라이벌은 상대를 죽이면 나도 죽어. 상대가 있어야 내가 발전하지. 기업도 마찬가지라네. 대기업과 중소기업, 벤처는 에너미가 아니라 라이벌이야. 큰 조직은 작은 조직의 모험 정신을, 작은 조직은 큰 조직의 시스템을 배우며 수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해야 해.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인터페이스야. 위치로 보면 목! 머리와 가슴을 잇는 목, 손과 팔을 잇는 손목, 발과 다리를 잇는 발목. 모든 국가, 모든 기업, 모든 개인은 이 목이 가장 중요해. 이쪽과 저쪽을 사이좋게 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21세기의 리더고 인재라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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