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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Ecomomics

거대한 전환 by 칼 폴라니

by hoyony 2018. 4. 20.

The Great Transformation


도서출판 길
2009
Karl Polanyi


제1부 국제 시스템

제1장. 백년 평화

19세기 문명이 무너졌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정치적, 경제적 여러 기원들 그리고 그것이 불러들인 거대한 전환을 다룬다. 
19세기 문명을 떠받치던 것은 네 개의 제도였다. 첫 번째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장기간의 파괴적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한 세기 동안이나 방지한 세력 균형 체제(blance-of-power system)였다. 두 번째는 세계 경제라는 19세기의 독특한 조직체의 상징이었던 국제 금본위제(international gold standard)였다. 세 번째는 전대미문의 물질적 복지를 낳았던 자기조정 시장(self-regulating market)이었다. 네 번째는 자유주의적 국가(liberal state)였다. 이 제도들 중 두개를 경제 제도, 다른 두 개를 정치 제도라는 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또 두 개는 국내 제도, 다른 두 개는 국제 제도라는 식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우리 문명의 역사는 이 네 개의 제도들 사이에서 그 대략적인 특징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문명이란 생명체나 마찬가지로 무수한 독립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요인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제도들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어떤 문명이 몰락하게 된 원인을 그 제도상의 메카니즘으로 추적하는 일은 무망한 헛수로고 보일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모험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의 주제가 단일한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여 겨냥을 맞출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 문명의 독특한 성격은 바로 그것이 단 하나의 특정 제도의 메카니즘에 중심을 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넓게 보아, 현재 인류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 위기를 낳은 여러 제도의 기원을 통해 규명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세력 균형 체제라는 것 자체도 본래 전쟁을 예방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나라가 국가 간 권력 배분의 현재상태(status quo)를 타파하려고 시도한다면 전쟁 발발의 위기가 오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시도로 인해 다른 강대국들이 자극을 받아 그러한 변화를 막으려고 자신들 사이의 동맹 관계를 재편성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소치일 뿐이며, 따라서 세력 균형 체제가 존재한다면 그런 전쟁은 미연에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이해 당사국들 모두가 혹시 전투가 벌어질 경우 자신들이 어떤 세력들과 맞서야 하는가를 이미 사전에 실질적으로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보이는 바, 평화는 세력 균형 체제의 반가운 부산물이었다. 

또 문제가 그저 약소국의 운명에 국한된 경우엔 아예 전쟁의 원인 자체를 신중하게 제거해버림으로써 전쟁을 회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작은 나라들의 전쟁 책동과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요인들로 권력 배분의 현재 상태가 어려워지는 일이 없도록 그에 필요한 견제와 예방이 벌어졌던 것이다. 1831년에는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침략했지만 결과는 벨기에의 중립화였다. 1855년에는 노르웨이가 중립화되었다. 1867년에는 네덜란드가 룩셈부르크를 프랑스에 팔아버렸지만, 독일의 저항으로 인해 룩셈부르크는 중립화되었다. 18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통일이 유럽의 평형 상태에 필수적임이 선언되자 유럽 협조 체제는 그 제국의 유지를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다 1878년이 지나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해체가 유럽의 평형 상태에 필수적이라고 여겨지자 즉시 해체가 시작되었다. 이 두 경우 모두 그 결정 사항은 오스만 제국 영토 안팎의 소수 민족들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강대국들 사이의 질서 정연한 합의 과정에 의해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1852년에서 1863년에는 독일 내부의 여러 나라들이 균형상태를 교란할 위협이 되었지만 두 경우 모두 강대국들은 약소국에게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강대국들은 세력 균형 체제가 자신들에게 제공하는 행동의 자유를 활용하여 모종의 공동 이해를 달성했으니, 그 공동의 이해가 바로 평화였던 셈이다.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원인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삶의 흐름을 그 근원부터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은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신성동맹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했으며 결국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도구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은 국제 차원에서 일종의 친족 연대를 형성했고, 로마 교회는 남유럽과 중유럽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에서 가장 천한 신분에 걸쳐 신성동맹을 위해 자발적으로 복무하는 공무원 조직을 제공했다. 혈통과 신의 은총으로 구성된 사회적 위계 서열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전 유럽의 작은 마을에까지 촘촘히 효력을 미치는 지배 도구를 형성한 것이다. 이제 여기다 물리력만 갖추어 보충한다면 대륙 전체에 평화를 보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신성동맹의 뒤를 이은 유럽 협조 체제는 이러한 봉건적 관계와 교회 조직이라는 유럽 전체에 촘촘히 뻗친 촉수를 갖고 있지 못해다. 그런데 사상과 목적에서 완벽하게 통일되었던 신성동맹조차 빈번한 군사 개입을 빌려서야만 겨우 유럽 차원에서 (평화를) 달성할 수 있어던 데 반해, 폭력 사용에서 그 빈도나 폭압성이 비교도 되지 못할 유럽 협조 체제라는 허깨비 같은 존재가 세계 차원에서 바로 그 (평화라는) 과업을 달성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위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려면 우리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무언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모종의 강력한 사회적 도구가 존재해서 예전에 왕조들과 각급 교회 조직들이 맡았던 역할을 수행하여 평화의 이익을 실현시킨 것이 아니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 익명의 요인이 바로 오트 피낭스(haute finance)였다.

*오트 피낭스 : 이 용어는 일정하게 합의된 정의가 존재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경제 시스템 내에서 경제활동의 자금을 중개한다는 보통의 금융 업무의 수준을 넘어 그러한 시스템을 아예 창출하거나 변동하는 것에서 큰 수익을 얻는 높은 수준의 대형 금융 자본의 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한 활동으로는 지정학적 변동을 가져올 전쟁의 대부라든가 초대형 인수 합병 같은 것들도 들어간다.

국제 금융은 대립되는 크고 작은 나라들의 야욕과 음모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국제 금융이 세운 계획들은 각국의 외교적 책략 속에 무산되고, 장기적 투자도 위협받기도 하며, 건설적 노력들은 정치적 파괴공작과 뒷전에서의 훼방 등에 부닥쳐야만 했던 것이다. 국제 금융이 힘을 가지려면 각국 내의 은행 조직들과의 협조가 꼭 필요하지만, 이 각국 내 은행 조직들도 종종 자국 정부와 공모자로서 한패가 되어 움직이기 일쑤였기에 국제 금융으로서는 자신들이 추진하는 어떤 계획이든 그 계획에 참여하는 이들 모두에게 각자의 몫을 미리 떼어주지 않고서는 그 게획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권력 금융은 달러 외교의 희생자가 되는 때만큼 그 수혜자가 되는 때도 많았으니, 후자는 전자에게 금융의 부드러운 벨벳 장갑 속에 들어갈 강철 뼈대의 역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사업이 제대로 성공하려면 약소국에 대해 무자비하게 무력을 사용하거나 후진국 정부를 아예 완전히 매수해버리는 등 식민지, 반식민지의 정글에서 익히 보이는 목적 달성을 위한 온갖 음험한 수단들이 필수요소였으니까. 하지만 기능 차원에서의 결정 요인을 보자면,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큰 전쟁을 피해가게 하는 역할은 결국 오트 피낭스의 어깨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따. 그렇게 모든 나라들이 전쟁에 뛰어들고 특히 그로 인해 각국 화폐가치가 큰 영향을 받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다른 투자자들이나 교역상들만큼이나 오트 피낭스처럼 각국 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보유한 자들 대다수였으니까. 오트 피낭스가 강대국들에 행사했던 영향력은 그래서 항상 유럽 전체 차원에서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제2장. 보수적인 1920년대, 혁명적인 1930년대

20세기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는 해체되었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명 전체가 전환을 겪게 된바, 이 둘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는 바로 국제 금본위제의 붕괴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혁명은 그 역사적 성격 면에서 19세기의 연장일 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20세기 초부터 도사리고 있었던 그 딜레마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이러한 장애물들을 분명히 제1차 세계대전이 빚어낸 엄청난 참상과 황폐화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그런대로 작동하던 세계 경제 체제와 세계 정치 체제가 모두 갑자기 그 기능을 멈추어버린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 황당한 상황의 원인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류의 대부분이 입게 된 끔찍한 상처에 기인하는 것으로 잘못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 경제의 해체는 이미 1900년 이래로 계속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뿌리가 되어 생겨난 정치적 긴장이 1914년에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한 것이다. 독일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은 그러한 긴장을 낳은 원인 자체를 더욱 악화시키는 꼴이 되었고, 평화의 달성을 가로막는 정치적, 경제적 여러 장애물들이 오히려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한 집단의 국가들은 무장 해제를 당하는 한편, 다르 집단의 국가들은 여전히 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 소름 끼치는 사실 ㅡ이러한 조건에서라면 평화를 조직하기 위한 방향으로 무언가 건설적인 조치를 위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ㅡ앞에 직면하자, 되레 모종의 감상적 태도가 나타나서 국제연맹은 무언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앞으로 도래할 평화 시대를 예고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맡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저 심심치 않을 만큼 자주 격려의 말을 퍼부어주기만 하면 영구 체제로 굳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항간을 지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국제연맹이 국제 통화 및 신용 조직을 주권 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지켜줄 유일한 보호장치로서 재건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한 것도, 또 전 세계가 그 전 어느 때보다도 더욱 오프 피낭스의 도움에 목매달게 된 것도 따라서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나탄 로스차일드(N. M. Rothschild)  대신 존 피어폰트 모건(J. P. Morgan)이 상황을 다시 19세기의 황금 시대로 회춘시켜줄 조물주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당시 미국 최고의 금융 자본가인 모건은 19세기 중반에 시작할 때부터 영국 쪽의 자본과 연결되어 있었고, 1920년대에는 독일의 전후 배상금 문제나 중동유럽의 금융 불안정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국제적 대부를 주선하는 주된 역할을 맡았다. 한편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패권이 쇠퇴하고 또 집안을 이끌다시피한 나탄(Natty)이 전쟁중에 사망하면서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감퇴하기 시작했다. 

승전국들은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해외에 돈을 꾸어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패전국들이 자국 경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영제국과 프랑스 모두가 금본위제로 복귀할 무력이 되자 이 나라들도 자국 통화의 환율을 안정시키는 데에 필요한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현실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파운드 가치의 안전성에 대한 불신이 조용히 확산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마침내 당시 제일의 금 보유국이었던 미국 달러의 가치 변동으로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서양 양쪽에 걸쳐서 금본위제 복귀를 향한 집착이 나타난 결과, 뜻밖에도 미국까지 위험 지대로 끌려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은 기술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미국은 1927년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의 가치를 지지하고자 했다. 그를 위해 런던에서 뉴욕으로 거대한 자본 이동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뉴욕 금융가의 이자율을 낮게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영국의 잉글랜드 은행 측에 자국의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가격 체계에 아주 해로운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에(이 사실은 물밑에서는 엄청나게 비용 감소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가격 수준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미국 자체만으로 보자면 이자율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7년간의 번영 기간이 끝나고 시계추가 반대쪽으로 넘어가는 1929년 비로소 경기 침체가 나타났다. 이는 보통의 경기 변동의 주기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진작에 왔어야 할 경기 침체가 이토록 뒤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그동안 잠재 인플레이션이 만연화되었고 이로 인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전 디플레이션 시절에 화폐 가치 앙등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채무자들은 이제 정반대로 인플레이션에 수반되는 화폐가치 하락으로 인해 채권자들이 무너지는 진풍경을 살아생전에 또 한 번 보게 된 것이다. 미국은 금본위제의 족쇄에서 풀려나고자 하는 본능적인 몸부림으로 결국 1933년 금본위제를 탈퇴했고, 이에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온 세계 경제의 마지막 흔적이 소멸되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전자는 여전히 19세기 유형에 충실한 것으로서, 단순히 세력 균형 체제가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터져나오게 된 강대국들 간의 갈등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이미 전 지구적인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대격변의 한 부분인 것이다. 

제2부 시장경제의 흥망

Ⅰ. 사탄의 맷돌

제3장. 삶의 터전이냐 경제 개발이냐

18세기 산업혁명에서 핵심이 되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생산 도구의 개선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은 망가지고 뒤죽박죽되는 파국이 함께 나타난 바 있다. 인간들을 통째로 갈아서 무차별의 떼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사탄의 맷돌은 무엇이었는가? 이 새로운 물리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 사태를 야기시켰는가? 그 새로운 조건들 아래에서 나타난 경제적 의존 상태는 또 얼마나 심대한 결과를 낳았는가? 

경제적 자유주의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한다. 사회적인 사건들을 경제라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우겨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이 장에서 우리는 산업혁명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주제를 다룰 것이다. 그것은 튜더 왕조 초기 영국에서 벌어졌던 종획운동(enclosures)이다. 당시 영주들은 초원과 공유지와 같은 따로 경작하는 이가 없는 땅에 울타리를 둘러쳤으며 농경지를 목초지로 용도 변경해버리는 바람에 온 나라가 인구 감소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가 울타리 치기와 용도 변경으로 인해 사람들이 어떤 곤경에 처했는가를 상기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튜더 시기의 사건이나 산업혁명 모두 궁극적으로는 혜택을 가져왔을지 몰라도 당장은 황폐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또 그 황폐화의 내용에서 두 사건 사이에 뚜렷한 유사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 종획운동(enclosures) : 중세 영국의 토지를 둘러싼 소유 및 영유 관계는 지극히 복잡했다. 로마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농촌 공동체에 다시 앵글로색슨족이 정착하면서 또 다시 복잡하게 되었고, 여기에 11세기에 지배 계급이 노르만족으로 바뀌면서 토지 사용에 관한 단일 법령이나 단일 권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제 영국의 장원으로 들어가보면 어느 땅을 어느 가족이 경작하며 또 어떤 작물을 기를 것이며 몇 년에 한 번 휴경을 할 것인가 등을 복잡하게 규제하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법이 칭칭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쓸 수 있는 공유지(commons) 그리고 길게 밭을 갈아 실제로 곡물을 파종하여 기르는 지조(strip) 이외의 땅(open field) 등에 대해서도 영주나 군주도 건드릴 수 없는 규칙과 관습이 존재했다. 그런데 16세기 들어 북대서양 교역이 활발해지고 플랑드르 지역의 양모 산업이 번창하자, 그 원자재를 공급할 배후지로서 영국의 위치가 주어지게 되고, 영국의 땅주인들은 자신의 땅에다 더 많은 양을 사육하여 화폐 수익을 올리고자 했다. 이에 이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관습법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일정 영역의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몇백 년간 경작과 주거의 권리를 보장받고 살아온 여러 종류의 신분을 가진 농민들을 모두 몰아내버린다. 이는 동시대인이었던 토마스 무어에 의해서 "양이 사람을 먹어치우고 있다"고 묘사되기도 했지만, 마르크스에 의해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의 시작으로서 그 의미가 밝혀진 이후 경제사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다. 

종획운동은 목초지로의 용도 변경 없이도 그것만으로 뚜렷한 이익의 상승을 가져왔다. 울타리를 둘러친 땅은 그렇지 못한 땅보다 두세 배의 가치를 가졌다. 계속 경작이 이루어진 곳에서는 고용도 크게 줄지 않았고 식량 생산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토지 소출은 명백하게 증가했고, 특히 토지의 임차 경영이 이루어진 곳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농경지에 양을 방목하도록 용도변경하는 일도 비록 삶의 터전을 괴하고 거기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의 일자리를 줄이고 제한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마을의 이익에 전혀 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가내 수공업이 확산되고 한 세기가 지나면 아예 시골 지역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목양 농장에서 양털이 생산되면서 경작지에서 쫓겨난 땅이 없어진 주민들과 소규모 보유농들에게 다시 일자리가 주어졌고, 새롭게 생겨난 양모 산업의 중심심지에서 수많은 직인들이 수입을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논점이 있다. 이렇게 경제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결국 보상 효과들이 벌어진다는 것은 시장경제라는 틀이 있을 때에만 당연시할 수 있는 사실이다. 만약 시장경제가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비록 양을 기르고 그 양모를 깎아 판매하는 직업 자체는 대단히 수지 맞는 것일지라도 농촌은 그로 인해 피폐해질 수도 있었다. 이것이 한때 대단했던 스페인의 부가 17세기에 결국 겪어야 했던 일이다. 목양 목장이 지나치게 확장된 나머지 침식당한 토양의 생산력이 영영 회복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생적 진보라는 것에 믿음을 가지게 되면 경제생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정부 역할이란 종종 그 변화 속도를 바꾸는 것에 있으며, 경우에 따라 그 속도를 높일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속도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든든가 그 속도에 끼어드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물론 그러한 개입의 여지가 사라진다. 종획운동이 바로 그 예이다. 오늘날 돌이켜보건대 서유럽에서 경제적 진보의 추세가 억지로 유지되던 획일화된 농업기술, 혼잡하게 섞인 지조, 마을 공유지 같은 원시적 제도 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었다는 점은 너무나 명확하다. 영국의 경우 양모 산업의 발전이 나라 전체의 자산이었고, 마침내 면화 산업의 확립으로까지 이어졌으며, 바로 이것이 산업혁명을 가져오게 했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구국내의 방직 산업 성장이 국내의의 양모 공급 증가에 달려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경작지가 목축지로 바뀌는 것 또는 그에 수반하여 일어난 종획운동과 같은 것들을 경젝제가 진보하는 추세로 보아야 한다는 점 또한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지만 튜더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에서 나랏일을 맡아본 이들이 종획운동에 제동을 걸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진보 속도가 파멸적일 만큼 가속화되어 마침내 진보 과정 전체가 건설적 사건이 아닌 오히려 사회 전체의 퇴락을 가져오는 것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변화된 조건에 적응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또 그 와중에서 그들이 경제적, 육체적, 도덕적 내용을 갖춘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망가뜨릴 것인가 아닌가, 그러한 변화에 의해 파생되는 새로운 기회의 영역에서 그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 없는가, 양모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수입도 함께 늘어나게 되는데 그러한 변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새로운 생계 원천을 찾을 수 있을까 없을까 등등의 여부는 모두 그 변화 속도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대답은 변화 속도,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적응해나가는 속도 사이의 비율에 달려 있다. 경제학에서 보통 말하는 장기적 시간 지평의 시장 균형 달성과 같은 사고방식은 여기에 용납될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옛날의 역사적 사건이 마치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벌어졌던 사건인 듯 가정하고 그래서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역사의 모든 사회가 시장경제였다는 식의 가정은 시장경제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우리에게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전혀 정당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시장경제라는 제도 구조는 우리 시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 시대에서조차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나타났던 것이다.  

영국이 심각한 피해 없이 종획운동의 재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튜더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가 왕의 권력을 발동하여 경제 개발의 속도를 사회가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늦춘 덕분이다. 즉 당시 중앙정부의 권력을 사용하여 그러한 사회 전환의 희생자들을 구제하고, 또 변화 과정이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것을 가급적 줄이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한 떄문이다. 

그로부터 약 150년 후 산업혁명이라는 모습으로 비슷한 파국이 다시 온 나라의 안녕과 생활을 위협하게 되었을 때 어째서 아무도 그러한 위기의 진정한 성격을 깨달을 수가 없었는가도 이것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온 나라에 충격을 준 운동의 원천이 이번에도 해외무역이었고 또 엄청난 규모의 경제개발로 인해 평민들의 생활 터전에 유례없는 파멸이 덮치게 되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으니, 그러한 황폐화가 벌어진 장소들이 이번에는 농촌이 아니라 이른바 산업도시들이었다는 점이다. 농촌 사람들은 이제 인간의 형상을 잃을 정도로 망가진 빈민촌 거주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파국은 경제적 발전이라는 광범위한 운동과 함께 나타났다. 또 서유럽 사회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제도적 메커니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세기 문명의 역사는 대부분 그러한 메커니즘이 가져올 황폐화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혁명 자체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공장 도시의 발생인가? 빈만가의 출현인가? 아동의 장시간 노동인가? 일정 범주의 노동자들의 저임금인가? 인구 증가율의 상승인가? 아니면 산업의 집중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가장 근본적 변화는 바로 시장경제의 확립이며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그저 이것에 부수적으로 생겨난 것들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 시장경제라는 제도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계제 생산이 상업사회에 나타났을 때 그것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가를 깨달아야만 한다고. 

사회는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과 더불어 이들이 생산한 토지의 소출을 구매하고 판매하는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생산을 일련의 판매와 구매의 연속으로 바꾸어 수행하는 일을 떠맡을 수 있는 유일한 이는 상인인데, 상인에게 이러한 활동을 맡기기 위해서는 그가 이 과정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기계로 생산된 재화의 경우 그것을 판매하는 방식은 다른 보통 재화와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조달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보통 상품의 경우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구매하여 조달하지만, 이 경우엔 판매하고자 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과 원자재를 먼저 구매한다. 정교한 기계들은 가격이 높기 떄문에, 그것으로 많은 양의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다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또 이러한 기계들로 생산하면서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생산된 재화의 판매 통로가 적절하게 확보되어야 하며, 또 기계에 투입할 원자재들이 부족하여 생산이 멈추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 이러한 조건을 상인들의 관점에서 다시 표현한다면, 기계의 작동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어야 한다. 즉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돈만 지불한다면 얼마든지 필요로 하는 만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람들 마음 속에서 단순한 생계 유지라는 동기는 사라지고 이익 추구는 동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거래는 화폐 거래로 바뀌게 되며, 이는 다시 산업생활이라는 전체 과정을 구성하는 모든 연결 고리에 교환의 매개 수단, 즉 화폐가 도입될 것을 필요조건으로 만든다. 이제 모든 종류의 소득은 무언가를 판매하는 행위에서만 발생하게 되며, 어떤 개인이 소득을 얻게 된 실제의 원천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그가 무엇인가를 판매한 결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패턴을 일컫기 위해 우리는 시장체제라는 용어를 보통 사용하지만, 이 단순한 용어의 저변에는 이토록 엄청난 사회 변화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장 경제 체제의 특징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 하나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시장 체제가 일단 확립되고 나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이나 간섭 없이 작동하도록 놓아두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일정한 이윤에 대한 보장 따위는 없으며 상인들은 자신의 이윤을 시장에서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모든 가격은 자기들 스스로 조정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만 한다. 이렇게 수만은 시장들이 스스로 조정하는 제가 바로 시장경제라는 말로 뜻하는 바이다.  

제4장. 사회와 경제 체제의 다양성

초기 사회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은 한결같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여러 천성적 자질들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모든 사회에 고루 나타나며, 인간 사회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것도 변함없이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에서 나온 두드러진 발견은, 인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회 관계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재화의 소유라는 개인적 이해를 지켜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행동하여 지키려는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권리, 사회적 자산이다. 인간이 물질적 재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목적들에 도움이 되는 만큼으로 한정된다. 생간과정도 분배과정도 재화의 소유와 관련된 특정한 경제적 이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족 사회의 경우를 보자. 개인에게 자기만의 경제적 이해가 그 개인의 행동에서 으뜸가는 중요성을 가지는 일은 도무지 벌어지지 않는다. 공동체 전체 차원에서 어떤 구성원도 굶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공동체 자체가 재난에 압도당하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이때에도 위협당하는 것은 집단 차원의 이익이지 개인 차원의 이익이 아니다. 한편, 개인에게 정작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 이유는 첫째, 어떤 개인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예나 관대함의 규약을 무시할 경우 그 개인은 공동체에서 쫓겨나 부랑자가 될 윟머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장기적으로 보아 사회적 의무란 모두 상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제대로 지키면 개인적 수지타산이라는 차원에서 따져보아도 최선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들에게 지속적인 압력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그 개인들로 하여금 의식 속에서 개인적 잇속이라는 것을 제거하게 만들고, 마침내 많은 경우 스스로의 행동의 의미를 자신의 개인적 이해와 연결해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강화해주는 것이 또 빈번하게 벌어지는 공동체 활동들이다.   

넓게 보자면 우리에게 알려진 바의 서유럽 봉건제가 끝나는 시점까지 존재했던 모든 경제 체제들은 상호성 원리, 재분배 원리, 가정경제의 원리 혹은 이 세 가지 원리의 조합을 통해 조직되었다는 것이 이 장의 논지이다. 이러한 원리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회조직의 도움을 받아 제도화될 수 있었다. 그 사회 조직이란 개인들을 추동하는 대단히 다양한 동기들을 통해 작동이 보장되는 것이며, 그 개인들은 자신들의 행동 동기를 일반적인 행동 원리들에 일치하도록 버릇으로 길들여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개인 동기들 가운데서 이익이라는 동기가 별나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관습법과 법, 마술과 종교 등이 모두 협력하여 개인들이 사회의 행동 규칙들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유인하며, 이 행동 규칙들은 그것을 따르는 개인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전체 경제 체제에서 각각이 맡은 기능을 틀림없이 수행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비록 무역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지만 이 점에서는 단절이 보이지 않는다. 로마 시대의 경제는 가정 경제 원리로 조직되는 경제가 근간을 이루었지만 로마 제국의 행정부가 곡물의 재분배를 거대한 규모로 시행한 것도 특징이다. 또 중세가 종언을 고할 떄까지 서유럽에서 시장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적이 없고 시장 이외의 다른 제도적 유형들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따는 사실도 위의 규칙이 잘 적용되는 바이다. 16세기 이래로 시장은 수도 많아지고 또 중요성도 증대해갔다. 중상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시장이 사실상 정부의 주된 관심사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시장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규제와 규율의 통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격했기에 자기조정 시장과 같은 생각은 전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19세기에 갑작스레 전혀 새로운 종류의 경제로 변화가 나타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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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칼 폴라니 해설) 

■ 여러 사회와 경제 체제에 대하 주요 문헌 근거

a) 이익이라는 동기는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
원시사회의 겨제학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생산이나 교환에서 이윤을 창출하려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b)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려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좀 더 문명화된 공동체들 내에서는 종종 이익이 사람들을 노동하게 마드는 자극이지만, 원시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의 상황에서는 결코 노동하도록 충동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노동은 보상을 필요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로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c) 회피할 수 없는 최소한으로 노동을 줄이려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
노동이 불가피한 최소한으로 제한되는 일은 결코 없으며 대신 활동에 대한 자연적인 혹은 획득된 기능적 욕구로 인해 절대적 필요량을 항상 초과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노동은 꼭 필요한 만큼을 항상 넘어서 행해지는 경향이 있다.

d) 사람으로 하여금 노동하게 만드는 보통의 유인은 이익이 아니라 상호성과 경쟁, 노동의 즐거움, 사회적 인정 등이다.
상호성 :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경제적 행동들은 상호간의 선물과 답례라는 모종의 연쇄에 속하는 것으로, 이는 장기적으로는 양측 모두에게 동등한 만큼의 이익을 가져다준다. 여러 경제적 거래에서 이러한 법칙의 지배를 지속적으로 어기는 자가 있다면 금세 사회적, 경제적 질서에서 쫓겨나게 되며, 그도 이 점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경쟁 : 경쟁이 뜨거우면 참가자들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지만 실적이 뛰어난 정도는 다양하게 벌어진다. 그 사회의 기존의 여러 행동 유형을 누가 더 훌륭하게 재생산하는가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노동의 기쁨 : 밭을 단정하고 깨끗하게 잡것들을 싹 치우고, 곱고 튼튼한 담장을 세우며, 각별하게 크고 튼튼한 얌 지지대를 조달하는 등 다양한 미학적 목적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동이 투여된다. 어느 정도까지는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작물의 성장에 필요한 것이지만, 원주민들이 순수하게 필요한 한도를 훨씬 넘어설 만큼 정성을 바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회적 승인 : 밭을 얼마나 완벽하게 꾸미는가가 어떤 사람의 사회적 가치를 재는 일반적 지표이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은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만큼의 근면성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 인간은 여러 시대에 걸쳐 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관찰해보면, 그러한 유형들이 분포하는 전체 범위는 모든 사회에서 동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랠프 린턴)
집단적인 감정들 중 기초적 인간 본성에 해당하는 몇 가지 감정들은 모든 인간 집단에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이것이 그 감증드이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배치나 형식의 유사성을 설명해주는 것이다(투른발트)

f) 여러 경제 체제는 사회 관계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질적 재화의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보장하는 것은 여러 비경제적 동기들이다.
노동이 결과를 낳는 활동이 될 수 있는 것은 여러 사회적 힘으로 조직된 집단적 노력의 일부로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 행위를 지배한는 두 가지 원리는 상호성과 저장과 연결된 재분배이다.
끊임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는 행태가 부족 생활의 전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g) 개인이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식량을 채취하는 것은 초기 인류의 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시장에서의 경제적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는 인간이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다고 가정했다. 이러한 가정은 카를 뷔허가 20세기 초에 출판된 그의 선구적 저술에서 다시 제기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만장일치로 이 점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있다.

h) 상호성과 재분배라는 경제 행위 원리는 소규모 원시 공동체뿐만 아니라 큰 규모의 부유한 제국들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된다.
우두머리는 농민들로부터 각종 선물 ㅡ이것은 오늘날 조세가 되었다ㅡ을 받으며, 이것을 그가 거느린 관리들, 특히 그의 궁정에 기식하는 이들에게 분배한다.
봉건제를 논의할 때 우리는 보통 유럽의 중세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봉건제란 하나의 제도로서 어떤 공동체 내에 계층화가 이루어지면 곧바로 나타나는 제도이다. 대부분의 거래들이 현물로 행해지며 상층 계층이 모든 토지 혹은 육축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다는 사실이 본건제의 경제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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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시장 패턴의 진화

현재의 정성로 통하는 경제사 이론은 사실상 시장 자체의 중요성과 의미를 끝없이 과장하는 관점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어떤 사회에 시장이 없다고 해도 거기에서 올바르게 추론할 수 있는 바는 그 사회가 일정한 고립과 폐쇄적 경향과 같은 경제적 특징들을 가진다는 것뿐이다. 어떤 경제의 내부 조직이라는 점에서 보면 시장이 있고 없고는 아무런 차이도 낳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자이란 주로 경제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작동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시장이란 원러기 무역의 만남 장소이다. 고유한 의미에서의 마을 장터(local market)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설로 통용되는 교리는 먼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물물교와의 성향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을장터 및 노동 분업이 발생의 필연성을 도출한다. 그리고 마침내 교역의 필연성을 추론하며 종국적으로는 대외무역과 심지어 원러기 무역까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추론해나간다. 현재 알려진 바의 지식에 비추어보면 그러한 주장의 순서를 거의 정반대로 뒤집어야 옳다. 올바른 출발점은 원거리 무역으로서, 이는 여러 종류의 재화들이 어떻게 지리적으로 분포되어 있는가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원거리 무역이 생겨나면 종종 그로 인해 여러 다른 시장이 발생되기도 한다. 시장이란 물물교환 그리고 화폐가 사용되는 경우엔 판매 및 구매 행위를 내포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그러한 제도가 나타나는 경우에는 궁극적으로 몇몇 개인들에게도 이른바 거래와 가격 흥정의 성향이라는 것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외부와의 무역이란 그 기원을 따져보면 물물교환보다는 오히려 모험, 탐험, 수렵, 해적질, 전쟁 등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무역이란 본래 쌍방향이나 평화 어느 쪽도 내포하지 않는다. 또 내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 쌍방향성이나 평화를 조직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것은 상호성의 원리이지 물물교환의 원리가 아니다. 

자본이란 변동성이 큰 존재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도시의 여러 제도가 해체될 위협이 항상 있었다. 여기에 대해 도시 주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대응한 바가 바로 수출 무역과 마을 장터 지역 내 교역을 분리하는 것이었으며, 수출 무역이 확장되어 자본의 영향이 강해질수록 그러한 분리도 갈수록 더욱 엄격해졌다. 전형적인 중세 도시들은 됫 제도 해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통제 불느으로 널뛰는 원거리 무역의 이런저런 변덕이 자신들의 통제 아래에 있는 마을 장터와 어떻게든 연결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원거리 무역의 영향으로 생겨날 재난을 피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극도로 엄격한 보호 정책과 배제 정책이라는 정면 돌파였으니, 사실 그러한 보호와 배제를 집행하는 것이야말로 중세 도시가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중세 도시들 때문에 자본주의적 방법으로 영업하는 도매상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던 국내 시장 혹은 전국 시장이 갖가지 장애물에 부닥쳐 창출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치 도시의 시민들은 마을 장터와 도시 간에 이루어지는 원거리 무역 모두에서 경쟁을 배제한다는 원리를 유지함으로써 도시들 사이의 무차별적 교역이 마구 개방되어 농촌까지 그러한 교역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사태를 자신들이 쓸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 진전으로 인하여, 시장이 전국화되어 한 나라의 국내 상업이 창출되려면 영방 국가라는 도구가 전면에 등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도시국들과 소공국들은 격렬한 보호주의를 내걸로 전면적인 시장의 출현에 반대하여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15세기와 16세기에 나타난 형태의 국가는 계획적인 행동을 통하여 교묘하게 이들로 하여금 얼떨결에 중상주의 체제를 받아 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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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칼 폴라니 해설)

■ 시장 패턴의 진화와 관련된 중요 문헌 소개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신이 제시하는 방법과 실천 방안들이 진보라는 일반 법칙의 자연적 귀결로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자기 기만을 유지하려 애써왔다. 그래서 그 방법과 실천 방안들을 일반 법칙이라는 패턴에다 끼워 맞추기 위해, 이들은 자기조정 시장을 떠받치는 원리들을 과거에까지 걸친 인류 문명의 전 역사에 투사해놓았다. 그 결과 교육, 시장, 화폐, 도시생활, 국민국가 등의 진정한 성격과 기원은 심하게 왜곡되었고, 게다가 마치 그렇게 왜곡된 모습이 자연적 일반 법칙인 것처럼 신비화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왜곡이 벌어졌다는 것조차 거의 의식되지 못하고 있다.  

a) 물물교환, 교역, 교환이라는 개인들의 행동은 원시 사회에서 오로지 예외적으로만 행해졌다. 

b) 교역은 공동체 내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이는 여러 다른 공동체들과 관계된 대외적인 문제이다.
산업은 그 기원 면에서 여러 민족 집단들 사이의 거래였다. 상업은 같은 부족이나 같은 공동체의 성원들 사이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가장 오래된 사회적 공동체들을 살펴보면 이는 항상 타부족들을 향해서 이루어진 대외적 현상이었다. 
중세의 경제적 부흥이 이루어진 것은 원거리 무역 덕분이었다.

c) 교역은 시장에 의존하지 않았다. 교역은 일방적인 운송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평화적인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d) 시장의 존재 여부는 경제 체제의 본질적 성격이 아니며, 마을 장터는 더 큰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하는 경향을 갖지 않는다.
마을 장터가 생겨난 목적은 그 구역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사행활에서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주 열리는 것이며 거기에 오는 사람들의 지리적 범위도 아주 제한되어 있는데다 거기서의 활동이 소규모의 소매상으로 제한된다는 사실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후대로 간대 해도 마을 장터는 정기시와 달리 대규모로 커지는 성향을 갖지 않았다. 마을 장터는 지역 주민들의 필요물을 공급해주는 것이며 오직 그 주변에 사는 이웃들만 참여했다. 그리고 그 상품들은 주변 마을에서 나온 농작물과 일상 생활용품 같은 것들이었다. 언뜻 보면 농민들 사이에서 조금씩 상인 계급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을 믿을 만한 증거는 전혀 없다. 

e) 노동의 분업은 무역이나 교환이 아니라 지리학적, 생물학적 그리고 다른 비경제적 사실들에서 기원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분업이 거의 유일한 분업이다. 생물학적 사실로부터 노동 분업이 발생하게 되는 다른 방식으로는 여러 다른 민족 집단들이 공생하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민족 집단들은 사회의 상위층을 형성함으로써 직업적-사회적 집단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종속적 계급의 생산 기여와 봉사에 기반을 두는 조직이 생겨나며, 또 한편으로는 지도적 계층 가문 수장의 권력에 기반하는 조직이 생겨나게 된다. 

f) 화폐라는 발명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있거나 없다고 해서 경제 유형에 본질적인 차이가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족이 화폐를 사용하다는 사실마능로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부족과 경제의 관점에서 차별화되는 점은 극히 적다. 
화폐는 시장과 마찬가지로 주로 공동체가 외부와 맺는 관계에서 나오는 현상이었으며, 따라서 화폐가 그 공동체에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가는 갖가지 무역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일반적 교환 매개체로서의 화폐 기능은 대외 무역에서 기원했다.

g) 대외무역은 그 기원 면에서 개인들 사이가 아닌 집단과 집단 사이의 일이었다.

h) 중세 유럽에서 도시 부근의 농촌 지역은 무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i) 중세 유럽에서 도시와 도시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은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쪽 도시의 상인이 어떤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채권자가 속한 쪽의 도시의 치안 판사들은 채무자가 속한 도시의 치안 판사들에게 문의하여 그들이 스스로의 시민들이 대우받았으면 하는 방식으로 자기 시민에게도 정의를 집행하라고 요청했으며, 만약 부채가 지불되지 않으면 그 도시 주민들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j) 전국 차원에서의 보호주의라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적 경계에서 관세가 매겨지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이후에서야 벌어진 일이다. 그 전에는 조금이라도 외국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자국민들 간의 교역을 이롭게 하기 위해 보호 조치를 취하려는 욕구가 있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국제적 무역행위는 모든 무역 종목에서 자유무역이었다.

k) 전국 차원에서 도시와 지방 사이에 자유무역을 강제한 것은 중상주의였다.

l) 중세에 행해진 규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m) 자치 도시에서 행해지던 관행을 전 국토로 확장한 것은 중상주의 국가였다.
그 결과는 정책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한 것이었고, 이는 일종의 자치 도시 정책을 국가 권력을 기초로 삼아 강제로 전국 차원에서 덮씌워놓은 것이었다.

n) 중상주의는 대단히 성공적인 정책었다.
중상주의는 복합적이고도 정교한 욕구 충족이 가능하도록 대한한 솜씨로 이루어진 체제였다. 경제생활이 전국 규모로 조직된 것은 주로 정치 권력의 집중화가 낳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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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자기조정 시장 그리고 허구 상품 : 노동, 토지, 화폐

경제 체제와 시장에 대해 위와 같이 대충만 살펴보아도 우리 시대 이전에는 시장이 경제생활에서 부속품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 체제는 사회 체제에 흡수되어 있으며, 시장 형태가 현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제를 주도하는 행위 원리에 맞추어져 있었다. 물물교역이나 교환이라는 원리는 시장 형태의 기초를 이루지만 결코 시장 외의 형태를 없애가면서까지 팽창하지는 않았다.  

시장경제란 오로지 시장만이 통제하고 조정하며 방향을 지도하는 경제 체제이다.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질서는 이 자기조정 메커니즘의 손에 맡겨진다. 이런 종류의 인간이란 그의 화폐 수익의 극대화를 달성하는 방식으로 행위하게 되어 있다는 예측과 기대에서 도출되어 나온 것이다. 이는 일정한 간격으로 얻을 수 있는 재와의 공급량이 그 가격에 대응하는 수요량과 일치하는 시장을 가정한다. 이렇게 되면 생산을 지휘하는 이들의 이윤이 가격에 의해 결정되므로 결국 가격이 생산을 통제하게 된다. 또 재화의 분배 또한 여러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라면 재화의 생산 및 분배의 질서는 오로지 여러 가격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것이다. 
자기 조정이라는 말은, 모든 생산은 시장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소득은 그렇게 생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산업의 모든 요소를 위한 시장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재화시장뿐만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가 판매되는 시장도 포함되며, 그 가격은 각각 상품 가격과 임금, 지대, 이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자기조정 시장에는 한 꾸러미의 전제가 더 따라 붙는데, 그것은 국가와 국가 정책에 관한 것이다. 어떤 시장이든 그것이 형성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소득이든 시장에서의 판매 이외의 방법으로 형성되는 것을 허락해서도 안 된다. 또 시자에서의 여러 조건이 변화할 경우, 여러 가격ㅡ재화의 가격이든 토지, 노동, 화페 그 어떤 것의 가격이든 ㅡ이 거기에 맞게 오르내리는 것에 어떤 방해가 있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산업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시장이 형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시장들의 활동에 영향을 끼칠 정책이나 법안은 그 어떤것도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가격, 공급, 수요 그 어떤 것도 고정되거나 규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 오로지 시장만이 경제 영역을 조직하는 유일한 권력으로 만들어주는 데에 필요한 조건들을 창출함으로써 시장의 자기조정을 확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정책과 법안들만 합당하다는 것이다.

산업생산이 복잡해질수록 확실하게 공급을 보장해야 할 산업 요소들의 가짓수도 늘어났다. 당연히 그 가운데 각별히 중요한 요소는 노동, 토지, 화폐였다. 상업사회라는 틀에서 이 세 요소의 공급을 조직하는 방법은 단 하나, 즉 구매로 얻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조직되어야만 했으니, 즉 상품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을 노동, 토지, 화폐라는 산업 요소들에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상업 사회라는 틀에 공장제를 도입하면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물론 이것들은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된 게 아니므로 정말로 상품으로 변형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물구하고 마치 노동, 토지, 화례가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처럼 여긴다는 허구가 사회의 조직 원리가 되고 만 것이다. 

제7장. 1795년 스피넘랜드

장기적으로 그 결과는 소름 끼칠 만한 것이었다. 일반 민중들의 자긍심이 한심한 수준으로 떨어져서 땀 흘려 일하여 임금을 벌기보다는 빈민 구호나 받는 쪽이 낫다고 생각할 지경이 되었던 것도 문제였지만, 그래도 이는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진행된 과정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임금을 공공기금으로 보조하게 되면 임금 수준이 바닥 모르게 처박힐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국은 원하든 원치 않든 빈민 구호소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조금씩 조금씩 농촌 사람들은 구호를 받아 그것으로 먹고 사는 구호 대상 극빈자가 되어갔다. 

하지만 이 시기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이전 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시대의 일반 민중들은 전통적인 옛날 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직 화폐 수익이라는 동기만으로 이런저런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시골 사람들의 대다수는 자기 땅에 살면서 농사짓는 점유-소유농들이거나 토지 보유가 일생 보장된 종신 보유농들이었는데, 이들은 구호 대상 극빈자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구호 대상 극빈자의 신분에는 여러 자격 정지가 따라오고 이로 인해 그 지위로 떨어진 이들은 진저리 날 만큼 굴욕과 불명예를 쓰도록 되어 있었다. 

뒷세대의 눈으로 보자면 자유로운 노동 시장의 임금체제와 생존의 권리라는 제도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즉 임금을 공공기금으로 보조하는 일이 계속되는 한 자본주의적 질서가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이 길을 닦아주고 있었던 질서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스피넘랜드 법은 일반 민중들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혹은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대중들을 구호 대상 극빈자로 만들어버렸고,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몰골을 거의 잃어버렸다. 

우리는 스피넘랜드 법에 대한 연구야말로 19세기 문명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그것의 사회적ㆍ경제적 효과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도, 심지어 그것이 근대 정치사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 말로써 우리가 진정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세대가 대부분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 즉 사회를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의식이 이 스피넘랜드 법을 둘러싼 논쟁의 틀에서 찍혀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 구호 대상 극빈자라는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비록 그 후로 거의 잊혔지만 당대의 논쟁을 지배했던 질문이었으며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대사건보다도 커다란 족적을 남겨놓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볼테르, 드니 디드로, 플랑수아 케네, 루소 등의 사상에 빚지고 있다면 구빈법 논쟁은 제레미 벤담과 에드먼드 버크, 윌리엄 고드윈과 토머스 맬서스, 리카도와 마르크스, 로버트 오언과 존 스튜어트 밀, 찰스 다윈과 스펜서 같은 사상가들의 정신을 형성했으니, 이 사상가들은 프랑스혁명의 영향과 함께 19세기 문명의 정신을 낳은 어버이라 할 만한 이들이다. 스피넘랜드 법과 구빈법 개혁을 겪으면서 그 후 몇십 년간 인류의 정신은 새롭게 안게 된 근심과 번민의 고통에 휩싸인 채 자신들의 공동체의 문제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버크셔의 판사들이 한사코 막아보려고 그렇게 애썼건만 결국 실패해버린 혁명, 그리고 구빈법 개혁으로 결국 자유롭게 풀려나버린 혁명, 바로 그 혁명을 통하여 인류는 집단적 존재로서의 자신들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가로 시야를 돌리게 된 것이다―마치 자신들의 집단적 존재로서의 성격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처럼. 지금까지는 아예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해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복합 사회(complex society)를 지배하는 여러 법칙들의 세계였다. 이 복합 사회라는 새롭고도 독특한 의미를 가진 사회가 출현한 것은 경제 영역에서이지만,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전 방위적인 것이었다. 

제8장. 스피넘랜드 법 이전의 것들, 스피넘랜드 법의 결과들

제9장.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와 유토피아

빈곤 문제는 두 개의 밀접한 주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으니, 그것은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와 정치경제학이다. 이 두 주제가 현대인의 의식 세계에 가한 충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따로따로 논할 필요가 있지만, 이 두가지는 불가분의 전체를 구성하는 단일 주제의 두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단일 주제란 바로 사회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스피넘랜드 법이 만들어지는 시점에서는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의 진정한 성격이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에 명확히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인구가 가능한 한 많이 불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서는 모든 이들이 완전히 동의하고 있엇다. 국가의 국력이란 결국 사람에 있으니까. 또 싼값에 노동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에서도 모두 선뜻 동의할 수 있었다. 노동이 싸면 제조업이 번창하게 되니까. 게다가 빈민들이 없다면 누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나 전쟁에 나가는 위험한 일을 하려 들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는 결국은 해결해야 할 사회악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을 제쳐두고 떠오르는 의문점이 또 하나 있었다. 어째서 구호 대상 극빈자들을 공공 사업의 이윤을 위해 고용하면 사적 이윤을 위해 고용하는 것만큼 채산성이 나오지 않는가? 

제10장. 정치경제학과 사회의 발견

빈곤이라는 것의 의미를 사람들이 깨닫게 되자, 19세기를 위한 무대가 본격적으로 펴쳐지게 되었다. 이 급격한 생각의 변화는 1780년 근처 어느 때에 벌어졌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만 하더라도 아직 빈민 구제는 문제로 인식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단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타운센드의 구빈법에 대한 논고에서는 빈민 구제가 굵직한 문제로 제기되었으며, 이후 1세기 반 동안이나 사람들이 골똘히 고심하는 주제가 된 것이다.  

스미스는 여러 나라의 부를 물질적, 도덕적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그 나라 전체의 삶의 함수로 보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 안에 경제 영역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을 근원으로 삼아 도덕 법칙과 정치적 의무를 도출할 수 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개인의 자기 이익이라는 것의 결과 또한 본질적으로 타인들에게도 혜택이 될 일들을 우리가 하게 재촉하는 것에 불과했다. 푸줏간 주인은 자기 이익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가 저녁상을 차릴 수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스미스의 사상에는 모종의 폭넓은 낙관주의가 속속 베어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은 자기 이익이라는 이음 아래 우리에게 서로를 잡아먹는 끔찍한 식인 의식을 강요하려 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의 존엄성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는 것에서 기인하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족과 국가, 나아가 인류라는 거대한 사회와 같은 공동체 질서의 일원이라는 도덕적 존재이며, 인간의 존엄성도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 인간성을 갖추었기에 아무리 돈을 더 주면서 일을 시키려 해도 일하는 양에 일정한 한계를 둘 수 있으며, 비록 경쟁과 이익이라는 것에 끌리기도 하지만 결국 이성과 인간성 앞에서는 힘을 잃게 되어 있다. 스미스는 부의 문제를 논하는데 물리적 의미의 자연을 의식적으로 배제했다. "어느 특정한 나라에서 연간 생산의 풍요 혹은 부족이란 그 나라의 토양, 기후, 영토의 넓이와 무관하게 그 특유의 상황 속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정황에 의해 결정짓게 되어 있다"고 했으며, 그것은 노동 숙련도와 그리고 그 사회에서 유용한 일을 하는 이들과 아닌 이들 사이의 수적 비율이라고 한다. 자연적 요인들이 아닌 오로지 인간적 요인들만이 초점이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인간 과학이어야 하며, 인간에게서 자연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지 자연에게서 자연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운센드는 인간 공동체를 아예 동물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함으로써 그 질문을 따롤려버렸고, 또 그렇게 하는 가운데 인간사에 새로운 개념의 법칙을 도입했스니, 그것은 자연의 여러 법칙들이었다.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 본성이야말로 사회의 부동의 기초라고 보이게 했으며, 이 사회는 예전의 정치적 질서 따위와 전혀 종류가 달랐다. 그리하여 경제학자들이 이제 스미스의 인문주의적 기초를 포기하는 대신, 타운센드의 사상을 기초로 삼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통하게 되었다. 새로운 왕국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맬서스는 인구법칙과 수확 체감의 법칙을 내놓았고, 이를 리카도가 다시 질하여 인간의 다산성과 토지의 비옥성을 구성 요소로 삼아 이 새로운 왕국의 작동을 설명했다. 정치적 국가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경제적 사회가 이미 나타난 것이다. 당시 터져나온 구호 대상 극비나 문제는 예전의 도덕으로서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고, 이로 인해 맬서스나 리카도는 자연주의로 빠져들어간 타운센드의 견해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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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해설>

■ 고전파 정치정치경제학

멜서스는 인구 법칙을 말한다. 인간은 성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먹을 게 충분하고 시간이 남으면 인간은 끝없이 성교를 계속하여 자식을 한없이 많이 낳게 한다. 그리고 그 증가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다. 그런데 자연이란 기본적으로 희소성을 그 원리로 삼는 고로, 이 많은 인구를 다 먹여살릴 수 없다. 식량 생산은 궁극적으로 수확 체감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식량 생산에 필요한 쟁기와 노동 등 다른 생산 요소들을 아무리 투입한다고 해도 토지의 크기는 한저오디어 있고 그 비옥도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많이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봐야 식량 생산 총량의 증가 속도는 점차 줄어들게 되고 여타 생산 요소들의 생산성만 떨어지게 된다. 결국 인구는 인간의 성욕에 의해 폭발적으로 체증하는 곡선을 그리며 증가하는데 식량 생산 총량은 갈수록 완만해지는 체감 곡선을 그리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곡선이 만나는 지점 이상에서는 두 곡선의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인간들은 모두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멜서스가 본바, 자연이 인간 세상의 경제에 정해 놓은 한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수확 체감의 법칙과 그것으로 결정되는 바의 식량의 양이라는 한계 내에서만 부를 누리든가 인구를 늘릴 수 있다. 일정한 문화적 발달을 위한 부의 편재ㅡ물론 이것을 담당하는 계급은 지주 등의 상층 계급이다ㅡ는 문명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는 가급적 인구 총수를 줄여야만 한다. 아니라면 우글거리는 떼거리들이 모두 한정된 생산량을 나누어버리고 다 같이 헐벗은 야만 상태에 있게 될 테니까. 따럿 단지 자연이 그어주는 한계선에서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문명의 발전을 위한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구를 줄여야한다. 멜서스는 여기서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좀 더 고상한 방법으로 성인들이 스스로의 성욕을 절제하여 산아를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멜서스가 보기에 성욕이라는 자연적 욕망은 도저히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방법이 등장하는데, 이는 전쟁, 돌림병, 범죄, 학살 등 떼죽음이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사회악을 적극적으로 조장한다는 것이다(심지어 그는 뇌염모기가 번성할 수 있도록 시궁창과 습지를 많이 만들자고까지 했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빈곤 상태는 바로 이러한 인구의 과잉 및 식량의 절대 부족 사태기 도래했음을 보이는 것이었다. 인구 법칙에 기초하여 임금이 결정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면 임금 철칙이 나오게 된다. 임금이 좀 올라가게 되면 노동자들은 즉시 좋은 영양 상태와 개선된 생활환경을 이용하여 성교에 몰두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을 낳게 된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머릿수가 늘게 되면 노동 시장에서의 공급이 늘어 임금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노동자들이 굶어죽거나 영양 부족으로 생식력도 떨어지게 되어 다시 머릿수가 줄게 될 것이고, 이는 공급 축소를 가져오게 되니 응당 가격 즉 임금의 수준도 올리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에 연결된 또 하나의 법칙은 임금 가설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로부터 멜서스, 리카도 등을 거쳐 특히 존 스튜어트 밀에서 정식화된 것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에서 노동자들의 몫으로 주어지는 몫은 전체의 생산수준 등에 의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노동자들이 아무리 임금을 올리려 든다고 해도 그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의 상승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곧 자본의 이윤을 줄이게 되고 이는 다시 투자량의 감소 그리고 추가적인 생산의 정체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생산 총량이 줄어들게 되면 임금으로 구입할 수 있는 물품의 양이 줄어들게 되므로 결국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그 전의 수준으로 돌아가게 된다느 것이다. 

이러한 임금 법칙과 그와 연결된 임금 기금설을 결합해보면 결국 임금 수준이란 경제의 호황, 불황과 상관없이 생계수준에서 요지부동으로 고정되며, 이것이 노동자들의 번식을 제한하여 그 머릿수를 저절로 조절하는 철의 법칙이 된다는 것이다. 이 철칙이라는 이름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자 라살이 붙인 것이지만, 그 기본적인 사상은 이미 고전파 경제학의 체계 내에 전제로 깔려 있다. 마르크스는 어디에선가 이러한 고전파 경제학의 자연주의적 기초, 특히 그 초석이 되는 인구 법칙을 인류에 대한 모욕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한편 리카도는 이러한 여러 법칙들에 근거하여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장기적인 발전 경향과 소득 분배의 법칙을 추론해냈다. 경제가 발전하는 데에는 자본 축적을 통한 생산 장비의 재투자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조건이 충족되어 경제 전체가 불어나게 되면 곧 자본가의 이윤에서 더 많은 임금을 얻어내려는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시작된다. 그 결과 임금이 상승하면 이는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고 식량이 모자라게 되어 곧 곡물가의 상승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사실상 노동자 임금의 실질 구매력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결과 노동자의 머릿수가 다시 줄게 되면 또 임금이 오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은 경제의 크기가 확장되면 자본자들의 이윤 축적의 몫을 놓고 계속 투쟁을 벌이게 되지만 결국은 임금 철칙의 작동으로 임금은 항상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이렇게 곡물 가격이 오르게 되면 지금까지는 경작할 수 없는 메마른 땅(열등지)으로 치부되던 곳도 더 많은 장비와 투자를 들여 경작지로 개간할 만한 금전적 유인이 생기게 되므로 열등지의 지주를 찾아가 지대를 내고 농업 경영을 하겠다는 자본가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별다른 지대를 거두지 못했던 메마른 땅의 지주들도 점점 더 소득을 거두게 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지주들이 가져가는 소득의 몫은 점점 늘어간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지주들이 얻는 소득인 지대란 생산에 기여하여 발생하는 소득이 아니다. 자기 땅보다 나쁜 토질의 땅과의 비교에서 발생하는 웃돈, 즉 더 좋고 땅을 깔고 앉았다는 이유 하나로 받아가는 불로 소득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이 가져가는 소득은 막상 생산에 기여하여 생산성을 내놓은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가져가야 할 소득의 일부를 가져가는, 그야말로 지대(rent)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지주들의 소득의 몫이 커지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자본가의 이윤이다. 노동자의 임금도 물론 상시적으로 영향을 받지만 기본적으로 임금 철칙으로 고정되어 있으므로, 지주들의 소득의 원천은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윤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주들과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는 적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끝까지 가면 어떻게 될까. 먼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현상이 나타난다. 갈수록 자본가들은 이윤이 줄어들고 지주들만 점점 더 많은 소득을 가져가게 되기 때문에 자본을 더욱 축적할 수도 또 그럴 유인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생산 설비 투자가 줄어들면 경제 전체의 확장도 멈추게 되고 임금, 이윤, 지대의 배분 몫이 일정하게 정해지면서 사회 전체의 경제적 역동과 팽창이 멈추어 버린 정상상태에 이르게 된다. 리카도는 자본주의 경제가 실제로 장기저긍로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윤율 저하라든가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적 파멸이라는 테마는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상태가 오는 것을 최대한 막는 것이 경제 정책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곡물법, 즉 지주들이 생산하는 곡물의 가격이 일정하게 높은 가격으로 유지되도록 외국에서 싼 곡물을 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오래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이것이 지주들의 권력의 온상이요 폐해라고 폐지를 외치고 있었으나 리카도는 전혀 다른 경제학적인 각도에서 이 법의 폐지를 주창한다. 즉 인구가 늘어 열등지를 계속 개간하는 일이 영국 안에서만 벌어진다면 이는 정상 상태의 도래를 한층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 또 지주들이 싼 외국 곡물의 수입을 막고 계속 더 높은 수준의 지대를 챙겨간다면 이는 자본 축적을 막고 경제 전체의 역동성을 가로막는 일이 된다. 따라서 지금 당장의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을 위하여 또 장기적으로 오게 될 운명의 그날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전 세계에서 들여올 수 있는 가장 싼 곡물을 들여와서 지주들의 지대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 살길이라고 주창한 것이다. 이러한 주창이 결국 영국에서 곡물법을 철폐하고 완전한 자유무역을 시작하게 하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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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사회의 자기 보호

제11장. 인간, 자연, 생산 조직

토지계급, 중간계급, 노동계급이 사회에서 담당했던 역할이 19세기 사회사 전체의 모양을 결정했다. 이 계급들은 사회가 처한 전체 상황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기능 가운데 저마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맞게 배역을 맡았다. 중간 계급은 막 생겨나던 시장경제의 담지자들이었다. 경기가 좋아지면 모두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부동산 소유자들이 지대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사업가 공동체가 외국인들과 경쟁해서 성공을 거두면 외환 가치도 안정되었다. 다른 한편, 시장 경제 때문에 노동자의 건강이 착취당하고, 가족의 삶이 파괴되며, 주거지역이 폐허가 되고, 삼림이 벌거숭이가 되고, 강이 오염되고, 작업 기술의 수준이 형편없이 떨어지며, 민속 전통이 무너지고, 주거양식이나 예술 등과 같이 사적 영역이든 공적 영역이든 이윤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많은 사회적 삶의 형식이 전반적으로 저질화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에 종사하는 계급은 그 속에 내포된 위험을 감내해내지 못했다. 중간 계급은 자신들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이윤이 사회 전반에 혜택을 준다는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믿음을 발전시켰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바람직한 삶에서 생산의 확장만큼이나 필수적인 다른 이익들에 대해서는 수호자의 자격을 잃게 되었다. 

제12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경제적 자유주의는 시장체제의 창출에 몰두했던 사회의 조직 원리였다. 태어날 무렵에는 그저 관료주의적이지 않은 사회 행정을 지향하는 사상일 뿐이지만, 곧 자기조정 시장을 통해 현세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짜배기 신앙으로 진화했다. 이것이 이렇게 광신주의로 변하게 된 것은 그것이 대답해야 할 과제로서 맞닥뜨렸던 문제가 급격하게 악화되는 바람에 생겨난 일이었다. 새로운 질서가 확딥되는 과정에서 그와 맞물려 있는 변화의 영역이 상상도 못할 만큼 넓어진데다 그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고통의 크기도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자유주의 교리가 그렇게 십자군과 같은 열렬한 전투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렇게 시장경제가 완전히 갖추어지면서 제기되는 필요에 응답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일 뿐이다. 

나중에 가면 자유방임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세 가지 교리를 대표하게 되었다. 첫째, 노동의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둘째, 화폐의 창출은 자동적 메커니즘에 복속되어야 한다. 셋째, 재화는 나라에서 나라로 아무런 장애나 편파적 차별을 만나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여야 한다. 요컨대 노동시장, 금본위제, 자유무역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자유방임의 신조를 구성하는 교리들을 따로따로 고찰하게 되면 그것들이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세가지 교리들은 동일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세 요소들이다. 그중 다른 두 가지 조건이 똑같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가지만 달성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럴 경우엔 결국 그러한 노력에 들어간 모든 희생도 허사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자유시장으로 가는 길을 뚫고 또 그것을 유지, 보수했던 것은 중앙에서 조직하고 토제하는 지속적인 정부 개입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 개입은 엄청나게 증대되고 말았다. 모든 정부 개입은 요새처럼 단단히 자리 잡게 되었지만, 애초의 목적은 토지, 노동 또는 지방 행정의 자유와 같은 단순한 자유를 조직해낸다는 단일한 목적에서 세워진 것들이다. 노동을 절감하는 기계들을 발명하게 되자 인간 노동의 사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애초의 예측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것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라. 마찬가지로 자유시장 체제를 도입하게 되자 통제, 규제, 개입의 필요가 제기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범위만 엄청나게 확장되고 말았다는 것이 진실이다. 행정가들은 이제 자유시장 체제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 그것을 감시해야만 했다. 그래서 국가가 모든 불필요한 임무에서 풀려나기를 가장 원했던 이들조차, 또 모든 철학의 중심 주제로서 국가 활동의 제한을 제기했던 이들조차, 자유방임을 확립하는 데에 필요한 새로운 권력들, 기관들, 기구들을 자신들이 그토록 축소시키려 애를 썼던 바로 그 국가에다가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란 산업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제도에 기초를 두도록 만드는 사회 조직 원리이다. 일단 그러한 체제가 비슷하게나마 달성되면 어떤 특정 유형의 개입은 줄어들어야 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 체제와 개입주의가 서로 완전히 모순된 용어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장체제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는다면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확립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국가 개입을 요구할 것이며, 그것이 일단 확립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 것이다. 따라서 겨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 주장의 일관성에 아무런 문제도 없이 국가에 법의 강제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할 수 있으며, 자기 조정 시장의 전제 조건들을 현실에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라면 심지어 내란과 같은 폭력적인 힘에 호소할 수도 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일로, 남부는 자신들의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유방임이라는 논리에 호소했고 북부는 자유로운 노동 시장을 확립하기 위해 무력의 개입에 호소했다. 자유주의 저술가들 쪽에서 때때로 나오는 개입주의라는 공격은 이렇게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 본성이 완전히 똑같은 조치들을 놓고서도 그저 자기들이 찬성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한쪽에다 멋대로 비난을 퍼북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13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2 : 계급적 이해와 사회 변화

계급적 이익이라는 말 속에는 특정 계급의 성원들이 다른 여러 계급 성원들의 지지를 저절로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무슨 마술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지가 일상에서 다반사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보호주의가 그 한 예이다. 여기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어째서 농업가들, 공장주들,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보호주의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소득을 올리려들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그러한 그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가이다. 어째서 기업가들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판매하는 상품들에 대해 독점적 권력을 확립하려 들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그들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이다. 어째서 몇몇 집단들이 유럽 대륙의 수많은 나라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그토록 서로 다른 나라에서 그런 집단들이 똑같이 나타나 모든 곳에서 똑같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이다. 어째서 곡물을 기르는 이들이 그것을 비싸게 팔려 들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이들이 곡물 가격을 올릴 것을 그 곡물을 사는 이들에게 항상 설득할 수 있었는가이다. 

사실 산업혁명에 대해 우리에게 친숙한 설명은 면화 산업의 높은 이윤 그리고 초기 공장주들의 급속한 자본 축적이 가능했던 것은 18세기 종획운동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 갈 곳이 없게 된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노동시켰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자본가들에게 겨누어진 비판의 화살의 이름은 착취라는 것이었으니, 동료 시민들을 그토록 무한정 착취했던 것이야말로 이 모든 비참상과 인간 타락의 근본적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문화적 진공 상태라는 용어는 인류학자들이 쓰는 말로서, 아프리카의 흑인 부족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이들이 백인 문명과의 접촉으로 인해 지독한 문화적 저질화를 겪게 된 원인을 일컫는 용어이다. 그 흑인들이 대대로 지녀온 여러 기술들은 쇠퇴하게 되고,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은 낱낱이 파괴당한다. 그 결과 무언가라도 하면서 살아갈 모든 동기 부여를 앗아가게 되어 이들은 결국 한없는 지루함과 권태에 치여 죽을 지경이 되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소진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제14장. 시장과 인간 

유럽 대륙의 노동자들이 막아내려고 했던 것은 산업혁명의 충격이 아니었다 ㅡ사회적 차원에서의 의미로 보자면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들이 저지하려던 것은 공장과 노동 시장의 조건들이 정상저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 자체였다. 영국의 노동자 동지들이 주로 노동조합과 같은 자발적 조직과 노동 시장에서 노동 공급을 독점할 수 있는 힘에 의지했던 반면, 유럽 노동자들은 주로 입법의 도움으로 이를 쟁취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사회적 보험이 영국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조속하게 도입된 편이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유럽 노동운동의 정치적인 지행성, 그리고 노동 대중들의 투표권이 비교적 일찍 주어졌다는 것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 보호의 방법이 한쪽에서는 강제적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자발적이었다는 차이 ㅡ즉 국가의 입법이냐 노동조합 운동이냐의 차이 ㅡ는 경제 차원에서 보자면 크게 법석을 떨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정치 차원에서 보면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유럽에서는 노동조합 자체가 노동계급 정당이 만들어낸 피조물이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노동자 정당이 노동조합의 피조물이었다. 유럽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노동조합 운동이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엇던 반면에 영국에서는 심지어 정치적 사회주의 운동마저도 본질적으로 노동조합주의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보편적 참정권이라는 것도 영국에서는 국민적 통합을 증대시키는 경향을 가졌던 반면, 유럽에서는 그 반대의 효과를 낳았다. 

노동자들이 자기들이 수행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직종에 대해 노동 시장에서 제공하는 임금을 무조건 순순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세상에 실업 따위가 생길 턱이 있겠는가? 이 문장이 바로 고용주들이 요구하는 노동의 이동성과 임금 유연성이라는 것이 진짜로 무엇인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간의 노동이 상품이 되어버린 시장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노동 시장이 이러한 제도라면, 그것에 맞선 사회 보호란 당연히 그런 제도를 파괴하여 다시는 생겨날 수 없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 실제 현실에서 일어난 것을 보자. 제아무리 노동이 상품이라고 우겨댄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따라서 노동 시장이라 해도 그 노동의 인간적 본성을 지켜낼 수 있도록 임금, 노동조건, 각종 표준과 규제를 두는 한도 내에서만 작동이 허용되었다. 혹자는 이러한 사회 입법, 공장법, 실업 보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조합 등의 장치들이 생겨나도 노동의 이동성과 임금의 유연성은 방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말은 그러한 장치들이 각각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런 장치들의 목적이란 다름아닌 인간 노동에 관한 수요 공급 법칙을 붕괴시켜서 인간 노동을 시장의 궤도에서 빼내오는 것이니까.

제15장. 인간과 자연

우리가 토지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제도와 떼어낼 수 없도록 엮여 있는 자연의 한 요소이다. 그것을 따로 고립시켜서 그것으로 시장을 구성한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 선조들이 행했던 모험 중에 가장 괴상한 모험이었다고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토지와 노동은 분리되지 않았다. 노동은 인간의 삶의 부분을 형성하며, 토지는 자연의 일부인 채 남아 있고, 삶과 자연은 함께 뭉쳐 유기적 전체를 구성한다. 토지는 친족, 이웃, 농업기술, 신앙 등의 사회 조직들, 즉 신전, 촌락, 길드, 교회 등과 엮이게 마련이다. 반면 단일한 거대 시장이라는 경제생활 장치에는 여러 생산 요소 시장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토지를 인간에게 떼어내고 사회 전체를 부동산 시장의 작동 조건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시장 경제라는 유토피아적 아이디어의 절대적 핵심이다.

제16장. 시장과 생산 조직

사실상 인간과 자연의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생산 기업의 경우에서도 시장 체제의 위협은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것이었다. 시장 체제에서 화폐 공급이 조직되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이 생산 기업들 또한 보호의 필요가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현대의 중앙은행 체제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보호 장치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발전된 장치로서, 이것이 없다면 시장경제는 스스로 낳은 자식들인 모든 종류의 영리 기업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종국에 가면 바로 이러한 보호 장치 자체가 바로 국제 시장 체제의 몰락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화폐량의 증감과 같은 통화적인 이유에서 가격 수준이 상당 기간 동안 하락한다고 해도 생산 원가에 해당하는 임금과 같은 요소들이 계약에 묶여 있어 함께 떨어져주지 않게 되면, 결국 영리 기업들은 곧 파산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고, 이는 생산 조직들의 해체와 엄청난 양의 자본 파괴라는 결과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가격 수준이 낮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격 수준이 하락하는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중앙은행이 나타나게 되자 금본위제의 자동적 작동이란 그저 허울에 불과한 것으로 저락하게 되었다. 중앙은행이 존재한다는 것은 통화가 중앙이 통제하는 관리 통화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이러한 고안 장치가 항상 의식적, 고의적으로 마련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신용을 공급하는 자기조정 메카니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제 중앙은행에 의한 조작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개별 나라들이 중앙은행을 폐지하지 않는 한 국제 금본위제가 자기조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뚜렷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중안은행은 어떤 조건에서도 항상 자국 통화의 금 가치를 준수한다는 것을 절대적 지상 명령으로 삼는 것이었기에 원칙상으로 보면 중앙은행과 금본위제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통화 가치의 변동과 함께 벌어지는 물가 수준의 운동이 이른바 금 수송점이라는 것으로부터 기껏해야 2~3%정도의 미미한 폭으로 오르내릴 경우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고정 환율을 지키기 위해 통화량 조절을 하는 과정에서 국내 경제가 감수해야 할 물가 수준의 변동이 10%나 30%까지 뛰어로으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일변한다. 그 정도의 가격ㄱ 수준의 하락은 온갖 참상과 파괴를 확산시키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각국의 국내에서 실제로 쓰이는 통화가 중앙은행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은 으뜸가는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중앙은행이 어떤 방법으로 이 사태에 대처하는가는 정책문제, 즉 정치체가 결정권을 쥐는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통화정책이 결국 정치의 영역으로 끌려오게 된다는 점에 중앙은행이라는 제도가 갖는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17장. 자기조정 기능, 망가지다

자기조정이 망가진 것은 보호주의의 결과이다. 자기조정 시장체제는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무언가 아주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것은 생산의 기본 요소인 토지, 노동, 화폐에 대해서도 시장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마저 시장들이 실제로 작동하게 되면 사회는 파괴의 위협을 당하므로 공동체 스스로 자기 보호 행동이 시작된다. 따라서 자기조정 시장체제는 그러한 기본요소 시장의 확립을 저지하려 들 것이고, 그것들이 이미 확립된 상태라면 자유로운 작동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될 것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가 스스로 기능할 능력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미국을 예로 들었다. 미국에서는 1세기 동안 노동, 토지, 화폐가 완전히 자유롭게 거래되었지만 어떠한 사회 보호 조치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 관세를 제외하면 산업은 정부 개입으로 방해받는 일 없이 굴러갔다는 것이다.  왜 미국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했는가. 단순명쾌하다. 노동, 토지 , 화폐가 무한정이었기 때문이다. 1890년대가 되기 전에는 서부 개척지가 아직도 남아 있어 무제한의 토지 공급이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싼 임금의 노동자들이 무제한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미국 화폐의 외환 가치를 안정시켜야할 책임 따위는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자기조정 시장 체제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무제한 공급이라는 조건이 충족되는 한, 인간도 토지도 영리 조직도 정부 개입으로만 얻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보호 장치가 필요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이 사라지게 되자 곧바로 사회 보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민자들의 저수지에서 하층 노동자들을 마음껏 데려다 쓸 수 있는 상황도 끝나게 되었고, 이민자들의 상층부도 마음껏 자기 땅을 찾아 정착할 수 없게 되었다. 토지나 여러 천연자원들도 희소하게 되어 절약해서 써야 했다. 통화 공급을 정치 논리에서 떼어내고 국내의 교역을 국제 교역과 연결시키기 위해 금본위제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도래하자 미국도 지난 1세기 동안 유럽이 밟아온 길을 빠른 시간 내에 되풀이하게 되었다. 토지와 경작자들의 보호, 노동조합과 입법을 통한 노동의 사회적 안정성, 중앙은행 등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1920년대의 번영은 10년으로 끝나버렸고 그 후에는 너무나 심한 경제 공황이 나타나서 결국 뉴딜 정책이 출현하게 되었던바, 뉴딜 정책이 노동과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친 해자는 유럽 어떤 나라에서 나타났던 비슷한 조치보다도 훨씬 더 깊은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적인 방향 모두에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것에는 결국 사회적 보호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우리의 핵심 주장을 입증해주는 충격적인 증거가 되었다. 

국내적, 국제적, 사획적, 국가적 보호주의가 서로서호 하나로 융합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곡물법의 도입으로 생활비가 상승하게 되자 이를 구실로 공장주들은 자신들의 공산품에 대해서도 관세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고 거의 어김없이 그것을 카르텔 정책의 도구로 써먹었다. 노동조합도 당연하게 생계비 상승을 보충하기 위해 임금 상승을 주장하고 나섰고, 고용주들은 그렇게 불어난 임금 청구서를 자신들이 감당하려면 수입관세 조치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요구를 했으니 이를 감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제18장. 체제 붕괴의 긴장들

보호 관세를 요구하는 이기적인 장사꾼들과 감상주의에 휘둘린 사회 입법이 제멋대로 자유무역과 금본위제 체제를 엉망으로 부수어버렸다는 그들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 반대로 이러한 보호주의적 제도들의 확산을 촉진했던 것은 바로 금본위제 자체였다. 금본위제가 요구하는 고정환율제의 부담이 커질수록 이러한 보호주의적 제도들이 더욱 환영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로 관세, 공장법,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등은 안정된 통화 가치의 전제조건이 되어버렸다. 

19세기에 들어 전형적 상황을 규정했던 것은 자기조정 시장의 메커니즘이었다. 이 메커니즘으로부터 19세기 문명의 두 가지 특성이 도출되었다. 첫째, 19세기 문명은 일정한 결정론의 메커니즘에 정밀하게 지배된 문명이었다. 둘째, 19세기 문명은 경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 두 개의 특징을 하나로 엮어 19세기 문명을 그토록 엄밀하게 지배했던 결정의 메커니즘이 인간이 경제적 동기로 움직인다는 사실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즉 인간이란 모두 개인으로서 자기 스스로 금전적 이해를 추구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차원에서 보자면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연관도 없다. 결정 메커니즘이 그토록 엄밀한 것은 인간에게 물질적 동기 부여가 강력한 힘을 갖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원인이 잘못 설정되었던 것이다. 수요-공급-가격 체제란 그 안에서 작동하는 인간들의 동기가 경제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그와 무관하게 항상 균형을 이루게 되어 있다. 

제3부. 진행중인 전환

제19장. 인민 정부와 시장경제

1920년대 노동 세력은 그 수를 무기로 삼아 의회에 참호를 파고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며, 자본가들은 산업을 자신들의 헐옹성으로 건설하여 그 위에 올라 앉아 온 나라를 호령했다. 이러한 자본가들에 맞서 인민들은 산업의 기존 형식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각종 단체를 만들고 영업활동에 인정사정없이 개입해 들어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면 산업의 거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자유롭게 선출한 정부와 의회의 지배자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도록 뒤흔들어놓는다.  그러면 이번에는 민주주의적 기관과 단체들이 만인의 생계가 달려 있는 산업 체제 전체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자 마침내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 양쪽 모두가 완전히 마비될 위협이 현실화되는 순간이 오게 되었다.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고 사람들은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따져보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쉬운 길만 제공해준다면 어떤 이들에라도 기꺼이 지도권을 떠안겨주기에 이르렀다. 파시즘이라는 해결책이 나타날 때가 무르익은 거이다.

제20장. 사회 변혁과 역사가 맞물려 진행되다. 

제21장.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

19세기 문명은 외부 혹은 내부의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그 문명의 생명력을 잠식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황폐화도 아니었고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나 파시스트 하류 중산 계급의 반란도 아니었다. 붕괴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든가 과소소비 혹은 과잉생산과 같은 이른바 경제 법칙 같은 것들의 결과도 아니었다. 그것인 해제된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원인이 있었으니 자기조정 시장의 활동으로 사회가 절멸당하지 않기 위해 취해진 여러 조치들이었다. 

토지, 노동, 화폐라는 생산 요소들을 시장에서 제거하는 일은 이토록 대단히 이질적인 여러 종류의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을 마치 하나의 획일적인 활동으로 보는 것은 오직 그 세 가지 모두를 마치 상품처럼 다루는 시장 관점에서나 나오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그 상품 허구의 해체를 통하여 회복되는 대상과 사실들은 사회의 전 영역과 모든 방향에 걸쳐 있다. 사실상 획일적인 시장경제의 해체는 이미 새로운 종류의 사회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또한 시장 사회의 종말이라는 것이 결코 시장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 시장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속하면서 소비자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수요의 변화를 나타내주며 생산자들의 소득에 영향을 주고 회계의 도구로서도 계속 기능하겠지만, 경제적 자기조정을 이루는 기관이라는 성격은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

현재의 상황은 외교정책에 명백히 모순되는 두 가지의 요구를 낳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현재 우호적인 나라들 사이에 19세기의 주권 국가 체제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긴밀한 협력이 나타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또 동시에 각국 내의 시장경제가 규제 체제로 전환한 것이 현재의 실정이기 때문에, 각국 정부들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핏발을 곤두세우게끔 되어 있다. 낡은 세계는 무너졌으며, 그 폐허로부터 각국 정부가 자신들 국내 제도를 뜻대로 자유롭게 조직하는 가운데에서 서로 간에 경제적인 협력을 이루는 새로운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무너져내린 시장경제로부터 상속받은 고상한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수를 써서라도 전력투구해야만 한다. 시장경제 아래에서는 자유도 평화도 제도화될 수 없었다. 그 체제가 목표로 삼는 것은 이윤과 물질적 안녕을 창출하는 것이었지 평화와 자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보자면, 이제 우리는 그것의 유지와 확장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장치들을 계획적으로 창출해야만 하며, 개인의 자유는 우리가 아는 만큼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는가에 비례하여 존속하게 될 것이다. 질서가 확립된 사회에서 개개인이 체제에 대한 순응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제도적으로 보호되어야만 한다. 기성 권력이란 사회적 삶의 몇몇 영역에서 행정 과제를 위탁받은 데에 불과하므로, 모든 개개인은 그 권력을 두려워하는 일 없이 스스로의 양심과 양식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학문과 예술은 어떠한 권위에도 위축되는 일 없이 오로지 문자공화국의 통치만을 받아야 한다. 절대적인 강제 따위는 결단코 사라져야만 한다. 모든 반대자들은 숨어들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되어야 하며, 계속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지가 주어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순응을 거부할 권리는 자유로운 사회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데에 도덕적 장애물을 하나 만나게 된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요소인 계획과 통제가 지금 자유의 부정이라는 이름으로 공격당하고 있다. 그 대신 영리 기업의 자유와 사적 소유야말로 자유의 핵심 사항들이라고 천명되고 있다. 규제를 통해 창출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매도당하며, 그것이 제공하는 정의, 자유, 복지란 단지 노예제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하다고 비방당하고 있다. 

자유주의 경제는 자유라는 우리의 이상을 그릇된 방향으로 오도했다. 자유주의 경제는 본질적으로 유토피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성취하는 과제에 가능한 접근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권력과 강제가 없는 사회란 가능하지 않으며, 강압이 기능하지 않는 세상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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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해제>

제3~5장 : 이 부분은 인류 역사의 진화에서 경제가 사화와 맺는 관계를 포괄적으로 해명하고, 그 속에서 시장경제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한다. 인간 사회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19세기 특유의 경제주의적 편견에 의해 크게 오해받아왔다. 인간은 모두 자기의 이익이이라는 경제적 이해로 움직이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렇게 구성되는 시장경제의 경제 법칙이야말로 전 역사에 걸쳐 모든 경제와 나아가 사회까지 지배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당시 최신의 경제인류학 및 고대 중세사의 성과를 빌려 이러한 관념이 19세기인들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경제는 사회 과정에 묻어 들어있는 것이며, 특히 시장경제는 인류 사회의 보편적 경제 형태이기는 커녕, 최소한 200년 전까지는 어디서나 부수적 존재로 철저하게 억압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윤 동기로 조직되는 시장이라는 형태는 16세기 영국에서처럼 자유롭게 풀려날 경우 급속도로 사회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을 완전히 시장 제도 하나만으로 조직하여 그것으로 자기조정 시장을 세운다는 것은 적어도 지난 수천 년 수만 년의 인류사에 비추어보면 자연적이기는커녕 극히 인위적인 유토피아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제6~10장 : 그렇다면 이토록 비현실적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유토피아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가장 주된 원인은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제 생산이 출현한 것에 있다. 예전의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보조하는 것인 데 반해, 새로이 나타난 값비싼 기계들은 인간의 기능을 대체하고 오히려 인간을 자신의 보조적 위치로 떨어뜨려버리는 것들이다. 생산 주체는 이 값비싼 기계가 되어버리고, 인간과 자연은 그 기계를 가동시키기 위해 들어가는 투입물이라는 위치로 떨어진다. 그런데 이 기계는 예전의 기계와 달리 큰 자본을 투하하여 구입하는 것이므로, 시장의 변덕에 맞추어 기계 가동률도 자동적으로 변해주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채산성을 유지하려면 기계 가동률의 증감에 따라 투입물인 인간과 자연은 저절로 그 투입량이 조절되어 호황 시에 마음껏 구입했다가 불황 시에는 바로 잘라낼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결국 인간과 자연 그리고 기게 생산의 불가결의 요소인 화폐ㅡ사회적 구매력 ㅡ또한 아무 때이건 원하는 만큼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취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격한 상상력이 쉽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상품화의 마지막 단계였던 인간의 상품화는, 영국의 경우 지주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닥치고, 이들은 실업자에게 무조건 생활비를 보장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스피넘랜드 법을 만들어낸다. 결과는 끔찍한 참극이었다. 구호 대상 극빈자들의 수는 한없이 늘어만 가고 노동 생산성도 한없이 추락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그 와중에 인간이 인간의 형상을 잃고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짐승 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 올라와 아가리를 벌린 생지옥을 보면서 자유주의자들은 인간 세상에는 어쩔수 없는 자연법칙이 존재하므로 그것에 순응하는 것만이 이 참극에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광신적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생각을 체현한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하나의 과학 법칙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결국 인간도 노동이라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유토피아의 마지막 단계의 완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 오언이라는 중요한 예외가 있었다. 마키아밸리, 루터, 홉스에 이르는 근대 초기의 사상가들은 국가 영역이 사회의 실체라고 상상했고, 이제 헤겔과 리카도는 새로이 발견된 시장경제가 사회의 실체라고 상상했지만, 오언은 국가와 시장이라는 두 영역은 물론 기계라는 압도적인 현실에도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고, 이 모든 북새통과 시련의 밑바닥에 버티고 있는 진정한 실체는 인간과 자연이 구체적으로 맺는 관계, 즉 사회 실재의 현실임을 간파했다. 드디어 국가도 시장도 아닌 사회라는 실체가 발견된 것이다. 오언은 그의 천재적 통찰을 통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시장경제의 법칙 앞에 인간을 내맡기는 것도 아니고 또 국가의 법령과 명령으로 후퇴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그 사회라는 실체를 강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제11~16장 : 이제 인간, 자연, 화폐까지 모두 상품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품 허구가 보편화되면서 인간의 경제는 모두 자기조정 시장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상품 시장은 동시적이고도 지구적으로 나타나야만 비로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빈법의 철폐, 금본위제의 시행, 곡물법의 철폐를 통한 자유무역 등과 같은 신앙적 행동이 취해지며, 19세기 문명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행동이 현실화되는 것을 사회라는 실체는 단 한순간도 못 견뎌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정당을 만들어 저항했고, 심지어 자본주의적 기업들마저 중앙은행을 통해 원활한 통화 및 신용 공급을 요구하며 저항했다. 풀리니가 말하는 이중적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이중적 운동이야말로 폴리니가 강조하는 시장경제의 유토피아적 성격과 이에 맞서는 사회 실재의 발견이 표출되는 지점이다. 시장경제가 나타난 것은 자유방임은커녕 엄청난 국가 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시장경제에 맞선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은 아주 자발적이고 자생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달성할 수 없는 어거지 유토피아에 대해 사회라는 실체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모습으 드러낸 것이다. 폴리니가 이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으로 생각한 로버트 오언의 생각처럼, 인간 존재의 핵심은 국가도 기계도 시장도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실제로 관계를 맺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 실체인 사회는 시장이라는 유토피아에 의해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적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한편으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시장 기율을 자기에게 채찍질하다가 너무 아프다며 요리 빼고 조리 뺀다. 그러다 문득 정신 차리고는 또 자기에게 시장 기율의 채찍질을 더욱 가혹하게 하고 또 요리조리 뺀다. 이 어처구니없는 스미골과 골룸의 자작 2인극이 계속되면 사회는 결국 붕괴하지 않을 수 없다. 붕괴의 긴장이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를 휩싸게 된다.

제17~20장, 제1~2장 : 이것으로 폴라니 당대에 목도하고 있는 19세기의 문명 붕괴와 그를 이은 거대한 전환을 설명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국내정부, 자기조정 시장, 국제 금본위제, 세력 균형 체제로 구성된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는 곧 제국주의적 경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파국을 맞는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의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세계가 19세기의 자기조정 시장 체제라는 유토피아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국제연맹과 금본위제를 앞세워 19세기 문명을 재건하려는 헛된 노력에 몰두한다. 하지만 결과는 금본위제의 몰락과 함께 산사태와 같은 붕괴 및 전환의 물결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대중 민주주의를 장악한 반 시장세력과 산업을 장악한 자본가들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라는 가랑이를 한 쪽씩 찢고 만다. 

제21장 : 이것이 19세기 이래로 서구 문명이 걸어온 파우스트적 몸부림의 자초지종이다. 이제 시장 경제라는 것을 구성하겠다는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은 전 지구적으로 힘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경제와 어떤 사회를 구성해야 할까. 과연 파시스트들처럼 산업 사회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사회를 기능적 구조로 완전히 재편하고 인간은 자신의 영혼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한 채 그 구조의 수나사, 암나사로 변해야 할까. 아니면 이러한 끔찍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처럼 시장경제에 대한 개입과 간섭을 일절 거부하고 19세기 문명의 형태를 고집해야 할까.
폴라니의 대답은 다시 자유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영혼은 분리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을 여러 기능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산업 사회라는 복합 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걷어내고 그 밑에 버티고 있는 실체, 지난 2세기 동안 한순간도 그 유토피아에 길들여지지 않고 이중적 운동이라는 역동을 만들어낸 사회라는 실체를 발견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이제 2000년 전 예수의 복음서 이후로 새롭게 재정의되어야 할 때가 왔다. 이것이 사회의 발견이며,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주의가 인류의 나아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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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자기조정시장' 개념의 탄생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위기의 시대에 읽는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강연의 두 번째 주제는 바로 자유주의, 곧 주류경제학의 모든 이론의 기본 중 하나인 자기조정시장에 대한 비판이다. 수요와 공급은 시장 안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재화가 상품화된다는 믿음은 현대 세계사를 관통하는 신앙과도 같다. 폴라니는 이를 전면 부정했다.

"폴라니는 마르크스나 케인스 아류가 아니다"

일단 가벼운 얘기로 시작해보자. 지금 우리의 모임을 시장주의적으로 볼 수 있을까?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들은 일정액의 돈을 내고 강의에 참석했다. 저도 강연료를 받는다. 소비자와 판매자가 모이는 장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느냐다.

형식(form)과 내용(substance)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생기는 갖가지 일에 어떤 형식을 씌우느냐가 중요하다.

제 생각에 여러분은 무언가를 소비하기 위해서 이곳이 오시지 않았다. 저도 강의료가 주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시장이라는 형식을 씌우는 순간 무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형식에 의해 내용이 재편되는 일이 생긴다.

다른 예를 또 들어보자. 대한민국에 우리가 왜 모여 있는가? 재작년 참여연대에서 실시한 '대한민국을 다시 묻는다' 시리즈에서 이 질문이 나왔는데 대답들이 시원치 않았다.

87년 6월에는 '민주주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잠깐이나마 사람들이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통하지 않는다. 최근 등장한 새로운 정체성은 바로 '주식회사 코리아' 정도가 될 것 같다. 우리가 이 나라에 돈 벌려고 산다는 얘기다. 나라가 주식회사이니 대통령은 CEO가 되는 게 당연하다.

이제껏 든 예들에서 볼 수 있듯, 형식에 따라 내용이 변한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시장'이라는 형식이 내용을 바꿔왔다. 폴라니는 이를 영혼의 파괴라고 얘기한다.

오늘 말씀드릴 얘기는 책 6장부터 10장까지와 3장의 내용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자기조정시장 개념과 허구적 상품 개념을 먼저 말씀드리겠다. 강의를 듣다 보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로 어떻게 경제를 운용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란 생각이 드실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핀햄랜드 제도(speenhamland system)다. 이 제도가 자기조정시장 개념을 탄생시켰다. 실업률 증가에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한 대응을 했는지, 그리고 그 황당한 대응에 대한 더 황당한 대응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너무나 황당했던 인류의 대응이 바로 오늘날 신화처럼 받들어지는 고전파 경제학과 자유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1. 자기조정 시장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상품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배웠다. 수요-공급 곡선. 그런데 이 그래프가 왜 움직이는지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가 합리적인 가격을 찾아간다(자기조정시장)고만 들었을 분이다.

유럽인들은 16세기에 아주 중요한 경제학적 발전을 거친다. '한 상품 가격은 다른 시장의 상품 가격과 관련이 있다'라는 것이다. 이후 17세기 말 또 굉장한 발견이 나온다. '시장의 모든 가격은 알아서 결정된다'는 것. 너무 당연한 얘기로 들리지만 당시 시대상과 시장의 특성을 보면 새로운 발견이라 부를 수 있다.

중세시대 유럽의 경제 규모가 100이었다고 가정하자. 시장은 주변부에 10도 안 되는 크기로 머물렀다. 삶에 굉장히 중요한 곡물, 고기 등은 교환될 뿐이었고 비본질적인 것들, 예를 들어 예수님 십자가나 아라비아에서 온 사랑의 묘약이니 하는, 삶에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상품만 시장에서 거래됐다. 당시만 해도 상품가격은 장사꾼의 수완, 나쁘게 말하면 사기술에 의해 결정됐다. 상품 간 가격변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점차 삶에 중요한 것들도 거래되게 된다. 발트해에서 들여온 곡식이 지중해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발트해의 곡식 가격이 지중해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차액거래도 생겨났다. 이런 현상이 점차 심화된 17세기 말이 바로 정치경제학의 본격 시작 지점이다.

쉽게 밀가루와 자장면으로 생각해보자. 밀가루 가격이 오르면 자장면 가격도 오른다. 따라서 시장 가격이 얼마에 결정되는지, 그리고 이 가격 이동이 얼마나 신속해질지가 굉장히 중요해진다. 물론 상품마다 가격변동이 사회에 미치는 충격은 다르다.

그렇다면 당시는 물론, 지금도 변동에 가장 큰 충격을 미치는 상품은 무엇일까. 18세기 후반이 되면 △토지 △임금 △이자(자본가격) 등 세 가지로 정리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개입되지 않고 만들어지는 물건은 없기 때문이다. 이들 요소의 가격결정 공간을 각각 △토지시장 △노동시장 △화폐시장이라고 한다. 이들을 생산하는 집단은 △지주(토지) △노동자(임금) △자본가(자본)로 나뉜다. 영국의 경제학자들이 이처럼 과감한 분류를 하면서 '모든 인간은 이들 삼대 요소 중 하나'라는 논리가 퍼진다.

이제 자기조정시장의 개념을 정리해보자. 앞서 본 3대 요소 시장에서 각각 소득이 발생한다. 지주는 지대를, 노동자는 임금을, 자본가는 이윤을 가져가게 된다. 자연스럽게 3대 요소시장과 더불어 사회를 지탱하는 3대 계급이 형성된다. 이들 요소들이 경제 변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소득범주라는 믿음이 아담 스미스의 책에 이론화된다. 데이비드 리카르도, 칼 마르크스 등도 이 영향력에 무관하지 않다. 자기조정시장 개념의 탄생이다. 시장 참가자들이 '스스로' 가격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자기조정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는데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3요소 이외의 누군가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동네 불량배가 나타나서 자장면 가게 아주머니의 가격 결정 과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부당한 개입에 따라 자기조정규제 매커니즘이 침해당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2. 허구적 상품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들 3대 요소시장은 3자의 개입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들을 두고 '허구적 상품'이라고 한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토지는 자연에 귀속돼 있다. 원래 판매되기 위해 존재했던 요소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원래 임금을 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화폐 역시 그렇다. 신용네트워크에서 사용되는 증서일 뿐이었지, 상품은 아니다. 폴라니는 화폐의 이런 본질적 특성을 두고 '화폐는 사회과학에 묻혀 있었다'라고 했다.

따라서 자연과 사람, 상인 간 신용관계의 다른 이름을 몽땅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3대 요소)을 가격결정 변수로 이해하고 소득 발생의 원천으로 이해하는 것은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상품이 아닌데 상품인 척 한다는 얘기다. 폴라니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한다.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3대 요소가 다 상품이라고 배워왔고, 이를 더욱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다시 각각의 예를 들어보자.

전라도 남원에서 생산되는 쌀이 15만 원, 캘리포니아 쌀은 3만 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남원의 농토는 유지될 이유가 없다. 남원땅은 수익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자기조정시장을 믿는 정부는 '남원은 부동산일 뿐이다. 가치가 떨어지면 사라지는 게 마땅하다'고 얘기할 것이다. 이런 일이 실제 영국에서도 일어났다. 곡물의 수출입을 규제한 곡물법이 리처드 코브던의 주도로 1846년 폐지된다. 당시 코브던이 반발하던 지주들에게 한 말이 이렇다. "농촌이라고 별 것 있나. 수익성을 좇는 비즈니스일 뿐이야."

최근 벌어지는 탄소배출권 거래제, 물 상품화도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탄소배출권 거래제의 논리는 이렇다. 나라마다 쓸 수 있는 탄소배출량을 배정한 후, 배출 권리인 쿠폰을 발행한다. 그리고 이 쿠폰, 곧 탄소배출권을 매매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다면 시장의 자기조정기능에 의해 쿠폰 가격은 점차 비싸지고, 따라서 일정 수준 이상의 가격이 되면 나라들은 탄소배출을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나라들은 녹색산업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쉽게 말해 쿠폰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면 지구온난화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이다. 실제 유럽인들의 대응은 어떤가? 탄소배출량을 줄이지는 않고 쿠폰만 잔뜩 사놓았다.

노동시장도 살펴보자. 5년 동안 잘 다니던 회사에서 어느날 갑자기 출근하지 말라는 문자가 온다. 이게 말이 되나? 된다. 우리의 몸은 상품에 불과하니까. 주류 경제학 교과서대로 설명하자면 '노동의 탄력성'이라고 한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신봉하는 논리다. 밀턴 프리드먼(신자유주의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시카고학파의 거두)은 "모든 사람이 보트를 타고 평생 배를 젓는 곳"이라고까지 했다.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따라서 최대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숙명인 평생 항해(노동유연성)를 방해하는 자들이니까.

조금 고약하긴 한데, 만일 앞으로 특정 대학에서 "우리 학교는 교수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테뉴어(영년 교수제)를 없애겠다"는 정책을 내놨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위대한 시장의 자기조정'을 찬양하던 경제학 교수들은 틀림없이 노조 만들고 "사랑도 명예도…"하며 노래 부를 것이다. 그들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사람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화폐 시장도 보자. 우리는 돈이 상품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입증할 살아있는 예를 이미 보았다. 미국이 지난해 경제위기로 휘청하자 자기조정시장 논리로는 미국의 은행 절반이 파산해야 맞았다. 그런데 그렇게 했나? 미국 정부가 한 일은 은행들보고 자산가치를 자율적으로 평가하라, 곧 분식회계하라고 한 것이다. 은행이 파산하면 안 되니까. 미국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화폐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고.

자, 이처럼 본질적으로 상품화될 수 없는 것들까지도 모두 상품화하려는 노력이 사회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이를 막으려는 반발, 곧 사회의 자기보호가 생겨나게 된다. 시장이 혹독할수록 반발도 강해진다. 결국 어떤 사회도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이를 '시장경제의 유토피아성'이라고 한다. 시장경제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폴라니는 따라서 한 발은 자기조정시장에, 한 발은 사회의 자기 보호에 두면 사회가 버텨낼 수 없으니 자기조정시장을 버리자고 했다.

폴라니의 설명을 그대로 읽어보자.

"우리가 주장하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자기조정시장은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실행될 경우 인간과 자연은 파괴당하고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사회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조치든, 사회 일상을 망가뜨리면서 사회는 또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결국 사회는 자신을 기초로 삼는 사회조직마저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3. 노동법의 기원

이제 두 번째 얘기를 할 차례다.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조정시장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나온 것일까'가 얘기의 내용이다.

흔히들 아담 스미스가 이 이론을 정립했다고 이해하는데 틀렸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먼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스핀햄랜드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스핀햄랜드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클로저 운동부터 살펴봐야 한다. 책에서는 7, 8, 9장에 설명된다.

16세기 영국에서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토지를 수익을 낳는 자산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땅이 상품화되는 첫 단계로 이행하면서 발생했다.

원래 영국은 지주가 가진 땅의 비는 곳인 공동경작지 '오픈 필드(open field)'에 아무나 와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16세기 들면서 네덜란드에서 모직물 산업이 성행하기 시작하자 지주들이 돈냄새를 맡았다. 오픈 필드를 내버려둘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하고 그곳에 양을 키우면 거대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자기 토지에 울타리를 쳐버린다. 이게 인클로저다.

인클로저가 너무 심해지다보니 영국의 농촌이 쑥대밭이 돼 버렸다. 농민들이 갈 곳이 없어지고 떼거지가 됐다. 떼거지가 더 모이면 떼강도로 변한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마을은 초토화됐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영국 왕까지 나서서 지주들을 말리기에 이른다. 이게 법령화되고 점차 체계화되면서 오늘날 영국 노동법이 된다.

영국 노동법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구빈법과 정주법, 그리고 직인법이다.

첫째 규약은 이것이다. 부랑하지 말라. 부랑자를 적발하면 귀를 잘랐다. 다시 적발하면 죽였다. 이게 구빈법(빈민 구제법)이다. 살벌한 것 같지만 내용이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부랑을 금지하는 대신, 어떻게든 직업을 찾아서 일하라고 강제했다. 그리고 일을 못 하는 병자나 노약자는 나라에서 먹여줬다. 이를 위한 시설이 구빈소이다.

그렇다면 부랑은 어떻게 막느냐, 이것이 바로 정주법이다. 영국의 지방행정 기초단위는 페리시(perish)라 불리는 교회의 교구 단위다. 우리로 치면 면 정도 된다. 이 교구를 벗어나 살 수 없도록 강제한 게 정주법이다. 교구를 잠시 살펴보면, 크게 목사와 시골 지주(squire)가 교구의 중심인물이다. 이들은 지역 행정과 치안을 돌봄은 물론, 부랑자들에게 일할 곳을 찾아주는 역할도 했다.

마지막으로 직인법은 살 곳이 정해지고 노동 의무를 받은 사람들에게 노동 연한과 규율 등을 정한 것이다. 매년 중앙정부에서 나와 임금사정도 했다.

결국 영국 노동법의 목적을 요약하면 △떼거지를 막고 △모든 영국인에게 노동을 강제하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지방에서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4. 공장의 탄생과 스핀햄랜드 제도

그런데 18세기 말이 되자 무시무시한 일이 생겼다. 공장도시가 탄생했다. 영국의 전통적인 지역 구분은 크게 교구(주거지, 농업지)와 타운(상업중심지)이었다. 공장도시는 이들 구분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당시 영국의 대외 교역량은 추세적으로는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나 진폭이 컸다. 교역량이 늘어날 때는 농촌 인구가 공장도시로 다 빨려들어갔고 공장에 일감이 떨어지면 실업자가 급증했다. 이들은 인근 교구로 흘러들어와 구빈소를 가득 메웠다. 공장도시의 등장으로 인구 이동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시골지주들은 그 부작용을 두려워했다. 사람들이 공장으로 흡수되면 그만큼 지주의 권력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때 이들이 내놓은 대책이 바로 스핀햄랜드 제도이다. 스핀햄은 지명이다.

제도는 간단하다. 앞으로 지주들이 노동자에게 무조건 빵 1갤런 값에 맞먹는 돈을 매주 지급한다는 것이다. 가족이 많으면 더 많이 줬다. 막말로 '지주가 무조건 먹여살려줄테니 도시로 가지 말라'는 얘기다. 다른 교구 역시 이 제도를 본받아 순식간에 영국 전역으로 확산된다. 전대미문의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크게 세 가지 문제가 곧바로 불거졌다.

첫째로 더 많은 소득 하위계층이 점차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됐다. 사람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은 지주들의 재산과 지역민의 세금으로 충당했다. 국가법령이 아니니 정부에서는 지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호를 받는 자(pauper)들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세금부담은 더 커졌다. 점차 생활이 악화되니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결국 구호대상자가 됐다.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한없이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동규율 문제도 심각하게 흔들렸다. 이제 구빈소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지역에서 다 먹여 살려주니 사람들은 굳이 일을 열심히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 때문에 노동규율이 땅에 떨어졌다. 노동생산성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이 제도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인간 자체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책 8장을 읽으면 상세히 묘사돼 있다. '현세에 아가리를 벌린 지옥의 철학이 나왔다' '이곳은 실로 을씨년스러운 비참의 구렁텅이였고, 이곳으로 이동한 농민은 … 점잖은 삶을 누리던 사람들도 일단 이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순식간에 진창 속의 짐승으로 변했다'고 책은 말한다. 예비군들을 생각하면 되겠다. 폴라니는 포퍼들을 노예 상선에 갇혀 숨을 헐떡이는 흑인에 비유한다.

5. 자유주의, 자기조정시장을 움직이는 법칙

우리가 살펴봤듯이, 스핀햄랜드 제도로 인해 빈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빈민 증가 원인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들은 '인구 자체가 늘어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이거나 살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살리기(스핀햄랜드)가 실패했으니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다 굶겨 죽이자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 당시 '다 죽게 내버려두자'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1795년 조셉 타운센드라는 목사가 재미있는 글을 배포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서양을 오가던 영국 상인들이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에 고기를 얻기 위해 염소를 풀어놓았다. 이를 질투한 스페인 사람들은 염소들을 다 잡아먹으라고 개를 풀어놓는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염소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섬 내의 개와 염소 사이에 일정한 개체 균형이 맞춰졌다.

타운센드는 이 내용에서 문명사적 전환을 이끌어냈다.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바로 신께서 일하는 방식이라는 얘기. 떼거지들을 죽게 내버려두면 인류가 알아서 균형을 찾아간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이런 주장에 크게 감화된 사람이 오늘날 경제학계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토머스 맬서스이다. 그는 빈민구제를 위한 방법으로 "인간 세계에는 항상 식량으로 먹여 살릴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수확 체감의 법칙). 따라서 잉여 인간들은 죽여야 한다. 전쟁을 조장하거나 전염병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편의 내용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후 낸 책에서는 어조를 조금 완화했고, 3편에서는 산아제한 등의 방법을 제시한다. 목사였던 그는 실제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애를 낳지 말라고 충고했다.

맬서스와 리카르도와 같은 이들은 바로 이처럼 비관적인 시각으로 자기조정시장을 움직이는 기초 법칙을 찾아냈다. 맬서스가 말한 임금 결정원리를 정리해보자.

만일 적정 임금수요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이 주어지면 노동자들은 그만큼 영양상태가 더 좋아진다. 그런데 인간은 태생적으로 성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태아가 더 많이 생긴다. 이로 인해 노동공급이 늘어나면 그만큼 임금은 떨어진다. 그러면 반대로 노동자들의 영양 상태가 나빠져 노동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 노동자들은 줄어든다. 이 과정을 통해 적정 임금수준이 결정된다.

인간이 모여사는 사회는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무조건 내버려두기만 하면 바로 희망의 계기가 싹튼다. 자기조정시장이 자율적으로 모든 균형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복음이 생겨난다. 바로 자본축적이다. 어찌됐든 자본은 계속 축적된다. 인간은 항상 균형 수준을 맞추지만 생산물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을 죽게 내버려두는 게 사회 전체의 증대를 이끌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한없는 진보의 힘이고, 언젠가는 도달할 풍요의 낙원으로 가는 유일한 희망이다. 따라서 자기조정시장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어떤 누구도, 싸구려 동정심으로 빈민 구제에 나서서는 안 된다. 자기조정시장이 작동해 부가 늘어날 기회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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