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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Ecomomics

자본주의와 자유 by 밀턴 프리드먼

by hoyony 2017. 12. 30.

Capitalism and Freedom


청어람미디어
2017. 4. 14
Milton Friedman

 

서론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 중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내용이 아니라 그 유래에 논쟁이 집중되는 현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구절의 전·후반부 중 어느 쪽도 자유사회의 자유인이라는 이상에 걸맞은 정부와 시민의 관계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말은 국가가 보호자이고 시민이 피보호자임을 은연중에 전제하는 가부장적 표현으로서, 이는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자유인의 신념과 배치된다.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유기체적 관점이며, 정부를 주인 또는 신격으로 보고 시민을 종복이나 숭배자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유인에게 국가란 구성원인 개인들의 집합체이지 개인위에 군림하거나 개인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인은 공통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하고, 공유하는 전통에 애착을 갖는다. 그러나 자유인은 정부를 수단이나 도구로 여길 뿐, 호의를 베풀거나 선물을 주는 시례자라고도,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봉사해야 할 주인이나 신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인은 시민들 각자가 헌신하는 목표들과 일치하는 경우를 빼고는 어떤 국가적 목표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인은 시민들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들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국가적 목적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인은 국각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각자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저마다 목표와 목적을 이루며, 무엇보다도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나와 내 동료 시민들이 정부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인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자유를 보호하고자 세운 정부가 바로 그 자유를 파괴하는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덧붙일 것이다. 자유란 희귀하고 여린 초목이다. 우리는 권력의 집중이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믿으며, 역사가 이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정부는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이고 우리는 이를 수단으로 삼아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이 정치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면 정부는 자유에 대한 위협이 되기도 한다. 비록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처음에는 선의로 행동했고, 또 자신이 행사하는 권력에 의해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권력이란 그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부가 자유에 대한 위협이 되는 것을 막으면서 정부로부터 기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첫 번째 원칙은 정부의 권한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주된 기능은 외부의 적들로부터는 물론 동료 시민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는 것, 즉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사적 계약을 실현하며 경쟁적 시장을 육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제활동과 그 밖의 활동에서 주주로 자발적인 협력과 민간기업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민간 부문이 확실하게 정부 부문의 권력을 견제하고, 표현·종교·사상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도록 할 수 있다.

두 번째 대원칙은 정부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면 연방정부보는 주정부가, 주정부보다는 지방자치단체가 행사하는 편이 낫다. 청소든 도시계획이든 학교든 간에 우리 지역에서 돌아가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면 그만이다. 실제로는 그렇게까지는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지라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만약 연방정부, 즉 국가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배타적 국민국가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는 달리 이렇다 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면, 그들은 소득을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에게로 이전하는 것이든 사적 용도에서 공공 용도로 이전하는 것이든 간에, 자신들이 생각하는바 공익에 맞는 정책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법제화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는 권력은 또한 해약을 끼치는 권력이기도 하다. 오늘의 권력자가 내일의 권력자로 남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해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앙집권화의 추진에 앞장선 사람들 중 대다수가 선의로 그 일에 뛰어들고서도 가장 먼저 그 결과를 후회하게 되리라는 점은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으며, 이 같은 이치는 무릇 정부의 권한 범위 확대를 추진하는 경우 전반에 걸쳐 그대로 적용된다.

문명의 크나큰 진보는, 건축이나 회화에서건 과학이나 문학에서건 공업이나 농업에서건 간에, 결코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이룩한 것이 아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아인슈타인과 보어, 셰익스핑피어, 밀턴, 파스테르나크, 휘트니, 매코믹과 에디슨, 헨리포드, 제인 애덤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알베르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인간에 대한 지식과 이해, 문확, 기술적 가능성 혹은 박애사업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아니다. 그들의 업적은 개인의 뛰어난 재능, 완강하게 고수한 소수 의견, 다양성과 차이를 용납한 사회 분위기의 합작품이었다.
정부는 결코 개별 행동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따라갈 수 없다. 언제 어느 때이건 간에 정부가 의식주에 통일적 기준을 부과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생활수준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교육, 도로건설, 공중위생에도 통일적 기준을 부과함으로써 중앙정부는 분명히 여러 지역사회의 운영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었고, 어쩌면 모든 지역사회의 평균 수준을 향상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부는 진보 대신에 정체를 불러올 수 있으며, 다양성을 획일적인 범용성으로 대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다양성이 미래의 낙후된 수준을 현재의 보통 수준보다 높이 끌어올릴 수 있는 실험에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19세기 말부터, 특히 미국에서는 1930년 이후에 자유주의는 말은 특히 경제 정책에 있어서 매우 다른 내용에 중점을 두는 것처럼 비치게 되었다.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간의 자발적인 대책보다 일차적으로 국가에 주저없이 의지하려는 태도를 연상시키게 된 것이다. 자유 대신에 복지와 평등이 자유주의를 나타내는 표어가 되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의 확산이야말로 복지와 평등을 진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고 보았다면, 20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복지와 평등이 자유의 전제조건이나 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복지와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고전적 자유주의가 맞서 싸웠던 국가 개입 및 가부장적 온정주의 정책들의 부활을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자유주의의 말뜻에 일어난 변화는 정치문제에서보다 경제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20세기 자유주의자도 19세기 자유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의회제도, 대의제, 민권 등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정치문제에서도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의 침해를 몹시 경계했고, 따라서 공사를 막론하고 권력의 집중을 두려워했으므로 정치권력의 분산을 옹호했다. 그러나 20세기 자유주의자들은 적극적 행동을 옹호하고, 권력이 표면상으로나마 유권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정부의 손아귀에 있는 한, 권력의 선한 의지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옳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있어서 중앙집권화된 정부에 호의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해왔던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지만, 자유를 촉진하는 국가 개입이라면 당연히 유지하고자 한다. 더구나 실제로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너무나 차이가 큰 입장들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장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불가불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나 귀족주의적 보수주의 같은 복합형 신조어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1장.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외환통제 때문에 미국에서 휴가를 보낼 수 없었던 영국인인이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 때문에 러시아에서 휴가를 보낼 수 없었던 미국인이나 똑같이 본질적인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자유에 대한 경제적 제한이고 후자는 정치적 제한이지만, 두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특정 종류의 퇴직연금기금에 자기 소득의 10%쯤을 납입해야 한다고 법이 강제한다면, 이러한 강제를 받는 시민은 그에 상응하는 만큼 개인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주의 법적 규제 때문에 면허 없이는 자기가 선택한 집업을 가질 수 없게 된 미국 시민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유의 본질적인 부분을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물건의 일부를, 예를 들어 스위스 사람의 시계와 바꾸고 싶지만 법으로 정해진 교역할당량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제조업자가 정한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알카 셀처를 팔았다가 소위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투옥된 캘맆포니아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밀을 재배할 수 없는 농부 또한 그와 같다. 분명한 것은 경제적 자유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전체적인 자유의 매우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상당히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자유 같은 것이 보장되었던 시대나 지역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그리고 인류의 전형적 상태가 폭정, 예속, 빈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자유보다 복지가 사회적 주조를 이루게 되었다. 개인주의에 대한 내재적 위협을 감지한 다이시, 미제스, 하이에크, 사이먼스 등 철학적 근본주의자들의 후예들은 경제활동의 중앙통제를 향한 계속적인 움직임이, 하이에크가 이러한 과정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에 붙인 제목처럼, 예속으로 가는 길이 될까봐 염려했다. 그들이 강조한 바는 정치적 자유를 지향하는 수단으로서의 경제적 자유였다.

사회조직의 근본문제는 수많은 사람의 경제행위를 어떻게 조정해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회에서도 가용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분업과 전문화가 필요하다. 선진사회에서는 현대과학과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그러한 조정이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져야 한다. 근본적으로, 수백만 명의 경제행위를 조정해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두가지뿐이다. 하나는 군대에서 현대 전체주의 국가에서 하듯이 강제력을 동원하여 중앙에서 지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협력인데, 이것이 바로 시장의 방식이다. 자발적인 협력을 통한 조정의 가능성은, 종종 부정되곤 하는 기본적인 명제, 즉 경제적 거래가 쌍방 당사자 모두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동시에 쌍방에게 똑같이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 있다면 쌍방 당사자 모두가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호교환을 통해 강제력 없이도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자발적 교환을 통해 조직된 사회의 실용적 모형은 우리가 경쟁적 자본주의라고 불러온 자유 민간기업 교환경제다.

물론 자유시장이 존재한다고 정부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토론장으로서나, 정해진 규칙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심판자로서나 필수불가결하다. 시장은 정치적 수단을 통해 결정해야 할 사항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고, 그럼으로써 정부가 게임에 직접 개입해야 하는 정도를 최소화한다. 정치적 경로를 거친 행동은 전폭적인 복종을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시장의 가장 큰 장점은 폭넓은 다양성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적 용어로 '비례대표제'라고 한다.

단일한 대규모 정부 안에 동등한 힘을 갖는 정치권력의 소小중심을 다수 유지하는 일은, 단일한 대규모 경제 안에 수많은 경제력의 중심을 두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하나의 대규모 경제에는 다수의 백만장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힘과 열정을 한 몸에 모을 수 있는, 진실로 특출한 지도자가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만약 중앙정부가 권력을 늘린다면, 그만큼 지방정부의 권력은 침해되기가 쉬울 것이다. 배분할 대상으로서 정치권력에는 고정된 총량 같은 것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경제력과 정치권력이 결합하면 권력집중은 거의 불가피하다. 반면, 경제력은 정치권력과 분리된 채로 남으면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맞서는 힘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2장. 자유사회에서 정부의 역할

전체주의 사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흔히 그 반대의 근거로서 내세운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이러한 반대는 명백히 비논리적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하지만 이런 안이한 대답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며, 그저 반대논리가 적절치 못하다는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 명제를 부인하려면 문제의 그 목적이란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적절한 수단의 사용이야말로 궁극적인 목적임을 부차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나쁜 수단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목적은 그것이 바람직하든 않든 간에 정당한 수단의 사용이라는 더 근본적인 목적에 우선할 수 없다. 자유주의자에게 정당한 수단이란 자유로운 토론과 자발적인 협조이며, 이는 어떤 형태의 강제도 부적절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상적인 것은 자유롭고 충분한 토론을 기반으로 책임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장일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장의 역할이란 순응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만장일치를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는 것, 즉 효과적인 비례대표제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비례대표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가 원하는 수준만큼만 국방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고, 당신이 그와 다른 수준을 원한다 한들 그만큼만 얻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렇듯 개별적으로 분할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관해서 우리는 토의하고 논박하며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결정되면 우리는 그 결정을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장을 통한 개별적 행동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듯 분할할 수 없는 사안에 우리가 지닌 자원의 일부를 사용해야 한다면, 우리는 각 개인 간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기 위하여 정치적 경로를 이용해야 한다.

정부가 수행하기에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자유가 저촉되는 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답이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을 살해할 자유는 바로 그 이웃의 살아갈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박탈되어야 한다는 명제라면 어려움 없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합의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경제 분야에서 주요한 문제의 하나는 단결할 자유와 경쟁할 자유 간에 마찰이 있을 수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훨씬 더 기초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해답을 얻기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재산권의 정의다. 재산이라는 개념이 유구한 세월을 두고 발전해오면서 우리의 법 규범 안에 구체화되어 어느 정도는 우리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결과, 우리는 이 개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은 물론, 재산의 구성요소나 재산의 소유에서 비롯되는 권능들이 자명한 것이기는커녕 얼마나 복잡한 사회적 창조물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게 땅에 대한 소유권이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재산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어떤 사람도 자기 비행기를 타고 내 땅 위를 날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기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는 그 사람의 권리가 우선하는가? 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높게 날아가는지에 달린 문제일까? 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내는지에 달린 문제일까? 자발적인 교환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내 땅 위를 비행할 권리의 대가로 그가 내게 돈을 지급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 땅위로 날아가지 않는 대가로 내가 그에게 돈을 지급해야 하는가? 지적 재산권 사용료, 저작권, 특허권, 회사의 주주권, 강기슭 소유자의 수리특권 등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재산의 정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규범의 역할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 또 하나의 경제영역은 통화제도다. 아마도 이처럼 정부의 활동이 한결같이 용인되고 있는 경제활동 영역은 달리 없을 것이다.
요컨대 자발적인 교환을 통해 경제활동을 조직한다는 것은, 정부를 통해서 어느 개인이 다른 개인을 강박하지 못하도록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자발적으로 맺은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고, 재산권의 의미를 규정하고, 이를 해석하여 집행하며, 통화의 운용체계를 마련해왔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일러줄 수 있는 공식 따위는 없다. 우리는 틀리기 쉬운 우리 자신의 판단에 의존해야 하고, 일단 판단에 이르고 나면 그것이 바른 판단이라고 다른 시민들을 설득할 우리의 능력, 또는 우리의 견해를 수정하도록 설득할 다른 시민들의 능력에 의지해야 한다. 다른 경우에도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우리는 불완전하고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시행착오를 거쳐 도달한 의견일치에 대하여 믿음을 가져야 한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재산권을 규정하고, 재산권이나 경제적 게임의 다른 규칙들을 수정하는 수단 노릇을 하고, 그 규칙의 해석을 둘러싼 분쟁을 재결하고,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고, 경쟁을 촉진시키고, 통화운용체계의 구조를 마련하고, 정부 개입을 충분히 정당화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으로서 기술적 독점에 대응하고 외부효과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에 관여해온 정부. 정신이상자건 어린아이건 간에 무능력자를 보호하는 데 있어서 사적인 자선이나 가족의 기능을 보완해온 정부. 이처럼 정부는 앞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일관성 있는 자유주의자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부도 그 기능이 명백히 제한되어야 하고, 미국의 연방정부와 주정부 그릭리고 그에 상응하는 서방 제국의 정부들이 오늘날 수행하고 있는 활동 또한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3장. 화폐의 통제

대공황은 심각한 실업사태가 발생한 다른 대부분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민간경제의 고유한 불안정성에서 비롯되되었다기보는 정부의 운영실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정부가 설립한 연방준비제도가 화폐정책의 책임을 지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1930년과 1931년에 연방준비제도는 화폐정책을 터무니없이 잘못 수행한 나머지, 사소한 경기위축으로 끝났을 일을 대재앙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철저히 자동적인 금본위제의 작동에 의존하는 방법ㅂ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독립된 기구에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하는 방법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안정적인 동시에 정부의 무책임한 간섭에서도 자유로운 통화제도, 자유기업경제를 위해 필수적인 통화제도의 틀을 마련해 주면서도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위협하는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없는 그런 제도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제껏 제안된 것으로서 유일하게 성공을을 기약할 만한 방법은, 통화정책의 운용에 관한 준칙을 법제화함으로써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닌 법에 의한 운영을 이룩하고자 노력는 것이다. 그러한 준칙은 대중이 통화정책에 대하여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거둠과 동시에 통화정책이 정부당국의 변덕에 좌우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자유에 대한 간섭을 획일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다. 왜 각각의 경우를 분리해서 처리하지 않고, 구체적인 사안의 시비곡직을 따져 문제를 다루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길모퉁이에 서서 산아제한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은 공산주의를, 또 다른 사람은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각각의 사안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처리할 한다면, 유권자 다수는 대부분의 경우 언론의 자유를 부인하는 데 표를 던질 것임이 확실하고, 심지어 사안별로 분리하여 처리한다면 모르기는 해도 항상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데 투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을 모두 일괄하여 일반 대중에게 그 전체를 놓고 투표하도록 한다고 가정해보자. 압도적 다수가 언론 자유에 찬성표를 던지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이유는 자기가 다수에 가담하여 다른 사람의 언론자유를 박탈할 때 느끼는 감정보다 자기가 소수로 몰려 자기의 언론자유가 박탈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 누구에게나 훨씬 더 강렬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한데 묶인 사안들 전체에 대해 투표할 때는 자주 생기는 다른 사람의 언론자유 박탈보다 어쩌다 생길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언론자유 박탈 쪽에 훨씬 더 무게를 두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누적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개 씨가 길모퉁이에 서서 연설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투표하게 되면, 이 투표는 언론자유라고 하는 명시적인 일반 정책의 긍정적인 효과를 고려할 수 없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특별한 입법 조치 없이 길모퉁이에 서서 연설할 자유가 없는 사회는 새로운 사상, 실험, 변화 등이 온갖 방법으로 방해받는 사회일 것이라는 사실을 참작할 수가 없다. 똑같은 문제가 통화 부문에도 적용된다. 만약 각각의 사안을 그 득실에 따라 고려하면, 결정권자는 제한된 영역만을 살펴볼 뿐 그 정책의 누적적 결과 전반을 참작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잘못된 결정이 이루어지기 쉽다.  

4장. 재정정책

뉴딜 정책이 시행된 이래 줄곧 연방 수준에서의 정부 활동 확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즐겨 내세웠던 논리가 바로 실업을 제거하려면 정부 지출이 필요하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다. 처음에는 마중물로서 정부 지출이 필요했다. 일시적 정부지출은 경제를 굴러가게 하고, 그러면 정부가 이 국면에서 발을 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최근에는 경기 부양을 위해서라거나 만성적 침체라는 요괴를 퇴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균형바퀴로서 정부 지출이 강조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든 민간 지출이 감소할 때는, 총지출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주기 위해서 정부 지출을 늘려야 하고, 반대로 민간 지출이 증가할 때는 정부 지출을 감소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경기침체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입법자나 관료들은 1929~1933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대공황의 조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그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연방지출 계획을 법제화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불규칙한 길에 대응하기 위해 핸들을 계속해서 돌리고 있는, 경제 자동차의 노련한 통화 운전자가 아니라, 차의 뒷좌석에 무게중심으로 앉아 있는 통화 승객이 때때로 몸을 기울이거나 핸들을 홱 잡아당겨서, 차가 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어떤 수단들이다. 이러한 통화정책의 준칙에 대한 적절한 대응물을 재정정책에서 찾자면, 사회가 사적인 경로를 통하기보다는 정부를 통해 처리하고자 하는 일만으로 범위를 좁히고 매년의 경제안정문제와는 무관하게 지출계획을 수립하는 것, 역시 매년의 경제변동과는 상관없이 여러 해를 평균하여 계획한 지출을 충당하기에 충분한 세입을 거두도록 세율을 정하는 것, 정부 지출이나 과세상의 돌연한 변화를 회피하는 것이 그에 해당하리라.

정부 지출의 증가는 화폐소득을 증가시킬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증가는 전부 정부 지출에 의해 흡수되어버린다. 민간 지출은 불변이다. 그 과정에서 가격은 상승하거나 적어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하여 덜 하락할 것이기 때문에, 그 효과는 민간 지출의 실질액을 오히려 줄어들게 한다. 마찬가지로 정부 지출의 감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논리들이 성립한다.

6장. 교육에서의 정부역할

교육에 대한 정부 개입은 두 가지 이유에서만 합리화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외부효과'의 존재, 즉 어떤 사람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비용을 발생시키지만 이 사람들이 그 비용을 보상해줄 방도가 없는 상황이나, 어떤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어떤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방도가 없는 상황 ㅡ이들 상황에서는 자발적 교환이 불가능하다 ㅡ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어린이들과 책임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에 대한 온정주의적 관심이다. 외부효과와 온정주의는 (1)일반적 시민교육과 (2)전문 직업교육에 있어서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대부분의 시민이 일정 수준의 교양과 지식을 갖추지 않고, 가치에 대해 어떤 공통된 합의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으면 안정된 민주사회가 달성될 수 없다. 교육은 이 두 가지를 갗추도록 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어린이 교육의 혜택은 어린이들이나 그 부모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전체에게 돌아간다. 내 아이에 대한 교육은 안정된 민주사회를 촉진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복리후생도 증가시켜 준다. 그런데 혜택을 받는 특정 개인(또는 가족)을 찾아내고, 혜택을 받는 부문에 대해 요금을 물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여기에는 상당한 외부효과가 존재한다.

예측하건대 학생의 경제적 생산성은 향상시키되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세나 지도자적 자질을 함양하지 않는 순수한 직업교육에 대한 보조금은 정당화될 수 없다. 미용사, 치과의사 등 수많은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한 직업훈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초등학교들이나 좀 더 높은 수준으로는 교양학부 대학들에 대한 정부보조와 동일한 근거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교육이 사회의 응집력으로 작용하기 위해 정부가 학교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특별한 논거는 사립학교들이 계층구분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자녀를 어느 학교에 보내느냐에 관해 더 큰 자유가 주어지면, 비슷한 부류의 학부모들끼리 무리를 이루려들고, 이에 따라 확연히 다른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건전하게 섞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제도 아래서도 확연하게 다른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섞이는 것은 주거지역 계층화로 인해서 이미 효과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게다가 지금도 학무보들이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종교계 학교의 경우를 제외하면, 오직 극소수의 계층만이 그럴 능력이 있거나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 떄문에 더 심한 계층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현행 학교제도는 기회의 균등화가 아니라 그 반대의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예외적 소수가, 그들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인데도 초년의 빈곤상태를 떨치고 일어서기가 한층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학교를 국영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기술적 독점이다. 농촌지역처럼 작은 공동체에서는 적정 규모의 학교가 하나 이상 있기에는 학생 수가 너무 적을 수 있으므로, 학교 간의 경쟁으로 학부모와 아동의 이익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설득력 있고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교통이 개선되고 인구의 도심집중이 심화됨으로 인해 그 타당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교사 급여에 관련된 주요 문제는 평균 급여가 너무 낮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ㅡ실제로는 평균적으로 너무 높은 편일 가능성이 있다ㅡ급여가 너무나 획일적이고 경직적이라는 데 있따. 급여체계는 획일적이고 성과보다는 연공서열, 학위, 교사자격증 등에 의해 훨씬 더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이 또한 대체로 정부가 학교를 운영하는 현행체제의 결과이며, 정부가 통제력을 발휘하는 대상의 단위가 확대됨에 따라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관료적이고 본질적으로 행정사무적인 그 어떤 조직도 표준적인 급여체계를 피하기 어려우며, 성과에 따라 급여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경쟁을 촉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름 아닌 교사들로 이루어진 교육행정가들이 일차적인 통제력을 행사하게 된다. 학부모나 지역공동체는 거의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목공이든 배관공이든 교사든 직종을 막론하고 노동자들 대다수는 표준 급여체계를 지지하고 성과에 따른 차등을 반대하는데, 그런 현상의 분명한 이유는 특별히 재능있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통해서건 산업독점을 통해서건 가격을 고정하기 위하여 담합을 추구하는 일반적 경향의 구체적인 사례다.

보조금 지급을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학교교육에만 제한하는 것도 어떤 근거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보조금을 개인에게 지급하여, 스스로 선택한 교육기관에서 ㅡ그러한 학교교육이 보조금을 지급하기에 바람직한 종류의 것이라면 ㅡ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잔존하는 공립학교들은 모두 교육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수업료를 징수함으로써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는 학교들과 같은 여건에서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

7장. 자본주의와 차별

어떤 사회이건 차별이 유지되는 영역은 가장 독점적인 성격을 보였던 반면, 특정한 피부색이나 종교를 가진 집단에 대한 차별이 가장 적었던 영역은 경쟁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었다.

언 집주인이 못생긴 하인보다 매력적인 하인을 선호하는 기호와 다른 집주인이 백인보다 흑인을, 또는 흑인보다 백인을 선호하는 기호 사이에, 우리가 전자의 기호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동의하는데 후자의 기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점을 뺀다면, 원칙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러나 자유로운 토론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은 그들의 기호가 나쁘며 그들의 견해와 행동을 고쳐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노력하는 것이지, 강제력을 동원하여 나의 기호나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적극적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즉 강압을 방지하도록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튼실한 논거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소극적 종류의 피해까지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혀 논리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정부개입은 자유를 감소시키고 자발적 협조를 제한한다. 개인들의 피부색, 인종, 종교를 이유로 고용상 차별을 할 수 없다고 국가가 선언하는 것이 적절하다면, 다수가 동의할 때는 피부색, 인종 종교에 따라 고용상 차별을 해야 한다고 국가가 선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소수집단이라도 다수결에 의한 특정한 행동에 의지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한다면, 이는 극도로 근시안적인 짓이다. 일반적이고 자기구속적인 규정을 받아들임으로써 특정한 다수가 특정한 소수를 착취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분명 이와 같은 자기구속적인 규정이 없다면 다수는 소수를 다수의 편견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선호를, 편견을 실행하기 위하여 수적 우세에 확실히 의지할 수 있게 된다.

피부색과 같은 특정기준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는 동시대 시민들이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도록 설득하는 일이지,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동시대 시민들에게 우리의 우너칙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결과와 의도 간의 차이는 자유사회를 정당화하는 주된 근거 중 하나다. 즉 결과가 어떻게 드러날지 예상할 방법이 없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 자신의 이익 성향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8장. 독점 및 기업과 노동자의 책임

경쟁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의미가 있다. 일상적 대화에서 경쟁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경쟁자를 꺾는다는 뜻에서 개인적 대항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경제에서 경쟁은 거의 정반대를 의미한다. 경쟁적 시장에서 개인적 대항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 흥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시장에서 밀을 생산하는 농부는, 실제로는 그의 경쟁자인 이웃 농부와 대항관계에 있다거나 그로부터 위협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경쟁시장의 본질은 비인격적인 특성에 있다.

물론 경쟁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선이나 점처럼 하나의 이상적인 모형이다. 어느 누구도, 넓이와 깊이가 제로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선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측량기사가 사용하는 줄처럼, 다양한 경우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적 체적을 유클리드 기하학적 선으로 간주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순수 경쟁이란 없다. 모든 생산자는 비록 미미하기는 하지만 자기 생산물의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학문적 이해를 위해서 그리고 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위해서, 이 영향력이 상당히 클 것인지, 아니면 측량기사가 소위 선의 두께를 무시할 수 있는 것처럼 적당히 무시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만약 노동조합이 특정 직업이나 산업의 임금을 인상하면, 그 직업과 산업에서의 고용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는 가격이 높으면 수요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경우 더 많은 사람이 다른 직업을 찾게 되고, 이는 다시 그 직업의 임금 수준을 낮추게 된다. 노동조합은 어쨌든 간에 높은 임금을 받았을 집단 중에서 가장 강력하기 때문에 임금이 낮은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고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 인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노동력의 사용을 왜곡함으로써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전체에 대해서도 피해를 주었다. 또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고용기회를 줄임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수입을 더욱 불평등하게 만들어왔다.

기업경영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주주와 노동조합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을 넘어서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견해가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자유경제의 성격과 본질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자유경제에서 기업이 지는 사회적 책임은 오로지 하나뿐인데, 이는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한에서 기업이익 극대화를 위하여 자원을 활용하고 이를 위한 활동에 매진하는 것, 즉 속임수나 기망행위 없이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에 전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사회적 책임은 조합원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의 책임은 법의 틀을 확립하는 것인데, 이러한 법은 다시 한번 애덤 스미스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법이 되어야 한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고양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항상 사회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는 종종 자기 이잉ㄱ을 추구함으로써 실제로 공익 추구의 의도를 가졌던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익을 위하게 된다. 나는 공익을 위한다는 사람들치고 실제로 공익에 많은 도움이 된 예를 알지 못한다."

자유사회에서 기업의 기부행위는 기업의 자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기업은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도구일 뿐이다. 기업의 기부행위는 개별 주주들이 자신의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다. 법인세와 기부금 공제제도가 있으면, 물론 주주들은 자신을 대신하여 기업이 기부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선의 해결방법은 법인세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법인세제도가 있는 한, 자선단체나 교육기관에 대한 기부금에 세액공제를 허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한 기부는 우리 사회에서 재산의 궁극적 소유자인 개인들이 직접 해야 한다. 자유주의라는 명목하에 기업의 이러한 기부금에 대하여 더 많은 세금공제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깅버에 대해 종종 제기되는 주된 비판 중의 하나가 바로 소유와 통제가 분리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기업이 독자적인 법칙을 가진 사회적 기구로서, 주주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무책임한 경영진을 가진 기관이 되어버렸음을 뜻한다. 이러한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기업에 자선 목적의 기부를 허용하고, 소득세 공제를 허용하는 현재의 정책방향은 소유와 통제를 실제로 분리시키고 우리 사회의 기본 성격과 본질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다.

9장. 면허제도

아마 대다수의 자유주의자조차도, 의료업만큼은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은 사람들만 행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나 역시 의료 분야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면허제도를 채택할 튼실한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도달하려는 결론은 자유주의 원칙에서는 의료업조차 면허제도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도 의료업에 대한 국가 면허제도의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면허제도란 국가가 설치한 기관이 부과한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 한 개인이 특정한 경제활동들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의 특별한 경우다. 입법부로 하여금 그러한 면허조항을 입법하도록 설득하려고 노상 늘어놓은 주장들에 따르면, 그러한 법 조항의 정당성은 공공의 이익을 보호할 필요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해당 직업 종사자들로부터 사기를 당하거나, 기타의 방식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일반 대중이 직업적 면허제도를 법제화하라는 압력을 가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반대로 이런 압력은 늘 해당 직업의 종사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특정한 관세로 특별한 이익을 본다고 생각하는 집단들은 결집되어 있고, 그들에게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공공의 이익은 분산되어 있다. 그 결과, 특별이익의 압력을 상쇄할 일반적 제도가 없는 한, 생산자 집단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분산된 소비자 집단보다 입법활동 및 당국에 대해 변함없이 더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정작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수께끼는 왜 그토론 많은 어이없는 면허규제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이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았느냐다.

자유주의자에게 의미 있는 주요 논점은 외부효과의 존재다.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예로서, 전염병을 일으킨 무능한 의사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의사가 자기 환자에게만 해를 끼치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자와 의사 간의 자발적인 계약과 거래의 문제다. 이런 상태에서는 개입의 근거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의사가 자기 환자를 잘 못 치료하여 그 거래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에게 해를 끼칠 만한 전염병을 퍼뜨릴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잠재적 환자와 의사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전염병의 발생을 막기 위해 유능한 사람에게만 의료개업을 제한하도록 하는 데 승복할 것임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현실에서 면허제도의 옹호자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은 자유주의자에게도 어느 정도 호소력을 가질 만한 위와 같은 내용이 아니라, 거의 또는 전혀 호소력이 없는 순전히 온정주의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 배관공, 이발사 등과 같이 용역을 제공해줄 사람들을 적절히 고를 능력이 없다. 의사를 현명하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의사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대다수는 무능력하고, 우리 자신의 무지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인가 의료행위를 금하는 법률이 적용되는 상황에서는, 단순기술자들이나 소위 캐딜락급 의학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도 숙련된 다른 사람들도 완벽히 잘해낼 수 있을 많은 일이 면허를 소지한 의사들만 할 수 있게 제한된다. 훈련받은 의사들은 다른 사람들도 잘해낼 수 있는 일에 자기 시간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결과적으로 제한조치들은 의미 있는 평균적 능력 수준의 저하를 가져올 것이다.

지식과 배움의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듯이, 의료업이라고 불리는 분야를 제한하여 이것을 지배적인 정통적 관행에 순응하는 특정집단에만 한정하면 행해지는 실험의 양이 확실히 줄어들고, 따라서 이 분야에서 지식의 성장속도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사기나 부주의로 타인에게 미친 해악에 관한 법적, 재정적 책임을 제외하면 아무런 제약없이 누구라도 의료업을 행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병원과 협력하는 집단의료가 엄청나게 성장했을 터이다. 개인의사들에 더하여 정부나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대규모 의료시설들이 존재하는 대신, 의료조합이나 의료기업 ㅡ의료팀 ㅡ이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병원을 포함한 집중화된 진단 및 처치설비를 제공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중 어떤 기관은 현행 병원보험, 건강보험 및 집단의료를 한 묶음으로 결합하여 선불을 받았을 것이다. 의료백화점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의료팀들은 환자들과 의사들 사이의 중재자가 되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유지되어야 하고, 이동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들 기관은 좋은 명성과 신용, 품질을 유지하는 데 큰 관심을 두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소비자들도 이들의 명성을 인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의사들의 자질을 판별할 수 있는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게 될 것인데, 요즘의 백화점들이 많은 상품에 대해 그러하듯, 소비자의 대리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기술이나 훈련 정도가 상이한 의료인들을 연결하고, 제한된 훈련만을 받은 기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걸맞은 일을 맡기며, 고도의 기술과 자질을 가진 전문인들은 이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과업을 위해 남겨 두는 등, 의료를 효율적으로 조직했을 것이다. 

나는 의료팀이 의료현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의 목표는 단지 현존하는 의료조직들의 대안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예을 들어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시장을 떠받치는 훌륭한 논거는 바로 다양성에 대한 시장의 관용이다. 시장은 특수집단이 실험을 방해할 수 없도록 무력화하며, 생산자가 아닌 고객들이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유리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둔다.

10장. 소득분배

자유시장 사회에서 소득분배를 정당화하는 직접적인 윤리원칙은 "각자에게 본인과 그가 소유한 도구들이 생산한 바에 따라" 분배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조차도 그 적용에서는 잠재적으로 국가행위에 의존한다. 재산권은 법의 문제이자 사회적 관습의 문제다. 재산권의 정의와 집행은 국가의 일차적 기능 중의 하나다. 이 원칙이 최대한 작용하는 상황이라면 소득과 부의 최종분배는 그 사회가 채택한 재산권 규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화폐 소득의 격차는 직업이나 사업의 여타 특성에 따른 격차를 상쇄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이 격차들은 금전적, 비금전적 순이익의 총량을 똑같게 해주기 위해 필요한 균등화 격차다. 평등한 대우를 이루기 위해서는, 달리 표현하면 개인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미묘한 의미에서 시장 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다른 종류의 불평등도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는 불확실성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 여하에 따라 직업, 투자 등을 결정한다. 공무원이 되기보다는 영화배우가 되려고 하는 소녀는 의도적으로 복권을 산 셈이고, 국채보다 싸구려 우라늄 관련 주식을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보험은 확실성에 대한 기호를 상징하는 한 방법이다. 이처럼 무엇을 선호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급료를 주는 제도 자체에도 영향을 준다. 만약 여배우 지망생들이 모두 불확실성을 아주 싫어한다면, 이들은 여배우 협동조합을 만들어 조합원들이 받는 소득을 대체로 평등하게 나누기로 미리 합의함으로써 위험의 공동부담을 통한 사실상의 보험효과를 거두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다.

타고난 개인적 능력의 불평등과 재산의 불평등을 구별하는 것, 그리고 물려받은 부에서 비롯한 불평등과 스스로 거둔 부에서 비롯한 불평등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개인적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이나 개인이 축적한 부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은 정당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불평등이 적어도 물려받은 부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만큼 부당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구별해내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목소리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이를 통해 높은 수입을 얻는 것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덕에 얻은 높은 수입보다 윤리적으로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가진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부모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는 일정액의 재산을 자식의 교육, 예를 들어 공인회계사 자격취득을 위한 교육자금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사업체를 차려줄 수도 있고, 재산소득을 가져다줄 신탁기금을 설정해줄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경우를 선택한다 해도 그 사람의 자녀는 부모의 도움이 없었을 때보다 높은 소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라면 그 소득은 개인적 능력에서 생긴 것으로 간주될 것이고, 두 번째 경우라면 이윤에서 생긴 것으로, 세 번째 경우라면 물려받은 부에서 생긴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윤리적 범주에서 이러한 소득의 범주를 구분할 근거가 있는가?

신분이나 부의 차이는 충분히 떨어져서 보면 대부분 우연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열심히 일하고 검약하는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그럴 만하다고 보지만, 이러한 자질은 그가 운이 좋아 물려받은 유전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우연'보다 '능력'에 대해 더 입에 발린 말을 하고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명백히 능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불평등보다 우연으로 말미암은 불평등을 훨씬 더 가까이 받아들인다. 대학교수는 동료가 경마에서 돈을 따면 부러워할 뿐이지 그 동료에게 적의를 품거나 스스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료의 봉급이 약간 인상되어 자기 봉급보다 더 높아졌다고 한다면, 그에 불만을 품을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성과에 따른 보상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자본주의체제는 소득과 부의 상당한 불평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고, 이 사실은 종종 자본주의와 자유기업체제가 여타의 대안적 체제보다 더 큰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사실 중 하나로서 많은 이의 예측과 정반대인 것은 소득의 원천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더 심화된 국가일수록 자산소득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적어지고 근로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커진다. 인도 이집트 등과 같은 저개발국가에서는 총소득의 절반 정도가 자산소득이다. 미국에서는 대략 5분의 1정도가 자산소득이다.

자본주의의 위대한 성취는 재산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며 개선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누진세 구조가 소득 및 부의 불평등에 미치는 효과를 감소시킨 요인중의 하나는 이러한 조세가 부자가 되려는 사람보다 이미 부자인 사람에게 훨씬 더 적은 세금을 물린다는 사실이다. 부에서 오는 소득에 세금을 부과한다고 해서 그 부 자체를 감소시키지는 못하며, 그저 그 소유자가 유지할 수 있는 소비 수준과 부의 추가분만을 감소시킬 뿐이다. 이러한 조세수단들은 사람들에게 위험을 회피하고 기존의 부를 비교적 안정적인 형태로 전환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그 결과 기존의 축적된 부가 분산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소득분배는 정부가 일련의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다른 조치들을 통해 복구할 수 있었던 수준을 넘어서는 해악을 끼쳐온 또 하나의 분야다. 이는 이른바 민간기업체제의 결함을 빌미로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또 다른 예지만, 실상 거대 정부의 옹호자들이 개탄해 마지않는 그런 현상들 중 다수는 크건 작건 간에 그 자체로서 정부가 만들어낸 것이다.

11장. 사회복지정책

<최저임금법>
최저임금법은 선의의 지지자들이 품은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은 정책의 가장 명백한 사례라 할 만하다. 최저임금법에 찬동한 많은 사람들은 극도의 저임금을 빈곤의 증거로 간주했고 일정 수준 이하의 임금을 불법화함으로써 빈곤이 감소하리라고 기대했다. 실제로는, 최저임금법에 무슨 효과가 있다면 이는 분명 빈곤을 증대시키는 효과일 것이다. 국가는 최저임금을 법으로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제 도입의 효과는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실업률을 더 올라가게 한다. 저임금이 사실상 빈곤의 표시라고는 해도, 최저임금제로 인해 실업상태에 빠진 사람들이야말로 최저임금제 도입 이전에 벌었던 소득 ㅡ최처임금제에 찬성했던 사람들의 눈에는 쥐꼬리만 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ㅡ을 포기할 여력이 가장 적은 사람들인 것이다. 
이 사안은 한 가지 점에서 공영주택단지와 매우 비슷하다. 양쪽 모두, 임금을 올려받게 된 사람들이나 공영주택에 입주하게 된 사람들처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들은 특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겪는 문제와 그 원인이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최저임금법 때문에 실업자 대열에 합류하거나, 그보다 더 흔한 경우로서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경제활동으로 밀려나거나 실업급여를 받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며, 확대일로의 빈민가에서 점점 더 우글우글 몰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공영주택단지의 희생자로 보이기보다 더 많은 공영주택단지가 필요하다는 신호처럼 보일 것이다. 

<농산물가격지지정책>
첫째, 혜택이 있다 해도 시장에서 팔리는 양에 비례하여 주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혜택은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성과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빈농은 부농보다 시장에서 더 적은 양을 판매할 뿐 아니라 소득 중 자가소비 목적으로 재배한 농산물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더 큰 셈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농산물가격 지지정책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둘째, 농민들이 가격 지지정책에서 무슨 혜택을 받는다 해도 그 혜택은 그에 지출된 총 비용보다 훨씬 적다. 이는 보관료나 그 비슷한 비용처럼 농민에게는 전혀 돌아가지 않는 금액에 관해서는 명백히 사실이며, 실제로 보관공간과 설비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가장 큰 혜택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는 농산물수매에 들어간 금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농민들은 비료, 종자, 농기계 등에 추가로 돈을 지출하도록 유도된다. 기껏해야 이러한 비용들을 빼고 남은 부분만 농민들의 소득에 추가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빼고 또 빼서 남은 부분마저도 농민들이 누리는 이득을 과장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농산물가격 지지정책의 도입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와 비교할 때 더 많은 사람을 농촌에 잔류하게 했기 때문이다. 농산물가격 지지정책을 전제로 농업에 종사하여 벌 수 있는 금액에서 이농離農했을 때 벌 수 있는 금액을 뺀 나머지만이 농민들이 순수하게 누리고 있는 혜택이 된다. 농산물 수매제도의 주된 효과는 단순히 농업생산량을 늘려준 것이지 농민 1인당 소득을 증대시킨 것이 아니다.  

12장. 빈곤의 완화

두 가지는 분명하다. 첫째, 빈곤의 완화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방향을 맞춰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하필 농부라면, 농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도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정책은 사람들을 그저 사람들로 보고 돕는 것이어야지, 그 사람들이 특정한 직업집단, 연령집단, 임금률집단, 노동조직이나 업계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농업프로그램, 일반노령연금, 최저임금법, 노동조합 우대입법, 관세, 각종 기능과 전문직의 면허제도 등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결함이다. 둘째, 시장을 통해 작용하는 과정에서 정책이 시장을 왜곡하거나 시장기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가격지지, 최저임금법, 관세 등이 갖는 결함이다.

자유주의 철학의 핵심은 개인의 존엄성을 믿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행동할 다른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스스로 판단한 바에 따라 각자의 능력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동등성에 대한 믿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불균등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각자는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는 점, 어느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써 누군가와는 다른 일을 하고자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문화 전반에 다른 사람보다 더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는 점, 바로 그 점들 때문에 위와 같은 권리는 중요하고도 기초적인 권리가 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는 한편으로는 권리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을 명확히 구분한다. 자유주의자는 자유사회가 실제로는 지금껏 시도된 다른 어떤 사회체제보다 물질적 평등에 가까운 사회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이것을 자유사회의 바람직한 부산물로 볼 뿐, 자유사회를 정당화하는 주요한 근거로 보지는 않는다. 자유주의자는 상대적으로 운이 없는 사람들을 돕는 데 초점을 맞춘 민간의 자선행위야말로 자유가 적절하게 쓰인 하나의 실례라고 생각한다. 평동주의자도 여기까지는 같은 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빼앗는 일을 옹호할 텐데, 바로 그 '어떤 사람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정의에 입각하여 그렇게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평등은 자유와 첨예하게 충돌하며, 개인은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13장. 결론

소비자를 보호한다며 도입한 철도 산업의 규제는 오히려 새로이 출현한 경쟁자들과의 경쟁으로부터 철도 산업을 보호해주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물론 소비자의 비용으로 말이다. 처음 도입할 때는 낮은 세율을 적용하다가 나중에 저소득층에 유리한 소득 재분배의 수단으로 적용된 소득세는 명목상의 높은 세율에도 불구하고, 과세제도의 허점 및 특례조항들로 인해 한갓 허울로 전락했다. 불평등을 줄이고 부의 분배를 촉진한답시고 만든 소득세제도가 실제로는 기업이익의 재투자를 조장했고, 그럼으로써 대기업의 성장을 유리하게 해주었으며, 자본시장의 기능을 억제했고, 신규기업의 설립을 저해했다.

과거 수십년 동안 정부가 새로 시작한 전례없는 사업들은 대부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계속 발전해왔다. 국민의 의식주나 교통사정은 더 좋아졌고, 계급 및 사회 격차는 좁혀졌으며, 소수집단이 겪어야 했던 불이익도 줄어들었고, 대중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유시장을 통해 서로 협조하는 개인들의 창의력과 추진력의 산물이었다. 정부가 취한 조치들은 이런 발전을 방해해왔지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오직 시장의 경이로운 창조성 때문에 이러한 조치들을 감당해내고 극복해올 수 있었다.

이 조치들의 주된 결점은 공공의 이익일 법한 무언가를 촉진시키고자 사람들이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과는 상반되게 행동하도록 정부를 통해 강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치들은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게 하는 틀을 확립하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상반되게 행동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른바 이해의 충돌 혹은 이해관계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해소하려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들에게 좋은지 대신 가르쳐준다거나, 정부가 어떤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식으로, 이해 당사자들의 가치관을 국외자들의 가치관으로 바꿔친다. 그 결과 이러한 조치들은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하고 창조적인 힘들 중 하나와 정명충돌하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의 삶을 살려는, 수많은 개인들에 의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조치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는 주된 이유다.  내가 말하는 이익은 그저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좁은 의미의 이익이 아니라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기 재산을 기꺼이 바치고 목숨까지도 희생하고자 하는 온갖 가치들이 모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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