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은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책에서 데이비드는 과학적 세계관이 골치 아픈 점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그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 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릿. 끈질김을 뜻하지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이 나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현실을 무시하는 게 편리할 때는 무시하도록,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데 필요하다면 어떤 말이든 자신에게 속삭이도록 프로그래밍하고 있다. 그런데 장밋빛 렌즈를 끼고 살아가는 일이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할까?
자기고양self-enhancement에 관한 수백 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마이클 더프너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했다. 이를 테면 도구를 빌리거나 파티에 초대받거나 좋은 일자리를 소개받을 기회가 줄어들 수 잇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손해를 보는게 아니다. 자기만의 두꺼운 거품 벽 안에 있으면 고통이 서서히 축적될 수 있다. 아기 엄마들이 자신에게 통제력이 있다는 착각이 심할수록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 우울한 엄마들보다 막막함을 더 심하게 느낀다. 긍정적 착각을 더 많이 하는 학생들이 단기적으로는 더 행복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평온 지수는 급감한다. 즉,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 것.
공격적인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매우 높게 평가. 민족주의적 제국주의, 지배자 민족 이데올로기, 귀족들의 결투, 학교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아이들, 길거리 깡패들의 언어 구사 등에서 볼 수 있음.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
한 종을 강력하게 만들고, 그 종이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주며, 혼돈이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기온 급변, 경쟁자, 약탈자, 해충의 침략 등 강력한 형태의 타격을 가해올 때도 그 종이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다윈은 무엇을 꼽았을까? 변이다.
동질성은 사형선고.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
다윈은 종의 기원의 거의 모든 장에서 변이의 힘을 칭송. 다양성 있는 유전자풀이 얼마나 건강하고 강력한지, 서로 다른 유형 개체 간의 이종교배가 자손에게 얼마나 큰 활력과 번식력을 만들어주는지, 심지어 완벽하게 자기 복제할 수 있는 벌레들과 식물까지도 새로운 변형을 만들어낼 수 있게끔 유성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발견.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기린에게 경쟁자에게 대한 우위를 갖춰준 것은 거추장스러운 목,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연은 모든 내부 기관과 모든 미세한 체질적 차이에, 생명의 전체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다리는 없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안함을 위한 것.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한 적응성을 보여주는 사례. 크건 작건, 깃털이 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
메리는 인형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을 지지해준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는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이 산꼭대기에서 사는 모든 생물을 진화적으로 동일한 산어류山魚類라는 집단에 속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상상해보자. 산에 사는 어류에는 산염소, 산두꺼비, 산독수리, 산사람이 포함된다. 그러면 이제는 이 모든 생물이 너무 다르지만 우연히 그 고도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비슷한 외피를 갖도록 진화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 외피가 비늘이 아니라 격자무늬라고 해보자. 모두가 격자무늬를 갖고 있다. 격자무늬 독수리, 격자무늬 두꺼비, 격자무늬 사람. 이렇게 서식지(산꼭대기)와 피부 유형(격자무늬)이 같아 보니 이들은 동일한 종류의 생물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한 종류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어류에 대해 해온 일이 바로 이와 똑같다.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은 것.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상상 속 사다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제일 윗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질서라는 단어. 오르디넴ordine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왕이나 장군,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 1700년대에 자연에 적용. 자연에 질서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정ㅡ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놓기, 추측ㅡ에 따른 것.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겨 있는 생물들을 해방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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