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by 우석훈
괴물의 탄생
개마고원
2008. 9.27
우석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축으로의 영향권 내에서 호혜적인 경제를 만들었던 게 언제 일이었냐는 듯, 세계는 이제 시장논리를 앞세운 대기업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이미 형성되어 있던 다국적기업들이 개별 국민경제의 범위는 물론이고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의 경계도 허물게 됩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이 일련의 사건을 세계화 또는 금융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최근에는 주주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어쨌고나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전세계적으로 일종의 대세가 되었고, 특히 초반 5년간은 이것이 영원한 시장의 승리이자 자본주의의 반영이며, 이제는 다국적기업이 된 대기업의 승리로 비쳐진 게 사실이지요. 이제는 다국적기업이 된 대기업의 승리로 비쳐진 게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세상은 드디어 애덤 스미스가 위정자들에게 경계하라고 했던 바로 그 기업가들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여 모든 것을 뒤덮는, 혹은 조만간 뒤덮게 되는 시기로 가게 된 것일까요?
국가별로 정말 다양한 양상의 변화가 생겨나기는 했지만, 대체로 1인당 국민소득을 3만 달러, 혹은 그 이상으로 올리는 국가들이나 지역들 대부분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국가가 시장에 떠밀려나지는 않았습니다. 동구가 붕괴하고 세계화라는 새로운 경향성이 생겨나던 1990년대 초의 관점으로 보자면, 사실 모든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대규모 다국적기업이 되어야 했고, 또 공공 서비스들, 예를 들면 건강보험이나 유럽의 국립대학 같은 것들도 지금쯤은 모두 민영화되었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사태가 어디 그렇게 일방적으로만 진행되었던가요?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진행되는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거라던 양극화가 최소한 한국의 경우처럼 극단적으로 나타나지도 않았지요. 게다가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처럼 그렇게 빠른 속도로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아지지도 않았고, 또한 같은 노동을 하면서 1/3 혹은 떄로는 그 이하의 비율로 임금을 받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왜 그럴까요?
제가 관찰한 바로는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을 타고 기업들이 국가를 일방적으로 누르고 지배적 위치에 올라서지 못한 이유에는 국가와 기업 외에 또 다른 제3부문이 존재하기 때문이란 점도 있습니다. 일단은 국가도 아니고 기업, 즉 이윤 극대화를 통해서 움직이는 것만이 아닌 또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일관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 특히 4만 달러를 넘은 나라들은 이렇게 제3부문이라 불도 이상하지 않을 경제주체 혹은 경제기구들이 국민경제 내에 엄연한 하나의 실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이 제 3부문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생시몽 혹은 ㅡ그 당시의 종교적 기반에서 출발했던 공동체 정신을 지닌 ㅡ초기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유통조직에서 출발한 생활협동조합이 이 제3부문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이 제3부문에는 스위스의 경우처럼 대형 할인매장이 도시로 밀고 들어올 때 생겨난 소상인연합 ㅡ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구멍가게 동맹 ㅡ의 경우나, 덴마크와 영국의 소규모 자영농들을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단체, 혹은 프랑스의 소규모 가족형 기업들의 경우가 포함되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틀리에라고 불리는 프랑스 장인들의 작업장이나, 독일의 마에스트로들이 만들어내는 정밀기계나 소재산업 같은 경우의 일부도 단순하게 이윤 극대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분석의 범위를 넓힌다면, 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클러스터라고 불린 작은 가게들과 생산자들의 네트워크에 의한 경제활동도 대기업들의 분석에 익숙한 이윤 극대화 혹은 그런 기업들의 활동 방식과는 전혀 다른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원래의 클러스터라고 불리는 것들은 지역자치의 특징을 더 많이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이러한 범주에 최근 각광받고 있는 개념인 사회적 기업을 넣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범위를 넓혀서 몇 개의 나라를 가지고 어림하여 계산해보면, 대체로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넘었던 나라, 그러니깐 스위스와 덴마크, 스웨덴의 경우는 기업과 공공 부문과 제3부문이 대략 1:1:1로 3등분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일본의 경우는 자료가 부족해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지역소득이 높은 몇 군데 도시에서는 제3부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협의 영역이 특별히 크고, 특히 일부 지역에서는 소비자 유통의 50~60%까지를 이런 3부문이 차지하고 있다는 특징을 종종 보게 됩니다. 미국 중서부 도시들에서도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생협이 대단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공공 부문과 대기업, 그리고 여기에 기계적으로 속하지 않은 또 다른 부문들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지요. 1980년대 미테랑 시절의 프랑스처럼 국가가 일방적이고 기계적으로 기업을 늘렸던 경우나, 혹은 대처 시절의 영국처럼 정부가 많은 공공 부문을 대기업에 넘기고 이윤 극대화를 강조했던 경우, 즉 국가가 주도하거나 기업이 주주도한 경제들은 1990년대 중, 후반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반면에 제3의 영역이 국가와 기업 사이에 버퍼 역할을 하면서 두 부문을 적절히 견제하던 현상이 특징적인 나라들, 즉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이 가장 먼저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돌파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어쨌든 이 제3부문을 일컫는 가장 정확한 이름은 '사회경제' 정도일 텐데, 이는 공공 부문의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던 사회주의 이념과도 다르고, 시장의 원칙에 의한 이윤 극대화를 주장하는 대기업의 작동원리와도 다르지요. 굳이 이념적으로 따지자면 '무정부주의' 혹은 '지역공동체주의'에, 때로는 '호혜'나 '공정성' 같은 것들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시대에 매우 유행했던 표현이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표현을 이런 제3부문의 원칙에 대입하면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일부에서는 이를 토속적인 것들은 세계 어디에가도 잘 팔릴 거라고 단순한 판매 경쟁력의 의미에서 이해했지만, 실제로 이 표현은 상당히 아나키즘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도 믿기 어렵고 정부도 믿기 어렵기 때문에, '풀뿌리 민주주의' 혹은 '자치'를 강화해서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역풍에 맞서 버텨보자는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슬로건이지요.
케인즈 이후 자본주의 방식으로 구성된 국민경제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상을 겨우 확보하게 된 국가가 199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일방적으로 기업에 밀리지 않았던 이유는 ㅡ하나로 환원하기는 어렵지만 ㅡ국가와 대기업 외의 또 다른 국민경제 부문들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부의 역할은 독과점 규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양 간주된 20세기가 출발했지만, 곧 세상은 기업이 시장원리에 의해서 작동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껏해야 땅투기에 물과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1920년 대공황에 의해서 무너졌고, 세상은 케인즈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좌파의 흐름에 서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속에서 국가, 즉 정부가 운용하는 재정과 기관들은 기업에 대한 확실한 조정자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노동자들과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황홀했던 시기는 다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이어서 신자유주의가 1990년대 중반부터 전세계를 강타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시민경제 혹은 사회경제, 협동조합 등 국가와 대기업에 기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부문을 가진 나라 혹은 지역들이 이 신자유주의의 광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나름대로 독자적이면서도 편안한 경제를 가지고 있게 되었더라는 거지요.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제3부문을 지금부터 어떻게 빠른 시일 내에 만들어낼 것인가가, 지금 한국 경제에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길에는 대략 다음 세 가지 경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생활협동조합의 구심점이 되어줄 수 있는 전통적인 사회기관인 종교기관들, 이를 첫번째 경로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아와 과부들을 자신의 어린양으로 생각했고, 부처님도 이런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똑같은 얘기를 하셨지요. 제가 읽었던 성경이나 불경 그 어디에도 지금 한국의 종교기관들이 하는 것처럼 금병품을 세우고, 부자와 권력자들을 모아 놓은 사교클럽 역할을 하고, 그들만의 추악한 뒷거래를 위한 네트워크 역할을 하라고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도 모두 글로벌주의자이자 보편주의자였습니다. 제자들에게 국가 쇼비니즘이나 마초 근본주의로 돈 장사하라고 가르친 게 아니라, 공동체를 잘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저 선진국의 종교기관이 했던 것과 같은 제3부문의 역할을 이 땅의 종교기관들도 해준다면, 한국은 훨씬 빨리 선진국이 될 겁니다. 해외에 목숨을 거는 선교사를 보내기보다는 신들의 곳간을 열어 조그마한 생협이라도 운영하면서 배고픈 고아들과 갈 곳 없는 과부들을, 그야말로 성경에 쓰인 그대로 주님의 품안에 거두는 것, 그 일을 하는 게 한국이 가장 빨리 4만 달러 국가들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두번째 경로는, 미국이 주로 그랬듯이 대기업들이 공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금들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록펠러 가문의 기업들이 그랬던 것만큼, 아니면 이름없는 수많은 독지가들이 미국에서 했던 것처럼, 아니면 최근의 빌 게이츠가 회사의 경영권을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스스로 하겠다고 하는 딱 그런 일들을,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업들이 하는 것이 두번째 경로일 겁니다.
세번째 경로는, 스웨덴이나 스위스 혹은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모든 기금을 대주는 식의, 그야말로 공공 부문의 의사결정에 전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는 정부산하기관을 제가 상정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인큐베이팅이라 표현하는, 출범시키고 일정 궤도에 올라갈 때까지 지원한다거나 생협에 매장 정도를 대여해주는 방식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시민 스스로, 혹은 사회적 당사자 스스로 운용하는 기관이라도 최초 출발시 시장과의 격차에서 오는 부담을 정부가 약간 보조하는 정도는 흔히 선진국들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보조금은 WTO 내에서도 지역 지원금, 생태적 지원금, 공공보건에 대한 지원금 등의 형태로 허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