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Ecomomics

이단의 경제학 by 조지프 스티글리츠 외

hoyony 2018. 5. 30. 17:54

Stability with Growth : 성장과 안정의 이분법을 넘어



시대의창
2010. 05. 31
Joseph E. Stiglitz



1부. 개관

1. 핵심 문제들

개발도상국에서는 경제성장고 안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지만 보수파 경제학자들은 수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상식에 어긋난 정책을 추진했다. 경기가 하강할 때 경기순응적 긴축재정을 추진하는 것은 선진국에서 채택하는 전략과 정반대이며, 거시경제학에서 가르치는 것과도 대립되다. 이를테면 아르헨티나,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에서 심각한 경기하강의 징후가 뚜렷이 드러났을 때도 IMF는 긴축적인 통화, 재정정책을 고집했다. IMF 창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케인스는 경기역행적 재정정책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이니 말이다. 

경제학자마다 견해와 정책처방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모든 경제정책에는 상충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정책을 선택할 때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그러한 위험 때문에 혜택을 누리는 쪽과 피해를 입는 쪽이 생긴다. 누가 결정을 내리는가도 중요하다. 거의 모든 분야의 경제적 의사결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시경제정책에서도 정치과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예 다른 대안이 없거나, 어떤 하나의 접근방식이 모두에게 최선이라면 국내외 전문가들과 관료들이 경제정책을 수립하도록 내버려두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대안은 언제나 존재하며 어떤 정책이든 장단점이 있다. 선택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문가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상황이 불확실할 때는, 최적의 정보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판단을 내리더라도 나중에 이 판단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때로는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책입안자의 책임이 아니다. 정책입안자와 자문역이 정작 책임져야 하는 것은 고용과 성장에 미치는 위험을 비롯한, 정책들의 장단점과 효과를 정확히 평가했는지의 여부다. 마치 단 하나의 올바른 정책, 즉 다른 모든 정책들보다 나은 파레토 우월적 정책이 존재하는 것처럼 꾸며댄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책의 목표는 일상적 거시관리든 위기 대응이든 대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는 동아시아 위기에 대응하여 1998년 9월에 자본통제를 시행했으나 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는 태국보다 경기 하강 기간이 짧고 하락폭도 작았으며 부채를 덜 지고도 위기에서 벗어났다. 물론 두 나라가 다른 점이 많기는 하지만, 말레이시아가 더 뛰어난 성과를 낸 데는 자본통제를 시행하고 정통적인 처방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한몫했다. 중국은 위기가 닥치자 정통 케인스주의 정책을 실시해, 경기 하강을 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빠른 경제성장을 유지했다. 중국은 수출과 성장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투자를 늘렸으며, 이러한 정책 덕분에 현재 소득뿐 아니라 미래 소득까지 늘릴 수도 있었다.  

2. 목표

경제적 안전을 분석할 때는 대개 개인과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개인은 위험을 싫어하고 안전을 소중히 여기며 소득의 흐름이 평탄하기를 바란다. 실업이야말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위험이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상충관계를 이룬다. 인플레이션 압력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실업률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까? 경제학에서는 완전고용을 인플레이션을 가속시키지 않는 실업률(NAIRU,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로 정의한다. 문제는 NARIU가 측정하기 힘들뿐 아니라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외부 충격을 나타내는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 자체는 모형 내에서 설명해야 하는 내생 변수다.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에 유가가 급등하자, 전 세계에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며 성장이 지체되고 빈곤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고유가였다. 석유 때문에 성장에 동원할 자원이 부족해진 탓이다. 물론 정책입안자들은 고유가의 영향을 누그러뜨리면서 충격에 폭넓게 적응할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하지만 긴축적인 거시경제정책을 써서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고 폭넓은 적응을 게을리 한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이미 유가 충격 때문에 경기가 둔화됐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라틴아메리카는 고유가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1970년대에 성장을 지탱하기 위해 외채를 마구잡이로 갖다 썼다. 하지만 이 전략의 장기적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석유 위기 이후 미국이 금리를 대폭 인상하자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대부분 파산하게 되었으며, 이는 198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으로 이어졌다.

인플레이션에 반대하는 주장을 들어보면 인플레이션이 성장에 해롭다는 말로 시작하여 인플레이션은 가장 잔인한 세금이다(빈곤층에게 특히 큰 피해를 입힌다는 뜻에서)라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중간수준의 인플레이션은 성장에 특별히 해롭지 않으며,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지나치게 낮출 경우에 오히려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ㅡ인플레이션이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에서는 ㅡ인플레이션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은 채권 보유자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은 불평등을 줄인다. 정치경제 현장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을 막으려고 노심초사하는 쪽은 노동자와 일반 기업이 아니라 금융시장과 월스트리트이니 말이다. 

인플레이션이 빈곤층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할 때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 인플레이션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에 대응한 조정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유가 급등이나 1990년대 통화위기와 같은 외부 충격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을 때는 일반적인 수단을 쓰다가는 파산과 실업이 증가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 대처비용이 인플레이션 비용보다 더 클 수 있다. 특히 실업의 고통을 가장 심하게 겪는 빈곤층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 편익을 평가할 때는 반드시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면 단기적으로는 실업이 늘고 중기적으로는 성장률이 낮아질 가능성이 커진다. 인플레이션 비용을 감당할 능력은 부유층이 더 큰데도, 대부분의 인플레이션 대처 비용은 나머지 계층, 특히 미숙련 노동자가 떠안는다. 

이 장의 요점은 세 가지다. 첫째, 파레토 우월적 정책, 즉 사회의 모든 사람을 다른 어떤 정책보다 더 잘 살게 만들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책은 저마다 다른 집단 ㅡ노동자 대 금융시장, 국내 채권자 대 외국 채권자, 채무자 대 채권자 등 ㅡ에 저마다 다른 영향을 미친다. 둘째, 각 집단은 저마다 다른 위험을 짊어진다. 여기에는 정책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데 따른 위험이 내포된다. 셋째, 정책이 각 집단에 저마다 다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민주 사회에서는 거시경제정책을 관료집단에만 맡길 수 없다. 이들이 경제 상황에 아무리 정통하고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물론 정치적 과정을 거친 이후 특정 임무를 관료 집단에 위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시경제정책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이에 따르는 상충관계는 정치적 과정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2부. 거시경제학

3. 정책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정통 케인스학파의 접근법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재정정책보다 통화정책을 선호한다. 금리를 낮추고 신용의 폭을 확대하면 투자가 촉진되고 성장이 가속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하강이 심각하거나 2001년 미국 불활때처럼 생산능력이 남아돌 때는 금리를 내려도 투자를 촉진하지 못할 수 있다. 기업들이 이미 과잉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일본에서는 명목금리가 0에 가까웠는데도, 물가가 떨어지는 탓에 실질금리가 0보다 컸다. 케인스가 지적했듯이, 이런 상황에서는 토오하정책을 써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이때는 정부가 재정정책에 치중해야 한다. 

보수파의 접근법

보수파는 경제가 완전고용에 가깝게 작동한다고 믿기 때문에 실업보다는 인플레이션을 염려한다. 이들은 경제정책이 수요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공급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한다. 상당수 보수파가 감세를 환영하는 이유는 노동의 세후 수익을 증가시킴으로써 사람들이 더 많이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케인스학파는 실업률이 높을 때 노동 공급을 늘리면 실업이 증가할 뿐 산출은 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보수파는 투자 수익에 대한 감세가 저축을 장려한다며 이에 찬성한다. 이들은 저축이 늘면 저절로 투자가 는다고 가정한다. 물론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로 작동하고 대외 차입이 없다면, 이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한다면, 저축이 증가하더라도 총산출은 오히려 감소할 것이다. 

비정통파의 접근법

이들은 이용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케인스학파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다고 주장한다. 정책을 통해 거시경제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메커니즘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공급 측면 효과, 경제구조, 기대의 역할, (현금 흐름과 신용에 대한 제약을 비롯한) 제약, 다양한 대차대조표 효과, 정책이 소득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금융위기가 일어나면 투자수요가 줄어든다. 하지만 금융위기는 재무구조에도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은행은 대출을 꺼리고 기업은 생산을 꺼리게 된다. 따라서 수요뿐 아니라 공급도 타격을 입는다. 현금이 궁하지 않은 기업도 대차대조표가 나빠지면 생산을 줄일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총수요가 빠르게 성장하면 긍정적인 공급 효과가 발생한다. 개발도상국을 분석하면서 대체로 생산구조 다각화와 연관된 구체적인 문제, 특히 기술습득을 비롯한 신생 기업의 진입 비용을 중시한다. 또한 산업 전체에 대해 규모에 따른 수익 증대를 얻을 수 있는 부문에 진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계와 기업이 받는 제약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를 테면 신용 할당 때문에 가계와 기업의 지출은 현재의 현금 흐름으로 제한된다. 주식기장과 보험시장의 제약 때문에, 신용 제약 기업의 위험회피 이론이 발전했다. 총 수요가 충격을 받으면 수익성, 재무구조, 총공급이 차례로 영향을 받는다. 비정통파는 안정정책을 추진할 때 이러한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싱턴 합의의 거시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데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주장을 제시했다. 첫째, 거시경제정책을 수립할 때는 다양한 목표를 고려해야 한다. 물가안정뿐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 발전, 분배를 고민해야 한다. 둘째, 수단과 목표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매개 변수를 궁극적인 정책 목표로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은 생활수준을 지속가능하고 공평하게 발전시키는 정책이다. 셋째, 거시경제적 정책 수단을 늘려야 한다. 전통적인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수단뿐 아니라 조세 구조와 규제 정책을 비롯한 미시경제적 개입을 동원해야 한다. 

4. 개발도상국의 거시경제학은 선진국과 다른가?

선진국은 개발도상국보다 금융기관이 훨씬 발달해 있다. 이를테면 개발도상국 기업들은 자금의 내부 조달 비중이 크며, 주식시장이 발달하지 못해 신규 투자의 자금원 노릇을 하지 못한다. 반면에 선진국은 금융의 중심이 은행 대출에서 채권으로 이동했다. 기업은 기업 어음이나 회사채를 발행함으로써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다. 하지만 개발도상국 기업들은 동아시아 나라들의 기업들처럼 외부 금융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은행 자금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기업이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는 하지만 은행이 아직 허약할 때는 경제 충격이 은행 위기와 경제 침체를 일으킬 수도 있다. 

기업이 차입 자금에 의존할 경우(개발도상국은 차입 자금이 일반적이다), 부정적인 충격(이를테면 가격 하락이나 수요 감소)이 발생하면 신용경색의 심화 때문에 생산과 투자가 위축될 수도 있다. (이를 금융 가속도라 한다) 충격이 증폭되는 정도는 기업이 차입 자금에 의존하는 정도와 차입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5. 세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 정책수단 :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선진국에서야 재정정책이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개발도상국은 경기가 하강할 때 재정정책에 의존하기가 무척 힘들다. 정부지출을 충당할 자금을 빌리는 것은 힘들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 경기가 둔화되면 당연히 세수가 줄어들며 부채를 상환할 자금도 감소한다. 정부의 부채 상환능력이 떨어지면 대출 금리가 오른다. 반면에 경기 순환의 상승 국면에서는 정반대의 문제가 생긴다. 세수가 회복되면 정부지출도 늘어난다. 경기 팽창 시기에는 정부가 자금을 조달하기 쉽기 때문에, 정부는 곧잘 적자 지출을 늘린다(이는 경제학자들의 권고와 상반된다). 이러면 일시적인 조세 수입과 신규 차입을 통해 지출이 늘어날 테고, 다음 번 경기 하강 때 긴축을 감당하기가 훨씬 고통스러울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재정정책이 매우 경기순응적이라는 증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90년부터 2001년 사이에 일어난 45차례의 경기 변동 중에서 중립적 정책이 12건, 경기순응 정책이 25건이었으나 경기역행적 정책은 8건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의 일반적인 문제는 경기순응적 재정정책을 쓰려는 유인이 강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은 경제정책을 수립할 때 재정정책의 경기순응적 성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부문 적자 목표 설정과 부채 대 GDP 비율과 같이 재정의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규칙을 제정해야 한다.

경기역행적 정책의 첫 번째 주요 수단은 일시적 공공부문 수입을 불태화(한 현상이 다른 현상에 영향을 미치치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하는 재정안정 기금이다. 재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1차 상품에 대한 안정기금(콜롬비아 국립 커피 기금, 칠레 구리 및 석유기금 등)을 관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더 폭넓은 재정안정기금으로 확대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외환 보유고가 있다. 안정기금의 요체는 경제가 호황일 때 자금을 떼어두었다가 경제가 불황일 때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금을 적립하고 지출하는 시기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이를테면 2005년 아르헨티나 멘도사 시는 성장률이 아르헨티나 평균을 웃돌았으며 재정 흑자를 기록했다. 상당수 경제학자들은 경상 지출 이외의 잉여 재정을 경기역행적 안정기금으로 적립하라고 멘도사 시에 권고했지만, 멘도사 시장은 당시 실업률이 (국내에서는 가장 낮았지만) 7~8%로 여전히 높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경제가 아직 완전고용 수준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으므로 일자리 창출 활동에 잉여 재정을 투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건전성 규제는 미시경제적 위험을 줄이는 수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들어 거시경제에서 비롯하는 위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비정통파 경제학자들은 건전성 규제를 거시경제정책 수단으로 쓰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은해은 개별 차입자와 연관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미시경제적 위험 관리를 이용한다. 건전성 규제는 은해이 이런 위험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하지만 거시경제정책과 경기 순환처럼 모든 시장 주체가 당면한 공통 요인과 연관된 위험은 줄이기가 더 힘들다. 게다가 바젤1 및 바젤 2 기준을 비롯한 기존 규제 수단은 경기순응적 성향을 지닌다. 이 제도에 따르면 은행은 대출 미상환이나 단기적인 미래 대출 손실 예측에 대비하여 자본을 충당해야 한다. 경기 확장시에는 손실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이 제도만 가지고는 활황기의 위험 감수 행위를 막기 힘들다. 반면에 경기가 둔화되거나 위기가 닥치면, 대출 미상환이 급증하여 은행 손실이나 대손 충당금이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자본이 줄어 대출 능력이 약해지며, 이로 인한 신용 경색은 경기 하강을 더욱 부추긴다. 

스페인의 충당금 제도에서는 충당금을 경기가 상승할 때 적립해두었다가 경기가 하강할 때 꺼내 쓰는 기금에 적립한다. 기금만 넉넉하다면, 은행은 불황이 닥쳐도 대손 충당금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다. 기금을 적립하고 인출하는 것은 경기역행적 움직임이지만 실제로는 은행 대출의 경기순응적 패턴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제도가 기존의 경기순응적 대손충당금 제도보다 뛰어난 것만은 틀림없다. 
따라서 엄격한 경기역행적 건전성 규제로 이를 보완해야 한다. 당국이 판단하기에 (기준에 비해) 신용이 부적절하게 증가할 경우 초과 대손 충당금을 보유하도록 하거나 건설 부문처럼 업계 전반적 위험도가 높은 부문에 대출을 제한하는 등의 기준을 둘 수 있다. 신용 증가를 직접 제한하거나 위험성이 큰 사업에 신규 대출을 제한할 수도 있다. 

6. 개방경제의 복잡성

개발도상국은 대부분 개방경제이며 수출입이 GDP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장기 직접 투자와 단기 자본을 비롯한 외국 자본흐름에도 점차 문을 열고 있다. 자본이 유입(유출)되면 자국 통화 수요가 증가(감소)하며, 나머지 조건이 동일하다면 통화가치 절상(절하) 압력이 생긴다. 경제가 개방되면 국가가 위험에 노출되며 안정정책의 필요성이 커진다. 

일반적으로 통화 약세의 효과가 얼마나 강하고 오래가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통화 약세가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과 실질 환율에 미치는 순 효과다. 우선 환욜 변화가 물가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살펴보자. 환율이 약세가 되면 수입품과 수출품의 가격이 높아진다. 수입품이야 자국 통화로 환산했을 때 더 비싸지는 것이 당연하고, 수출품은 외국 시장에서 자국 통화로 환산하여 더 비싸게 팔리기 때문에 국내 가격도 덩달아 오르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는 수입품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특히 중간재와 자본재의 비중에 따라 달라진다.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다면(이를테면 실업률이 매우 높으면), 평가절하를 하더라도 적어도 수년 동안은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동아시아,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는 현저한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외채위기 이후 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기대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과거 사례를 토대로 삼는다. 최근 들어 대규모 평가절하가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 사례는 전혀 없으므로 앞으로도 평가절하가 물가 연동과 인플레이션 기대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금리와 환율이 자본흐름에 미치는 영향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개방경제에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효과를 구별해내기가 힘든 이유는 자본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무이다. 나머지 조건이 동일하다면, 팽창적 거시경책으로 국가의 실질소득이 늘면 자본이 흘러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조건이 동일하다면, 긴축적 통화정책으로 금리를 올리면 자본이 흘러들어 환율이 평가절상될 것이다.(반대로 금리를 내리면 자본이 빠져나가 환율이 약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조건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는 주로 금리와 자본흐름의 복잡한 상호작용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경제학 이론이 강조하듯, 금리뿐 아니라 신용 문턱 또한 중요하다. 자본흐름은 가계와 기업이 얻을 수 있는 자원의 양과 심지어 은행의 대출 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인 폐쇄경제 모형에서는 금리를 내리면 투자가 늘고 성장률이 높아지지만 개방경제에서 금리를 내리면 자본이 유출되고 환율이 약세가 된다. 여기에 환율의 평가절하로 인한 대차대조표 효과가 더해지면 신용문턱이 높아져 낮은 금리가 총수요에 미치는 정상적인 영향을 줄이거나, 심지어 뒤집을 수도 있다. 정책입안자들이 수요 하락에 대처하려고 금리를 내리려는 시도는 자멸적이다. 금리가 낮아지면 자본유출이 더욱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폐쇄경제 모형에서는 경기 숨고르기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 투자가 줄고 성장률이 낮아진다. 반면에 개방경제에서는 금리를 올리면 자본유입을 통해 신용 공급이 늘어나고 투자와 성장이 촉진된다. 하지만 개방경제에서는 두가지 중기적 효과가 발생한다. 첫째, 중앙은행이 올리는 금리는 대개 단기 금리이기 때문에 유입되는 자본도 단기 자본이다. 이들 자본흐름은 장기적인 생산 투자보다는 소비나 부동산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성장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은 미미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자본유입은 단기 거품을 일으키기 때문에, 거품이 터지면 산출이 주저앉을 수 있다. 이 효과는 아시아 외환위기에도 한몫했다. 
둘쨰, 유입이 늘면 통화가치가 절상된다. 그러면 수출 산업과 수입 대체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져 중장기적으로는 경기가 둔화될 수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호황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표준 모형에서 예측하듯 중장기적으로는 성장이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

지금처럼 불확실한 시대에는 통화당국과 재정당국이 실질 변수에 치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리를 내리고 정부지출을 늘리면 일반적으로 실질 국민소득이 늘어난다. 이처럼 경제 상황이 실제로 호전되면 투자자의 자신감이 커져 자본이 더 많이 유입될 것이다. 빗나간 기대나 정반대의 자본흐름 때문에 이러한 1차 효과가 무산되는 예외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경기가 하강하는 데도 금리를 올리고 정부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올리고 환율을 절상하라고 주문하는 이들은 이런 간접적인 효과가 팽창적 재정정책과 팽창적 통화정책의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능가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있다. 

인플레이션 목표제

통화당국과 재정당국이 엇박자를 내는 과정을 살펴보자. 재정당국의 조치를 전제조건으로 하여, 통화당국은 목표 인플레이션을 달성하기 위해 금리를 올린다. 이 떄문에 대규모 대외 불균형이 일어나고 통화가 과대평가된다. 이제 재정당국 차례다. 재정당국이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올리면 실업률이 높아진다. 실업률이 높아지면, 인플레이션 목표제의 통화 당국은 금리를 내린다. 하지만 이미 재정당국은 정해진 금리에서 대외균형을 달성하기에 알맞은 수준으로 재정정책을 짜두었다. 그런데 금리가 낮아졌으니까 이제는 무역흑자가 생긴다. 재정당국은 방향을 돌려 지출을 늘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통화당국은 정해진 재정정책에서 완전고용을 달성하기에 알맞은 수준으로 통화정책을 짜두었다. 그런데 팽창적 재정정책 탓에 이제는 인플레이션이 증가한다. 통화당국은 다시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다. 

환율 변동을 줄이기 위한 개입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주목적은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된 통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환율 변동을 줄이는 것이다. 실질 환율 변동을 막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변동이 일어나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1차 상품의 가격이 오르면 자본 유입이 증가하여 외화가 풍부한 상태에서 통화 절상 압력을 받으면 장기적인 산업 공동화 효과가 나타난다. 교역 부문에 진입할 때 비용(고정자본 투자 또는 외국 시장에서 거래처를 확보할 때 드는 고정 비용)이 드는 경우에도 (특히 자본시장이 불완전할 때) 실질 환율의 평가절상은 장기적 비요을 낳는다. 

개발도상국의 공공부문 부채 관리

동아시아 나라들이 오햇동안 훌륭한 성과를 낸(또한 다른 나라들이 겪은 변동성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저축률이 높은 덕에 외국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도 투자율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아시아 위기의 주요 요인은 자본시장 자유화다(높은 저축률을 감안할 때, 이 나라들은 자본시장을 자유화할 필요가 없었다) 외채 규모가 큰 나라의 중기 목표 중 하나는 국내 자본시장을 발전시키고 국내 저축을 장려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금을 어디에서 조달하느냐가 아니라 부채의 위험이 얼마나 되느냐다. 공공부문 부채구조의 심각한 통화 불일치와 만기 불일치는 여러 개발도상국이 겪고 있는 중요한 문제다. 장기 부채는 대부분 외화 표시 부채인 반면, 국내 부채는 대개 단기 부채다. 하지만 일부 공기업을 제외하면, 공공부문이 생산하는 서비스는 국내 경제를 위한 것(비교역재)이며, 공공투자는 장기적이다. 

장기적으로  볼때 통화 당국의 목표는 국내 자본시장의 깊이를 깊게하는 것이어야 한다. 중앙정부는 위험 수준이 낮고 발행 채권의 가치가 균일하기 때무에 국내 채권의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이 장기적으로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정부 역할에는 민간부문 채권의 기준 금리를 제공하는 것도 포함된다. 
위험이 없는 시장은 없다. 국내 통화 채권시장은 단기자본 유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내 정부채권 시장을 통해 외국인은 단기 투자 상품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는 호황기에 자본유입을 부추기고 위기시에 자본유출을 가속시킨다. 유동적인 국채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면, 투자자가 통화를 공매도할 수 있기 때문에 환투기가 쉬워진다. 라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정부가 필요한 국내 차입을 꺼릴 필요는 없다. 다양한 형태의 자본 규제를 통해 위험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통화 당국은 외국인이 단기 채권을 매수하지 못하도록 금지할 수 있고 장기 채권을 1년 이상 보유하도록 의무화할 수도 있다.  

8. 정책 틀

회계 틀

GDP(국내총생산)란 나라 안에서 생산한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합친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국가 자산을 외국에 팔고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고 희소한 천연자원을 써버려 국민이 더 가난해지는데도 GDP가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전체의 후생을 측정하기에는 GDP보다 GNP(국민총생산)가 더 적절한다. GNP는 GDP에서 내국인이 외국에 투자하여 얻은 소득을 더하고 외국인이 국내에 투자하여 얻은 소득을 뺀 것이다. 더 나은 기준은 자본재 감가상각분을 뺀 NNP(국민순생산)이다. 훨씬 바람직한 것은 천연자원 고갈, 환경오염, 위험증가를 고려한 국민 산출이다.

민간에서 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정부가 초과비용, 최소 통행효 수입, 환율 변동 등을 보증하는 경우(대개 민관 협력사업이라 불린다)에도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민관 협력사업은 사실상 국가사업이지만 우발 비용이 국가 회계에 계상되지 않으며 경상 지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부 보증은 민간투자자의 위험에 대해 정부가 보험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정부는 이러한 보험료를 추산하여 정규 예산에 반영하고, 우발 사건이 일어날 경우 지급할 특별 기금을 편성해야 한다. 또한 예상 우발 채무를 공공부문 부채에 포함시켜야 한다. 민간부문의 기반 시설 사업에 대한 정부 보증을 정규 회계에 계상하지 않으면, 정부가 부담하는 사업비용이 장기적으로 더 큰 경우에도 이런 방식을 선호하게 된다. 공공부문이 보증하는 민간 기반 시설 투자는 엄격한 재정적자 목표를 피해가는 유용한 편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위험

1990년대에 개발도상국들이 너도나도 추진한 개혁 또는 경제의 자동 안정 장치(경제 상황이 바뀔 때 저절로 경기 역행적으로 조정되는 항목)를 약화시켰다. 이를테면 경기 후퇴시에 소득세를 내리면 경기를 부양할 수 있지만 많은 나라들은 부가가치세 비중을 늘렸으며, 이 때문에 조세의 누진성이 낮아져 조세의 자동 안정 기능이 약해졌다. 이와 동시에 실업 보험이 줄어드는 등 사회보장 제도가 축소되자 지출 또한 자동 안정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 중에는 아예 불안정 장치를 시스템에 들여오는 것도 있다. 은행에 대해 엄격한 자본 적정성 요건을 관용없이 적용하면 (어떤 편익이 있든) 경기가 하강할 때 신용을 더욱 위축시킬 수 있다. 경기가 둔화되면 은행 대출 자산 구성이 나빠진다. 그러면 은해은 준비금을 늘리고 신용문턱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이때야말로 신용이 가장 필요한 시기이다.

위험을 감당할 능력이 작은 집단에서 큰 집단으로 위험을 이전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금융시장에서 새로운 상품이 개발되어 부유층이 (신용제약을 받을 가능성이 큰) 빈곤층에게 임금 보험을 제공할 수 있다면 경제가 더 안정될 것이다. 하지만 파생상품을 개발하는 등 자본시장은 발전했으나 경제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투기의 기회만 생겼을 뿐이다. 

국제금융기구의 정치경제

G7 나라들은 국제기구에서 가장 큰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IMF에서 중대한 결정에 대해 거부권에 해당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개발도상국은 의결권이 제한되거나(국제결제은행),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바젤 은행감독위원회) 각국에서는 재무장관을 대표로 파견하기 때무에 의사결정 과정이 금융시장의 이익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관료들은 회전문 인사의 유혹을 받는다. 민간 금융기관 출신이 공직자로 임명되기도 하고 공직자가 민간 금융기관에 진출하기도 한다(후자가 훨씬 흔하다) 국제 금융기구는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의해 가장 큰 영햐을 받는 사람들(개발도상국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정통 경제학의 주장에 따르면, 제대로 작동하는 효율적 시장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 (위험 관리능력이 더 뛰어난) 부유한 선진국으로 위험을 이전해야 한다. 하지만 위험은 이전되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외 준비자산 체제의 문제도 관심을 끌고 있다. 개발도상국은 대외 준비자산의 상당부분을 미 재무부 증권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는 막대한 자금을 미국에 저리로 빌려주는 셈이다. 한편 채권자들은 개발도상국에 자금을 빌려줄 때 훨씬 높은 금리를 요구한다. 그 결과 막대한 자금이 빈국과 중간 소득 국가에서 부국으로 이전되는 터무니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9장. 형식적 접근

현재의 표준적 경쟁 균형 틀로는 신고전주의 모형, 대표적 경제주체 모형, 실물 경기 순환 모형이 있다. 이들 모형에서는 노동시장을 비롯하여 모든 시장이 투명하다고 가정한다. 또한 완벽한 정보, 완벽한 시장, 완벽한 임금 및 물가 유연성, 완벽한 경쟁, 완벽한 합리성이 존재하며 외부효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이들 모형이 현실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면, 경제는 효율적으로 작동할 것이며 정부가 개입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시된 수많은 거시경제 모형은 완전 경쟁 모형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임금과 물가는 완벽하게 유연하다. 시장이 완벽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개인은 완벽한 시장을 가정하고 행동한다. 임금과 물가에 대해 개인이 지닌 합리적 기대는 미래로 무한히 확장된다. 좀 더 포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정보 불완전성이나 정보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시장이 불완전하다면, 현명한 시장 참여자들은 그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수단(이를테면 정교한 계약 조항)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형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모형의 가정은 비현실적이며 거시경제 공식으로는 미시경제적 행동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모형은 (비자발적) 실업은 왜 존재하는가나 노동수요 감소는 왜 노동시장 단축이 아니라 해고의 형태로 나타나는가와 같은 핵심적인 경제 현상에 대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한다. 

보수파 모형은 주로 경제주체 모형을 토대로 삼는다. 이 모형은 경제가 개인/가계 하나와 기업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다. 이런 식으로 모형을 구성하면 거시경제의 중요한 측면을 상당수 간과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들 모형에서는 노동수요의 감소가 어떤 형태로 일어나는지(노동자를 해고하는지,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개인이 한명뿐이므로, 이 개인은 노동 시간을 줄일 것이다. 정보 비대칭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용 할당도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이 한명뿐이면 위험 분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경제 변동의 사회적 비용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노동시간 축소의 부담을 일부 노동자들이 짊어지기 때문이다. 이드은 해고당할 뿐 아니라 소비를 유지하기 위한 대출도 받을 수 없다. 대표적 경제주체 모형을 쓰는 경제학자들은 신용할당 문제를 무시하며 경제 변동의 복지비용을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한다. 

행동거시경제학

케인스학파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화폐착각을 일으키며실질 임금이 오르더라도 명목 임금이 깎이는 것을 싫어한다고 주장했다. 합리적인 경제 주체라면 디플레이션이 일어났을 때 가격을 하향 조정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는 명목 가격의 하향 경직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존재한다.
실제 행동을 연구하고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분석하는 행동경제학은 개인의 행동이 체계적인 비합리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는 보수파의 정책적 입장 밑에 깔려 있는 거시경제학 모형의 신빙성에 또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3부. 자본시장 자유화

10장. 자본시장 자유화 : 찬성론과 반대론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자유무역이 선진국과 저개발국 모두에 이익을 가져다주리라는 견해가 학계와 정책 집단 내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우루과이라운드 무역협상(이 협상의 결과로 WTO가 탄생했다)이 1994년 타결되자,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와 미주정상회담에서는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나머지 지역에서도 포괄적인 자유화와 자유시장 논리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1997년 9월 홍콩에서 열린 IMF 연차 총최에서는 무역을 방해하는 자본통제를 첦하라는 창립 이래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자본시장 자유화를 촉진하라는 요구를 포함하도록 헌장을 개정하자는 안건이 제출되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이미 무너졌다. 동아시아 위기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번졌다. 구제금융 규모는 역대 최고였으며, 태국과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한국, 브라질, 러시아까지도 IMF에 손을 벌렸다. 위기의 한가운데에는 투기성 핫 머니(단기 자본흐름)가 있었다. 한편 대규모 신흥시장인 중국과 인도는 모두 자본통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위기 동안 자본통제를 시행한 결과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에 비해 경기 하강 기간이 짧았으며 부채도 적었다. 

자본시장을 자유화하면 자본이 유입되어 반드시 성장이 빨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새장을 열면 반드시 새가 날아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자유화하면 자본이 유출될 수 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자본이 대량으로 이탈했듯이 말이다. 자본흐름은 경기 상승과 경기 후퇴를 둘 다 악화시킨다. 은행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대출을 해주고, 나라가 호경기일때는 자금이 몰려들지만 위기가 일어나면 자금이 빠져나간다는 금융계에 널리 퍼진 금언도 그러한 증거의 하나다. 자본시장을 자유화한 나라는 단기 투자자의 변덕에 놀아나는 비합리적인 시장 심리에 휩쓸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자본시장을 자유화한 나라는 자국 통화를 안정시키려다가 헤지 펀드와 다른 투자자들의 투기 공격에 노출된다. 

금융시장 참여자들은 대부분 단기 실적에 집착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수익을 점검받으며 단기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기 실적에 치중하다 보면 장기 성장에 역효과가 나타난다. 자본시장 투자자들은 장기적 펀더멘털이 악화되고 있을 때에도 단기 이익을 좇아 투자한다. 시장 분석가들은 이런 단기적 관점에서 경제정책을 분석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이들은 생산적 투자지출로 인한 차입 증가와 소비 지출로 인한 차입 증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공공자산을 싸게 매각하거나 민영화하여 나라가 더 가난해지더라도 부채만 줄어든다면 시장에서는 박수를 보낸다. 시장은 예산적자 축소에 주목할 뿐 정부 자산 감소는 외면한다. 국가 기반시설의 악화, 교육/기술 투자의 부실, 불평등 증가와 같은 요인들이 어떤 결과를 낳든, 단기 실적을 좇는 시장은 이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자본시장 자유화를 옹호하는 이들은 자본시장을 개방할 경우 경제 효율이 높아지고 기술 투자를 비롯한 투자가 늘어나 경제성장이 촉진된다고 주장한다. 총소득이 늘어나면 국내 저축과 투자가 더불어 늘어나며, 이를 통해 지속적인 경제 팽창의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채 선순환은 각국의 경제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시킨다. 하지만 자본시장 자유화가 성장을 촉진하려면 유입 자본을 소비가 아니라 투자에 써야 한다. 1970년대와 1990~1997년에는 자본이 개발도상국으로 흘러들기는 했지만 추가적인 자금을 성장으로 연결하는 기본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입 자본이 대부분 투자 증가보다는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11장. 형식적 접근 : 자본시장 실패

외부효과 

외부효과로 인한 시장실패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시장 참여자에게 돌아가는 이익과 사회 전체에 돌아가는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가 손실을 입더라도 투자자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정부 개입의 근거가 된다. 외부효과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가격'외부효과와 '수량'외부효과를 살펴보자. 가격외부효과는 자본이 유입될 때에도 유출될 때에도 생길 수 있다. 자본이 유입되면 통화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수출 및 수입대체 부문이 피해를 입는다. 반면에 자본이 유출되면 정부가 통화가치 하락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린다. 그러면 자국 통화로 환산한 외화 표시 부채의 가치가 치솟는다. 통화가치가 떨어지거나 금리가 오르면 기업은 파산하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수량외부효과가 극심한 경우는 자본유출이 신용 할당으로 이어질 때다. 자본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면 은행들이 신용 문턱을 높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당국에 자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나라의 총 단기 부채와 수입 대비 미상환 단기 부채 비율을 살펴본 뒤 고금리를 위기 징조로 받아들여 상업 신용 한도를 줄일 때에도 수량 외부효과가 생긴다. 

또 다른 외부효과는 유동 부채에 해당하는 준비금을 보유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건전성 정책으로 인해 생긴다. 자본이 1억 달러 유입되었을 때 준비금을 1억 달러 늘려 이를 상쇄해야 한다면 사회는 막대한 금융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이러한 준비금은 대개 미 재무부 증권을 비롯한 경화자산으로 보유하는데, 다른 곳에 투자할 때보다 수익이 턱없이 낮다. 

불완전 정보가 투자 행위에 미치는 영향

1990년대 이후, 경제학자들은 자본흐름이 과열되고 붕괴하는 이유로 '비합리적 낙관'과 '투자자 군집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무에 기대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린다. 한편 이러한 기대의 토대는 현재의 조건에 대한 정보다. 이 정보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며, 자료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처리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 시장 참여자 중 일부는 적절한 정보를 더 쉽게 얻고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남들의 행동과 의견으로부터 바람직한 투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때문에 군집행동이 일어난다. 또한 주요 시장 참여자인 투자은행, 평가기관, 국제 금융기구는 같은 곳에서 정보를 얻기 때문에 서로의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의 '전염'이 발생하면 도취나 공황 상태가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거품-붕괴의 순환을 낳는다.

시장 분리 : 차선의 규제 

분리의 목적은 자본시장 자유화로 인한 변동성으로부터 국내 경제를 보호하는 것이다. 

1) 시장을 분리하면 자국 통화 표시 자산에 대한 수요를 안정시키며, 이는 거시경제 안정에 이바지한다

국내에서 발행하는 자국 통화 표시 증권은 대부분 내국인이 거래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들 증권에 대해 신뢰할 만한 장기적 국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이러한 수요가 생기기 전에 외국인이 보유한 국내 자산은 대부분 단기적, 투기적이다. 외국인 보유 자산의 주된 위험 요인은 자국 통화이기 때문에, 국내 자산에 대한 외국인의 수요는 대개 환율에 대한 기대에 좌우된다. 따라서 국제적 분위기가 바뀌면 외환시장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 내국인도 환율에 대한 기대와 금리 격차에 따라 자산에 대한 투자와 해외 자산에 대한 투자 사이를 오락가락할 수 있다. 하지만 내국인 경제 주체가 외국인과 다른 점은 자국 통화와 자산에 대해 부녕한 장기 수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 시장을 분리하면 경기순응적 대외 차입과 안정을 해치는 통태적 과정으로부터 경제를 보호할 수 있다

외국인 채권자들은 채무자의 상환 능력이 가장 낮을 때 상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화 차입을 제한하면 개별 차입자에게 미치는 전체적인 악영향을 경기 순환과 상관없이 줄일 수 있다.

3) 시장을 분리하면 거시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커진다

정책입안자들이 도취 시기에 통화 팽창을 제한하는 정책을 쓰거나 위기시에 지나친 긴축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정부의 통화 자율성은 자본 이동성에 좌우된다. 한편 자본 이동성은 시장 분리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환율 관리는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또 하나의 필수 도구다. 게다가 시장을 분리하면 환율 변화의 효과가 더 커진다.

자본시장 직접 개입에 드는 비용 

제한의 당면목표는 자본유입이 소비를 부추기고 주로 부동산부문에서 금융거품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조치로 인해 금리가 오를 경우 경제 전반에 걸쳐 대출이 위축될 수 있다. 금융거품이 생기면, 정부는 금리를 올려 거품을 터뜨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장기 투자, 중소기업 발전, 생산적인 외국인 직접투자를 장려하고도 싶어한다.

4부. 결론

14장. 안정, 자유화, 성장

이 책의 주제는 개발도상국의 안정 및 자유화 정책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은 거시경제의 목표와 구조가 아주 다르다. 우리는 실질 불안정이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며 안정정책은 물가안정이 아니라 실질 안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단다.

우리는 물가안정을 목표로 삼는 것에 반대했다. 물가안정은 성장, 완전고용, 실질 안정, 소득분배 같은 궁극적인 목표에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만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시장이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정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미시경제적 수단과 구조적 정책, 이를테면 자본계정 규제, 건전성 규제, 조세정책, 산업정책, 회계제도 개선을 통해서도 경제운용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실질 불안정과 성장의 연관성

실질 불안정이 성장에 악형향을 미치는 경로는 여러 가지다. 채무 불이행이 많아지고 경제 환경이 점점 불확실해지면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대출 능력과 의향은 더욱 줄어든다. 대차대조표가 위기 전 수준으로 점차 회복됨에 따라 이러한 영향은 사라질 수 있지만, 조직, 정보, 자본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면 그 영향이 훨씬 오래갈 수도 있다. 이를테면 동아시아 같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위기가 기업 파산으로 이어져 금융부문을 잠식하기 때문에, 유실된 조직, 정보, 자본을 쉽사리 복구할 수 없다. 

금융부문 변수의 변화가 실질 변수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는 다양하다. 첫째, 국내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줄면 기업 수익성이 뚜렷한 타격을 입는다. 둘째, 외환위기가 일어나 통화가치가 크게 떨어지면 외화표시 부채를 가진 기업의 대차대조표가 악화된다. 셋째, 위기가 일어났을 때 금리를 올리면 국내 자산가치가 떨어져 사실상 모든 국내 기업의 대차대조표와 수익성이 악화된다. 넷째, 대차대조표와 미래 수익성이 불확실해지면 기업이 차입하고 투자하려는 능력과 의향, 은행이 대출하려는 능력과 의향에 영향을 미친다. 

목표들의 균형 잡기 : 물가안정에 너무 치중하면 위험하다

인플레이션은 일종의 세금이다. 여느 세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비효율이 따른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에는 비용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을 줄이려는 정부 조치에도 비용이 따르기는 마찬가지다.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려다 산출이 불안정해지거나 금리가 크게 변동해 실업이 크게 증가한다면,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는 비용이 인플레이션 비용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환율이냐 산출 안정이냐

동아시아 위기는 환율, 물가·산출 안정, 경제성장이 상충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환율안정에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통화가치 하락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통화가치 폭락 사태는 고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통화가치 하락이 만성적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리라는 우려는 크게 줄어들었다.

위기가 일어나게 되면 관심사는 통화가치가 너무 많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위기시에 중단기 성장과 환율의 또 다른 연관성이 드러났다. 통화가치가 폭락라면 외화 표시 부채를 지고 있는 기업의 대차대조표가 악화되어 채무 불이행 위험이 커지며 정보, 조직, 자본이 파괴된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수단들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낳았다. 금리가 인상되자, 대차대조표와 기업 생존 능력에 더 큰 악영향을 미쳤다. 어느 쪽이 더 나쁜 선택인가를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금리 인상이 경제에 미친 역효과 때문에 자본이 나라 밖으로 유출됐으며, 통화가치는 오르기는커녕 더 떨어졌다. 상충관계의 성격은 나라가 처한 상황에 좌우된다. 기업이 과도한 단기 부채를 지고 있다면, 금리인상은 커다란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브라질은 기업의 차입이 아니라 정부의 차입이 문제였다. 금리를 올리자, 정부는 차입액을 올려야 했다. 정부의 재정 악화로 인한 불안감은 자본 도피와 통화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는 것은 어느 것에도 도움이 안되는 정책이다.

예산 균형이냐 산출 안정이냐

경기가 하강하면 대체로 조세 수입이 줄어들어, 사회보장 제도의 비중이 클 경우 총지출이 늘어난다. 따라서 예산 균형을 맞추던 나라들조차 적자가 늘어날 수 있다. 이 때의 표준적인 거시경제 처방은 정부가 지출을 늘리거나 세금을 깎는 경기역행적 재정정책으로 경기 하강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위기가 일어나 잠재 수출이 감소했을 때 중국의 대응이 꼭 이런 식이었다. 

적자 물신숭배(deficit fetishism)의 위험

보수파의 적자 물신숭배는 정책입안자들이 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지출을 감축하는 것으로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자를 줄이면 경제와 정부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투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경제의 활력을 금세 회복하고 탄탄한 장기 성장을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뢰 수법이 개발도상국에서 효과를 발휘한 적은 한번도 없다. 오히려 일반 경제학에서 예견했듯 긴축적인 재정·통화 정책은 대체로 경기 하강을 심화시켰다. 

안정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인플레이션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 금리를 올려 총수요를 줄이기보다는 정부지출을 줄여 충수요를 줄이는 쪽이 성장에 이롭다고들 말한다. 금리를 올리면 투자가 위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의 타당성은 어떤 정부지출을 줄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이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기반 시설 투자라면, 정부 투자를 축소하기보다는 통화정책을 쓰는 것이 성장에 유리할 것이다(물론 세금을 올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통화정책(금리인상)에 치중하는 것은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통화정책이나 환율정책을 이용하여 경제를 안정시키려다 보면 금리변동이 커진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책의 결과가 장기적이며 쉽게 되돌릴 수 없을 때다. 이를테면 동아시아의 고금리 정책은 대량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금리를 올리면 기업이 파산에 내몰릴 수 있다. 그 뒤에 금리를 내려봐야 파산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들이 급성장을 한 것은 차입금융 덕분이다. 차입금융을 할 수 없었다면 기업들은 자금을 내부에서 조달해야 했을 테고 이것은 성장에 제약을 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금을 내부에서 조달해야 할 경우 자본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기 때문에 경제 전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또 다른 문제가 존재한다. 동아시아 위기 때와 같은 대규모 금리인상은 차입 금융을 어렵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안정, 분배, 빈곤 감소

인플레이션 비용과 실업 비용을 꼼꼼히 따져보면 실업이야말로 (적어도 많은 나라들에서는) 빈곤층에게 훨씬 큰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상치 않은 통화가치 절하의 결과로, 임금이 그에 비례하여 오르기 전에 수입 생필품의 가격이 올라 빈곤이 증가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환율 약세는 수출 및 수입대체 부문의 투자와 산출을 촉진한다(그리고 환율 평가절하가 예상되면 그 효과는 더 크다) 따라서 환율 약세는 고용을 창출하고 빈곤을 감소시킬 수 있다. 중국같이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발전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환율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환율정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빈곤 감소 정책이다.

이에 반해 주기적 실업은 미숙련, 저임금 노동자에게 훨씬 큰 피해를 입힌다. 숙련 노동자는 임금 삭감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대체로 미숙련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산을 지나치게 긴축하여 사회보장 지출이 삭감될 때에도 빈곤층의 피해가 훨씬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