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by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Der Teil und das Ganze
서커스출판상회
2016. 8. 20
Werner Karl Heisenberg
1. 원자 이론과의 첫 만남(1919~1920)
(로베르트) 너희 자연과학도들은 항상 경험을 끌어다대지. 그로써 진실을 손에 넣었다고 믿어. 하지만 난 그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경험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봐. 사실상 너희가 하는 말은 너희의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거야. 과학은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하지만 생각은 사물에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사물을 직접적으로 지각하지 못해. 우리는 지각 대상을 우선 표상으로 변화시키고, 그로부터 개념을 만들어내. 감각적 지각에서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밀려들어오는 것은 무질서하게 섞인 다양한 인상들이야. 그런 다음 우리가 지각하는 형태나 특성은 인상 속에 직접적으로 들어 있는 게 아냐. 가령 종이 위헤 그려진 사각형을 본다고 해봐. 그럴 때 우리 눈의 망막이나 두뇌의 신경 세포에도 그런 사각형이 있는 건 아닐거야. 오히려 우리는 표상을 통해 감가적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정리를 하는 거지. 전체의 인상을 표상, 즉 서로 연관된 의미 있는 상으로 바꾸는 거야. 지각활동이란 이렇듯 개별적인 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말해. 그러므로 경험에 대해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표상들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것들이 개념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며, 사물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우선 점검해 봐야 할 거야.
2.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다(1920)
(발트의 어머니)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이들이 음악의 거장인 것은 그들이 2백년 동안 많은 무명의 연주자들에게 세심하고 성실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오고, 재해석하게 만들어 청중들의 이해를 도모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야. 청중들 자신도 이런 세심한 이해와 해석 작업에 동참함으로써 위대한 음악가들이 표현한 내용이 청중들에게 살아 있게 되었던 거지. 역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예술과 과학 모두 마찬가지인 듯 한데, 각 분야에서 오랜 세월 고요히 정지해 있거나 느리게 발전하는 기간이 있는 것 같아. 이런 기간에 세심하게, 하나하나 꼼꼼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이런 작은 작업들은 잊히거나, 주목을 받지 못해.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느린 과정 가운데 해당 분야의 내용이 변하게 되고 이제 갑자기, 종종 예기치도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내용이 부각되는 거야. 그러면 천재들은 여기서 느껴지는 성장의 힘에 마술적으로 이끌리게 되고, 그리하여 좁은 공간에서 몇 십 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엄청나게 뛰어난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거나 아주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져. 그런 식으로 18세기 후반에 빈에서 클래식 음악이 만들어졌고, 15,16세기 네덜란드 회화가 탄생했지. 위대한 천재들은 새로운 정신 내용에 외적인 표현을 부여하는 사람들이야. 계속적인 발달을 가능케 하는 형식을 만들어내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새로운 내용을 혼자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야.
6. 신대륙으로 떠나는 길(1926~1927)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가장 커다란 업적은 무엇일까? 지구가 둥글게 생겼다는 것을 이용하여 서쪽 길로 인도에 가려고 했던 것? 아니다 그런 생각들은 다른 사람들도 했다. 그렇다면 탐험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배에 필수적이고 전문적인 장비를 갖추었던 것? 아니다. 이 역시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콜럼버스 탐험의 가장 어려운 결정은 바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모든 땅을 떠나 서쪽으로 멀리 항해하기로 했던 것, 기존에 배에 실은 비축물로는 돌아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지점에서도 굴하지 않고 서쪽으로 더 멀리 멀리 떠났던 것이다. 과학의 신대륙 역시 결정적인 부분에서 기존의 과학이 토대로 하고 있던 기반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을 때라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에서 이전의 물릭학이 확고한 기반으로 삼았던 동시성의 개념을 포기했다. 하지만 비중있는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학자들은 이 개념을 포기하지 못해 상대성이론의 격렬한 반대자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양자론이 갖는 통계적 특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해당하는 게의 모든 결정 요소들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확률적 진술을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에서는 현상을 완벽하게 규정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결정 요소들을 아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토론에서 종종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받아쳤다.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 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불확정성 원리가 통하지 않는 실험들을 생각해 내고자 애썼다. 토론은 이른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 원리를 반박하는 새로운 사고실험을 제안하는 것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곧장 분석을 시작했고, 회의실로 가는 도중에 아인슈타인의 의문과 주장에 대한 첫 번째 해명을 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서 하루를 보내며 그에 대한 많은 대화가 이루어졌고, 저녁쯤 되면 저녁 식탁에서 닐스 보어가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실험이 불확정성 원리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면 아인슈타인은 약간 불안해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새로운 사고실험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사고 실험 역시 저녁쯤이면 이전 것보다 더 낫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고, 이런 일이 며칠 계속되자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네덜란드 레이덴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는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인슈타인, 난 자네가 부끄러워. 자네는 새로운 양자론에 대해 예전에 자네의 상대성이론 반대자들처럼 반박하고 있잖아." 하지만 이런 우정 어린 충고도 아인슈타인을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나는 다시금 기존의 과학 및 사고의 토대가 되었던 생각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참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뼈져리게 느꼈다.
7. 자연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첫 번째 대화(1927)
(폴 디랙) 우리 시대에 아직도 종교를 가르친다면, 종교가 아직도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중들, 곧 순진한 사람들을 회유하려는 의도임에 틀림없어. 자족하는 사람들은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사람들보다 통치하기 쉬우니까. 착취하고 이용해 먹기가 더 쉽지. 종교는 일종의 아편이야. 민중이 행복한 소망 가운데 취하여 자신들이 당하는 불의를 용납하도록 건네진 아편이지. 국가와 교회라는 양대 정치세력이 그렇게 쉽게 연대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야. 이 두 세력은 자비로운 신이 불의에 항거하지 않고 묵묵하고 참을성 있게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을 준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는 거야. 이런 신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따름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물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여겨질 테고.
(닐스 보어) 나는 최근 수십 년간 물리학에서 객관, 주관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지를 배우게 된 게 사고의 해방으로 느껴져요. 그것은 상대성이론에서 시작되었지요. 예전에 두 사건이 동시적이라는 진술은 언어로 명백히 재현할 수 있고, 그러써 임의의 모든 관찰자가 검증할수 있는 객관적 확인으로 여겨졌어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동시성의 개념이 주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정지해 있는 관찰자에게는 동시적으로 여겨질 두 사건이 움직이는 관찰자에게는 꼭 동시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상대성이론은 모든 관찰자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지각하게 될지 혹은 지각했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객관적이지요. 양자역학은 이런 이상으로부터 급진적으로 돌아섰어요 우리가 이전 물리학의 객관적인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사진 건판이 검게 되었다, 또는 여기에서 안개방울이 만들어졌다는 식의 사실에 대한 진술뿐이에요. 원자에 대해 진술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이런 확인으로부터 미래를 추론하는 일은 관찰자가 자유로이 결정하는 실험적 문제 제기에 따라 달라지죠. 이런 점에서 오늘날 자연과학의 물리학적 사실은 객관적이면서 주관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요.
종교가 인간 공동체의 정신 구조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때, 종교를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가 종교와 같은 정신 구조를 발전시켜 나가고, 그 구조의 지식에 맞추어나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아요. 우리 시대에 개개인은 어떤 정신 구조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듯해요. 이런 자유에서 다양한 문화권과 인간 공동체 사이의 경계들이 유연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개개인이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고 애쓸지라도, 알게 모르게 기존 정신 구조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게 되어 있어요.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 그 외 일반적인 연관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까 말이죠. 그 자녀들도 그 공동체의 모범에 따라 키울 것이고, 공동체에 맞추어 생활하겠지요.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은 개개인의 행동을 인도하고, 불안을 극복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힘의 근원이 되지요. 위기 가운데서는 커다란 연관 가운데 안전하고 보호되고 있다는 위로를 선사해주고요. 그리하여 종교는 공동체 생활이 조화를 이루게끔 해줘요.
닐스는 그런 상황에서 그가 즐겨 언급하곤 하는 이야기로 대화를 끝마쳤다. "우리 티스빌데 별장 근처에 사는 어떤 남자는 자기 집 현관 앞에 말편자를 걸어놓았어요. 미신에 따르면 말편자는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죠. 한 지인이 그에게 물었어요. '그런데 자네 그렇게 미신적인 사람이었나? 정말로 말편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물론 믿지 않아. 하지만 저건 믿지 않아도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하더라구."
8. 원자물리학과 실용주의적 사고방식(1929)
(바튼) 전에 뉴턴역학은 관찰되는 사실을 충분히 정확하게 묘사했어요. 그리고 나서 전자기 현상이 알려졌고, 뉴턴역학이 그것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죠. 하지만 맥스웰 방정식이 이런 현상을 기술하기에 일단은 충분했어요. 그러다가 원자 과정에 대한 연구가 고전역학과 전자기역학으로는 관찰되는 결과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따라서 이전의 법칙 또는 방정식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양자역학이 탄생한 것이고요. 여기서 기본적으로 물리학자는 다리를 건설하고자 하는 엔지니어와 비슷해요. 엔지니어가 지금까지 활용했던 정역학 공식이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는 데 미흡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봐요. 그는 풍압, 재료의 노후정도, 기온 변화 등등과 관련하여 수정한 내용을 기존의 공식에 추가로 반영해 넣을 거에요. 그렇게 해서 더 나은 공식, 더 믿을 만한 설계도를 얻게 될 것이고, 모두가 이런 진보를 기뻐하겠지요. 하지만 기본적으는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 생각에는 자연법칙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어떤 정리를 지나치게 추앙하거나 신성시하는 것으로 보여요. 이런 정리는 기본적으로는 해당 분야의 자연을 취급하기 위한 실질적인 규정에 불과할 텐데 말이에요. 따라서 나는 어떤 것이든 절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그러면 어려움은 없어져요.
(베르너) 당신은 엔지니어가 물리학을 실제적으로 응용하면서 꾀해야 하는 개선을 이야기했는데, 뉴턴역학이 상대성이론 또는 양자역학으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엔지니어가 꾀하는 개선과 동급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봐요. 엔지니어는 개선할 때 기존의 개념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엔지니어에게 모든 용어는 그 전에 가졌던 의미를 똑같이 가져요. 다만 전에 등한시되었던 영향을 위해 수정이 들어가는 것뿐이죠. 그러나 뉴턴역학에서 그런 종류의 변화는 의미가 없어요. 그런 변화를 꾀하게끔 하는 실험들도 없고요. 뉴턴역학이 여전히 절대적일 수 있는 것은 그 물리학이 적용되는 분야에서 그것이 결코 조금도 개선될 수 없기에, 즉 여기서는 오래전에 최종적인 형식을 찾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뉴턴 역학의 개념 체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경험 영역들이 있어요. 그런 경험 영역들을 위해서 우리는 아주 새로운 개념 구조를 제시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뉴턴역학은 엔지니어의 물리학적 장비는 가질 수 없는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완결성은 작은 개선도 용납하지 않지요. 하지만 옛 개념 체계가 새로운 것에서 한계가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 아주 새로운 개념 체계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하지요.
10. 양자역학과 칸트철학(1930~1932)
(그레테 헤르만) 칸트철학에서 인과율은 경험을 통해 확증되거나 반박될 수 있는 경험적 주장이 아니에요. 그것은 모든 경험의 전제지요. 그것은 칸트가 '아프리오리(a priori)라고 부른 범주에 속해요.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감각적 인상은 선행하는 과정으로부터 인상들이 뒤따르는 인과율이 없이는 어떤 대상과도 연결되지 않는, 느낌의 주관적인 작용에 불과할 거에요. 따라서 지각을 객관화하고자 한다면, 즉 뭔가ㅡ사물이나 현상 ㅡ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려 한다면,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의 명백한 연결을 전제로 해야 하죠. 다른 한편 자연과학은 경험들을 다뤄요. 객관적인 경험들을 다루지요. 다른 경험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경험들만이 자연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에요. 이로부터 모든 자연과학은 인과율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와요. 인과율이 있어야만 자연과학도 있을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인과율은 사고의 도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런 도구를 가지고 감각적 인상이라는 원료를 경험으로 가공하지요. 이것이 가능한 범위에서만 자연과학이 가능한 거고요. 그런데 양자역학은 어째서 이런 인과율을 느슨하게 만들려고 하면서 동시에 자연과학으로 남고 싶어하는 거죠?
(베르너) 우리가 라듐 B 원자 한 개를 실험대상으로 삼는다고 가정해봐요. 원자를 한꺼번에 많이 다루는 것, 즉 소량의 라듐 B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은 원자 한 개를 가지고 하는 것보다 더 쉬워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원자 하나를 연구하는 것도 가능하지요. 우리는 길든 짧든 라듐 B원자가 그 어떤 방향으로 전자를 방출하고 라듐 C원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요. 평균적으로 그 일은 30분 만에 일어나요. 하지만 라듐 B 원자는 몇 초 만에 라듐 C 원자로 이행할 수도 있고, 며칠 만에 그렇게 이행할 수도 있어요. 평균이라는 것은 다수의 라듐 B원자를 대상으로 할 때는 약 30분 만에 반 정도가 C 원자로 변화된다는 이야기에요. 하지만 우리는 각각의 라듐 B원자가 더 먼저도, 더 나중도 아닌 바로 지금 붕괴하는 원인을 말할 수 없어요. 바로 여기에 인과율이 통하지 않는 일이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라듐 B원자가 다른 방향이 아니라, 바로 이런 방향으로 전자를 방출하는 원인도 이야기할 수 없어요.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런 원인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답니다.
(카를 프리드리히) 여기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마치 라듐 B원자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원래 그럴 수 없어요. '물자체'라는 말은 칸트에서 이미 문제가 있는 개념이에요. 칸트는 물자체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우리에게는 지각의 객체만이 주어져 있어요. 하지만 칸트는 이런 지각의 객체를 소위 물자체라는 모델에 따라 연결시키거나 정돈할 수 있다고 봐요. 따라서 칸트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익숙하며, 정확한 형식으로 고전물리학의 토대를 이루는 경험구조를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요. 이런 이해에 따르면 세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되는 공간 속의 사물들로, 그리고 규칙에 따라 서로 잇따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하지만 원자물리학에서 우리는 지각을 더 이상 물자체의 모델에 따라 연결시키거나 정돈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러므로 라듐 B 원자 자체 같은 것도 없는 거죠.
(그레테 헤르만)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현상에서 드러나지 않아요. 간접적으로라도 말이죠. 물자체라는 개념은 자연과학과 전체 인식론적 철학에서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일컫는 기능을 할 뿐이에요. 우리의 전 지식은 경험에 의존해 있어요. 사물을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아는 것이 곧 경험이죠. 선험적 지식도 물자체로 나아가지 않아요. 인식의 유일한 기능은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당신이 고전물리학의 의미에서 라듐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객체 또는 대상이라고 칭했던 것을 말하는 거예요. 객체는 의자, 테이블, 별, 원자 등 현상 세계의 일부죠. 원자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요. 우리는 현상으로부터 그것을 유추하니까요. 현상 세계는 서로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어요. 일상적인 지각에서조차, 직접적으로 보는 것과 유추만 하는 것을 서로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당신이 이 의자를 보고 있어요. 뒷면은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눈앞에 보이는 앞면과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뒷면을 가정해요. 즉 자연과학이 객관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지각에 대해서가 아니라 객체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거에요.
(카를 프리드리히) 양자론은 지각을 객관화하는 새로운 방식이에요. 칸트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이죠. 양자론에서 모든 지각은 관찰 상황과 관련돼요. 지각으로부터 경험도 따라와야 하는 경우에는 그 관찰 상황을 명시해야 하지요. 지각의 결과는 더 이상 고전물리학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객관화될 수 없어요. 어떤 실험으로부터 지금 여기에 라듐 B원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때, 그런 인식은 어떤 관찰상황에서는 완전한 거에요. 하지만 다른 관찰상황에서는 더 이상 완전한 것이 아니지요. 서로 다른 두 관찰 상황이 보어가 상보적이라고 말했던 관계에 있을 때, 하나의 관찰 상황에 대해 완전한 지식은 동시에 다른 관찰 상황과 관련해서는 불완전한 지식이 돼요.
칸트의 분석은 사고 능력이 있는 생명체가 주변과 관계를 맺는 곳에서는 늘 옳은 것으로 남아요. 우리는 이런 관계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경험이라고 일컫죠. 하지만 칸트의 아프리오리 역시 나중에 중심적인 위치에서 밀려나서, 인식 과정에 대한 더 포괄적인 분석의 일부가 될 거에요. 이런 자리에서 '각 시대는 자신의 진실을 가지고 있어'라는 문장으로 자연과학적 혹은 철학적 지식을 무마시키는 것은 잘못일 거에요. 하지만 역사적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 구조도 변한다는 사실은 직시해야 해요.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 이해해 나가는 것뿐 아니라, 이해라는 말의 의미를 늘 새롭게 배워나가는 것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요.
11. 언어에 대한 대화(1933)
(닐스 보어) 언어의 의미는 딱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해요. 단어의 의미는 문장 속 언어들의 연관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 달라지지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부수적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자신의 글에서 이런 상황들을 탁월하게 묘사해냈어요. 그는 우리가 듣는 말들이 명료한 의식 속에서는 그 주된 의미가 드러나지만, 의식이 명료하지 못할 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며, 다른 개념과 연결되고, 그 영향이 무의식으로까지 번져간다고 했어요. 일반적인 언어에서도 그러니, 시적 언어에서는 더 그렇지요. 자연과학 언어도 어느 정도는 그래요. 우리는 원자물리학에서 이전에 매우 정확하고 문제가 없어 보였던 개념들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 것인지를 자연을 통해 알게 되었잖아요. 위치와 속도 같은 개념만 해도 말이에요.
약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에서는 단어들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애초부터 포기해요. 반면 자연과학에서는 언젠가 훗날 그 단어들에 명백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내지 환상을 품지요. 아무튼 실증주의자들의 이런 비판은 귀 기울여 들어야 해요. 가령 나는 '삶의 의미'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의미'라는 말은 늘 의미를 문제 삼는 대상과 의도, 표상, 계획과 같은 것과 연관되어 있어요. 하지만 삶,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전체는 의미라는 말과 연관시킬 만한 것이 없어요.
설거지는 언어와 똑같군요. 물도 더럽고 행주도 더럽지만, 결국 이걸로 접시와 컵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느니 말이에요. 언어도 마찬가지에요. 개념이 불명확하고, 논리가 적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만 제한되지요.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자연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동물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특정 신체 능력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발달시켰어요. 생존하기 위해 이런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외적인 조건들이 격변하면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해 버리지요. 인간들만이 특화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어요. 인간은 사고 능력과 언어 능력을 가능케 하는 신경계를 가지고 있고, 그럼으로써 시간적, 공간적으로 동물보다 훨씬 월등한 존재가 되었어요.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는 거예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고, 다른 인간들의 경험을 활용할 수도 있어요. 그로써 인간은 동물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적응능력이 뛰어나게 되지요. 유연성으로 특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고와 언어가 우선적으로 발달함으로써, 즉 지능이 발달함으로써 목적 지향적이고 본능적인 행동 능력은 오히려 위축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많은 면에서 동물보다 신체 능력이 뒤떨어져 있어요. 후각이 예민하지도 않고, 산을 산양처럼 빠르고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도 없어요. 하지만 공간적, 시간적으로 더 커다란 영역을 장악함으로써 이런 결점들을 상쇄할 수 있었어요. 여기서 언어의 발달은 매우 중요했어요. 언어, 그리고 그와 연결된 사고 능력은 다른 신체적 능력과는 달리, 개인 안에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발달하는 능력이니까요. 언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인간들 사이에 펼쳐진 그물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생각, 즉 인식 가능성을 가지고 이런 그물 속에 걸려 있는 것이고요.
과학에서는 되도록 바꾸지 않으려는 자세로, 제한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집중하는 과정에서 내실 있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걸세. 기존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의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자연과학에서는 반쯤 정신 나간 괴짜들만이 기존의 것을 전복시키고자 해. 영구기관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처럼 말이야. 내 개인적인 희망에서 비롯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역사에서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는 혁명은 기존의 것들을 최대한 유지하는 가운데 제한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군.
나 역시 낡은 형식을 고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다만 그 형식에 깃든 내용은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것 역시 물리학과 비교하여 설명해보지. 고전물리학의 공식들은 오래된 경험적 지식들일세. 이것은 늘 옳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시대를 초월하여 옳은 것으로 남을 거야. 양자론은 이런 경험의 보고에 형식적으로만 다른 형태를 부여했을 따름이야. 그러나 물리학의 관점에서 진자운동, 지렛대 원리, 행성 운동과 관련하여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런 현상에서 세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
13. 원자 기술의 가능성과 소립자에 대한 토론(1935~1937)
원자핵은 미니 행성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행성계에서는 중심의 무거운 물체로부터 가장 강력한 힘이 나오고, 중심의 물체가 그 주변을 도는 가벼운 물체들의 궤도를 결정한다. 하지만 원자핵은 동일한 종류의 핵물질로 이루어진 서로 다른 크기의 입자이며, 원자핵을 구성하는 핵물질은 같은 수의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핵물질의 밀도는 모든 원자핵이 대략 같았다. 단 양성자들의 강한 전기적 반발로 인해 무거운 핵에서는 중성자 수가 양성자 수보다 약간 더 많았다. 핵물질을 결합시키는 강한 힘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교환해도 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가정은 확실히 입증되었다.
15. 새로운 시작을 향해(1941~1945)
우리는 당시 포츠담 광장에서 가까운 항공교통부 청사에서 열린 항공학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후베프트 샤르딘이 현대 폭탄이 미치는 생리적 효과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 기압이 높아져서 생길 수 있는 공기색전증으로 인한 사망은 비교적 고통이 없을 거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대 공습경보가 울리는 바람에, 우리는 청사 지하에 있는 방공호로 대피해야 했다. 군용 침대와 짚을 채워 만든 요로 편안하게 설비가 되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격렬한 공습을 경험했다. 폭탄 몇 개가 청사 건물에 떨어졌고, 지붕과 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지하실과 외부 세계를 연결해주는 복도가 다 막혀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지하실 조명은 공습이 시작된 직후 나가버려서, 손전등으로 이따금 비추어 보는 게 고작이었다. 신음하는 여인이 실려와 위생병의 응급처치를 받았다. 처음에는 이야기도 나누고 이따금 웃기도 하던 사람들이 바로 가까이에서 연속적으로 폭탄 소리가 들리자 점점 말이 없어졌다. 분위기는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 압력이 우리가 있는 지하실에서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심한 폭발음이 들린 뒤 갑자기 구석에서 오토 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르딘, 이 망할 놈 같으니라구, 이제 스스로도 자기 이론을 더 이상 믿지 않겠구먼"
지금의 이런 상황은 신들의 황혼의 신화, 즉 독일인들이 항상 빠지곤 하는 '전부 아니면 무' 식의 철학이 초래한 당연한 결과일 따름이에요. 독일 민족을 모든 비참과 위험으로부터 구해내 외세의 압박에서 해방된 더 나은 세계로 인도하는 영웅이자 해방자로서의 지도자, 그러나 운명이 받쳐주지 않으면 단호하게 세계 멸망으로 걸어가는 지도자에 대한 믿음! 이 끔찍한 믿음과 이와 연결된 절대성의 요구는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망쳐놓아요. 이런 믿음은 현실을 도외시한 채 환상을 좇게 하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다른 민족들과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지요. 따라서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요. '현실이 환상을 남김없이 무참하게 파괴하는 마당에 과학은 세계와 세계 속의 우리의 상황을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판단하게 수단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에요. 따라서 난 과학의 경제적인 유익보다는 교육적인 면을 더 생각합니다. 과학을 통해 비판적인 사고력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부테난트) 이성적 사고를 교육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사안이지요. 이런 사고에 다시금 비중을 두는 것은 전쟁 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일 테고요. 원래 지금까지의 전쟁 상황만으로도 독일인들은 현실에 대한 눈을 떴어야 했어요. 지도자에 대한 믿음이 천연자원을 대신하거나, 경제 및 기술 발전을 저절로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을 직시했어야 했어요. 전 세계를 보고, 미국, 영국, 러시아가 통제하는 거대한 영토를 생각하고, 지구상에 독일 민족에게 할당된 지역이 얼마나 작은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기겁해서 지금 감행하는 일로부터 발을 빼야 마땅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어렵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많지만, 민족 전체로서는 꿈속을 헤매며, 환상을 지성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감정을 사고보다 더 심오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므로 과학적인 사고에 다시금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일이 시급해요.
(베르너) 우리 독일인들은 정말로 논리나 자연법칙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종종 일종의 강제로, 마지못해 복종해야 하는 압박으로 여깁니다. 이런 강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이 자유가 허락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환상과 꿈에 몰두하고, 유토피아에 취하는 거에요. 거기서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실현하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절대성은 되풀이되면서 독일인들로 하여금 예술 같은 영역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리도록 고무해왔어요. 하지만 현실에서 이것을 실현하려면 법칙의 강제에 복종해야 해요. 작용하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고, 모든 작용은 사실이나 생각의 법칙적인 연관을 토대로 하니까요.
독일에서는 헤겔과 마르크스, 플랑그와 아인슈타인, 음악에서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처럼 세상을 뒤바꾼 과학적 또는 예술적 업적이 탄생했다면, 그것은 절대성과의 관계 속에서, 시종일관 원칙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가능했어요. 절대성에 대한 추구가 형식, 즉 과학에서는 냉철하고 논리적 사고에, 음악에서는 화성학 법칙과 대위법에 복종할 때 말이죠. 이런 극도의 긴장 속에서만 진정한 힘이 펼쳐질 수 있어요. 절대성을 추구하다가 형식을 파괴하면 그 길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카오스로 이어져요. 나느 이런 카오스를 신들의 황혼이나 세계 멸망과 같은 개념으로 미화할 마음이 없어요.
16. 과학자의 책임(1945~1950)
(베르너) 개개인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자리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고, 거기서 주어진 명령을 수행했던 것뿐이야. 그 이상은 아니야. 실제로 한은 독일에서 우라늄 핵분열 응용과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에만 평화로운 원자 기술에 대한 발언만 했어. 핵분열을 전쟁에 이용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가는 곳마다 만류하고 경고했지. 하지만 미국에서 개발하는 것까지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어.
(카를 프리드리히) 여기서는 발견자와 별명자를 기본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봐요. 발견자는 기본적으로 발견 전까지 그 발견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해요. 발견된 뒤에도 실제적인 활용까지는 길이 멀어서 예측이 불가능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발명자는 특정한 실용적 목표를 염두에 두지요.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걸 확신해야 해요. 그러니 발명자에게는 그에 대한 책임을 부과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발명자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커다란 인간 공동체의 명령으로 행동해요. 전화 발명가는 사회가 빠른 의사소통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총을 발명한 사람도 전투력을 증강시키고자 하는 호전적인 권력의 명령을 좇은 것이었고요. 따라서 개인에게는 책임의 일부만을 지울 수 있을 거에요. 게다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개인도 사회도 그 발명이 훗날 초래할 모든 결과를 조망하지는 못해요. 가령 농산물을 해충에서 보호할 수 있는 화학 성분을 만들어낸 화학자는 그렇게 곤충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 나중에 그 지역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측하지 못해요. 다만 각 개인에게 자신의 목표를 좀 더 커다란 시각에서 봄으로써 작은 집단의 이익을 구하다가 분별없이 커다란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요구 정도는 제기할 수 있을 테지요. 따라서 요청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술과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커다란 연관을 세심하고 양심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17. 실증주의, 형이상학, 종교(1952)
(닐스)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는 해당 분야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테지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정의할 수 없는데 그것은 어떤 분야에 대해 정말로 많이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전문가는 해당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굵직한 실수들 몇 가지를 알고 그것을 피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했지요.
(베르너) 실증주의자들에게 이해는 예측 능력과 동일한 것이에요. 몇 안되는 특정 사건만 예측할 수 있으면, 그 작은 부분만큼만 이해한 것이고, 다양한 많은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으면 넓은 분야들을 이해한 것이라고 보죠. 아주 조금 이해한 것과 거의 모두 이해한 것 사이에는 연속적인 눈금이 있어요. 하지만 예측 가능성과 이해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는 거죠.
(볼프강) 그렇다면 자네는 예측 가능성과 이해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베르너) 응, 내 생각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일 초 뒤에 비행기가 어디에 있게 될지를 확실히 예측할 수 있어. 진행 방향으로 직선을 연장시키면 되니까. 비행기가 이미 커브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커브도 함께 계산하면 되지.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 비행기의 궤도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그 궤도를 이해한 건 아니야. 그 전에 조종사하고 이야기하고 조종사에게서 그가 의도하고 있는 비행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 궤도를 정말로 이해하게 되는 거지.
(볼프강) 아까 보어의 집에서 자네는 비행기의 궤도를 비유로 들었잖아. 나는 그 비유로 무얼 말하려 한 것인지 모르겠어. 자연 속의 무엇이 파일럿의 의도나 임무에 해당한다는 거지?
(베르너) 의도나 임무 같은 말들은 인간의 영역에서 나온 말들이고, 자연과 관련해서는 기껏해야 은유로 볼 수 있어. 하지만 다시금 프톨레아이오스의 천문학과 뉴턴 이후의 행성 운동 이론을 비교해보면 좀 더 명확해질 것 같아. 예측을 진리의 시금석으로 보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나중의 뉴턴 것에 뒤지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뉴턴과 프톨레마이오스를 비교하면, 뉴턴이 천체의 궤도를 더 포괄적이고 올바르게 정리했다고 보지. 뉴턴은 자연의 구성에 바탕이 되는 의도를 기술했다고 볼 수 있어. 현대 물리학의 예를 들어 볼까? 우리가 에너지 내지 전하의 보존 법칙이 보편성을 지니고, 그것들이 물리학의 모든 영역을 초월하여 유효하며, 기본 법칙이 갖는 대칭성을 통해 생겨난다고 말하면, 이 말은 대칭성이 자연 창조의 밑바탕을 이루는 계획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하는 셈이야. 여기서 계획, 창조 같은 말들은 다시금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기껏해야 은유로 볼 수 있어. 그러나 언어는 인간 외적인 개념들을 제공해주지는 않아. 따라서 내가 자연과학의 진리 개념에 대해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베르너) 가치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야. 따라서 이런 질문은 인간에 의해, 인간에 대해 제기되지. 그것은 인생길을 헤쳐 나갈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나침반에 관한 질문이야. 이런 나침반은 여러 종교와 세계관에서 행복, 신의 뜻, 의미 등 아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지. 나침반을 이렇게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인간 집단마다 의식 구조가 많이 다르나는 것을 보여줘. 알다시피 현실은 우리 의식 구조에 의해 좌우돼. 객환화할 수 있는 부분은 현실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 하지만 주관적인 부분이 문제가 될 때에도 중심 질서가 작용하기에, 이런 부분을 형상화하는 것을 우연이나 자의의 작용으로 볼 수는 없어. 물론 개인과 관련된 것이든, 민족과 관련된 거이든, 주관적인 영역에는 많은 혼란이 있을 수 있지. 악령이 지배하며, 행패를 일삼을 수도 있고, 좀 더 자연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심 질서에서 떨어져 나온, 그래서 중심 질서에 맞지 않는 부분 질서가 작용할 수도 있어. 그러나 결국에는 언제나 중심 질서가 관철돼. 고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라고 하는 것 말이야. 우리는 종교의 언어로 이런 질서와 관계를 맺게 되지. 따라서 가치를 묻는다는 것은 분리된 부분 질서들을 통해 생겨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중심 질서의 뜻에 맞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요구라고 할 수 있어.
실용주의는 손을 놀리지 말고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거창하게 세계를 개선할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당면한 일에 힘쓰라고, 그리고 힘이 닿는 한, 작은 영역에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쳤어. 내가 볼 때 이런 부분에서 실용주의는 심지어 많은 종교보다 나은 것 같아. 종교적 가르침들은 수동적인 태도로, 불가피해 보이는 것들에 순응하게끔 하거든. 자신의 활동으로 아직 많은 것을 개선할 수 있는데도 말이야. 커다란 부분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작은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적인 행동과 관련하여 좋은 원칙임에 틀림없어. 과학의 경우에도 커다란 연관을 시야에서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이런 방법으로 과학을 하는 것이 옳을 거야. 뉴턴역학에서도 지엽적인 것을 세심하게 연구하면서 시선은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어.
나는 막스 베버의 명제에 따라 실용주의 윤리는 결국 칼뱅주의에서, 즉 기독교에서 유래한 거라고 봐. 우리가 사는 서구 세계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무엇이 추구할 만한 것이고 무엇을 지양해야 할 것인지를 물으면 늘 기독교의 가치 척도를 발견하게 돼. 이런 종교의 상과 비유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도 말이야. 그러나 언젠가 이런 나침반을 조절하는 자기력이 완전히 사라지면 ㅡ이런 힘은 중심적인 질서로부터만 올수 있는데ㅡ 나치의 강제 수용소나 원자폭탄을 능가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가 돼.
20.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1961~1965)
생물학자들의 토론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날은 현대 다윈 이론, 즉 '우연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주제로 토론이 이루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예로 생물 종의 탄생과 인간 도구의 탄생이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수상 교통수단으로 맨 처음 등장한 것이 노 젓는 배였으며, 이후 호수의 해안은 노 젓는 배들로 북적였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돛으로 바람의 힘을 활용하자는 생각을 해냈고, 그 뒤 돛단배가 노 젓는 배를 제치고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증기선이 모든 바다에서 돛단배와 범선을 몰아내 버렸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미비한 시도의 결과물들은 빠르게 도태된다. 그러므로 다양한 생물종에서 일어나는 선택과정도 이와 비슷하게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연변이는 양자론에서처럼 순전히 우연적으로 일어나지만, 자연선택은 자연이 행한 대부분의 시도돌을 다시금 걸러내고, 주어진 환경에서 입증된 잘 적응한 소수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비유를 생각하면서 나는 앞에서 예로 든 기술 발전 과정이 중요한 저에서 다윈 이론과 모순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즉 다윈 이론에서 우연이 개입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다양한 인간의 발명품들은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와 생각을 통해 탄생한 게 아닌가. 그러면 다윈의 우연의 자리에는 무엇이 올까? 여기서 의도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애초에 인간의 경우에만 의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뿐이다. 박테리아에 다가가는 박테리오파지가 스스로 증식하기 위해 박테리아에 침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까?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유전자도 자신을 변화시키서 환경의 조건을 더 잘 적응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런나 이쯤 되면 의도라는 말은 남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카를 프리드리히) 자연에 대한 모든 생각들은 커다란 원이나 나선형을 그릴 수밖에 없어요. 자연에 대해 생각할 때만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모든 행동방식, 생각과 더불어 우리는 자연의 역사로부터 배출되었어요.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어떤 지점에서든지 시작할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가장 간단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게끔 되어 있어요. 그리고 가장 간단한 것은 양자택일이지요. 예스나 노냐, 존재냐 비존재냐, 선이냐 악이냐. 이런 양자택일이 일상생활에서처럼 생각되는 한, 그로부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는 양자론에서는 양자택일에 예와 아니오라는 대답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상보적인 대답도 있음을 알고 있어요. 예 혹은 아니오에 대한 확률이 규정되고, 예와 아니오 사이에 진술 가치를 갖는 그 어떤 간섭이 확정되지요.
(베르너) 자네는 파울리가 말한 양분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양분으로 보지 않고, 결정적인 자리에 상보성이 들어오는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의 양분은 파울리의 말대로 정말로 악마의 속성일 거야. 그것은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카오스에 이를 뿐이지. 그러나 양자론의 상보성과 함께 등장하는 제3의 가능성은 유용하고, 반복을 통해 실제 세계의 공간에 이르게 돼. 고대 신비주의에서도 3이라는 수는 신적인 원칙과 연결되어 있었어. 굳이 신비주의까지 언급하지 않으려면 헤겔의 삼단논법인 정반합만 생각해도 그래. 여기서 합은 정과 반의 혼합, 정과 반의 절충만은 아니야. 정과 반이 연결되면서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생겨날 때만이 생산적일 수 있어.
절은 세대는 커다란 연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터부시되는 것 같고, 보다 일반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라는 아내의 말에...
(베르너) 난 터부시하는 일이 그리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터부는 어떤 내용 자체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조소나 허튼소리에서 그 내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거든. 괴테는 터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어.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고, 현인들에게만 말하라. 대중은 금방 비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터부에 대해서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게 좋아. 그리고 난 계속해서 커다란 연관들에 대해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과학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라도 말이야. 그렇다면 그런 젊은이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
서로 모순되는 것이 공존하는 세계... 양자역학이 밝혀낸 ‘상보성’...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건가 (부산대 김상욱 교수)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 장자(莊子)는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사라져버린 것을 ‘도(道)’라고 했다. 대립되는 두 개념이 사실 하나의 개념이라는 생각은 동양인들에게 익숙한 철학이다. 음양(陰陽)의 조화라든가, 중용(中庸) 같은 것도 대립하는 개념 사이에서 옳은 쪽을 찾기보다 둘을 조화시키는 동양의 지혜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대립되는 두 명제 가운데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런 이분법은 선악개념에 기초한 기독교에서 친숙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대립물을 하나로 보는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이 발견한 것은 어쩌면 동양의 오래된 지혜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처음에는 ‘이중성(duality)’, 나중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이라는 용어로 공식화시켰다. 상보성의 중요한 예는 하이젠베르크가 찾아낸 ‘불확정성의 원리’다. 이 원리는 물리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제약을 가한다. 이제 물리학자는 우주를 완벽하게 기술하는 전지적(全知的) 위치에서 주관적이고 확률적이며 불확실한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양자역학과 동양철학 사이의 유사성에 흥미를 갖는다. 서양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그 유사성을 자세히 정리했다. 이런 유사성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과학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과학은 실험적 증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생각의 틀을 제공하는 법이다. 독일인 친구 물리학자가 ‘이중성’을 받아들이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렵기는 했어도 큰 거부감은 없었다. 아니 동양인으로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자연법칙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서양철학을 근본부터 뒤집은 과학혁명의 순간을 살펴보기로 하자. 바로 이중성의 발견이다.
■ 이중성
‘당구공’의 대립물(對立物)은 무엇일까? 물리학자의 답은 ‘소리’다. 선문답처럼 들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자’의 대립물이 ‘파동’이라는 뜻이다. 당구공과 같은 입자는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소리와 같은 파동은 무게가 없다. 당구공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소리는 어디 있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만약 당구공이 파동같이 행동한다면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소리가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면 소리의 개수를 하나 둘 셀 수 있다는 말이다. 입자와 파동이 대립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서로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9세기 물리학의 핵심은 전기(電氣)다. 1860년대 전기와 자기를 기술하는 맥스웰 방정식이 완성되고, ‘빛’이 맥스웰 방정식의 수학적 해(解)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의 파동, 즉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전자기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의 탄생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된다. 바로 이 순간 물리학자들은 모순에 부딪힌다.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이 확립된 바로 그때 빛이 입자라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증거는 ‘흑체복사’라는 현상이다. 복사(輻射)란 빛을 내는 것이다. 온도를 가진 모든 물체는 빛을 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깜깜한 방에서는 안 보이는 걸까? 사람은 체온에 해당하는 흑체복사, 즉 적외선에 해당하는 빛을 낸다. 인간의 눈은 적외선을 볼 수 없다. 적외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야시경을 쓰면 깜깜한 방에서도 사람이 보인다. 태양도 빛을 낸다. 섭씨 6000도라는 표면의 온도는 태양의 빛을 흑체복사이론으로 분석해 알아낸 것이다.
흑체복사이론은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제안한 것이다. 이 이론에는 기묘한 가정이 하나 필요했다. 빛의 에너지가 특정한 값의 정수배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돈이라면 빛의 에너지는 반드시 100원, 200원, 300원 등만 가능하다. 120원이나 145원은 안된다. 이런 기묘한 상황을 설명하는 손쉬운 방법은 빛이 100원짜리 동전으로 돼 있다고 하는 거다. 빛이 입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빛은 파동이다! 플랑크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차마 빛이 입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빛이 입자라고 처음으로 용감하게 외친 사람은 당시 특허청 말단 직원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었다.
빛이 입자라는 두 번째 증거는 ‘광전효과’다. 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사실 이 실험은 금속에 전자를 충돌시켜 빛이 나오는 실험을 거꾸로 한 것이다. 당시 금속에 전자를 충돌시켜 발생한 엑스(X)선이 화제였다. 엑스선을 사람에게 쬐면 몸속의 뼈가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엑스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밝혀진다. 빌헬름 뢴트겐은 엑스선 발견의 공로로 1901년 제1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무튼 엑스선 발생과정을 거꾸로 하면 이번엔 전자가 튀어나온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쬐어준 빛과 튀어나온 전자의 에너지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흑체복사 때와 같이 빛의 에너지가 띄엄띄엄하다는 가정을 해야 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빛이 입자라고 용감하게 주장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빛은 파동이니까. 결국 빛이 입자라는 세 번째 증거가 나오자 비로소 물리학자들은 빛의 입자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1920년대 초 아서 콤프턴(192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 빛으로 당구공 실험을 해 빛이 입자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당구공을 서로 충돌시키면 어떻게 행동할지 뉴턴역학으로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 콤프턴은 빛이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이제 물리학자들은 서양과학사의 최대 모순에 빠지게 된다. 파동임에 틀림없는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여기서 ‘이중성’이라는 용어가 탄생한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물리학에 이중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던 1920년대, 예술에서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됐다. 인간의 무의식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표절(Le Plagiat)’을 보면 집 안에 있는 나무 내부에 집 밖 풍경이 그려져 있다.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의 공존은 이 시대의 새로운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
■ 상보성
파동인 줄 알았던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그렇다면 입자인 줄 알았던 ‘것’이 파동의 성질을 가질 수는 없을까? 당시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된다. 닐스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수소 원자를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았지만 모든 물리학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되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어서다. 보어의 이론은 맥스웰 방정식을 무시하는 듯했고, 심지어 전자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서 물리학을 구한 것은 루이 드 브로이(192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였다. 드 브로이는 전자가 파동같이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입자다.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전자빔을 쬐면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당신 몸도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구성된다. 전자가 파동이라면, 당신 몸이 소리로 되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전자의 파동성은 큰 저항 없이 물리학계에 받아들여진다. 이미 빛의 이중성이라는 더러운(?) 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빛과 전자는 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것일까? 이 두 성질은 물리적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무선 통신을 할 때 빛은 파동으로 행동하지만, 광전효과실험에서 빛은 입자로 행동한다. 이 두 실험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둘 중에 하나의 실험을 하면 빛은 입자와 파동,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마치 남자냐고 물으면 남자가 되고 여자냐고 물으면 여자가 되는 귀신과 같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양성자, 중성자 등 물질을 이루는 모든 기본입자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원자도 전자와 같은 이중성을 갖는다. 이중성은 자연의 본질인 것 같다. 여기서는 질문이 존재를 결정한다. 보어는 이중성의 이런 특성을 ‘상보성’이라 불렀다.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멀다. 그리고 그것은 가깝다. 그것은 이 모든 것 속에 있으며 이 모든 것 밖에 있다.’ 상보성은 모든 대립물이 동시에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상보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 정의된 물리적 성질들이다. 상보성은 불교 시인 아슈바고샤가 이야기한 “그러한 것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와 같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로 답이 정해진다. 상보성은 정반합(正反合)의 철학과도 다르다. 상보성은 정(正)과 반(反)이 공존한다고 말할 뿐이다. 둘이 융합해 새로운 합(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만 옳다.
상보성 개념을 제안한 보어는 1937년 중국을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태극문양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양자역학을 이해할 사고의 틀이 서양에는 없었지만, 동양에는 있었던 것이다. 1947년 보어는 물리학에 대한 그의 공로로 덴마크 귀족 작위를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귀족 예복에 태극문양을 새긴 뒤에 ‘CONTRARIA SUNT COMPLEMENTA(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라는 라틴어 문구를 넣었다고 한다.
■ 불확정성
상보성의 대립물 가운데 물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와 운동량이다. 운동량이란 물체의 질량에 속도를 곱한 양이다. 그냥 속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 앞에 있는 스마트폰을 보자. 스마트폰이 보인다면 위치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속도는 어떨까? 당신 손 위에 정지하고 있으니 속도도 아는 거다. 하지만 위치와 속도, 둘을 동시에 정확히 안다면 상보성에 위배된다. 이게 말이 되나? 상보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자나 원자와 같은 기본입자들이다. 이들은 엄청나게 작다. 당신 손톱 위에 1억개의 원자를 일렬로 늘어세울 수 있을 정도다. 상보성에 따르면 이렇게 작은 원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다.
위치와 속도를 모두 정확히 알 수 없다면 물체의 운동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부산에서 출발한 자동차가 시속 100㎞로 1시간 달리면 어디에 있을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속력이 얼마인지 모른다면 1시간 후의 위치를 알 방법은 없다. 불확정성 원리가 옳다면 우리는 원자에 대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거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무지(無知)는 우리의 실험장비나 감각기관의 부정확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상보성, 그러니까 자연의 근본 원리로서의 무지, 본질적인 무지다.
뉴턴의 물리학은 물체의 운동을 완벽하게 기술한다. 우리는 언제 일식이 일어날지, 언제 화성이 지구에 가장 근접할지 알 수 있다. 17세기 이래로 물리학이 승승장구한 이유다. 하지만 원자에 대해서는 결론이 ‘모른다’는 것이라니…. 양자역학이 발견한 물리(物理), 즉 사물의 이치는 결국 불가지론(不可知論)이란 말일까. 아니다. 양자역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과학 이론 가운데 가장 정밀한 결과를 준다. 더구나 20세기의 첨단 과학은 대부분 양자역학의 자식이다.
당신이 본 스마트폰은 여기 그대로 있지만 당신이 보려던 전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부산대 김상욱 교수)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보는 것이 왜 믿는 것일까? 보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스마트폰이 보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빛이 스마트폰에 맞아 튕겨 나온다. 튕겨 나온 빛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 일부가 우리 눈에 도달한다. 수정체를 통과하며 굴절된 빛은 망막에 스마트폰의 상을 맺는다. 망막에 있는 세포는 빛을 감지해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뇌로 이동하면 우리는 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본 것’은 본 ‘것’과 같은 것일까? 우리 뇌에 떠오른 심상은 물체와 같은 모습일까? “뭐 이런 질문이 다 있냐”고 할 독자도 있으리라. 오늘의 주제는 바로 본다는 것과 관련 있다.
■ 본다는 것
과학의 역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지구는 정말 편평한가? 태양이 정말 돌고 있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이나 길이가 무엇인지 묻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론 시간이 무엇인지는 아인슈타인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을 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공을 하늘로 던지며 시곗바늘을 읽고, 공이 돌아와 손에 잡힐 때 시곗바늘을 다시 읽는다. 두 시곗바늘 눈금의 차이가 공의 비행시간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따라가면 운동하는 사람의 시간은 정지한 사람보다 느리게 간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양자역학은 원자를 그 대상으로 한다. 원자는 정말 작다. 앞 문장의 마침표 위에도 100만개의 원자를 늘어세울 수 있을 정도다. 원자를 맨눈으로 볼 수 있을까? 원자는커녕 원자보다 훨씬 큰 바이러스도 보지 못한다. 원자는 원자핵 주위에 전자가 돌고 있는 구조를 갖는다.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간접적으로 알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는 원자 내부에서 어떻게 운동하고 있을까? 양자역학이 원자를 설명하는 이론이라면 바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1925년까지 물리학자들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한다. 당시까지 알려진 물리이론을 총동원해 전자의 운동을 설명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로서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닐스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이론조차 다수 물리학자의 외면을 받는 상황이었다. 사실 외면할 만했다. 전자가 유령처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간이동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했으니 말이다. 보어는 급기야 에너지보존법칙을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한다. 버릴 게 따로 있지. 이제 물리학자들 모두 미치기 직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때 25세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혜성같이 나타난다. 하이젠베르크는 역사를 바꿀 질문을 던진다. 전자를 직접 볼 수 있을까? 직접 본다면 전자가 정말 공처럼 공간을 가로질러 연속적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보일까? 과학의 역사를 보라.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 본 적도 없는, 아니 영원히 볼 수도 없을 전자가 왜 상식대로 행동할 거라 생각할까?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엄청난 도약을 한다. 전자가 공처럼 행동한다는 기본 관념을 내던지고, 오로지 직접 알 수 있는 물리량들만 갖고 이론을 만들어 보자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일까? 원자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 즉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스마트폰 보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스마트폰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 스마트폰에 맞고 튕겨 나온 빛을 보는 것이다. 원자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자에 맞고 튕겨 나온 빛을 보는 것이다.
당시 원자를 설명하는 보어의 이론에 따르면 원자 내에는 불연속적인 ‘상태’들이 존재했다. 지구 주위를 도는 인공위성들의 ‘궤도’를 상태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인공위성의 궤도반지름을 바꾸고 싶으면 엔진을 작동시켜 더 높은 위치나 낮은 위치로 이동하면 된다. 이때 연료만 충분하다면 원하는 아무 궤도반지름이나 갈 수 있다. 하지만 원자 내의 전자는 특별한 반지름을 갖는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이유는 모른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그냥 점프를 해야 한다. 문제는 점프를 하는 동안 궤도 사이를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 그냥 한 궤도에서 사라져서 다른 궤도에 ‘짠’하고 나타나야 한다(역시 이유는 모른다). 당시 물리학자들이 보어의 이론을 싫어한 것도 당연하다.
아무튼 전자가 이렇게 점프를 할 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원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점프할 때 드나드는 빛뿐이다. 빛이 나오기 위해서는 점프를 ‘시작하는 상태’와 ‘끝나는 상태’가 반드시 정해져야 한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려면 입구와 출구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물리에서는 입구와 출구 모두 에너지로 기술된다. 즉 시작 에너지와 끝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로 방향을 시작 에너지, 세로 방향을 끝 에너지 순서로 이들을 늘어세우면 2차원 격자 모양의 배열이 얻어지는데 이런 숫자들의 배열을 수학에서는 ‘행렬’이라 부른다.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선언한다. “원자는 행렬이다.”
만약 여기서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면, 당신은 물리학자거나 정신병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라고 했다는데, 하이젠베르크는 “만물은 수의 배열”이라고 하는 셈이다. ‘하타고라스’라 불러야 할라나.
아무튼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보고 기뻐한 물리학자는 당시 거의 없었을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행렬역학은 원자의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축복은 많지 않았지만 드디어 양자역학이 탄생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에서 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는 파동역학을 내놓았다. 지난 호에서 다뤘던 전자의 이중성, 그러니까 전자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양자이론이다. 파동역학은 전자의 파동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담고 있다. 이 방정식을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생겼다.
 당신이 본 스마트폰은 여기 그대로 있지만 당신이 보려던 전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http://img.khan.co.kr/news/2017/09/07/l_2017090801000787700080121.jpg)
“어차피 이해도 못할 수식을 왜 보여주느냐”며 역정을 내실 ‘수포자’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주위를 둘러보시라. 수많은 자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동차가 움직이고, 심장이 뛰고, 스마트폰이 울리고, 밥을 먹으면 힘이 나는 등. 이런 모든 자연현상의 99%를 설명하는 방정식이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고, 이 방정식은 원자를 설명하니까.
행렬역학과 파동역학.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이 둘이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방법은 동일한 예측을 내놓았다. 놀라운 일이지만 수학적으로 두 이론이 동일한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 모두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해피엔딩일까. 그렇지 않다. 이제 이해하는 일이 남았다. 우리가 앞에서 얻은 결과의 물리적 의미는 무엇일까? 행렬역학은 불연속적인 점프를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어떻게 두 상태 사이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을까? 파동역학은 전자가 파동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전자는 질량을 가진 입자다. 전자의 파동방정식은 전자가 입자라는 명백한 사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더구나 파동은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소리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입자는 한 순간 한 장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전자가 파동이라면 동시에 여기저기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자는 유령인가?
양자역학의 모든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바로 ‘본다는 것’에 있다. 측정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빛이 스마트폰에 맞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보어의 상보성에 따르면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다. 빛이 당구공 같은 입자라면 맞을 때 아파야 한다. 스마트폰에 빛이 맞고 튕겨 나올 때 스마트폰이 그 충격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건 말도 안된다. 동의한다. 스마트폰은 크니까. 하지만 전자와 같이 무지무지 작은 녀석은 어떨까? 실제 전자는 빛과의 충돌로 휘청거린다. 원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자에 맞아 튕겨 나온 빛을 보고 알아낸 위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전자는 이미 그 장소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느끼고 알 수 있는 현상의 세계 바깥에 모든 사물의 근원이자 본질인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자에 빛이 닿을 때마다 움직인다면 우리는 전자의 현재 위치를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자는 어느 위치엔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바로 이 생각이 이데아 같은 것을 가정하는 거다. 결코 알 수 없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전자의 위치 말이다. 결코 알 수 없는데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 아닌가? 하이젠베르크는 자전적 에세이 <부분과 전체>에서 어린 시절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플라톤과 결별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즉 측정이 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면 전자의 정확한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측정의 부정확성이나 오차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누구도 전자에 교란을 주지 않고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물리가 아니다.
결국 원자의 세상에서 우리는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완벽히 알아낼 수 없다. 현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면 나중의 정확한 위치를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무엇을 예측하는가?
전자는 파동이기도 하다. 소리처럼 여기저기 있을 수 있다. 당신이 하는 말을 옆 건물에서 들을 수는 없다. 여기저기 있다고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란 말이다. 소리는 파동방정식을 따라 공간에 퍼져나간다. 전자의 파동도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라 공간에 퍼져간다. 전자가 어디 있는지 측정을 하면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므로(이중성) 분명 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전자가 측정 이후에도 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측정이 전자를 교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자가 입자로 되는 동안 전자의 파동은 어디 갔을까?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때마다 전자는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결국 전자의 파동은 전자가 여기저기서 발견될 확률을 의미한다.
전자가 특정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일상 용어로서의 확률은 불확실하다는 느낌을 강조하지만, 양자역학의 확률은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결정되는 실체와 비슷하다. 측정할 때마다 전자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과를 모아보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예측하는 확률분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뜻이다. 주사위 던지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매번 무작위로 숫자가 나오지만 모아보면 각 면이 나올 확률은 정확히 6분의 1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자역학은 완전히 모른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이 아니다.
이쯤에서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으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보어는 말했다. 리처드 파인먼(196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니 너무 좌절하지 마시라. 아무튼 이로써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은 모두 이야기했다.
오르한 파묵(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구절이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도 않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지 않은 것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았다고 믿는 것을 그린다. 결국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