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by 밀턴 프리드먼 & 안나 J. 슈워츠
The Great Contraction 1929-1933
옮긴이의 말
만약 지질학을 알고 싶다면 지질을 연구하시오. 경제학을 이해하고 싶다면 미국과 세계 경제 전체를 덮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재앙, 대공황을 연구하시오. 대공황이 제기한 이슈와 교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Ben S, Berbanke. wall Street Journal 2005, Dec. 7.
미국의 실물 생산이 1929년 8월 정점 이후 감소하기 시작했고 10월에는 주가가 폭락했으며 1930년 10월 은행위기가 터졌다. 그리고 1931년 5월에는 오스트리아 최대은행 크레디트안슐탈트가 파산하면서 세계경제는 결국 장기간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이 책에서 연방준비제도의 잘못된 긴축통화정책이 대공황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1930년 10~12월의 은행위기는 특히 합중국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민간이 은행예금 대신 안전자산인 현금을 선호하도록 충격을 가했다. 동시에 은행들의 자금관리방식도 위험회피적, 안전 우선주의적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은행의 신용창조기능이 크게 감퇴했다. 통화승수가 급락한 것이다. 그럴 때는 연방준비제도가 적극적인 공개시장정책을 써서 본원통화 공급을 늘려 통화량 급감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진성어음주의와 금본위제 유지라는 낡은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통화정책은 1932년 4~8월의 예외는 있었지만 1933년 봄 전국 은행 휴무기간까지 긴축기조였다. 이는 초기에는 주식시장 과열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고, 1931년 9월 영국이 금본위제를 이탈하고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한 후에는 미국이 금본위제 고수에 더욱 집착했기 때문이다. 진성어음주의는 미국이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이후까지도 신봉되었다. 미국의 통화긴축은 미국 내 경기침체를 다른 나라들보다 심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공황 파급에도 책임이 있다. 통화요인을 강조한 프리드먼과 슈워츠의 1930년대 대공황 설명은 <미국화폐사, 1867~1960년>이 출간된 1960년대 초반 당시 지배적이던 기존 해석과 여러 측면에서 대비되었다. 당시 대공황에 대한 이해는 과소소비, 과잉생산, 유동성함정, 재정정책의 효과 등 기존 경제이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책 출간을 계기로 비로소 차원이 달라졌다. 특히 이후 대공황 연구가 은행위기 같은 통화 및 금융 부문의 영향에 주목하게 된 데이는 이 책의 영향이 크다.
저자들의 대공황 설명이 실증적으로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다. 특히 1939년 은행위기를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이 논의에 따르면 통화공급 감소는 금리 상승을 수반했을 텐데 실제로 금리 상승은 관측되지 않으며, 명목통화량이 감소했지만 물가 하락으로 인해 실질 통화량은 감소하지 않았다. 적어도 1913년 여름까지는 통화요인의 설명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목금리가 하락했다 해도 실질금리는 오히려 상승했을 수도 있어, 이것은 물가 하락(디플레이션) 예상 문제로 귀결된다. 물가 하락에 대한 기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이 어느 시점인가를 둘러싼 논란이 있기는 하나,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제기한 통화요인의 설명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1929년~1933년 대공황 기간의 초기 침체를 어떤 요인이 촉발했는가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에 1930년 말 은행위기 이전 기간에 통화긴축이 공황을 직접 촉발시켰다는 문구는 없다. 저자들은 통화량 감소가 주기적인 경기침체를 사상 유례없는 재앙적 대공황으로 심화시킨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따른 일련의 은행위기가 대공황의 전개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통화정책이 어떤 역할을 해야 했는지의 문제에 주목한다. 이 책 이전이나 이후에 나온 연구결과를 감안하면, 물가 하락이 예견되지 않았고, 따라서 실질금리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더라도 채무의 실질 부담을 확대시켜 자산가격 하락과 지출 감소를 낳았으며 다시 이로 인해 은행위기가 유발되는 또 다른 효과(부채디플레이션)가 발생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시기 물가 하락은 예상된 만큼은 실질금리 상승에 반영되었고 또한 예상되지 않은 만큼은 부채디플레이션을 야기함으로써 공황이 심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는 중유럽의 은행시스템 붕괴가 대공황 발발의 신호탄이었다. 이 위기는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 보덴크레디트안슈탈트가 1929년 파산하고 다시 이를 합병한 구제은행 크레디트안슈탈트가 1931년에 파산함으로써 현실화되었다. 예금인출쇄도와 오스트리아 쉴링에 대한 공격이 밀어닥쳤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금본위제를 고수하려다 준비금을 순식간에 소진하고 외환통제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도 금융위기가 터졌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비효율적 재정 운영이 문제가 되어 외환위기와 은행위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쌍둥이 위기가 발생했다. 파산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던 다나트은행이 파산했는데 제국은행은 최종대부자 역할을 할 능력이 없었다. 독일은 결국 1931년 금본위제를 사실상 포기했고 자국 내 외국인 자산에 대한 동결 조치를 내렸다. 다른 나라에서도 외국인 자산 인출을 제한하는 조치가 잇달았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금융위기의 파급효과는 컸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 루마니아를 포함한 여러 유럽 나라가 예금인출쇄도와 외환 압박으로 심각한 고통을 겼었다. 유럽의 금융위기는 영국 파운드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다. 1931년 9월 영국이 할 수 없이 금본위제를 이탈했다.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1931년 9~10월에 은행위기가 발생했다. 이 1931년의 은행위기는 대공황시기에 미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전국적 은행위기였으며 처음으로 연방준비제도의 보유 금이 해외로 대량 유출되는 사태를 빚었다. 전 세계가 극도의 불황에 허덕이던 가장 심각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연방준비제도는 금본위제를 고수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했다. 1931년 가을의 이 통화긴축은 공황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더욱 심화시킨 주 요인이 되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1933년 2~3월 은행위기는 결국 전국 은행 휴무 조치로 이어지면서 금융공황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당시 진성어음주의와 같은 낡은 인식에 사로잡힌 연방준비제도의 소극적 자세를 비판했다. 적극적 공개시장 매입으로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통화량의 급감을 막아야 한다는 정책 처방을 제시했다.
2007~2008년 전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는 연구자뿐 아니라 정책입안자, 금융시장참여자, 일반이 모두에게 대공황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는 주요 선진국 경제 대부분이 연루된 점에서 실로 1930년대 금융위기와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와 1930녀내 위기는 그 배경부터가 다르다. 1930년대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금본위제에 복귀한 만흥ㄴ 나라가 긴축재정을 쓰고 이에 은행위기 같은 금융시스템 문제가 수반되면서 발생했다. 전후 생산요소를 평시체제로 복귀시키는 문제, 임금 및 물가 유연성의 하락, 국경 변화에 따른 기존 분업질서의 단절, 연합국 간 대부체계의 정지, 패전국에 부과된 배상금 문제, 초인플레이션에 따른 중산층 저축의 소멸 등이 그 구조적 배경이다.
반면 2008년 금융위기의 구조적 배경은 글로벌 무역 불균형, 세계화 진행에 따라 성장하는 쪽이 더 빨리 성장한 결과로서 빚어진 국내 및 국제 소득불평등 심화, 유럽 연합의 지리적 확장과 구사회주의권 체제 전환상의 어려움 등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불안정이 국제경제에 전반적으로 불확실성을 증폭시킨 가운데, 부동산 버블의 생성과 소멸 과정에서 규제받지 않은 그림자은행체계(shadow banking system)가 붕괴하면서 그 파장이 실물부문에까지 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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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933년의 대공황은 우리가 다루는 근 1세기만이 아니라 아마 미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심각한 침체 기간일 것이다. 미국의 국민순생산은 경상가격 기준으로 절만 이상, 불변가격 기준으로는 1/3이상 줄었다. 내재물가지수는 1/4이상, 월별 도매물가는 1/3이상 떨어졌다. 대공황 말고는, 침체에 선행하여 그토록 오랜 기간 통화량이 증가하지 못한 사례가 없었다. 1929년 8월 경기 정점부터 1933년 3월의 저점에 이르는 동안 통화량은 1/3이상 줄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1/5이상의 상업은행들이 재무적 곤경으로 영업을 중단했다. 여기에 자발적인 청산, 합병 등이 더해져 전체 상업은행 수는 1/3이상 감소했다. 은행 휴무가 1933년 초 여러 주에서 처음 시행되고 3월 6일 월요일부터 3월 13일까지 전국에 확대되면서 공황은 일단락되었다.
대공황 기간 중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연이은 은행 도산이야말로 제1순위의 문제다. 은행 도산에 관해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한 세 가지 의문사항이 있다. 왜 은행 도산이 중요했는가? 은행 도산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은행 도산에 대한 연방준비제도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은행 도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 첫째, 은행 도산은 그 소유주와 예금주 모두에게 자본손실을 야기했다. 둘째, 연방준비제도 정책이 일정한 조건하에서 은행 도산은 급격한 통화량 감소를 야기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총 부에 대한 비율로 따지자면 은행 도산 때문에 발생한 손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측면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1929년~1933년에 통화량은 1/3 이상 감소했다. 상업은행 예금은 42% 이상 감소했는데 절대액수로 이는 180억 달러가 넘었다. 은행 도산이야말로 통화량 급감을 야기한 메커니즘이었기 때문이다. 은행 도산은 일차적으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은행 도산이 간접적으로 미친 영향 때문에 중요했다. 만약 은행 도산이 급격한 통화량 감소를 유발하지 않으면서 정확히 같은 규모로 발생했더라면 주목은 받았겠지만 결코 결정적인 사건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은행 도산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통화량이 같은 규모로 급감했따면, 공황은 적어도 같은 정로로 심각했을 것이며 어쩌면 더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적해온 이 같은 과정의 가장 극단적인 예를 영국이 금본위제를 이탈한 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정부채권 가격이 10%, 우량 회사채 가격이 20% 하락한 것은 1920년대 신용이 질적으로 저하했다거나, 그 용어의 어떤 의미상으로든 부실한 은행 경영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가격 하락은 은행이 예금주에게 현금을 지급하기 위해 그 몇 배에 달하는 크기로 자산을 줄여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채권을 투매하면서 발생한 불가피한 영향때문이었다.
연방준비제도가 은행 도산에 관심을 보이는 데 그렇게 뒤늦고, 그렇게 소극적인 대으을 한 주된 이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은행 도산, 뱅크런, 예금 감소, 채권시장 취약성 등의 연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데 있었다. 뉴욕연방중비은행의 실무진은 이 연결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연방준비제도 내에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방준비은행 총재들 중 대부분이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회원,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의 다른 행정 관련 임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은행 도산을 부실 경영이나 부실한 영업 관행의 유감스러운 결과로, 아니면 투기광풍이 지난 다음의 필연적인 반작용으로 생각했지 좀처럼 원인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연방준비제도가 더 일찍 은행 도산 문제에 관심을 키우고 또 관심이 커졌을 때 더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네 가지 부가적인 상황 요인이 있다. (1) 연방준비제도 임원들은 비회원은행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감이 없었다. 1921~1929년, 그리고 1930년의 처음 10개월간 도산한 은행 대부분은 비회원이었고, 문제된 예금 가운데 비회원은행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2) 당시 도산은 소규모 은행들에 집중되었는데 연방준비제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 소규모 은행들의 존재를 유감스러워하던 대도시 은행가들이었기 때문에 소규모 은행들의 소멸은 어쩌면 안일하게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다. (3) 도산 건수가 급격히 증가한 1930년 11월과 12월에도 80% 이상은 비회원은행들이었다. (4)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1930년 말에 도산한 대형 은행들에 대해 많은 연방준비제도 임원들은 경영상의 문제에 따른 불행한 경우로 간주했고 이에 따라 중앙은행이 행동을 고치기 쉽지 않았다.
1929년 서방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로 다른 통화 간 환율을 고정시킨 고정환율제도로 복귀했다. 이 통화제도는 금환본위제도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여러 나라가 통화 준비금을 금 자체로 보유하기보다는 고정된 가격으로 금태환이 가능한 외환 형태로, 특히 스털링과 달러로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 나라들에서 공식적인 외환당국, 통상 중앙은행들은 환율을 종종 자국통화 대비 고정된 비율로 금을 매매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고정시키기보다는, 다른 통화 대비 고정된 비율로 자국통화를 매매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고정시켰다.
고전적 금본위제 같이 금환본위제 역시 고정환율제도였다. 이는 또한 서로 다른 나라의 물가수준과 소득수준이 긴밀히 연결되었음을 뜻한다. 각 나라는 국제수지상의 균형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동해야 했다. 하지만 금환본위제의 적용은 국가 간 조정의 여지가 더 줄어드는 것을 뜻했다. 예금/준비금 비율 상승이 국내 통화시스템을 더 취약하게 만드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금환본위제는 국제금융시스템을 교란요인에 대해 취약하게 만들었다. 금환본위제는 국제적인 본원통화(이 경우는 금)에 대한 청구권 크기를 실제 가용 본원통화의 크기에 비해 증사시켰기 때문이다.고정환율로 맞물린 국제적 연결망은 1929년 이후 소득과 물가 하락을 여지없이 전 세계적인 것으로 되게 했다. 1920년에는 고정환율이 그보다 덜 경직적이었는데도 당시 불황을 전 세게적인 것으로 만든 바 있다. 어떤 나라에서 큰 폭의 물가 하락을 수반하는 대규모 불황이 발달하면 이 불황이 다른 나라로 전달되고 확산되도록 강제하는 연결망이 작용했다. 연결망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서 미세한 것 말고는 조정되지 않은 움직임을 허용치 않았다.
1920~1921년 불황이 주로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최초 단계는 1920년 1월 할인율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이었다. 이는 실은 이에 앞선 금 유출에 따른 귀결이었다. 한편 금 유출은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것이었다. 할인율이 상승하자 5월 들어 금 이동 양상이 뒤바뀌었다. 두 번째 단계는 1920년 6월 할인율이 연방준비체제도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높은 수준으로 상승한 것이다. 계획적으로 선택된 이 정책은 금 유입이 이미 시작된 상태였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6월의 할인율 인상은 대규모 금 유입으로 이어졌다. 이는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을 본받아 금 아끼기에 나서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1929년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최초의 결정적 사건인 주식시장 붕괴가 미국에서 발생했다. 1930년 후반에 빠른 통화량 감소가 시작되게 한 일련의 상황 전개 역시 그 기원은 주로 국내에 있었다. 국제적 영향은 심각했고 급속히 파급되었다. 이는 금환본위제로 인해 국제금융시스템이 교란요인에 더 취약해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이 금본위제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미국은 금 유입으로 통화량이 확대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은 금 유입을 불태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더 나아갔다. 미국의 통화량은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금 스톡이 증가하면 통화량이 줄어드는 식이었다.
그 영향은 먼저 가장 적은 양의 금준비로 금본위제에 복귀한 나라들, 그리고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루마니아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금융구조가 가장 심각하게 손상된 나라들에서 격심했다. 이 나라들의 금융시스템을 떠받치기 위해 국제적인 대부가 조성되었는데 연방준비제도도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미국의 디플레이션으로부터 초래되어 이 나라들에 미친 기본적인 압력이 완화되지 않았고, 혹은 이 나라들을 미 달러화에 묶어놓는 고정환율의 고리가 절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도움은 미봉책이었다.
우리 역사상의 모든 은행위기에 대해 그 상세한 내막을 보다 보면 책임감과 리더십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뛰어난 인물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오직 그런 리더십으로만 해결 가능한 위기들에 취약했던 것이먀말로 당시 금융시스템의 한 가지 결함이었다. 물론 뉴욕연방준비은행에서 기타 연방준비은행들로의 권력 이동이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약점보다도 그런 금융시스템의 존재 자체가 궁극적으로 이 시기 금융 붕괴를 더 잘 설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시스템 때문에 그러한 여건들이 그토록 광범위한 파장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왕에 금융시스템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치고, 권력 이동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약점, 이 요인들은 유동성위기를 초기에 제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크게 낮춰버렸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적극적인 지적 리더십을 갖지 못하고, 금융계 전반적으로나 독립적으로 책임을 질 의사나 능력이 없는 연방준비은행 총재들 사이에서 올바른 정책에 대한 공감대도 없었기 때문에, 정책 표류와 우유부단만 난무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파급효과는 더욱 누적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대해서 그렇듯이 자기자신에게도 실패 원인을 판단 부족보다는 권한 부족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법이다. 우리는 1919~1921년 기간 정책의 비판에 연방준비제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통해 이미 이런 경향을 목도한 바 있다. 초기 단계에서는 경제가 자동 정화될 것으로 희망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위기와 파국이 연방준비제도의 통제범위 밖에서 전개되는, 민간 경제에 내재하는 어떤 불가피한 힘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점점 더 우세하게 되었다. 연방준비제도는 1930년 가을 첫 번째 유동성위기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자 다음 번 유동성위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훨씬 더 소극적 태도로 대처했다. 연방준비제도가 1932년 초에 실은 훨씬 일찍 이루어졌어야 하는 대규모 증권 매입을 실행에 옮기면서 일시적으로 입장을 변경한 것은 단지 의회의 압력이 너무 거셌기 때문이다. 매입이 극적인 개선을 즉각 가져오지 않자 연방준비제도는 기존의 수동성으로 즉시 퇴보했다.
이 시기의 금융붕괴가 뉴욕연방준비은행에서 다른 연방준비은행들로의 권력이동 그리고 명목상 권한을 가진 인물의 개인적 배경이나 특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설명은 무리한 강변으로 보일 수도 있다. 거대한 사건에는 거대한 근원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은 하나의 건전한 일반 원칙이다. 따라서 1929~1933년에 미국에서 벌어진 금융 대참사 같은 중요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연히 당시 권력을 가진 특정 개인이나 공식 당국의 특성들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연쇄작용이라든가 누적적인 파급효과 같은 것이 있어서 때로는 작은 사건이 거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분지불준비제도와 단점은행체제하에서 유동성위기는 정확히 그와 같은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울러 경제적 붕괴는 종종 누적적인 과정으로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어떤 임계치를 넘어서면 일정 기간 그 영향이 확산되면서 자체 힘으로 스스로 강화되다가 더욱 강렬한 붕괴의 과정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산사태가 시작되려는 상황에서 돌덩어리를 멈추게 하는 데는 큰 힘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이를 막지 않아 발생하는 산사태 자체는 큰 규모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