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Ecomomics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by 로버트 고든

hoyony 2017. 8. 21. 10:25

The Rise and Fall of American Growth by Robert Gordon 


로버트 고든
생각의 힘
2017.07.03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경제혁명 100년을 회고한 인공지능 시대의 전망



이 책은 각 장마다 저자가 요약한 <결론>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제1장.  들어가는 말 : 성장의 오르막과 내리막특별한 세기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 혁명의 세기는 고통스러운 육체노동, 고단한 가사노동, 암울함, 고립, 조기 사망 등 끊임없는 일상의 노역에서 가정을 해방시킨, 정치가 아닌 경제의 시대였다. 불과 100년 뒤 미국인들의 일상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바뀌었다. 힘으로 하는 옥외작업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작업으로 대체되었고, 집안일을 가전제품이 대신 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어둠은 전기가 들어오며 물러났고, 고립은 수월한 여행과 거실로 세계를 들여오는 컬러 TV 영상으로 말끔히 사라졌다. 무엇보다 신생아들의 기대수명은 45세가 아닌 72세로 늘어났다. 1870년부터 1970년까지 일어난 경제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특이한 것으로, 대부분의 업적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1970년 이후의 경제성장은 현란하면서 동시에 실망스러웠다. 이런 역설은 1970년 이후로 발전의 방향이 엔터테인먼트와 통신 그리고 정보의 수집과 처리에 관련된 인간 활동의 좁은 영역으로 제한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결된다. 음식, 의복, 거주, 교통, 건강, 집 안팎의 근로 조건 등 인간이 관심을 갖는 나머지 부분의 발전은 1970년 이후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속도가 늦춰졌다. 혁신과 기술진보의 속도를 가장 잘 측정할 수 있는 척도는 총요소생산성TFP이다. TFP는 노동과 자본 투입량에 비해 생산량이 얼마나 빨리 늘어나는지 측정하는 척도다 1970년 이후로 TFP는 1920년부터 1970년까지 이룩한 속도의 3분의 1 정도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이런 역풍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1970년 이후로 미국의 성장 기제가 만들어낸 결실의 상당 부분을 소득분배의 상위층으로 계속 몰아주었던 불평등의 심화다.

남북전쟁 이후 이어진 발명의 홍수는 생활방식을 완전히 변형시켜, 사람들의 관심과 열정을 지상으로부터 치솟는 고층건물과 비행기로 옮겨놓았다. 성냥을 긋는 것 대신 스위치 하나를 딸깍 켜서 불을 밝힐 수 있게 된 이후로, 빛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엘레베이터로 인해 건물이 옆으로 길어지는 것뿐 아니라 위로도 올라갈 수 있게 된 이후로, 토지 용도는 성격 자체가 바뀌었고 도시 밀도는 한층 더 촘촘해졌다. 작은 전기 기구들이 바닥에 장착되거나 손에 쥐어지면서 가죽이나 고무벨트로 동력을 전달하던 거대하고 무거운 증기보일러가 퇴출되었을 때, 인간의 노등을 기계로 대신할 수 있는 범위는 전례없이 확대되었다. 도시 내 운송의 일차적 수단이 말에서 자동차로 바뀌면서, 사회는 더 이상 말을 먹일 사료를 만들어내기 위해 농지의 4분의1을 따로 떼어놓을 필요가 없었고 말똥을 치우기 위해 많은 노동인구를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이 모든 위대한 발명 중에서도 특히 운송은 1830년대 소박한 최초의 철도가 역마차를 대신한 이후 1958년 보잉 707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기까지, 한 세기 남짓한 기간에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19세기 후반에 각 가정은 수입의 절반을 식량을 구입하는 데 썼다. 하지만 이 특별한 세기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식량 공급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존 랜디스 메이슨이 1859년에 발명한 메이슨 자mason jar 덕분에 사람들은 음식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통조림 고기는 남북전쟁 시기 북군의 식량이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켈로그의 콘플레이크부터 보든의 연유, 젤오에 이르기까지 유명 가공식품들이 줄줄이 미국 가정을 파고들었다. 근대의 마직막 단계에서 나온 식품의 냉동 보관법은 1916년에 클래런스 버즈아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냉장고가 실용화되기까지는 냉동실 온도를 0도로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이 확보되는 195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1870년에 신발과 남자 옷은 가게에서 샀지만 여자 옷은 대부분 집에서 엄마나 딸이 만들었다. 1920년대 도시의 여성들은 대형 유통매장, 즉 대도시 백화점에서 옷을 구입했고 시골 사람들은 우편주문 카탈로그로 구입했지만 1870년에는 백화점도 우편주문 카탈로그도 없었다.

늘어난 기대수명과 0에 가까운 유아사망률은 의학과 공중위생 분야에서 특별한 세기동안 이룩한 진보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양적지표다. 공공급수 시설은 주부들의 일상에 혁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수인성 질병으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해주었다. 19세기 말에 개발된 마취법은 소름끼치는 수술의 통증을 말끔히 해소해주었고, 살균 수술법은 불결했던 19세기 병원의 문제를 크게 개선했다. 엑스레이와 항생제와 근대적 항암치료법 역시 이 특별한 세기에 발명되고 시행된 의학 발전의 결과물이다. 

1880년에는 단 한 집도 전기가 연결된 곳이 없었지만 1940년에는 미국 도시의 거의 모든 가정에 전기가 들어갔다. 역시 같은 시간 간격으로 1940년에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는 상수도와 오물을 처리하는 하수도를 갖춘 도시의 가정은 94%에 달했다. 1940년의 도시 가정의 80% 이상이 실내 수세식 변기를 구입했고, 73%는 난방과 취사를 위한 가스를 이용했으며, 58%는 중앙난방을 했고, 56%는 전기냉장고를 보유했다. 간단히 말해 1870년의 주택은 제각기 따로 존재했지만 1940년의 주택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었고, 대부분은 전기, 가스, 전화, 상수도, 하수도 등 다섯가지의 연결 고리를 갖게 되었다.

1870년에는 지주이든 노동자든 남성의 절반 이상은 농촌에서 일했다. 일하는 시간은 길고 힘겨웠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추웠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동의 결실을 좌우하는 것은 가뭄과 홍수와 병충해였다. 도시 노동자 계급은 매주 60시간, 즉 토요일을 포함하여 하루 10시간을 일해야 했다. 10대 소년의 절반 이상이 노동에 종사했고, 남성 가장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거나 죽을 때까지 일했다. 그러나 1970년에 노동시간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바뀌어 한 세기 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타임블록이 도입되고 토요일과 일요일의 주말은 물론 은퇴라는 개념까지 생겼다.


1970년대 이후 : 협소해진 성장의 영역과 줄어드는 성과

1870년부터 1970년까지로 특별한 세기를 한정하는 이유는 1970년 이후부터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기술적 진보가 피로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1970년부터 이루어진 혁신의 속도는 특별한 세기의 발명이 주었던 자극만큼 넓지도 깊지도 않았다. 둘째, 1970년 이후에 심화된 불평등은 혁신의 결실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즉 소득분포의 성장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번창했지만, 중간이나 아래쪽에 있는 미국 사람들에게 가는 몫은 계속 줄어들었다. 

특별한 세기가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전기와 관려된 것을 비롯하여 내연기관, 신체적 건강, 근로조건 그리고 가정의 네트워킹 등 변화의 크기와 분야가 대단하고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 이후에도 발전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엔터테인먼트, 통신, 정보기술 등 좁은 분야에 집중된 발전이었다. 변화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이었다. 예를 들어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 나타난 TV는 대량 보급된 만큼이나 영화관을 찾는 발길을 뜸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영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는 TV프로그램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특히 수백 개의 채널 시대가 열린 이후로 영화와 TV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TV는 라디어도 몰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TV는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는 가구였던 라디오를 작고 휴대할 수 있는 기기로 바꾸어 놓았다. 특히 차 안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TV가 흉내낼 수 없는 장점이었다. 그래도 TV를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TV는 크고 평평하고 고화질 컬러 스크린이 일반화되면서 더 좋아지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통신은 1876년에 발명되어 벨의 독점이 무너진 1983년까지 100년이 넘는 기단동안 지상통신선을 이용한 전화가 지배했다. 하지만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유선전화를 없애는 가구 수가 크게 늘어났다. 정보통신은 그 어느 때보다 1970년 이후로 훨씬 빠르게 발전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메인프레임에서 1980년대의 퍼스널컴퓨터로 그리고 1990년대의 인터넷과 연결된 PC에 이어 최근의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의 이행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빠른 변화를 보여주었지만, 이것 역시 인간 경험의 제한적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변화였다. TV와 오디오와 휴대폰 등 전기를 이용하는 모든 엔터테인먼트, 통신, 정보기술에 들이는 지출은 사업체와 가구를 다 합쳐도 2014년 현재 국내 총생산의 7%를 넘지 못한다.

엔터테인먼트, 통신, 정보기술 이외의 영역은 1970년 이후로 그 발전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냉동식품이 출현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식품을 구하고 보관하는 방식의 변화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소수민족의 전통음식이나 제철이 아닌 음식과 유기농 제품은 특히 그랬다. 의복은 스타일과 다양해진 원산지를 제외하면 눈에 띌 만한 변화가 없었던 반면, 의류 수입은 미국 국내의 의류산업을 거의 초토화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1970년에 주방은 크고 작은 가전제품으로 채워졌다. 특히 전자레인지는 1970년 이후로 사람들의 주방 살림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15년의 자동차는 1970년에 비해 훨씬 편하고 안전해졌지만, 사람과 화물을 나르는 기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1970년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런가 하면 항공 여행은 더 엄격하고 길어진 보안 절차로 인해 출발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승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등 1970년보다 크게 불편해졌다. 

1970년 이후의 의학 역시 1940년부터 1970년까지 이룩한 눈부신 성장과 비교할 때 그 발전속도가 크게 떨어졌다. 1940년부터 1970년까지 기간에는 항생제 발명, 관상동맥 질환의 예방과 치료법의 개발 그리고 지금도 암에 대한 표준 치료법으로 사용되는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의 발견 등 많은 획기적인 업적이 뒤따랐다. 


생활수준과 측정

이 책은 1인당 실질 GDP가 특정 국가, 특히 특별한 세기의 미국에 대한 생활수준의 향상을 크게 저평가하고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해 보여준다. 첫째 GDP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삶의 질을 여러 차원에서 놓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GDP라는 개념의 결함이라기보다는 GDP를 다루는 설계상의 결함 때문이다. GDP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척도일 뿐, 사람들에게 중요한 비시장활동의 가치는 포함되지 않는다. 둘째 시장 활동에 대한 척도라는 본래의 개념을 따른다 해도 GDP의 성장은 구조적으로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명목 소비를 물가상승을 감안한 실질 달러로 바꾸는 데 사용되는 물가지수가 물가상승을 과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실질GDP에 잡히지 않는 생활수준의 개념을 확대한 다음, 물가지수 편의를 야기하는 원인을 찾고, 그다음 GDP에서 빠졌거나 중요성이 크게 저평가된 인간 활동의 주요 사례를 들어 결론을 내릴 것이다.

TV와 같은 추가된 장비와 TV의 화질 개선과 같은 기술 변화는 가계생산과 여가에 소요되는 가정 시간의 한계생산성을 증가시킨다. 자동세탁기와 건조기가 추가되면서 가계생산에 들이는 시간은 빨래판과 옥외 빨랫줄로 세탁했을 때보다 더 가치가 높아졌다. 

시장노동의 비효용으로 인한 후생의 감소도 있다. 시장의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서 일을 하면 그만큼 비효용이 늘어난다. 예를 들어 1900년에 주당 60시간을 일해 벌어들인 소득으로 살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1940년에 40시간만 일하여 살 수 있다면, 노동으로 인한 비효용은 1900년보다 1940년이 더 적을 것이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작업의 비효용성을 줄이는 방법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작업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에는 작업의 성격과 관련된 불편함, 예를 들어 제련소의 혹독한 열기 속에서의 작업 같은 물리적 어려움을 줄이는 조치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말이나 노새를 따라가며 쟁기질하던 1870년의 농부와 에어컨과 GPS가 달린 트랙터를 몰며 작업하는 농부를 비교해보면 작업의 효율성이 얼마나 크게 개선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각 세대를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로 보아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늠한다. 

이처럼 가계생산, 여가시간의 가치, 하기 싫은 일의 감소 등을 포함시키면, 생활수준이라는 우리의 개념은 시장에서 구입하는 재화와 용역의 질과 양에서의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GDP에 포함된 요소들조차 명목가격을 불변가격으로 변환하는 데 사용되는 물가지수의 결함때문에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명목가격을 불변가격으로 바꾸려면 물가지수가 필요하다. 가령 1965년에 소비자가 휘발유를 구입할 때 갤런당 0.3달러를 지불했다면, 같은 휘발유를 2009년 기준년도에는 갤런당 3달러로 지불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제품이 휘발유 같지는 않다. 휘발유는 수십 년 동안 일정한 품질을 유지해온 상품이다. 룸 에터컨 같은 신제품이 출시될 때, 무더운 여름밤에 시원한 침실에서 잘 수 있는 것과 같은 개선된 소비자 후생은 여기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용할 수 있는 물가지수는 에어컨의 가격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주지만, 에어컨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알려주는 것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신제품은 보통 제조사들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생산량을 늘리기 때문에 초기 몇 년 동안은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만, 이에 대한 공식 지수는 신제품이 출시된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채택된다. 예를 들어 룸 에어컨은 1951년에 처음 출시되었지만, 공식 물가지수에 포함된 것은 1967년이었다.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가 처음 출시된 것은 1978년이었지만 물가지수에 포함된 것은 1987년이었다. 

이처럼 물가지수는 신제품의 후생 편익과 초기에 가격이 하락하면서 발생하는 후생 증진 효과를 놓친다. 게다가 기존 재화의 질을 측정할 때 생기는 품질 편의가 있다. 어느 달이든 TV 모델은 대부분 전달에 팔린 것과 같지만, 물가지수는 기존 모델에서 이 달에서 저달로 이어지는 가격 변화를 포착한다. 그러나 물가지수는 가격 변화가 거의 없어 더 큰 화면과 더 깨끗한 해상도를 제공하는 신제품이 꾸준히 출시되는 경우를 무시한다. 소비자들은 신제품으로 몰리고 구 모델에는 눈길도 주지 않지만, 물가지수는 가격 대비 품질 비율의 개선을 반영하지 못한다. 자동차의 연료 효율성이나 룸에어컨과 빨래건조기 같은 가전제품의 에너지 효율성 개선은 특히 공식 물가지수에서 품질 편의를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물가지수는 또한 새로운 유형의 대형 할인점이 소비자에게 주는 혜택을 놓친다. 예를 들어 월마트는 보통 기존의 상점보다 싼값에 식품을 판다. 물가지수도 동네 상점에서 파는 달걀의 물가지수가 있고, 월마트에 있는 달걀의 물가지수도 있다. 소비자가 같은 달걀을 20% 싸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가격 하락으로 기록되지 않기 때문에 GDP에 반영되지 않는다. 물가지수는 소비자들이 달걀에 실제로 지불하는 가격을 부풀린다. 이런 할인점 대체 편의는 엄청난 양의 실질 GDP를 계속 누락시킨다. 처음에는 백화점이 소규모 전문 상인을 몰라낼 때 누락되고, 우편주문 카탈로그가 작은 시골 잡화점과 경쟁할 때 다시 누락되고, 슈퍼마켓에서 식품을 팔기 시작할때 다시 누락되고, 월마트가 기존 슈퍼마켓보다 싼 가격에 식품을 공급할 때 다시 누락되고, 최근에는 인터넷 판매가 온갖 종류의 제품을 기존 아울렛보다 싼 가격에 제공할 때 누락되었다. 

실내 수도 배관으로 옥외 부속건물이 사라지고 중앙난방이 장작과 난로를 대체하는 것 등으로 대표되는 주택 품질의 엄처난 진보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향상된 생활수준은 GDP에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항생제 페니실린의 개발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고 그들 생명 하나하나가 모두 대단한 가치를 지니지만, GDP통계는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과 장비의 비용만 기록한다. 파스퇴르의 질병세균설과 그에 따른 비누와 청결에 대한 강조, 실내 수도 배관을 가능하게 만든 도시 위생 인프라의 개발, 파는 음식 일부가 부패하거나 함량이 미달되거나 희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19세기 말의 자각도 비슷한 사례다. 

개선의 마지막 요소는 늘어난 기대수명의 간접 효과다 주택수준의 향상은 대부분 전기 같은 발명과 연관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공동주택에서 교외의 단독주택으로 옮겨가는 현상은 주로 집 면적에 대한 소득탄력성이 양의 방향으로 바뀐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 가족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신용기관의 발전 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높아진 소득은 또한 깨끗한 물이나 교육 등에 대한 공공지출처럼 꼭 혁신이 필요한 것은 아닌 여러 형태의 구입에도 영향을 미친다. 주거 공간에 대한 수요가 교외로 연장하기까지는 운송수단의 혁신이 필수적이었지만, 청결한 물의 공급은 정수와 염소 소독 기술에 좌우되었다. 

생활부문에서 소비자가 누린 혜택은 GDP에서 완전히 빠졌지만, 그 누락된 크기는 시대가 이를수록 더 컸다. 즉 빨래판에서 자동세탁기로의 변천은 수동세탁기에서 전기세탁기로의 전환이나 12파운드짜리 욕조에서 18파운드짜리 욕조로의 변환보다 소비자 후생에 더 중요한 기여를 했다. 측정되지 않은 혜택중에서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기대수명의 변화는 1950년대 이후보다 1890년과 1950년 사이에 훨씬 더 빠르게 늘어났다. 물가지수 편의 역시 특별한 세기의 초기 몇 년 동안 더 심하게 나타났다. 


1부. 1870~1940년 : 나라 안팎의 혁명을 만들어낸 위대한 발명


제2장. 출발점 : 1870년의 생활과 일

1870년대의 보통 사람들은 살 수 있는 소비재의 양이 제한되어 있었다. 또 그런 소비재를 살 돈을 벌기 위해 남편과 아내가 해야 할 일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주부들의 일은 무척 고달팠다. 그들은 땔감과 깨끗한 물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집 안으로 나르고 재와 쓰고 남은 물을 내다 버리는 고단한 일을 끝도 없이 계속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음식과 옷을 만드는 데 들였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힘들고 불편해 보이는 1870년의 여러 생활상도 GDP에는 전혀 잡히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서는 해결되지만 1870년의 생활방식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GDP로 측정되지도 않았던 결핍을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다. 가공식품은 구하기 힘들었고 날고기도 안전하지 않았다. 결국 식사는 절인 돼지고기와 탄수화물 음식의 단조로운 연속이었다. 집에서 기르지 않는다면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 과일 구경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겨울에 얻을 수 있는 채소는 저장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뿌리채소가 전부였다. 옷은 투박했고 그나마 여성들의 옷은 대부분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재봉틀이 발명되기까지 옷을 짓는 일은 시골과 도시 주부들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노동이었다. 

1870년의 주택에는 실내배관, 수돗물, 쓰레기 처리기, 전기, 전화, 중앙난방 등이 없었다. 중류층과 상류층 가족들은 도시나 인근 교외에 오늘날 유서 깊은 주택가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집을 지었지만, 농부와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고 고달팠다. 1870년의 농부들은 대부분 방이 6개 이상인 단독 농가를 갖고 있었지만, 도시 노종자에게 이런 공간은 감히 생각도 못할 꿈이었다. 물론 농촌이라고 다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시적인 초가집이나 방 한 칸짜리 판잣집에서 사는 농부도 없지 않았다. 1870년에는 방충망이 없어 파리나 해충이 들어와도 방법이 없었다.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은 밀집된 도시 빈민 지구뿐 아니라 농가에도 상존했다.

1870년 미국의 모든 가족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말에 의존했다. 증기 동력이 철도와공장에서 위력을 발휘했지만 1870년에는 사실 증기로 움직이는 농기계나 도시 내 운송수단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은 쟁기나 탈록에서 도시 내 운송까지 책임지는 가장 대표적인 기동력이었다. 1870년에 사람들이 이런저런 용도로 의지하던 말은 860만 마리에 달해, 5명당 1마리 꼴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말을 먹이는 데 필요한 많은 곡물을 말할 것도 없고 길거리에 버려지는 말의 배설물을 치우기 위해 동원되는 노동인구에 들어가는 비용도 GDP에 잡히지 않았다. 

시골사람으로 분류되는 미국 인구의 75%를 오늘의 시선으로 바라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고립이다. 1870년에는 전화도 지방 우편서비스도 없었다. 정착민들은 더 이상 갈 수도 없는 대평원의 끝까지 해치고 나가, 악천후가 일상적이었던 북유럽과 동유럽 출신들조차 감당하기 힘든 극한 기후와 싸웠다. 

1870년은 근대 미국의 여명기로 설명된다. 이어지는 60년 동안 미국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혁명을 겪었다. 1929년에는 도시에 전기가 들어갔고 거의 모든 도시 거주지는 전기와 천연가스와 전화와 깨끗한 수돗물과 하수도로 외부와 이어지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1929년에 말은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가구 수 대비 자동차의 비율은 90%에 달했다. 1929년에는 축음기와 라디오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고, 화려한 외관의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등 사람들은 1870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흥을 즐겼다. 1929년경에는 유아사망률이 매우 낮아졌고, 병원과 의원들은 요즘 같은 면허제도와 전문성을 확보했다. 일하는 날은 줄어들었고, 육체노동을 하는 남자의 비율도 줄었으며, 가전제품들은 집 안에서 하는 사소한 일을 크게 줄여주었다.

이런 획기적인 변화는 서서히 진행되다 1900년 이후에 전력화와 자동차 보급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근대의 기반은 이미 1870년 이후의 첫 10년 내에 마련되었다. 전등, 믿을 만한 내연기관, 무선 송신이 1879년이 끝나가는 마지막 석 달 사이에 모두 선보였다. 그 10년 기간 내에 전화와 축음기도 역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차 산업혁명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바꿔가고 있었다.  


제3장. 먹는 것, 입는 것, 그것을 구입하는 곳

식품 소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개선되었지만, 소비하는 열량으로 보자면 1920년대가 오히려 1870년대에 비해 적었다. 의류는 양적으로 질적으로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주부들의 노동의 질을 보면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1929년에 주부들은 더 이상 의복을 만들어 입지 않아 사서 입는 쪽을 택했다. 제조 기술의 발달과 우편주문 카탈로그와 백화점의 등장으로 인한 가격 인하와 가계소득의 상승 등이 맞물려 옷을 지어 입던 습관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식품과 의류 소비가 크기 늘지 않은 것을 꼭 기이한 현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들 기본적인 필수품에 대한 지출 비율이 줄어든 것은 새로운 여러 가지 신기한 발명품 구입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물가지수 편의가 식품과 의복 소비의 증가를 평가절하했다고 여길 만한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소비자들이 비싼 시골 상점이나 동네 상점을 두고 체인점에서 식품을 구입하는 데서 얻는 가격의 차이를 물가지수는 고려하지 못했다. 우리가 계산한 바로는 1911년에 체인점의 식품 가격이 기존 아울렛보다 22% 이상 낮았다. 그렇다면 체인점이 한창 그 위세를 떨치던 20세기 첫 사반세기 동안 나타날 수 있는 식품의 물가지수 편의가 연간 -1% 정도였을 것이다. 의류에서도 도시 백화점과 우편주문 카탈로그로 인해 가격이 내려갔기 때문에 비슷한 편의가 생겨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식품과 의류에 대한 물가지수 편의 외에도 1인당 실질 소비에 대한 기존의 측정 방식이 생활수준의 향상 측면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거리에서 말 배설물을 치우는 작업이나 도시나 시골 주부들이 물 긷는 수고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 것 그리고 전기를 이용한 조명, 운송, 가정용품 등 위대한 발명의 혜택은 GDP에서 제외되었고 따라서 우리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았다.


제4장. 주택 : 어둡고 고립된 집을 버리고 환하고 네트워크화된 집으로

187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행하는 과정은 탁 트인 공간에 우뚝 선 단독 농가를 버리고 창문이 없어 빛도 잘 들지 않는 방과 통풍용 수직갱에 버려진 쓰레기에서 올라오는 악취 등으로 상징되는 인구밀도가 높은 아파트형 공동주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설명된다.물론 이런 그림은 너무 단순하여 정확한 설명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공동주택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대기에 개방된 바깥 공간과 작은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이나 기껏해야 2가구 주택이었다. 1870년의 농촌 주택도 중서부 지방의 전형적인 2층짜리 농가가 전부는 아니었고, 남부의 원시적인 오두막이나 통나무집이나 흙벽돌집도 꽤 있었다.

1870년 이후의 생활은 특히 물과 땔감을 직접 나르던 방식에서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방식으로의 변환으로 압축할 수 있다. 전화선, 수도관, 하수도, 전선 등 새로운 네트워크는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등장한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둘씩 이 집과 저 집에 들어서면서 도심에서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으로 조금씩 확대되어 갔다. 

1870년에는 개방형 난로 외에 별다른 열원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은 바깥과 기온이 비슷했다. 실내 온도를 1년 내내 섭씨 20도 유지시킨다는 목표는 2단계로 진행되어 20세기 전반에는 중앙난방으로, 20세기 후반에는 에어컨의 점진적인 보급으로 실현되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집으로 바뀌는 과정에는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답은 실내 욕실이나 중앙난방 같은 특별한 속성의 존재나 건축자재 그리고 주택 가격이나 임대비용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자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욕실이 있으면 임대비는 82% 정도 올라간다. 난로가 있는 부엌에 중앙난방 시설을 갖추면 임대비는 28% 올라간다. 이런 개선 사항을 종합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주택의 질이 1870년과 전후 초기 사이에 전기, 배관, 중앙난방이 도입되면서 세 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9년 미국 도시의 주택을 네트워크로 연결시킨 개발은 대부분 도시 위생 기반 시설의 혁신을 승인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해준 수백 명의 담당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전제품, 욕실 설비, 화장실, 난로를 개발한 익명의 인물이나 분산된 혁신가들의 노력의 성과였다.

미국 주택의 혁명적 변모는 이것이 두 번 다시 일어나기 힘든 일회성의 발명이었다는 이 책의 주요 주제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현대의 편의품은 1929년에야 도시로 들어갔고 작은 마을과 농촌에 이르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런 현대의 편의품이 가정에 들어간 뒤에 변모는 완결되었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새로운 발명이 꾸준히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소비자 가전제품은 대부분 1940년에 발명되었고, 각 가정에서 그런 것들을 갖추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에어컨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1940년 이후로는 어떤 발명품도 이번 장에서 논의한 발명품처럼 몸을 움직여서 하던 일을 스위치 하나를 딸깍거리고 수도꼭지를 돌려 해결한 것만큼 일상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제5장. 말과 철도를 따라잡은 자동차 : 발명 그리고 이후의 점진적 개선

현대의 편의품이 몰고 온 변화는 내연기관으로 가능해진 교통혁명과 함께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교통의 획기적인 변화는 세 가지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증기로 움직이는 도시간철도였다. 1860년의 도시간철도는 아이오와 동부의 노선 대부분이 끊긴 짧은 노선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지속적인 장거리 여행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와 달리 철도의 속도는 1870년에 보통 시속 32~40킬로미터였지만, 1940년  프리미엄 특별요금 급행열차의 경우 세 배 가까이 빨라졌다. 또한 철도여행은 다리를 건너고 지하터널을 통화하는 등 연속성을 확보했다. 속도만 빨라진 것이 아니라 여행의 쾌적함도 크게 높아져, 1940년에는 거의 모든 급행열차에 에어컨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두번째는 시내 대중교통이었다. 1870년의 시내 교통은 말이 끄는 시속 5킬로미터의 승합마차와 이보다 속도를 간신히 두 배 올린 말이 끄는 철도마차가 전부였다. 적어도 일부 도시에서 케이블카가 잠깐 기세를 올렸지만, 전차가 느닷없이 등장했고 결국 1902년에는 말이 끄는 교통수단을 시내에서 모두 몰아냈다. 대도시들은 곧 고가열차와 지하철 등 전기로 움직이는 고속 교통 네트워크를 갖추며 전차로 인한 거리의 혼잡을 극복했다. 그리고 전기로 가동하는 도시간 열차는 대도시 간의 짧은 거리를 비교적 고속으로 운행하여 증기 열차를 대체했다. 증기로 움직이는 도시간열차의 경우에서 보듯, 1870년과 1940년 사이에는 바퀴자국으로 패이고 포장되지 않은 거리를 덜컹거리며 달리던 승합마차 대신 빠른 궤도차와 전차가 들어서고 전기로 차량의 난방과 조명을 해결하면서 대중교통은 한결 쾌적해졌다.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 자동차다.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자동차는 도시와 농촌의 생활에 변혁의 바람을 일으켰다. 1940년에 자동차 차체는 유선형으로 바뀌었고 밀폐되었으며 변속기나 현가장치가 크게 개선되었고, 엔진은 전국 곳곳에 속속 건설되던 포장 고속도로를 최고 속도로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튼튼하고 내구이 강한 자동차의 가격을 1920년대 연간 가계소득의 4분의 1 이하로 줄인 포드의 천재성 덕분에, 불과 몇 년 사이에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1926년 아이오와 등 여러 주에서는 농민들의 93%가 승용차나 트럭을 보유할 정도가 되었다. 고립된 시골은 옛말이 되었다. 자동차를 갖게 된 농촌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한 작물을 좀 더 좋은 가격에 팔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고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샀으며 말이나 마차로는 엄두를 못 냈던 휴양지나 관광지를 찾았다.

1870년과 1940년 사이에 일어난 교통 혁명의 세 주역은 도시의 규모와 차원과 구조를 바꿔놓았다. 도시를 변모시킨 또 한 가지는 전기와 이동수단의 결합이었다. 전기 엘리베이터는 중심 업무 구역에 고층 빌딩, 호텔, 공동주택 단지를 조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통근열차망이 잘 개발되어 있던 뉴욕과 시카고 같은 도시들은 엘리베이터로 인해 공간 밀도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도심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도시 주변은 밀도가 낮아졌다. 궤도마차와 통근열차 노선으로 인해 크기의 제약을 받았던 1890년의 도시와는 달리, 1940년의 도시들은 승용차와 트럭 덕분에 고유의 특징을 유지한 채 그 범위를 넓혀갈 수 있었다.

교외의 택지개발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초기의 철도 교외는 18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들 철도 교외 벨트로 인해 철도와 철도 사이의 공간에는 개발되지 않은 거대한 대지가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지역도 1920년대 들어서며 주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새로운 쇼핑 구역까지 들어서 도심의 중심가를 벗어난 유통 활동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근교 개발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주춤했지만, 1940년 말에 다시 본격화되었다.

교통 개선의 세 가지 차원은 말로부터의 독립이라는, 1870년 당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의 변화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다소 의외지만 증기철도는 말의 대안이 아니라 보완수단이었다. 철도는 거대한 면적의 농지를 새로 열었고, 그로 인해 농사용 말의 수요가 증가했다. 열차는 국내 시장의 범위를 넓혔지만, 그 기동성은 철도가 놓인 곳에 한정되었다. 말만이 "철도를 오가는 짧은 거리를 왕복하고 철도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을 갈 수 있ㅅ었다. ...말은 처음부터 철도를 쓸모 있는 수단으로 만들어주었다."

반면에 전차나 도시간열차 등 전기로 가는 도시 대중교통은 자동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을 대체했다.  1905년에는 말이 끄는 차량이 대세였지만 1917년 도시에서는 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도시의 거리 풍경을 잠깐 사이에 바꿔놓은 과정은 발명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변화에 해당한다. 농기계가 말을 완전히 대체한 것은 1950년대 말의 일이지만, 이미 1929년에 미국 대부분 도시에서 말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1870년부터 1940년까지의 교통상황을 설명한 이번 장은 이 책의 중심 주체 세 가지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다. 

첫째, 위에서 분류한 세 가지 교통수단의 발명은 농촌이든 작은 마을이든 도시든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둘째, 사람들은 발명 초기 10년 이내의 기간에는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고, 이후 몇 십년 동안 그 발명품을 보완하는 하위 발명들이 이어지고 또 원래의 발명이 개선되는 과정에서 큰 혜택을 보았다. 

셋째, 초기 발명과 이어진 보완적 개선은 역사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1870년과 1940년 사이에 미국이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 이행한 것 역시 본래적으로 한 번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었다. 1870년에 시속 40킬로미터도 안 되었던 도시간열차의 속도가 1940년에 시속 95킬로미터 이상으로 빨라진 것도 한 번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 이후 피스톤 식 비행기에서 제트기로 이행한 것 역시 한 번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었다. 말과 그에 따른 거리의 배설물과 질병이 사라진 현상도 한 번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었다. 도시 대중교통이 4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시속 5킬로미터에서 시속 65킬로미터로 빨라진 것도 한 번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었다. 1940년 이후 자동차에서 승차감과 편리함과 기능과 안전 등 여러 면에서 많은 개선이 있었지만, 1906년 당시 7마력짜리 엔진에 엉성한 마차 같았던 무개차가 1940년에 85~100마력짜리 엔진에 미끈한 유선형 밀폐형 차량으로 바뀐 것도 한 번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었다. 


제6장. 전신에서 무선전화로 : 정보, 통신, 엔터테인먼트

1870년과 1940년 사이에, 농촌의 고립은 사라지고 소통의 네트워크가 자리잡았다. 전화로 이웃에 설탕 한 컵만 빌려달라거나 갑작스런 비상상황에서 도움을 청하고나, 축음기로 고전음악이나 대중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로 뉴스와 연예 프로그램을 동시에 듣거나,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위력적인 파급력을 과시하기 시작한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하는 등 1870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 유형의 삶이 가능해졌다. 

인터넷과의 경쟁에 밀려 인쇄매체가 갈수록 힘을 못 쓴다고 한탄하는 요즘 사람들은 1870년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에 인쇄매체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책과 잡지와 신문의 독자 수는 1870년 이후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것은 1870년 이전에 맥을 못 추었던 경제가 1870년 이후 한 세기 동안 본격적인 성장가도를 다려 인류의 추진 동력이 되었다는 이 책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현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종이 값이 떨어지고 인쇄기술이 발달한 것만이 아니라 문맹률이 제로에 가까워졌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읽는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민간 분야의 노력도 있었지만 정부가 무료 공공도서관을 많이 세웠기 때문이다.

1844년 이전에 통신의 속도는 열차, 말, 돛단배의 속도에 따라 정해졌다. 천년을 이어온 기술의 역사에서 1844년에 발명된 전신에 의해 통신의 속도가 증가한 것과 같은 그렇게 급진적인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1870년에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전신부호를 전화선을 통해 인간의 목소리를 전송하는 방식으로 바꾸려는 발명가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간발의 차이로 첫 번째 특허를 취득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20세기 동안 AT&T의 전화 네트워크는 벨 시스템으로 불렸다. 전화는 1876년부터 1926년까지 50년의 기간에 비교적 느린 속도로 가정에 보급되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통신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 엔터테인먼트의 혁신은 축음기로 시작되었다. 축음기가 없던 시절,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전문가가 연주하는 고전음악이나 대중음악을 들을 방법이 없었다. 축음기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받은 라디오와 달리 보급 속도가 느렸다. 음반을 살 때마다 돈을 들여야 하는 축음기과 달리 라디오는 뉴스에서부터 코미디,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했다. 

1906년~1907년 하늘에서 떨어지듯 니켈로디언이 나타났고, 1911년에는 테라코타 장식과 장편 무성영화로 관객몰이를 하는 대형 영화관이 세워졌다. 20세기 첫 30년 동안, 영화의 흥행 요소는 각 분야에서 향상되었고 1928년에는 유성영화가 시작되었다. 

1870년에 고립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국 여러 지역은 70년 사이에 네트워크에 편입되었고 온 국민은 하나가 되었다. 1938년에는 전 국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000민 명이 라디오로 서비스킷과 워 애드머럴의 경주를 숨죽이고 들어싸. 미국 전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암갈색 화면이 칼라로 바뀌는 마법같은 순간에 도로시가 강아지에게 상징적인 말을 내뱉는 장면을 TV로 지켜보았다. "토토, 여기는 캔자스 같지가 않아"


제7장. 불결하고 험하며 짧은 : 질병과 조기사망

1870년부터 1940년까지의 기간에, 공중보겅과 의학계는 두 가지 분야에서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다. 부분적으로는 유아사망에 대한 승리였고, 보다 전체적으로는 감염병에 대한 승리였다. 출생시 기대 수명의 증가율은 20세기 전반이 후반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1926년의 진보는 의료계가 치료법을 알아낸 것과 실제의 결과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이다. 

1890년부터 1940년까지 발전을 추진한 동력 중에서도 으뜸은 도시 위생 기반 시설, 압력을 이용하여 깨끗한 수돗물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파이프 네트워크, 쓰레기와 폐술르 처리하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하수도관들이었다. 커틀러와 밀러는 유아사망률 감소의 4분의 3은 청결한 물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물과 관계없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수인성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만큼, 아니 그보다 더 빠르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 공로는 청결과 모유 수유에 관한 개인 차원의 지식이나 냉장 처리의 역할, 음식의 변질과 불순물 혼합을 줄이기 위한 연방 차원의 규제, 방충망 발명, 1900~1930년 사이에 일어난 말에서 자동차로의 이행 등 감염병의 확산 자체를 줄인 다른 요인에게 돌려져야 한다. 

청결한 물 뿐만 아니라 변질되지 않은 우유는 유아사망률 하락에 크게 기였했다. 물을 섞은 우유는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 흔했다. 농촌은 우유를 자신들이 직접 키우는 소에서 얻거나 가까운 이웃에서 구했지만, 도시에서는 행상인으로부터 우유를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1906년의 식품및의약위생법으로 절정에 이른 개혁 운동은 공중보건 규제를 요구하며 물을 섞거나 변질된 우유뿐 아니라 비위생적인 도축장까지 표적으로 삼았다. 우유 공급의 정화운동은 1880년부터 1910년까지 30년 동안 유아사망률이 가장 빠르게 하락한 원인에 대한 중요한 답이 된다. 

의료서비스 부문의 진전은 연구와 병원과 의사로 나누어 설명 수 있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진전은 파스퇴르의 질병세균설이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크게 주목을 받은 질병세균설은 19세기 말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여러 원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감염병의 원인으로서 곤충과 박테리아의 정체를 규명했다. 질병세균설을 믿는 의사와 공중보건 담당 관리들이 늘어나면서, 도시 위생 기반 시설의 발전과 식품 및 의약품 규제는 한층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1920년 전까지만 해도 의학 연구 자체는 사망률 감소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상화을 타개한 쪽은 주로 외과 분야였다. 마취제와 소독제 개발은 수술의 고통을 크게 줄이고 수술 도중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을 크게 줄였다. 그리고 심전도, 엑스레이 촬영기 등 현대 의학의 기본적인 도구들의 발명으로 1920년 이전에 이미 발전을 향한 기반은 자리 잡혀 가고 있었다.


제8장. 직장과 가정의 근로조건

그동안 우리는 1870~1940년 사이에 일어난 일상의 변화를 살펴보았고, 이들 변화가 대부분 1890~1930년 사이의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기화, 가정의 네트워킹, 자동차, 통신, 엔터테인먼트, 유아사망률 뿐 아니라  대부분의 감염병이 근절되는 과정 등 세상이 달라지는 모습을 따라가며 보았다. 생활은 여러 방면에서 개선되었다. 1930년에 미국 도시는 말에서 자동차로 거의 완벽하게 갈아탔으며, 전기, 수도, 하수관, 전화, 도시가스 및 천연가스를 공급했다.

이 40년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진보의 시대로, 주당 노동시간이 줄고, 힘들고 위험한 일이 즐겁고 편안한 일로 바뀌는 긴 여정이 시작되고, 공장과 광산의 미성년 노동 착취 현장이 조용한 고등학교 교실로 바뀌고, 상하수도와 가전제품의 등장으로 지겹고 고된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크게 줄어든 시기였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건이 한동안 발전을 가로막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25년 뒤 그 혜택은 전 국민에게 고루 돌아갔다. 

노동으로 인한 비효용(또는 불쾌함)이 줄어드는 과정은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890년에 약 60시간이었던 주당 노동시간은 1940년에는 40시간으로 크게 줄었다. 철강산업처럼 일부 극단적인 경우는 1890~1910년 사이에 주당 노동시간이 72시간을 넘었다. 두 번째 변화는 고되고 불편하고 위험했던 일이 조립라인 작업이나 화이트칼라 사무직 등 할 만한 일로 바뀐 것이었다. 세 번째는 이번 장의 핵심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870`1900년 사이 각 직업군 내부의 고되고 험한 근로조건이 1910년 이후 꾸준히 개선된 획기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위험한 탄광이나 역겨운 도축장의 환경은 박물관과 공공도서관을 짓고 기부한 자선사업가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앤드류 카네기 같은 사주의 가혹한 처우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철강산업 노동자들의 처절한 조건에 못지 않을 만큼 악명이 높았다. 개인사물함 따위는 아예 없었고 화장실도 옥외 화장실이 전부였으며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제철소의 뜨거운 열기와 위험한 작업은 떵떵거리며 사는 고용주의 위헤와 허약한 노동자의 극심한 불균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힘을 못 쓰게 되면 관리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예고 없이 해고했다. 노동시간도 사업의 호불황에 따라 들쑥날쑥 바뀌었고, 유지보수나 재건축을 위해 시설을 일시 폐새할 때도 철장 수요가 줄 때도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상이나 실업보험 없이 거리로 내몰렸다. 

도시든 농촌이든 여성들의 일은 고되고 지루하고 단조로웠다. 취업전선에 뛰어든 일부 극소수 여성들은 의류공장, 서무, 간호사, 교사 등 소위 여성직으로 스스로의 역할을 제한했다. 임금은 보통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다. 노동시장은 미혼의 젊은 여성에게 관대한 편으로, 이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가정부였다. 당시 가정부는 노동인구의 5%를 차지했다. 

이번 장에서는 세월의 경과와 함꼐 근로조건이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개선되어쓴지를 추적했다. 

농업 노동자의 비율이 줄고, 1920년 초의 제한적 이민 쿼터 덕에 무한히 공급될 것 같았던 이민자들의 행렬도 줄었지만,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작업장의 엄격했던 규율은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다. 상하수도, 주철 난로 등의 혁신적 제품들 그리고 이어진 1895년 이후의 우편주문 카탈로그를 통해 구입하는 많은 상품들, 특히 전기세탁기와 냉장고 등 1920년 이후부터 사용하게 된 주요 가전제품들로 인해 집안일에 매달려야 하는 주부들의 고된 일상도 크게 부담이 줄었다.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은 크게 달라졌다. 예전보다 많이 먹었을 뿐만 아니라 음시을 만들어도 간편하게 시장에서 사다 적당히 조리해서 식탁에 올렸다.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밥벌이의 어려움에 큰 관심을 가졌다. 결국 장시간 엄격한 규율 속에서 일하던 작업장의 분위기는 직원들을 존중하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노동시간도 많이 단축되었다. 역사상 어느 시대도, 이처럼 빠르게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많은 요소가 결합하여 인간의 조건을 이렇게 완벽하게 변형시킨 적은 없었다.


제9장. 위험에 대한 대처방식 : 소비자금융과 보험과 정부

소비자금융으로 사람들은 할부 구입을 통해 대금을 완납하지 않고도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보험은 화재로 인한 인명이나 재산 등의 피해로부터 가정을 지켜주었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 사고나 병으로 조기 사망했을 때 수입을 보전해주었다.

1870년에 지방의 신용거래는 주로 지역의 잡화점에서 이루어졌고, 지역은행도 농민들을 상대로 모기지를 제공했다.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점점 전당포 같은 사설 신용업체에 의지했다. 1900~1910년까지 10년 동안 현금 구입만 가능한 우편주문 카탈로그가 시골 사람들이 의류나 도구 등을 구입하는 주요 수단이 되고, 역시 현금 거래만 하는 백화점이 중대형 도시의 대표적인 공급원이 되면서 신용거래량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19세기 말에 가계 예산의 절반 이상은 음식과 옷에 쓰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집세로 나갔다. 따라서 내구소비재를 구입할 여유는 많지 않았다.

1910년과 1929년 사이에 경제 사정이 좋아지고 소득이 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1920년대는 소비자금융과 모기지 금융이 크게 번창했다. 1850년대까지 거슬러갈 수 있는 할부 판매는 재봉틀이나 피아노처럼 중산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구매품에 한정되었지만, 이제는 도시와 지방, 중산층과 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이용하는 제도가 되었다. 1910~1925년 사이에 카탈로그로 주문하는 주택과 백화점은 현금 거래에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할부 판매를 도입했다. 1920년대의 경제 번영에 박차를 가한 것은 쉬워진 소비자 금융으로, 그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첫 차를 신용으로 구입하여 1919년에 전체 가구의 29%였던 자동차 보유율은 1929년에 93%로 크게 올랐다. 또한 냉장고, 세탁기 등 초기의 주요 가전제품에도 소비자금융이 적용됐다. 모기지 금융은 특히 풍족하여 주택 붐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주택 붐은 예기치 않았던 만큼이나 오래가지도 않았다. 1920년대 초의 이민제한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앞으로 인구증가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의 생명보험은 각 증서에 현금가액과 대부가액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저축의 방편으로 변형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생명보험은 중산층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널리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생명보험계약대출은 자동차나 집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계약금을 조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자동차보험 등 민간 보험이 사람들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덜어주었다면, 정부는 일반 기업들이 할 수 없거나 하려 들지 않는 사회보험을 제공했다. 위험과 관련하여 뉴딜 이전에 가장 중요한 정부 조치는 우유와 육류 등 식품들의 불순물 혼합과 변질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1906년에 설립된 식품의약청이었다. 하지만 위험을 줄이기 위한 좀 더 의미 있는 조치가 나오기까지는 193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1930년대 뉴딜은 연방예금보험공사를 통해 은행 파산으로부터 예금주들의 예금을 보상해주었다. 나이가 들었을 때 무일푼이 되는 위험을 막아준 것은 사회보장 법안이었고, 실직의 위험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보호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은 정부가 시행하는 실업보험이었다. 1870~1940년에 주정부와 지방정부는 상하수도 설비에 기금을 토입하여 생활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주정부는 연방정부와 힘을 합쳐 1916~1940년 사이에 고속도로망을 구축했다. 도시의 전력 공급망은 민간 기업들이 주도하여 어느 정도 완비된 모습을 갖추었지만, 남부 농촌지역까지 전력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연방정부가 예산을 투입하여 지방전력보급청을 설치했기 떄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연방정부는 또한 1887년에 주간통상위원회를 설립하고 1890년에는 셔먼 반독점법을 통과시켜 과도한 독점에 개입했다. 정부의 이런 조치는 위험을 줒ㄹ이고 경제성장을 촉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지만, 민간 경제에도 강력한 힘을 실어주어 1870년과 1940년 사이에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쉬어가는 글 : 혁명에서 진화로

2009년 불변가격으로 따져 1870년에 1인당 2,770달러였던 실질 GDP는 1940년에 9,590달러로 올라, 이 70년 동안에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을 세 배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실질 GDP만으로 따지면 1870~1940년 기간에 향상된 생활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대부분 빠뜨리게 된다.

실질 GDP가 포착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발전의 원인 중에는 불편하고 위험하고 어둠침침했던 등유와 고래 기름을 대신한 전구의 밝기와 안전성이 있다.

실질 GDP는 콘플레이크에서 코카콜라에 이르는 가공식품의 발명, 냉장열차로 가능해진 신선한 육류 등 1870년 이후 다양해진 식품들도 계산에 넣지 않는다. 1870년대와 1880년대부터 도시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권과 규모의 경제와 편리함을 제공한 도시 백화점의 가치도 실질 GDP에 반영되지 않는다. 실질 GDP는 1,000쪽에 달하는 우편주문 카탈로그의 가치도 산정하지 않는다. 우편주문 카탈로그는 종전 가격보다 크게 낮은 가격으로 같은 물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물론, 1900년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의 종류를 몇 배로 늘렸다. 

실질 GDP는 1900~1940년 사이에 자동차의 등장으로 거리에 떨어지던 말의 똥오줌이 사라진 현상에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실질 GDP는 자동차로 인해 속도와 적재량이 증가한 것의 가치도, 개별여행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태동시킨 자동차의 기동성도 계산에 넣지 않는다.

자동차가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된 것은 1935년 사이에 자동차 가격이 경이적으로 하락하고 품질이 향상된 점도 고려하지 않는다. 1910~1923년 사이에 포드의 모델 T가격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여 대략 80% 떨어졌다.

실질 GDP는 전신으로 가능해진 실시간 소통, 전화를 통한 음성 소통, 축음기의 음악 재생 능력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라디오 네트워크가 전국에 형성되면서 쏟아진 뉴스와 엔터테인먼트의 실시간 청취의 가치도 계산하지 않는다. 실질 GDP는 5센트 극장에서 상영하는 무성영화와 평균 23센트를 주고 보는 총천연색과 소리와 음향효과의 현란함으로 포장된 1939년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질적 차이도 고려하지 않는다.

실질 GDP는 1890년에 신생아의 22%에 달하던 유아사망률이 1950년에 1%로 줄었어도 이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 몇 가지 평가를 종합하면 이런 유아사망률의 변화가 만들어낸 후생의 가치는 다른 모든 요인의 소비자 후생 증가분을 합친 것보다 더 컸다. 실질 GDP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당 72시간을 일하던 철강 노동자의 작업이 에어컨을 켠 사무실에서 주당 40시간을 일하는 사무직과 전문직의 일로 바뀌었을 때 일어난 몸과 마음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

실질 GDP는 수도꼭지만 틀면 깨끗한 물이 나오는 세상으로 바뀌어 우물이나 개울가에서 물을 길어올 필요가 없어졌을 때 발생하는 소비자잉여의 증가분을 계산하지 않는다. 실질 GDP는 1940년 작은 마을과 도시의 오수관이 인간의 배설물을 조용히 처리해주어 예전처럼 변소에서 직접 퍼내가 버려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실질 GDP는 1870년에 부엌에서 물을 덥혀 큰 통에 붓고 몸을 씻던 불편함을 뒤로 하고, 개인용 실내 화장실에서 욕조나 샤워기를 이용하여 몸을 씻으면서 느끼는 안전함과 편리함도 고려하지 않는다. 실질 GDP는 여성들이 월요일이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무슨 의식처럼 빨래판에 옷가지를 비비고 빨고, 화요일이면 역시 무슨 의식처럼 옷을 내다 걸어 말리던 일에서 해방되었어도 이를 계산하지 않는다. 수돗물, 세탁기, 냉장고, 자동차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모든 발명품은 GDP통계에 '링크드인'되어 있다. 이것은 그 발명품들의 가치가 0으로 계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부. 1940~2015년 : 황금시대와 저성장의 조기 경고


제10장. 페스트푸드, 합성섬유, 들쑥날쑥한 필지 분할 : 음식과 의복과 주택의 느린 변화

1870~1940년 사이에 일어난 음식과 의복의 변화는 1940년 이후에 일어난 어떤 변화보다 더 중요했다. 1870년 이후 몇 십년에 걸쳐 가공식품이 등장하고, 우유와 육류의 위생과 안전이 확보되고, 식품판매의 주체가 작은 시골이나 도시의 상인에서 체인점이나 슈퍼마켓으로 바뀌면서 음식 소비와 판매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다. 이에 비하면 1940년 이후의 변화는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통조림 제품과 포장 식품 외에 냉동식품이 추가된 것이 눈에 띄는 변화라면 변화였다. 가계속득이 늘어나면서 음식에 들어가는 금액의 비율은 수직으로 떨어져 1870년의 45%에서 2012년에는 13%로 내려갔고, 같은 음식 소비도 집보다 패스트푸드점이나 일반 식당을 이용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1940년 전에는 음식소비와 관련된 발전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한 세기 동안 일정한 수치를 유지하던 1일 칼로리 섭취량이 1970년 이후로 약 20% 증가한 것이다. 결과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날씬하고 건강했던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뚱뚱한 나라로 바뀌었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미국인들의 몸무게는 계속 늘어갔다. 도시빈민 구역, 식품사막, 그 밖의 빈곤 증세 등으로 결국 가난한 사람들은 정크푸드에 의지했다. 

두 번째 필수품은 의복이다. 의복에서 중요한 변화는 1940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들은 옷을 직접 만들어 입어야 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후에는 스타일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집에서든 일터에서든 사람들의 복장은 좀 더 간편해졌고 비싸지 않은 옷을 선호했다. 월마트와 타켓 등 유통업체의 인기로 고객들은 다량의 저가 의복을 실컷 구경하며 고를 수 있었다. 이런 대형 할인매장에 전시된 저가의 수입 의류로 인해 의복의 상대가격은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대형 할인매장의 인기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도심의 백화점들은 문을 닫았고 수입 의류의 홍수는 미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섬유 및 의류 제조업체들을 사실상 해고시켰다. 

대공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기까지 15년 동안 주택 건설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지만, 1945년 이후로는 전쟁으로 인해 쓰지 못했던 돈이 모이고 또 전쟁 전보다 높아진 임금으로 수요가 갑자기 늘면서 이를 충족시키려는 주택건설 붐이 조성되었다. 베이비붐도 주택 공급을 늘리는 또 다른 압박요인이었다. 1950년대의 10년 동안에만 미국 인구는 20%가량 증가했다. 도시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교외는 땅값이 쌌기 때문에 미국은 서구 유럽과 달리 독자적인 도시 개발 경로를 걸었다. 미국은 다른 선진국의 도시 개발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도시 인구가 분산되는 저밀도 현상을 드러냈다. 도시 확산에 기여한 중요한 한 가지는 산술적인 문제였다. 인구가 1950년과 2010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교외의 지역개발은 좁은 부지에 작은 집을 짓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어느 집이든 맑은 공기가 흐르는 마당이 있었고 도심의 혼잡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전후에 형성된 교외는 계획성 부족으로 중심축이 되는 공공장소가 마련되지 않았고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이런 주택의 대형화는 2012년까지 계속되었다. 새로 지어지는 단독주택의 평균 크기는 1940년대 말에 세워진 주택의 세 배 정도였다. 2015년 현재 미국 주택의 절반은 1977년 이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크기도 크고 갗줄 수 있는 현대의 편의품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다. 에어컨 또한 중앙집중식이다. 윈도우형 에어컨은 전후 시기의 전반기에는 에어컨 그 자체만큼이나 혁명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시간이 가며 인기가 시들해졌다. 신축하는 주택들은 옥외에 온수 욕조나 프로판가스 그릴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 실내에는 붙박이식 전자레인지, 언더카운터 주방 조명, 에어컨과 천정 선풍기 등 1950년대의 가전제품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통합형 기능을 갖추었다.

집의 크기는 꾸준히 커졌지만, 주요 가전제품이 갖춰지는 궤적은 그렇게 꾸준하지도 않았고 또 가전제품의 품질 역시 계속 좋아지지도 않았다. 1975년까지는 가전제품을 갖추는 속도가 무척 빨라, 웬만한 가정도 전자레인지와 중앙집중식 에어컨을 제외하고는 요즘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가전제품을 마련했다. <컨슈머 리포트>는 수시로 가전제품에 대한 평점을 매겼지만 평가는 놀라울 정도로 매번 비숫했다. 1940년대 말에는 품질과 성능이 형편없었지만  이후로는 빠르게 개선되어, 1970년에 <컨슈머리포트>는 거의 모든 주요 가전제품에서 특기할 만한 결함이 사라진 관계로 더 이상 제품의 품질을 따지는 기사는 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이후에는 더 잇아 주요 가전제품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 

1975년 이후로 음식과 의복과 주택 설비의 진화가 정체된 것 이외에, 계속 커지는 주택의 크기를 일부 상쇄하는 부정적 요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뚜렷한 것은 미국의 저밀도 도시 모델의 태생적 결함과 공공도로의 보조금 지원과 고사되어 가는 대중교통이다. 결국 집에서 일터까지 거리가 멀어지면서 에너지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통 정체는 상습적이 되었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 외에도 고소득층이 가난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대형 주택에 살게 되면서 사회적 불평등까지 심화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도심의 빈민가의 식품사막에 갇혀 있다.

미국의 통치방식은 중앙에서 세금을 거두어 이를 프로젝트의 우수성이나 시미의 필요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 모델이 아니다. 미국의 통치는 그와 정반대의 형태로 다수의 지방행정 단위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시민들은 가난한 지역으로 재정적 자원을 이전시킬 의무를 쉽게 피할 수 있다. 이런 구조는 특히 지방 학교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지방 학교들은 일차적으로 그 지역의 재산세에서 재정을 조달받는다. 따라서 재정적 불평등은 교육적 자본 투입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그 결과는 부유한 학군과 가난한 학군의 성적 격차로 나타난다. 이처럼 지역의 학교 재정은 다음 세대의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아마도 전후 미국에서 나타난 준교외 조성에서 가장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제11장. 쉐보레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둘러보세요

가구당 차량수는 1970년까지 빠르게 늘어났고 1970년부터 1990년까지 증가 속도가 줄었다가 1990년 이후로는 증가 자체가 거의 없었다. 1인당 차량마일 역시 증가율이 꾸준히 감소하다, 2000년부터 2014년까지는 감소속도가 빨라져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줄어드는 현실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 이후로 자동차 품질은 꾸준히 향상되었고, 아울러 주행거리당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도 꾸준히 줄어들었다. 

자동차 품질은 1906~1940년 사이에 적어도 2.5배 상승했지만, 이 부분 역시 가격과 GDP에 관한 정부 자료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1935년까지 자동차는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후의 승용차는 1940년 때보다 별로 커지지도 않았고 더 강력해지지도 않았지만 에어컨이나 자동변속기나 저공해장치를 비롯한 편의와 관련된 기능은 계속 추가되었다. 연비 또한 향상되었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률도 꾸준히 줄어들었다. 이런 성과는 정부가 안전벨트와 에어백을 의무화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주간 고속도로의 일부로 1958년과 197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슈퍼 하이웨이의 내재적 안정성이 커졌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경제 전반의 노동생산성이 1972년 이후보다 이전에 더 빨리 성장한 것은 적어도 화물차 운전자들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해준 주간 고속도로 시스템의 직접적인 영향 덕분이다. 

민항운송처럼 첫 10년 동안에 무서운 속도로 기술적 발전을 이룩한 산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장거리용 비행정과 중거리용 DC-3가 이룩한 성과로 하늘을 나는 일은 더욱 쉬워졌다. 하지만 여행의 상대가격이 너무 높아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영화계 스타나 부자들이 아니면 이용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 초를 기점으로 바른 성장이 느린 성장으로 바뀌는 현상은 자동차보다 항공운송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1945~1970년과 1970~2000년의 두 기간을 비교해보면, 1970년 이후에 항공운송의 상대가격이 더 느리게 하락하고 1인당 여객마일도 더 느리게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몸으로 느끼는 항공여행의 질적 변화는 1970년 초 더 비좁아진 좌석과 더 길어진 보안 검사 행렬로 분명 악화되었다.  그리고 1980년 이후로 느려지는 상대가격의 하락속도는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던 기내식과 수화물 검사에 별도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바뀐 상황을 무시하기 때문에, 과장된 가격 하락폭을 잡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단골 고객에게 주는 보상 탑승권의 가치로 어느 정도 상쇄된다.

항공사에 대한 규제는 1978년에 가격 인하를 조건으로 완화되었지만, 1980년 이전에 빨랐던 요금 하락세와 달리 항공여행의 상대가격은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상대가격을 떨어뜨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규제의 범위가 아니라 주간 고속도로와 화물차 운전자의 생산성에서 보는 것처럼 항공사 승무원, 특히 조종사의 생산성을 높이는 더 크고 더 빠른 비행기의 개발이었다. 

규제 완화 기간에 합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미국내 항공산업은 네 개의 대형 항공사로 규합되고 몇몇 소형 항공사들이 주변에서 남은 몫을 챙기는 식으로 판도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한 때 비행기 탑승권 요금이 항공여행비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승객으로부터 별도의 수수료를 뽑아내어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제12장. 엔터테인먼트와 통신 : 밀턴 버얼에서 아이폰까지

미국인의 생활수준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 중에서, 엔터테인먼트와 통신분야의 수준은 1940~2014년 기간 내내 가장 바르고 가장 확실한 발전을 계속해왔다. 이 두 분야만큼은 음식, 의복, 가전제품, 항공여행처럼 1970년 이후로 발전 속도가 늦어진 경향을 보이지 않았다. 

TV는 처음 등장한 이후 크고 작은 혁신을 통해 변신을 거듭했다. TV의 품질은 꾸준히 개선되어 1950년에는 고장이 잦은 9인치 흑백 TV도 400달러를 지불해야 살 수 있었지만, 2014년에는 번쩍거리는 40인치 LED고화질 컬러에 서라운드 스테레오 사운드를 갖춘 TV를 같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의 공식 물가지수인 소비자물가지수는 전쟁 이후로 가격에 비해 엄청나게 달라진 TV의 품질 향상을 반영하지 못한다. 1952~1999년 사이에 실질 GDP에 기록된 수치 중 TV의 품질 향상으로 인한 혜택을 측정하지 못한 수치를 우리는 TV에 지출된 금액 1달러에 대해 5달러 정도라고 추정한다. 1999년부터 산출 방식을 개선한 소비자물가지수는 소비자 편익이 저평가되는 원인을 원천 제거했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 HD TV의 가격이 10분의 1로 크게 하락한 것을 소비자물가지수는 정확히 추적해왔다. 즉 소비자물가지수는 그 10년 사이에 매년 20% 이상의 비율로 내려갔다. 이런 사실은 역시 이 책의 주제 중 한 가지인 새롭게 개선된 제품으로 인한 혜택을 저평가하는 정도가 전후 초기 몇 년이나 특히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사례다. 1970년에 컬러로 바뀌면서 TV화면에는 새로운 활기와 현실감이 보태졌고, 케이블 TV는 시청자의 선택 범위를 넓히는 한편 특정 분야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전문성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기반으로 삼는 공중파의 매력을 대체했다. 1970년대 말에 시작된 VCR과 나중에 나온 DVR은 시청시간 조정권을 시청자의 손으로 넘겨, 각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 선택권과 조정권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오폐라나 야구 경기나 그 밖의 프로그램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게 된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플랫폼 역시 여러 단계를 거쳐 변형을 거듭해왔다. 1940년대 이후로 30년 동안 축음기는 여전히 음악 청취 현장을 장악했지만, 1970년대 이후로 새로운 기술은 음악을 움직이는 실체로 만들어놓았다.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워크맨을 거쳐 아이팟에 이르기까지 음악 청취기기를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꾸준히 확장되어온 저장 용량과 재생 시간이 맞물려 이루어진 발전이었다. 통신분야에서 장거리전화 요금은 꾸준히 떨어져, 요즘 전화기 사용자들은 3,0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 통화해도 고시가격에 따라 요금을 지불하는 것을 당연히 여길 정도가 되었다. 휴대폰은 거리에 대한 제약뿐 아니라 지역에 대한 제약까지 해소시켜 이런 추세를 이어갔다. 요즘은 어느 곳에서나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만, 1970년 전만 해도 멀리 떨어진 두 지역을 연결하려면 몇 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고 평균 시급보다 훨씬 비싼 비용이 들었다. 지난 20년 동안 진행되어온 디지털화로 엔터테인먼트와 통신 세계는 어디 할 것 없이 더 편리해졌고 더 개성적이 되었다.


제13장. 컴퓨터와 인터넷 : 메인프레임에서 페이스북까지

컴퓨터 혁명은 1654년에 등장한 최초의 메인트레임 컴퓨터 유니박1에서 시작하여 2014년 9월에 선보인 아이폰 6까지 이어졌다. 정보처리 기술의 빠른 발전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규합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소통하고 정보를 얻는 방법까지 완전히 바꿔놓았다. 인텔의 공동 설립자 고든 무어가 1965년에 컴퓨터 칩의 성능이 2년마다 두 배가 될 것이라고 한 추측은 과학 사상 가장 정확한 예언이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에는 그 속도가 더 빨라져 16개월마다 두 배가 되었다가, 2006년부터는 느려져서 두 배가 되는 기간이 4년 또는 6년으로 늘어났다. 그런 속도 유지에 필요한 기술적 비용에 대한 수요가 없기 때문에 무어의 법칙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칩은 데스크톱과 랩톱 컴퓨터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수행할 만큼의 용량을 갖추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는 너무 커서 방 하나를 다 차지했고 별도로 맟춘 에어컨을 쉬지 않고 가동해야 했다. 초기 컴퓨터는 전화요금고지서를 자동으로 발행할 수 있게 해주었고, 통화를 전자제어식으로 바꿔 교환수를 거치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현금자동인출기는 많은 창구 직원들의 업무를 대신해주었으며, 항공사들은 컴퓨터 덕ㄷ분에 예약하고 수속하는 지루한 수작업을 없애고 바쁜 시기에 폭주하는 물량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컴퓨터는 별난 크기를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1970년에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전자계산기가 나와 하룻밤 사이에 기계식 계산기와 계산자를 밀어냈다. 방 하나를 꽉 채웠던 메인프레임 컴퓨터는 1981년에 몸집을 줄여, 사무실이나 가정의 책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상자에 화면까지 갖춘 유닛으로 바뀌었다. PC는 서류를 다시 타이핑하지 않고도 계속 수정하고 편집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타자기도 곧 자취를 감추었다. 전자식 스프레드시트의 마법 덕분에 수백 수천 개의 숫자에 단 하나의 공식을 적용하면 어떤 계산이든 해낼 수 있었다. PC는 처음에 컴퓨터광이나 통계학자나 작가나 연구원들이나 사용하는 전문적인 도구였지만, 1990년대 초에 웹브라우저가 만들어진 이후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필수 도구가 되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혜택은 매우 긍정적이지만, 일부에서는 부작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첫째로 컴퓨터와 인터넷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가난해서 집에 컴퓨터가 없거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어렵다. 그런 아이들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공부하는 아이들과 경쟁이 안 된다. 이런 새로운 종류의 학습원이나 정보원을 이용할 줄 모르는 인터넷 문명은 평생 장애가 될 수 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양산하는 것도 문제다. 노벨상을 수상한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자 로널드 코스는 오래전에 이렇게 경고했다. "데이터를 아주 오래 고문하면, 녀석은 아무 말이든 자백할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풍부하고 다양하지만, 귀중한 자원이라도 결함은 있게 마련이다.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교까지 인터넷은 사이버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인터넷은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를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온 세상에 퍼뜨릴 수 있으며, 아랍의 봄 같은 혁명도 촉발할 수 있지만 환멸감을 일으키거나 잘못된 정보를 유토시키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언제든 연결이 되어 있는 신세계에는 다른 문제가 있다. 10대들, 특히 사내아이들은 온라인 세계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학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아이들은 숙제를 미루어놓고 유튜브 영상을 들여다보며 친구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들추거나 친구들과 비디오게임에 열중한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인터넷에 노출되면 대인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학교 관계자들은 시험 점수나 수업 참여의 어떤 확실한 긍정적 결과도 없는 상태에서 기술부터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지적한다.

 

제14장. 항생제, CT 그리고 보건과 의학의 진화

1940년 이후로 미국의 의료제도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 의료서비스를 전달하는 기구, 그 지불 방법에서 큰 변화를 일구어냈다. 1940년 이후에 가장 중요한 혁신은 1940년과 1970년 말 사이에 이루어졌다. 실제로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는 미국인들의 일상을 교란하는 감염병을 대대적으로 뿌리 뽑는 사회적 혁명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파스퇴르의 질병세균설, 수질관리와 쓰레기 처리 방법의 개선 등으로 양적 도약이 이루어진 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명된 페니실린을 비롯한 항생제는 위험하고 극성스러운 여러 감염병에 결정타를 가했다. 1970년대에는 심혈관 질환과 암 치료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심장볍의 경우, 1960년대 초에 다양한 예방책과 완화책이 나오면서 발병률이 느리지만 꾸준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암과의 전쟁은 아직 성공적이라 할 수 없지만, 1970년대에 널리 사용된 화학요법과 면역요법 같은 치료법과 현대식 조영기법의 발달로 몇 번의 전기를 맞았다.

건강에 대한 대중의 지식과 인식이 크게 달라진 점도 진전에 한몫했다. 흡연 등 여러 위험 요소들을 줄이려는 노력도 심장병을 줄이는 데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요소였고,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을 개선하려는 정부 차원의 노력은 기대수명과 질보정 수명에 긍정적인 영햐을 미쳤다. 사고로 인한 사망률도 꾸준히 감소했고, 폭력은 주기적인 기복을 보이면서 최근의 경우 1990년대 초에 순환주기의 정점에 올랐다가 그 이후로 뚜렷한 감소세를 나타낸다. 

1970년 이후 갈수록 전문화된 의료업은 고가의 첨단 장비를 활용하는 쪽으로 치우쳐 병원들은 '기술 집약체'이자 차가운 '기계치료센터'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부터 GDP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히 상승했고,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단순한 예방조치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병원과 의사들은 공중보건을 향상시키는 문제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동시에 실용적인 의료 혁신은 빈도가 줄어들었고, 신약개발 속도는 규제와 치솟는 비용의 장벽에 가로막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의료비의 GDP 대비 비중을 끌어온린 것은 비용에 아랑곳하지 않고 첨단기술 서비스를 크게 늘릴 유인을 갖고 있는 의료보험 제도였다. 진료별 수가제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와 정부 개입에서 벗어나려는 의료업계의 소망을 반영한 조치로, 보험을 조건으로 내거는 고용이라기보다 시민의 권리로서 보편적 의료 혜택을 지향하는 다른 선진국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1980년 이후 관리의료 조직을 향해 서서히 방향을 선회한 보험제도는 2010년에 진료별 수가제를 대부분 대체했지만, 보험 적용을 고용에 의존하는 관행은 끝나지 않았다. 1930~1960년 사이에 4%에 불과했던 GDP 대비 의료비 지출 비율은 2013년 18%에 달할 정도로 높아졌지만, 전 국민의 6분의 1은 여전히 보험이 없고 미국의 출생시 기대수명은 전 국민에게 국민건강보험을 제공하는 다른 선진국보다 2~4년 짧았다. 

한편 1940년과 1970년대 후반 사이에 이루어진 빠른 진보와 비교할 때, 기술변화에서 얻는 이득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당초 많은 기대를 받았던 게놈과 줄기세포 연구의 혁신은 아직까지 그 속도가 너무 느려 효과적인 신약이나 별다른 치료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이룩한 획기적인 변화들은 치료보다는 주로 질병 관리의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도 대부분 많은 비용을 들여야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질병 치료의 개선으로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알츠하이머와 그 밖의 여러 형태의 치매에 취약한 연령대로 들어가는 미국인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연구와 치료법 개발에 많은 비용을 지출하면 기대수명을 꾸준히 늘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 지출을 한다고 해서 선진국 가운데 가장 비싼 의료체제를 갖추고도 기대수명의 순위는 낮은 미국의 위상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제15장. 가정과 직장에서의 일과 젊음과 은퇴

직장과 가정의 근로조건은 1940년 이전의 70년보다 이후의 70년 사이에 크게 개선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일이 안전해지고 육체적으로 한결 수월해지는 추세는 1940년부터 1970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1900년에 60시간이던 주당 노동시간은 1940년에 이미 40시간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주부들의 가사조건도 빠르게 향상되었고, 1970년경에 주요 가전제품이 거의 보편화되면서 힘겹고 지루한 허드렛일이나 손으로 하던 빨래나 장작을 나르고 물을 길어오는 일은 대체로 사라졌다. 

베이비붐으로 높아진 출산율은 1960년대 중반부터 떨어져, 여성들은 집에서 나와 사회활동에 뛰어드는 등 자신의 시간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전후 초기만 해도 대학 강의실은 남학생 일색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 졸업자의 절반이 여성들이었고, 2013년에는 여학생 비율이 다시 58%로 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절반을 넘어 1970년에 4분의 3에 이르렀다. 높아진 교육 수준의 가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많았던 미성년 노동이 사라지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전후에 마련된 전역군인지원법으로 돈이 없어도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면서 대학 졸업자 수는 크게 늘었다. 고등학교 졸업자와 대학 졸업자의 비율의 계속적인 증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노동자 사회에서 중산층 사회로 넘어가는 기반이 되었다. 

1930년대에 사회보장법이 채택되고 전후에 확정급여형 연금 플랜이 확산되고 노사협약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몫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면서, 고령자들의 소득 안정성은 빠르게 개선되었다. 노동자들은 62세가 되면 은퇴했고, 선벨트의 컨트리클럽이나 골프 촌락으로 주거지를 옮겨 여가생활에 눈을 돌렸다. 기대수명이 늘어나 은퇴 기간이 20년 이상으로 늘어나자, 이 제도의 재정적 활력에 관한 우려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1980년대 이후로 기업들은 점차 확정급여형 연금 플랜을 중단하고 401(k) 확정기여형 플랜으로 대체했다. 확정기여형 플랜은 투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거나 일시적인 실업이나 배우자의 실직으로 미리 돈을 꺼내 쓴 퇴직자들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제도였다. 

이 장에서 다룬 주제 두 가지는 경제성장을 계속 둔화시키는 유력한 원인을 밝혀냈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아울러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완화되면서,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와 재능을 할당하는 문제가 크게 개선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런 변화는 1960~1990년 사이에 미국 경제를 15% 또는 20%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2000년 이후 떨어지고 백인과 흑인의 임금격차가 1990년 이후 평탄면에 도달하면서 그 중요성은 확실히 줄어드는 것으로 밝혀졌다. 성장세를 둔화시키는 또 다른 원인은 줄어드는 교육 수준의 상승이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비율은 이미 오래전인 1970년에 평탄면에 도달했다. 4년제 대학 졸업자의 비율은 느리나마 꾸준히 증가했지만 최근에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졸업장에 어울리는 직업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학 등록금이 빠르게 치솟고 최근에 졸업한 사람들의 빚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대학 졸업자의 수는 더 이상 늘지 않던가 아니면 줄어들 가능성이 많다.


쉬어가는 글 : 느려진 성장에 대한 이해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실질 GDP의 공식 집계가 1870년 이후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의 여러 측면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질 GDP는 1인당 생산량이나 시간당 생산량을 분수로 나타낼 때 분자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실질 GDP가 이런 진전된 측면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면 이들 핵심 부분의 성장률도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이 새로 발명된 재화와 서비스로부터 받은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앞의 쉬어가는 글에서는 1870년과 1940년 사이에 실질 GDP 자료에서 빠진 생활수준의 혁명적인 변화의 사례들을 열거했다.

실질 GDP에 잡히지 않은 개선사항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전등의 밝기와 편리성과 안전성, 냉장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식품의 변질 방지,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해 도시의 거리에서 말의 배설물이 사라진 점, 자동차 전용도로 건설, 자동차와 민영 항공기의 속도와 운송능력으로 인해 나타난 인간 활동의 획기적인 변화, 전신과 전화로 인한 즉각적 소통의 가치, 축음기나 라디오나 영화의 발명이 가져다준 엔터테인먼트의 가치 등은 실질 GDP에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도 있다. 깨끗한 수도물이 들어오면서 물을 길어오고 내버리는 노역이 사라진 점, 옥외 변소가 실내 화장실로 바뀐 점, 미성년 노동에 종사했던 10대 남자아이들이 고등학교 교육을 받게 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아사망률이 1890년에 22%였다가 1950년에 1%로 크게 떨어진 점 등이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든 가정에 엄청난 가치를 제공한 이런 변화는 1940년경에는 미국 도시에서 일어났고 1970년에는 농촌과 소도시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2부에 해당되는 1940~2015년 기간에는 실질 GDP 증가율의 저평가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우선 에어컨으로  인한 안락함이나 생산성과 지리적 입지의 변화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물가지수는 TV의 놀라운 질적 도약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나타나는 엔터테인먼트의 다양성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흡연의 위험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를 비롯하여 의술이나 과학 지식의 발전은 기대수명을 꾸준히 늘려왔지만 이것 역시 실질 GDP에서는 따지지 않는다. 갖가지 유형의 사고율, 자도아와 비행기로 인한 사망률도 1940년 이후로 꾸준히 감소했다. 시민권 관련 법안과 여성의 노동인구 편입에 이은 전문직 편입 등 인권과 관련된 변화는 수돗물과 가전제품의 등장이 고되고 지루한 가사노동을 몰아낸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헤아리기 힘든 가치를 창출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1970년 이후로는 생활수준의 변화에 대한 실질 GDP의 저평가 정도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동차의 질적 향상과 대형화된 신축 주택으로 인해 향상된 생활수준의 두 가지 측면이 비교적 정확하게 실질 GDP에 반영된 것이다. 1986년 이후로 물가지수는 메인프레임과 퍼스널컴퓨터의 가격 대비 성능 비율에서 빠른 발전의 상당 부분을 실질 GDP에 반영해내곤 했다. 무엇보다도 성장에 대한 실질 GDP의 저평가 정도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서 그 심각성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것은 1970년으로 끝난 특별한 세기에 비해 1970년 이후로는 변화의 성격에서 혁명적인 특성이 ㅁ낳이 줄었기 때문이다. 실질 GDP와 생산성 통계가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의 우수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들은 경제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로 이루어진 발전이나 다기능적인 스마트폰보다 풜씬 더 중요한 혁신적 변화의 과정을 실질 GDP 변화가 저평가했다는 사실은 종종 잊는다.


3부. 빨랐던 성장 속도가 느려진 원인


제16장. 1920년대에서 1950년대로의 대약진 : 그 기적의 원동력

현대 경제사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우선 로마시대부터 1750년까지 2,000년 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1인당 실질생산량은 어떤 이유로 긴 동면에서 빠져나와 성장의 기지개를 켰는가? 왜 미국의 경제성장은 20세기 중반, 특히 1928~1950년 사이에 그렇게 빨랐는가?

가장 특이한 부분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 대약진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대공황이 없었다면 뉴딜로 없었을 것이고, 산업부흥과 와그너법도 없었을 것이다. 와그너법은 노조 결성을 장려하고 실질임금의 가파른 상승과 평균 주간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해서 높아진 실질임금과 짧아진 노동시간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이전인 1930년대 말의 생산성 급상승에 큰 힘이 되었다. 민간설비투자에 관한 자료를 보면 실질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다. 1937~1941년에 자본에 대한 설비투자비율은 1920년대 말보다 한참 치솟았다.

또 한 가지 대공황이 미친 더 미묘한 영향은 생산량과 이윤이 급격히 떨어져 가혹할 정도로 비용절감(특히 직원 해고)을 단행한 뒤에 이루어진 구조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도 생산량이 제로 수준까지 떨어지지는 않았고, 얼마 되지 않은 수의 직원들로 그 정도 생산량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효율성을 높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반증이었다. 그런 아이디어와 기술은 대부분 1920년대부터 실행해왔떤 것들이었다.  1930년대에 자동차의 마력이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 증거를 보면, 전동 공작기계와 손공구의 힘과 효율성도 1930년대에 역시 크게 향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보다 조금 더 확실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고압경제 기간 중에 일어난 생산성 향상의 경험학습이다. 경제학자들은 그동안 리버티 운송선을 건조한 속도와 효율성이 계속 향상되었던 현상을 연구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노동생산성의 급증 현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것도 끝도 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다. 1945~1947년 동안 전시 방위비 지출은 빠르게 감소했지만, 노동생산성은 전쟁 직후 몇 년 동안 조금도 줄지 않았다. 전쟁의 필요성은 향상된 생산기업을 발명하는 모태가 되었고, 크고 작던 이런 혁신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잊히지 않았다.

기존의 공장과 설비의 효용성도 증가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방정부는 전혀 새로운 제조 부문에 자금을 지원하여 새로 공장을 짓고 생산설비를 들여놓게 해주었다. 전후의 생산성 증가는 공작기계의 수가 1940~1945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난 사실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연방정부가 민간 부문의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구입한 추가적인 생산설비의 양은 경이적인 규모였다. 1940~1945년까지 연방정부는 전쟁 전인 1941년에 존재했던 민간 소유 설비의 50%에 달하는 생산설비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1941~1950년까지의 기간에 사들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자본은 1941년 존재했던 민간 소유의 자본보다 더 현대적이고 생산적이었다.

대공황과 그 뒤에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대한 설명을 넘어, 우리는 개혁의 속도 자체를 고려해야 한다. 대약진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기계의 품질 향상이었을 것이다. 대공황의 트라우마도 미국인의 발명 동력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1930년대 후반에는 혁신의 속도가 올라갔다. 앞선 여러장에서는 라디오와 영화의 빠른 질적 발전, 자동차 품질의 비약적인 발전의 증거들을 제시했다. 1940년에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고속도로가 허용하는 만큼 빠르게 갈 수 있는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꿈을 이루었다. 이런 기술적 경이에 어울리는 고속도로의 발전은 주로 1958~1972년에 대체로 모습을 갖춘 주간 고속도로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은 석유와 합성수지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중간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사스 동부 유전의 발견부터 지금은 아주 흔하게 접하는 여러 유형의 합성수지 개발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는 '기술 진보의 10년'이라는 영광에 빛을 더했다. 모든 종류의 생산자와 내구소비재에서 합성수지의 용도는 생산 체제가 전시 용도로 전환되기 전인 1941년에 이미 그 실체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경제성장에 감추어진 수수께끼를 풀려는 우리의 연구는 두 가지 중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경제를 장기 침체에서 구했으며, 전쟁이 없었다는 가정 라애 1939년 이후의 경제성장을 생각하는 가설적 시나리오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기존의 경제사와 비교할 때, 19세기 말의 '위대한 발명' 특히 전기와 내연기관은 1920년대뿐 아니라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생산 방법을 바꿔나갔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필드는 1930년대가 '가장 진취적인 10년'이었다는 신서ㄴ한 주장으로 미국 경제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제17장. 혁신 : 미래의 발명은 과거 위대한 발명의 맞수가 될 수 있을까

TFP 실적에 관해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빠른 성장이 1890년 이후 120년 남짓한 기간에 골고루 분배된 것이 아니라 20세기 중반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1920~2014년의 성장률은 매년 064%에 그쳐 1920~1970년 동안 속도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이 장에서는 1920~1970년에 TFP가 급등한 것이 2차 산업혁명의 위대한 발명의 중요성을 반영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3차 디지털 산업 혁명은 미국인들이 정보를 입수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지만, 2차 산업혁명만큼 인간 생활의 전 영역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해석이다. 2차 산업혁명은 음식, 의복, 주택, 주택설비, 운송, 정보, 통신, 엔터테인먼트, 질병 치료와 유아사망률 정복, 가정과 직장에서의 근로 조건의 향상 등 여러 차원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1920~1970년 기간에 나타난 TFP증가율의 급등은 2차 산업혁명의 세 지류를 통해 절정에 달했다. 주간 고속도로를 이용한 고속 여행, 제트 민항기를 이용한 항공여행 그리고 에어컨의 보급 등은 1940년 전에 이미 현재의 모습을 갖춘 뒤, 이후로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3차 산업혁명의 영향은 1994년~2004년의 10년의 가간에 초점이 맞춰졌다. TFP는 연 1.03%의 비율로 성장하여 1920~1970년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지만, 1970~1994년 연 0.57%와 2004~2014년의 0.4%보다는 한참 빠른 속도를 보였다. 우리의 해석 중에는 인터넷 브라우저가 등장했던 1990년대 중반에, 통신과 PC의 결합과 우연히 일치하는 사업관행의 일회성 혁명이 있었다. 사무실은 서류 더미와 파일로 가득한 캐비넷을 버리고 평면 스크린과 클라우드 스토리지로 탈바꿈했다. 두꺼운 종이로 된 도서관의 목록 카드와 공장의 부품 목록은 검색할 수 있는 비디오 화면으로 바뀌었다. TFP 증가율은 곧바로 반응했지만, 2004년에 웹으로 과도기를 넘길 수 있는 요인이 발생했을 때, TFP의 수준은 높은 평탄면에 도달했고 이후의 증가율은 뚜렷하게 더뎌졌다.

이 장에서는 1994~2004년에 나타난 TFP의 빠른 성장이 두 번 다시 반복되기 어려운 일시적 현상이었다는 증거를 두 가지 유형으로 취합했다. 

첫 번째는 사례 설명을 통한 평가로, 이들 평가는 사무실이나 유통매장이나 금융시장에서의 업무 관행이 1994~2004년의 10년 기간에 요즘과 같은 방식으로 빠르게 전환한 이후 변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고 판단한다.

두 번째는 여섯 가지의 객관적 척도를 통한 평가로, 이들 평가는 모든 척도가 1990년대 말에 최고로 활성화되었다가 최근 10년 동안 성장 속도가 급격히 둔화되거나 정체되거나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사례는 뉴욕 증권거래소의 일일거래량, 창업률, 제조업 생산능력의 증가, 순투자 비율, 컴퓨터의 가격 대비 성능의 향상 속도, 컴퓨터 칩의 밀도 증가율 등이 포함된다.

이번 장에서는 인간의 활동을 흉내 내고 떄로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향상된 역량과 관련하여 테크노 낙관론자들의 흥분과 지난 10년 동안 계속 느려진 TFP의 증가율의 모순적 현상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한 것이 200년 이상 계속되었고,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대신한 것이 50년 넘도록 계속되어 왔다는 점이다. 금융전문가, 신용분석가, 보험대리인 같은 직업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그렇게 밀려난 노동자들은 여행사 직원, 백과자전 외판원, 보더스나 블록버스터 직원처럼 지난 20년 동안에 웹의 등장으로 직장을 잃은 희생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러나 이런 일자리가 사라졌다고 해도 2015년에 미국의 실업률이 거의 5%까지 떨어지는 기세는 막지 못했다. 사라진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나타나 이를 메웠기 때문이다.

맥주나 빵이나 음료수 같은 상품들은 여전히 매장 직원이나 화물차 운전사의 손을 빌려야 선반에 진열될 수 있다. 유통매장의 계산대는 로봇이 아닌 인간이 계산과 포장을 처리하며, 셀프계산대는 여전히 한산하다. 미용, 마사지, 손톱 단장 등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 영역이고, 식당의 조리사나 서빙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호텔의 프런트데스크는 여전히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룸서비스도 로봇이 아닌 사람의 일이다. 일자리를 없애는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바뀌는 과정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빙하가 움직이듯 보이지 않는 속도로 진행된다.

혁신을 경계하는 사람들은 <로봇과 알고리즘은 어떻게 세상을 점령하는가> 같은 제목의 글을 통해 앞으로 로봇과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한 생산량이 늘어나리라 예언한다. 다음 몇십 년에 대한 그들의 예측에는 두 가지 비전이 다툼을 벌인다. 우선 테크노 낙관론자는 직업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며, 폭발적인 생산성 성장은 항구적인 대량 실업 사태의 다른 말이라고 예측한다. 이와 상반된 쪽에서는 최근의 10년을 근거로 삼아 지금이나 앞으로나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고용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겠지만, 2004~2014년 동안 관측된 노동생산성의 낮은 성장률은 계속 되리라고 그들은 예측한다. 

테크노 낙관론자는 인간을 대신하는 기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미래의 생산성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반면 일자리를 없애고 대량 실업 사태를 야기하는 비판적인 예측을 내놓는다. 반면 테크노 비관론자의 견해는 여러 차원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과거 10년 동안 거시 경제에 미친 로봇이나 인공지능의 영향이 대단치 않았으며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의 변화가 느렸다는 점을 강조한다. 테크노 낙관론자들이 일자리 증가에 비관적인 것처럼, 테크노 비관론자들은 일자리는 계속 늘어날 것이고 기술이 일자리를 몰아내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낙관한다.

미국 경제는 다시 어느정도 완전고용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로봇과 인공지능이 새로운 영구적 실업 사태를 초래하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컴퓨터 시대가 초래한 문제는 대량 실업이 아니라 버젓하고 안정적인 중간 수준의 일자리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일자리는 로봇과 알고리즘 뿐만 아니라 세계화와 해외로 아웃소싱하는 관행으로 피해를 입고 있으며, 아울러 비교적 임금이 낮은 육체노동에서만 일자리가 늘고 있다.   


제18장. 불평등과 그 밖의 역품 : 둔화되는 미국의 장기 경제성장

17장에서 1970년이 TFP의 증가율이 빨라졌다가 느려지는 분기점이었던 것처럼, 혜택이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갔던 1970년 이전의 성장과 1970년 이후의 불평등한 성장 사이에는 각 계층의 사이가 좁혀지지 않고 따로 움직였던 과도기가 있었다. 지난 40년 동안 꾸준히 심화된 불평등은 미국인의 생활수준 성장률의 속도를 늦춘 강한 역풍이었다. 상위의 소득, 특히 상휘 1%의 소득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는 사실은 연예계나 스포츠 슈퍼스타들의 소득, 기업 고위 임원진 보수에 대한 유인변화, 부동산과 주식시장에서의 자본 증가 등 상위 소득을 크게 끌어올린 여러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위 90%의 소득 정체는 중간 소득의 일자리를 없애는 자동화의 영향, 노조 세력의 약화, 최저임금의 구매력 저하, 제조업을 위축시키는 수입 제품의 영향, 고급 또는 하급 기술직 이민자들의 역할 등 설명할 수 있는 원인도 여러 가지다.

교육역풍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세번째 인구 역풍은 인구를 하나의 통합된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몇몇 특정 집단과 그 하위 집단으로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젊은 층의 경제활동참가율 감소는 1인당 노동시간을 줄이고 1인당 생산량으로 정의되는 생활수준이 시간당 생산량으로 정의되는 노동생산성보다 더 느리게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만든다.

네번째 역풍은 정부부채다. GDP에 대한 정부부채 비율은 앞으로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하는 납세자에 비해 은퇴자가 많아지게 되면 사회보장 세제에 대한 현재의 세율을 바꾸고 복지수당 수령 수준도 바꾸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해질 것이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교육 체제가 흔들리고 인구학적 역풍이 불고 재정 조정 필요성이 높아지면 실질 중간 가처분소득의 증가율은 앞으로 훨씬 느려질 것이다. 1970년 이후로 생산성에 미치는 혁신의 영향이 더 작아지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성장의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불평등, 교육, 인구, 정부부채 등 네 가지 역풍이 결합되었을 때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수치로 환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곳곳에서 나타나는 미국 사회의 와해 징후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비율로 측정하든, 저소득 미취학 아동의 부족한 어휘력으로 측정하든,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젊은 백인이나 흑인들의 비율로 측정하든, 사회가 쇠약해지고 있다는 징후는 21세기 미국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미국의 성장 실적과 향후의 진로

미국의 성장은 1970년 이후 속도가 둔화되었는데, 그것은 발명가들이 총기를 잃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바닥나서가 아니라, 그때쯤 음식, 의복, 주택, 운송, 엔터테인먼트, 통신, 건강, 근로 조건 등 현대적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많은 기본적 차원에서 이룰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70년을 전후로 밀려온 혁신의 물결의 시점은 미국 성장의 흥망을 가르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계속된 성장률의 하방 압력은 네 가지 역품으로 가뜩이나 미약한 미국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켰다. 약화되는 불평등은 소득증가분의 상당 부분을 최고 1%로 몰아주어, 하위 99%의 몫을 더욱 위축시켰다. 20세기 내내 빠르게 성장했던 교육 수준은 더 이상의 상승세를 마감하여 생산성 성장을 감소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1인당 노동시간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함께 줄어들고 있다. 늘어나는 은퇴 인구와 줄어드는 생산연령 비율과 늘어나는 기대수명은 2020년 이후로 GDP 대비 연방부채 비율을 감당할 수 없는 궤도로 밀어 올리고 있다. 이 네 가지 역풍은 향후 25년 동안 1인당 실질가처분소득 중앙값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사실상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전례없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948~1973년까지 소득분포의 대압착은 상위부터 하위까지 실질임금을 빠르게 증가시키며 세계 최초의 대량 소비사회를 만들어냈다. 평범한 시민들도 자동차와 TV와 가전제품과 교외의 주택을 소유할 수 있었다. 현명한 정부는 사회로 복귀한 전역 군인에게 무상 대학 교육과 저비용 모기지를 제공했다. 의회는 1964년 공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 등 활발한 입법 활동으로 시민권을 고취시켰고, 1965년에는 고령자를 위한 메디케어와 극빈자를 위한 메디케이드를 도입했다. 여성들은 노동시장에 진출하고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2010년에는 대학 졸업자의 58%를 차지하며 전문직에서 자신들의 진가를 당당히 입증했다. 미국 발명가들이 일으킨 지속적인 혁신의 물결은 치밀하고 공격적인 벤처캐피탈산업을 뒷받침하는 자금으로 탄력을 받았고, 그 공은 인터넷 초기 개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 국방부와 정부 지원을 받은 과학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성장 중심 정책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원래 근본적인 문제의 성격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미국의 혁신 기제가 그 자체로 건강하게 작동할 때는, 혁신을 장려하겠다고 정부가 정책적으로 쉽게 개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한동안의 저금리 정책과 높은 수익률로 기업들은 필요 이상의 투자자금을 제공받았기 때문에 , 앞으로 정책이 투자를 끌어올릴 여지는 거의 없다. 대신 교육은 정책으로 생산성 증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실속 있는 분야다. 게다가 여러 유형의 교육 역풍을 극복하는 문제는 생산성 성장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육 체제, 특히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 체제를 향상시키면 심화되는 불평등을 억제할 수 있고 빈곤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겪는 여러 장애들을 걷어낼 수 있다.

갈수록 심화되는 불평등은 40년 전보다 소득 파이를 훨씬 많이 차지한 최고 소득자들에게 더 높은 세금을 물림으로써 억제할 수 있다. 아래쪽에서 최저임금을 높이고 근로소득 지원세제를 확대하면 경제적 파이의 더 많은 부분을 아래쪽 절반에 있는 사람들 쪽으로 되돌릴 수 있다.

미국의 규제 장벽은 저작권과 특허법을 통해 과도한 독점적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혁신을 제한하고, 직업면허제한을 통해 현재의 서비스 제공자를 보호함으로써 직업 선택을 제한하고, 토지 사용을 규제함으로써 인위적인 희소성을 만들어낸다. 이런 규제 장벽은 생산성을 줄이는 한편 불평등을 조장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재의 저작권법이 저작권 침해를 범죄시하고 비상업적 복제를 금지시킴으로써 인터넷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무리수를 고집하고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허법은 소프트웨어와 영업방식 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확대되었다. 모리스 클라이너는 면허가 필요한 일자리의 비율이 1970년 10%에서 2008년에는 30%로 늘어났다고 지적한다. 면허제는 고용 기회를 줄이고 새로운 중소기업의 창업을 제한하고 저소득자의 신분 상승을 가로막는다. 면허제는 새로운 기업의 창업률을 줄이기 때문에 사업 역동성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제한구역 설정과 토지 사용 규제를 규제세라 부른다. 규제세는 풍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재산을 풍족한 사람들에게 이전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유한 사람들과 떼어놓음으로써 거주지 분리를 조장하고, 주택 가격을 부풀림으로써 생산적인 대도시 권역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생산성이 떨어지고 집값이 싼 지역으로 몰아낸다. 이런 과도한 규제의 사례들은 모두 불평등과 연관이 있다. 이런 규제는 소득과 부를 특허, 면허, 저작권, 토지 사용 제한 등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에게 재분재한다. 규제들은 대부분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관할로 연방정부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 밖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런 규제와 그밖에 지나친 규제를 되돌려놓는 것은 불평등을 해소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데 당장 필요한 정책 수단이다.

생산성 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1인당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해소하기 어려운 근본적 원인 때문이다. 지금까지 제시한 모든 정책 발의를 실행에 옮겨도 1인당 가처분실질소득의 중앙값은 크게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경제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이런 조치들이 합쳐지면 보다 평등하고 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 역풍을 잠재우고 프리스쿨 교육을 비롯한 시급한 정부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세수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