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착각 by 엘렌 랭어
정신은 어느 정도까지 육체에 영향을 미칠까? 갓 구운 도넛을 냄새만 맡으며 먹는다고 상상할 때도 혈당 수치가 올라갈까? 평소 치아 상태가 최상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치아 엑스선 촬영 결과가 더 좋게 나올까?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된 사람들은 스스로 빨리 늙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리적으로도 머리숱이 많은 사람보다 신체 나이가 많게 나올까? 성형수술로 생김새가 젊어진 여자들은 남자보다 천천히 늙어갈까? 이 같은 의문이 ‘막연해’ 보일지 몰라도, 의문을 품어볼 가치는 있었다.
우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신체가 아니다. 신체적인 한계를 믿는 사고방식이다. 지금 나는 질병의 진행과 관련해 우리가 반드시 옳다고 여기며 따르는 의학 지식 중 어느 것도 진실로 여기지 않는다. 일군의 노인들이 각자의 인생에 그토록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한계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지식을 어떻게 얻었는지, 근거로 삼은 사실은 무엇인지, 그 같은 사실을 도출한 과학을 믿어도 되는지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이처럼 아무런 비판 없이 정보를 받아들인 탓에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인 것이 실제로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연구에서는 여자들이 생일 전주보다 다음 주에 죽는 경우가 더 많다. 반면 남자들은 생일 전주에 더 많이 죽고 생일 다음 주에 사망하는 확률은 평균보다 높지 않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정보를 구성하는 방식이 실제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뜻. 예컨대 여자들은 자신의 생일을 준비하며 희망을 품고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고대하는 경향이 있지만, 남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무언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일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어나게 만들 방법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음을 의미. 만일 어떤 질병이 치유 불가능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고 믿는다면, 무의미한 노력이라며 병을 치료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의학이 정복한 질병은 대부분 한때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단지 규정할 수 없었을 뿐.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음을 감안하고, 우리는 자신만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의학계를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나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이 얼마나 생각 없이 일어날 수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터무니없는 정보가 주어져도 그것이 기존에 지닌 믿음이나 깊이 뿌리박힌 행동 양식에 들어맞는다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우울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삶이 흡족할 때의 감정 상태를 스스로 확인하지 않기 때문. 기분 좋을 때는 대다수가 감정의 근거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반면 우울할 때는 불행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으려 든다. 우울할 때는 이유를 묻고, 행복할 때는 묻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 상태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얻지 못하며 행복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항상 우울하다고 가정.
의사의 진단 도구는 대다수의 환자 집단을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는 있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우리’가 아니다. 연구 결과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원래 조사 때 존재하던 변수의 수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면 결과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환경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본인의 잘못으로 여기곤 한다. 문제를 환경 탓으로 돌리거나 욕구가 충족되도록 구성을 바꾸려는 시도는 좀체 하지 않는다. 부엌 꼭대기 선반의 접시에 손을 뻗다가 사고로 떨어뜨리면 자기 부주의로 접시를 깨뜨렸다고 생각. 이때 접시에 손을 뻗으면서 딴생각을 한 탓이라고 여긴다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그 선반이 나보다 키 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탓임을 인식한다면 더욱 나아질 것. 이런 깨달음과 함께 나의 필요에 더 잘 맞도록 선반을 다시 설계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약물은 젊은 성인을 실험 대상으로 하는 것이 보통. 그 결과 노인들은 종종 약물을 과다 복용해 왔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약물의 효과가 떨어질 테니 젊은 성인들은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노인과 유사하고, 젊은이와 유사한 노인들도 분명 있다. 따라서 우리 중 일부는 충분한 약물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지만 일부는 지나치게 과다 복용중.
유니폼은 일상적 의복보다 나이 제한을 덜 받으므로,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이 본인의 옷을 입고 일하러 가는 사람에 비해 나이 관련 단서에 노출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유니폼을 입지 않는 부유층 개인들은 같은 수준에서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보다 건강이 나빴고, 소득 범위에서 더 높이 올라갈수록 그 효과도 커졌다.
우리는 대머리가 아닌 남자들에 비해 조기 탈모로 대머리가 된 남자들이 전립선암과 관상 동맥 심장 질환으로 진단받을 위험이 더 크다는 사실도 확인.
젊은 단서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더 오래 살 것으로 예상. 실제 일찍 아이를 낳은 여성들보다 늦게 낳은 여성들의 평균 수명이 길었다. 어떤 연령대든 아이들을 기르며 겪는 심신의 소모를 고려한다면 반대의 결과를 예상하기 십상인데 말이다. 배우자와 4살 차 이상인 부부와 그 미만인 부부를 비교. 현저히 어린 배우자의 경우 훨씬 나이가 많은 쪽의 배우자보다 수명이 짧았다.
팔다리 벌려 높이뛰기를 100개 또는 200개 실시한 뒤 언제 피곤해졌는지를 조사. 두 집단 모두 2/3 시점에서 피로를 응답. 첫 번째 집단은 65~70개 정도를 한 뒤, 두 번째 집단은 130~140개 정도 후에 피곤.
또 다른 실험에서는 1p 또는 2p 워드프로그램 진행. 1p 집단의 경우 대부분의 실수가 끝내기 2/3 지점에서 오타가 발생. 두 번째 집단은 분량이 2배가 되는 데도 2쪽의 2/3 지점까지 실수를 하지 않았음.
우리가 육체적인 한계로 여기는 상당수가 학습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는 처음, 중간, 끝 같은 개념을 배웠고 우리 몸은 그에 맞춰 행동.
숫자는 모호함을 숨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대상화함으로써 자기 충족적인 예언으로 이끌기도 한다. 숫자는 정확성에 대한 환상도 심어 준다. 42세와 54세인 사람을 비교해보자. 첫 번째 사람이 더 젊다는 것 외에 두 사람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전자가 더 건강하거나 더 활력 넘치는지, 더 창의력이 있는지 알아낼 방법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 우리는 애당초 그들에게 나이를 물어본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25세 남자가 세발자전거를 타기 어려워하는 까닭이 기다란 팔다리와 보족한 유연성 탓이라고 결론 내리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세발자전거가 25세 남자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듯, 자동차 좌석도 75세 노인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5세 노인이 차에서 내릴 때 어려워한다고 그 사람에게 결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25세 젊은이가 세발자전거 경주에서 무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노인들은 기억력 검사 수행 능력을 포함해 젊은이들의 관심사에 단순히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건망증이 심한 것처럼 보일 가능성. 어떤 개인에게 전혀 관심 없는 정보가 주어진다면, 그 정보는 기억 저장고에 담기지 못할 것. 시간이 지나 그 정보 관련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 정보는 잊혀진 것일까? 어쩌면 노인은 우리의 추측만큼 건망증이 심하지 않다.
많은 노인에게 노화는 점점 좁아지는 자아 정의와 관련이 있다. 능력이나 기회, 관점의 변화는 스스로 자신의 ‘과거 모습’과 현재를 비교함으로써 지금 맞닥뜨린 한계에 집중하도록 만들 수 있다. 노화를 한계나 상실감이 늘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행동을 곧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제한된 특정 행동의 측면에서만 자신의 본 모습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자아를 정의하는 범주에 이해와 행동을 구체화하는 환경적, 동기적 영향의 다양성을 확장시킨다면, 나이 든 사람들도 단순히 상실감을 느끼는 대신 일생에 걸친 연속성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우리는 정신을 지배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격렬히 반대하는 사이, 우리는 몸에 대한 통제력을 너무 쉽게 포기한다. 이제는 통제력을 되찾고 의식을 집중해서 우리의 몸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도 똑같이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