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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by 알랭 드 보통

hoyony 2023. 2. 26. 00:01

1. 사랑결핍

 

먹을 것과 잘 곳이 확보된 뒤에도 사회적 위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곳에서 물질이나 권력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ㅡ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ㅡ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가족에서 나타나든, 성적 관계에서 나타나든, 세상에서 나타나든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볼 수도 있겠다. 우리의 존재에 주목하고,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우리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고, 약점이 있어도 관대하게 받아주고, 요구가 있으면 들어주기 때문.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 가난한 사람은 들락거려도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다. 군중 속에 있어도 자신의 오두막 안에 처박혀 있을 때나 다름없이 미미한 존재일 뿐. 반면 지위와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주목.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목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2. 속물근성

 

어렸을 때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 아무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으며,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무조건적인 애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 그런 인물들의 행동은 지위에 대한 우리의 불안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

 

3. 기대

 

서양 문명 2000년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부, 식량, 과학지식, 소비 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이 증가했다는 사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 없고, 중세 조상의 생활과 비교하여 판단할 수도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전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우직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 :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상태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귀족 계급의 지원을 받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사회는 그 참상에도 불구 오늘날에는 맛보기 어려운 행복을 누렸다. 민중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자와 동등해지기를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지만 반감을 품지도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여겼다.

 

하버드 심리학 교수 윌리엄 제임스 :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이룬 것
내세운 것

이 방정식은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암시.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 제임스는 두 번째 방법의 장점을 지적.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4. 능력주의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 문학과 과학에 세습제를 적용하면 이 두 분야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생각하며 혼자 웃음을 짓곤 한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정부에도 적용해본다. 세습적인 통치자는 세습적인 작가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호메로스나 유클리드에게 자식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있었다 해도, 그들이 완성시키지 못한 작품을 아들이 완성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경제적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속이나 다른 유리한 조건 없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개인은 과거 아버지에게서 돈과 저택을 물려받았던 귀족은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개인적 정당성의 요소를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 실패는 과거에 삶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던 농민은 다행스럽게도 겪을 필요가 없었던 수치감과 연결되었다. 훌륭하고, 똑똑하고, 유능한데도 왜 여전히 가난한가 하는 문제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답을 해야 하는(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더 모질고 괴로운 문제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자 하버트 스펜서 <사회통계학> : 과부와 고아가 죽기 살기로 안간힘을 쓰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럼에도 그 일을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보편적 인류의 이익과 연결시켜보면, 그런 가혹한 불행도 은혜가 넘치는 일로 보게 된다. 병든 부모의 자녀를 일찍 무덤으로 보내는 것과 똑같은 은혜다…‥ 자연 질서에 따라 사회는 병약하고, 저능하고, 느리고, 우유부단하고, 신의 없는 구성원을 끊임없이 배설하고 있다.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다면 살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사는 것이 좋은 일이다. 만일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지 않다면 죽을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죽는 것이 최선이다.

 

능력주의 사회의 비옥한 귀퉁이에서 움트는 더 가혹한 의견들에 따르면, 사회적 위계는 단계마다 거기에 속한 사람의 자질을 엄격하게 반영한다고도 한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들이 성공하고 게으름뱅이가 실패할 조건은 이미 굳어져 있는 셈이고, 결국 자선, 복지, 재분배 장치, 단순한 동정의 필요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해 법

 

1. 철학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 이성을 도입. 이성의 규칙을 따르면 주어진 결론은 타당성 있는 최초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거쳐 도출되었을 경우에만 참으로 간주.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 철학은 주류의 가치 체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당하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인정. 다만 이런 불의가 벌어질 경우, 우리는 철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후광 없이도 사랑받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오 데 미아 윤리학>

- 철학적 이상 +
용기 무모함
인색함 관대함 낭비
줏대없음 온화함 격분
촌스러움 재치 익살
무뚝뚝함 친근함 아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져있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그러다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샹포르 :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 사회의 소두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멍청하고 허약하고 흉물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 :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염세주의 철학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려면 우리 지위를 단속하려는 미숙한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지위를 단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는 우리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과 결투하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가치를 느껴야 하는데, 사실 이때 느끼는 만족감이 근거가 더 탄탄하다.

 

2. 예술

 

옥스퍼드 대학 시학교수 매수 아널드 <교양과 무질서> :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거기에서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해 도덕적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예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나 죄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조롱.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사람들이 비극 예술에 담긴 교훈을 받아들인 세계에서는 실패의 결과가 우리를 그렇게 심하게 짓누르지는 않을 것이다.

 

변태와 정신병자, 실패자와 패배자를 이야기하는 신문이 이해의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있다면, 비극은 반대편 끝에 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3. 정치

 

자동차 광고는 광고에 나온 자동차를 소유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을 망칠 수 있는, 또는 적어도 약화시킬 수 있는 심리의 여러 측면이라든가 소유의 전반적 과정을 교묘하게 무시해버린다. 어떤 것을 소유하고 나서 얼마 후에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자꾸 보게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임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행복의 가파른 절벽을 다 기어 올라가면 넓고 높은 고원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 한다. 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의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어리둥절한 채 우울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똑똑히 뜨고 그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해보면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 역시 자연스럽지도 않고 신이 주신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생산과 정치 조직의 변화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후 유럽과 북미로 퍼져갔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주입되어 있는 물질주의, 기업가 정신, 능력주의에 대한 열망은 체제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4. 기독교

 

우리는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라서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은행은 폐허가 되고, 우리는 죽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룬 것들, 심지어 우리의 이름마저 땅에 짓밟힐 것이다. 이런 생각이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야망이 원대할수록 현실을 더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위에 대한 우리의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광대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회적 위계 내에서 우리가 하찮다는 느낌은 모든 인간이 우주 안에서 하찮다는 느낌 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 불가능하지도 않고 혐오스럽지도 않다는 생각은 지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 성공하여 피어날 것이냐 아니면 실패하여 시들 것이냐 하는 이분법의 그 가혹한 칼날도 약간은 무디어지는 것이다.

 

5. 보헤미아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를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