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주의 by 장하성
한국 자본주의 경제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
경제민주화가 화두인 이유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정리하자면 자본주의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통제하고 제어하는 체제로써 작동하도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조화롭고 균형있게 결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는 단지 일부 학자나 시민 단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에 명시되어 있다.
①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1항은 한국의 경제체제를 시장경제로 규정했고, 2항은 경제민주화의 내용을 규정했다. 특히 2항은 속득 불평등이 심해지거나 재벌과 같은 특정한 세력이 시장을 지배하고 경제 권력화 될 경우에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이를 규제하고 조정할 권리를 가지며, 정부는 이를 시정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988년 헌법 개정 시에 이 조항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김종인은 제119조 2항의 '경제적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부분은 '양극화 등으로 경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거나 흔들릴 우려가 커질 때 정부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 원용할 수 있는 비상 안정정치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경제민주화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생 원리'라고 규정하며, '경제민주화의 뜻은 어느 특정 경제 세력이 나라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의론>의 저자인 존 롤즈가 규정한 정의의 두 가지 원칙 중에서 '차등의 원칙'으로 알려진 두 번째 원칙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a) 사회의 최소 수혜자 성원에게 최대의 기대 이익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b) 공정한 기회균등이라는 조건 아래 모든 이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에 결부되어야 한다.
롤즈는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은 그 자체가 불의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유리한 불평등'이라면 정의로운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시장경제 때문에 발생한 불평등과 양극화를 저소득계층에게 유리하도록 바로잡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의미다.
보수 우파의 박정희 향수
보수 우파들의 박정희 향수나 박정희 찬양은 어떤 수단과 방식을 통해서든 경제성장을 가져왔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는 결과론적인 정당화이며, 기껏해야 전체주의적인 발상의 애국주의이지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이념적 신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니며 개발시대에 정치권과 재계가 공생하는 정경 유착으로 자신들의 확고한 기득권을 향유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깊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기득권이 침해당하지 않는 자유를 의미하며, 그런 자유를 반대하거나 걸림돌이 된다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반대파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시장이란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세력들이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방임을 의미하며,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을 위한 규칙이나 질서 따위는 그저 능력 없는 군상들의 시기어딘 질투이거나 아니면 소위 좌빨들의 이념 공세일 뿐이라는 것이다.
진보 좌파의 박정희 향수
한국은 서구와 같이 케인지안 정책을 추진한 적도 없고 복지의 부작용은커녕 복지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한국에서는 고복지 비용 부담을 위한 고세율 정책도 없었고, 더구나 과도한 재정적자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성장을 저해하고 실업을 양산하는 경험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규제라고 모두 같은 규제가 아니다. 서구의 규제가 시장의 안정과 질서, 그리고 시민의 안전과 복리에 집중된 반면, 한국은 특정 부문, 특정 기업, 심지어는 특정 개인을 승자로 만들기 위한 규제로 점철되었다. 정부 규제의 입안부터 추진까지 최소한 전제되어야 할 엄정성과 공정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관료의 임의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규제였다.
박정희식 경제구조를 지향하는 일부 좌파는 비록 보수 우파와 이념적, 정치적 지향성은 다르지만 적어도 재벌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 우파와 유사하게 박정희 향수에 젖어 있다. 개발 연대의 성공 원인을 재벌에서 찾고 있으며, 향후의 성장을 위해서도 그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보수 우파와 일치한다. 그들은 시장보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주주 자본을 자본조의 모순의 근원으로 보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일맥상통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독점자본인 재벌을 옹호한다는 점에서는 전혀 상반된 입장이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재벌이 잘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재벌을 성공하게 만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온 국민이 치러야 했던 비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노동 탄압과 통제를 통한 무노조, 저임금 정책으로 달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배분은커녕 국민으로서 권리인 기초적인 복지마저도 부재한 상황에서 산업 역군으로서 마냥 일만 열심히 했던 겨로가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경제 시대에 산업 역군으로 일했던 지금의 60대, 70대 이상의 세대들은 자신들이 일구어낸 지금의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절반이 빈곤층에 속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 독재 정부가 계도하듯 재벌들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기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온 가족의 희생으로 장차 가족의 생계를 짊어질 자식 하나를 대표 선수로 키워놓았는데, 성공한 자식은 자신의 영화만 누릴 뿐 가족들은 염두에도 없는 형국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신자유주의를 모든 사회적 관계를 시장경제적 관료로 재편하거나 시장경제적 관계에 최대한 종속시킴으로써 자본 운동의 자유를 극대화하려고 하는 정치적 이념이자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반독점 정책이나 공정거래 정책과 같이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독점으로 인한 폐해나 불공정거래를 바로잡기 위해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조차도 신자유주의다. 또한 불평등한 소득분배로 인한 양극화와 같은 계급 대립적인 경향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한 복지 정책을 시행하는 것과 같은 국가 개입도 신자유주의다. 사회적 경제도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적 영역과 시장경제적 업적을 기초로 사회 구성원의 복지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정책적 영역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재벌 개혁 정책도 자본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독과점 규제 정책, 복지 정책, 재벌 개혁 정책 그리고 사회적 경제까지도 신자유주의로 보는 것은 이러한 정책들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구조적 축적 위기를 반동적인 방식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시장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시장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자체를 부정하는 이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교정하려는 어떠한 노력이나 시도도 모두 신자유주의이며, 시장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이념으로 본다.
신자유주의의 남용과 범람
한국이 계획경제체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한 시기를 1990년대 중반이라고 본다면,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시행되기 시작한 시기보다 15년이나 지난 후다. 또한 이러한 한국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 배경은 미국과 유럽에서처럼 케인즈 주의적 시장경제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 전환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미국과 유럽에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정책과 규제를 통한 시장 개입, 강력한 노조 그리고 광범위한 복지 정책 등으로 대표되는 케인즈주의 정책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신자유주의가 출현한 1980년대 초 이전에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30여 년의 기간은 의료, 교육, 사회 서비스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고 그 질을 개선하는 복지국가의 역할이 확대된 복지국가의 황금시대였으며, 조직된 노동의 조직적 힘과 영향력이 증대한 기간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출현한 배경인 광범위한 복지 제도나 강력한 노조 같은 현상들은 한국의 개발 경제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미국과 유럽에서 신자유주의가 꽃을 피우던 199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에서는 목욕탕 요금과 자장면 값까지도 정부가 규제하는 계획경제를 하고 있었다. 계획경제 하에서의 정부의 시장 개입은 주로 재정 정책을 통한 케인즈 주의적 시장 개입 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에서는 케인즈 주의적 시장경제체제 단계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논쟁들은 이러한 차이를 무시한 채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시장경제를 구축하기 위한 정책들을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미국과 유럽에서의 논쟁을 바로 연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단계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시장 기능을 확대하는 정책을 무조건 싸잡아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향은 신자유주의 비판의 남용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의 남용은 부도난 기업에서 인력을 감축하는 구조 조정과 재벌 총수들의 불법행위를 견제하는 소액주주들의 권리 행사도 신자유주의로 비판할 정도다. 하청기업을 착취하는 재벌 기업의 불공정한 거래들은 반시장적인 것이다. 또한 산업자본인 재벌들이 은행까지 장악해서 자신들의 경제 권력을 확대하는 것도 반시장적인 것이다. 극히 적은 지분을 소유한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사적 소유물로 치부하고 노동자와 소액주주들을 포함한 이해당사자들의 이익을 탈취하는 불법행위는 반시장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 자유화를 시행하면서 불공정거래를 막는 정책과 재벌들의 은행 소유를 금지하는 정책은 자본주의 사장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지 영미식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니다. 기업 경영을 투명성과 책임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 지배 구조의 개선과 소액주주의 권리 강화는 잘못된 기업경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지 신자유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를 인정하거나 또는 부정하지 않으면서 시장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정책들까지도 시장만능주의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시장적인 재벌과 대기업
재벌들은 하지 않는 사업이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각 사업 분야에서 재벌의 시장 지배력을 가히 절대적이다. 신생 기업이 재벌 기업이 하지 않은 사업을 찾아서 성장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이고, 중소기업이 재벌기업이 하고 있는 사업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소수의 재벌 그룹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에서 소기업이 중기업으로, 중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기업 생태계가 한국에서 작동하지 않은 지 오래다. 중기업이나 중견기업마저도 대기업과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대기업의 하청기업으로서 성장하는 구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재벌 구조가 확고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과 같은 새로운 창업자의 성공 신화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미국과 같이 시장경제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도 100대 부자의 70%가 당대의 창업자인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거꾸로 100대 부자의 70%가 물려받은 부자라는 사실이다.
단기성과주의의 전도된 인과관계
단기 성과주의 경영의 문제는 한국 기업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주식 투자 기간이 가장 짧은 나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장기적인 투자를 하는 미국이나 영국에서와 같은 단기 성과주의 경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한국 주식 투자자들의 보유 기간이 몇 달에 불과할 정도로 짧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회사의 장기적인 경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달리 한국 기업들의 경영진들의 보수가 주가와 연동된 인센티브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일부 금융회사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장기 투자하는 기관투자자들의 경우에도 수익 관점보다는 수익 외적 관계에 더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증권회사와 투자자들이 재벌 그룹의 계열사이거나 또는 대기업과 투자은행 업무와 연관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식 투자자의 이해관계 보다는 회사의 영업적 이해관계에 더 얽매여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주주가 경영진에게 이익을 배당하도록 요구하는 경우들은 있지만 단기 성과를 내도록 압력을 행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주주가 주식회사의 주인인 이유
주식회사에서 주주를 회사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본을 제공했기 떄문만은 아니다.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 되는 이유는 다른 이해당사자보다 불리한 세 가지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첫째는 다른 이해당사자에게 배분하고 남은 이익이 있을 때만 이익을 배분받는 잔여청구권자가 된다. 둘째는 배당금을 정하지 않으며, 배당의 지급도 보장받지 않는 위험을 감수한다. 셋째는 회사에 제공한 주주자본을 돌려받지 않는다. 주식회사 제도에서는 자본을 제공한 주주가 이와 같은 책임을 지는 것을 전제로 주주를 회사의 주인으로 정한다. 채권자도 주주와 마찬가지로 자본을 제공하지만 배당보다 우선적으로 확정된 이자를 지급받고, 원금을 돌려받기 때문에 주인이 되지 못한다.
주주가 주인으로서 행사하는 권리가 매우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주식회사에서 주주 중심 경영이 가능한 이유는 주주가 두 가지 중요한 결정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회사의 최고 경영자를 선임하고 해임할 권리를 갖는 이사회의 이사를 선출하는 것이다. 둘째는 경영진의 임금과 보상을 주주총회에서 승인하는 것이다. 특히 경영진의 보상을 이익이나 주가에 연동시키는 경우에는, 경영진이 주가를 높이기 위한 경영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주주 중심 경영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업에서 대주주가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소액주주들이 경영진의 임금과 보상의 승인을 부결시키거나 또는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이사로 선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서 이러한 권한도 소액주주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주주없는 기업 : 노동자가 주인인 회사
국가 소유 기업을 제외하고 논의한다면, 주주가 없는 기업에서는 나머지 이해당사자인 노동자, 공급자 그리고 채권자가 기업의 주인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일 것이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기업형태로 노동자협동조합이나 종업원이 주주인 주식회사가 있다. 한편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공급자가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공급하는 원자재와 서비스 또는 토지 등의 현물이 자본으로 출자되는 경우다. 주주가 없는 회사에서 자본을 제공하는 채권자가 회사의 주인이 되는 형태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실적인 예로는 회사가 파사능ㄹ 해서 워크아웃, 즉 기업 구조조정 체제에 들어가게 되면 주주의 권리는 정지되고 채권자가 회사의 주인으로서 경영을 책임지게 된다.
노동자, 공급자, 채권자 중에서 누가 기업의 주인 역할을 할 것인가는 사회적 계약 또는 이해당사자 간의 계약에 의해서 정하는 것일 뿐이다.
기업의 주인은 주식회사 주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세 가지를 책임져야 한다.
첫째, 자본을 스스로 제공하거나 또는 제3자로부터 확보해야 한다. 둘째,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이해당사자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셋째, 회사가 이익을 내지 못한 때는 자신에게 배분될 이익을 포기해야 하며, 회사가 파산할 경우에는 자신이 제공한 출자 자본을 포기하는 유한책임을 져야 한다.
노동자협동조합이 주식회사의 대안이 될까?
노동자협동조합은 다른 종류의 협동조합과 비교해서 조직의 유기적 공동체 성격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조합원의 동질성이 높아야 한다. 소비자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참여가 주로 구매 행위에 국한되기 때문에 각자의 역량 차이가 크게 문제디지 않으며, 구매 가격도 모든 조합원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또한 특정한 조합원의 구매가 다른 조합원의 구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협동조합에서 노동자들은 각자의 역량, 맡은 역할, 그리고 기능의 차이가 크며, 그에 따른 임금과 보상이 다르다. 그리고 개개 노동자의 노동이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과 연계되어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노동자협동조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동기 이외의 조합원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조합원을 하나로 묶어내고 조합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유지할 수 있는 공동체 가치와 동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여타 협동조합과는 다른 점이다. 주식회사에서는 추가적인 자기자본이 필요할 경우 불특정 다수의 일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주식을 새로 발행해서 신규 자본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단기간에 대규모의 자기자본조달이 용이하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경우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성장의 기회가 있다고 해도 갑자기 출자금을 늘리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물론 이때 필요한 자본을 부채로 조달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자본인 출자금의 규모가 작은 경우 부채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또한 대규모 부채 자본을 사용할 경우 이자에 대한 부담이 늘고 부채 자본으로 인한 재무 위험이 커져서 안정적인 회사 운영이 위협받을 수 있다.
풍랑 효과와 욕조 효과의 함정
한국이 외국 자금 유출입을 자유화한 1990년 이후의 외국 자금 이동 행태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주식 자금이 부채 자금보다 자본 유입의 변동성이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결과는 경기가 확장되는 국면에서나 수축되는 국면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외국인 자금 유출입의 지속서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주식 자금이 부채 자금보다 보다 오랫동안 한국에 머무른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 자금은 경기 확장기와 수축기에 따라서 순유입 차이가 큰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다. 78개 국가를 대상으로 자본 이동성과 경제 성장성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대상국가나 시기에 관계없이 주식에 의한 자본 이동성 증대는 총요소생산성을 증대시키고 나아가 국민소득을 증대시키지만, 채무에 의한 자본 이동성 증대는 총요소생산성을 떨어뜨려 국민소득을 하락시킨다는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이는 주식 자금의 변동성은 시장에서 쉽게 관찰되는 반면에 부채 자금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데서 기인하는데, 이를 일종의 풍랑효과와 욕조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외국인 주식 자금 중에서 상당 부분은 시장의 변화에 단기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장기 투자자금이다. 더구나 국경을 넘은 자본 이동은 기술적으로 단 몇 초에도 가능하지만, 실제로 주식 자금을 운용하는 펀드들이 투자 대상 국가를 변경할 때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주식 자금이 부채 자금보다 단기적이라는 인식은 위기와 같은 태풍이 불면 표면에서는 거센 풍랑이 일어나서 바다가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바다 깊은 곳에서는 해류의 기저에 따라 서서히 그리고 고요하게 흐르는 심층수가 요동치는 것은 아닌 풍랑효과와 같은 이치다.
외국인 부채 자금이 주식 자금보다 안정적이라는 전도된 인식은 부채 자금이 움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기 떄문이다. 이는 욕조 밑에서 배수구로 물이 빠지고 있어도 수면은 잠잠하기 때문에 수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한참 지난 후에나 알게 되는 욕조효과와 같은 것이다.
경영권은 없다
주식회사가 주식시장에 주식을 상장하는 목적은 광범위하고 불특정한 다수의 일반 사람들에게 주식을 발행해서 자기자본을 조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식회사가 상장되면 소수의 주주들이 소유했던 주식들을 수많은 새로운 주주들에게 매각하고 소유가 분산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상장 역사가 오래되고 신주 발행으로 조달한 자본을 기반으로 상장한 회사들은 불특정 다수의 주주들이 주식을 소유하게 되어 분산된 소유 구조를 갖는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들도 대부분 주식시장에 상장을 해서 조달한 자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창업자의 후손들이라 할지라도 오너라고 불릴 만한 지분을 가진 주주가 드물다. 소유가 분산된 선진국들의 상장회사들에서는 창업자의 후손들이 경영권을 장악하거나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 그룹에서는 소유 지분과 관계없이 창업자의 후손들이 최고 경영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재벌 기업과 총수들의 불법 행위를 과거의 관행으로 여기며 관용을 베출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왕조가 아니라면 사회주의 독재 체제에서도 정치권력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며 세습되지 않는다. 재벌 총수의 황제 경영권을 보호해주고 세습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기득권 세력의 궤변일 뿐이다.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의 운명과 국가 경제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경영권은 보호받아야 할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도전과 경쟁의 대상이다.
자본주의의 대안 :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를 현실 체제로 가장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스웨덴은 복지국가를 만들었고, 독일은 노동자의 경영 참여 등 유럽식 자본주의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스웨덴은 가장 모범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한 나라다.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1932년에서 1976년까지 44년간 집권하면서 스웨덴 모델이라 불릴 정도로 선진국 중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다. 스웨덴은 사회주의 이념의 근간인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채택하기보다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에 의한 자원배분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를 수용하되 조세정책과 사회복지 정책을 통해 국가가 평등주의적인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이로써 생산의 사회화 대신에 분배와 소비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는 정책들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여 다른 나라들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공산주의는 실패로 끝났고, 일정한 성공을 거둔 중국식 사회주의는 공산당 일당 체제에서 가능했기에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에게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복지국가를 이루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고 시장 근본주의적인 영미식 자본주의와는 다른 유럽식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지금은 다른 자본주의 체제와 마찬가지의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들의 역사적 실험 결과에 비춰보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사라져가고 있으나 우리를 여전히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추동시켰던 가치와 이상을 그냥 제쳐둘 수가 없다. 그중 어떤 것은 좋은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고, 실현해야 할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지향했던 함께 잘사는 평등의 가치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시도했던 여러 제도들 중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배워오고 채택한 것들이 적지않다. 사회보장제도, 연금제도, 복지 제도 등과 같이 정부가 적극적인 평등 정책을 시행한 점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부터 배워서 발전한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한 스웨덴 모델의 사회민주주의는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시장 메커니즘 중심의 자원 배분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적 소득분배와 소비 분배를 달성할 수 있으며, 원활한 경제성장과 평등주의적 재분배 정책이 상당한 정도까지 양립 가능하고, 높은 수준의 참여 민주주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
물질적 풍요와 행복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선택한 하나의 체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최고의 가치인 자유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정의이며, 이때 자유와 정의는 분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와 분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이다.
함꼐 잘사는 공동선과 공정한 정의가 지배하는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한국 경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성장 지상주의를 벗어나서 지속 가능한 포용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성장 지상주의란 결과가 부정한 과정과 수단조차 정당화하는 성장, 결과의 분배에 대한 기준과 원칙도 없는 성장, 성장의 목적을 상실한 성장,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고 현재의 성과만을 추구하는 성장을 말한다. 반면에 지속가능한 포용적 성장이란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성장, 노동에 대한 정당한 분배가 이뤄지는 성장, 노동의 존엄성과 신성함이 보장되는 성장,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가계살림도 함께 나아지는 성장,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을 이루는 성장, 그리고 환경을 보존하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의미한다.
경쟁의 자기 소멸 모순
경쟁이 반복되면서 승자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완전경쟁이 불완전경쟁으로 퇴화하며, 궁극적으로 경쟁이 스스로 소멸되는 무순은 승자가 경쟁의 결과 중에서 가장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경쟁의 원리 자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경쟁의 근본적인 목적은 승자가 더 많이 가져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승자가 더 많이 배분받는 것은 경쟁을 유지하기 위한 유인책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 유인책 때문에 경쟁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소멸된다면 그 유인책을 교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 경쟁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쟁 결과로 얻어진 가치를 승자만이 아니라 경쟁에 참여한 패자들에게도 적절하게 분배되어 다음 단계 경쟁에서의 불공정성을 최소화하는 교정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분배의 조건을 교정하여 불공정성을 최소화함으로써 다음 단계의 경쟁에서 가능한 한 공정한 조건을 만드는 것은 단지 효율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노직이 말한 절대적 가치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시장의 경쟁에서 결정된 승패예 따른 분배를 그대로 둔다면 경쟁이 반복적으로 지속될수록 자본을 더 많이 축적한 승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는 확대된다. 하지만 패자의 자유는 갈수록 축소되고 승자의 기득권으로 인해서 자유가 구속된다. 승자의 기득권이 강화되는 불완전경쟁 구조는 모두에게 자유로운 상태가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돈이 돈을 버는 자기 복제성이 있다. 때문에 설령 승자가 승리로 획득한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경쟁 과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일지라도 자본을 더 많이 가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승자가 더 큰 경쟁력을 갖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공정한 시작
경쟁의 시작점에서 차등적인 조건을 최소화함으로써 경쟁의 공정성을 확보할 주체는 결국 정부다. 정부는 진입 장벽을 낮춰서 누구나 경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개개인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공교육과 기초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출발선에서의 불평등을 줄여햐 한다. 그리고 낮춰진 진입 장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생적으로 불리한 조건 때문에 아예 시장에 참여하기 어려운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게는 특별한 배려를 통해서 참여의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자본 부족 때문에 창업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또한 시장을 독과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기존 기업들의 기득권 떄문에 새로운 도전자가 경쟁에 뛰어들기 불가능한 상황도 자주 있다. 따라서 정부가 정책금융을 통해 연구개발과 창업을 지원하거나, 공정거래 정책을 통해 독과점이나 담합을 규제하는 것은 경쟁의 시작에서부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이다.
공정한 과정
경쟁은 출발선에서의 기존 구조를 깨고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혁신(dynamic innovation)과정이다. 출발선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뒤처져 있는 참여자는 경쟁의 과정에서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과 차별성이 있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시도를 통해서 초기의 불리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는 실패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더 큰 위험을 부담함으로써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에 도전하는 등의 방법으로 결승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경쟁의 역동적 혁신의 근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미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대기업이나 기득권 세력들이 새로운 도전을 막거나 방해하는 불공정한 경쟁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한국은 소수의 재벌그룹이 의류, 식품에서부터 전자, 자동차까지 거의 모든 제조업과 운송, 광고, 음식점, 제과점 같은 서비스업까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진출해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불공정한 경쟁이 구조화되어 있다.
정의로운 분배
민주주의를 정치제도로 선택한 것은 사회적 합의로 이룬 정치적 결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공정한 분배를 이루는 경제적 제도를선택하는 것도 스스로의 정치적 결정의 몫이다.
빈곤층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기 위해 최대의 혜택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가, 기업이 만들어낸 이익 중에서 얼마만큼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할 것이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를 얼마로 할 것이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얼마로 할 것인가 등을 정하는 것 등은 그것들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시장에 맡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진적 소득세를 얼마로 결정할 것인가, 상속세와 증여세는 얼마를 부과할 것인가, 지역 간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기초 복지를 어느 정도 확대할 것인가, 어떤 부분에서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고 어떤 부분에서 선택적 복지를 시행할 것인가, 교육과 의료와 같은 공공성이 높은 부분에서 시장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담당할 것인가 등 이 모든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도 시장이 아닌 정치가 결정할 일이다.
현실과 정의 사이
한국이 아직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던 산업화 시대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는 다수의 대중이나 노동자들의 참여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학생, 민주화 운동 세력과 야당 정치인, 그리고 일부 노동 운동가에 의해서 주도된 시민혁명 없는 민주화였다. 그랬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 시절에 다수의 대중이나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라는 식의 냉소주의가 있었다. 더구나 유신 시대에 박정희의 계획경제를 찬양하고 독재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민주화된 지금에 와서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내세우는 보수 원조를 자처하면서도 다시 박정희 향수를 갖는 이중, 삼중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그러나 40대 이하는 개발 독재가 무엇이고 유신시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 삶이 고달프니 그런 것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청년 세대는 당장 취업이 어렵다. 이러한 세대적 경험의 차이와 현실적인 상황의 차이가 정의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밥 먹여주지 않는다거나 당장 내 삶이 고달프다는 이유로 실천적인 문제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죽 써서 절대 남 안 준다
재벌 그룹들이 너도나도 하는 사업들이 있다. SI사업, 건설업, 물류운송업, 광고업, 골프장사업은 재벌 그룹의 계열사가 아니면 생존하기 어려울 정도로 춘추전국 업종이다. 이 사업들은 그룹 내부의 수요만으로도 최소한의 규모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계열사는 외부 업체에 외주를 주는 그룹 전체의 창구 역할만을 하고도 일종의 통행세를 중간 마진으로 챙겨도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다. ㄱ러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사업들은 계열사를 만들어서 일감 몰아주기로 회사를 운영한다. 모든 재벌들이 다 하는 이런 사업에는 절대 강자가 없으며, 경영능력이나 효율성이 아니라 그룹 내부의 수요가 얼마나 큰가로 회사의 경쟁력이 결정된다. 이런 와중에서 재벌 그룹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회사들은 경쟁하기 힘들고, 다만 재벌 계열사들의 재하청기업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재벌 그룹에 속하는 회사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업을 핵심 사업으로 하는 회사들이 있지만, 그 회사들도 다른 재벌들이 물량을 주지 않으니 성장에 한계가 있다. 지금과 같이 재벌 그룹들마다 내부 물량으로 물류-운송 회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시장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물류비의 낭비를 줄이기 어렵다. 재벌들마다 물류-운송 사업을 하고 있지만, 세계적인 물류 업체인 DHL이나 UPS같은 초일류 기업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평등과 불평등의 하모니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평등 원리로 작동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은 승자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불평등의 원리로 작동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평등 원리와 불평등 원리의 결합과 같은 것이다.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의 원리가 결합된 것이다. 평등과 평등의 결합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역사적인 실험인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와 결합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평등 이외에도 중요한 또 다른 가치인 자유와 평등과 함께 추구한 것이 사회민주주의였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산업화 이후에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에 진정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길게 봐서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고, 공식적으로는 1995년 사회주의 방식인 계획경제를 끝내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시행한 것은 길게는 40년, 짧게는 20년이 지났다. 따라서 한국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한 것은 지난 30년에 불과하다. 이제는 민주주의의 평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결합한 한국의 실험결과가 어떤 사회를 만들었는가를 다시 짚어보고 새로운 변혁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
민주주의가 희망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노동과 자본의 끊임없는 협력과 충돌의 역사다. 생산을 위해서 노동과 자본이 결합되고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생산으로 만들어낸 부가가치를 나누는 단계에서는 노동과 자본은 서로 많은 몫을 가져가려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자본이란 돈이 돈을 버는 세포분열적인 자기 복제성이 있다. 하지만 노동은 복제가 불가능하며 유일한 확장 수단이 생산성, 즉 역량을 늘리는 것이다. 자본은 이동성이 높지만 노동은 그렇지 못하다. 자본은 언제든지 더 나은 투자를 찾아서 국경을 넘어서 순간적으로 이동하지만, 노동은 일단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대안적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노동과 자본의 본질적인 속성의 차이로 인해서 노동과 자본의 이해가 충돌될 때는 노동이 자본보다 항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이론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Robert Dahl)은 '어떤 법체계도 재산권을 자연권으로 주장하는 것을 완전히 인정한 적이 없다' 그리고 '재산권은 단일한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권리와 특권, 의무와 책임의 묶음'이라고 했다.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고 함께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자본의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 공정성, 효율성 등의 가치를 추구하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함양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개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의로운 분배를 달성할 방법을 모색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