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Croquis

2018. 09. 13

hoyony 2018. 9. 13. 23:36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시지프 신화, 알베르 까뮈




어떤 문제가 다른 문제보다 더 절박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경우, 나의 대답은 그 질문에 따라 마땅히 실천하게 되는 행동이 바로 그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존재론적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중대한 과학적 진리를 파악하고 있던 갈릴레이는 그 진리의 주장 때문에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즉시 그 진리를 너무도 쉽게 부인해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잘한 일이다. 그것은 화형을 감수해야 할 정도의 진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와 태양 중 어느 것이 다른 것의 주위를 회전하느냐 하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요건태 그건 하찮은 문제인 것이다. 반면에 나는 많은 사람이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죽는 것을 본다. 그런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 주는 이념 혹은 환상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하건대 삶의 의미야말로 질문들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질문인 것이다. ​​​​​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몸짓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첫째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을 본능적으로라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배에는 구원이 없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다 빼앗기고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논리적으로 되기는 언제나 쉽다. 그러나 끝까지 논리적으로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간다. 그러므로 자살에 대한 성찰은 나의 관심사인 단 하나의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제공한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